• 마태복음 01:18-25/ 예수 임마누엘
  • 조회 수: 3618, 2013.11.17 17:25:32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18-25)

     

    예수, 그 이름의 비밀을 아십니까? 성 베르날로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혀에 꿀 송이처럼 달고, 예수 그 이름은 귀에 아름다운 멜로디로 울리고, 예수 그 이름은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나게 하는 이름이다." 그런가하면 우리와 이 땅에서 함께 한평생을 뇌성마비로 살아온 시인 송명희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여러분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그 이름이 내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어떻게 역사하고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작명하신 하나님


    예수!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작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모친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그가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수태를 고지(告知)받고 금새 자기 사촌인 엘리사벳에게 가서 의논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벳이 도무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임신이 되었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이 낳을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이라고 한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좇아갔습니다. 이 사실이 마리아에 의해서 고백되어졌는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졌는지, 어떤 경로로 알려졌는지는 모르지만 요셉이 이 일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침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늘 옳은 것을 숭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곤혹스럽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몹시 고민스러웠습니다. 그가 고민할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그의 고민에 대한 답을 가르쳐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어떻게 그 아이가 출생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가르쳐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니라"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집에 데려왔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한 이름이 아니라 당시에 많이 있었던 흔한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가 바로 예수입니다. 히브리말로는 '여호수아'이고 그리스말로는 '예수'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북경'이라고 쓰는 단어를 영어권 사람들은 'Peking'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면 '북경, Peking'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들은 '베이징'이라고 해야 알아듣습니다. 똑같은 단어를 이처럼 나라마다, 언어마다 다르게 읽습니다. 여호수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단어가 신약성경이 기록되면서 헬라어로 '예수'라고 표기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전에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그도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여호수아는 얼마 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구세주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십니다. 스룹바벨이 제2성전을 지을 때 귀환한 동포들에 의해서 대제사장으로 선임되어 나간 사람의 이름도 여호수아(예수아)였습니다. 그는 헐어진 성전을 다시 짓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성전의 제사를 회복한 사람이지만 그는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다릅니다.
    많은 여호수아가 있고 많은 예수가 있지만 이 예수만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신 분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왔지만 예수 그 분만 하나님께서 700년 전, 400년 전 계속해서 '내 아들을 한 아기로 이 세상 보낸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그 분이 오신다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예언되어서 이 땅에 예언의 성취로 오신 아기입니다. 많은 이름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작명하시고 작명에서 끝나지 않고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말의 뜻을 한층 더 깊이 풀어서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이라고 그 이름의 정확한 설명까지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중요한 두 가지 뜻을 붙잡아야 됩니다. 첫째로 '내가 어디에 소속된 사람인가?' 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제가 처음 외국 나들이할 때 설움이 참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돈을 정식으로 $50 밖에 안바꿔줄 때도 있었고 조금 지나니까 $100 바꿔주었습니다. 여행비 $100을 가지고 어디에 가서 씁니까? 국가가 약하니까 한 달을 여행하고 40일을 여행하더라도 그냥 $100만 환전합니다. 그래서 돈을 암달러상에게서 바꿔서 팬티에 속주머니를 만들든지, 여러 곳에 숨겨 넣어 가지고 나오던 때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외국에 같이 가서 돈을 거두면 이상한 곳에서 돈이 나옵니다.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꿈같은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가난한 나라 백성의 설움이었습니다. 그것만해도 서러운데 입국대에 서서 korea라고 하면 열외로 비켜놓고 "당신 어디서 왔소? 지금 무슨 일 해요? 숙소는 어디요? 당신의 신원을 증명할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하고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처음에 나가면 도무지 말 소리도 안들리는데, 그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면서 20분, 30분 지내고 나면 진이 빠집니다. 미국 갈 때마다 그렇게 미국 대사관에 줄서서 비자를 받곤 했습니다.
    얼마 전에 희년 선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서 병원을 개원하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서 네팔에서 온 사람들,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등 각 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날, 남의 나라에 와 있는 설움이 어떤 것인가 하는 간증을 들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잔인한 민족인가 싶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울다가 끝났습니다.
    언제 한번 브라질에 있는 우리 동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브라질 여권을 가졌습니다. 비행기에서도 같이 재밌게 이야기하다가 저와 같이 줄서서 파리 공항에 들어가는데 저는 여권을 보이니까 그냥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브라질 여권을 가진 그 사람은 세워놓고 옛날에 제가 당했던 그 고문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친구 때문에 30분을 밖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나와서 이야기하기를 자기들이 처음 브라질에 이민 갔을 때 브라질 여권 가지면 미국이나 유럽을 마음대로 다녔는데 이제는 국가가 어려우니까 이렇게 사람 값이 개값이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역전이 되었지요. 한국 경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면 내가 가진 모든 것, 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나라 사람 아닌 또 다른 시민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분의 백성입니다. 그 분 왕국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위치는 계속 바뀌어갈 것입니다. 계속 흔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이 일시에 다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한편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어깨에 모든 정사가 걸려있는 분의 나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영원한 나라, 흔들림이 없는 나라, 완전한 그 나라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 대한민국 백성으로 당하는 설움과 어려움에 손해가 있을지 몰라도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풍요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내가 확고하게 입적되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내가 그의 백성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가슴에 품습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어떤 상태에서 어떤 방법으로 그 분의 백성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냥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시작이 어디라고 말합니까? "저희 죄에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어느 때든지 사람을 불행케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쉽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잘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거짓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거짓말 같은 것은 죄로 안 여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혜롭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이것이 동양 문화의 특색인 것 같습니다. 