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01:18-25/ 그리스도의 특별한 탄생
  • 조회 수: 357, 2021.12.22 11:26:29


  •  올해 저희 교회에서는 많은 아기들이 새로 태어났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온 집안은 물론이고 교회에도 기쁨이 되었습니다. 새로 한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는 싱글벙글하면서 아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태어난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나 아이가 새로 태어났는데도 전혀 집안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식구들은 더 화를 내고 아기 엄마는 울기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원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모가 누구와 잘못된 관계를 해서 아이가 생기게 된 경우 그 아이는 전혀 환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엄마는 계속 울고 가족들은 그 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고아원이나 외국의 입양 기관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만큼 어느 나라나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결혼하지 않은 미혼모의 사생아 출생은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고 하면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찬송과 함께 그리고 땅에서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면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렇게 아름다운 탄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탄생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혼모의 출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남편과 정식 부부 생활을 하기 전에 이미 임신해 있었습니다. 요즘은 사실 
    ‘속도위반’(?)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기도 합니다. 오래 교제하다보면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혼전 성 관계를 갖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될 사람 요셉과는 아무 상관없는 임신이었고 요셉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모친 마리아는 정식 결혼이 이루어지기 전에 남편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이 집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에게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고 요셉과는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는 관계였습니다. 아마도 이 두 집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더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탄생이었습니다. 누가 아버지도 모르는 사생아를 자신의 구주로 믿겠습니까? 그러나 마태는 그의 복음서 서두부터 그리스도의 특이한 탄생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면 승부와 같은 것입니다. 마태 사도는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이 복음서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가 없이 어느 미혼모가 바람을 피워가지고 낳은 사생아냐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초자연적으로 여자의 몸을 빌려서 우리에게 온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우리가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정신이 좋아서 예수를 믿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처음 출생부터 이상했는데 결국 예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는 누구신가?

     마태 사도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유다 백성들이 그렇게도 기대하고 있던 다윗의 왕가 혈통을 열거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혈통이 포로 후기에도 어떻게 계속되었는지 추적하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가 맨 마지막에 제시하는 그 다윗의 후손은 놀랍게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아마도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에는 그렇게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 같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고향에서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한번은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려 한 것을 통해서 고향에서만 조금 알려졌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예수님에게 공격하기를 좋아하던 유대인들이 한번도 예수님에게 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과연 누구요?’하는 식으로 물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다니시면서 복음 전하실 때 ‘나는 요셉의 진짜 아들이 아니고 내 어머니는 처녀로서 나를 낳았다’는 사실을 떠들고 다니셨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걸림돌이 되어서 처음에는 감추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다시 그의 출생이 조명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고백되어진 사실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부터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도전장을 던지고 있습니다.
     18절,“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좀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단 남녀가 어느 정도 자라면 법적인 결혼을 합니다. 여기서 법적인 결혼이라는 것은 법적으로는 부부이지만 실제로는 부부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부부가 되려면 남자가 돈을 벌어와서 신부 대금을 지불하고 아내를 데려가야 정식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대개 이렇게 아내를 데려갈 때 신부집에서는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돈을 신부의 아버지에게 주고 아내를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모친 마리아의 경우에는 남편 요셉과 정혼만 하고 정식 결혼이 되기 전에 이미 임신한 것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마리아의 법적인 남편인 요셉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이 요셉에게 알려졌는지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쪽에서 처음에는 감추고 있다가 나중에 배가 불러감에 따라 도저히 이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서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상의를 했는지 아니면 소문이 나다보니까 요셉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저는 전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다윗의 족보를 보면서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 왕가의 정치적인 회복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포로 후기의 다윗의 족보를 통해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정치적으로 유능한 리더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면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제시하고 있는 사람은 진짜 다윗의 후손도 아니고 다윗의 후손과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낳은 부모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정도에서 마태의 복음서를 집어던지면서 ‘미친 수작하지 말어!’하면서 소리치지 않을 유대인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만큼 이 두 가지는 극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다의 정치적인 회복은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었고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의 탄생은 너무 혐오스럽고 구역질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 사도는 이 복음서를 읽는 청중들이 일차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 다윗의 족보를 보고 감격해서 이 복음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드디어 등장하는 사람은 다윗의 혈통도 아니고 다윗의 후손과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누구 아이인지 모르는 사람의 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결국 보여주는 것은 형편없는 싸구려인 경우와 같습니다. 왜 마태 사도는 이런 극적인 방법을 사용합니까?
