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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01-54 전편 강해 [1편]
  • 2017.01.04 22:39:53
  • 1편: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은 시편의 서론인 동시에 결론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된 삶을 밝히 증거한다.
    [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로, 복 있는 사람은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로 묘사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신분과 죄의 성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경건한 자라도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와 어울리면 악의 영향을 받고 악한 본을 받기 쉽다. 악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해야 한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했다.
    둘째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과 생활의 규범, 곧 성경을 말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믿어야 할 바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그것은 의(義)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그 책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되다.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규칙적이고 지속적이게 읽고 그 뜻을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복 있는 자는 악한 자를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이다.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과 친근히 하지 말고, 오직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의로운 교훈대로 살기를 힘쓰자.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본문은 복된 자, 즉 악인을 멀리하고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나무로서 가장 복된 나무이다. 나무에게 필수적인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나무로서 걱정거리가 없다.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과 함께 또 그 말씀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상징할 것이다.
    이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나무로서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많이 열어야 하고 포도나무는 포도를 많이 열어야 한다. 이 열매는 성도의 좋은 인격과 선한 행실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도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리가 많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요 15장).
    이 나무는 또한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땅에는 때때로 가뭄이 있다. 땅이 가물면 나무 잎사귀가 마르게 되며 심하면 나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냇가의 나무는 시냇가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물 부족이 없고 시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시냇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의 시냇가이며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결코 영적 침체가 없다.
    또 이러한 인격자의 계획하고 행하는 일은 다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교훈된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영육으로 복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죄짓는 일을 두려워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창 39:2-3, 23). 또 하나님께서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계명을 지킨 히스기야와 함께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왕하18:6-7).
    복된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된 자가 되자.
    [4-5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본문은 악인 즉 불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가 복된 자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즉 악인은 선한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가뭄을 타고 범사에 형통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악인이 바람에 나는 겨 같다고 말한다. 이 바람은 세상 풍조나 환난의 바람 등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은 세상 풍조 따라 방황하고 환난의 때에 당황할 것이다. 그렇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풍조와 환난 앞에서 든든히 설 수 있을 것이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시편 125: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본문은 또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한다. 평안한 때에는 악인과 의인이 별차이가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평시에는 악인도 번창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악인은 그 앞에 서지 못하고 그 심판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본문은 또 악인 곧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악인은 죽음과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소유한 의인들의 회중, 즉 참 교회에 들지 못한다. 물고기가 땅 위에서 살 수 없듯이, 악인은 참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고 장차 영광의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요 3:5). 의인과 악인은 본질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자.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에만 순종하자.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인정한다’는 원어(요데아 וֹי, 현재분사)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의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경건과 악을 버리고 미워하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를 멀리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항상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그는 의인의 말과 행동을 처음부터 아시고 마음의 깊은 것까지 속속들이 다 아신다(시 139:1-4; 히 4:12-13). 그는 단지 그것을 지식적으로만 알지 않고 그것을 인정하고 의인을 사랑하고 선택하고 그에게 영생과 천국의 복을 주신다.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반면에,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악인의 삶은 하나님을 잘 모르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뜻을 거슬러 불의와 악을 품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 생활이다. 즉 세상의 유행과 여론과 풍습과 가치관을 따라 사는 세상적인 삶이다.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과 징벌이다. 악인의 육신은 늙고 병들고 쇠약하여 마침내 죽을 것이다. 그들이 쌓은 부와 재물은 허무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갈 것이다(잠 23:5). 그의 재물은 남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눅 12:20). 또 그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며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복음 5:29, “. . .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와 같이, 의인과 악인의 길은 확실히 다르다. 그 둘의 생활 목표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 방식이 다르고 그 결말이 다르다.
    우리는 오직 의인이 되고 의인의 길을 걷자. 모든 죄를 버리고 구주 예수의 의만 힘입고 성경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2편: 아들에게 입맞추라


    시편 2편은 메시아 예언시이다. 1-3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심리를 증거하고, 4-6절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증거한다.
    [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분노한다’는 원어(라가쉬 שׁ)는 ‘소란하다, 격분하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열렬하다. 이것은 이단자들이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는 것과 비슷하다(유 16).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세운 모든 계획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2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받은 자 곧 메시아를 대적하여 나서며 함께 의논하고 꾀를 낸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악을 행하기를 잘한다(롬 2:8). 과연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헤롯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시편 2편을 인용하면서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말했다(행 4:27-28).
    [3절]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속박으로 여기며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의요 생명의 길이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헛된 일을 도모하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로우려고 하지 말자. 성도의 바른 길은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이다.
    [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4-6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땅의 왕들에 대한 그의 반응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자’이시다. 그는 온 땅과 거기 있는 왕들을 통치하시는 자요 심판하실 자이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는 왕들을 보고 웃으신다. 그는 즐거워서가 아니라 가소로워서 웃으신다. 주님(아도나이 י)이신 그는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다.
    [5-6절]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을 발하며 진노하셔서 그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자이지만, 또한 그를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는 자이시다. 그가 노하시면 모든 사람은 다 놀라며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놀라게 하시며,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내가’라는 말(아니 י)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메시아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땅의 왕들과 하나님을 대조시킨다. 또 ‘나의 왕’이라는 말은 사람들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혈통에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과 뜻에 따라 세움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행할 왕이시다.
    ‘내 거룩한 산 시온’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거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왕 메시아를 그곳에 세우신다는 것은 메시아가 그곳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그는 육체로 그곳에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하셨고(행 2:36) 재림하심으로 온 세상의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이다(계 22:3).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땅의 왕들을 두려워 말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만 믿고 그에게만 순종하자.
    [7절] 내가 영(令)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영’(令, 코크 ק)은 ‘칙령 혹은 작정(decree)’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9절까지 나오는 내용이다. ‘내게’는 일차적으로는 다윗을 가리키지만 그는 메시아의 예표이었다. 본문의 내용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첫째로,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거되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은 영원을 가리킨다.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만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는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참된 신성(神性)에서 증거된다. 예수께서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렸다고 증거하셨다(요 17:5). 성경의 증거대로, 그의 참된 신성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20:30-31; 롬 1:4).
    [8절]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둘째로, 메시아의 왕국은 온 세상 땅끝까지 미칠 것이다. 다윗 왕국의 확장은 메시아 왕국을 예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8:19; 행 1:8)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계 7:9).
    [9절]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셋째로, 메시아는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저희를 깨뜨린다’는 원어(테로엠 ם)는 어떤 고대 번역들(LXX, Syr, Vg)에서 ‘저희를 다스린다’(티르엠 ם)는 말로 읽었다. 그리스도는 다니엘 2:34에서 ‘열방을 부서뜨리는 돌’로 예언되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철장으로 다스리는 자’로 묘사되셨다(계 2:27; 12:5; 19:15). 그는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이시다(행 17:31; 딤후 4: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왕권을 깨닫고 또 메시아 왕국 곧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내다보자. 또 우리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만 믿고 그를 따르며 그의 나라 확장의 일에 힘써 참여하자.
    [10-11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대적하는 무리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시고 메시아를 통한 그의 뜻은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은 지혜와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본문은 세 가지의 교훈을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이다(잠 1:7).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떨어야 한다. 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한다. 히브리서 13:28,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경외함 혹은 경건함과 기쁨은 정상적 신앙생활의 덕이다.
    [12절]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둘째로,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롬 10:9; 고전 12:3)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삶의 길에 속히 임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12절] . .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셋째로, 하나님만 의지하라. 세상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이나 그의 지혜도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재물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자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다.
    세상 권세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한 세상 구원의 뜻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경외하고 그의 아들을 믿고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자.
    3편: 곤경 중에 부르짖음
    [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이 시의 표제어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이 시를 썼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반역하는 일이 커갔고 압살롬에게로 오는 백성이 많았다고 성경은 증거한다(삼하 15:12).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마 27:22-23). 사도 바울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 그와 입장을 같이하지 않았다(딤후 1:15; 4:16).
    [2절]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대적자들은 다윗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은 다윗을 낙심시킬 만하였다. 사람들의 대적이 두려운 일이나 하나님이 그를 지지하고 도우신다면 걱정될 것이 없지만,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한다면 심각한 일이다. ‘셀라’라는 말은 ‘소리를 높이라’는 뜻이거나 ‘쉬라’는 표시일 것이다.
    [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완전히 잘못된 비난이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원수들의 공격을 막아주실 그의 방패시며, 그에게 왕의 영광을 주셨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주실 그의 영광이시며, 그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는 그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세상에는 우리의 대적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와 영광과 위로와 힘이 되심을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앞에 충성하자.
    [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다윗은 그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우리는 기도할 때 보통 조용한 소리로 혹은 마음 속으로나 생각으로 기도하지만(느 2:4),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부르짖음은 기도하는 이의 간절한 심령을 나타낸다.
    기도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할 수 없는 우상이나 그를 도울 수 없는 거짓 신이 아니다. 아합 시대에 참 선지자 엘리야와 대결하였던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왕상 18:26).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렘 10:10). 그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 계셔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나아가 그에게 기도하는 자는 복되다.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그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그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불로 응답하셨다(왕상 18:37-39). 본문은 그가 그 성산에서 응답하신다고 말한다. 그 성산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 하나님이 계신 표를 두신 예루살렘, 그리고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도의 응답이 있다.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응답받는다(요 14:13-14). 기도는 아름다운 말이나 경건한 모양에 있지 않다. 기도는 믿음과 진실함에 있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고 늘 기도하며, 특히 어려울 때 부르짖어 기도하자.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 중에 있었던 다윗, 많은 대적자들과 그들의 악한 비난 중에 있었던 그였지만, 그는 밤에 누워 평안한 잠을 잤다. 그에게 상심함과 두려움이 있었다면 그는 단잠을 잘 수 없었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그는 편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의 받는 벌들 중의 하나가 경심증(驚心症)이지만(신 28:28),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을 주신다(시 127:2).
    다윗이 단잠을 잘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었다. ‘나를 붙드신다’는 원어(이스메케니 י)는 ‘나를 계속 붙드신다’(미완료시제)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한번만 도우시고 붙드신 것이 아니고 계속 도우시고 붙드셨다. 다윗이 환난 중에서도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또 그를 대적하여 둘러선 수만명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다윗에게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담력과 용기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와 담력이다. 사무엘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窘急)하였으나[고통스러웠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더라.” 구약 시대의 선지자 엘리야나 미가야, 초대 교회의 아다나시우스나 종교개혁 때의 루터의 용기와 담력도 그러하였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우리가 큰 환난 중에서도 평안과 담력을 얻고 단잠을 잘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를 도우시고 붙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시지 말고 일어나 행동하시며 압살롬의 반란으로부터, 대적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건져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큰 곤란 중에 낙심하거나 당황한 채로 있지 않고 또 단순히 인간적 대책을 연구하거나 의논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은 성도의 놀라운 특권이다. 우리에게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7-8절] . . .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요청하는 근거를 말한다. 그의 기도의 근거는, 첫째로, 주께서 과거에 그의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셨다는 사실이었다. ‘뺨’이라는 원어(레키 י)는 ‘턱, 뺨’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과거의 경험은 고난 중에 그의 현재의 기도의 근거가 된다.
    8절 상반절은 그의 기도의 근거를 계속 말하는 것 같다. 그의 기도의 근거는, 둘째로,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성경에 밝히 증거된 하나님의 진리이며(시 37:39; 62:6; 렘 3:23; 욘 2:9; 계 7:10; 19:1) 다윗의 지식과 확신이었다.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도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하였다(삼상 17:47). 구원은 사람들에게나 군대의 힘에나 그 어떤 인간적 수단과 방법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또 그는 “주의 복이 주의 백성에게 있나이다[혹은 주의 백성에게 있게 하소서]”라고 주의 백성이 가진 특권에 대해 증거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 낙심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또 인간적 수단과 방법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구원과 도움을 구하자.
    4편: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평안
    표제어에 ‘영장(伶長)’이라는 원어(메낫체아크 )는 ‘찬양 지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시편에 ‘현악’(네기노스 תוֹני)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어를 가진 것은 7개가 있다(4, 6, 54, 55, 61, 67, 76편).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의(義)의 하나님’이라는 표현한다. 성도의 의는 그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의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율법 앞에서 죄인이지만, 구약 시대에는 짐승 제사로,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성도는 그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기도한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너그럽게 하셨다’는 원어(히르카브타 )는 ‘안심케 하셨다, 건지셨다’는 뜻을 가진다. 과거에 다윗이 어려운 일을 당하여 마음에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함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셨고 그를 건져주셨다. 다윗은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현재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기도 응답을 요청한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실상 그가 가진 의도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그가 당한 환난에서 그에게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서 우리의 의가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 문제의 해결을 요청하자.
    [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다윗은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그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한다고 말한다. ‘나의 영광’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왕권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백성들은 그의 왕권의 영광을 인정하고 높이고 그를 존경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를 왕으로 세우신 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해치려 하고 있었다.
    다윗은 또 그들이 허사를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거짓된 것을 구하고 그들의 계획은 다 허사(虛事)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며 그것을 무(無)로 돌려버리시기 때문이다.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던 형들의 계획이나 왕을 속이고 다니엘을 모함했던 그의 동료 총리들의 계획은 다 허사가 되었다. 악한 자들의 거짓된 계획은 다 허사이다.
    [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계획을 폐하시고 경건한 자들을 택하신다. ‘경건한’이라는 원어(카시드 די)는 ‘선함과 친절함’(케세드 ד)을 가진 자라는 맛을 가진 단어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선하고 친절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선한 성품을 본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런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또 그는 이런 자를 인정하시고 도와 주시고 그의 대적들을 파하신다. 경건한 자에게도 어려운 일들이 있으나 그는 결국 그 모든 일들에서 승리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악한 자들의 거짓되고 헛된 계획을 폐하시고 경건한 자를 택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시며 결국 승리케 하신다.
    [4절]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4-5절은 다윗이 대적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떨며’라는 원어(리게주 וּז)는 ‘떨라, 고민하라’는 뜻이지만 헬라어 70인역은 ‘분노하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은 다윗의 대적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라는 뜻이거나, 에베소서 4:26의 인용처럼 그들이 다윗을 향해 분노의 감정을 가짐을 지적하는 뜻일 것이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노한 감정을 버리고 범죄치 말아야 할 것이다.
    다윗은 또 그들이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밤에 침상에 누울 때 자신을 반성케 된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밤에 침상에 누워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잘못되고 지나친 말과 감정과 행실을 버리고 잠잠해야 할 것이다.
    [5절]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또 다윗은 그들에게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한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의를 예표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참된 제사는 사람의 죄를 씻고 그에게 의를 준다. 물론 성도는 외식적 종교 형식을 버리고 참된 믿음과 진심으로 의로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말한다. 아마 그들은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인간적 생각과 계산, 사람들의 수와 힘을 의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다 헛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에게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범죄치 말고 잠잠하며 의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참된 성도는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인간적 생각과 믿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만 행해야 한다.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대적자들도 다윗 일행을 조롱했지만, 많은 사람들도 다윗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절망적 전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였다. “주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어 주소서.” 다윗이 구한 주님의 얼굴은 진노하신 얼굴이 아니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얼굴이다.
    [7절]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그런데 주님의 얼굴빛은 다윗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다. 슬픈 얼굴은 남에게 슬픔을 주고 화난 얼굴은 남에게 불안을 주지만, 기쁜 얼굴은 남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 하나님은 기쁨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을 포함한다(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이 충만한 나라다(롬 14:17). 더욱이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의 기쁨, 즉 추수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라고 말한다.
    [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또 다윗은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증거한다. 그는 많은 대적자들의 비난과 핍박 중에서도 평안히 잠을 잤으며 생활의 안전함을 누렸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義)로 삼고 그를 의지하며 사는 성도가 누리는 복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약속하셨고 허락하셨다. 요한복음 14:27에서 그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악한 자들의 비방과 대적과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항상 주님의 은혜의 얼굴빛을 구하며 받아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자.
    5편: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심
    [1-2절]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본문은 다윗의 기도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다윗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이었다. ‘심사’(心思)라는 원어(하기그 גי)는 ‘중얼거림, 탄식’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형식적 기도나 말만 많이 늘어놓는 기도가 아니고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이며 간절한 탄식의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고 말한다. 그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이었다.
    둘째로,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하는 기도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즉 그는 하나님을 그의 왕으로 인정하며 그 앞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질 때 올릴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고백이다. 참된 기도는 바로 이런 지식과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3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셋째로, 다윗의 기도는 정성스런 기도이었다. 그는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이다. 그것은 하루 중 가장 귀한 시간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그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가장 합당하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를 본받아 마음 중심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왕권을 인정하며 기도하고, 아침마다 정성으로 기도하자.
    [4절]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留)하지 못하며.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로 시작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원수들을 물리치실 것인지 그 이유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며 또 악이 그와 함께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의 속성에 맞지 않는 것은 그가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은, 거지에게는 더러운 옷과 누추한 집이 어울리지만 왕자에게는 깨끗한 옷과 아름다운 집이 어울리는 것과 같다. 다윗은 대적자들로 인해 지금 위협을 당하고 탄식 중에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 악인들을 물리치실 것을 확신한다.
    [5-6절]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目前)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다윗은 계속 말하기를, 오만한 자가 하나님의 눈앞에 서지 못하며 하나님은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오만한 자’라는 원어(홀렐림 םיוֹה)는 ‘자랑하는 자들’(BDB, NASB) 혹은 ‘어리석은 자들’(KJV)이라는 뜻이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며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사람은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지만 죄로 더러워지고 악하게 변했을 때 또 그가 회개함으로 새로워지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실 수밖에 없다. 사람도 자기에게 있는 아무리 좋은 것도 더러워지고 그 더러움이 심각하다면 할 수 없이 그것을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더러운 것은 버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다 갖춘 훌륭한 자라도 죄 지으면 버림을 당하고 멸망한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죄 문제이다. 우리는 죄를 짓지 말자.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仁慈)를 믿고 의지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에서 비롯된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으로 택하심과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느냐, 못 입었느냐의 차이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가!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힙입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고 그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주의 집’(베세카 י)과 ‘성전’(헤칼 코드쉐카 לי ‘주의 거룩한 전’)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시 65:4), 본문에서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막을 가리킬 수도 있고(시 68:29) 하늘 성소를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시 11:4; 18:6). 여하튼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해 경배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다. 여기에 경건한 성도와 불경건한 악인과의 차이점이 있다.
    [8절]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나의 원수들’(KJV, NASB, NIV)이라는 원어(쇼레라이 יוֹשׁ)는 ‘나를 해하려고 엎드려 주목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BDB).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의(義)로 삼고 살았을 뿐 아니라(시 4:1), 이제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인도와 판단과 처분을 바란다. 성도는 스스로 원수에게 보복할 필요가 없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신 32:35; 롬 12:19). 그는 곧 공의로운 판단과 처분을 보이실 것이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그에게 참된 예배를 드리고 그의 공의로운 인도와 판단과 처분만 구하자.
    [9절]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윗이 하나님께 공의로운 판단과 처분을 호소한 이유는 그의 원수들이 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자기의 이익과 불이익을 따라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한다. 신실함이 없는 말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진실한 자는 그가 처한 상황이 그에게 이익이 되든지 해가 되든지 관계치 않고 바른 말을 하고 한결 같은 말을 한다.
    다윗은 또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겉보기는 선량할지라도 마음 속은 심히 악하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의 마음은 심히 악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증거하였다(렘 17:9).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다윗은 또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다고 말한다. 무덤이 열리면 나쁜 악취가 날 것이다. 악인들의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온다. 주께서는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중생한 자에게도 악한 본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엡 4:31).
    다윗은 또 그들이 혀로 아첨의 말을 한다고 말한다. 아첨의 말은 남의 비위를 맞추는 말이며 일종의 거짓말이다. 시편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아첨의 말은 상대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중생한 우리는 악인처럼 되지 말자. 우리는 마음 속에 선한 마음만 품고 진실하고 선한 말만 하자. 또 우리는 아첨하는 자가 되지 말자.
    [10절]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시기를 호소한다. ‘정죄하소서’라는 원어(하아쉬 םי)는 ‘유죄(有罪)라고 선언하소서’(BDB), ‘유죄(有罪)라고 여기소서’(NASB), ‘벌하소서,’ ‘멸망시키소서’(KJV, Langenscheidt)라는 뜻이 있다. 다윗은 스스로 원수를 보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셔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벌은 공의롭고 철저하며 사람의 보복보다 훨씬 더 무섭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꾀로 인해 넘어지게 하시기를 호소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악인들을 자기 꾀로 인해 넘어지게 하신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은 높이가 50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집 뜰에 세우고 모르드개를 거기에 달아 죽이려고 계획하였으나 그 나무에 자기 자신이 달려 죽임을 당했다(에 5:14; 7:10). 다니엘서에 보면, 악한 자들은 선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죽이려고 한 법령을 제정케 하였으나 그들과 그 처자들이 거기에 던지웠다(단 6:7, 24).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쫓아내시기를 호소한다. 그는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라고 말하며 또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라고 한다. 다윗의 원수들은 많은 악을 행하고(9절)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종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쫓으시고 징벌하시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자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에 맡기자.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가 갚으실 것이다(신 32:35; 롬 12:19).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진실하게만 살자.
    [11-12절]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이는]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본문은 성도에 대해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성도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이다. 피하는 것은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이다. 둘째로,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섭리자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신 자임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할 것이다. 셋째로, 성도는 의인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교훈과 명령을 행하는 자이다.
    본문은 또한 성도의 기쁨에 대해 증거한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다 기뻐하며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신약 성도도 똑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했고, 빌립보서 4:4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로 11절에 “주의 보호로 인하여”라고 말하고, 12절은 원문에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첫째로 주께서 의인에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둘째로 주께서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원수들의 비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의인을 복 주시며 보호하시기 때문에 기뻐한다.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
    우리는 의인으로만 살자. 어려울 때 하나님께 피하며 그만 의지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대로만 살자. 또 우리는 의인의 복을 누리자. 즉 환난 중에도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보호하심을 체험하자.
    6편: 눈물의 탄식을 들으심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그를 징계하지 마시기를 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 또 광야에서 인도자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그 동료들이 땅에 산 채로 삼킨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전임자 사울 왕을 버리시고 그로 하여금 악령으로 고통당하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무섭다.
    [2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지금 자신의 몸이 수척하며 쇠약하고 뼈가 떨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의 긍휼과 치료를 간구한다. 그는 자신의 몸의 연약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책이라고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긍휼로 그의 몸의 연약을 치료하시고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어떤 좋은 것을 구할 수 없다.
    [3절]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는 자신의 영혼까지도 심히 떨린다고 말한다. 심령의 두려움과 침체는 몸의 연약보다 더 문제이다. 또 그의 고통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말한다.
    성도는 때때로 심신의 연약함에 떨어진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자신의 부족 때문에 온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며 그가 우리의 심신의 연약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자.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치 파선 당한 배의 선원들이 구조 신호를 보내면서 구조 요청을 하듯이, 다윗은 그의 연약 중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다윗과 함께 계셨고 그를 지키시고 도우셨으나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마 그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잠시 그를 떠나가셨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 그의 공의뿐이라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긍휼과 자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중단과 마침이 있고 우리의 구원과 회복이 가능하였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로 시작된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절박하게 요청한 이유는 그가 죽으면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으며 음부(陰府) 곧 무덤에서 주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육신을 두고 한 말이다. 사람이 죽어 몸이 무덤에 묻히면 그 몸은 의식이 없는 시체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다. 다윗이 좀더 살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이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이어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자.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의지하며 그렇게 하자. 또 우리는 우리 몸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과 그의 뜻에 맡기며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감사하자.
    [6-7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본문은 다윗이 처한 심각한 고통의 상태를 묘사한다. 다윗은 탄식함으로 곤핍하였다. 그의 심령은 답답하고 괴로워 신음하며 한숨지었고 그 결과 몸도 마음도 피곤하며 지쳤다. 또 그는 밤마다, 즉 여러 날을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우리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그는 근심으로 인해 그의 눈도 쇠해졌다고 말한다. 그의 근심은 특히 그의 많은 대적자들을 인한 것이었다. 그는 눈이 쇠해질 정도로 극한 근심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다윗의 고통은 인간 예수님의 고통을 예표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고(요 5:16, 18), 또 그가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분기가 가득하여 저를 죽이고자 하였다(마12:14; 눅 6:11). 그가 성전에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은 돌을 들어 그를 치려 한 적도 있었다(요 8:59; 10:31). 또 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설교를 하셨을 때 그들은 그에게 맹렬히 달라붙었고 그에게 올무를 놓아 넘어뜨리려 하였다(눅 11:53-54). 마침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를 죽이려고 의논하고 그 일을 이루었다(마 27: 1).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당한 슬픔의 사람’이었다(사 53:3). 인간 예수의 고통은 참으로 컸을 것이다.
    성도에게는 탄식과 눈물과 근심의 극심한 고통의 상황이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
    [8-10절]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본문은 다윗의 기도 응답의 확신에 대해 증거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본문은 다윗의 기도를 세 가지의 다른 단어로 표현한다. 첫째는 ‘곡성’이다. 다윗은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6절에 말한 대로,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셨다. 둘째는 ‘간구’이다. 그는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아뢰었다. 본 시편의 1-4절에는 ‘여호와여’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온다(1, 2, 2, 3, 4절). 셋째는 일반적 용어인 ‘기도’이다.
    이런 눈물과 간구의 기도를 올린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게 되었다. 8절을 다시 번역하면,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음이로다.” 또 9절은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들으셨다’고 과거형(완료동사)으로 표현한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 즉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나타낸다. 기도 응답이 아직 현실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평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는 또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다윗에게 주신 기도 응답의 내용은 다윗의 대적자들 곧 그에게 악을 행하던 자들이 홀연히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 그를 떠나가는 것이다. 전에는 교만하고 의기양양했던 그들이 이제는 몸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심히 떨고 당황할  것이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구원과 승리도 있고(시 34:19) 영속적 평안도 있다(요 14:27).
    고난 중 아뢰는 성도의 눈물의 간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얻는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원수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물리치신다.
    7편: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심
    [1-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다윗에게는 그를 쫓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자같이 그를 찢고 뜯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사울에게 쫓기던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피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구원을 간구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확신하고 기도하는 자는 복되다.
    [3-5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이것을 행했다”는 말은 다음에 나오는 말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그의 손에 죄악이 있거나 그가 자기와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다면, 원수들이 그를 쫓아 잡아 그의 생명을 땅에 밟고 그의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며 담대히 구원을 간구한다.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이라는 말씀은 “나는 무고히 나의 원수된 자를 건져내었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KJV). 이 말씀은 그가 사울을 살려준 일에 맞다(삼상 24:7; 26:11).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책망할 것이 없을 때, 즉 자기 행위가 양심적으로 결백할 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하나님께 간구한 바를 얻을 것이다(요일 3:21).
    우리는 사자같이 우리를 해하려는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확신하며 간구하고, 행위 결백한 삶을 살므로 더욱 담대히 기도하자.
