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17-32)
  • 2013.11.05 06:45:54
  • 희망의 새해 첫주일을 맞이 하여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한없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금년 우리 교회는 “새로워지는 교회”라는 표어 아래 우리 모두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부터 3장까지는 교리적인 면에 대해서 말씀했고, 4장에서부터는 실제 생활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처음에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이 편지를 읽은 에베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의 생활을 경험해 본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생활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이방 사람으로 살 때의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7-19절에 있는 말씀은 말하자면 옛 사람의 생활을 말합니다. 옛 사람의생활은 한 마디로 말해서 어두운 생활이었습니다.

    Paul Tillich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위 실존주의 예술, 문학 및 철학이란 인간의 공허성, 인간의 무의미성, 초조함을 나타내는데 불과하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더러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허무한 일을 추구하는 것 같이 허무한 것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마음이 무지해졌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도 “저희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했습니다. 22절에는 “저희가 우준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8절에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어두운 데 거하는 사람은 빛을 싫어합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했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생활은 죽음과 심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에  “저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인간 아니, 하나님이 내버려둔 인간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경배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된 것은 인간의 자유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그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리 죄를 범해도 아무런 벌도 없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만사가 형통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시편 73편 4절 이하의 말씀을 읽을 때 들어보세요.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의 소득은 마은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면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무엇을 깨달았다고요? 
    악인이 형통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셨기 때문이요. 우리가 의롭게 살려고 하지만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의 채찍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의 생활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다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 합당치 못한 일을 한다.”고하면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내어 버려둔 사람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타난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요한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나타난 그리스도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할 때 자기 자신이 놀랄 정도로 멸망해 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제일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알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옛 사람의 생활 모습은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산 것입니다. 아파도 아픈 것을 모르는 생활이 감각 없는 생활입니다. 더러운 것을 더럽게 느끼지 못하는 생활이 감각 없는 생활입니다. 어두운 데 살면서도 어두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감각 없는 생활입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죄를 범하는 것까지도 모르는 생활이 감각 없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느끼지 못하고, 무엇을 원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굳어져서 바로 느끼지 못하고, 소원이 잘못되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신앙에서 떠나게 되면 반드시 도덕적인 방종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소돔성이 그랬고, 고대 헬라와 로마가 그랬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형편이 바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감각이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양심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판단이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배로 하나님을 삼고 부끄러움을 오히려 영광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고 세상에 맞기고 될대로 되라.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흐르는 대로, 육신이 하지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고 감각을 잃어버려서 이런 사람에게서는 시대를 거슬러 가는 피나는 싸움이란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옛 사람의 어두운 생활을 끊어 버리라는 소극적인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인 권면으로 새 사람의 생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너희’라는 말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옛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저희’라는 말로 했습니다. 저희는 어두움에 하여 그 마음이 허망한 것을 행하고,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어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모든 더러운 행실을 자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오로지 너희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희만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하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 그리스도를 배움에 있어서 그의 교리 혹은 그 자신을 배우는 목적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21절에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22절에 보세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옛 사람이란 표현이 바울의 편지에만도 세 번 나옵니다. 여기 옛 사람이란 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벗어 버리라’는 말은 그 영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을 뜻하는데, 바울은 이것을 육신적인 죽음의 비유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옛날 죄악에 파묻혀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수양아니 훈련을 통해서 점점 개선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말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지 아니합니다. 옛 사람은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전혀 새롭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여기 ‘벗어 버린다’는 말은 침례를 받을 때 침례복을 입기 위해서 평상복을 벗고 그 옷을 갈아 입는 것을 비유적으로 사용했다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로마서 11장에도 “어두움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옛 사람의 상태를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썩어져 가는’이란 동사는 현재분사형 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지금 이 시간에도 썩어져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나 멸망은 진행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 자리에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는 자리에 있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장래에 가서 받을 것이 아니라 현재 받고 있으며 그렇지 못할 때는 지금도 멸망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아예 벗어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그렇습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새롭게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로마서 12장 2절 이하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 ‘마음’은 우리의 심리를 가리킵니다. 사상의 중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할 것이면 새로운 사상을 가져야만 합니다. 낡은 사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구약 잠언에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시편 39편 3절에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발하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불이 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도 그렇고 나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언제나 자기의 생각을 살펴서 조심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두 가지 생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에 속하는 생각이 있고 땅에 속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땅에서 살지마는 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병 안에 있는 공기를 내보내려면 병 속에 물이나 기름을 담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기는 밀려 나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된 증거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새롭게 되어’라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말해서 현재 부정형 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매일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매일매일 새로워질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겉 사람도 또한 새롭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에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22절의 말씀과 좋은 대조가 되는 말씀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의 탄생 경위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하는 말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구약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으로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하므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날 때, 중생할 때 다시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되찾게 되고 따라서 다시 찾은 하나님의 형상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대개 알 수가 있습니다. 결혼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신부입니다. 고별 예배에 참석할 때는 상복을 입습니다. 군복을 입은 사람은 군인입니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은 공장의 노무자나 기사입니다. 판사는 재판석에 들어갈 때 법복을 입습니다. 술집 여자는 옷을 보아도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옷을 입으십시다. 그 옷이 무엇입니까? 빛의 갑옷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처럼 감각 없이 어두운 데서 살지 말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 사람을 입으십시다.