     그는 결국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신앙은 제대로 된 신앙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과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는 범위 안에서 기독교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전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우리의 상식과 기대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으로 잉태된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임신은 남자와 여자가 성적인 관계를 해야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리아의 임신이 그런 성적인 관계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특별하게 임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성령의 임신은 인류의 역사가 생긴 후 유일하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으며 영원히 반복되지 않을 단 한번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잉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잉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남자의 정자처럼 되어서 여자의 난소와 결합해서 자궁에 착상해서 아주 작은 피 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며 온 세계도 그의 손바닥 안에 들어 올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크신 하나님이 아주 작은 피 덩어리가 되어서 여자의 몸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의 신성은 어떻고 그의 능력은 어떠하며 그의 불붙는 거룩하심은 어떻게 하고서 아주 작은 피 덩어리가 되어서 임신될 수 있습니까? 마리아의 처녀 탄생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천지 창조나 죽은 자의 부활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분이 여자의 몸 안에 착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진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말 성장 과정이 있고 음식도 먹고 배설도 하는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 신비가 가장 어려운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피 덩어리가 영원한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이 작은 피 덩어리로 오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됨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의 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계시다가 우리 사람들에게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천 년 전에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사생아로 태어났든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하루하루 밥 벌어먹고 살기 바쁜 우리들에게 그가 동정녀로 태어났든 아니면 이상하게 태어났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우리의 역사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다면 다른 방법으로는 안되는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이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무엇인가 어떤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2.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님의 특별한 탄생을 증거해 줄 사람은 역시 장본인들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 사도는 무엇보다 당사자인 요셉을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당사자인 마리아를 증인으로 세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자는 증인으로 세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 사도는 요셉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요셉의 증거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처음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이혼을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문제를 두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천사가 꿈에 분명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자기는 마리아와 성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는 요셉의 처음 반응입니다.
     19절,“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태 사도는 여기서 개인적인 감정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극히 사실적으로만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사자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 예, 저라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결코 참을 수 없지요. 얼마나 그가 많은 고민을 했겠습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어떻게 마리아의 임신을 알게 되었는지도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요셉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는 이혼을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여기서 왜 갑자기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이 나오게 될까요? 여기서 성경은 요셉이 거짓말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없었던 일이 있었다고 거짓말하거나 혹은 남의 아이를 가진 여자와 함께 살 정도의 사람로 부도덕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쪽에서는 자신의 성령 잉태 사실을 어느 순간에는 요셉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가족들이 마리아를 대신해서 요셉에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게도 마리아의 혼전 임신은 엄청난 충격과 불신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저의 추측으로는 마리아가 혼자서 이 사실을 감추고 있다가 도저히 더 이상 감출 수 없으니까 요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천사의 말 때문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20,21절,“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여기서 천사는 왜 요셉에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고 말하였을까요? 이것은 분명히 마리아가 직접 말을 했는지 아니면 누구를 통해서 말을 했든지 간에 자기가 임신을 했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임신한 것이니까 나를 그냥 두지 말고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요셉이 이것을 두고 정말 데려와야 하나 아니면 마리아를 버려야 하느냐 하는 것을 두고 고민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자신이 마리의 성령 잉태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그것 자체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릅니다. ‘성령 잉태가 도대체 뭐야. 이거 잘못하다가 나까지 죽는 것 아냐.’ 그런데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마리아의 혼전 임신이나 성령 잉태 자체를 대단히 부정하고 불경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 사도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가 대단히 불경스럽고 유쾌하지 못하며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경건한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인데 그에게도 마리아의 임신 소식이 큰 시험거리였고 특히 그가 성령 잉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대단히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제까지만 해도 아끼고 사랑했던 어떤 자매가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부터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자기가 ‘하나님을 배었다’고 말은 한다면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쾌하고 두려운 일이 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경건하려고 애쓰거나 혹은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요셉이 겪었던 것 같은 그런 심한 거부 반응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 쪽의 설명을 듣고서도 성령의 임신으로 믿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마리아가 죄에 빠졌으며 이것을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리까지 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이상 마리아의 남편이 되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그가 마리아를 의심해서는 안되며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보호하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아주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오심은 돌발적인 것이며 과격하며 정상적인 경건을 가진 사람도 놀라서 도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식으로 세상에 오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들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는 평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지금 유대 백성들은 로마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재산을 지켜줄 수 있는 구원자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는 정치적인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도대체 구원이 무엇입니까? 어떤 위기에서 건져주는 것이 구원이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불타는 건물에 갇혀 있는데 꺼내어 주는 것도 구원이고 침몰하는 배에 있는 사람을 건져주는 것도 죄입니다.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는 자를 치료해주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런데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 모든 인간이 죄의 세력에 빠져 있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 안에는 죄의 세력이 있어서 우리는 죽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죽어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몰론 이 세상에 좋은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이미 이 세상에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이 세상의 학벌이나 지식이나 건강이나 부나 재산 외의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마음이요 선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무서운 죄의 세력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로잡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의 세력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여기서 자기 백성은 육신적인 이스라엘 사람들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은 건지시려고 하시겠지만 끝까지 그를 거부하고 죄의 세력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마태 사도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오해를 고쳐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내 백성이 ‘혈통상의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온 가족들을 보시면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며 내 자매냐고 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며 형제며 자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내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도 단순히 혈통상의 유대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마태 사도는 마리아의 성령 잉태 사실을 요셉의 증언을 통하여 분명히 한 후 이제는 성경의 증거를 들이댑니다.