    [6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인들의 분노보다 몇 백갑절 더 크고 무섭다. 악인에게 공의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율법에 약속된 바이다. 다윗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분노할 때 그것을 막을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대적들의 노함은 저지될 것이다. 세상에서 성도에게 대적자들이 많으나 심판의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그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 성도의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문제 자체만 가지고 씨름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갖고 나가야 한다.
    [7-8절]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민족들’이라는 말(움밈 םי)은 영어번역들처럼 ‘백성들’(peoples)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민족들 혹은 백성들이 주를 둘러 모이고 주께서 그 높은 자리에 앉으심은 위엄 있는 재판장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나라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되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심판하시기를 하나님께 담대히 구한다. ‘성실함’이라는 원어(톰 ם)는 ‘온전함, 순전함’ 등의 뜻이다. 이것은 대략적 의미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의로운 자요 온전한 자이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악한 원수들과 현저히 구별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올바르게, 순전하게 행하자. 또 우리는 그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고난 중에서도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자.
    [9절]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셔서 악인들의 악을 끝나게 하시고 의인들을 세우시기를 간구한다. 세상에는 악인이 끊임없이 득세하고 활개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완전한 도덕적 질서는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악 행위를 정확히 구별하신다. 본문에 사람의 ‘심장’이라는 원어는 ‘마음과 내부(內部)’라는 말인데, ‘내부’라는 원어(켈라요스 תו)는 ‘신장(腎臟), 생각, 감정, 품은 뜻’을 가리킨다. 또 ‘감찰한다’는 원어(바칸 ן)는 ‘시험한다, 검사한다, 판별한다’는 뜻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품은 뜻을 다 시험하시고 판별하시며 악인들을 끊고 의인들을 세우실 것이다.
    [10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의인’과 동의어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순종하며 행하는 자이다. 성도의 특징은 마음의 정직함에 있다. 성도는 거짓과 간사함을 미워한다. 세상은 의인을 몰라주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고 그를 악한 자들로부터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방패는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성도는 악한 대적자들의 핍박을 받을 때 육신의 힘이나 칼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한다. 육신의 힘이나 칼이나 세상을 의지하는 자는 그것들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시는 방패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시험하시고 판단하신다. 그는 악인의 악을 끝나게 하시며 의인을 악인의 공격으로부터 건져주신다.
    [11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도덕적 하나님이시다.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그는 악인들의 악을 조금이라도 용납하거나 묵인하지 않으신다. 만일 그가 악을 눈감아 주신다면, 그는 불의한 재판관이실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악인들에게 평강과 복을 주시지 않는다(사 48:22; 57:21). 그는 악인들의 악에 대해 매일 분노하신다. 악인들은 매일 하나님의 진노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12-13절]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火箭)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명하셨다. 마태복음 4:17,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3:3,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절하며 그의 진노를 쌓고 있다. 로마서 2:5,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악인을 위해 징벌을 준비하셨다. 그것은 매우 치명적 징벌이다. 본문은 그것을 그의 칼, 그의 활, 그의 화살 등으로 표현하며 또 ‘죽일 기계’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가장 훌륭한 궁수(弓手)이시다. 그의 불화살은 악인들의 심장에 명중할 것이며 그들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두려워해야 하며 죄인에게 내리시는 그의 형벌을 두려워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14-17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殘害)를 잉태하며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악인들은 죄악된 일을 위해 애쓰며 남을 해치는 일을 은밀히 계획하고 거짓된 일을 행한다. ‘해산한다’는 원어(예캅벨 ל)는 ‘(해산을 위해) 진통한다’는 말이다. 악인은 악행을 수고로이 계획하고 은밀하게, 거짓되게 수행한다. 그는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행한다.
    그러나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9절) 하나님은 악인에게 공의로 보응하신다. 악인은 의인을 해하려고 웅덩이를 파 만들지만 자신이 거기 빠지며 그를 해하려고 계획한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그의 포학함이 자기 머리에 내려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다. 시편 다른 곳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시편 9:15,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57:6,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역사상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수천명의 기독교인의 눈을 뽑았던 로마의 맥시미너스 황제는 눈병이 나서 죽었고, 기독교를 박해하라는 칙령에 서명하려던 로마의 아우렐리안 황제는 손이 까부라져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하며, 하나님의 성도들을 불태워 죽였던 스테반 가드너는 혀가 타서 흑색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와 매달려 있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었다.
    다윗은 악인에게 보응하시고 고난받는 성도를 지키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감사하며 찬송한다. 이것은 성도의 체험적 찬송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악인이 되지 말자. 악인의 악은 자기만 해할 뿐이다. 또 우리는 악인의 해를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8편: 사람을 존귀케 하심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이고 ‘주’는 소유권과 통치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시요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시다. ‘아름답다’는 원어(앗디르 ריאַ)는 ‘엄위하다’는 뜻이다. 주 여호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이 천지에 가득하다.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어린아이’라는 원어(올렐 לוֹע)는 ‘어린아이 또는 소년’이라는 뜻이다. 주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거기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는 아이들이 있었다(마 21:15). 예레미야는 새 시대가 오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4).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진리가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겨졌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마 11:25). 하나님께서는 순진한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고백케 하신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
    또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의 입술의 고백을 사용하셔서 대적자들을 잠잠케 하신다. 소년 다윗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에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증거하며(삼상 17:45, 47) 그와 싸워 이겼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셔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고백했다(고전 1:27-29).
    우리는 천지에 가득한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을 깨닫자. 우리는 순진한 어린아이들같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고 찬양하며 증거하자.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주의 손가락’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이다. 사람의 손가락이 물건을 만들 수도 있고 집을 지을 수도 있는 자동기계와 같듯이, 하나님의 손가락은 공사장 중장비 이상의 탁월한 기계와 같으시다. 그는 뛰어난 발명가이시며 장인이시며 과학자이시며 미술가이시다. 온 세상과 만물은 그의 창조 작품이다.
    하늘과 달과 별들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것들은 우연히 된 것이거나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작이 있다. 창조가 바로 그것들의 시작이다. 또 하늘은 광대하고 신비하며 달과 별들은 오묘막측하다. 사람은 인류 역사 6천년에 겨우 달이나 화성 등에 로켓을 보내어 탐험을 시작한 정도이다.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표현은 사람은 광대(廣大)한 우주와 비교할 때 너무 미미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광대한 우주에 비교할 때 지구는 하나의 작은 공이며 사람은 그 공의 지극히 작은 점에 불과하다. 광대한 우주에 비교하면 사람은 무(無)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가치해 보이는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사람을 생각하시며 돌보신다. ‘권고한다’는 원어(파카드 ד)는 ‘돌본다,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주관심은 단지 우주나 심지어 지구도 아니고 지구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다스리시고 복과 벌을 내리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다. 사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광대하고 신비한 창조 세계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찬송하자.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심을 감사하자.
    [5-9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牛羊)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 ‘천사보다’라는 원어(메엘로힘 םי)는 ‘하나님보다’라는 말이지만 고대의 번역들(LXX, Syr, Targ, KJV)처럼 ‘천사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히 못한 존재이며, ‘하나님보다’라고 말하려면 ‘당신보다’라고 표현했을 것이며, 언어적으로 그런 번역이 가능하며(시 97:7 등), 또 신약성경에서 그런 뜻으로 인용되었기(히 2:7, 9) 때문이다. ‘조금’이라는 원어(메아트 ט)는 ‘조금’ 혹은 ‘잠시’라는 뜻이다. 사람은 본래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지만, 범죄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이었으나 범죄함으로 그 영광과 존귀를 잃어버렸다(롬 3:23; 시 49:12).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화와 존귀를 얻으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는 장차 영화와 존귀를 얻을 것이다(롬 8:30; 빌 3:21). 구원의 결과는 영광이다.
    또한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지만(창 1:26, 28) 범죄함으로 어리석은 우상 숭배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성도는 바른 지식으로 사람의 임무를 완수하여 피조물의 종이 되지 말고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의 임무를 다하자. 또 하나님을 섬기며 만물을 다스리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자.
    9편: 공의로 심판하심
    [1-2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奇事)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한다. ‘감사한다’는 원어(야다 ה)는 ‘찬송한다’는 뜻도 있다. 성경에서 감사와 찬송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대상 25:3; 시 92:1-3; 95:2 100:4 등). 에베소서 5:19-20,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6,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다윗의 감사와 찬송의 대상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모든 기사를 전하겠다고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그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체험적 감사와 찬송이다.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시고 도우셨으며 그의 대적자들을 징벌하셨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인해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찬양하자.
    또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를 찬송한다고 말한다. 정성 없는, 형식적, 위선적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찬송하기를 원하신다. 또 참된 찬송은 기쁨과 즐거움의 찬송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은 없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바꿀 수 없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를 찬송하자.
    [3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지금 다윗을 공격하고 비난하지만 항상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이 물러갈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넘어져 망할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원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도우시고 그의 대적들을 징벌할 것이다. 그것이 다윗이 경험할 일이요 또 우리도 경험할 일이다. 다윗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4절]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본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로 시작된다. 다윗의 원수들이 넘어져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판단과 의, 그리고 그의 송사를 지지하시고 변호하신다. 그는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거기 사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심판하신다. 이 사실은 참으로 감사하다. 사람의 양심은 선과 진실이 인정을 받는 도덕적 세계를 원하며 세상 사람도 입으로는 그런 세계를 인정할 것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악을 행하며 또 그런 것과 타협한다.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자는 오히려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5-6절]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무시하는 이방 나라들이 지금 크고 유명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것들은 영원히 멸망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악인들의 결말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세상에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7절]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신다는 말은 그가 영원히 계신다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여호와’라는 그의 명칭은 ‘영원히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이다. 시편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항상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영원하신 하나님은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요 심판자이시다. 그는 인류 역사 속에서 자주 심판을 시행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날 그는 최종적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20:11,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그 보좌는 마지막 심판 보좌이다.
    [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직으로 심판하신다. 이것은 그의 도덕법에 따른 것이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편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로마서 2:6, 1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이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모든 죄를 버리고 의와 선만 행하자. 우리는 또한 그를 의지하며 그의 완전한 심판을 기뻐하자.
    [9절]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압제’는 부당하게 위협하고 억누르는 것이다. 보통,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압제한다. ‘환난 때’라는 원어는 ‘환난의 때들’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인간의 삶의 여러 환난들, 질병과 가난, 자연 재해와 전쟁 등의 환난들을 암시한다. 낮과 밤이 있고 맑은 날과 비오는 날, 따뜻한 날과 추운 날이 있듯이, 인간의 삶의 여정에는 어려운 때들이 많다. 어떤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징벌로 오지만, 어떤 때는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만 소망케 하는 훈련 과정으로 온다(시 39:6-7).
    그런데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자에게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 되신다. ‘산성’(미스갑 ב)은 남한산성, 행주산성같이 높은 곳에 있는 요새와 피난처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원수들의 교묘하고 집요하고 위압적인 공격과 핍박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곳이 되신다. 하나님은 긍휼로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변호하시며 악인들을 징벌하신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의 해결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있다.
    [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능력이 많으심과 압제나 환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산성이 되심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그를 의지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는 자들은 그의 말씀을 붙들고 그에게 기도할 것이며 또 그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경건 생활로 나타나고 그 둘은 서로 비례하며 같이 자라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자. 특히 그가 압제와 환난 당하는 자에게 산성이 되심을 알자. 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특히 어려울 때 기도하자.
    [11-12절]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온’은 구약시대에 성막과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계시며(왕상 8:30) 세상을 초월해 계시며(왕상 8:27) 온 우주에 충만하시지만(렘 23:24), 그는 또한 시온에 특히 성막과 성전에 계셔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는 오늘날에는 교회 즉 성도들 안에 계신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곧 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셨다. 특히 그는 그들의 억울한 일들을 갚아주셨다. 다윗은, 시온에 거하시며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행한 일들을 백성 중에 선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행사들이란 다음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행하신 의롭고 선한 일들을 체험하는 자마다 그를 찬송하며 그의 일들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송과 전도를 참으로 기뻐하신다.
    12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앞절에서 권면한 찬송과 전도의 이유를 말한다. ‘심문하신다’는 원어는 ‘조사한다, 심사한다’는 뜻과 함께 ‘갚는다’는 뜻도 있다. ‘가난한 자’라는 원어는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거해야 할 이유는 그가 의인들의 피흘림당함을 갚으시는 자이시며 그들을 기억하시고 핍박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과 그가 핍박당하는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악인을 징벌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알자. 또 그 하나님을 찬송하며 사람들에게 그를 증거하자.
    [13절]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성도 다윗은 지금 그를 미워하는 자들 때문에 곤고한 상태에 있다. 다윗에게는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가 그들에게서 받는 고난과 곤고함은 컸다. 그가 하나님을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의 처지를 암시한다. ‘사망의 문’은 사람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죽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가 죽음의 위협 속에 있고 죽음 앞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지금 원수들로 인하여 곤고함이 심하여 죽을 지경에 있는 것이다.
    다윗은 그런 어려운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자이심을 믿었다. ‘일으키신다’는 말은 들어올려 건져내시고 피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위협과 곤고함에서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은 다윗은 그에게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곤고함을 보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간구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돌아보시고 그를 도우신다면, 그는 그 곤고함과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간구하였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 자는 그에게 기도한다.
    [14절]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결심을 고백하기를, 만일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면 모든 성도들이 출입하는 시온의 문에서 그들이 듣도록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증거하며 주의 구원을 기뻐하겠다고 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는 누구나 기쁨으로 그를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곤고함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긍휼을 구하자. 또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으로 찬송하며 증거하자.
    [15-16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열방’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불경건한 이방 나라들과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고 그들의 발로 걸리게 하려고 몰래 그물을 쳤다. 악인들은 경건한 자들이 그들과 동류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악을 지적하고 책망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한다. 요한복음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신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시편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자신이 살아계시며 악인들을 미워하시는 공의의 심판자이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로, 경건하고 선한 자들을 해치려던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졌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고 자기의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이며 악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하고 악함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를 해치려고 자기 집 뜰에 세웠던 25미터나 되는 높은 나무에 자기 자신이 처형되었던 하만처럼(에 6-7장), 또 아무 흠이나 허물이 없었던 다니엘을 모함하여 사자굴에 던지워 죽게 하려다가 오히려 자신들과 자신들의 처자들이 사자굴에 던지워 죽임당했던 다니엘의 동료 총리들과 방백들처럼(단 6장), 불경건한 악인들의 악한 계획은 자신들만 해롭게 하였다.
    힉가욘(ןוֹי)은 ‘울리게(resounding) 부르라’는 음악적 용어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자. 그의 살아계심과 공의와 심판을 알자. 또 우리는 악인의 종말을 알자. 우리는 악하지 말고 의와 선과 진실만 행하자.
    [17-18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악인’은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부도덕한 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은 악인과 같은 부류로 간주된다. ‘열방’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이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을 알았던 노아의 자손들이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지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부도덕하다.
    그들은 음부로 향해 간다. 성경에서 ‘음부’(쉐올 לוֹא)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지옥은 악인의 영혼의 무덤과 같다. 본절에서는 이 말이 문맥상 지옥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덤’이라는 뜻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악인만 무덤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고 의인도 무덤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지옥을 가리키는 단어는 이 단어뿐이다. 신약성경에서 ‘음부’(하데스 ᾅδης)는 악인의 사후에 형벌의 장소로 밝히 계시되어 있다(눅 16:23- 25). 본 시편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증거하며 그 심판의 결과로 악인들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18절은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그것은 불경건한 악인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이유를 보인다.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는 성도를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당하며 때때로 잊혀진 것 같고 소망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실상 항상 잊혀진 것이 아니며 그의 소망도 영원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고통을 기억하시며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이며, 악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보응으로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악인들의 결말을 깨닫고 결코 악인이 되지 말자. 또 지옥 갈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열심히 전도하자.
    [19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일어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신다는 것은 그가 잠잠히 계시지 않고 일어나 행동하신다는 뜻이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은 악인이 스스로를 높이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를 핍박하면서 끝까지 형통하지는 못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다윗이 그것을 소원한 것은 악인이 대적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께서 악인을 미워하시고 벌하심을 스스로 증거하시기 위해서 또 그로 인해 성도가 보호와 위로를 얻기 위해서이다.
    다윗이 여기에 언급한 ‘인생’은 불경건하게 사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기를 구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요청한 것이다. 불경건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하고 또 경건하고 의롭게 살려는 성도를 핍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그 심판은 인류 역사상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나 무서운 전염병들이나 전쟁 등으로 자주 나타났다.
    [20절]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행하시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들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인생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원어(에노쉬 שׁוֹנ)는 ‘병약한’(아누쉬 שׁוּנאָ) 존재라는 뉘앙스를 가지는 말이다. 지금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해치려 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교만을 버리고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엎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하자. 또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두려워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10편: 악인에 대한 심판을 호소함
    [1-2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窘迫)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지금 큰 환난 가운데 있다. 그는 자신을 ‘가련한 자’라고 표현하면서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핍박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편 9편이나 10편에 여러 번 나오는 ‘가난한’ 혹은 ‘가련한’이라는 원어들(아니 י 혹은 아나우 ו)은 ‘가난한, 가련한, 겸손한, 고난당하는, 핍박당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동의어(同義語)들이다. 이 말은 성도를 묘사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악하고 교만하지만, 성도는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때때로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
    시편 저자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지 않고 멀리 서 계시다고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깊으시고 높으신 뜻 가운데 성도를 환난에 버려두신다(시 22:1, 11, 19; 35:22; 38:21).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은 환난 때에 우리에게 산성이시요 피난처시며 큰 도움이시지만(시 9:9; 46:1), 성도가 하나님의 즉각적 도우심을 경험치 못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악인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호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실 것이다. 그 어렵고 답답한 시간은 그에게 결코 손해나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인 큰 유익과 복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은 그의 믿음을 더 순수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환난 때에 하나님의 즉각적 응답이 없다고 낙심치 말자. 그의 시간표는 우리 것과 다르다. 그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3-4절]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악인이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을 축복함이니이다. 악인은 그 얼굴의 교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나이다”(KJV). 이 본문은 악인으로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시편 저자의 간구의 이유를 나타낸다.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 즉 육신적, 세상적 욕심을 자랑한다. 성경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였다(요일 2:16). 또 악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탐욕자들, 즉 불의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축복한다. 악인은 세상을 사랑하고 또 그런 자들을 사랑한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그의 삶의 목표요 가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한 주인을 선택해야 했으며 우리는 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선택했다. 성도는 그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이다(갈 5:24). 우리 가운데 아직도 돈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신앙의 헛된 건설자일 것이다.
    악인은 또한 교만하며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의 사상 세계에 하나님이 없다. 그는 무신론자이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면 모든 악을 회개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악을 떠날 수 있다.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그러나 교만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악을 버리지 못하며 또 돈 사랑과 쾌락 사랑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자. 육신의 정욕, 재리의 욕망, 교만을 버리자.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뜻만 행하자.
    [5-6절]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악인의 길은 때때로 견고해 보인다. 성경은 그 사실을 여러 곳에서 증거한다. 욥은 악인이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며 형통함을 말하였다(욥 21:7-13). 시편 73편의 저자도 악인이 형통하고 건강하고 평안함을 말하였다(시 73:3-12). 선지자 예레미야도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고 말했다(렘 12:1). 게다가, 하나님의 심판은 높아서 악인의 눈에 미치지 못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악인은 또 모든 대적자를 멸시하고 자신의 평안과 형통을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실패나 고난에 대해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패기와 용기같이 보이지만, 실상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일 뿐이다.
    [7절]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또 악인의 입은 남을 해치는 말들로 충만하다. ‘죄악’이라는 마지막 단어(아웬 ןאָ)는 ‘허탄함’(KJV)이나 ‘사악함’(NASB)이라는 뜻이다. 말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한다. 주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악인은 남을 저주하고 속이고 포학하고 해치고 헛되고 사악한 말을 한다.
    우리는 악인처럼 교만하고 헛되고 악한 말을 하지 말자. 우리는 성도답게 살며 성도답게 오직 경건하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자.
    [8-10절]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본 시편에서 성도는 ‘무죄한 자’ ‘외로운 자’ ‘가련한 자’ ‘가난한 자’ ‘겸손한 자’ 등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악인은 이런 성도를 해치려 한다. 악인의 특징은 우선 은밀하게 해치는 것이다. 그는 한적한 곳에 앉으며 은밀한 곳에서 성도를 엿본다. 그는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은밀한 곳에 엎드린다. 악인이 공공연히 악을 행치 못하고 은밀히 하는 것은 양심 때문일 것이다. 악인이 낮을 두려워하고 공명정대하지 못한 것 자체가 양심의 존재와 활동을 증거한다.
    악인의 특징은 또한 의인을 강포로 죽이는 것이다. ‘강포’라는 원어(아춤 םוּצ)는 ‘강한 수족(手足)’이라는 뜻이다. 악인은 폭력적이다. 그는 성도에게 폭력적이고 그를 잡으며 그를 죽인다. 세상에서 의인들은 핍박과 고난을 당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악인은 또한 무신론적이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사고 때문에 악을 담대히 행한다.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잠언은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말했다(잠 16:6).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라고 말했다.
    우리는 악한 세상 속에서 모든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행하자(암 5:4, 6, 14). 우리는 범사에 정정당당하게 살자.
    [12-15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악인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이 감찰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실상 그의 사상은 무신론적이다(4절).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의 잔해와 괴롭힘을 다 보셨고 감찰하셨다. ‘원한’이라는 원어(카아스 ס)는 ‘괴롭힘, 분노’ 등의 뜻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무시한다고 무시를 당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오히려 모든 일을 다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며 그 손으로 악인의 악행에 대해 갚으려 하신다.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근본 진리이다.
    또 하나님은 악인을 징벌하심으로 성도를 도우시고 돌보신다. 본문은 그가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라고 말한다. 신명기 10:18은 그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며 시편 68:5는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경외하며 의롭고 선하게 사는 성도, 이 세상에서 악한 자 때문에 핍박을 당하여 외롭고 가련하기까지 한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본 시편을 쓴 성도는 그러므로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또 그의 기도는 그 믿음의 자연스런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고 손을 드시고 가난한 자를 잊지 마시기를 구했고 또 악인에게 합당한 징벌을 내리시기를 구했던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자. 그의 살아계심과 그의 공의와 긍휼을 알자. 또 우리도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소원을 간절히 아뢰자.
    [16-18절]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다. 옛 시대에 왕은 한 나라의 통치자일 뿐 아니라 또한 심판자이었다. 하나님은 일시적인 왕이나 심판자가 아니고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다.
    그는 성도의 호소를 들으신다. 17절에 보면, 그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다. 여기에 ‘겸손한 자’라는 원어(아나임 םי)는 ‘가난한 자’와 같은 말로 ‘가난한 자,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이며 성도 자신을 가리킨다. 물론 그의 소원은 믿음의 소원, 겸손한 소원, 선한 소원일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성도의 간구를 들으셨다.
    또 그는 성도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어떻게 준비시키시는가? 악을 버리고 의와 선에 굳게 서도록 준비시키신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또 그는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원고의 호소를 듣고 그 문제를 공의로 판결하듯이,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소원과 호소를 들으신다.
    그 심판의 결과,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이방인들은 그의 땅 곧 유다 땅, 아니 장차 이 세상으로부터 멸망을 당할 것이다(16절). 악인은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성밖에 있을 것이다(계 21:27; 22:15). 또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성도를 위해 심판하셔서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다. 그는 우리의 소원과 호소를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바르고 선하게 살자.
    11편: 하나님께서 인생을 감찰하심
    [1-2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시편 저자 다윗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도망하라고 권면하였다.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표현은 새가 사냥군을 피하여 산 속으로 날아 숨듯이 도망하라는 말이다. ‘네 산’은 ‘네가 피신할 곳’이라는 말로서 인간적, 세상적 피신처를 의미한다.
    2절은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믿음 없는 친구들이 그에게 도망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이며 그를 쏘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도는 ‘마음이 바른 자’로 표현된다. 그는 이성과 양심을 따라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게, 악인은 그런 성도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한다. ‘어두운 데서 쏜다’는 말은 은밀히 해치려 한다는 뜻이다. 악인은 솔직하거나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거짓되며 이중적이다. 그것이 악인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 다윗은 어떻게 처신했는가? 그는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고백한다. 다윗은 역경 중에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다. 이것이 참 믿음이며 정상적 믿음이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당황하거나 두려워 떨거나 낙심하는 것은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피하며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시편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또 악인은 거짓되고 이중적일지라도 우리는 항상 정정당당하며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하자.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터’(foundations)는 기본적 원리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들, 즉 우리의 신앙 사상이 되는 교리들과 생활 원리가 되는 윤리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초이며 또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초이다. 실상 하나님은 우리의 터이시다.
    건물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건물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기본적 원리들이 부정되거나 무시된다면, 거기에 어떤 기독교적 삶이 가능하겠는가. 기독교의 기본적 원리들이 부정된다면, 거기에 참된 기독교는 없을 것이며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헛될 것이다. 거기에는 신앙의 정조와 절개를 지키는 보수 신앙과 의롭고 선하게 사는 도덕적 삶이 무의미하며 무가치할 것이다.
    때때로 세상이 악화되어 사상적, 윤리적 기본이 흔들리는 시대가 있고 심지어 교회도 부도덕하고 배교적이게 되는 때가 있다. 세상이 심히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교회들도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고 왜곡시키며 심지어 낙태와 동성애 등의 악을 포용하는 오늘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터는 견고하다.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시편 102:27,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말라기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히브리서 13:8-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의롭고 선하게 살 이유가 있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기본이 흔들리는 세상과 교계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하고 끝까지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자.
    [4절]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생존하시기 때문에 성도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기초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신다. 그는 무한하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시지만 특히 천국에 계시며 또 옛시대에 성막이나 예루살렘성전에서도 구름으로 그의 계심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는 오늘날에는 성도들의 회 즉 교회 가운데 성령으로 항상 계신다(고전 3:16).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 영광의 보좌를 하늘 즉 천국에 두셨다. 그의 보좌는 통치하시는 왕의 보좌이며 심판하시는 재판장의 보좌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심히 거룩하고 위엄이 있다. 그는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의인과 악인을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오늘날 성령으로 교회 가운데 계신 그는 모든 사람을 살피신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밝으시다. 하나님의 시력은 2.0 정도가 아니시고 200.0도 더 되신다. 그의 시력은 완전하다. 그 시력은 약해지거나 쇠하여지지 않는다. 또 그는 우리의 삶을 감찰하신다. ‘안목’이라는 원어(아프아프 ף)는 ‘속눈썹, 눈꺼풀’이라는 뜻이며 ‘감찰한다’는 원어(바칸 ן)는 ‘시험한다,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는 사람의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감정과 뜻까지도 다 아시고 그의 선함과 진실함을 시험하시고 판단하신다. 시편 139:1-4, 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성도의 신앙생활의 터가 되신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며 우리를 살피시고 심판하신다. 우리는 그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앞에 바르게 살자.
