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요20:24-29)
  • 조회 수: 223, 2013.06.22 21:40:31
  •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성도여러분들의 삶속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이란 학설이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요,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성경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철학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 문제가 복잡해 졌습니다. 사건일수록 단순합니다. 불이 났습니다. 불이 어디에 났고 어떻게 났는가의 설명은 필요할지 몰라도 불의 원리와 불의 유용성과 불의 나쁜 점등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항상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건을 기록해 놓았으면 그 사건을 기록해 놓은 대로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가서 목격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확인을 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고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좀 배웠다고 해서 부활의 사건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다보니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정말 부활이 가능한 일인가? 부활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실재적 사건입니다. 설명하고 안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보면 "안식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 미명에 가서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고, 곧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것을 재차 확인했기에 무덤이 비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녁때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고,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볼 때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추궁할까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다락방에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것이"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입니다. 불안한 그들에게 먼저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함을 아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숨결인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은 이들이 지금 성령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없으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두렵습니까? 불안한 모습으로 사십니까? 성령을 받으세요. 예수님이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을 받으면 평강이 찾아옵니다. 화평해 집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담력이 생깁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오늘 본문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 여기서 "디두모"라는 것은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도마는 쌍둥이였다는 것인데 누구와 쌍둥이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락방을 찾아왔을 때 도마가 없었습니다. 어디에 갔는지, 왜 하필이면 혼자 자리를 비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재수 없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3년 동안 같은 스승인 예수님 밑에서 한솥밥을 먹었으면 믿을 만도 한 대 열 명의 제자들이"우리가 주님을 보았노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도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면 내 손가락으로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는 도마의 불신앙의 모습은 주님의 말씀과 함께 동료들의 말도 믿지 않는 나쁜 모습입니다. 내가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이 보았으면 그대로 믿는 것이 아름다운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반드시 내가 보아야 한다고 우겨되는 사람들은 답답합니다. 매가 만나지 못해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부모님이 믿고 형제가 믿고 친구가 믿고 아내가 믿으면 그대로 믿으십시오. 믿으면 복이 됩니다. 헬렐루야!   
        예수님이 죽으신 후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까?  내가 예수님이라면 도마를 보면서 '이 답답한 친구 봤나 그렇게 동료들을 못 믿으면 어떻게 같이 다니고 같이 일하겠는가'라고 꾸중을 할만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자상하게 8일이 지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오셔서 도마 앞에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28절을 읽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
        예수님은 도마의 약점을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도마를 꾸중하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예수님께서 방문을 닫고 있었는데도 들어오셔서 도마에게 상처난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인을 광채나는 얼굴이나 광채 나는 흰옷이나 그분의 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마도 부활의 주님을 확인하는데 상처난 곳을 원했고 예수님도 자신의 고난의 흔적과 아픔의 흔적인 상처난 곳을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도마가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확인해 보았습니까? 손을 직접 옆구리 창자국에 넣어보았습니까? 도마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이 말씀이 원문에 보면 감탄사로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감격스러웠습니다. 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흔적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계시지 않고 바로 이 도마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의 예수님입니다. 다시 사신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사시지 못했다면 지금 고난의 흔적을 가진 모습으로 도마 자기 앞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도마는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럴수가. . . 이 보다 더 분명한 부활의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당했던 고난의 흔적, 고통의 흔적, 고통의 상처를 보여 줄 수만 있어야 합니다.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잘 믿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고 할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고난의 흔적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화여대 교수로 오랫동안 봉직하셨던 이어령 교수님을 잘 압니다. 이 교수님은 예수도 석가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서울 주님의 교회에서 신앙강좌를 개설하면서 "교회 밖에서 본 교회"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만약 종교를 갖는다고 하면 기독교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석가는 살이 너무 쪄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도마가 예수 부활의 증거로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도 부활의 증거로 도마에게 보여준 것이 아픔의 상처였는데 한국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증거인 고난 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 난 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당한 희생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집단화된 이기심, 거대한 야망, 그리고 세속화된 성공주의와 출세주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령 교수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보여 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 주십시오. 나는 그 교회 교인 되기를 고려해 보겠습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석자를 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우리 자신을 증거 하려고 했지 결단코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고난의 흔적을 갖는 일에는 애써 외면했던 우리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고난의 흔적 아픔의 상처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고통, 지역사회 백성들의 아픔을 나누며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고통을 안고 울부짖으며 자신을 찢고 옷을 찢는 고난당한 흔적을 우리 교회가 갖고 있습니까? 이런 흔적이 없다면 세상은 우리를 향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거가 어디 있느냐? 있으면 보여달라'고 계속 외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분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우리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면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중앙통 같은 곳에 가서는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갈릴리 호수가로 다녔습니다. 광야에 다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은 벌벌 떨며 문을 잠그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신앙을 가지면 늘 불안하고 두렵고 초조합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걸어 잠가야 합니다. 잠가두어도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으면 문을 잠글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집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닫혀진 입술과 답혀진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 두려움이 없애고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된 입술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을 닫아두지 말고 활짝 열어 누구든지 사귀고 용납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가두어 두어도 갇히지 않고 오히려 나가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수가 다시 살아 나셨다"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예수 믿는 것이 더 불쌍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15:17-19 절에"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
        부활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는 성도들과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것입니까?  고난의 흔적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고난의 흔적을 보자마자 손을 자국에 넣어 확인해 보지 않고 곧바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감탄하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에 대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고전15:42-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증언을 가질 수 있고 부활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허물어지는 것이 무조건 안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너져야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것이 죽을 때 죽지 않을 것으로 새롭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믿는 자 보다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보고도 안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보았을 때는 믿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 아는대로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베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육신도 아파 고통 중에 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는 잘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처가 심하여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을 정도로 흉칙한 병으로 고생하면서 밥을 주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었기에 천국 갔습니다. 그때 부자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세상에는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살려서 세상에 보내서 나 있는 곳이 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세상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많이 있다. 그들의 말을 안믿는 사람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가도 안믿는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습니까? 눈으로 보고 믿으려고 하지 말고 보지 말고 믿으십시오.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더 살피고 말씀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도마가 '나는 내 손으로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도마 앞에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했을 때 도마가 손을 넣어 보았습니까? 도마는 손을 넣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 듣고는 도마가 하는 고백이 "오!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하는 것을 듣지도 못했는데도 도마 자신이 한 말을 다 알고 계시면서 자신이 요구한 상처 난 자국을 보여 주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오, 성자 하나님이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다만 우리가 우리 곁에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도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고 내가 만나지 못했다고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고 못 믿겠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은 위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139:1절에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여기서 '감찰한다'는 동사는 탄광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서, 채광작업을 할 때 행하는 정밀한  작업을 말합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광산 속에 무엇이 정확하게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갱도 속에 들어가 정밀 조사를 하는 자는 그 깊은 곳까지 낱낱이 살피시고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다윗은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아신다'는 단어는 '동거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디를 가든 자기와 함께 동거하시며 자기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39편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직도 불활실한 믿음으로 갖고 계시는 분 계십니까? 오늘 처음 교회에 출석하신 분 계십니까?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곁에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꾸만 확인하려고 하는 믿음을 가진 분 계십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젠가는 죽고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도마처럼 이것을 알고 믿고 확인하고 믿으려하지 말고 보지 않고 믿는 복 있는 자가 되십시오. 금년 부활절이 여러분의 신앙도 함께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admin 223 2013.06.22
146 admin 225 2013.02.08
145 admin 226 2013.03.31
144 admin 226 2013.07.10
143 admin 227 2013.06.2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