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의 관점(눅 1:46-55)
  • 조회 수: 728, 2013.08.22 22:05:12
  • 인류 역사상 추앙 받는 여인을 손꼽아보면 마리아가 단연 으뜸일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성모라고 말합니다. 분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거의 신의 어머니처럼 받들고 숭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마리아는 그저 평범한 여염집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저는 오늘 이 부분부터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번 주 토요일이면 성탄절이 됩니다만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현장에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참 딱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수가 호적등록을 명령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장 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자세히 보십시오.  성경은 로마의 황제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 천하"  한 마디로 로마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그의 명령에 온 천하가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온 세계가 완전히 로마판 이었습니다.  

    구레뇨가 로마의 명령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호적등록을 하게 됨에 따라 백성들이 대이동을 하게 됩니다.  온 세계를 체계적으로 영원히 통치하려는 로마의 의도아래 유대민족 또한 예외 없이 민족이 대이동을 하게 되는데 얼마나 혼잡했던지 임산부가 거할 방 한 칸 얻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개인의 상황이 무시된 혼잡한 그 인파 속에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한 여인의 뱃속에 계셨습니다.  한 시대를 신같이 호령하는 로마 황제의 그 엄청난 권세 앞에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방 한 칸 없어 퀴퀴한 말 분뇨 냄새가 나는 마굿간의 구유 안에 세상의 첫 시간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초라했습니다.  그렇게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렇게 비천했습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의 몸을 통하여 비천한 계집종의 몸을 통하여 비천한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은 누워 계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이 말씀이 참 특별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무슨 표적입니까?  출산할 장소 찾지 못한 촌부의 불쌍한 처지가 무슨 표적입니까?   황제의 후손도 아니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의 아들도 아니요, 위대한 랍비의 자녀라면 이해가 갈법 한데 그 시골의 한 마을에 것도 마구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첨하고 냄새가 나는 곳, 보잘것없는 여인의 몸에서 잉태된 이 사건, 정황적으로 하잘 것 없는 이 일이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성육신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의 출생이었음을 선포합니다.  지금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그가 가장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실권자이며 가장 두려운 존재여서 오늘도 야단법석 온 유대가 들끓고 있고 비록 예수님의 탄생은 기억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정도 비중이지만 그러나 그 곳에 출생하신 주님은 로마의 황제도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만왕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이 그치고 이제는 로마가 주는 평화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선전이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평화의 왕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령은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외적은 전쟁은 그쳤는지 몰라도 역사의 밤은 더욱 깊어만 가는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무력으로 눌러서 소리를 내고 있지 못하는 것뿐이었지 많은 백성들은 고통스러운 외침을 영혼 가득 품고 있었습니다.  

    참 평화의 왕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닙니다.  참 평화는 로마 황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평화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 평화를 이 땅에 가져올 왕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닙니다.  값진 보석과 값비싼 향유 내음이 가득한 고귀한 장소가 아닌 너무나 일상적이고 너무나 보잘것없는 자리가 바로 평화의 왕이 오시는 자리입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모습입니다.  

    마리아 찬양의 첫머리가 무엇입니까?  "(눅 1: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예수님은 나심부터가 달랐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마구간을 가장 신성한 자리,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 왕중의 왕의 탄생의 자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비천한 한 여인을 어떤 여인으로 변화시켰습니까?  만세에 복이 있다 일컬어질 여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비천함조차도 존귀로 바꾸어놓는 역사임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어디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까?  어디에 위대함이 있습니까?  어디서 우리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부자들의 몸에 걸친 비단자락에 있습니까?  아니면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 있습니까?  아니면 남들이 모두 그 앞에 절하는 권력의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존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있습니까?  잘 알려진 유명인사에게 있습니까?  

    누가복음은 대답합니다.  '아니다'  '소박하고 비천한 마음에 있다'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보잘것없이 보이는 그곳을 신성한 곳으로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을 가장 존귀한 이름으로 바꾸어 놓는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천들의 노래는 로마 황실에,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 들린 것이 아닙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과 양이 있는 들녘에 나타났습니다.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러분에게 이 천군과 천사의 노래 소리가 들리길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51절 53절까지를 보십시오,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오늘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마리아는 그의 찬양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함에 있습니다.  마음이 높은데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부요함이 문제가 마음 높은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 높으면 참된 생명력이 그 안에 없습니다.  마음 높은 사람의 속에 말구유에 오신 주님은 거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음 낮은 어부들을 제자 삼으셨습니다.  교만하고 마음 높고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일에 집착해 있는 사울의 삶을 다메섹에서 꺽으시고야 그를 제자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그랬고 예수님의 이 땅의 삶의 마지막도 그러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끌고 처형장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또 한 사람을 꼭 기억하게 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6절의 이 사실을 두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되어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남아 있게 된 것은 그가 귀한 신분의 권세 있는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시골뜨기였기 때문입니다. 방금 시골에서 올라와서 그런 모욕적인 일을 시켜도 크게 시비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관점 마리아의 찬미에 나타난 관점으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삽니까?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마리아에게 수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지금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건은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마리아의 삶에 어떤 회오리가  몰아칠지 모릅니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받아들인다해도 그녀의 주변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불 보듯 훤한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그녀의 약혼자 요셉부터가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행운의 여인입니다. "마태복음 1장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변에 일어날 상황이 감당키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떻게 마리아는 이 사실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는 그녀는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사의 음성이라 할지라도 그 음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임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천사의 음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친척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이었습니다.

    천사가 들려줍니다. "(눅 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러자 비로소 대답합니다. "(눅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여러분 여기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의 계집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해서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하면 여러분 같으면 그럼 그렇게 해 주십시오. 대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대로 대대로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것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계집종이라는 말은 여자 노예를 두고 하는 말 둘레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지게 될 경우 자신에게 미칠 온갖 비난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낮은 자의 마음이 이 두 단에 "주의 계집종"이라는 표현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낮아지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엎드림이 필요합니다.  엎드림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눅 1: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오늘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이 생각이 그들의 곤고함, 가련함, 가난함,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것이 보여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을 것이고 따라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그 능력을 받아들일만한 실력을 갖추는 것인데 이 실력은 권세나 지위의 높음에 있지 않고 낮은 마음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낮은 마음의 축복을 주시길 바랍니다.  불행의 근원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별 수 없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싸운적 있습니다. 다툼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높은 마음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본성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낮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분명합니다. "(눅 1: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54절, 55절을 읽어보겠습니다."(눅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여기에 귀한 마리아의 관점이 있습니다. 약속의 실현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눈입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침묵으로 일관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었던 이유는  나라가 부패하고 우상 숭배가 만연할지라도 이 죄악을 지적하고 꾸짖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이 아픈 것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행하여 입을 다무신 지가 400년이나 되었습니다.

    400년이면 엄청난 세월입니다. 13대이상이 지나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접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즉각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여인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소망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이 역사를 그 역사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기다림이라고 하는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아십니까?  기다림이 왜 중요합니까?  이 기다림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인내심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인격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이 기다림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 기다릴 줄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실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자꾸 인간이 앞서고 인간의 의지가 나타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과소평가 하는데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자꾸 나서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21세기가 열린답니다.  세월만 변한다고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낮은 마음을 품은 자에게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다리는 자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오늘 주님은 크리스마스 이 계절에 낮은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마리아가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가장 복된 한 사람이 되었듯이 여러분 모두가 1999번째 크리스마스의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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