    [5절]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신다. ‘감찰한다’는 원어는 ‘시험한다, 증명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의인의 중심을 시험하시며 그가 과연 진실한 신앙고백자인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지하는지, 혹시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인 자가 아닌지 증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사랑하는 의인을 인정하시지만, 교만하고 강포한 악인을 미워하신다. 이것이 그의 도덕적 판단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분명하고 정확하다. 세상 사람은 악인을 칭찬하고 그를 친근히 할지 몰라도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항상 명확하다. 하나님은 악인을 미워하신다.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신다. 그것은 악인이 받을 징벌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약삭빠른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내려치시는 그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그물은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으로 묘사된다. 그것들이 악인의 소득이다.
    불과 유황은 맹렬한 불의 형벌을 가리킨다. 유황은 화약과 성냥의 원료로서 불이 아주 잘 타는 물질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음란했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고(창 19:24) 최종적 지옥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묘사되어 있다(계 21:8). 또 태우는 바람은 무서운 환난과 재앙의 바람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들에게 내리실 형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증거되고 의인의 억울한 고난이 보상되며 마침내 세상의 도덕 질서가 확립될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시고 증명하시고 악인을 미워하시고 무서운 재앙으로 징벌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버리고 의롭게만 살자.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원문에서 본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의 이유, 즉 의인을 시험하여 인정하시고 악인의 악을 판단하시고 징벌하시는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義)는 도덕적 표준에 일치함, 즉 도덕적 완전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실상, 그 자신이 도덕적 표준이시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악한 일을 미워하시는 것은 그의 도덕적 속성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 하나님은 의와 선을 좋아하시며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시고 명령하신다.
    옛날 영어번역이 본절 후반부를 “그의 얼굴이 정직을 보심이니이다”라고 번역하나, 히브리어 본문에 첨가된 엑센트들에 의하면, 정통 유대인 학자들은 이 구절을 우리 본문처럼 읽은 것 같다. 또 근래의 영어성경들도 우리 번역과 같다(NASB, NIV).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시편 42:5,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민수기 6:25-26,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의 얼굴, 평강의 얼굴, 능력의 얼굴이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그 얼굴을 가리우시지만, 의인에게는 그 얼굴을 보이셔서 은혜와 평강과 능력을 내려주신다. 또 의인들은 천국에서 실제로 또 영원히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12편: 안전 지대에 두심
    [1-2절]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성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성도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할 수 있고 그의 응답함을 체험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까닭은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경건하고 충실한 자가 하나씩, 둘씩 없어져 가는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고 또 그런 현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이게 보인다.
    또 사람들은 서로 거짓말을 하며 아첨의 말을 하고 또 두 마음으로 말한다. 그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면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남의 비위를 맞추는데 능숙하고 또 속과 겉이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자를 매우 미워하시며(잠 6:19) 아첨의 말은 사람을 멸망시킬 것이다(잠 26:28). 그래서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했다(엡 4:25).
    이런 현실에서 참 성도가 어떻게 즐거이 신앙과 경건, 정직과 충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신앙과 정직을 지키며 또 고난을 각오함이 없이 진리를 전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때 성도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렵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또 오직 경건과 선함과 진실함으로 말하며 행하자.
    [3-4절]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사람의 거짓과 교만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거나 재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자기를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죄악되고 병든 인생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실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거짓된 아첨의 말이나 자랑의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한 공의로 사람들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말 한마디까지도 공의로 갚으실 것이다.
    [5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성도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눌림을 당하고 탄식하므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 가련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은 정한 때에 일어나셔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실 것이다.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는 구절에서 ‘그 원하는’이라는 원문(야피아크 로 וֹל י)은 (1) ‘그가 그에게 입김을 뿜는다’는 뜻이거나 (2) ‘그가 그것을 열망한다’는 뜻이다. 첫 번째 경우라면, 어떤 영어성경처럼(KJV나 NIV가 비슷함) “그에게 거칠게 말하는 자로부터 그를 안전 지대에 두리라”는 뜻이며, 두 번째 경우라면, 한글 번역처럼 “그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는 뜻일 것이다(NASB). 안전 지대는 더 이상 원수의 핍박이 없고 싸움과 위협이 없고 오직 평안함만 있는 곳을 가리킨다.
    우리는 아첨의 말에 감동받지도 말고 자랑의 말에 위축되지도 말자. 하나님은 아첨의 입술과 자랑의 혀를 끊으시고 성도를 건져내셔서 안전지대에 두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선하고 덕스럽고 진실한 말만 하자.
    [6-8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이 세상은 매우 악하다. 악인들은 곳곳에서 활보하고 있고 비루함, 저질스럽고 무가치한 일이 인생 중에 높아지고 있다. 주께서는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다(마 12:39).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했고(롬 12:2) 또 참된 경건은 우리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약 1:27).
    악인들의 말은 악하고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순결한 은같이 불순물, 즉 불결함이나 거짓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여(시 19:7-8)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만하다. 5절에서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지켜질 것이다.
    그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이 악한 세대에서 성도를 지키시고 보존하실 것이다. 그는 예전에 경건한 롯을 심히 음란한 소돔 성으로부터 구원하셨다. 베드로후서 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는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믿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순결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거룩하고 선한 길을 걷자.
    13편: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
    [1-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원수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마음에 근심하고 그의 원수는 그를 대항하여 자긍하며 의기양양해 하였다. ‘종일토록’이라는 원어(요맘 םוֹי)를 어떤 영어성경들은 ‘날마다’라고 번역했다(KJV, NIV). 그의 마음의 근심과 고통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점점 커져갔을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를 잊으신 것 같았고 그 얼굴을 숨기신 것 같았다. 그는 다윗을 돕지도 않으셨고 악인을 징벌하지도 않으셨으며 다윗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원문에 보면 다윗은 1절에서 2번, 2절에서 2번, 도합 4번이나 아드 아나(האָ־ד)라고 부르짖는다. 우리 말 성경은 3번은 “어느 때까지”라고 번역했고 1번은 “언제까지”라고 했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고 그의 마음의 고통도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높으신 뜻, 깊으신 뜻,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뜻, 완전하신 뜻 가운데 어느 기간 동안 다윗을 그렇게 버려두셨다.
    그러나 성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여” 하며 부르짖었다. 우리에게는 부르짖으며 기도할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그의 정하신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 동안 우리를 고통 중에 버려두신다고 낙심치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정하신 때를 믿고 계속 기도하자.
    [3-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고난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기도하였다. 첫째로, 그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생각한다’는 원어(나바트 ט)는 ‘본다, 주시한다, 중시한다(regard)’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배려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큰 행복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소돔에서 건지셨다(창 19:29). 또 그는 라헬을 생각하셔서 요셉을 잉태케 하셨고(창 30:22), 한나를 생각하셔서 사무엘을 잉태케 하셨다(삼상 1:19).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 안에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
    둘째로, 다윗은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눈을 밝힌다’는 것은 낙망키 쉬운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며 자신이 처신할 바를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판단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부족이 있으면 철저히 반성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고난의 현실 중에서 사람이 눈이 어두우면 길을 잃고 방황하며 믿음 없이 행하고 말과 행위에 실수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목적을 표현하였다. 그는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낙심은 사람을 불신앙에 떨어지게 만들고 불신앙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불신앙은 영적으로 잠자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잠이다. 또 그는 그의 원수가 그를 이기었다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기뻐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성도가 의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손이 피곤해지면 대적자들이 기뻐할 것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낙망하지 말고 우리를 생각하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탁하면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간구하자.
    [5-6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였다.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그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인 사람이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특히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면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 그의 인자하신 품에 안겨야 할 것이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그를 후대하심을 확신하고 있다. 지금은 원수들이 그를 핍박하고 대적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고 그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의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이런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겠다고 고백한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후대하심은 그의 기쁨의 이유이며 찬송의 이유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기쁨과 찬송의 이유이다.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도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의지하며 그의 구원과 후대하심을 확신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항상 기뻐하고 찬송하자.
    14편: 어리석고 부패된 인생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부정하는 것이 큰 무지요 어리석음이듯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도 똑같다.
    또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는 행위가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사람은 죄악되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는 악을 떠나지 못한다.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는 죄악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는 참된 선행을 찾아볼 수 없다. 세상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의 선행은 결함이 있고 환경에 따라 변하며 자기 자랑을 동반하고 심지어 위선적이다.
    [2-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보시니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고 다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신 것이니 확실한 사실이다. 세상의 종교들은 우상숭배적이고 고행과 금욕을 가르치나 참된 의와 선을 이루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이 아니고서는 참 경건과 도덕성을 가질 수 없다.
    성경의 교훈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참된 회개와 믿음 가운데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
    [4-6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4절은 영어성경들처럼 “죄악을 행하는 자 곧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며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그들은 다 알지 못하느뇨?”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또 6절은 옛날 영어성경처럼 “너희는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도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피난처가 되심이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서 일반적인 번역이다.
    4-6절에 나타난 죄인들의 모습은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쉽게 핍박하고, 둘째로 그들이 여호와를 부르지 않으며, 셋째로 그들이 가난한 자 즉 고난당하는 성도의 경영을 부끄럽게 한다. 앞에서도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행위가 부패하고 더러우며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러면 그들은 다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윗은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라고 말한다. ‘거기’는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장소를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그 곳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다윗을 계속 죽이려 했던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심을 보고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성경은 증거한다(삼상 18:12, 28-29).
    끝으로,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에 대해서도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의인들과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고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도우신다. 둘째로, 하나님은 성도의 피난처가 되신다. 이것은 성도의 특권이며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세상에는 성도를 핍박하는 악인들이 많지만, 우리는 의인과 함께하시며 성도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만 행하자.
    [7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소원하였다. 이것은 경건한 자들의 소원인 동시에 예언적 간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온에 보내주셨다. 다윗의 예언적 간구는 성취되었다. 동일한 예언이 이사야 2:2 이하에도 나온다.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구원은 시온 즉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었다(눅 24:47).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것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원수의 핍박 아래 있던 처지에서 건져내심을 받는 것을 뜻할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뜻도 있을 것이다. 또 영적으로 말해, 죄와 사탄과 불행과 사망에 포로된 인생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마 1:21).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 중에 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사실상, 죄와 사탄과 불행과 사망으로부터의 구원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며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고(눅 10:20),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했다(살전 5:16, 18).
    시온에서 나온 주 예수의 복음이 우리의 영육의 구원이 됨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항상 기뻐하며 살자.
    15편: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
    [1-2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은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가 살 수 없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하는 자들만 들어가 살 수 있다. 천국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자는 어떤 자인가?
    첫째로, 정직하게 사는 자이다. ‘정직하게’라는 원어(타밈 םי)는 ‘완전하게, 흠 없게’라는 뜻이다.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타밈)라.” 욥기 1:1, “그 사람[욥]은 순전하고(탐)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완전함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뜻에 일치하게 사는 것,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도의 성화(聖化)의 목표이다.
    둘째로, 의를 행하는 자이다. 의는 표준에 일치하는 것이다. 도덕적 표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인간의 양심이나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뜻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양심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훈대로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이다. 사람의 주관과 편견이나 이권(利權)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객관적 원리와 원칙, 즉 성경 교훈대로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이다.
    셋째로, 그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진실은 사실 그대로를 가리킨다.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행동 원리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쟁이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계 22:15). 성도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든지 해가 되든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완전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말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본문은 천국 백성의 자격에 대해 또 세 가지를 더 말한다. 첫째는, 그 혀로 참소치 않는 자이다. ‘참소한다’는 원어(라갈 ל)는 ‘돌아다니며 거짓말로 다른 이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뜻이다. 그것을 ‘중상(中傷)’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웃에 대해 거짓말하고 그를 해치는 행동이다. 느헤미야의 원수들은 그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한다는 거짓말로 그를 비난하였다(느 6:6). 거짓말로 다른 이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둘째는, 그 벗에게 악을 행치 않는 자이다. 악은 남을 해치는 행동을 가리킨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들에서 쳐죽인 일은 악한 일이었다(창 4:8).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종으로 판 것은 악한 일이었다(창 37장). 가룟 유다가 주님을 은 30개에 팔아 넘긴 것은 악한 일이었다. 거짓된 비방, 명예훼손, 사기, 도적질, 인신 매매, 폭력, 살인, 강간 등이 다 천국에 합당치 않은 악한 일들이다.
    셋째는, 그 이웃을 훼방치 않는 자이다. 훼방은 남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이웃에 대한 말은 정당한 것이라도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꼭 필요한 경우란, 재판 석상에서 증언하는 것이나, 남의 거짓된 비난에 대해 부득이 해명하는 것이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 등이다. 바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후메내오와 빌레도, 부겔로와 허모게네, 구리장색 알렉산더 등을 언급하였고(딤전 1:20; 딤후 1:15; 2:17; 4:14),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언급하였다(요삼 9). 그러나 우리는 보통 남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마태복음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면, 우리는 거짓말로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말아야 하고 남에게 악을 행치 말아야 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4절]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본문은 천국 백성의 자격에 대해 또 세 가지를 더 말한다. 첫째는, 그의 눈에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이다. ‘망령된’이라는 원어(니브제 ה)는 ‘비열한, 경멸할 만한’이라는 뜻이다. 그는 비열한 자를 칭찬하거나 높이지 않고 멸시한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곧 경건은 모든 도덕의 원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요(잠 8:13),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첫 번째 요소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적 부귀 영광을 일시적으로 누렸던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보다, 가난하지만 경건했던 엘리야가 확실히 더 존귀하고 가치 있는 자이었다.
    셋째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맹세도 지키는 자이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며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신의 맹세를 지킬 것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사사 시대에 입다의 귀한 점은 그가 자기에게 해로운 서원을 이행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무남독녀(無男獨女)인 딸을 서원대로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삿 11장).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면, 우리는 악한 사람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중하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맹세도 지켜야 한다.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본문은 천국 백성의 자격에 대해 또 두 가지를 더 말한다. 첫째는, 이자 혹은 높은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는 자이다. ‘변리’라는 원어(네쉐크 )는 ‘이자, 고리대금’이라는 뜻이 있다(BDB). 성경은 세속 사회에서의 대금업 혹은 은행업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만(마 25:27; 눅 19:23), 성도 간에는 고리대금(高利貸金)을 하거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한다(출 22:25; 레 25:35-37).
    둘째는,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 자이다. 은 30개에 주를 배신한 가룟 유다처럼, 세상적 탐욕과 물질욕이 있는 자는 불의의 이익을 취하고 악을 행할 것이지만, 성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장로나 집사의 자격으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것’을 꼽았다(딤전 3:3, 8; 딛 1:7). 성도는 물질에 있어서 깨끗해야 한다. 돈은 정당하게 벌어서 선하게 써야 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결론적으로,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의 구원은 그의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로 확증된다. ‘영영히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믿음이 흔들리거나 실족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드로후서 1:10-11,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오직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16편: 하나님은 나의 기업
    [1-2절]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며 그의 보호하심을 구한다. 세상은 낮에는 뙤약볕이 있고 밤에는 추위가 있으며 사나운 짐승이나 강도의 위험이 있는 광야와 같다. 세상에는 성도를 범죄케 하는 마귀의 시험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에서 피할 곳을 가진 자, 보호자를 가진 자이다. 하나님은 그의 보호자요 그의 피난처시다. 이것은 성도에게 가장 큰 복이며 그에게 평안과 기쁨의 이유이다.
    2절은 원문에 “네가 여호와께 아뢰되”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다윗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KJV). 다윗은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고백한다(NASB, NIV). 이 번역이 옳은 것 같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마다 하나님만 복으로 삼을 것이다.
    하나님을 유일한 복으로 삼는 자는 땅의 것을 탐하지 않을 것이다.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는 욥기의 말씀(욥 22:24-25)은 옳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고(갈 6:14), 또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였다(빌 3:7-8). 과연 세상의 모든 것,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다 헛되며(전도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그의 말씀도 영원할 것이다(벧전 1:24-25). 영원하신 하나님이 성도의 유일한 복이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유일한 복으로 깨닫자.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요 보호자이심도 깨닫자.
    [3-4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땅에 있는 성도가 존귀한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느 제왕의 왕자나 공주보다 더 존귀하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했다(벧전 2:9).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이다.
    다윗은 그들에게 그의 모든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오는 즐거움, 즉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이다. 주의 종들에게는 이런 기쁨이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고(빌 4:1), 데살로니가 교회에게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했다(살전 2:20). 사도 요한도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썼다(요삼 3-4).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과 대조하여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에게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창조주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은 다 헛것이다(시 96:5; 렘 10:11).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헛수고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평강 대신에 많은 괴로움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처럼 그런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며 이방신의 이름도 미워한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주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가 얼마나 존귀한 무리인지를 깨닫고 성도들을 사랑하자. 또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되자.
    [5-6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기업과 잔의 분량이시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론의 자손들의 분깃이요 기업이라고 말씀하셨다(민 18:20). 시편 다른 곳도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라고 말하였다(시 73:26; 119:57). 땅에 있는 물질적인, 육신적인 것은 지금 있다가 장차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은 성도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기업이시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잔으로 삼았다. 잔은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이다. 즉 다윗은 육신적, 세상적 즐거움보다 하나님을 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영원한 기업이요 만복의 근원으로 바로 아는 자는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과 잔의 분량이시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분깃을 지키신다고 말한다. ‘분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복, 현세적이고 내세적인 복,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복을 포함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복을 지켜주신다. 아무리 좋은 복이라도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하면 계속 복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복을 지켜주시면, 우리는 영원히 복된 자가 될 것이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정하시고 주신 구역, 즉 현재 그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복이 실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아름답다. 하나님이 주시는 정신적, 육신적 복은 참으로 아름답다. 특히 장차 성도가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 또 성도가 누릴 영광스런 몸의 부활과 영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기업과 잔의 분량, 우리의 소망과 기쁨으로 삼자. 또 그가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복을 친히 지켜주심을 알자.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하나님은 교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사람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잘못 행할 때도 많고 알면서도 연약하여 넘어질 때도 있기 때문에 교훈이 필요하다. 친구의 조언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하나님의 교훈은 크게 유익하다. 그는 우리의 문제와 연약한 점들을 아주 잘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교훈의 책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다윗은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세상에는 교훈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교훈을 감사히 받았고 교훈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자 한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한 큰 죄를 지은 후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를 지적하고 그를 책망했을 때 즉시 회개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훈을 겸손히 받고 그 교훈을 감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훈은 사람에게 생명과 평안의 길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의 심장이 밤마다 그를 교훈한다고 말한다. ‘밤마다’라는 원어(아프 렐로스 תוֹלי־ףאַ)는 ‘심지어 밤에도’라는 뜻이다. ‘심장’이라는 원어(킬야 ה)는 ‘사람의 내장, 속, 마음’을 가리킨다. ‘교훈한다’는 원어(야사르 ר)는 ‘책망한다’는 뜻이다. “그의 심장이 밤마다 그를 교훈한다”는 말은 낮에 진지하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속에 간직되어 밤에도 그를 교훈한다는 뜻일 것이다. 잘 박힌 못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밤마다 침상을 교실 삼아 그를 교훈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고 감사하자. 또 그 교훈을 따라 행하며 부족한 점을 고치므로 온전한 자가 되자.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항상 그 앞에 모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높이며 경배하며 그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며 그에게 기도하는 삶이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고 그의 도움을 구하지만, 평안하고 건강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없이 불경건하게 살기 쉽다. 그러나 경건한 자는 어려울 때도 평안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 다윗은 어린 목동 시절에도, 또 왕이 된 후에도 경건하게 살았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다. 요셉은 종살이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겼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편에 계시다고 표현한다. 오른편은 힘이 있는 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편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이 되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힘이 되셨다는 뜻이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앙망만 해도 힘이 되는데,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살면 얼마나 더 힘이 되겠는가!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오른편에 계시므로 요동치 않는다고 고백한다. ‘요동치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어 불안하거나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경건하게 사는 자는 하나님께 힘을 얻어 환난 중에서도 평안함을 얻고 담대하며 낙심치 않는다. 그는 엄마 품에 안겨 평안히 잠자는 어린아기와 같다. 풍랑 중에 당황했던 제자들은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들었으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우리 앞에 모시고 삶으로써 평안과 힘을 잃지 말고 든든히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자.
    [9절]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삶으로 심령에 요동함이 없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다윗은 이러므로 그의 마음이 기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신 성도의 마음은 기쁘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기쁨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곧 기쁨]”이다(갈 5:22). 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기쁨)이다”(롬 14:1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6-18). 하나님 안에 참 기쁨이 있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마다 참 기쁨을 맛볼 것이다.
    다윗은 또 “내 영광도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내 영광’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있어서 참된 존귀와 영광이 되는 부분인 사람의 속사람 즉 그의 영혼을 가리킨다. 그것은 결국 ‘내 마음이 기뻐한다’는 구절과 같은 뜻이다. 사도행전 2:26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내 입술(혹은 혀)도 즐거워하였으며”라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 헬라어역인 70인역을 따른 것이다.
    다윗은 또 그의 육체도 안전히 거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영혼의 기쁨뿐 아니라 육체의 평안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영육의 복을 주신다. 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성막 제도뿐 아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고 발이 부릍지 않고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신 8:3-4). 시편 23:2, 4,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우리 앞에 모시고 삶으로 마음의 기쁨과 영혼의 즐거움과 육신의 평안을 누리자. 경건한 삶은 영육에 복이 된다.
    [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본절은 앞에서 말한 영육의 기쁨과 평안의 이유를 다시 보충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한다. ‘음부’라는 원어(쉐올 לוֹא)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것은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므로 ‘지옥’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지옥에 던지운다면, 살아 있을 때 그의 기쁨과 즐거움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슬피 울며 통곡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기뻐한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므로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의 거룩한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다윗은 죽었고 그의 몸은 썩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다윗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메시아의 부활을 예언하고 소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예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죽은 지 3일 만에 몸이 썩지 않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 사도행전 2:29-32에 보면, 베드로는 증거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첫열매로서(고전 15:20) 성도의 소망이며 기쁨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셨고 우리의 몸도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자.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그에게 보이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고(창 1:21, 24),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산 자가 되게 하셨다(창 2:7). 그는 “모든 육체의 생명[영]의 하나님”이시다(민 16:22; 27:16). 생명의 원천은 그에게 있다(시 36:9). 사람이 그에게 범죄함으로 죽게 되었으나 그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다시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생명의 길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요 3:16).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시다(요 6:48). 그가 오신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10:10).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26).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쁨이 충만하고 그의 오른편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또한 기쁨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시며 성도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앞에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눈물과 죽음과 아픈 것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계 21:4).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느 정도가 아니고 충만하며,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영생을 누리며 확신하자. 또 그 안에서 영원하고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자.
    17편: 정직한 부르짖음
    [1절]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운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소원한다. ‘정직함’이라는 원어(체데크 ק)는 ‘의로움’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한 것이다. 성도는 악을 위해 무엇을 간구할 수 없고 의로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우리가 악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지만, 우리가 의롭고 정직하게 행한다면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기를 구한다. ‘부르짖음’이라는 원어(린나 ה)는 ‘애통하며 부르짖음’이라는 뜻이 있다. 믿음 없는 기도는 형식적이지만, 믿음의 기도는 간절하고 진지하다. 특히 고난 중에서 믿음의 성도는 부르짖는 간구를 올린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수께서는 끈질기게 강청하는 기도, 낙망치 않고 부르짖는 기도를 하라고 교훈하셨다(눅 11:5-8; 18:1-8).
    다윗은 또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말한다. 원문은 “거짓된 입술에서 나오지 않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되어 있다. 뜻은 한가지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거짓된 입술을 물리치시고 진실한 기도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정직한 기도, 간절한 기도, 그리고 진실한 기도를 올리자.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다.
    [2-3절]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려고 애썼다. 1절에서도 그는 ‘자신의 정직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였었다. 본문에서 ‘공평함’이라는 원어(메솨림 םיי)는 ‘올바른 일들’ 혹은 ‘올바르게’라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옳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3절에서도 그는, 다시 번역하면,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고 밤에 나를 권고하셨고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시니 내가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라 결심하였나이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잘못 행함이 없었다는 자신의 확신을 나타내며 말로라도 범죄치 않겠다고 결심했던 자신의 결심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현실은 어두웠다. 그는 원수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9절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자 애썼고 상당히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성도 다윗에게 고난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악함 때문에, 또는 사탄의 시험으로, 또는 하나님께서 선한 뜻 가운데 성도를 단련시키시기 위해 일어나는 고난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통의 현실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호소하였다.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소서” 혹은 “나의 판단이 주의 앞에서 나오게 하소서.” ‘나의 판단’이라는 말은 ‘나에 대한 판단, 나의 사건에 대한 판단’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자 애쓴 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담대한 호소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의 호소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자. 그러나 고난이 있을 것을 알고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을 구하자.
    [4-5절]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성도에게 행위는 중요하다. 4절의 ‘행사’(페울로스 תוֹלּ)는 ‘행위들’이라는 말이며, 5절의 ‘나의 걸음’도 ‘나의 행위’을 가리킨다. 성도에게 믿음과 사상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한 행위와 삶도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고(눅 6:46),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4:12).
    다윗은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라고 말한다. 성도의 행위의 표준은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명하신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신 10:12-13). 성경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이다(딤후 3:16). 그 교훈의 주요 내용은 강포한 자의 길을 버리고 주의 마음을 본받고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따라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살라는 것이다.
    5절은, “나로 실족치 않도록 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붙드소서”라고 고쳐 번역할 수 있다(KJV, MT, LXX). ‘굳게 지킨다’는 원어(타모크 )는 ‘붙든다’는 말의 부정사(절대형)로 기원의 뜻을 가진 명령법으로 잘 이해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았고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하나님의 길, 곧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생활 방식을 지키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강포를 버리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살아가며 또 실족치 않도록 항상 우리의 걸음을 하나님께 의탁하자.
    [6절]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 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자이심을 믿었다.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므로 응답하실 수 있기 때문이요 긍휼이 많으시므로 고통 중에 부르짖음을 돌아보시기 때문이요 전능하시므로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도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 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믿음의 선진들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모세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사무엘도, 다윗도 그러했다. 히스기야,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는 다 기도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고 땀 흘리며 기도하셨다. 성경은 성도의 기도에 대해 많이 증거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응답을 기다렸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 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기도 응답은 때때로 더딘 것같이 보이지만 우리는 낙심치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는 기도하며 낙망치 말라고 교훈하셨고(눅 18:1),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했다(약 1:6). 시편 40:1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마다 믿음으로 기도하며 낙심치 말고 그의 응답하심을 기다리자.
    [7절]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본문은 성도를 주께 피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피하다’는 원어(카사 ה)는 ‘피하다, 의지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환난 중에 하나님의 품 안에 피하며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시편에는 자주 이 단어가 나온다. 시편 5:11,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시편 7: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시편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시편 16:1,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본문은 하나님을,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자’로 표현한다. 세상에는 성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이 드러날 때 성도들을 시기하고 미워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고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신다. 오른손은 능력의 손이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23:4-5).
    다윗은 그 구원의 하나님께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라고 기도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의 손길이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신다. ‘주의 기이한 인자’는 사람의 생각과 예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과 간섭하심을 가리킨다. 성경의 많은 인물이 그런 응답을 체험하였다. 애굽에 우거했던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바벨론에 살았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러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우리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피하며 그의 기이한 인자를 간구하자.
