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29:01-02/ 경배하는 사람들
  • 2013.11.27 21:57:44
  • 신년설교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은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은  문자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점이라든지 도덕이나 윤리 규범을 지키는 능력 등 짐승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과 신앙심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절을 짓고  사원을 짓고 교회를 짓는 것은 인간세게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제아무리 지능지수가 높은 침팬지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세계엔 하나님  예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모인 곳엔  예배가 있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경배의 대상이나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고 문제가 있습나다만 그러나 절대 자를 찾고 경외하고 경배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하늘, 땅, 해, 달, 별 같은 천체나  바람, 비, 번개, 우레 같은 자연 현상들을 숭배했습니다. 그것은  자연숭배(Nature Worship)라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그리거나 새겨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면 믿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물숭배 (Fetichsm)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숭배행위는 결국 피조물을 절대화해서  숭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숭배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창조주를 십계명의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찌니라"고 했고 제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을 신격화해서 숭배하는 종교와 창조주를 절대자로 예배하고 숭배하는 기독교를 같은 종교 범주에 넣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채필근  목사님의 비교종교론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어른은 유모어가  풍부하시고 한학과 동양학은 물론  해박한 신학과 철학을 겸비하신 학자였습니다. 본래 채목사님은 철저한 유교가정에서 자라며 유교경전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14살 되던 해 아버지가 (1898년) 복음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때  소년 채필근의 심정은 아버지를 이단에게 빼앗긴 것 같은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는 유명한 한
    학자로 600여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던 분이었습니다. 채필근은 공자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공자님,  제 아버지는 그리스도교를 좀 알아가지고 그 종교를 공박하고 유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시겠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보시더니 그만 불행하게도 이단에  빠졌습니다. 성인님께서 이단을 공부하고  연구하면 해롭다고 하심이 이것을  가리키심인듯 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성인의  도를 저버리지 않기로 맹세합니다"라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어느날 아버지가 채필근을 부르더니 내일은 주일이니 예배당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변명도  피할 길도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이단자를 따라 난생 처음 예배당엘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 공부자님께 다시 호소했습니다. "공부자님 참말로 죄송합니다. 성인님의 가르침 중에 아버지가 잘못하면 간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좇으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세상을 떠나시면 3년까지 고치지 말라 하셨지요. 저도 아버지 세상  떠나시면 3년 상 치르고 틀림없이  성인님에게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그러나  그 채필근이 끝내 공자한테  안돌아가고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훗날 채목사님은  [공자님께] 라는 글속에서 "내가  꼭 다시 성인님에게로 돌아오겠다던 맹세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공자님이 계시다면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과 철인들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9편1절에서 시인은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예배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9:1-2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예배는 계속해서 드려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돌리고 돌릴찌어다라는 거듭 계속해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신체의 리듬은 일할 때 일하고 쉬어야할  때 쉬고 먹어야 할 때 먹고 잠자야 할 때  자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간격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리듬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1년분의 음식을 다 먹을 수는 없습니다. 사흘 휴가 기간 동안 1년 밀린 잠을 다 잘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1년에 한번이나 한 달에  한번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의 예배로는 부족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의  시간입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가까운 사람일수록 만나는 횟수가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정말 친해지면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장관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 세례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사에 바쁘고 교통조건이 열악했던  때였습니다만 그는 아직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의 나라를 방문했던 것입니다.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에디오피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데  큰 몫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에디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살기 힘든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잘 살던 저들이었습니다만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에디오피아를 떠난 것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주말이면 모든 상가가 철시를 하고 주일이면 가족들이 정장한 모습으로 교회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국력이나 경제적 영향력이나 정치적 힘은 세계에 제일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그리고 세속문화의 거센 도전에 정신문화가 무릎을 꿇기 시작하면서부터 미국사람들은 주말이면 저마다 문을 닫고 바닷가로 산으로 술집으로 들로 빠져나갔습니다. 교회는 텅텅 비기 시작했고 문을 닫거나  교회건물을 파는 교회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은 날개를 달고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위신이 추락했고 경제가 흔들리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국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포가하자 하나님이 저들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미국을 염려하는 미국인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본래 영국을 떠났던 청교도들은 미국  신대륙에 상륙하여 첫 해 지은 농사로 맨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청교도 정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정신인 것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2.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리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방법은 제사였습니다. 모든  제사는 정해진 법대로 드려야 합니다. 제물을 선택하는 법, 제물을 잡아서 드리는 법, 제사장이 제사를 집전하는 법 등이 소상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는 그 기본 정신과 자세가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고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른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찬송, 옷차림, 헌금, 마음가짐 등 미리미리 준비하고 당일에 서둘거나 조급히 굴면 안 됩니다. 

    둘째, 모든 예배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였던 주기철  목사님이 어느 주일날 예배인도를 하고 있는데 그 교회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헐레벌떡 교회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급한 일로 늦었던 것입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장로님이 늦으면 교인이 본받을게 뭐가 있겠습니까?"그 한마디에 조만식 장로님은 그날 선 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목사님을 찾아와 앞으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늦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오산학교를 다니실 때 교장이셨고 주 목사님은 학생이셨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가 주기철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시기로 하고  조만식 장로님을 청빙대표로 보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주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 저희교회에 부임해  주실 것을 허락해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대인의 겸손이셨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교통사정, 개인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 뵙는 시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 바른 자세로 드려야 합니다. 태도도 바르게, 마음도 바르게, 찬송도, 기도도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 이외의 다른 사건이나 소음이 예배장소를 어지럽히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예배도중에 핸드폰이 울린다든지 그리고 유유하게 통화를 하고 있는 다든지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안 됩니다. 그리고 유아가 쿵쾅거리고  활보를 한다든지 울음소리가 남의 예배를 방해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이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였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헛수고로 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아름답고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옷이란 거룩함으로 꾸민 아름다운 옷이라는 뜻입니다. 구악시대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입는 옷은 평상복이 아니었습니다. 최고급 천에 수를 넣고 금술을 달아 만든 거룩하고 아름다운 옷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입는 옷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단정해야 합니다. 복장문화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다양하고 멋있는 의상을  접하게 되었습니
    다. 유니섹스라고 해서 남녀의  성구별이 모호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의상도 남녀 구별이 어려워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초로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옷이든 입어서 추하고 혐오스러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입는 옷은  더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운 예배, 기쁘고 즐거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84:3을 보면 '참새도 주의 전에서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둘 보금자리를 얻었나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4;4을 보면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9;11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전에 나오기를 힘쓰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에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자명합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리고 교통이 차단됩니다.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배에 최선을 다합시다. 예배생활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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