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위해 오셨다(요한1서 4:7-11)
  • 조회 수: 84, 2013.11.01 20:44:31
  • 기쁜 성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1983년을 보내는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뜻깊은 날입니다. 사람이 말로나 글로 표현된 가장 비극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우리를 약하게 합니다. 사람의 근본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그와 동행하며 그의 뜻에 순종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을 승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 있는 사람은 물질이나 기회의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로 살며 그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것을 해결하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여기서 용서의 개념을 말씀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용서하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이고 새롭게 다시금 생기를 주는 화평과 사랑 그리고 용서를 주고받을 때 마음 속에 기쁨과 만족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식과 원한이 주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지옥의 한복판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진리로 자유케 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도록 가르침을 받은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피해를 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죄지은 사람은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노를 묻어 버리고 상처를 입었다면 나는 용서하거나 저주할 수 있습니다. 선택권이 내게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유익을 가져올 수 있는 편은 분노와 복수의 심정을 마음 속에 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서 사랑의 정신으로 용서하는 편을 택할 때 우리의 인격이 평화의 천사처럼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받는 자와 주는 자 모두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우리의 인격을 깎아 버린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의 인격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날, 그리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뜻 깊은 날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생각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자녀인 우리가 영광을 되찾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옷을 입고 사는 동안 하나님께 기쁜 영광의 꽃을 바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가장 무서운 죄는 나 자신으로 하여금 “나는 가치 없는 존재다.”라고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점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거부하며 믿음 없이 살아가며 계속 죄를 범해 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둘째로 구원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의 사함을 받고 나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과 형제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예롭게 봉사하기 위하여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우리의 아집을 지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헐뜯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자신에 대해서 만족할 수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에게 이중(二重)의 축복을 줍니다. 먼저는 나 자신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고 다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축복을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주시는 축복을 누리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을 나눠 줄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용서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십니까? 은혜를 통해서 하십니다. 은혜란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행위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 편에서는 무가치해 보이지만 하나님편에서는 우리가 요긴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시고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 위에 오신 날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화롭게 하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귀한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형태를 취하셔서 우리 지구를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죄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죄인시하는 일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지 않으므로 역사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자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거룩한 용서를 베푸시고, 우리의 의롭게 됨을 보장하시고 가치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자마자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을 섬길 수 있게 됨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랑을 전해 주어야 마땅하며 또 성령을 힘입어 우리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7-9)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19-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성육신을 통해 인류의 영광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영혼이 얼마나 값진가를 확증하셨습니다. 더구나 부활을 통해 그의 영광스러운 사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의 어느 오래된 동네 교회 뜰에 두 손을 활짝 펴고 서 계시는 예수님의 대리석 상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그 동네 가까이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예수님의 대리석상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적군은 물러갔습니다. 멀리 피난 갔던 동네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찾은 것은 교회 뜰에 세워져 있던 예수님의 대리석상이었습니다. 폭격에 산산조각이 난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예수님의 대리석상 조각들을 찾아 모아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다시 붙여 만든 상처투성이의 대리석상은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그것이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이 대리석상은 동네 사람들의 삶의 일부였고 그들은 몹시도 아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흩어진 조각을 다 주워 모은다고 했지만 대리석상의 양손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상처투성이의 손이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손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새로 그리스도의 상을 조각해 세우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도 동감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한 청년이 제안을 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의견에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이 대리석상 받침대에 이렇게 글을 써 붙이면 어떻겠습니까? 가령 ‘나에겐 손이 없지만 여러분에게는 손이 있습니다’라고요.” 이 젊은이의 제안이 기꺼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여러 해 후 어떤 사람이 놋쇠판 비문을 보았는데 이런 짧은 글이 덧붙여 있었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손이 없으나
      오늘 내 일을 할 너희의 손이 있다
      나에게는 발이 없으나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너희의 발이 있다
      나에겐 입이 없으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 줄 수 있는 
      너희의 입이 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없으나
      사람들을 하나님 편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너희의 도움이 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내용의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믿고 영접하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은 크게 축복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님에게 속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는 일에 참여하는 긍지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용서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탕감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하고 영화롭게 하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의 죄를 없애주실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새로운 자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범한 죄를 용서해 주실 뿐더러 새로운 꿈으로 바꿔 주시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해서 우리 자신을 알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고, 우리의 꿈을 이루어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우리는 주 안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육신적인 면, 보이는 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죽었던 심령이 살아나고, 희망 없던 심령에 소망이 생기며, 맥없이 약하던 심령이 생기를 얻으며, 미워하던 심령이 사랑하게 되며, 좁던 마음이 넓어지며, 용서할 수 없던 심령이 용서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의 역사요, 변화입니다. 주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죄로 인한 공포심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하는 위축된 태도로부터 해방을 받아 적극적으로 힘차게 높은 꿈을 가지고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이 죄로부터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향해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는 거룩한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죄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하므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만을 하게 하는 것은 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죄를 범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가 범한 죄 때문에 돼지  우리 방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나처럼 살지 않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에 일어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가 계신 곳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 뛰어나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좋아하셨습니다. 이때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으시고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지은 죄를 용서받을 때 죄의식에서 벗어날뿐더러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고 사회를 위해서 일하실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나를 필요로 하시며 나를 쓰시기 원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들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생각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더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놀라운 생각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뜻 깊은 성탄절에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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