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를 태신자로…(골 1:21-23)
  • 조회 수: 18, 2013.07.25 06:48:02
  •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본문을 먼저 관찰해 봅시다. 본문 관찰의 첫 질문은 문체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무슨 문체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네 가지 답 가운데 하나를 골라보십시오. ① 설화체 ② 강화체 ③ 시가체 ④ 묵시(예언)체 가운데 무엇일까요? 

    용어 설명도 없이 느닷없이 답을 요구하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분은 평소에 성경공부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신 분은 이 정도는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는 뭐 성경공부 하기 싫어서 성경대학에 참석하지 않습니까? 형편이 안되니까 참석을 못할 뿐이지요…" 예, 형편상 수요 성경공부에 참석하기가 불가능한 분들을 위해서 올해부터는 주일 오후에 성경대학 과목이 신설된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함께 모여서 성경공부할 시간이 정 안 되는 분은 요즈음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까 책을 사서 독학이라도 하십시오. 아이 둘 데리고 집안 살림하다 보면 성경 통독할 시간도 없는데 언제 책 읽고 공부할 시간이 있느냐구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나이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분들은 나이 들면 "이 나이에 무슨 성경 공부를 새삼스럽게 하겠어요?"라고 반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말씀드리면 성경공부는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욕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기어히 하고 마는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끝까지 졸라댑니다. 나이가 많아지고, 바쁘고, 피곤해도 하고 싶은 욕망이 있으면 어찌하든지 하고 맙니다. 꼭 해야 될 일은 바쁘다고 미루는 사람도, 자기 하고 싶은 일은 하고 말거든요. 

    아이 키우는 젊은 엄마 여러분, 아이 둘이 어쩌다가 잘 놀면 그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둘 다 낮잠이라도 자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맘먹고 귀납법적 성경공부를 시작해 보십시오. 좋은 책 한 권 소개하겠습니다. 한국 기독학생회 출판부에서 나온 [성경연구 핸드북]이라는 책입니다. 우선 책을 구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연세가 들어도 성경 공부는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경 공부가 가능합니다. 세상 돌아가는데 대한 관심이 있으면 신문을 펼칩니다. 천국 들어가는데 대한 관심이 있으면 성경을 펼쳐 보십시오. 그래도 아직 천국 가기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남아 있지 않습니까? 몇 분 남은 기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에서도 시계를 쳐다보면서 신문을 읽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직 몇 년이 더 남았는지 모르는데 성경 연구를 포기하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 같은 인생을 끔찍이 사랑하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면 나이 탓, 아이 탓하고 뒷전에 앉아 있을 수만 없습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첫 질문이니까 제가 양자 택일하도록 좀 쉽게 묻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내용이 설화체입니까? 아니면 강화체입니까? 설화체는 사건의 전개가 있는 이야기식 글을 뜻합니다. 강화체는 저자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진술하는 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강화체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강화체의 글이 신약 서신 서들입니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임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주일마다 한 번씩은 말했지 싶습니다. 

    그러면 본문 관찰을 위한 두 번 째 단계로 나가 봅시다. 본문의 문맥 글의 앞뒤를 살펴보십시오. 새해 들어 살피고 있는 골로새서 1장의 큰 줄거리를 잡아 보십시오.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글이므로 맨 먼저 문안 인사가 나온 것은 당연합니다. 이어서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품은 감사의 내용을 밝히고 나서 그들을 위한 간구를 드리고 또한 찬양으로 나아갔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감사의 기도는 주님을 찬송하는 데로 진전했던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요? 기도하다 보면 찬송이 터져 나오고 찬송하다 보면 큰소리로 기도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기도와 찬송이 있고 나서 오늘 본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부터 시작해서 2장 5절까지는 간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찬양과 사도적 사역에 대한 바울 사도의 고백 사이에 있는 부분입니다. 

    자, 이제 문맥을 살피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 관찰의 세 번 째 단계인 본문 구조를 살필 차례입니다. 3절로 구성된 짧은 문단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논리적 단락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락별로 본문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문단이 짧다고 더 쉬운 것도 아닙니다. 한 번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어떤 본문은 쉽지만 어떤 본문은 시간을 요합니다. 