     22,23절,“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러면 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이 당장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 잉태라구? 도대체 그런 것이 성경에 어디있어?’라고 의문을 표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 이사야 선지의 글에는 장차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 7: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서는 좀 논란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배경이 되는 것이 유다의 아하스 왕 때였습니다. 아하스 왕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 베가와 수리아 왕 르신이 연합하여 침공하는 바람에 나라가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새로 왕이 된 아하스에게 이사야를 보내어서 절대로 이스라엘과 수리아의 공격으로 망하지 않을테니까 징조를 하나 구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신앙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앗수르에 도움을 청할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직접 한 징조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텐데 그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말하기 전에 이스라엘과 수리아 두 나라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이 처녀가 누구일까요? 아마도 처녀는 아니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젊은 여자였을 것입니다. 아하스의 왕비 중 아이를 낳지 못하던 한 여자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사야의 젊은 부인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단어에 이 ‘처녀’는 젊은 부인의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진정한 성취는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습니다. 그래서 논란이 되는 것은 성경이 이런 식으로 이중적인 예언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성경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예표요 성전을 짓는 다윗의 아들도 한편으로는 솔로몬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입니다. 
     한때 두 나라의 공격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또 새로운 아기의 탄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며 어떤 위기나 어려움에서도 능히 건져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한 여자의 특별한 임신과 출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눈앞에 있는 위험이나 위기가 아무리 크더라도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천 년 전에 유대 땅에 계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그 분은 그때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그가 사신 이상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든 죄의 용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놀라운 신성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성령으로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마음속에 지금도 쏟아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임마누엘입니다. 그 당시 육신으로 임마누엘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 몸 안에 임마누엘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찾아서 능히 나가게 하십니다. 

     4. 요셉의 순종.

     마태 사도는 요셉이 천사의 말을 듣고 어떻게 하였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24,25절,“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역시 주님의 백성은 언제까지나 생각하기만 하고 이치를 따지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난 후 누워 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당장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아직 자기에게 성령의 잉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이 다 이해되고 난 후에 마리아를 데려오든지 말든지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아무 것도 제대로 이해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조용한 나의 가정에 침범하셔서 모든 미래의 행복을 빼앗아 가시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 다른 집을 사용하시지 않고 하필 우리 집이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마리아를 데리고 왔고 또 마리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여자의 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인정하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은 내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시고 내 방식대로 일하셔야 하신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고 하는데 길이 막힐 때 나보다 더 높은 수준의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무시당할 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왜 이 여자를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는지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빼앗아 가시느냐고 대어들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기 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의를 인정했고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의 하나님의 복을 믿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내일 모레 결혼을 앞두고 있는 신혼을 꿈꾸는 젊은 두 연인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드레스는 어떤 것을 입고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는 등의 신혼의 단 꿈에 젖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의 인생 길을 험악하게 바꾸실 때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신혼의 꿈에 젖어 있다 하더라도 죄가 해결되지 않은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신혼 부부가 단꿈에 젖어서 어느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배가 침몰하려고 한다고 합시다. 어떤 구조 요원이 그 부부의 방에 뛰어 들었다고 해서 불평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혼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사용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 이상의 신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요셉에게는 다른 하나님의 아기를 배고 있는 마리아를 데리고 먼 베들레헴으로 도망치는 그 여행이야말로 가장 신나는 길이었으며 또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치는 것이 그들의 신혼을 가장 멋지게 보내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뛰어 드셔서 나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드실 때 기뻐하십시다. 사실 그것 보다 더 신나고 멋진 계획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쁨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들도 지금 주저앉아서 주판만 튀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포기할 수 있는 약간의 정욕과 욕심이 있으면 기꺼이 포기합시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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