    [8-9절]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윗에게는 그를 압제하는 악인들, 그를 에워싼 극한 원수들이 있었다. 성도에게 가장 악한 원수는 사탄이며 그 밖에도 많은 악한 원수들이 있다. 예수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러했고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그의 제자 가룟 유다가 그러했다. 원수들은 때때로 성도를 에워싸고 공격한다. 다윗은 시편 3:6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고 말했다.
    다윗은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기를 구한다. 신명기 32:1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눈동자는 사람의 몸의 지체 중에서 매우 민감하게 지키는 부분이다. 눈꺼풀은 자동셔터문이고 눈썹은 보초병이며 눈물샘은 자동세척장치이다. 사람이 자기 눈동자를 이처럼 보호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얼마나 더 잘 보호하실 것인가. 그는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성을 포위한 아람 군사들보다 더 강한 불말과 불병거 탄 천사들로 그의 종을 눈동자같이 보호하셨다(왕하 6:17).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날개 그늘 아래 그를 감추시기를 간구하였다. 시편에는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온다. 시편 36:7,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시편 57:1, “[내 영혼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편 91:1, 4,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어미새의 ‘날개 그늘’은 새끼들에게는 가장 평안하고 안전한 장소이다. 하나님의 날개는 그 어떤 어미새의 날개보다 더 평안하고 안전하다.
    우리는 사탄과 악한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그의 날개 아래 품으심을 알고 그만 의지하자.
    [10절]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성도를 핍박하는 악인은 어떤 자인가? 첫째로, 악인은 자기 기름에 잠긴 자, 즉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참으로 깨닫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자이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깨닫는 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말했다(창 18:27). 주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3), 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라고 하셨다(눅 17:10).
    둘째로, 악인은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는 자이다. 악인은 자기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랑하는 말을 잘 한다.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사람의 교만한 마음은 그의 눈과 얼굴 표정에서 나타나며 특히 그의 말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다. 주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성도는 주 예수의 마음을 본받는 자이다(마 11:29).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
    [11-12절]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셋째로, 악인은 성도를 해치려 하는 자이다. 그는 성도의 걸음을 에워싸며 눈을 땅을 향하게 한다. 11절 후반은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그들의 눈을 땅을 향하게 하나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은 성도를 해하려는 악인들의 음흉한 표정을 묘사한 것 같다. 또 그들은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다. 마귀는 사자같이 성도를 삼키려 한다(벧전 5:8). 그러나 성도는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운다.
    우리는 자기 만족이나 교만에 빠지지 말고 항상 자신의 부족을 알고 겸손하자. 또 남을 해치려 하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우자.
    [13-14절]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앞절들에서 다윗은 악인들은 자기 만족에 빠져 있고 교만한 말을 하며 성도를 은밀히 해하려 한다고 말했다. 본문 14절에서 그는 또한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번영함을 누린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며, 주께서는 주의 재물로 그들의 배를 채우시며, 그들은 자녀들이 많으며,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물려준다. 14절의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라는 구절의 원어는 “당신께서 당신의 재물로 그들의 배를 채우시며”이다. 악인이 누리는 물질적 복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한다. “여호와여 일어나 . . .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잠잠하신 동안, 그가 마치 주무시는 것 같은 동안, 악인들은 자기들 세상인 양 활개를 치지만,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상황은 즉시 바뀔 것이다. 대동아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때에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 몇 개가 무조건 항복을 가져오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다윗의 대적자들은 하루 아침에 항복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원자폭탄보다 더 크시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악인들을 치시고 멸하실 것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소서”라는 원문의 뜻은 “저를 대면하여 굴복시키소서”이다. 하나님의 칼은 지극히 날카로우시며 그의 손은 지극히 날렵하시다.
    우리는 악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의 외적 번영을 부러워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늘 의지하며 항상 바르게 살자.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의로운 삶을 힘쓰고 있음을 고백한다. 다윗의 원수들은 그에게 악을 행했지만, 그는 본 시편 초두에 말한 대로 정직하게, 올바르게, 진실하게 살아왔고, 또 본절의 고백대로 의로운 삶을 힘쓰고 있고 끝까지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의가 없이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뿐이지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안에서 실제로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로마서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또 다윗은 성도에게 깰 때가 있음을 증거한다. 깬다는 말은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든지, 아니면 마지막 몸의 부활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에게 죽음이 끝이라면 아무 소망이 없을 것이지만, 죽음 너머의 복된 삶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곁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회개하고 주를 의지하였는데, 그 때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회개한 그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끝나는 순간 천국에서 깰 것이다. 또 사람의 죽은 몸도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그 형상으로 만족하리라고 고백한다. 주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8). 요한계시록 22:4는 장차 새 예루살렘 곧 천국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이며 만족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항상 의를 행하며 죽음 너머의 세계를 확신하자. 또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알자.
    18편: 나의 힘과 구원이신 하나님
    [1-3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불렀다. 세상의 현실 속에서 때때로 피곤하고 힘이 빠지며, 특히 고난과 핍박의 현실 속에서 그러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힘이 되셨다. 오늘날도 악한 세상과 마귀의 도전과 핍박 속에서 자주 피곤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신다. 건강이나 돈이나 세상 권력은 일시적이며 변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불변하는 힘이 되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여러 비유의 말로 표현한다. ‘반석’이라는 원어(셀라 ע)는 ‘울퉁불퉁한 바위나 절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적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바위이다. ‘바위’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방어하심을 말한다. ‘요새’는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을 가리키고, ‘산성’이라는 원어(미스가브 ב)는 ‘안전하게 높은 곳’을 가리킨다.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환난과 핍박을 피하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지켜주시고 그것을 막아주시고 그것으로부터 건져주신다.
    다윗은 피난처와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찬송하며 그에게 간구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마다 그러할 것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를 찬송하고 그를 사랑하며 어려울 때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기도하자.
    [4-6절]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줄’이라는 원어(케벨 ל)은 ‘줄’ 혹은 ‘고통’이라는 뜻이다. 고대 헬라어 번역(70인역)이나 옛날 영어번역(KJV)은 ‘고통’으로 번역했다. ‘얽다’는 말은 ‘에워싸다’는 뜻이다. ‘불의’라는 원어(벨리야알 ל)는 ‘무가치함, 악함, 악한 자’라는 뜻이다. 옛날 영어성경은 ‘악한 자들’이라고 번역했다. 다윗을 죽이려는 고통스런 음모와 시도들이 그를 에워쌌고 악한 자들의 악함이 급류와 같이 그를 두렵게 하였고 지옥에 떨어뜨릴 듯한 고통이 그를 둘렀고 그를 죽이려는 올무들이 여기 저기 그 앞에 놓여 있었다. 다윗이 심신으로 당한 환난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극한 환난이었다. 성도는 세상에서 때때로 이런 환난과 고난을 당해야 한다(시 34:19; 행 14:22; 딤후 3:12).
    환난 중에 다윗의 대책은 주위의 환경여건만 쳐다보지 않고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아뢰었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었다. 기도는 원수들의 공격 앞에서 성도의 가장 강한 무기이며 환난 중에 성도가 가질 가장 완전한 대책이다. 환난 중에 성도의 할 일은 기도이다(빌 4:6).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곳 즉 하늘 성전에서 성도의 간구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는 응답하시며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역사하신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어떤 환난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응답하심과 그의 역사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7-8절]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에게 진노하고 징벌하심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사람이 노하면 음성이 커지듯이 하나님이 노하시면 그의 음성은 천둥소리 같아서 땅과 산의 터를 진동시키시고, 그의 코에 연기가 오르고 그의 입에 불이 나와 원수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성경에 이런 말씀들과 예들이 많다. 선지자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를 증거하기를,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라고 하였다(나 1:2, 6). 또 사도 바울도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성도를 핍박하던 자들을 영원한 멸망의 형벌로 엄하게 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살후 1:6-9).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초기에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임직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하나님의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하다가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므로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레 10:1-2). 또 레위 자손 고라와 그 동료들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유명한 족장 250명과 함께 일어나 모세를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갈라지게 하셔서 고라와 그 동료들을 산 채로 지옥에 빠뜨리셨고 250명의 족장들은 불이 나와 타 죽게 하셨다(민 16장). 신약시대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이다가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행 5장). 하나님은 참으로 두려운 하나님이시며 그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히 10:26-31).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고 그 안에 거하면서 오직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자.
    [9-11절]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신다고 말한다. ‘드리우다’는 말은 ‘아래로 굽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은 하늘 위에 계시지만, 그는 성도를 돌보시며 특히 고난당하는 성도를 돕기 위해 때때로 하늘을 굽히고 내려오듯이 땅에 내려오신다. 무한하신 하나님께 장소의 이동은 신비한 일이지만 그가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신다는 비유적 표현이 성경에 종종 사용된다(창 17:22; 35:13).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나시며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다고 말한다. 그룹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들의 한 부류이다. ‘바람 날개’라는 말은 ‘영의 날개’라는 뜻으로 천사들의 날개를 가리킬 것이다.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수종드는 자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행하신다. 천사는 빛처럼 빠르게 이동하며 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으로 이동하심과 우리의 삶에 개입하심은 지극히 자유로우시고 신속하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고 하나님께서 흑암, 즉 물의 흑암과 빽빽한 구름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시고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의 신비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존재이시다(욥 36:26).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을 본다면, 우리의 눈은 멀고 우리의 심장은 멎을 것이다(출 33:20).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런 신성의 본체를 감추시고 영광의 작은 단편을 나타내 보여주실 뿐이다(출 33:23; 사 45:15).
    우리는 우리를 도우시려고 신속히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의 본체의 영광을 감추시는 그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자.
    [12-15절]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그 영광의 광채로 인해 빽빽한 구름이 우박과 천둥 번개로 변할 것이다. 하늘의 천둥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음성과 같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박과 불을 내리신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 또 하나님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해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이 물러가고 홍해가 마른 땅이 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다(출 14:21).
    특히, 천둥과 우박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의 수단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 중 일곱 번째는 우박 재앙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뇌성과 우박을 애굽 전역에 보내셨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다(출 9:23-24).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의 아모리 다섯 왕과 싸웠을 때도, 하나님은 큰 우박을 내려 이스라엘을 도우셨다. 그 때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들이 더 많았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수 10:11).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큰 우뢰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을 어지럽게 하셨고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패하게 하셨다(삼상 7:10).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연 현상들을 주관하시고 그것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 그는 천둥과 번개, 우박과 불과 벼락, 바람 등으로 원수들을 흩으시고 파하신다. 그는 자연 현상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셔서 원수들을 징벌하시고 자기 백성을 그들에게서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진노의 능력을 두려워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가자.
    [16-19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다윗은 큰 환난을 당했다. ‘많은 물’은 많은 환난을 가리킨다. 다윗을 미워했던 원수들은 세력이 강하고 다윗보다 힘센 자들이었다. ‘나의 재앙의 날에’라는 말은 그가 당한 환난이 재앙과 같았음을 말한다. 경건한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때때로 심히 커서 재앙과 같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다윗은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는 재앙의 날에 하나님을 그의 의지자로 삼고 그를 굳게 의지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믿는 자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배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다가 큰 풍랑을 만나자 주무시는 주를 깨우며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외치던 믿음 없는 제자들(마 8:26)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시 62:1).
    하나님은 다윗을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16절,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절,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19절,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 그의 뜻에 순종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 그의 기뻐하시는 참 성도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바울도 주께서 그를 모든 핍박과 고난 중에서, 사자의 입에서 건지셨고 또 앞으로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주실 것을 확신했다(딤후 3:10-11; 4:17-18).
    우리는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선하게만 살아가자.
    [20-24절] 여호와께서 내 의(義)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道)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의롭고 깨끗하게 행했다. 20절과 24절에 ‘내 의를 따라,’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라는 말이 그것을 보인다. 또 23절은 “내가 그 앞에 완전하다”고 말한다. ‘완전하다’는 원어(타밈 םי)는 ‘흠이 없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비록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에게 완전한 의와 깨끗함이 없지만, 다윗은 여실하게 의롭고 깨끗한 삶을 살았으며 흠이나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적 성숙함을 보였다.
    의(義)는 우리의 행위의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道)를 지키고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그 앞에 두고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성경 교훈대로 사는 것이 의요 성경 교훈을 거슬러 행하는 것이 악이다. 성도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성경의 가르침대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따라, 그의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다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 앞에 절대적 의미에서 의롭고 거룩한 자가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불완전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의롭고 깨끗한 행위에 대해 상주시고 갚아주신다. 의로운 자는 평안이 강과 같고(사 48:18), 히스기야와 같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며(왕하 18:6-7), 환난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성도의 의를 갚으시며 그를 원수들의 핍박에서 건져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게만 살자.
    [25-26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악의 행위에 따라 그에게 공의로 보응하신다. 첫째로,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신다. ‘자비하다’는 원어(카시드 די)는 ‘자비하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7). 성경은 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한다(약 2:13).
    둘째로,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신다. ‘완전하다’는 원어(타밈 םי)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다,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따르며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왕상 8:61).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 지극히 정당하고 선한 방식으로 응답하시며 복을 주시며 능력을 베푸신다(시 128:1; 대하 16:9).
    셋째로,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 죄는 우리를 더럽고 불결하게 만들고(마 15:19-20) 죄를 떠난 자가 깨끗한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고후 7:1).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 그의 깨끗하심, 즉 불의나 부당함이나 거짓이 없는 그의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처분을 항상 내리실 것이다.
    넷째로,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신다. ‘사특하다’는 원어(익케쉬 שׁ)는 ‘비뚤어지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훈을 거스르고 비뚤어지고 패역하게 행하는 자에게 노와 분으로 갚으신다(롬 2:8-9).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하나님은 공의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비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자가 되며, 비뚤어지고 패역한 자가 되지 말자.
    [27-29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원문은 세 절 모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것은 ‘왜 내가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에 대해 말했는가 하면’이라는 뜻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에 대해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을 낮추시기 때문이다. ‘곤고한 백성’은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흠 없고 깨끗한 성도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원수들의 핍박으로 곤고한 자들을 가리킨다. 또 ‘교만한 눈’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비뚤어진 악한 자들을 가리킨다. 악인의 교만은 그 눈에서 나타난다. 불경건과 교만은 상관되어 있다. 또 그런 자는 불순종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는 곤고한 성도는 돌아보시며 구원해주시지만 악하고 교만한 자들은 낮추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심신의 고통을 주는 질병, 큰 경제적 어려움, 자연적 재난이나 큰 사고, 전쟁에서의 패배 등을 주셔서 그들을 낮추실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자기의 등불을 켜시며 흑암을 밝히시리라고 말한다. 흑암은 슬픔과 불행을 상징하고, 등불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할 것이다.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슬픔과 불행을 제거하시고 그를 건져내셔서 기쁨과 행복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복을 주시는 까닭은 그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의지하거나 칼과 창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적군에 달리고 그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을 뛰어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용감히 살아가는 그의 성도들을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자신도 다른 사람도 세상의 무엇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악을 버리고 의와 선만 힘써 행하자.
    [30절] 하나님의 도(道)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 ‘도’는 신앙생활의 교훈과 지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해 주신 교훈과 지침은 흠과 점이 없이 완전하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다. ‘정미(精美)하다’는 원어(체루파 הוּר)는 ‘세련되다, 정제(精製)되다’는 뜻이다. 그것은 불순물을 가진 광석이 용광로에서 제련되어 깨끗케 됨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고 다 진리이며 다 유익하다. 신구약 성경말씀은 완전하고 깨끗하며 어떤 오류도 없다.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시편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30절] . . .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하나님은 그에게 피하는 자,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의 방패이시다. 2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방패는 원수의 공격을 막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성도에게 방패가 되신다. 그는 불완전하거나 결함 있는 방패가 아니고 완전하고 확실한 방패이시다.
    [31절]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여호와 하나님은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또 그는 자기 백성의 의지할 반석이시며 피난처와 요새가 되신다. 이 세상에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안 계신다. 그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또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건져주신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며(사 45:22; 행 4:12) 우리의 영원한 기쁨과 소망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깨끗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방패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앞에 바르게만 살자.
    [32절]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으로 띠를 띠우신다. 그는 우리에게 육신적인 힘은 물론이고 특히 영적인 힘을 주신다. 즉 그는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으로 사는 힘, 선을 행하고 낙심치 않는 힘,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할 힘, 진리를 위해 싸울 힘, 고난을 참을 힘을 주신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연약하고 피곤해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신다.
    또 그는 우리의 길을 완전하게 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우리의 행위와 삶이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한 행위와 온전함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도우시고 이끄시는 은혜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을 얻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이룬다.
    [33절]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고 우리를 높은 곳에 세우신다. 암사슴 발은 튼튼하고 지치지 않고 잘 달리는 발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살고 사랑으로 행하며 진리를 위해 싸우고 고난을 잘 견디는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골짜기는 고난의 상황을 가리키지만 높은 곳은 평안과 승리를 가리킨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빈번히 실패할 것이지만, 그의 은혜로 평안과 승리의 삶을 산다.
    [34절]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의 손을 가르쳐 원수와 싸우게 하시며 우리의 팔을 굽혀 놋활을 당기게 하신다. 성도는 사탄과 악령들과 세상의 악과 악한 자들과 싸운다(엡 6:10-13).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의 과정이다. 디모데전서 6:11-12,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하나님은 가장 훌륭하신 훈련 교관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우리를 훈련시켜 선한 싸움을 잘 싸우게 하신다.
    [35절]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의 방패를 다윗에게 주셨다. 그런 방패가 없었다면, 다윗은 원수의 화살들에 부상당했거나 심지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의 퍼붓는 불화살들의 공격 속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구원의 방패를 주셨고 그로 그 화살들을 피하며 결국 승리케 하셨다.
    또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은 그를 굳게 붙드셨다. 다윗도 사람인 고로 마음이 연약해지고 두려움이 생기고 생각이 착잡해질 때가 없지 않았을 것이지만 크게 낙심하거나 요동치 않았다. 하나님은 능력의 손으로 그를 붙드셔서 그 모든 어려움을 잘 참고 이기게 하셨다.
    또 하나님의 온유함이 그를 크게 하셨다. 이새의 막내아들, 보잘 것 없는 양치던 목동 다윗을 들어 유대의 왕을 삼으신 자는 온유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는 다윗이 실수하고 범죄했을 때도 그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들어 사용하셨다.
    [36절]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다’는 원어는 ‘내 아래에 있는 나의 발판들을 넓게 하셨다’는 뜻이다. 징검돌을 딛고 개울을 건널 때, 그 디딤돌이 작으면 발이 미끄러질 위험이 많겠으나, 그 디딤돌이 크고 넓으면 발이 미끄러지지 않고 잘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걸음에 디딤돌들을 넓게 하셔서 그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해주셨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오늘날 진실한 성도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발 아래 겨우 디딜 만한, 때때로 미끄러질 작은 돌들을 놓아두지 않으시고, 걷기에 안전한 크고 넓은 돌들을 두셔서 실족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 우리의 힘, 우리의 안전과 승리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자.
    [37-38절]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다윗은 원수와 접전하여 기어코 승리할 것이다. 그의 싸움은 승리적이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영적 전쟁에서도 우리의 원수인 마귀와 악령들이 우리 발 아래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원수들은 참으로 강하지만, 우리 대장 예수는 전쟁에 능한 큰 용사이시며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마다 승리할 것이다.
    [39-40절]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전쟁에서의 다윗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함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그에게 띠 띠우셨고 그를 대적하여 일어난 자들로 그 앞에 굴복케 하셨다.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라는 원어는 옛날 영어성경처럼 “내 원수들의 목을 내게 주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다윗이 원수를 멸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다.
    [41-42절]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서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부르짖었으나 구원할 신이 없었고 심지어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은 악한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다윗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서뜨렸고 거리의 진흙같이 쏟아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강한 원수들을 완전히 패배케 하셨다.
    하나님은 성도의 영적 전쟁에 승리를 주신다(롬 8:37).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들을 겁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올바르게만 살자.
    [43-45절]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저희가 내 풍성(風聲)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다윗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의 전임자인 사울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사울은 그를 시기하여 여러 번 그를 죽이려 하였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인도자의 위치가 다 그러하지만, 백성의 여론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항상 있었다. 그는 백성의 다툼 속에서 피곤하거나 낙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은 그를 백성의 싸움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나라의 분열된 여론을 잠잠케 하시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은혜를 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열국을 제압하는 권세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다. 그래서 이전에 다윗을 알지도 못했던 백성들이 이제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시며 만국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손 안에 있다.
    이방인들은 다윗의 소문을 들은 즉시 그에게 순복하며 복종할 것이며 그들은 쇠약해져서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올 것이다. 도무지 항복할 것 같지 않았던 이방 나라들이 즉시, 철저하게 복종할 것이다. 그들은 심히 무력해져서 두려워 떨며 다윗에게 항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셨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다. 우리에게 있는 크고 작은 문제, 영적 육적, 개인적 단체적 문제들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그 앞에 바르게만 살자.
    [46-50절]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報酬)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나님은 생존하신다. 세상의 다른 신들은 인간의 고안물이며 생명이 없는 헛것이지만(시 135:15-18),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창 1:1)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섭리하고 통치하신다(시 93:1).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이방 나라들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고 그를 원수들과 대적자들로부터 구원하셨다. 47절,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報讐)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48절,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50절,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우리 모두도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구원을 받았다(히 2:3). 그것은 죄와 사망과 사탄 권세로부터의 구원이며 내세의 영생과 천국뿐 아니라, 또한 현세의 보호와 공급과 도우심의 보장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한다. 46절,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9절,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섭리하시고 인간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고 또 그의 크신 은혜와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19편: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말씀
    [1-3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만물, 특히 하늘이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증거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나타낸다. 이것을 흔히 자연계시(自然啓示)라고 부른다. 이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능력과 선에 대해 핑계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계시다(롬 1:20).
    낮은 낮에게 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달과 별들을 통해 전하지만, 아무 말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다. 자연계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주는 계시이지만 무언(無言)의 계시다. 그 계시는 무언(無言)의 선포요 그 지식은 무언(無言)의 지식이다.
    [4-6절]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溫氣)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소리’라는 원어(카왐 ם)는 ‘그것들의 줄’이라는 뜻이지만(KJV, NASB) 고대 번역들(70인역, 시마쿠스역, 제롬)이 ‘소리’라고 번역했다(NIV). 자연계시의 줄과 소리는 세상에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에나 미친다. 해는 멋있는 새 신랑과 같고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 선수와 같으며, 온 세상은 그것의 따뜻한 온기(溫氣)를 받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행 14:17; 17:25-28).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무언(無言)의 계시를 깨닫고 그를 인정하고 그의 은총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7-8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본문은 성경의 복된 성격들과 효능들에 대해 말한다. 율법, 증거, 교훈, 계명은 다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첫째로, 성경의 법은 완전하다. 성경은 오류나 결함이 없으며 의와 선의 표준을 명확히 제시한다. 오직 성경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규칙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죄악 됨을 깨우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오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리고 병든 영혼을 고치며 침체된 영혼을 회복시킨다.
    둘째로, 성경의 증거는 확실하다. 사람은 불확실한 내용을 잘 믿지 않는다. 성경의 증거가 불확실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와 내용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확실하다. 그래서 성경은 우둔한 자에게 참 지혜와 지식을 준다. 누가복음 1:4는 그 책을 기록한 목적이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고, 디모데후서 3:15는 성경이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말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은 정직하다. 그것은 올바르고 진실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거짓말은 사람에게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을 주지만, 하나님의 올바르고 진실한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참 평안과 풍성한 기쁨을 준다.
    넷째로, 성경의 계명은 순결하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는 거룩한 계명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눈을 밝게 한다. 죄는 영적으로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들지만, 의와 거룩은 그 눈을 밝게 만든다.
    우리는 성경의 이런 복된 성격과 효능을 깨닫고 이 책을 열심히 읽고 묵상함으로 구원과 온전함, 지혜와 지식, 참된 기쁨을 충만히 누리자.
    [9-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道)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고 악에서 떠나야 한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을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또 이러한 진리는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천국에는 악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거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와 선만을 행할 것이다.
    또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고 다 의롭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와 선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도 분명하다. 하나님이 보이신 의의 길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러므로 시편 110: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말한다. 모든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그러므로 성경은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말씀이다. 세상에서 금은 가치 있는 것을 대표한다. 그것은 세상 물건을 사는 데 큰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세상 물건은 결국 썩어질 것이며 마지막 심판 날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들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믿음과 의와 성결을 얻게 하며 천국과 영생을 준다. 그러면 정금과 성경 중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는 자명하다.
    성경은 또한 “송이꿀보다 더 단” 말씀이다. 우리는 단 것을 다 좋아한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꿀맛 같다’고 표현하며 맛있는 수박을 꿀수박이라고 부른다. 서양 사람들은 사랑하는 아내를 ‘허니’(honey, 꿀)라고 부른다. 그러나 꿀은 입맛에만 좋지만, 성경은 송이꿀보다 더 달아 우리의 영혼에 참된 기쁨과 위로와 힘과 용기를 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결하고 의롭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의 참 가치와 맛을 깨닫고 체험하며 그것을 많은 정금보다 더 사랑하자.
    [11절]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는 우리가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신 10:12-1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우리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벌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세상에도 법에는 어길 때 부과되는 벌칙이 들어 있다. 교통 법규는 규정 속도를 위반할 때 부과하는 벌금을 규정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은 그것을 어길 때 받을 벌칙을 포함한다. 레위기 26:16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신명기 28:15 이하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육체적 질병, 자녀들의 불행, 물질적 궁핍, 전쟁 등의 국가적 재난 등의 재앙을 경고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복을 누리며 큰 상을 받을 것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주의 종이 . . .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신명기 10:12-13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우리의 행복을 위함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2-6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할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사회적 복에 대해 증거한다.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또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순종은 인간의 당연한 의무인데도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은혜로 복을 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랑하고 순종하여 현세의 평안과 형통의 복을 누리고 영생의 나라에서 큰 상을 받는 자들이 되자.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허물(쉐기아 האָי)은 ‘실수로 범하는 죄, 부지(不知) 중에 범하는 죄’를 말한다. 레위기 4:2의 ‘그릇 범하는 죄’(쉐가가 ה)와 같은 뜻이다. 우리는 양심적으로 자책할 것이 없는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나 영적으로 어린 우리에게는 부지중 범하는 죄들이 적지 않으며 사람은 무지하여 자기 허물과 실수를 잘 깨닫지도 못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되는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깨닫는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둘째, 우리는 기도 중에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숨은 허물을 깨닫는다. 기도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밝히시며 성경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하신다.
    셋째, 우리는 친구의 충고를 통해 우리의 부족과 실수를 깨닫기도 한다. 잠언 27:5-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어린아이는 부모나 선생의 책망과 징계를 통해 자신의 부족을 깨우치고 고쳐 온전케 된다.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우리는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벗어난다’는 말은 ‘죄와 징벌로부터 깨끗케 된다’는 뜻이다. 숨은 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그 죄도 지적을 받고 깨닫고 버림으로 깨끗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숨겨진 죄가 하나도 없도록 하나님께 고백하며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양심적으로 자책할 것이 없는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하며 혹 숨은 허물까지도 다 깨닫고 버려 깨끗함을 얻어야 한다.