    또 본문의 내용을 파악해야 구조를 알 수 있고 구조를 파악해야 본문 내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우선 좀 더 심도 있는 본문 파악을 위해서 특징적인 표현이나 강조 점을 찾아봅시다. 이 단계에서 저는 즐겨 여러 가지 번역 성경이나 원어 성경을 참조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도 헬라어 공부를 하시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영어나 일어를 읽을 수 있으면 읽어보십시오. 아주 유익한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모두가 외국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모르면 어떻습니까? 한글만 읽어도 그게 어딥니까? 세상에는 자기 글이 없는 사람도 많고 있어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도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만해도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비율이 더 높습니다. 요즈음에는 한글로 된 성경도 여러 가지 번역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대조해서 읽어보시면 본문의 내용 파악이나 구조 관찰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혹시 한글을 못 읽으시는 분은 경로대학의 한글학교를 이용하셔서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여러분의 수준을 너무 높게 잡는다고 실망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목사님은 아직도 우리를 몰라! 우리를 제대로 알기에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하셨어"라고 낙담되지는 않습니까? 너무 실망하거나 낙심하시지 마십시오. 저도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주일마다 연속적으로 골로새서 본문으로 설교해도 개역 성경 본문조차 미리 읽어 오지 않는 분이 있다는, 아니 많이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부가 있습니다. 3년 6개월이 다 되도록 여러분을 바라보고 목회를 하는 것은 이런 소망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지금 그 수준으로 천국 보내질 않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성경에 능한 아볼로를 가르친 평신도 브리스길라-아굴라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 설익은 신학생 정도보다는 울산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기대를 합니다. 

    지금이라도 본문을 유심히 관찰해 보십시오. 비슷한말이나 반복되는 말은 없습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이라는 구절이 눈에 뜁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면"이란 구절도 발견할 수 있지요. 23절에는 "복음"이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웬만한 관찰자라면 비슷한 말 뿐만아니라 눈에 확 들어오는 대조적인 말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라는 말과 "이제는"이라는 말입니다. "원수됨"과 "화목"도 반대 개념의 말입니다. "멀리 떠난 상태"와 "앞에 세우는 것"도 그러합니다. "악한 행실"과 대조적인 모습이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삶입니다. 

    또 본문 관찰은 앞 뒤 문단과 비교해서 할 수 있습니다. 앞에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모든 이야기가 향하고 있습니다. 찬송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찬양 받으실 그 분에게만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15절에서 20절까지는 "우리" "너희"라는 말이 나온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21절은 시작하자마자 "전에 악한 행실로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어순에는 21절 맨 뒤에 등장하는 "너희를"하는 말이 헬라어나 영어 성경에는 맨 먼저 등장합니다. 23절에는 "나 바울은…"이란 말들을 볼 때에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너희가" 강조되어서 새로운 문단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새 문단에서는 바로 앞 문단 찬송 속에 노래한 보편적 진리를 독자인 "너희를" 향해서 설명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문맥의 흐름상 우리가 읽은 새 문단은 본격적인 설교의 시작입니다. 그의 편지 속에 스며 있는 목회적 관심이 다시 부각됩니다. 15-20절의 찬양으로 단절된 목회자로서의 관심이 골로새 성도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물에 미치는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을 골로새 성도들의 삶의 구체적 현장에 접목시킵니다. 

    설교란 무엇입니까? 앞에 앉아 있는 청중에게 적용된 진리가 설교입니다. 화목 사역의 우주적 성격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설교가 아닙니다. 화목사역이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명에다가 구체적인 청중의 삶을 접목시켜야 합니다. 짧게 표현하면 설명 + 적용이 설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적용이 시작되어야 설교가 시작된다고 까지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흐름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해서 늦게 와도 다 같은 지각일 수 없습니다. 첫 영광송 부를 때 나타나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모두 일어서서 찬송을 부르는데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아예 대표기도 끝나고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들어오시는 분도 있으니까요. 신통한 것은 항상 늦게 오는 분은 매주 정확하게 늦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들어와도 예배 진행 순서상 다음은 무엇이라는 감은 잡아야 합니다. 

    본문의 흐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표기도에 해당하는 바울의 기도가 9-14절, 회중 찬송이 15-20절에 있었습니다. 이제 응당 설교가 시작되어야 할 차례가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은 기도와 찬송에 이어서 위대한 화목의 진리를 골로새 성도들에게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이 부분은 본격적인 설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설교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는지를 관찰해 보십시오. 

    이 설교를 잘 살펴보면 찬송 문단에서 나타난 세 가지 진리를 취해서 골로새 독자들에게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20절에는 "만물 곧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을 화목케" 했다는 명제는 21, 22절에서는 "너희를 화목케 하사"라고 적용시킵니다. 다음으로 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만물의 화목이 이뤄진 것을 말하고 22절은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화목케 하셨다고 그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아무리 온천지가 화목케 되었다고 말을 해 보았자 앉아 있는 사람들과 관계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와 "이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끝으로 찬송 전반부에서 거듭 강조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만유를 포함한다는 진리는 복음이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다는 표현으로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만물을 포함하기에 천하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은 전파되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화목의 목적을 밝히는 22절 하반 절은 10절의 기도를 기억나게 합니다. 23절에 나오는 "믿음" "소망" "들은 바 복음"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복음"이란 주제들은 3절에서 7절의 감사 문단에 등장했던 것들입니다. 다시금 동일한 주제를 사용해서 이 문단을 마감하며 믿음에 계속 설 것을 요구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관찰을 마무리짓고 문단 주제와 구조를 설정해 봅시다. 문단 전체 주제는 앞 찬송 문단의 핵심 주제였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을 골로새 성도의 삶과 관련시킨 후 그 진리에 비춰서 "복음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21절 첫 단락은 화목되기 전 골로새 성도들의 이전 삶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22절 둘 째 단락은 화목한 골로새 성도들의 현 상태를 묘사합니다. 23절 마지막 단락은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된 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을 제시합니다. 

