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은 은전 찾읍시다(눅 15:8~10)
  • 조회 수: 71, 2013.11.09 20:49:15
  •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비유 세 가지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열 개의 드라크마 가운데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를 찾고 있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음 생각하게 될 말씀은 떠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떤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잃은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고 있는 목자, 잃은 돈을 찾는 여인, 그리고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잃은 것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세 비유는 똑같은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재차 반복된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좀 더 깊이 세 비유를 관찰해보면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 비유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각각 보완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양의 경우에, 이 양은 자기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서 길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크마의 경우에는 자기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잃어버려진 자리에 던지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양은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목자를 떠나갔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거절합니다. 자기 스스로 주의 진리를 거절합니다. 자기 스스로 주님의 메시지를 거절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적극적인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자의적인 행동과는 상관없이 잃어버려져 있는 자리에서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도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시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리와 창기 같은, 그 당시 사회에서 혜택받지 못하고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세요. 그들은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보다는 운명적인 삶의 상황이 불행한 가운데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들의 삶과 비슷한 오늘의 이웃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는 이 진리를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과는 상관이 없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죄 가운데로 몰아 넣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내 속에 내가 원하지 않는 강한 충동이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이해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선을 원하는 것은 있지만 행함이 없는 나,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억누르고 자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끈질긴 부조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진리를 우리는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비유 가운데서 또 하나의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경우 목자가 양을 잃어 버렸습니다. 저 먼 곳에서 방황하고 있는 한 마리 양의 모습을 첫 번째 비유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생각하게 되는 비유에서 여인이 은전을 잃어버린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 여인은 은전을 집안에서 잃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먼 곳에만 잃어버린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지의 선교도 하면서 국내 선교도 힘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먼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도 있습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멀리 외국에 나가서 애쓰시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혼은 저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까운 데, 우리 일터에, 우리 학교에, 우리 부대에, 우리 가게에, 우리 가족 가운데, 우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주님의 복음이 누구보다도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누구보다도 절실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니,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사람 가운데도 아직 잃어버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여러 해 전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아주 중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병문안을 갔었습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한 달을 넘기시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에게 준비를 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가지 말씀을 나누다가 “집사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가 한 번은 떠나게 되는데 혹시 집사님의 경우 이 세상을 떠나신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가실 확신이 계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집사님은 뜻밖에도 “확신이라니요? 저는 확신이 없는데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분은 거의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셨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놀라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집사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지요?” 
    “아, 그거야 물론 믿지요.”
    “그러면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을 읽어보실까요”
    그러면서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사님더러 따라 읽으시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을 것이라’가 아니라 ‘영생을 얻었고’입니다. ‘생명으로 옮길 것이라’가 아니라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입니다.”
    “아, 그러면 제가 영생을 얻었습니까?”
    “물론이지요.”  
    그 때 이 집사님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감격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성경 구절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말씀에 담겨 있는 메시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 집사님에게 메시지가 되지 못하였었습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그 말씀의 메시지가 나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 머리 속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메시지가 내 것으로 다가오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앞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했지만 아직까지도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 앞에 그 영혼의 문이 열리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그의 영혼이 깨어진 감격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생겨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이라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찬송은 부르면서도 아직 주님을 붙들지 못했다면, 교회의 예배에 출석은 하지만, 찬송은 부르지만, 기도는 드리지만, 말씀을 듣지만, 헌금을 하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고백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씀을 아시지요? 정말 하나님이 나의 목자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까? 교회는 다니는데 아직도 잃어버린 영혼은 없습니까? 
    예수님이 하나의 비유로 만족치 아니하시고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옆에 잃어버린 영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많은 세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구원받았나?” 이 질문 앞에 고민 한 번 해보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현대인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영혼이 성경의 근원적인 메시지 앞에 부딪혀서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체험이 아직 없는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잃어버린 나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드라크마는 잃어버려진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비유에서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 또 하나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양은 들에서 방황하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목자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이 은전은 잃어버렸음에도 자기가 잃어버려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아마 집마루 어느 구석에 떨어져 있는 이 은전은 자기 여주인의 지갑 속에 있는 것보다도 그 마루 밑 먼지 속이 더 당연한 삶의 자리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아니 내게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중생이 필요하다는 이 영적인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는 현대 교인이 아닙니까? 

    초대교회 오순절 때 터진 강렬한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어찌 할꼬!” 그들에게는 이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 고민이 없습니다. 그저 한 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독교입니까?