    [13절]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故犯罪)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고범죄’(故犯罪)라는 원어(제딤 םי)는 ‘뻔뻔스런 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실수로 부지중에 짓는 죄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죄인 줄 알면서 범하는 죄이다. 죄에도 경중(輕重)이 있다. 뻔뻔스런 죄는, 연약하여 짓는 죄보다 더 큰 죄이다. 예를 들어, 배교(背敎)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고의로 저버리고 대적하는 것으로 가장 큰 고범죄이다. 우상숭배, 의도적 살인, 간음 등도 고범죄이다. 실수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으나, 고의적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했다. 속으로는 거짓되고 탐욕적이면서 겉으로는 진실하고 절제 있는 것같이 보이는 위선도 고범죄이다. 우리는 고범죄를 짓지 말고 그런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14절]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은 성도들의 마음의 묵상이요 입술의 고백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고 후시대에 성도들을 위해 교훈이 되게 하셨다. 그것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기록되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전달하는 성경 말씀이 되었다.
    우리는 고범죄 즉 뻔뻔스런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첫째, 성경 말씀이 항상 우리의 마음을 지배케 해야 한다. 시편 119:9, 11,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둘째, 시시때때로 깨어 기도해야 한다.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셋째,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0편: 환난 날에 도우시기를 기원함
    [1절]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인생은 고생과 수고의 연속이다. 야곱은 자신의 130년 생애를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회상하였다.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다. 성도에게도 자주 환난이 있다. 시편 34:19는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말했다.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남의 도움이 필요한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도우시며 그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를 높이 드신다. ‘높이 든다’는 말은 ‘안전한 곳에 둔다’는 뜻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의 환난 날에 그에게 응답하셨다고 고백했고(창 35:3), 또 후에 하나님을 “나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표현했다(창 48:16). 다윗은 하나님을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표현했다(시 46:1). 바울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한 고생 중에 자신을 건지신 하나님을 증거하였다(고후 1:8-10). 환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성도에게 큰 복이다. 야곱에게 응답하셨듯이, 다윗에게 응답하셨듯이, 바울에게 응답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응답하셨고 또 이 이후에도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하자.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평안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만, 특히 환난 날에 낙망치 말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하자. 이것이 참 믿음이다.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성소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천국을 가리킨다. 열왕기상 8:30,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성소는 또한 땅 위에 있는 성막과 성전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성소에 거하시고 거기에서 말씀하셨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후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말했고(왕상 8:29), 다니엘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단 6:10).
    구약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성전이시다. 요한복음 2:19,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께서는 성소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시온에서 우리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구약 성도는 예루살렘성전을 향해 기도했고 오늘 우리는 교회에서 합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마태복음 18:19,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참 교회를 기뻐하시고 또 교회의 합심된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몸된 교회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자.
    [3절]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본문의 ‘너’는 누구인가? 1절에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라고 했고, 2절에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라고 했고, 본문에 “네 모든 소제를 . . . 네 번제를”이라고 한 그 ‘너’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진실한 성도를 가리킨다. 다윗은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다른 성도에게도 같은 체험이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뿐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행 2:39).
    본문은 성도의 소제와 번제에 대해 말한다. 소제는 곡물 제사로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드리는 예물이고, 번제는 짐승을 온전하게 불태워 드리는 제사로서 하나님이 보내주실 메시아의 대속 사역에 대한 믿음과, 제사드리는 자의 온전한 헌신과 순종에 대한 결심과 각오를 나타낸다. 원문에는 본문에 ‘소제들’과 ‘번제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린 모든 예배, 모든 신앙고백, 모든 봉사, 모든 순종, 모든 헌금을 가리킬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많은 예배와 많은 찬송과 많은 기도와 많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예물, 모든 감사와 신앙고백과 헌신과 순종과 봉사와 헌금을 하나님께서 과연 기쁘게 받으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옛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창 4: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참으로 경외하고 그의 모든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그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의 예배들, 찬송들, 기도들, 봉사들, 헌금들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면 그는 예물 드린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많은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항상 감사의 예물들과, 온전한 헌신과 순종의 예배를 하나님께 올리자.
    [4-5절]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네 마음의 소원’이라는 원어는 ‘네 마음’인데, 우리는 마음으로 이것저것을 원하고 바란다. 또 ‘네 모든 도모’는 ‘네 모든 계획’이라는 말이다. 5절의 ‘네 모든 기도’라는 원어는 ‘네 모든 청원 혹은 간구’라는 뜻이다. 성도에게는 마음의 여러 소원들과 계획들, 기도의 제목들이 있다. 특히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는 그 환난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소원일 것이다. 성도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지 않는 선한 소원과 기도 제목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의 소원과 계획과 청원을 들어주시기를 기원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했다(빌 2:13).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소원은 육신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소원들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이시다(시 65:2).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를 환난에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기뻐 부르고 승리의 깃발을 세우겠다고 말한다. ‘승리’라는 원어(예슈아 הוּשׁ)는 ‘구원, 승리’라는 뜻이다. ‘개가를 부른다’는 원어는 ‘기뻐 외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확실하므로 성도의 승리도 확실하다. 온 회중은 고난당하던 형제의 구원과 승리를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선한 소원과 계획과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 아뢰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자.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고 본다. 요셉은 “하나님의 신[영]에 감동한 사람”이라고 증거되었고(창 41:38) 여호수아도 “신[성령]에 감동된 자”로 증거되었다(민 27:18). 구약 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은 다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표이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오셨다. 그것이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의 말뜻이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골로새서 2:9, “그[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자이셨고 본질상 성령과 일체(一體)이셨다.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디도서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고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성령께서 인치신 기름부음 받은 성도가 환난 중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외면치 않으시고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오른손 즉 그의 능력의 손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 속에 있음을 알고 감사하자. 우리는 또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녀들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심을 확신하자.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자랑한다’는 원어(나즈키르 רי)는 ‘언급한다, 부른다, 자랑한다’는 뜻이 있다. 세상 사람과 성도는 믿는 대상이 다르다. 세상 사람은 병거와 말, 즉 군사력을 의지한다. 군사력은 세상적, 인간적 도움물을 가리킨다. 즉 그것은 자신의 건강이나 지식이나 재물을 가리킬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을 의지하며 산다. 그러나 성도는 다르다. 성도는 세상 것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의지하지 않는다. 성도는 오직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이름만 부르며 의지하며 자랑한다. 그것이 참 믿음이다.
    [8절]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원문의 뜻은 “저희는 굴복하였고 엎드러졌으나 우리는 일어났고 바로 섰도다”이다. 이것은 확실한 미래를 표현한다. 세상 것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헛되이 만드실 때 실패하고 멸망할 것이다. 사람의 건강도 쇠해지고 물질적 유여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믿는 성도를 건지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바로 서게 하실 것이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9절]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성도는 그러므로 환난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구원을 요청해야 하며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도우시는 능력의 왕이시다. 그는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세상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간구하고, 또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확신하자.
    21편: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기뻐함
    [1-2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다윗 왕은 하나님의 힘과 구원을 체험하였다. 그는 시편 20편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다윗이 힘이 빠져 있었을 때 힘을 주셨고 환난의 수렁에서 그를 건져주셨다. 그는 우리가 약할 때도 힘을 주셨고 환난을 당했을 때도 구원하셨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힘과 구원을 크게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1절은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마다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다. 시편 13:5,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35:9,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오늘날 우리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구원이며 그것은 모든 믿는 이에게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다윗이 구원받은 것은 기도의 응답이었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소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의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성도의 합당한 소원을 잘 들어주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크게 기뻐하며 찬양하자. 또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자.
    [3-4절]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앞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의 소원을 주셨다고 고백한 이유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선한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그의 머리에 금면류관을 씌우셨다. 다윗은 사울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고 이방 나라들과의 전쟁도 많았지만, 승리하여 적국 왕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곤 하였다.
    하나님의 주시는 복은 다 선하고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슬픔 대신 기쁨을, 질병 대신 건강을, 가난 대신 일용할 양식을, 싸움 대신 평안을 주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금면류관을 씌우신다. 그는 우리에게 수치와 고통 대신 영광과 기쁨을 주신다.
    특히,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도피하던 때나 주위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던 때나 압살롬의 반역의 때 등 생명의 위협이 있을 경우에 하나님께 생명의 보존을 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지켜 주시되 영영한 장수 곧 영생을 주셨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만 사람에게 생명의 연장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복을 주셨고 특히 가장 복된 영생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자.
    [5-7절]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때때로 고난과 수욕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시고 큰 영광을 주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입혀주신다. 요셉은 여러 해의 종살이, 옥살이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다윗은 외롭고 힘든 긴 도피 생활 후에 왕이 되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삼일 만에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셨다. 성도의 영광과 존귀는 장차 부활의 몸으로 천국에서 영생할 때 절정을 이룰 것이다.
    6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다윗에게 영광과 존귀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크고 영원한 복이며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건강이나 재물이나 세상 권세 같은 복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복, 즉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복은 영원하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구원은 현세와 내세에 지극한 기쁨과 즐거움을 동반한다.
    7절도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성도에게 영원한 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지하는 자를 긍휼로 붙드셔서 요동치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는 하나님만 의지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를 붙들어 요동치 않게 하실 것이다. 연약한 인생이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영광과 존귀의 복, 기쁨과 즐거움의 복, 영원한 복을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자.
    [8-9절]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8절부터 12절까지 우리 말 성경에 ‘네, 너를, 네가’라고 번역된 말들은 ‘주의, 주를, 주께서’(2인칭)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8절을 다시 번역하면, “주의 손이 주의 모든 원수를 발견하심이여 주의 오른손이 주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시리로다.” 눈 대신 손이 찾는다고 말한 것은 원수를 찾아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주의 손은 심판의 손이다.
    하나님의 원수들,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의 원수이며 그들을 미워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을 학대했던 애굽의 바로 왕,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웠던 아말렉 사람들,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했던 블레셋, 암몬, 에돔 등의 이웃 나라들은 다 원수이었다. 사울 왕이나 압살롬 등은 다윗 개인에게 원수이었다. 많은 기독교인을 죽였던 로마 황제들, 천주교회, 일본 제국, 공산당은 교회의 원수이었다.
    9절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저희를 불로 삼키시며 저희를 소멸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음란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를 내려 멸망시키셨다(창 19장).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했던 나답과 아비후를 불에 삼키어 죽게 하셨다(레 10장). 신명기 32:22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일어나서 지옥 깊은 곳까지 사른다고 말했다. 히브리서 12:29는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표현하였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주께서는 꺼지지 않는 불의 지옥에 대해 강조하셨다. 요한계시록 21:8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지옥 불못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다. 그 진노는 소멸하는 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두렵고 철저한 심판을 두려워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말고 그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실한 종들이 되자.
    [10절]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네가’는 ‘주께서’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보통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든 하기 원하지만, 참으로 그들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의인의 자녀들은 복되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고(출 20:6), 또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자녀들의 복을 약속하셨다(신 28:4).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증거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하였다(시 37:25-26).
    그러나 악인의 자녀들은 멸망할 것이다. 본문은 “주께서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하심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워하시는 자들의 죄를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갚겠다고 말씀하셨다(출 20:5).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들의 자녀들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신 28:18).
    성경은 악인의 자녀들이 망한 예들을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시대에, 고라와 그 동료들이 모세를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 동료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 즉 자녀들까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매장되게 하셨다(민 16장). 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아간의 범죄로 아이 성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간뿐 아니라, 그 자녀들도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게 하셨다(수 7장).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아들들과 손자들 70명은 하루아침에 그 선생들에 의해 다 목베임을 당하였다(왕하 10장).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자.
    [11-13절]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11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저희가 주를 대적하여 악을 계획했고 이루지 못할 해로운 방책을 상상했음이니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벌하실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계획하고 해로운 방책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방책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은 다니엘을 모함해 죽게 하려 했던 그의 동료들이나 모르드개 죽이기를 왕에게 요청하려 했던 악한 하만처럼(단 6장; 에 7장) 그 악한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12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주께서 그들의 얼굴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실 때 그들로 돌아서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려고 돌아설 것이다. 악한 자들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굴복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쫓던 애굽 왕 바로의 병거들과 기병들을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 하셨듯이, 또 유다를 침공했던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을 하룻밤에 다 죽은 시체가 되게 하셨듯이, 악한 자들을 징벌하시고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을 높이고 노래하고 칭송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한 자는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살리셨고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우리는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능력으로 징벌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만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22편: 메시아의 고난
    [1-2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여’라고 반복해 부를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자이었고 또 그는 낮에도, 밤에도 부르짖을 정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경건한 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난 중에 내버려두셨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성도를 때때로 고난 중에 내버려두신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려두신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멀리하여 돕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를 도우시는 것은 정상적인 일인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셨다. 선한 목자가 병든 양을 돌아보듯이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신음하는 성도를 돌아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밤낮 부르짖어도 응답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으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의인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예표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택한 백성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고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깊고 높은 뜻 가운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버려두셨다. 그는 고난의 구주를 구원치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을 감사하자. 또 의인의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알고(롬 5:3-4),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자가 되자(빌 1:29).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원문에는 본절이 “그러나 주는”이라는 말(웨앗타 האַ)로 시작된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인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곤고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믿음이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자이심을 고백하였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33: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 147:1,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모든 만물도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려야 한다(계 5:13).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욕을 돌리고 있다. 로마서 1: 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 .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참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찬송을 부른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고 말한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피조 세계와 구별되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환난과 고난의 어두운 현실 너머에 창조자, 초월자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은 성도의 의지가 되시며 성도를 환난과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고난 중에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라보자. 또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힘써 찬송하자.
    [4-5절]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은 열조의 신앙과 체험을 기억하고 증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진리이다. 신앙의 열조들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뢰하였다.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라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의뢰하였음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한 목자 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로 나타난다. 신앙의 열조들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기도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는 기도할 수 없으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기도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뢰하고 간구한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환난에서 건지셨고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과 구원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살아계신 주권자 하나님,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그에게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도우실 것이다.
    성경은 신앙 열조들의 많은 체험들을 기록하고 있다. 유다 왕 아사는 구스 군사 백만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그의 도우심으로 구스 군대를 패배시켰다(대하 14:11).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셨다(대하 32:20-21).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특히 환난 날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더욱 굳세게 의지하고 의뢰하며 도우심을 구하자.
    [6-8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당하고 있는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다윗은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한다. 욥도 사람을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고 표현하였고(욥 25:6), 이사야서에도 “지렁이[벌레] 같은 너 야곱아”라는 표현이 나온다(사 41:14). 야곱은 고난 충만한 생을 살았었다. 죽은 몸에 벌레가 생기는 것을 보면, 사람과 벌레의 차이가 무엇인가?
    다윗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는다고 고백한다. ‘조롱거리’라는 원어는 ‘멸시를 받는다’는 뜻이다. 의인도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당한다. 이것은 높은 차원의 고난이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고난을 예표하며 동감(同感)케 한다.
    원수들은 고난당하는 성도를 보며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조롱한다. ‘입술을 비쭉인다’는 원어(카프티루 וּרי)는 ‘조롱하기 위해 입술을 벌린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실 거라고 놀려댄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의 사랑하는 종을 이런 비천함과 고통 가운데 버려두신다.
    다윗의 고난은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했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며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마 27:39-4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억만분의 일이라도 깨닫고, 낙심치 말고 의를 위한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자.
    [9-11절]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본절은 원문에서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된다. 벌레같이 비천해진 상황에서도 다윗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출생케 하셨고 모친의 젖을 먹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어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어린아이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성도를 갓난 아이 때부터 돌보신다.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커서 신앙고백을 할 때부터가 아니고, “모태(ם)로부터,” “어머니의 배(ן)로부터”(원문의 뜻)이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침례교회의 생각과 다르다. 언약의 원리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들을 그들의 출생 때부터 하나님과 연관시킨다. 그들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하나님께 맡긴 바 되었다. 이것이 구약 시대에 남자 아이에게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베푼 이유요, 신약 시대에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근거이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의 어릴 때부터의 하나님이시며 그가 어릴 때부터 그를 의지했음을 말하는 이유는, 그의 약하고 보잘 것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도 그를 돌보시고 도우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열조들을 도우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며, 어릴 때 우리를 도우셨던 하나님은 늙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지금 다윗은 환난 중에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는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 있지만, 그를 도우실 자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안다.
    하나님은 성도의 어릴 때부터 그의 하나님이심을 깨닫자. 이 사실을 우리 자녀에게 가르치자. 또 평생 하나님만 굳게 믿고 의지하자.
    [12-15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거칠고 힘센 황소같이 또 잔인하고 위협적인 사자같이 그를 둘러쌌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심신으로 약해져 그의 생각, 감정, 힘, 그리고 용기가 다 쏟아져 버린 것 같고 그의 모든 뼈가 어그러진 것 같았다. 또 그의 마음은 초같이 녹았고 그의 힘은 질그릇 조각같이 말랐으며 그의 혀는 이틀에 붙었다. 그는 거의 죽음 앞에 있는 자와 같았다.
    [16-18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또 다윗의 대적자들은 물고 뜯는 개들과 같이 인정이나 도덕성이 없이 다윗을 둘러싸 그의 손과 발을 찔렀다. 육신의 고통이 극심하여 모든 뼈들이 다 이탈되어 그 수를 셀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대적자들은 그를 주목하며 심지어 그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고 그의 속옷까지도 제비뽑아 취하였다. 겉옷과 속옷까지 취하는 것은 사람에게 아마 가장 큰 모욕과 수치일 것이다.
    실제로 다윗이 언제 이런 고난을 당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메시아의 고난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작은 인정도 자비도 없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찔림을 받으셨고 로마 군병들은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가졌고 그의 속옷은 제비뽑아 가졌다(요 19:23-24).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고난도 즐거이 받자.
    [19-21절]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다윗은 극심한 고통의 현실에서도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시편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편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힘의 원천이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시 40:31).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다. “멀리하지 마옵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 . .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고통의 현실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반복하여 요청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성도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였다. 21절에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은 기도 응답의 확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다윗의 간구를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얼마동안 버려두시곤 하지만 영원히 그러하지는 않으신다. 성도가 인내하며 낙망치 않고 조금 더 간구하면 그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택자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악인들의 개가(凱歌)를 그치게 하셨고 자신의 의로우심을 증거하셨고 우리의 의(義)와 구원이 되셨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자. 또 하나님의 구원과 기도 응답을 확신하며 체험하자.
    [22-24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 그는 주의 이름을 ‘그의 형제들’(원문)에게 선포하고 성도들의 모임인 회중(카할 ל) 즉 교회에서 주를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감사치 않고 찬송치 않을 것이지만, 성도들의 회에서는 찬송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면한다. 찬송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4장로들과 천만 천사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고 찬송하였다(4:10-11; 5:12).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믿는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33:1,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원문 24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자들의 고난을 멸시치 않으시고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성도를 돌아보시고 그 부르짖음을 응답하신다. 다윗의 체험은 또한 모든 성도들의 체험이며 다윗이 말한 찬송의 이유는 또한 우리의 찬송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또한 고난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심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자.
    [25절]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대회’라는 원어(카할 라브 ב ל)는 ‘많은 회중’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22절에서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특히 교회에서, 회중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송한다.
    다윗은 많은 회중 가운데서 부르는 그의 찬송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고백한다. 성도의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가지고 그가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힘으로 하는 찬송은 참되고 영속적일 것이다.
    다윗은 또한 그의 서원을 경건한 자들 앞에서 갚겠다고 고백한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결심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다윗은 큰 환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간구하며 서원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므로 그 서원한 바를 그대로 갚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서원은 꼭 갚아야 한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옛날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그에게 붙여주셔서 승리케 하시면 돌아올 때 집 문에서 제일 먼저 그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였고 그것을 이행했다(삿 11:30-31).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의 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였고 그것을 이행했다(삼상 1:10-11).
    다윗이 찬송을 주의 은혜로 깨닫고 또 서원을 갚겠다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약속한 바를 다 행하자.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본절은 고난에서 건짐받은 성도를 ‘겸손한 자,’ ‘여호와를 찾는 자’라고 표현하며 그의 복된 면모를 말한다. ‘겸손한 자’(아나윔 םי)라는 원어는 ‘고난당하는 자, 겸손한 자’라는 뜻이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겸손한 인격이 되며 또 이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된다.
    다윗은 겸손한 자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건짐받은 성도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먹고 배부르게 하신다. 시편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사야 55:1-2,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다윗은 또 여호와를 찾는 자가 그를 찬송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평소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지만 특히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체험하며 그 후로는 더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된다. 구원받은 체험을 한 자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그는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은 영혼의 활동이다. 마음이 죽는다는 말은 마음이 슬픔과 절망 가운데 낙심되고 침체되는 것을 말하고, 마음이 산다는 것은 마음이 기쁨과 소망 가운데 힘을 얻고 활기를 찾는 것을 말한다.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구원 얻은 성도는 마음에 힘과 기쁨과 활기를 얻을 것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슬픔과 근심, 환난과 고난이 많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은 영원히 기쁨과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하나님을 찾는 참 성도가 되어 세상사는 동안 영육으로 먹고 배부르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마음에 활기를 누리며 살자.
    [27-28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다윗은 땅의 모든 끝 곧 만국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우리나라는 그 ‘땅 끝’에 속한다. 우리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온 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단지 100년 전의 일이었다.
    열방의 모든 족속, 즉 세상의 모든 족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것이 세계복음화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즉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에서 이미 암시되었다(창 12:3; 18:18). 이것은 이사야 45:22에서도 암시되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고(마 28:19),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원문 28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세계복음화의 이유는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열방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노아의 후손들이다(창 10:32). 하나님은 온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이시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되어진다. 창조도, 타락도, 구속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있다. 의인의 고난도, 악인의 핍박도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도 만세 전에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이었다(엡 3:8-11).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온다(롬 11:36).
    주권자 하나님께서 하시는 세계복음화의 큰 일을 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우리도 하나님과 연합하며 고난도 받으며 그의 일에 힘쓰자.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본문에 ‘풍비한’이라는 원어(다쉔 ן)는 ‘살찐, 부유한, 힘있는’ 등의 뜻이다. 이 말은 육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존귀하고 힘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과 돈을 의지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에게로 돌아오며 영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지만, 그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요한계시록 21:24, 26,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또 본문에 ‘진토(아파르 ר) 즉 흙에 내려간다’는 말은 ‘풍비한’이라는 말과 대조되며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 ‘진토에 내려가는 자’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힘이 없어 죽어가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즉 거의 죽을 지경에 떨어졌으나 스스로 자신을 건지거나 회복시킬 힘이 없는 자이다. 옛날부터 이런 자들이 많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그런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복된 새 생명을 얻는다.
    이와 같이, 본문은 모든 사람이 주께로 돌아올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권세자도 평범한 시민도, 용사도 가련한 자도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굴복할 것이며(빌 2:10-11) 택함받은 모든 사람이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그 택함받은 자들 속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만 높이고 그만 의지하고 그만 따르자.
    [30-31절]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구원받은 자들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어른들만 섬기거나 당대(當代)에만 섬기고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잘 섬길 것이다. 이것이 참된 복이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가면 그것처럼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그의 자녀들이 범죄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염려하여 잔칫날 후에는 그의 식구 수대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다(욥 1:4-5).
    구원의 복음과 바른 신앙생활은 경건한 모든 사람에게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신명기 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구원받은 성도는 특히 하나님의 의(義)를 전파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마 5:17),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고(요 19:30), 우리의 의(義)를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신앙의 계대(繼代)가 주님 오실 때까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구원과 신앙생활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 특히 복음을 성실히 전하며 가르치자.
    23편: 하나님은 나의 목자
    [1-2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보살피며 보호하며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다. 이사야 40:11,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에스겔 34: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나님의 양인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소유자로서 부요하시고 또 전능자로서 모든 것을 풍족히 주실 수 있기 때문이며, 친히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였으나 그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그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다(신 8:4).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의식주의 공급을 풍족히 받는다고 말씀하셨다(마 6:33).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쉴 만한 물’이라는 원어(메 메누코스 תוֹח י)는 ‘잔잔한 물’이라는 뜻이다.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주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과 음료이며(요 6: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목마름을 없앨 생수의 강이시다(요 7:37-39). 그것은 성도에게 푸른 풀과 잔잔한 시냇물 같은 만족한 은혜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은 자는 영육의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만 진실히 믿고 섬기며 성경교훈대로만 살자.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소생시킨다’는 원어(예슈베브 בוֹשׁ)는 ‘회개시킨다, 회복시킨다, 새 힘을 준다’는 뜻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때때로 범죄하고 연약해지고 낙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도록 이끄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자이시다. 이사야 40:29-31,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방향은 의(義)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롬 1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3-24; 10:9-10). 이것이 법적인 의(義)이다. 또 이런 법적인 의를 얻은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실제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인격이 되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살전 4:3).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우리에게 존귀한 이름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의의 길,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로 의의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또 늘 새 힘을 얻어 성도답게 의의 길을 힘써 행하자.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환난이 많은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세상에는 곳곳에 죽음의 위협과 공포가 있다. 질병과 사고가 있고 지진,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있다. 또한 세상에는 영적인 무지와 부도덕의 어두움도 가득하다. 세상에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지만, 심지어 교회 안에도 형식적 교인들과 위선자들이 있다. 마귀는 세상 곳곳에서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삼키려고 두루 다니며 찾고 있다(벧전 5:8).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해’는 영적인 혹은 육적인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은 성도에게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고 교훈한다. 여호수아 1:6, 7, 9,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고 산다.
    성도가 세상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기 때문이다. ‘지팡이’(쉐베트 ט)는 사나운 짐승들을 물리치는 무기이며, ‘막대기’(미쉬안 ן)는 양들을 인도하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그는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이나 불 가운데서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사 43:2). 또 그는 그의 품 안에 거하는 자들을 무서운 질병과 재앙에서 건지시겠다고 말씀하셨다(시 91:1-10). 세상이 악하고 험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신다.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지만 우리는 해를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깨닫고 또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감사하자.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을 베푸신다고 말한다. 여기에 ‘상’은 밥상 혹은 잔칫상을 말한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먹는 즐거움도 주시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 앞에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이 실패하고 망하기를 바랐겠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에게 기쁜 일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원수들 앞에서 그를 사랑하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다고 말한다. ‘기름을 바른다’는 원어(디쉔 ן)는 ‘기름지게 만들다, 기름을 바르다, 기쁘게 받다’는 뜻이 있다. 옛 시대에 잔치 자리에서 주인은 귀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었다고 한다. 죽었다가 살림을 받았던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할 때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었다(요 12:3).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은 기름의 좋은 향기로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귀한 손님처럼 대우하셨다. 얼마나 큰 은혜이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또 다윗은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잔칫상은 풍성한 식탁이었다. 음식도 풍성했고, 마실 포도즙도 풍성했다. 부요한 주인이 손님들에게 기쁨의 포도즙을 잔에 넘치게 부어주듯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쁘고 즐겁고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목자 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따라가자.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양으로 증거한다. 양은 목자를 믿고 그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른다(요 10:26-27). 참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좋은 양과 같다.