    본문의 세 절의 구조는 그와 같이 파악되지만 저는 오늘 제 설교를 본문 전체에 관련시키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포함된 첫 째 명제인 그들의 삶에 왜 화목은 필요했는가?(21절)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누구를 태신자로 삼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 포함된 나머지 명제들은 차례대로 뒤에 다룰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동참한 구도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울산교회에 주신 아름다운 전통의 하나는 새 생명훈련이고 5월마다 실시하는 총력전도주일, 달리 말해 이웃초청예배입니다. 우리 관점에서 표현하면 총력전도주일이지만 초청 받아 오시는 분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이웃 초청 예배"라고 하는 것이 훨씬 듣기 좋고 거부감이 없는 표현일 것입니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어떻게 말하고 접근해야 될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표현대신 우리가 굳이 총력전도주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흔히 총동원 전도주일이라고 하면 산더미 같은 선물을 쌓아놓고 무조건 사람을 많이 데려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출석하는 숫자에 관심을 쓰게 되면 총동원 전도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피곤해집니다. 그리고 한 주간이 지나게 되면 썰물 빠지듯이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故 박두욱 목사님께서 좋은 전통을 세우셨습니다. 총력전도주일로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총력전도주일은 다릅니다. 물론 우리도 그날 초대된 사람들에게는 선물을 준비해서 인사를 합니다만 개념이 다릅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방법이 다릅니다. 당일에 무조건 데리고 오는 대신 구역마다 팀 미팅을 해서 거기 참석한 사람들에게 미리 복음을 제시하고 영접한 사람을 예배에 초청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올해 총력전도 주일 표어로서 "구역마다 팀미팅 결신자를 교회로"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이 이웃초청 잔치를 5월 16일에 합니다. 그래서 구호를 "오일육 전도잔치 오천명 예배참석"이라고 정했습니다. 당일 무조건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먼저 제시하고 결신한 사람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새생명훈련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역장 모두 이 새생명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팀미팅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서 사실 우리 각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태신자를 정해서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구역마다 팀미팅 이전에 사람마다 태신자를 품어야 합니다. 써서 붙이지 않은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 놓아야될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구역마다 팀미팅 이전에 사람마다 태신자를 품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와야할 구호부터 제창해 봅시다. "사람마다 태신자, 구역마다 팀미팅" 그 다음은 "구역마다 팀미팅, 결신자를 교회로" 마지막 구호는 "오일육 전도잔치 오천명 예배참석"입니다. 

    자 그러면 처음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누구를 태신자로 삼아야 합니까? 본문에 근거해서 그 답을 찾아봅시다. 먼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 가운데서 아직 하나님께 멀리 있는 사람들을 태신자로 삼아 우리 마음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사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새벽에 우리가 묵상한 시편 14편의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때에 똑 같다고 하십니다. 다 치우쳤다고 하십니다. 교회에 먼저 나왔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때에 여기에 와서 앉아있는 사람이나 세상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다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을 가지고 여기에서 뽑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죄를 행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온 사람들의 차이점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차이입니다. 행동하는 것을 보면 큰 차이가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에서 차이는 이미 생겼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좋아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을 인해서 찬송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게 된 것은 우리가 달라지게된 모습입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여기에 부임해서 구역 팀미팅을 네 번째 실시합니다. 총력전도주일을 하는데 어떤 구역장들은(대체로 구역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목사님 데리고 올 사람들은 다 왔습니다. 데리고 올 사람이 없어서 팀미팅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365일 길다니면서 유심히 쳐다봅니다. 그 말이 정말인가 해서입니다. 내가 보니까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더라구요. 나야 모를지 모르지만 교인들은 날 알 것 아닙니까? 여러분 주위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두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의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는 사람 말입니다. 가끔 하나님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마음 한 가운데 자리해 있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가장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한번씩 떠올리기는 한데 문제는 마음 한가운데 하나님이 자리해 있지 않는 사람이 우리 태신자 대상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은근한 적대감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소속이 하나님이 아닌 것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주께로 돌아오기 전의 골로새 사람들처럼 주님께로 돌아오기 전에 울산교회 교인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 인생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사는 사람입니다. 울산교회 교회당에서 멀리 떨어져 안 살아도 가까이 살아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멀리 떠났다는 것은 지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심리적인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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