    철학자 파스칼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두 가지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도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깨닫고 있는 죄인이다.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 두 가지로만 구별됩니다.

     이 비유에서 나타난 비극은 이렇습니다. 그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먼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잃어버린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방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서운 착각, 이것이 비극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이 드라크마는 잃어지기는 했으나 잊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나타난 이 여인은 열 개의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드라크마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려진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누군가가 우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잊지 않고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 할 것이라.”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잊어버리는 어머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찾으심이 시작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 여인은 등불을 켜고 잃어버린 은전을 찾습니다. 왜 등불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어두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요한복음의 기자인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 9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는 우리의 빛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으십니다. 사망의 그늘 속에서 빛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우리, 죄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비를 들고 쓸고 있습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도록 찾지 않겠느냐.” 
    먼지를 일으키며 잃은 은전을 찾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잃은 은전을 찾고야 말겠다는 이 여인의 심정을 보세요. 어두움 속에 있는 세상을 향해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이 어두움 속에, 먼지 구덩이 속에, 이 삶의 부조리 속에, 이 절망 속에 주님이 뛰어들어와 찾으십니다. 주님은 오늘 이 순간에도 나를 찾으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앞에는 문법적으로 정관사 하나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도 “바로 그 양”을 찾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의 대치로 만족치 못합니다. 숫자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치 못합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그 양’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이 여인은 잃어버린 ‘그 드라크마’를 찾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그 드라크마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 여인에게는 잃어버린 그 드라크마에 대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신랑이 신부에게 목걸이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그 목걸이가 바로 드라크마를 연결시켜서 만든 목걸이였습니다. 열 개의 드라크마를 줄에 꿰어 연결시켜서 만드는 목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이 드라크마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 드라크마로 만든 목걸이에는 사랑의 계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를 향한 사랑의 놀라운 계약 아래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대상이 바로 우리입니다. 다른 누구도 대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이 여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외친 메시지를 들어보세요.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여기 “찾았노라”는 말은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유레카”라고 합니다. 주전 3세기에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가 시라큐스의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원리를 발견한 그는 너무 기뻐서 벗은 채로 거리로 뛰어나와 “유레카! 유레카!” “나는 찾았다! 나는 찾았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여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은 지난 시간 생각한 말씀하고는 조금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했습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비유에서는 목자가 양을 찾았을 때 그저 막연히 “하늘의 기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천사를 말합니다. 잃어버린 죄인 하나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을 때 천사가 먼저 기뻐합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헛일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누구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 섬기다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천사들은 우리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는지를 압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기쁨을 아십니까? 그리고 이 하나님의 기쁨 속에 동참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기쁨을 함께 누리고 계십니까? 이것이 없다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위대한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인간을 찾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왜 여인으로 묘사되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목자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게 되는 비유에서는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여인의 섬세한 마음 때문입니다. 여인은 잃어버려도 그것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주 잃어버리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찾아보다가 찾지 못하면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하루 이틀 시간이 걸려도 찾고 또 찾아 결국 찾아내고야 맙니다. 바로 여인의 섬세한 마음을 통해서 잃어버린 우리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세요.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선언하십니다. “나는 너를 그대로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먼지를 일으키며 삶의 좌절과 불안과 절망의 상황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은 뛰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이웃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잃은 자를 찾은 기쁨이 있으십니까? 이 발견의 기쁨을 맛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아직 우리 가운데 교회는 다니면서도 영혼이 구원받은 기쁨을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그러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를 찾아보십시오. 그대로 지나가지 마시고 찾아보세요.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도리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깨닫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그냥 교회에 다니는 것 이상의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큰 감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얻기 원하십니다. 내가 구원받을 때 내가 기뻐한 것 이상으로 주님이 이 기쁨을 누리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아직도 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드라크마는 자기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향해 손끝을 대었을 때 그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거절하지 마세요.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하나님의 찾음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된 그 기쁨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받은 사실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그 기뻐하실 기쁨을 바라보며 이웃들을 찾아 나서고 계십니까? 
    지금도 이 아버지의 음성은 우리에게 들려 옵니다. “돌아와야 해.” 우리 주변에 잃은 은전 같은 심령을 찾읍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잃은 첫 사랑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잃은 열심 다시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민족을 향해서 잃은 투명성 찾고, 잃은 신뢰도를 찾으라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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