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소망(골 1:21-23)
  • 조회 수: 73, 2013.07.25 06:49:41
  •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를 여러분 모두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므로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뭐 크게 다를 것이 있냐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믿는 것을 기점으로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증거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그것을 증거 하는 성경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서로 다릅니까? 아니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에 어떻게 그 신분과 생활이 달라집니까? 예수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 의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마음 한 가운데 좌정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하나님께 무관심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소속이 어디인 것을 드러내는 행동을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그 마음속에 자리한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과 적의는 악한 행실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만 착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제게 물으면 제가 설명을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왔을 뿐이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믿기는 해도 까다로운 사람도 있고 믿지 않아도 수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천방지축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교회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어도 규모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관심하며 소중한 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귀한 분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서로 다릅니다. 마음자세가 서로 다르면 행동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우리 눈으로는 큰 차이를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판이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에서부터 변화가 있으면 삶은 시간과 함께 개선되어질 것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있었다는 기술은 정확하고 올바른 기술입니다. 믿지 않던 시절의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러므로 "악한 행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두렵고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깝고 소중한 분이 됩니다. 막연한 조물주로서 하나님을 생각하던 것이 구체적인 아버지로서 고백됩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이 믿어지는 순간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이 열립니다. 그것을 22절은 화목이라고 부릅니다. 멀어졌던 관계가 가까워집니다. 이전에 무관심했고 대적했던 그 분이 이제는 소중해집니다.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새 소원이 자리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 누구입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느냐는 여기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10년을 한 동네에 살아도 서로 무관한 사이도 있습니다. 한 아파트의 같은 통로에 살아도 그냥 무관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눈길을 서로 주고받고 깊이 있는 대화가 나누어지면 더 이상 무심한 사이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 보다도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서로 뚜렷이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믿기 전과 믿은 후는 온 세상이 달라 보일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원수된 관계에서 만나는 것과 화목된 관계에서 만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입니다. 마음으로 원수된 처지에 있는 것과 그 마음속에 화목의 평화가 있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불안과 평안의 차이입니다. 불평과 감사의 차이입니다. 수심과 기쁨의 차이입니다. 떠남과 만남의 차이입니다. 어두움과 빛의 차이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그 엄청난 차이를 "전에"와 "이제는"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21, 22절에서 밝힙니다. 전에는 악한 행실로 특징 지워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으로 멀리 떠났던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원수된 관계가 화목된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전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과거의 관계와 현재의 신분만 아니라 미래의 전망이 새로워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성도의 삶에는 놀라운 미래의 전망이 펼쳐집니다.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 오십시오.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놀라운 미래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어떻게 이 편지를 받는 골로새 성도들의 삶은 이같이 철저히 바뀌게 되었습니까? 과거의 관계가 바뀌고 현재의 신분이 달라지고 복된 미래의 전망을 갖게 되었습니까? 전에 흑암 가운데 있던 자들입니다. 세상의 초등 학문과 저급한 종교에 매달려 살던 그들이 아닙니까?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라는 계율의 노예처럼 살던 자들 아닙니까? 

    벽에 못 하나 박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이사하는 날자 조차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던 어리석은 삶을 살던 자들입니다. 여러분도 이전에는 그같이 살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궁합이 틀린다고 결혼도 못하던 비극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전에 흑암 가운데 살던 이들이 어떻게 지금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23절을 통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변화는 그들이 들은 바 복음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골로새 성도들의 삶의 모든 전망을 바꾸어 놓은 복음에 대해서 경험으로 알고 계십니까? 기쁜 소식으로 복스런 소식으로 접해 본 적이 있습니까? 믿는 사람은 기쁘게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복된 신분과 전망을 확신합니다. 골로새 사람들을 바꾸어 놓은 복음에 대해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설명하는지 오늘 우리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는 복음에 대해 최소한 세 가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인을 바꾸어 놓은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본질이 소망을 주는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바 복음의 소망"이란 구절 속에 그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나서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던 인생들에게 소망을 제시합니다. 

    제 힘으로 살고 제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큰 소리 칠 때는 복음은 어리석게만 들립니다. 화창한 봄 날 대자연 속에서 등산 한 번도 못하고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 모여서 젊은 세월을 보내는 답답한 친구들을 그들은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비젼도 없고 능력도 없는 군상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교회당이라고 생각을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고 우리 인생에 창조적 전망을 허락합니다. 복음이야말로 어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제시하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소망은 복음의 근본적 부분을 형성합니다. 복음은 모든 인생에게 차별없이 소망을 부여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소망을 제공합니다. 복음은 인생여정 어떤 순간에도 참 소망을 허락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망이 있는 자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어떻게 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복음을 들음으로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복음이 주는 소망을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우리도 복음을 들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 복된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 아들을 통해서 자신과 우리를 화목하셨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인생이 누리는 최대의 축복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자는 환경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 소식에 감격해서 부르는 찬송은 상황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역경에 도달하거나 순조로운 인생길을 가거나 상관없이 찬양하는 순례길을 걷게 합니다. 복음의 소망은 생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은 하박국의 찬양을 떠올릴 수 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주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고백하는 자는 절망의 골짜기에 헤매지 않습니다. 총체적 재난 가운데서도 미래의 전망이 있는 높은 곳에서 사슴같이 뛰놀게 됩니다. 

    오늘 여기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에게 소망을 선물하는 복음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복음으로 말미암는 소망이 여러분의 삶을 밝혀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들은 바 복음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땅에 속한 자들이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갖게 된 것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두신 소망에 근거합니다. 이 소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이미 들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살던 인생들에게 복음은 소망을 안겨줍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온 만물을 자기와 화목케 하신 분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기독교 소망의 원천이십니다. 