    본절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다윗을 은혜로 택하셨고 구원하셨고 인도하신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그를 따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거에 우리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또 남은 여생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보혜사이시다(요 14:16).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 38-39).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그가 성전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응답의 고백인 동시에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 천국 중심의 삶을 살 것이다. 그는 주의 재림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더 힘쓸 것이며(행 2:42; 히 10:25),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의 삶을 누릴 것이다(계 22: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며 그 안에 거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고 영원한 영광의 천국만 사모하며 소망하자.
    24편: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1-2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이 광대한 지구와 거기에 가득한 것들과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산들과 골짜기들, 나무들과 풀들, 꽃들, 새들, 짐승들, 곤충들, 벌레들, 땅 속의 금은보석의 광물들, 바다들과 강들과 물고기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각 피부색과 언어와 풍습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참된 주인이시요 소유자이시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여러 곳에서 밝히 증거한다. 출애굽기 9:29,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신명기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역대상 29:11,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욥기 41:11,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시편 50:12,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셨고 강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이다. 즉 천지 만물과 모든 생물과 사람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다. 시편 89:11,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 우리 자신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순종으로 바르게 살자.
    [3-4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곧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교제할 수 있는가?
    첫째로, 손이 깨끗한 자이다. 손은 사람의 행동을 나타낸다. 사람의 손은 나쁜 일도 할 수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다. 도적질, 살인, 간음을 하는 손은 나쁜 손이며 의와 선을 행하는 손은 좋은 손이다. 우리는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딤전 2:8). 손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다(렘 17:9).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비방 등이 나온다(마 15:19).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회개와 믿음으로 깨끗케 된다(행 15:9). 회개와 믿음으로 마음이 깨끗케 된 자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마 5:8). 그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 자이다. 허탄한 것은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 죄악된 것을 가리킨다. 물질적인 것은 썩는 양식에 불과하다(요 6:27). 재물은 허무한 것이다(잠 23:5). 그러므로 마음을 이런 것들에 두지 말고 믿음의 일(요 6:29), 주의 일(고전 15:58), 선한 일(딤전 6:17-18)에 두는 자가 하나님과 교제할 만한 참 성도이다.
    넷째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이다. 사울은 맹세하고(삼상 14:39; 19:6) 그가 한 맹세를 저버렸다. 그러나 입다(삿 11:30-39)와 한나(삼상 1:10-11, 24-28)는 맹세한 바를 그대로 지켰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요 하나님과 교제할 만한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할 만한 자, 곧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가 되자.
    [5-6절]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본문의 ‘저’는 앞절에 말한 대로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는 자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속에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자이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사람이 참으로 회개할 수 있다. 베드로의 증거대로, 이방인 고넬료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기 때문이었다(행 11:18).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며 그의 구원의 하나님께 의(義)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중의 복은 구원의 복이며 그 구원의 내용은 의(義)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3-5에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들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특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셨다고 증거했고, 또 로마서 3:23-24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다.
    6절은 “이는 그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니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Syr, NIV; 한글본문= LXX).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만세전 선택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자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를 믿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의를 받는다. 우리가 바로 이런 자들이다.
    우리는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의 증거를 나타내자. 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이 복된 구원을 널리 전파하자.
    [7-10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본문에 5번이나 반복하여 언급된 ‘영광의 왕’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원수 마귀와 모든 악한 일들을 물리치시는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영광의 왕’은 특히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예표한다. 그는 시편 22편에 고난의 종으로, 시편 23편에 선한 목자로, 본 시편에 영광의 왕으로 증거되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셨고(행 2:36) 영광 가운데 승천하셨다(딤전 3:16).
    이제 다윗은 “영원한 문들아 네 머리를 들라”고 외친다. ‘영원한 문’은 천국문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 천국에 들어가실 때 천국문은 그를 위해 활짝 열려야 할 것이다. ‘영원한 문’ 혹은 ‘옛부터 있는 문’(NAS, NIV)은 인류 초기부터 있었던 교회(계 13:8)의 문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핍박과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 교회들, 곧 주의 백성들은 기쁨으로 영접해야 하며 그가 장차 왕으로 세상에 재림하실 때에도 그러해야 한다.
    “너희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영광의 왕을 즐거이 환영하라는 뜻이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승천하시는 메시아를 환영해야 한다. 또한 지상에 있는 교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도 마음문을 활짝 열고 영광의 왕이신 주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영접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죄를 대속하신 고난의 주님은 지금 하늘에 계신 영광의 왕이시다. 우리는 마음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25편: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람
    [1-3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들은 다윗을 까닭 없이 속였다. ‘속이다’는 원어(바가드 ד)는 ‘배신적이게 행하다, 불신실하게 행하다, 거짓되이 속이다’는 뜻이다. 그는 다른 시편에서도 자신과 친하던 자가 배신하고 그를 대적했다고 말했다(시 41:9; 55:12-14). 주께서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함으로 세상이 그를 미워하였듯이(요 7:7), 성도가 악과 타협치 않고 바르게 살고자 하면 그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딤후 3:12).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했다. 1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2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하나님은 주권적 통치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원수들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군대가 침공했을 때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아뢰었었다(왕하 19:1, 14).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않을 것이다. 3절,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이것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이시다. 성도는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배신적이게 혹은 거짓되이 행하며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과 일일이 맞대결하지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자.
    [4-5절]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중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기를 원한다. 길은 생활 방식을 가리킨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잠언은 말한다(잠 16:25).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셨다(사 55:8-9). 세상에는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으며(마 7:13-14), 육신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으며(롬 8:5-6), 사람의 길이 있고 하나님의 길이 있다.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유익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되는 길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라고 말한다. 주의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다(시 119:105).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다(잠 6: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모세오경]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셨다(수 1:8). 성경의 교훈이 곧 하나님의 길을 보인다.
    5절 하반절은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윗이 하나님의 교훈을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고 또 구원하실 것이며 그가 하나님을 종일 앙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목자 되신 하나님을 아는 자이었고,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도 하나님의 교훈대로 사는 것이 환난을 이기는 최선의 길임을 아는 자이었다.
    우리는 환난 중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의 교훈을 사모하고 받으며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길로만 행하자.
    [6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다시 번역하면,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옵소서. 이는 그것이 영원 전부터 있음이니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그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도 영원하시다. 시편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에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이 26번 나온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긍휼과 인자를 알고 이 사실에 호소한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안에서뿐이다.
    [7절] 여호와여 내 소시(少時)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어릴 때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기를 소원한다. 물론 어른이 된 후에도 부족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의 어릴 때, 아직 믿음과 인격이 많이 부족했을 때의 실수와 부족, 흠과 연약은 때때로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미 다 용서하셨고 기억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과를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멀리 옮기셨고(시 103:12) 그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그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미 7:18-19). 사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 버려두셨던 것은 우리로 인간 본성의 심히 죄악됨을 깨닫게 하심으로 겸손케 하시고 하나님의 긍휼과 의만 의지하게 하시는 유익이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어릴 때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따라 그의 선하심을 인해 그를 기억하시기를 소원한다. 환난과 원수의 공격으로부터의 구원과 승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 긍휼, 자비, 은혜, 사랑은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자.
    [8-9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직하시다. 선하심은 긍휼하심, 인자하심, 은혜와 사랑과 거의 같은 개념이며, 정직하심은 올바르다, 의롭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하나님의 이 대조적인 두 속성은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겸비한 의이며 그의 선하심은 의와 올바름을 겸비한 선하심이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5-6). 의가 없는 사랑, 즉 불의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의도 참 의가 아니다. 선하심과 정직하심 즉 사랑과 의는 하나님의 필수적 속성들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길로 죄인들을 교훈하신다. ‘그 길’ 즉 하나님의 길은 선하고 올바른 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생의 행복을 위해 명령된 선한 말씀이며(신 10:13), 그가 지시하시는 길은 선한 길이고 그 길로 가는 자는 심령의 평강을 얻을 것이다(렘 6:16). 또 하나님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며(시 19:8),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다(딤후 3:16).
    하나님은 특히 온유한 자들에게 그 길을 가르치신다. ‘온유한 자’라는 원어(아나윔 םי)는 ‘고난당하는 자들, 겸비한 자들, 온유한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다. 고난은 사람의 인격을 온유하고 겸손케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교만은 불순종케 하나 온유와 겸손은 순종케 한다.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공부할 자격 요건이다. 하나님의 참된 양들은 겸손히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를 따른다(요 10:27; 계 14:4).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직하시며 우리를 선하고 정직한 길로 교훈하신다. 우리는 오직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그의 길을 배우며 가자.
    [10-11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모든 길이 인자와 진리라고 말한다. ‘인자’(仁慈)는 선하심, 긍휼, 은혜, 사랑과 같은 뜻이고, ‘진리’는 진실, 성실, 신실 등의 뜻이다. ‘길’은 그의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며 우리에게 인자와 진실의 삶을 교훈하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인자와 진실이시다.
    특히 하나님의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들에게 그러하다. ‘언약’은 그가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이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언약으로 사람들을 대하셨다. ‘증거’는 그가 자신의 뜻에 대해서와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하신 증거의 말씀들, 즉 그의 계명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언약과 증거 곧 계명들을 어기고 저버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두려운 공의가 있을 뿐이지만,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는 그의 인자와 진실이 있다. 행위가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의 진실함과 성실함을 요구하시며, 그의 언약과 율법은 우리의 많은 죄와 허물을 깨우쳐 우리로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크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그의 큰 죄악을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가 크고 심각함을 더욱 알게 되며 하나님께 그 죄의 용서를 구하게 된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라는 말은 “선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이름, 즉 선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인하여”라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자신의 죄의 용서를 구한다.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대로 회개하는 자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만 의지하고 모든 죄를 버리고자 하는 중심을 가지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죄의 용서를 빌고 사함을 얻자.
    [12-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누릴 복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우러러보고 의지하며 그에게 순복하는 태도이다. 이런 자는 어떤 복을 받는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택할 길을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길은 가장 좋은 길일 것이다. 인생의 길은 선택의 연속인데 하나님께서 택할 길을 가르쳐주시니 얼마나 복된가.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보다 앞서 행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의 태도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을 때 가져야 했던 마음가짐이었고(민 9:17-23), 또 다윗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물었던 마음가짐이었다(삼하 5:19, 23).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영혼의 평안을 주신다. 13절,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평안히’라는 원어(베토브 בוֹט)는 ‘형통하게, 행복하게’라는 뜻도 가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육으로 복을 누리는 길이다. 잠언 3장은 지혜를 얻는 자가 가장 복됨을 증거하는데(13-18절), 지혜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잠 1:7; 9:10). 또 사도 바울은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하였다(딤전 4:8).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땅을 상속받는 복을 주신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안정과 복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 복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복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택할 길을 알며 영혼의 평안과 형통을 얻고 그 자녀들까지 영육의 복을 받는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자.
    [14-15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누릴 복에 대해 좀더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친밀함이 그에게 있다. ‘친밀함’이라는 원어(소드 דוֹס)는 ‘회의, 친밀한 대화’라는 뜻이다. 욥기 29:4,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친밀함]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잠언 3: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친밀함]이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의 친밀한 교제와 대화가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그에게 알게 하신다. ‘그 언약’은 율법과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즉 구약과 신약의 중심 내용은 율법과 복음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얻는 첫 번째 복은 그의 뜻과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그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하였다(롬 12: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 충만한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그물은 원수들이 쳐 놓은 시험거리이다. 마귀는 성도를 넘어뜨리고 범죄케 하려고 은밀하게 그의 발 앞에 그물을 놓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항상 그를 앙망하는 자의 발이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그물을 피하게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그에게 있고, 바른 성경 지식을 얻고, 그의 발이 그물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16-18절]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다윗은 자신이 처한 고난의 현실에 대해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라고 말한다(16절).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때때로 혼자만 남아 있고 사람들이 그를 다 버릴 때가 있다. 요셉이나 모세가 그러했고 엘리야나 미가야나 예레미야도 그러했을 것이다. 다윗이 지금 그러하다. 또 그는 괴로운 상태에 있다. 또 그는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라고 말하며 (17절), 또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라고 말한다(18절). 세상에서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것은 때때로 근심과 걱정, 곤고함이 있는 고난의 길이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시 34:19).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며 그에게 호소한다. 그는 “주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며 그에게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한다(16절).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성도도 본래 죄인이었고 여전히 죄성(罪性)과 부족이 있으나,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다. 또 다윗은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라고 간구한다(17절). 긍휼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인생의 난제(難題)의 해결책이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시 50:15; 눅 11:8-13).
    다윗은 또 자신의 죄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8절). 그는 고난 중에 자신의 죄들을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으면 고난으로부터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세상에서 성도는 많은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과 죄 용서를 구하면서 그 고난으로부터 건짐받기를 간구하여 얻자.
    [19-22절]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다윗의 처한 현실은 고난이었다. 다윗에게는 원수가 많았고 그들은 다윗을 심히 미워하였다. 다윗뿐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많은 환난이 있다. 그래서 다윗은 22절에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고난이 많고 또 성도에게도 그러하다(행 14:22).
    다윗은 고난의 현실을 믿음과 기도로 대처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20절, “내가 주께 피하오니.” 21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를 의지했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고난 중에 두려워 떨고 당황하고 방황하겠지만, 믿음이 있는 자를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20절,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는 것은 고난 중에 낙심하거나 낭패로 끝나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이다. 또 22절,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救贖)하소서.” 성도는 여러 가지 고난 중에도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께 나아간다. 성도에게는 도움을 요청할 하나님이 계시다.
    다윗은 심령에 담대함이 있었다. 21절을 다시 번역하면, “완전함과 정직이 나를 보호하게 하소서.” ‘성실’이라는 원어(톰 ם)는 ‘완전함, 순전함’이라는 뜻이다. ‘완전함’은 본인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다른 진실한 이들이 볼 때 흠과 점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다윗은 평소에 완전함과 정직함으로 행하였고 그래서 담대하였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이 올 때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께 피하자. 또 평소에 완전함과 정직함으로 행하기를 힘쓰자.
    26편: 완전함에 행하며 하나님을 바람
    [1-2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1절을 다시 번역한다면,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 나를 판단하소서. 또한 내가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한다. ‘완전함’이라는 원어(톰 ם)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김으로 흠과 부족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노아가 완전하다는 말(타밈, 창 6:9)이나 욥이 순전하다는 말(탐, 욥 1:1)은 같은 어원이다. 다윗은 노아와 욥과 같이 평소에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 흠과 부족이 없는 삶을 살았다.
    다윗은 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요동치 않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믿음의 사람이었다(삼상 17:45-47). 또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불변하시며 그를 의지하는 자는 요동치 않을 것이다. 시편 125:1에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은 담대히 하나님의 판단을 구한다. 1절, “나를 판단하소서.” 2절,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나를]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내 뜻’이라는 원어(길요사이 יוֹי)는 ‘나의 신장(腎臟), 나의 내부’라는 말이다. ‘내 뜻과 내 마음’은 ‘나의 깊은 생각과 마음과 뜻, 즉 나의 마음 중심’을 가리킨다. 또 ‘단련하다’는 원어(차라프 ף)는 ‘제련하다, 시험하다’는 뜻이다. 그는 담대히 하나님의 판단과 시험을 구한다. 그에게는 믿음의 담대함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완전하게 행하자. 그러면 우리도 믿음의 담대함을 얻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요일 3:21-22).
    [3-5절]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םי 나알라밈, 자신을 감추는 자들, 속이는 자들)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3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으며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였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앞절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던 그의 담대함의 근거를 보인다. 그의 담대함의 근거는 첫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고 둘째 그의 평소의 순종생활이었다.
    첫째, 다윗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그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믿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 용서함을 받았고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다윗은 평소에 하나님의 진리 중에 행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교훈과 그의 진실한 성품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 하며 또 그의 진실한 성품을 본받아 범사에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요한삼서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또 다윗은 4절과 5절에서 자신이 거짓되고 악한 자들과 동류가 되지 않았고 또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번역하면 “나는 헛된 사람들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며 속이는 자들과 동행치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하였사오며 악한 자들과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그것은 시편 1:1이 말한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성도는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 안에 행하자. 또 헛되고 속이고 악을 행하는 자들과 친근히 하지 말자.
    [6-7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다윗은 깨끗한 손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한다. ‘무죄하므로’라는 원어(베닉카욘 ןוֹי)는 ‘깨끗함 중에서, 무죄함 중에서’라는 뜻이다. ‘손을 씻는다’는 말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나 단에 가까이 가서 제물을 불사를 때에 먼저 그들의 손과 발을 물대야에서 씻는 것을 생각케 한다(출 30:19-20). 후에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대야 10개 외에 바다라는 것을 1개 만들었는데, 번제물은 물대야들에서 씻고 제사장들은 바다에서 씻었다(대하 4:6).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라는 말은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지만 제사장들이 제단 주위에서 분주히 제사들을 수행하듯이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표현이다.
    성경은 우리가 거룩한 손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깨끗한 제물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고 증거한다.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말라기 1:11,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증거하겠다고 말한다.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에게 감사의 말씀을 소리내어 아뢴다는 뜻이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편 100: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또한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모든 기이한 일들을 증거하고 찬송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찬송의 내용이기도 하고 또 전도의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깨끗한 손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깨끗함 중에 행하므로 그를 바르게 섬기자. 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증거하자.
    [8-12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신 집과 그 영광이 거하는 곳, 곧 성막을 사랑하였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막을 사랑할 것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는 교회를 사랑할 것이며, 주께서 피흘려 사신 백성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사랑할 것이다.
    또 다윗은 완전함에 행하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했고, 3절에서 진리 중에 행하였다고 했다. 이제 그는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11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양심에 거리낌없는 순종 생활을 힘썼고 흠 잡을 데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12절에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라는 말도 평지에 견고히 섰다는 뜻도 되지만, 또한 의와 정직 가운데 섰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다윗의 대적자들의 모습은 달랐다. 그들은 9절에 ‘죄인’과 ‘살인자’라고 표현된다. 악한 자들은 남을 죽이고 남의 피를 흘리는 자이다. 또 10절은 “저희 손에 악특함 혹은 악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라고 말한다. 뇌물은 불의한 일을 위해 주는 불의한 선물이다. 악인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을 해치고 죽이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기 마소서”(9절), “나를 구속(구원)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11절)라고 기도한다. 그는 지금 죽을 위기에 처해 있지만, 담대히 하나님의 인자하심(3절)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하는 자가 되자. 그것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바른 생활로만 가능하다.
    27편: 하나님을 담대히 의지함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생명의 능력”으로 고백하며 의지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시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요 1:9; 8:12).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무지한 우리의 심령을 밝혀 갈 길을 알게 하시며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으시고 의를 입혀주신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 되시고 복이 되신다. 빛은 이와 같이 좋은 것이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 ‘구원’이라는 원어(예솨 ע)는 ‘도움, 구원’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건져주신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능력이시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 쇠약해질 때, 즉 우리가 병들고 낙심할 때 우리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는 자이시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빛과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시다.
    다윗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는 환경적 위협과 악인들의 위협이 많이 있지만, 성도는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고 생명의 힘이 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3:5-6에서도 고백하기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 살아계신 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빛,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의 능력이심을 바로 알고 의지하며,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2절]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다윗의 대적자들과 그 원수된 행악자들은 그의 살을 먹으려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악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의요 무엇이 악인가? 공의와 악의 차이는 무엇인가? 공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은 이웃을 해치는 것이다. 악한 자는 선하고 무고한 자를 해치기도 한다.
    의인은 선악 분별이 분명하고 선을 선이라고, 악을 악이라고 판단하고 말한다. 물론 의인이 악을 보고도 하나님께 맡기고 침묵할 때도 있지만, 상대방의 회개와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 악을 지적하고 고발하고 책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악인은 선악을 분별치 못하고 때때로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한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따라 행한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다윗은 그의 대적자들이 그의 살을 먹으려고 그에게 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를 해치고 죽이려 한다는 뜻이다. 남을 해치는 것은 그의 살을 먹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살을 먹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대적자들이 그에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다고 말한다. 실족하는 것은 발을 잘못 디디는 것이다. 실족하면 넘어진다. 그러면 발목 부상을 입어 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윗의 원수들의 넘어짐은 일시적인 넘어짐이 아니고 영구적이고 최종적인 넘어짐이었다. 그를 핍박하던 사울도 엎드러졌고 그를 대적하던 아들 압살롬도 죽고 말았다. 그들은 다 완전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우리는 대적자들, 행악자들의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질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晏然)하리로다.
    다윗은 심지어 군대가 그를 대적하여 진을 칠지라도 마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군대는 많은 무리들, 훈련되고 조직적으로 정비된 무리들이다. 한두 명의 비난과 대적과 공격도 마음이 쓰이고 마음이 상하는데 군대가 대적하여 진친다면 인간적으로 얼마나 두렵고 마음이 쓰이겠는가.
    또 다윗은 전쟁이 일어나 그를 치려 할지라도 오히려 안연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은밀한 싸움이 아니고 공개적 싸움이며, 부분적 싸움이 아니고 전면적 싸움이다. 부분적 공격도 사람들을 죽이거나 중상시킬 수 있는데, 전면적 공격은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를 당하겠는가. 은밀한 비난과 음모도 사람에게 해가 되는데, 공개적 비난은 그에게 얼마나 더 해가 되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두렵지 않고 안연(晏然)할 것이라고 말한다. ‘안연하다’는 원어(보테아크 וֹב)는 ‘안전하다’는 뜻이다. 다윗이 그런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구원하심과 보호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확신 있는 고백을 하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교훈하였다(벧전 4:19).
    우리는 세상에서 대적자들의 어떤 공격도 두려워하지 말고 안연히 행하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만 행하자.
    [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다윗은 하나님께 한가지 일을 청하였고 이제도 그것을 구하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생전에 하나님의 집에 거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그 전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었다. 우선, 다윗은 자신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간구한 것이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다윗은 그의 생전에,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의 전에서 사모하기를 원했다. ‘아름다움’이라는 원어(노암 ם)는 ‘사랑스러움, 기뻐함, 즐거워함’이라는 뜻이다. ‘사모한다’는 원어(바카르 ר)는 ‘조사하다, 찾다, 묵상하다, 기쁨을 가지고 생각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여 하나님을 만나며 그와 교제하며 그를 섬기기를 원하며 그를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의 모습과 표정과 그의 음성과 뜻과 그의 존재 자체를 찾고 묵상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이것이 참된 경건이며 종교요 믿음이다. 아모스 5:4는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한다. 다윗의 속에는 이 귀한 것이 있었다.
    다윗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고(요 6: 27, 29), 마르다에게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눅 10:41-42).
    우리의 구하는 것도 바로 이 한가지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썩어질 것, 없어질 것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하자.
    [5-6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다윗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이유를 보인다. 다윗은 환난 때에 인간적 수단 방법을 찾아 고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와 그와 교제하기를 원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며 환난에서 승리하는 길임을 알았다.
    다윗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그를 숨기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 초막과 장막은 성막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는 환난 날에도 피할 곳을 얻는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우리의 피할 피난처이시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91편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자에게 극한 염병과 재앙이 가까이 하지 못한다고 증거한다(1-10절).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를 바위 위에 높이 두실 것이며 그의 머리는 그를 두른 원수 위에 들릴 것이라고 말한다. 바위 위에 높이 두는 것은 안전함을 가리킨다. 시편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또 머리가 원수 위에 들린다는 표현은 확실한 승리를 의미한다. 시편 3:3, “여호와여 주는 . . .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다윗은 그 장막에서 하나님께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노래하며 그를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은 승리할 때 교만해지지만,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승리케 하심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자.
    [7-8절]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그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기를 구한다.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많이 말한다. 시편 18:6,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편 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시편 57:2,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예레미야 29: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누가복음 18:7,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부르짖는 기도는 전심으로 간절히 하는 기도이다. 묵상기도는 때때로 잠이 오고 잡념이 들 수 있지만, 소리내서 하는 기도는,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한다면, 더 낫다.
    다윗은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라고 말한다. 감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할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그의 응답을 기대할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긍휼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실 때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대답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이다(시 24:6).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구하는 것이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며 거기에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고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며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구하자.
    [9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첫째로, 다윗은 과거의 체험을 증거한다. 9절에 보면, 다윗은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라고 부른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체험하였다. 그는 시편 46:1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고백했다.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을 취해 에벤에셀 즉 ‘도움의 돌’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이었다(삼상 7:1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건지시는 구주이다. 바울은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고백한다(고후 1:10).
    둘째로, 다윗은 현재 하나님께 간구한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주의 얼굴은 은혜와 위로의 얼굴이며 기쁨과 평강의 얼굴이다. 하나님의 버리심은 그의 진노의 행위이시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를 노하여 버리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은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셋째로, 다윗은 간구의 근거를 말한다. 본절의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할 것임이니이다.” 이것은 다윗의 확신이기도 하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버리지 않으나, 그런 경우가 혹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환난 중에 과거의 체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하며 또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확신하자.
    [11-12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길로 행해야 한다. 그 길은 정로(正路)이며(사 30:11),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다(렘 6:16). 하나님의 길은 바른 길, 선한 길, 지혜의 길, 평안의 길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사 55:8-9). 그러나 그 길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길이다(신 10:12-13).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환경 여건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길을 걷고 지켜야 한다. 그 길은 성경에 밝히 계시되어 있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한다. ‘평탄한’이라는 원어(미쇼르 רוֹשׁי)는 ‘정직한’이라는 뜻도 있다(NIV). 그것은 안전하고 평안한 길이라는 뜻과 더불어 올바르고 정직한 길이라는 뜻도 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이끄셔서 든든히 세우시며 고난을 제거하시고 평안을 주시며 올바르고 정직한 길로 행케 하신다.
    다윗이 하나님의 길과 평탄한 길을 구한 이유는 원수들 때문이었다. 11절, “내 원수를 인하여.” 12절, “이는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위증자’이었다. 즉 그들은 다윗에게서 흠 잡을 것이 없으므로 거짓 증거를 사용하였다. 또 그들은 ‘악 혹은 강포를 토하는 자’이었다. ‘악’이라는 원어(카마스 ס)는 ‘강포’라는 뜻이다. 성도는 온유한 자이나 악인은 강포하다. 다윗의 악한 원수들은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고 해치려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를 없애고 죽이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생명을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려는 원수들을 겁내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길만 구하며 걷자. 그 길이 의의 길이며 평강의 길임을 알자.
    [13-14절]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였다. 13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만일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주의 선하심 볼 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나는 낙심하였을 것이라]”(KJV, NASB). ‘산 자들의 땅’은 이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는 세상 곧 천국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선하심과 은혜를 베푸신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도는 이 사실을 믿고 환난 중에도 낙심치 말아야 한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다른 이에게 교훈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라, 강하고 담대하며 하나님을 바라라는 교훈이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도우심과 구원을 믿고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뿐이다. 시편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디모데전서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야 한다. 세상은 영적 싸움터와 같다. 히브리서 10:34-35,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그러나 이 담력은 진실한 순종 생활에서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진실한 순종 생활을 힘씀으로써 항상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며 소망하자.
    28편: 기도 응답을 인해 찬송함
    [1-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은 지금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갈 상황에 처해 있다. ‘무덤’이라는 원어(보르 רוֹבּ)는 ‘구덩이’라는 뜻이다. 무덤은 죽음의 구덩이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때때로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갈 듯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앙훈련의 기회이다.