    끝으로 새 사람을 입었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25절에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범하고 사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게 됩니까? 사실과 나의 의견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부터 생깁니다. 가령, ‘아, 그 아무개는 아주 불친절해’, ‘그 사람 아주 교만해’, ‘그 사람 무슨 일이든 독단적이야’합니다. 우리는 흔히 개인적인 인상을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잘 알고 난 후에 처음에 가졌던 인상이 잘못되었던 것을 발견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문 퍼뜨리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소문이란 것은 정확한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정확하다고 해도 좋지 않은 말은 아예 묻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사람은 부족하기 때문에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습니다. 오래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 새해에 성령의 불로 우리 입술이 깨끗함을 받아 이 입술로 다른 이의 상한 마음 고쳐 주고 위로해 주게 되기 바랍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6-27절에 “분을 내어도 죄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나와 대립되는 개인의 감정 문제 때문에 싸우고 분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분을 더디 내고 혹시 분이 났다고 하더라도 오해를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내게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분을 곧 풀고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분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결과가 되어 시험에 빠지게됩니다. 분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28절에는 “도적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 여덟째 계명입니다. 남의 재산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요사이 절도와 강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10여일 전에 새벽에 교회에 나오려고 일어나 옷을 입고 나오는데 현관문이 열려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부엌쪽을 보니까 부엌 문짝이 뜯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둑이 다녀간 모양이다’ 하고 집안을 둘러 보아도 아무것도 없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저희 집은 1년에 한 두번씩 그런 분이 다녀가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 받고’산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것도 손댄 것이 없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 자동차 시동을 걸려고 자동차 키를 찾는데 키가 없어졌어요. 깜짝 놀라 밖에 나가 보니 차도 없어졌어요. 집에 들어와서 물어 보지도 않고 자동차 키 가지고 현관문 열고 제대로 가져갔어요.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더니 닷새만에 사당동에 버린 것을 찾아왔습니다. 이런 세상입니다.
    절도, 강도만 도둑은 아닙니다. 남의 재산 손해시키는 것은 다 여기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것도 도둑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선을 행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 꾼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 했습니다.

    29절에 “더러운 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권입니다. 그 말이 악해서는 안됩니다. 파괴적이고 갈라 놓고, 깍아내리고, 비틀로, 헐뜯고, 맥빠지게 하는 말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사랑하고 북돋워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되시기 바랍니다.

    30절에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본성을 거스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성령은 우리를 구속의 날까지 인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거짓말하지 말고, 분내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더러운 말하지 말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 새 사람을 입은 증거를 들어낼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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