    바울은 지금 인생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에 대해서 또 하나의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왜 바울은 복음이 하늘 아래 천하만민에게 전파되었다고 표현할까요? 그들이 들은 바 소망을 주는 복음에서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을 호소하는 과정 속에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들은 이 복음은 너희에게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고 밝힘으로 그 신빙성을 입증합니다. 특정 민족, 특정 지역에만 호소력을 갖는 것은 복음의 보편성과 배치됩니다.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 앞에 소망을 주는 복음은 민족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합니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자본주의는 기독교이며, 공산주의는 비기독교라고 선을 긋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주의에 매이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체제를 변화시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교회내에서는 동서간의 갈등이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창조주와 화목케 하는 복음은 응당 지역 감정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모인 울산교회는 우리가 지역 감정을 극복한 복음의 수혜자임을 밝히는 현장입니다. 민족간의 갈등도 복음 앞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소망에는 종교의식의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 계급의 차이를 또한 극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문화적, 경제적인 차이도 뛰어 넘습니다. 가지고 못 가진 자들의 벽을 허물어뜨립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 앞에 전파된 바요 하늘 아래 만민들에게" 소망을 주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부터 왔느냐"는 과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미래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동일한 하늘나라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공유한 사람입니다. 3장 11절은 이 진리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과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도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고백하는 자의 삶에는 더 이상 이전 구별과 제한이 계속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본 토수의 교회설립은 일본 교회와 한국교회가 함께 사역하므로 이것을 입증했습니다. 박영자 선교사님의 거처를 제공하는 부분에는 그 쪽 교단이 도와주고, 선교사님의 사역비용은 한국교회가 부담하는 동역하는 일이 시작된 것을 발견하고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이 복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피조물이 있는 모든 곳에는 이 복음의 영향이 미쳐야 합니다. 골로새 이단들은 특수 집단들에게 -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유혹했지만 바울은 한 마디로 일축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고 골로새인들이 들은 복음은 지금 "온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다"고 선언하므로 진정한 진리는 보편적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에 만민중앙교회의 이단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만민중앙교회와 우연히 여름 수련회를 한 지역에서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예의도 없고 밤중도 모르고 새벽도 모르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는데 확성기를 통한 기도제목은 우리 목사님, 사모님처럼 되게 해주시고… 이 기도 내용을 듣고 문제가 있는 집단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동네의 민폐를 끼치면서 하는 기도가 기껏 목사님, 사모님을 닮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10년 세월이 지나가니까 한국교회 연합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의 특징입니다. 이단 감별법의 첫째가는 특징입니다. 복음은 온 천하에 전파된 진리입니다. 

    이 말은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낼 즈음 '정말 사람사는 곳곳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말인가' 라고 의문을 갖지 마십시오. 바울은 지금 인구 센세스의 결과로 기독교인의 비율을 구한 다음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복음은 주로 지중해 중심의 온 세계를 석권해 갔습니다. 그것도 마을마다 집집마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세계의 주요 거점인 도시를 중심해서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선지자다운 안목으로 미리 내다본 것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바둑을 두어 보신 분이라면 바울의 선언을 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초보자의 눈에는 막판이 되어야 승패가 보입니다. 하긴 한 집 한 집 다 세기 전에는 누가 이겼는지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단자에게는 다릅니다. 대국해서 몇 분이 지나면 그 판세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둑판 위에는 아직 몇 개의 바둑돌이 놓이지 아니했습니다. 흑백의 바둑 돌 차이는 하나 이상 나지 않습니다만 어느 쪽이 우세한지 명백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입장에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눈에는 혼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전혀 백이 침투하지 못한 지역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우세한지 흑암의 권세가 우세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곳도 있습니다. 아니 빛의 권세보다 흑암의 권세가 판을 치는 지역도 있습니다. 일본이 그렇고 중국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판세를 흐름을 따라 볼 줄 안다면 바울과 함께 소리칠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만민에게 전파되었다"고 외칠 것입니다. 복음은 지금 오대양 육대주에 승리의 거점을 이미 확보했습니다. 게임은 곧 완료될 것입니다. 큰 국면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다만 국지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태극기는 다시 중앙청에 게양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시내 곳곳에는 총성이 계속됩니다. 미아리고개, 아리랑 고개는 패주하는 인민군의 만행이 아직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역사적 서울수복의 기쁨을 이미 맛보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라는 선언 속에 포함된 최후의 승전가를 듣고 계십니까? 바울은 이 결정적 승리의 상황을 목도하며 그 복음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에 비추어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온 천하에 전파된 복음과 관련해서 "나는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의 진전되는 역사를 위해서 나는 몇 분의 태신자를 확보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역의 팀미팅을 위해서 나는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 접수를 해야 할 이 과정에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온 천하를 정복할 복음과 관련해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복음 전파의 방관자입니까? 아니면 방해꾼입니까? 여러분도 바울과 더불어서 복음의 일꾼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사역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과 밀접히 관련시켜서 보고 있습니까? 시장에서 물건을 파시는 분도 있고, 가게를 차려 놓고 영업하시는 분도 있고, 아니면 다른 직종에서 근무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시는 그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주어진 이 자리는 최후의 승리를 거둘 복음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늘 주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거하는 거기가 바로 여러분의 선교지 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순간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공동체를 섬기면서 세상을 향해서 복음 증거하는 일에 능력있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소망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도한다고 일 주일동안 해야 할 직무를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월급을 받는 사람 같으면 그 월급에 해당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근무시간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틈틈히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소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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