    다윗은 그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1절, “여호와 나의 반석이시여(KJV, 원문의 액센트)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2절, “내가 . . . 주께 부르짖을 때에.” 부르짖음은 조용히 묵상하거나 속삭이는 기도가 아니고 큰 소리로 하는 기도, 때때로 울부짖는 기도이다. 성도는 때때로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어 간구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귀를 막지 마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 속에 거하셔서 우리의 작은 기도 소리도 들으신다. 하물며 그는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얼마나 더 잘 들으시겠는가.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않는다면, 우리가 철저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다윗은 특히 주의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였다. ‘성소’라고 번역한 원어(데비르 코드tnp카 רי)는 ‘성소의 내실(內室)’ 곧 지성소(NIV)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간절함의 표시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갈 상황에서도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요 14:13-14)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자.
    [3-5절]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악인과 함께 이끌지 마시기를 구한다. ‘함께 끈다’는 말은 동등하게 행하게 버려두거나 동등하게 취급하여 처리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악인처럼 악하게 행동하게 버려두지 마시고 그를 지켜 바른 길로 행케 하시며, 그를 악인처럼 멸망의 길로 가지 않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말과 악인의 결말이 다름을 증거해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본문은 악인들의 모습도 증거한다. 그들은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다(3절). 즉 악인들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다. 또 악인들은 악하며 악을 행한다. 3절,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 . . 저희 손의 지은 대로[행한 대로].” 악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생각지 않는다. 5절,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행하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즉 악인들은 불경건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본문은 악인들의 결말도 증거한다.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행한]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의인과 악인의 결말은 뚜렷이 다르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깨닫고 악인으로 살지 말고 의인으로 살자.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자(롬 12:9; 살전 5:21-22).
    [6-7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진심으로 그를 의지하였고, 그의 믿음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표현되었다. 6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참된 믿음은 기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신 후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부언하셨다(눅 18:8).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어주셨고 그를 도우셨다. 6절,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절,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나의 힘’이라는 말은 낙심하거나 연약할 때 힘이 되신다는 뜻이며 ‘나의 방패’라는 말은 원수들의 비난과 공격을 막아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를 도우시고 힘 주시고 지켜주신다. 믿음의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마가복음 11:2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받을]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다윗은 기도의 응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한다. 6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7절,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찬송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노래이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자마다 찬송할 것이다.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자. 또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진심의 찬송을 올리자.
    [8-9절]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저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왕 다윗을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힘이시요 기름 부음 받은 자신에게 구원의 산성이 되심을 확신한다.
    다윗은 그 하나님께 몇 가지 소원을 아뢴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구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소서.” 구원은 원수의 핍박이나 질병이나 여러 재난에서 건져내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특히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셨다. 이 큰 구원에 비교해보면,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현실의 어떤 어려움에서라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산업에 복을 주시기를 구한다. “주의 산업에 복을 주소서.” ‘그의 산업’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이다. 하나님의 산업은 오늘날 신약교회도 가리킨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며 복을 주는 하나님이시다. 그의 복은 영육의 것을 다 포함하고 현세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영육의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셋째,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 목자가 되시기를 구한다. “저희의 목자가 되소서.” ‘목자가 된다’는 원어(라아 ה)는 ‘양을 먹인다, 인도한다’는 뜻이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된 우리에게 영육의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의의 길,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넷째,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영원토록 붙드시기를 구한다. “영원토록 드십소서.” ‘든다’는 원어(나사 א)는 ‘들어올린다, 붙든다, 돕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영원히 붙드시고 도우실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힘과 구원을 확신하며 간구하자.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저희에게 복을 주소서. 저희를 먹이시고 영원히 붙드소서.
    29편: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함
    [1-2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다윗은 권능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그는 ‘여호와께 돌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한다. ‘권능 있는 자들’은 이 세상 권세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영광과 능력을 자신에게 돌리기 쉽다. 그러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나님만 온 우주에 홀로 참 권세자시다. 인간의 권세는 조만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사람의 이름이 그 자신을 나타내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그의 이름의 영광’(원문)은 하나님이 본래 가지고 계신 영광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만든 분이 아니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그는 영원 자존자(自存者)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지혜와 능력, 아름다움이 충만하신 자이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신 영광, 즉 그의 이름에 합당한 그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다윗은 또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한다. ‘거룩한 옷을 입고’라는 원어(베하드랏 코데쉬 שׁ ת)는 ‘거룩함의 영광으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와 구별되고 특히 죄악된 것과 구별되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되 죄악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각과 방식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만 돌리자. 우리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자. 우리는 거룩한 방식으로 그에게 경배하자.
    [3-6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3절부터 9절까지에 ‘여호와의 소리가’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온다. 그것은 하늘의 천둥소리를 가리킨다. 천둥소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낸다. 자연의 큰 위엄은 창조주 하나님의 큰 위엄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폭우를 쏟아내시기 전 하늘이 캄캄한 비구름으로 뒤덮이고 천둥 번개를 동반하게 하신다.
    천둥 번개가 얼마나 요란하고 힘이 있든지 그 소리는 백향목을 꺾어 부순다. 백향목은 키가 36m까지나 크고 튼튼한 나무이다. 그러나 벼락이 치면 백향목도 꺾이며 그 토막들은 송아지같이 사방으로 뛸 것이다. 레바논과 시룐이 들송아지같이 뛸 것이다. 헤르몬산은 레바논산 오른편에 있는데, 시돈 사람들은 그 산을 시룐이라고 불렀다.
    [7-9절]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본절은 뇌성과 번개를 가리킨다. 광활한 광야는 하나님의 우렁찬 천둥소리로 진동한다. 9절에 ‘낙태’라는 원어(쿨 לוּח)는 출산을 뜻한다. 새끼를 밴 암사슴이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새끼를 출산한다. 천둥, 번개, 폭우로 수풀에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난다. 9절의 ‘모든 것’(쿨로 וֹלּ)은 ‘그의 모든 백성’이라는 뜻일 것이다. 자연만물도 그러하지만, 특히 그의 모든 백성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자연만물 속에, 특히 천둥과 번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깨닫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자.
    [10절]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홍수 때에’라는 원어(람맙불 לוֹבּ)는 ‘그 홍수 때에’라는 말로서 노아 시대의 홍수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에 좌정(坐定)하셨다. 하나님은 그 홍수를 내리셨고 주관하셨다. 창세기 6: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노아 홍수 때에 증거되었듯이, 하나님은 온 세상에 유일하고 영원하신 왕이시다.
    [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능력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실 수 있고 과연 주실 것이다. 또 그가 주시는 힘은 완전하여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는 자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사야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주신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왕이시며 천지를 진동시키실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천지에 평안과 안정을 주실 수도 있다. 이사야 45:7,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인간의 모든 시끄러운 문제를 잠잠케 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참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영원한 왕이심을 깨닫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또 그가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주심을 깨닫고 구하여 얻자.
    30편: 곤고함에서 건지심을 찬송함
    [1-3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의 대적들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나를 끌어내소서,”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또 그는 심한 질병 중에서 거의 죽을 지경에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를 고치셨나이다,”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본문에 ‘음부’(쉐올 לוֹא)는 ‘무덤’을 가리키고, ‘무덤’(보르 רוֹבּ)은 ‘구덩이’라는 뜻이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도에게는 종종 죽음의 위기가 있다.
    다윗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성도는 어려운 때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아는 행복자이다. 그러나 절망적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자는 불쌍하다. 고난은 유익하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단련시키신다(롬 5:3-4).
    다윗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높인다. 하나님은 그를 곤란에서 건져내셨고 병을 고치셨다. 그는 죽음의 구덩이에서 그를 끌어내셨다. 그 체험은 그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위해 살게 만든다. 성도는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더 높이며 그를 섬기며 그를 위해 살게 된다. 은혜를 체험한 자마다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자. 또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며 더욱 하나님을 높이자.
    [4-5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의 성도들’(원문)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경건한 자들을 가리킨다. 또 ‘그의 거룩한 이름에’라는 원어(레제케르 코드쇼 וֹשׁ ר)는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경건한 자들은 그의 뛰어나신 위엄과 영광, 그의 크신 긍휼의 영광을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한다. 찬송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5절 전반부를 다시 직역하면, “이는 잠시간은 그의 진노 안에 있으나 생명은 그의 호의 안에 있음이로다.”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잠시 동안 지속된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다(애 3:33). 그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매를 들어 때리시지만, 자기 백성을 영원히 노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다윗은 “생명은 그의 호의 안에 있다”고 말한다(KJV). ‘생명’이라는 원어(카임 םי)는 ‘평생’이라는 뜻보다는 ‘복된 생명’이라는 뜻 같다. 그것은 구원과 기쁨과 복을 포함하는 개념일 것이다. 물론 본문은 이러한 생명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전반부의 ‘잠시간’이라는 말(레가 ע)과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징벌하시지만 또한 고치시고 회복시키신다(호 6:1). 하나님의 호의는 그의 진노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이다.” 사사기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주신 평강의 기간은 그가 내리신 징벌의 기간보다 보통 2배에서 심지어 5배 가량까지 길었다. 예를 들어, 사사 옷니엘 때 이스라엘은 8년간 징계를 받았으나 40년간 평안을 누렸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책을 받을 때 낙심치 말고 달게 받자(히 12:5-6). 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확신하고 늘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하자.
    [6-7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형통할 때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졌었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평안하고 형통할 때 육신적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지 못하는 육신적 자신감과 안정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실상 그런 자신감과 안정감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삶에는 평안과 고난이 교차되어 나타나며 고난이 닥쳐오면 사람은 여지없이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자신의 산을 세우셨다고 고백한다. ‘내 산’ 곧 다윗의 산은 다윗의 왕국을 가리킬 것이다. 그 왕국은 시온 산에 세워져 있거니와 구약성경은 왕국을 ‘산’으로 자주 표현한다(사 2:2; 단 2:35, 44). 자신의 왕국이 하나님의 은혜로 굳게 세워졌다는 다윗의 깨달음은 바른 것이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가정도, 사업도 그러하다.
    그러나 다윗은 또한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리우시매 자신이 근심하였다고 말한다. 세상이 밝은 것은 태양 때문이며 태양 빛이 가려지면 땅 위에 그늘과 어두움이 생기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인생은 평안과 형통을 누리지만, 그 은총의 빛이 가려지면 그에게 즉시 환난과 곤고함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육신적 자신감과 안정감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며 의지하자. 가정이나 사업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자.
    [8-9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다윗은 죽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9절 전반부를 다시 번역하면, “나의 피에,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나의 피에’라는 말은 ‘내가 피 흘려 죽을 때에’라는 뜻 같다. 그것은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라는 구절과 동일한 뜻이다. 다윗은 자신이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죽지 않기를 간구한 것이다.
    그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9절 후반부가 그것을 보인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는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찬송하고 그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서 찾았다. 이러한 삶의 목표는 매우 성경적이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0절]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의 회복과 연장이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으로 될 것을 믿었다.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다. 우리의 생명의 연장과 강건함 그리고 의롭고 바른 삶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자. 또 이를 위해 그의 긍휼에 의지하여 우리 생명의 연장과 강건함을 구하자.
    [11-12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은 전에 슬픔 가운데 있었고 베옷을 입은 자와 같았다. 그것은 그의 대적들 때문에, 그의 질병 때문에, 죽음의 위협 때문에이었다. 그는 큰 연약 중에, 곤경 중에 있었다. 이 세상은 슬픈 일이 많은 세상이며 우리도 구원받기 전에는 슬픔의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기쁨을 주셨다. 그는 그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고 그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다. 죽음의 곤경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이처럼 기쁨의 춤을 출 것이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에게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뻐하였다(출 15장). 에스더 때에 다 멸절될 위기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구원받은 유다인들은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해 즐거움이 된 12월 14일과 15일을 부림절로 지키기 시작했다(에 9:21-22).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 슬픔이 변하여 춤추며 즐거워함이 되리라고 하셨다(렘 31:13).
    다윗은 그런 기쁨으로 춤추며 기뻐하였다.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살전 5:16; 빌 4:4).
    하나님의 큰 구원을 체험한 다윗은 이제 심령에서 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고 영원히 그에게 감사를 올리고자 한다. ‘내 영광으로’라는 말은 ‘내 영혼으로’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그의 은혜를 찬송케 하시기 위함이다(엡 1장). 우리는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야 한다(히 13:15).
    하나님은 슬픔의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기쁨과 평안을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자.
    31편: 고통 중에 담대히 기도함
    [1-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피신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였사오니”(원문).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믿음이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며 구원을 간구하였다. 믿음은 기도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고난 중에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로 결코 부끄럽게 마소서”(원문)라고 기도하였다. 하나님께 피하고 그만 의지했는데 그의 지키심과 도우심과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원수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또 그는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지금 그는 급박한 구조가 필요한 고난 가운데 있다. 그는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이 절실하였다.
    다윗은 특히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주의 의(義)’ 곧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 주신 의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시편 4:1에서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다(롬 10:4; 고전 1:30). ‘주의 의’라는 말이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킬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며 죄를 회개하고 겸손히 그의 뜻을 행하는 자를 구원하실 것이지만, 교만하여 불경건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며 구원과 도우심을 간구하자. 예수님의 의만 믿고 겸손히 순종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자.
    [3-4절]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과 산성”이라고 고백한다. 4절의 ‘산성’은 ‘요새’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반석, 산성, 요새는 원수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마귀의 시험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그의 백성이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되신다.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지도하시는 길은 가장 좋은 길, 완전한 길, 복된 길, 평안의 길, 영생의 길이다.
    특히, ‘주의 이름을 인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모욕을 당하지 않고 영광을 얻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에스겔 20:9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말씀하셨다(겔 20:9). 다윗은 시편 23:3에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해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했다. 시편 저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죄를 사하시고(25:11),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들을 도우시며 구원하시고(79:9), 그의 이름을 인해 그들을 선대하시기를 간구하였다(109:21). 또 선지자 예레미야는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렘 14:7).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다윗은 또 원수들이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내시기를 기도하였다. 사람의 지식과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사람은 종이 한 장 뒤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는 우리의 원수들의 비밀히 친 그물에서 우리를 빼어내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반석과 산성으로 삼자. 또 그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원수의 은밀한 그물에서 빼어내시기를 기도하자.
    [5-6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한다. 그는 몸 안에 있는 영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몸의 건강과 안전도 필요하지만, 몸은 결국 늙고 쇠하고 죽을 수밖에 없고, 우리의 영은 내세에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우리의 영이 어디로 가는가는 몸의 건강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나의 영을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부탁할 수 있는가? 나의 영을 돌보아 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오직 참되신 하나님만 우리의 영을 지켜주시고 복되고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실 수 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하나님이 자신을 구속(救贖)하셨음을 고백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거짓이 없으시며 진실하시다(출 34:6). 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요 17:17).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속(救贖)하셨다. ‘구속’(救贖)은 값 주고 사셔서 건져내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친히 구원하신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은 또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허탄한 거짓’이라는 원어(하벨레 솨웨 א י)는 ‘속이는 헛된 것들’ 혹은 ‘헛된 우상들’이라는 뜻이다. 이방신들과 우상들은 헛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사람을 속이고 그에게 구원이나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를 멸망과 지옥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자들을 존경하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을 미워하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참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말씀만 믿고 하나님께만 우리의 영혼을 의탁하자.
    [7-8절]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그가 곤란 중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떤 것이었는가?
    다윗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성도가 곤란을 당하고 환난 중에 처한 것을 보시고 아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의 손 안에 감금되지 않게 하셨고 그의 발을 넓은 곳, 곧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 세우셨다고 말한다.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과 백성들을 환난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여러 번 비상한 방법으로 구원하셨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이라는 비상한 방법으로 구원해주셨다. 이스라엘은 주위의 이방 나라들의 침략 때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많이 체험하였다. 아사 왕 때, 여호사밧 왕 때, 히스기야 왕 때 등의 역사는 그런 예들을 보여준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풀무불 혹은 사자굴에서 건져주신 일이라든지, 에스더 때에 민족 몰살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구원얻은 일이라든지, 신약시대에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하신 일 등도 그런 예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았다. 그 결과, 성도는 세상에서 큰 환난을 통과할지라도 장차 흰옷 입은 승리자로 나타날 것이며(계 7:9-10, 14) 또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히브리서 2:14-15의 증거대로, 성도는 사망과 사탄 권세를 이길 것이다. 성도는 이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은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자. 고난의 세상에서도 항상 주 안에서 영광의 천국을 바라보자.
    [9-10절]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다윗은 고난의 현실 가운데 있다. “내 고통을 인하여”라는 구절은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라는 뜻이다. 그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 또 근심으로 그의 눈과 그의 영혼과 그의 몸이 쇠하였다. 즉 심신이 쇠약해진 것이다. 또 그는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라고 말한다. 그의 사는 나날은 슬픔과 탄식의 시간이었다. 그런 고통의 시간들이 여러 날, 아니 아마 여러 해 계속되었다. 또 그는 그의 기력이 약하며 그의 뼈가 쇠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몸은 힘이 없었고 그의 뼈도 약해졌다.
    다윗은 그의 연약과 고통이 자신의 부족과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당하는 고통이 자신의 죄와 부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징벌은 엄격하고 혹독하였다. 하나님은 자기 자식을 근실히 징계하는 부모처럼 자기 백성을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증표이며 결과적으로 그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의 인격을 거룩케 하는 유익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자신이 고통의 현실에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었다. 미가 7:18-19,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안에서만 살자. 우리의 죄와 부족 때문에 징계를 받을 때라도,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회개하자.
    [11-14절]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다윗은 극심한 고난 중에 있었다. 그는 대적들에게 모욕과 비난을 당했고 이웃들에게 심히 당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또 그는 사람들의 따돌림도 받았다. 길에서 그를 보는 자는 그를 피하였다. 그는 죽은 자같이, 깨진 그릇같이 사람의 생각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다. 또 그는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사방에는 두려움이 있었고 원수들은 그의 생명을 빼앗기를 의논하였다.
    다윗이 당한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비슷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모욕과 비난을 당하셨다. 십자가에 처형되시던 때에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그를 모욕하였다. 또 무리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의 전도사역 초기부터 그를 죽이기를 의논하였고 마침내 그 일을 이루었다(마 12:14; 요 5:18; 마 26:3-4, 59). 예수 믿는 우리도 세상에서 모욕과 핍박과 비방을 받을 것이다(행 14:22; 딤후 3:12). 바울은 그것을 체험하였다(고전 4:12-13; 고후 6:8).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그런 모욕과 비방을 당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마 5:11).
    다윗은 이러한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14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그러나 나는 당신을 의지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하였나이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참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일 5:4).
    우리는 세상에서 참된 신앙생활의 길에 모욕과 비방과 핍박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 어떤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자.
    [15-16절]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은 자신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한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내 시대’라는 원어(잇토사이 י)는 ‘나의 시간들, 나의 시간의 과정들, 나의 환경들’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자신의 시간들, 자신의 환경여건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섭리 신앙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0:29).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다윗은 섭리 신앙을 가지고 원수들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우리의 기도와 응답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원수들과 핍박하는 자들의 손이 힘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은 더 힘이 있으시다. 우리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므로, 원수들의 손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다윗을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하나님께는 그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빛을 간구한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긍휼의 얼굴이다. 흐렸던 날이 개고 땅에 밝은 햇빛이 비취듯이, 고난이 지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빛이 비췰 것이다.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다(민 6:25). 하나님께서 긍휼과 인자하심을 다윗에게 베푸신다면, 그가 원수들과 핍박자들의 손에서 구원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닫자. 또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의 현실을 이길 수 있음을 알고 오직 그의 얼굴빛을 구하자.
    [17-18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나로 부끄럽게 마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부른다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김을 표현하는 구약적 표현이다. 창세기 4:26은 셋의 아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태도, 즉 하나님께 경배하며 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를 섬기는 자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 악인들에게 공의로운 처분을 내리시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그가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들이 잠잠히 무덤으로 가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무덤에서 잠잠케”라는 원어는 “잠잠히 무덤으로 가게”라는 뜻이다. 또 그는 악한 자들로 벙어리 되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18절을 다시 번역하면, “교만과 경멸로 거만하게 의인들을 비방하는 거짓 입술들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악한 비방의 말은 그쳐져야 할 것이다.
    사울은 다윗을 향해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과 말로 비방하며 죽이려 하였다. 다윗은 사울을 해하려 한 적이 없지만, 사울은 그를 자기를 해하려고 사람들과 공모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그를 나쁜 사람으로 비난하였다. 다니엘의 동료들은 그를 왕을 거역하는 나쁜 사람으로 모함하고 비방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심히 제한적인 역사 지식이나 과학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왜곡시키고 정통신앙을 조롱하고 모독하고 비방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며 매우 죄악된 일이다.
    하나님은 그를 섬기는 자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의인들을 악하게 비난하는 거짓 입술들을 벙어리 되게 하실 것이다.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다윗은 자신을 포함하여 경건한 성도를 ‘주를 두려워하는 자,’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라고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참 경건이다. 또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자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시시때때로 그에게로 피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런 성도를 위해 큰 은혜를 쌓아두시고 베푸신다고 증거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은혜’라는 원어(투베카 וּט)는 ‘당신의 선하심’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를 위해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시고 그의 좋은 것들을 주신다.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0절]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고 그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선하신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셔서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사람의 ‘꾀’라는 원어(로케스 ס)는 사람의 ‘공모(共謀)’라는 뜻이라고 한다(BDB). 누가 사람들의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누가 사람들의 거짓되고 악한 입의 말을 막아낼 수 있으랴.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막으시고 건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사람의 꾀와 구설의 다툼에서 건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만 되자.
    [21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다윗은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라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견고한 성에서 그의 기이한 인자를 그에게 보이셨기 때문이었다. 본절 후반부를 다시 번역하면, “이는 그가 견고한 성에서 그의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견고한 성은 하나님의 품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품보다 더 견고한 피난처가 어디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한 품에서 다윗에게 기이한 인자하심을 베푸셨다. 그것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이한 자비이었다.
    [22절]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본절도 다시 번역하면, 옛날 영어성경처럼 “이는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눈앞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음이니이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놀라고 당황해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보다, 하나님의 눈길과 관심이 나를 떠나셨나보다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이것은 믿음이 없고 마음의 눈이 어두워 현실만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부족과 연약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믿음과 기도는 정비례한다. 믿음이 강한 자는 많이 기도하게 되고, 많이 기도하는 자는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 또한 믿음과 기도 생활은 고난의 훈련을 통해 자라고 강해진다. 하나님의 일꾼은 기도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자. 기도 훈련을 통해 믿음을 굳게 하자.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자.
    [23-24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다윗은 성도들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 우선 ‘성도들’이라는 말(카시딤 םיי)은 ‘자비로운 자들, 선한 자들,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또 ‘성실한 자’라는 말(에무님 םיוּמ)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 신실한 자들, 충성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또 ‘여호와를 바라는 자들’이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소망하며 선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교훈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핵심적 내용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그가 천지의 창조자요 섭리자시며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에게 천국과 영생을 주신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신 10:12-13; 요일 5:3).
    둘째는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지 못하면 우리는 불신앙과 죄악과 타협하고 변절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히 10:34-35).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요일 5:3-4).
    다윗은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신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령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마 28:20; 요 14:16) 우리를 그에게서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요 10:28).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선한 마음을 품는 참된 성도가 되자. 또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만 사랑하며 그의 계명들을 힘써 행하자.
    32편: 회개와 죄사함의 복
    [1-2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죄사함에 대해 증거한다. ‘허물’(페솨 ע)이나 ‘죄’(카타아 האָ)는 구약성경에서 죄를 가리키는 대표적 용어들이다. ‘정죄’라는 말(아본 ןוֹ)은 ‘죄, 죄책, 죄의 형벌’이라는 뜻이 있다. 허물이 사함을 얻고 죄가 가리움을 받고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 죄사함을 묘사한다. 죄사함은 인간의 죄 자체가 없어진다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가리우시고 덮으시고 그 죄의 책임을 묻거나 그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그것을 덮으시고 죄 없는 것처럼 간주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죄사함을 받은 자는 그 마음이 깨끗해지고 그의 영혼 속에 거짓이 없게 된다. 2절 앞부분은 원문에는 중간에 나온다.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사도행전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죄사함은 법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도 사람의 심령을 깨끗케 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죄사함은 참으로 복되다. 다윗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사죄의 복은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다. 죄의 결과는 모든 불행, 특히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이지만, 죄사함의 결과는 하나님의 모든 복, 특히 영광스러운 천국과 영생이다. 생명의 구속(救贖)은 너무 귀하며(시 49:8), 사람의 목숨은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으며(마 16:26), 죄사함의 구원은 사람이 1만 달란트 진 빚을 탕감받는 것과 같다(마 18:23-27). 세상에서 죄사함의 복보다 더 큰 복은 없다.
    우리는 사죄의 복의 가치를 깨닫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돌리자. 또 사죄받은 자답게 모든 거짓을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진실하자.
    [3-5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다윗은 자신이 토설치 않고 잠잠했을 때, 즉 자신이 죄를 고백지 않았을 때의 심적 고통을 증거한다. 그 때 그는 병든 자와 같이 종일 신음하였고 뼈까지 쇠하는 고통을 당했다. 하나님의 손은 밤낮으로 그를 누르셨고 그의 심신의 진액은 변하여 여름 가물에 메마름같이 되었다. 성도는 죄를 짓고 회개치 않을 때 이런 고통을 당한다. 죄는 잊으려 해도 쉽게 잊을 수 없고 지우려 해도 쉽게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한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한 회개를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였다. 5절의 첫 부분은 원문에 중간 이후에 나온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악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자복하였다. 다윗이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켜 떠나는 것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것을 떠나기로 결심할 때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신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는 감추어 둔다고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이 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다 고백하자.
    [6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로 인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고 다윗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가 있다. 죄인은 그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이사야 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이다(고후 6:2).
    다윗은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홍수는 큰 환난과 어려움을 가리킨다. 성도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면 큰 환난도 극복할 수 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지신다(시 34:19). 의인도 때로는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손으로 그를 붙들어주심으로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시 37:24).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환난의 큰 바람은 의인을 삼키지 못한다.
    [7절]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은신처”라고 불렀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또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환난에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그를 둘러싸게 하실 것을 믿고 증거하며 고백한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셔서 우리로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신처이시며 환난에서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기회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8-9절]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이것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주는 체험적 교훈이다. 그는 죄인의 길을 살피며 바른 길을 지시하고 교훈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주목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바른 길을 보이시고 교훈하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교훈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한다. 또 디모데후서 3:16-17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교훈과 인도는 가장 선하다.