둘로 구분합니다.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의리를 지키고 정직해야 됩니다. 그러나 내 가족이나 내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짓말 잘 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제갈 양입니다. 그래서 동양에는 거짓말이 죄라는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거짓말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벤처 기업하는 젊은 두 청년이 거짓부렁으로 만들어놓은 신화가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케 하고 있습니까? 다른 자식들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했는데 거짓문서 만들고 법을 교묘히 속여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상상해 보건대 지금 그 부모들은 원상복구 할 수 있다면 자기 머리털이라도 다 뽑고 싶을 거예요. 기가 막힐 것 아닙니까? 다시 벗어날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다 쓰고 싶어할 겁니다.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또 거짓말하라면 열심히 할거예요. 거짓은 늘 거짓말로 포장되어야 진실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부모의 잘못된, 거짓된 판단으로 인생이 멋지게 준비되어져야될 때에 찌그러진 인생으로 평생동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한번 지어버린 죄의 고통을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멕베드>를 보면 던컨 왕을 죽인 멕베드가 자기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을 보면서 외쳐대는 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구나." 한번 죄를 지어버리면 다시 돌이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들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 외에는 죄를 사하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마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우리 하나님은 필시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두 팔을 스스로 묶으시고 사랑하는 아들이 그 모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외쳐대는 그 고통의 소리를 다 들으셨습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불행케 하는 원흉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도 불행케 하는 원흉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놀라운 감격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오시고 만난 이유가 내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내 죄 때문이라는 사실, 내 잘남 때문이 아니라 내 못남 때문이라는 사실, 내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내 추잡함 때문이라는 사실, 내 영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내 비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 좋아합니다. 귀한 것 좋아합니다. 그리고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나쁜 것 싫어합니다. 추잡한 것 멀리하고 싶습니다. 실패하고 못나고 추잡하고 더럽지만, 내 자식이면 그 자식의 실패와 아픔을 10배나 100배나 당하는 부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믿습니까? 인생을 가장 불행케 하는 죄에서 구원하셔서 참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예수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그 사역이 끝나지 않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우리는 내 곁에 모시고 삽니다.
    가난, 지겹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절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가난의 고통을 안다.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생애를 살았다. 너는 아무리 못하더라도 집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날 곳이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났다. 가난, 그러면 내가 너 앞서 있다. 네 모든 가난의 행로를 내가 안다. 너와 함께 하겠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런가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의 때를 나는 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 너와 함께 있는 나는 안다."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눈물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입니다. 또 친구의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했던 제자 유다에게 노예 값도 못되는 개 값 같은 은 삼십 냥에 팔렸다. 네가 당한 그 배반의 아픔을 내가 안다. 나는 너의 임마누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 분이 임마누엘이십니다. 그 분 앞에 나 같은 것은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나올 수 없다구요?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 임마누엘이신 주님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 분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수고롭고 무거운 짐, 그 짐을 진 상태 그대로 나오라."(마 11:28)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백성 된 것도 알겠고 예수께서 죄 사해주신 은혜도 알아서 예수 그 이름을 크게 부를 수 있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그렇지만 그 구원이 지금 이 시간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명퇴 당해서 직장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증에 빠져있는 내게 임마누엘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그 분 앞에 서십시오.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내 임마누엘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만드시는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내가 당했던 손해와 내가 당했던 슬픔과 내가 당했던 멸시와 내가 당했던 좌절까지도 사용해서 그것 없이는 도무지 안될 것 같은 성공의 길로 인도하기를 기뻐하시는 나의 임마누엘이십니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내가 너의 임마누엘이라."(막 9:23)고 말합니다. 그 분은 마태복음의 마지막을 닫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말씀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 그 분은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임마누엘로 오신 그 분을 향해서 나아가는 밤입니다. 그 분을 향해서 찬송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도무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이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아마비로, 뇌성마비로 평생을 고통 당하면서도 예수가 그 속에 비밀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의 인생에 감동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 인생에 임마누엘로 능력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 임마누엘! 이 분 때문에 송명희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노래합니다. 임마누엘이신 그 분을 찬양합시다. 그 분을 붙잡고 다시 일어납시다. 그 분의 백성 된 인생은 비밀을 가져야 됩니다. 그 분 때문에 도무지 사람들이 웃을 수 없을 때 웃습니다. 왜냐면 내 속에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명은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화급할 때에 세상이 감당 못할 평화를 누립니다. 설명으로 안됩니다. 심리학자가 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그런 일 할 수 없는 인생들이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상상할 수 없는 사역을 펼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그 이름 때문에, 그 비밀 때문입니다. 예수의 비밀이 모든 성도들에게 임마누엘로 역사하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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