    특히 다윗이 주는 교훈은 “무지한 말과 노새같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말과 노새는 지혜와 이해력과 판단력이 없는 무지한 짐승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자기 편한 대로 가려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주인들은 그 짐승들에게 재갈을 끼우고 굴레를 씌워서 그것들을 통제한다. ‘재갈’은 짐승의 입에 끼우는 쇳토막이며, ‘굴레’는 그것과 짐승의 목을 걸쳐 맨 끈이다. 짐승들은 재갈과 굴레로 통제된다. 즉 그것들은 주인들의 지속적 간섭과 제재를 통해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나 짐승과 달리 지혜로운 존재인 인간이 때때로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바른 길을 걷는다. 시편 119편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을 통해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시 119:67, 71). 히브리서도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거룩해지고 의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히 12:8, 10). 그러나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의 갈 길을 보이신다. 우리는 무지한 말과 노새같이 되지 말고, 자발적으로 그 하나님의 교훈을 순종하자.
    [10-11절]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다윗은 악인들에게 많은 슬픔이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않고 그 명령대로 행치 않고 자신의 쾌락을 따라 사는 자를 가리킨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다. ‘슬픔’이라는 원어(마크오브 ב)는 ‘고통, 슬픔’이라는 뜻을 가진다. 악인은 마음의 고통, 육신의 질병, 가정적, 환경적 고통 등 여러 가지 슬픔을 당한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이사야서는 두 번이나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증거하였다(사 48:22; 57:21). 성경은 의인에게도 고난이 많다고 말하지만(시 34:19) 그러나 심령에는 기쁨이 있다(행 5:40-41; 마 5:12; 벧전 4:13).
    다윗은 반면에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두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의인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라고 표현하며 또 ‘마음이 정직한 자’라고 표현한다. 의(義)라는 말은 도덕적 표준에 맞는다는 개념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이며 마음이 정직하고 올바른 자이다. 사람의 마음은 군대의 지휘통제소와 같아서 마음이 정직하면 말과 행동도 정직하게 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함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도덕성을 가진다. 그것이 곧 의와 선과 진실이다. 이런 의인들을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와 사랑이 두루 감싼다.
    다윗은 이제 의인들에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평강과 형통의 복을 주시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살전 5:16, 18).
    모든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그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자. 그러면 우리의 삶에 기쁨이 넘칠 것이다.
    33편: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송함
    [1-3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다윗은 의인들에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오늘날 의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라”는 원문은 “여호와 안에서,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라”는 뜻도 된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이며 기쁨의 대상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그 기쁨이 찬송의 원동력이다.
    다윗은 찬송이 정직한 자들의 마땅히 할 바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찬송은 성도의 당연한 신앙고백이며, 찬송은 성도의 특징이며 열매이다(히 13:15).
    본문은 찬송의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말한다. 첫째,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라고 한다. 수금(키노르 רוֹנ)은 리라(lyre)라는 통속적인 작은 악기이다. 비파(네벨 ל)는 수금보다는 조금 나은 작은 하프 같은 악기라고 한다. 오늘날도 악기의 가장 좋은 용도는 찬송이다.
    둘째, 새 노래로 찬송하라고 한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늘 새로운 감흥을 가지고 찬송하라는 뜻일 것이다. 셋째, 즐거운 소리로 찬송하라고 한다. 찬송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불러야 찬송답다. 넷째, 공교히 연주하라고 한다. 우리는 목소리든지 악기든지 간에 가장 아름답게, 잘 연습하여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찬송의 원동력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다. 찬송은 성도에게 합당한 일이다. 우리는 악기로, 새 노래로, 즐거움으로, 공교히 찬송해야 한다.
    [4-5절]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4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며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세계는 의의 세계이다. 불의와 죄악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 천국에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정직하여 우리의 구원이 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섭리하신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되지만, 악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행사들이 다 진실하고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은 다 진리이다. 하나님의 모든 증거의 말씀들은 다 진리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고(요 17:17) 또 친히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성경 말씀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며 우리의 믿음의 견고한 기초이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세상에 충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시다(시 103:8). 창조 세계가 그의 사랑의 결과이며 그의 섭리의 모든 일들이 다 그러하다. 그는 그의 선하심으로 만물을 돌보시고 먹이신다. 특히 그는 그의 긍휼과 인자로 죄인들을 구원하셨고 또 여전히 연약성을 가진 성도들을 오래 참으시고 돌아보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신다(시 103:3-5).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진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인해 그를 찬송하자. 또 우리는 그의 의로우심과 진실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받자.
    [6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萬象)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 만상’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가리킨다. ‘그 입 기운’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입 기운은 말할 때 나오므로 말씀과 거의 같은 뜻일 것이다. 삼위는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말씀으로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창 1장; 요 1:1-3).
    [7절]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본문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닷물은 육지로 올라와 뒤덮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지구에 중력을 주셔서 바닷물이 고이게 하시며 달의 인력을 인해 바닷가에 밀물과 썰물이 생기게 하신다. 이것은 자연법칙을 사용하여 자연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이다. 하나님은 지구의 관리자이시다.
    [8절]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인생은 두려워해야 한다. 광대한 우주 안에서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또 그 우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9절]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이유는 그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며 또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이 거기에 6번이나 나온다(창 1:7, 9, 11, 15, 24, 30).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것을 보존하고 계신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자.
    [10절]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도모’라는 원어(에차 ה)는 ‘의논, 목적, 계획 등’이라는 뜻이며, ‘사상’이라는 원어(마카솨보스 תוֹב)는 ‘생각들, 목적들, 계획들’이라는 뜻이다. 두 단어의 뜻은 비슷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의 목적과 계획들을 다 폐하시고 무효케 하신다. 역사상 세계적 제국들, 즉 바벨론, 메대 파사, 헬라, 로마 나라의 계획들이 그러하였다. 1, 2차 세계대전의 주범들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나, 그 후 러시아나 중국이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의 목적과 계획들이 그러하였다.
    [11절]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심사’는 앞절의 ‘사상’과 같은 말(마카솨보스 תוֹב)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들은 영원히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사 46:10-11).
    [12절]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인 나라, 곧 하나님이 자기 기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복되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들의 계획들은 다 폐하여지고 세상 나라들은 다 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고 그의 뜻은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행복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신 33:29; 시 65:4).
    하나님은 열방의 도모를 다 폐하시고 자신의 도모를 영원히 세우신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가장 복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만 거하고 그의 뜻대로만 살자.
    [13-15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며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고 증거한다(시 2:4; 11:4; 115:16; 사 66:1; 마 5:34; 계 4:2).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시편 115:3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비록 높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감찰하신다. 오늘날 군사용 인공위성들은 고성능 망원렌즈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어서 땅에 있는 물체들과 그 움직임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이 만든 군사용 인공위성보다 더 성능이 좋으시다. 비록 사람들이 많고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을지라도, 또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다양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을 다 감찰하실 수 있다. 그래서 시편 139편 저자는 하나님을 떠나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말하며(7-9절)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으신 자이시므로 사람의 마음과 행사를 다 감찰하신다. ‘일반의 마음’이라는 원어(야카드 립밤 ם ד)는 ‘그들의 마음을 비슷하게’(KJV) 혹은 ‘그들의 마음을 다’(NASB, NIV)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지으셨고 비슷하게 지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심리와 감정을 통달하시는 가장 뛰어난 심리학자이시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아시고(히 4:12; 계 2:23) 그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아신다(시 139: 3-4).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에 대해 공의롭고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마 12:36; 롬 2:6; 계 20:12).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셔서 땅의 모든 인생을 감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두려움과 정직함과 단정함으로 살자.
    [16-17절] 많은 군대로 구원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다윗은 많은 군대와 용사와 말의 힘이 구원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은 큰 용사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하였지만, 소년 다윗의 물맷돌에 맞아 쓰러졌고 죽임을 당했다.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헬라나 로마가 망한 것이나 소련이 붕괴된 것은 군사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큰 군대와 많은 군사력이 왕을 구원하거나 그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18-19절]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다윗은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도,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었다(삼상 17:47). 다윗은 시편 3:8에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라고 고백했고, 20:7에서는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보살피신다. 시편 147:11,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이사야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또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기근 시에 살게 하신다.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이 새 생명을 얻는 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며, 영혼이 살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얻을 것이다. 또 하나님은 그들의 육신적 필요도 채우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 힘과 수단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를 경외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자.
    [20-22절]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다윗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의지한다고 표현한다. 성도들의 영혼과 마음이 그렇게 한다. 영혼은 인간의 생명 원리이며 행동의 주체이다. 그것은 마치 기계를 움직이는 힘과 같다. 사람의 마음은 영혼의 활동이다. 신앙생활은 사람이 영혼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21절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그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는 이유를 말하는 것 같다. 다신 번역하면, “이는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요 이는 우리가 그 성호[거룩한 이름]를 의지하였음이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면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과 방패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도움과 방패가 되심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한다. 그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위험할 때, 원수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의 도움과 방패이시다. 또 다윗은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분량과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그의 도움과 구원을 체험할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고 바라면,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풍성히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며 즐거워하자. 이것이 정상적 신앙생활이다. 또 우리는 그의 도우심을 사모하며 믿고 기대하자.
    34편: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함
    [1-3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다윗은 입으로 하나님을 항상 송축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항상 찬송해야 한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또 다윗은 입으로뿐 아니라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자랑하리라고 말한다. 찬송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했다(엡 5:19).
    또 다윗은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할 것이니 나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권한다. ‘곤고한 자’라는 원어(아나윔 םי)는 ‘고통당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 겸손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경건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가난하고 겸손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높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다(고후 1:4).
    [4절]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는 두려운 환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셨고 그를 그 모든 두려운 일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 시편의 표제어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다윗이 블레셋 왕에게 피신했을 때 체험했던 바이었다(삼상 21장).
    우리는 하나님의 큰 구원 곧 질병, 환난, 죄, 사망,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마음과 입술로 그 모든 은혜를 항상 찬송하자.
    [5-6절]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다윗은 고난받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빛의 비침을 받아 그들의 얼굴도 기쁨의 광채를 입었다. 그들은 실패치 않을 것이며 그 얼굴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6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체험을 말한다. ‘이 곤고한 자’는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윗은 많은 심신의 고통을 당했으나 그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를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에게 부르짖는 자마다 같은 은혜를 체험할 것이다.
    [7절]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둘러 보호하고 그들을 건지신다고 말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왕은 자신들의 계획을 신비하게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성에 군사들을 보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말과 불병거를 가득히 보내어 그 성을 에워싸 막게 하셨고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선지자를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던 선지자 요나가 바닷속에 던지웠으나, 거기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그를 삼키게 하셨고 또 그를 육지에 토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들은 다 충성되이 믿다가 풀무불이나 사자굴에 던지우는 어려움을 당했으나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여 승리하였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앙망하고 의지하자. 또 어려운 문제들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자.
    [8-10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본문은 성도의 정상적 모습을 증거한다. 9절의 ‘성도들’이라는 원어(케도솨우 ויד)는 ‘그의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여 죄와 불결을 떠난 자를 가리킨다. 또 성도는 8절에 ‘하나님께 피하는 자,’ 9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10절에 ‘하나님을 찾는 자’로 묘사되었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며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며 그를 찾는 자이다.
    본문은 또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다. 8절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다 알지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기도 응답, 그의 도우심과 구원하심과 돌보심 등 그가 베푸시는 모든 은혜와 복을 가리킨다. ‘맛본다’는 말은 체험한다는 뜻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과 돌보심과 복을 체험한다.
    9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또 10절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젊은 사자가 궁핍할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 환경적으로 먹이가 없거나 몸이 아프거나 몸의 일부분을 다쳤을 때 궁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성도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의식주의 필요가 넉넉히 공급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6:33), 사도 바울도 경건이 범사에 유익하며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에 약속이 있다고 증거하였다(딤전 4:8).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모든 선한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성도의 정상적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며 거룩하게 살자.
    [11-14절]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은 기본적으로 꼭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며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는 길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12절의 ‘복 받기를’이라는 원어는 ‘좋은 것 보기를’이라는 말인데, 뜻은 같다.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섬기는 것이 곧 영생이 된다(요 17:3).
    또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생명을 사모하고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땅히 악을 버리고 선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 혀로 악을 금하며 네 입술로 거짓된 말을 금하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화평을 구하며 찾으라.”
    죄로 인해 죽음과 모든 불행이 왔으나, 죄로부터 해방되고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 영생에 이르는 것이 구원이다(롬 6:22). 거룩한 열매는 곧 선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아모스 5:14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리라”고 말했고(롬 2:6-7), 또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우리가 영광스런 천국과 복된 영생의 삶을 원할진대,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버리며 선을 구하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5-18절]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본문은 하나님이 의인들을 환난에서 구원하심을 증거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며 그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신다고 말한다. 마치 아기 엄마가 아기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멀리서도 그 아기의 울음소리를 금방 알아차리듯이,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에게 눈길을 떼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
    17절의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들[의인들]은 외쳤고 여호와께서는 들으셨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 즉 의인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그들을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셨다고 증거한 것이다.
    특히 18절은 의인들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께 상한 마음으로 통회하며 부르짖었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깨닫지 못하지만, 의인들은 고난 중에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그러나 본문은 또한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끊어버리심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16절,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시고 불쾌해 하시고 노하신다. 천국은 의로 충만하며 의인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악인들 즉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계 21:27; 22:15).
    하나님은 환난 중에 의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지만, 악인은 끊어버리신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와 선을 행하는 의인이 되자.
    [19-22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본문은 의인의 구원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은 의인에게 많은 고난이 있다고 말한다. 의인은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또 잘못이 없어도 인격 단련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100세까지 정식 자녀가 없었고, 기근 시 애굽에 우거(寓居)하러 갔다가 아내를 빼앗겼고, 조카 롯을 구하러 전쟁을 치렀고, 여종 하갈로 인해 가정적 갈등을 겪었고, 그랄에 우거하다가 또 아내를 빼앗기는 등 여러 가지 고통스런 일들을 경험하였다.
    의인에게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신다. 또 그는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셔서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않게 하신다. 이 말씀은 영육의 온전한 구원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장차 천국에서 영육의 완전한 부활체로 영생케 하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22절에는 하나님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救贖)하시며 그에게 피하는 자, 곧 그를 의지하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증거한다. 본문에 ‘죄를 받는다’는 원어(아쉠 םאָ)는 ‘정죄받는다’는 뜻이다.
    본문은 또 악인이 죽임을 당할 것을 증거한다. 본문은 “악이 악인을 죽인다”고 말한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으로 죽은 자들이나 소돔 고모라성에서 유황불비로 멸망당한 자들은 다 그들의 악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회개하고 악을 버렸더라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본문은 악인의 특성을 ‘의인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며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으로 살자. 하나님을 믿고 의와 선을 행하자. 또 고난을 잘 참자. 의인에게는 영육의 온전한 구원이 있다.
    35편: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소서
    [1-3절]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다윗은 담대히 하나님께,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라고 기도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에 계심을 확신한다. 이 확신과 담대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서 나온다. 이것이 의인이 가지는 담대함이다(잠 28:1; 요일 3:21).
    다윗은 하나님께서 방패와 큰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그를 도우시기를 구한다. ‘방패’라는 원어(마겐 ן)는 일반적인 방패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손 방패’라고 번역한 원어(친나 ה)는 ‘온 몸을 막는 큰 방패’를 가리킨다고 한다(BDB). 하나님은 방패가 있으신가? 있으시다. 물론 비유적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방패는 우리의 전후좌우를 방어할 수 있는 전방위적인 큰 방패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능숙하게 방패를 사용하여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창을 빼어 그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은 창도 있으신가? 있으시다. 하나님의 창은 아주 날카로우시며 하나님은 창을 잘 던지시는 용사이시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에 맞으면 치명적 상처를 입을 것이다. 하나님은 창을 드시고 다윗을 쫓는 원수들의 길을 가로막고 그들이 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하실 것이다. 다윗에게 가까이 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창에 찔릴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고 말씀하시기를 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체험하기를 원한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계명을 순종함으로 담력을 얻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기를 구하자.
    [4-6절]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찾는 자, 곧 그를 죽이려 하는 자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케 하시고 그를 해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를 당케 하시기를 구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공의로운 처분을 믿었다. 그는 단지 자기를 대적하는 원수들과 싸우지 않았고 자기의 두렵고 위태한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의 선한 처분을 구하였다.
    다윗은 또 그의 대적자들로 바람 앞에 겨 같게 하시고 그들의 길이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기를 구한다. ‘바람 앞에 겨와 같다’는 표현은 평안과 안정이 없음을 뜻한다. 의인들은 시온산이 요동치 않음 같고(시 125:1) 영영히 이동치 않는 기초 같으나(잠 10:25, 30),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시 1:4). 또 악인들이 길은 어두우며 미끄럽다. 그들은 잘 나가는 것 같다가 갑자기 걸려 넘어지며 미끄러진다. 악인의 결말은 좋지 않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몰아내고 뒤쫓게 하기를 구한다. ‘따르다’는 원어(라다프 ף)는 ‘뒤쫓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위험에서 건지신다. 하나님의 사자는 성도를 위해 보내시는 경호원과 같다.
    시편의 이런 기도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의 뜻을 보인다. 다윗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공적인 처분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신약 아래서 우리는 이런 기도 대신 주님의 교훈(마 5:44)대로와 또 주님과 스데반의 모범대로(눅 23:34; 행 7:60) 더 성숙한 기도 즉 악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악한 세력들,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 교훈대로 바르게만 살자.
    [7-8절]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본문은 악인들의 악행을 증거한다. 악인들은 무고히, 정당한 이유 없이 의인들을 핍박하고 해치려 한다. 그들은 의인들을 빠뜨리려고 은밀히 함정을 파고 그물을 구덩이에 숨긴다. 그들의 싸움은 비겁하고 정정당당치 못하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생애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뜰에 모여 궤계로, 은밀히, 교묘히 예수를 잡아죽이려 의논하였다(마 26:3-4). 로마 총독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시기함으로 그에게 넘겨준 줄 알고 있었다(마 27:18). 누가복음 23장은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세 번이나 말했다고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었다.
    다윗은 본문에서 악인들의 멸망에 대해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에 대한 선언과 같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갑자기 멸망케 하실 것이다. 악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얼마 동안 형통해 보이지만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할 것이다. 또 하나님은 악인들이 의인을 해하려고 은밀히 베푼 그물에 그 자신이 걸려 멸망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여러 성경구절들이 이런 진리를 증거한다.
    시편 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편 9:15,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시편 57:6,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에스더서에 기록된 하만의 이야기는 생생한 예이다. 왕의 가장 높은 신하인 악한 하만은 경건하고 충직한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그 자신이 그 나무에 처형되었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만 살고,  정당한 이유 없이, 편견과 추측으로 이웃을 비난하거나 해하려 하지 말자.
    [9-10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본문은 성도가 고난 중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내용이다. 본문은 우선 성도의 원수에 대해 말한다. 그는 성도보다 강한 자요 성도를 노략하는 자로 표현되었다. 성도를 핍박하는 인간 원수도 때때로 그러하지만, 우리의 진짜 원수는 사탄이다. 그는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며(엡 2:2) 장차 세상에서 큰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길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자이다(계 13:7). 이렇게 강한 사탄과 악령들과 싸우려면 우리는 강건해야 하고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교훈하였다(엡 6:10-11).
    본문은 성도를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표현한다. 악한 세상에서 악과 타협하지 않고 경건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성도는 미움과 핍박과 경제적 곤란을 당한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36-38절).
    본문은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성도를 그 고난에서 구원해주셨고 성도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송한다고 말한다. 또 성도의 육신은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의 모든 뼈가 하나님의 구원을 고백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뼈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참된 기쁨의 찬송과 고백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고난 많은 세상에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셨고 또 언제나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항상 찬송하자.
    [11-13절]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본문은 다윗을 해치는 악인들에 대해 말한다. 본문은 그들이 불의한 증인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가 알지도 못하는 일로 그를 비난하였다. 거짓 증거는 악한 일이다.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또 그들은 다윗에게 선을 악으로 갚았다. 다윗은 평소에 남들에게 선을 베풀었지만, 그들은 그의 선에 대해 보답하기는커녕 악으로 선을 갚았던 것이다. 그것은 보통 악보다 더 악한 일이다. 잠언 17:13,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또 그들은 다윗의 영혼을 외롭게 하였다. 성도가 가는 길은 좁은 길이며 외로운 길이다. 많은 사람이 넓은 길로 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다(딤후 1:15; 4:16).
    그러나 성도는, 악인과 달리, 선으로 악을 갚는 자이다. 다윗은 그들이 병들었을 때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그의 영혼을 괴롭게 하였다. 주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셨다(눅 6:27). 바울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했다(롬 12:20-21).
    “내 기도가 내 품에 돌아왔다”는 말씀은 그의 기도가 그에게 복이 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 이것은 주께서 전도자의 비는 평안이 받을 자가 합당치 않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과 같다(마 10:13).
    우리는 세상에서 성도로서 고난을 각오하며 살자. 우리는 결코 악으로 선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갚는 자가 되자.
    [14-16절]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의인과 악인은 너무 대조적이다. 다윗은 악한 이웃이라도 병들었을 때 그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그에게 행하며 마치 모친을 곡함같이 몸을 굽히고 슬퍼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비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가짐이며 태도이다. 참으로 경건한 자는 겸손하고 선하고 자비하다.
    그러나 악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다윗이 환난을 당할 때 기뻐하였다. 우리는 이웃의 환난당함을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또 그들은 서로 모여 악을 도모하기까지 하였다. 성도들은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믿음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며 교제한다. 성도들의 교제는 거룩하고 선한 교제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모여 악을 도모한다. 성경은 악인들을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롬 2:8). 의인들은 하나님만 바라고 그와 동행하며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악인들은 오직 인간 관계를 중시하며 서로의 뜻이 맞으면 하나님의 뜻을 상관치 않고 악을 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특히 악하고 헛된 말로 의인들을 비난한다. 본문은 비류가 모여 나를 치며 찢는다고 표현한다. ‘비류’라는 원어(네킴 םי)는 ‘치는 자들, 비난하는 자들’이라는 뜻 같다(NASB, NIV). 그들은 말쟁이들처럼 성도를 함부로 비난한다. 사람은 마음 속에 쌓인 것을 말하며 악한 자는 악을 쌓아 악한 말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말은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 12:34-37).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며 의인으로 살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까지 선을 베풀며 말로라도 남에게 악을 행치 말자.
    [17-18절]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성도에게는 고난의 기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느 기간 동안 고난 중에 내버려두신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키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며 심령의 깨끗함을 얻고 육신적 쾌락에 빠지지 않게 되며 겸손해지며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며 소망하며 의지하게 된다. 고난의 기간은 유익하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내 영혼을 그들의 파괴로부터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 곧 영혼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라고 말했다. ‘저 멸망자’라는 원어(쇼에헴 םי)는 ‘그들의 파괴들’이라는 뜻인 것 같다(NASB, NIV). 원수들은 사자같이 그를 해치려 하였고 그를 파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자이시다. 그는 정하신 기간 동안 잠잠하시지만, 마침내 성도를 위해 일어나실 것이다. 이사야 45:21-22,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기도는 고난의 해결책이다. 시편 50:15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는 주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대회 중에서, 많은 백성 중에서 감사하며 찬송하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공적인 찬송과 감사를 올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간증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며 우리의 신앙 생활의 일차적 목표이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난의 기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또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자.
    [19-21절]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정당하지 않게 그의 원수가 되었고 까닭없이 그를 미워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들이 환난당한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고 눈짓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눈짓한다’는 표현은 경멸의 눈짓, 흘기는 눈짓을 가리키는 것 같다(잠 6:13; 10:10도 비슷한 뜻이라고 봄).
    또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해하였다. 화평을 구하는 자는 사랑과 용서, 이해와 관용의 마음을 가질 것이나, 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고 오히려 가만히 있는 자들을 괴롭혔다. 이것은 얼마나 악한 일인가? 이런 자들 때문에 인간 사회에 법이 필요하고 벌이 필요하다. 이런 자들이 활개치면 사회는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살기 어려운 사회가 될 것이다. 시기심, 미움, 거짓과 악은 인간 사회를 황폐케 만든다.
    또 그들은 다윗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들의 벌린 입은 조롱과 멸시의 입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다윗이 환난과 낭패를 당하였다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듯이 기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악한 자들을 얼마 동안 활개치도록 내버려두시지만, 마침내 그들을 꺾어 승리하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대주재자시요 주권자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한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믿었고 그에게 그의 모든 괴로운 사정을 아뢰었다.
    우리는 우리 속에도 남아 있는 시기심, 미움, 거짓과 악을 조심하자. 우리는 오직 악인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만 기도하자.
    [22-24절]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는 자이심을 믿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악행을 다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자이시다(계 2:23).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명칭은 주권적 섭리자라는 뜻이다. 창조자시요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 신앙고백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행을 보시고 잠잠하지 마시며 자기를 멀리하지 마시기를 기도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떨치고 깨시며 일어나 행동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 대해 언제까지 잠잠하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까지 경건한 자들을 곤경 중에 버려두고 돌아보지 않으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다윗을 도우실 것이며 환난에서 그를 건져주실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공의대로 판단하시고 처리하시기를 구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온 세상에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그가 그 동안 다윗의 원수들을 내버려두신 것은 그가 죽으셨거나 주무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다 보셨으나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다윗의 송사를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인들이 그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에서 자신의 승소(勝訴)를 확신한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행치 아니하였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 안에서 행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로 고백하며 의지하자. 항상 진리 안에 행함으로 환난 중에 담대히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구하자.
    [25-28절]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원수들이 개가를 부르지 못하고 수치와 욕을 당케 하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는 원수들이 그 마음에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또는 ‘우리가 저를 삼켰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시며 그의 환난을 기뻐하고 자긍하는 자들로 수치와 낭패와 욕을 당케 하시기를 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하며 또 악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다윗은 그러나 또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비록 많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다윗의 정당함을 이해하고 다윗의 경건과 의, 그리고 영적 싸움을 기뻐하고 응원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소수의 신앙 동료들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도 쓸쓸하고 힘든 전도 사역에서 소수의 동료들을 가졌다. 많은 사람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을 때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고(빌 2:20-22)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을 때 오네시보로는 그를 방문하고 위로하였다(딤후 1:16-18).
    다윗은 또 그들로 하나님, 곧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크심을 항상 찬송케 하시기를 기도하며, 자신도 하나님의 의를 종일토록 찬송하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그에게 순종하는 의로운 성도들의 형통을 기뻐하신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어떤 때라도 악인이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것을 깨닫고 바르고 신실하게만 살자.
    36편: 의인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심
    [1-4절]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본문은 악인의 특성을 증거한다. 악인은 그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는데(잠 16:6)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니 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악인은 스스로 자긍한다. 2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저가 그 죄악이 드러나서 미움을 받기까지 스스로 자긍함이니라”(KJV). 원문의 뜻이 이러한 것 같다. 악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스스로 자랑하며 “괜찮다, 괜찮다!” 하며 스스로 위로한다.
    또 악인은 그 입의 말이 죄악과 거짓이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을 드러낸다. 또 악인은 지혜와 선행을 그쳤다. 구약의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지혜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음으로 지혜를 버렸고 의와 선을 버렸다. 또 악인은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선하지 않은 길에 스스로 서며 악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는 우연히 실수로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계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이며 악을 싫어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범죄치 않으려고 애쓴다. 또 그의 입의 말은 선함과 진실함이다. 또 그는 지혜를 구하며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고 선한 일을 연구하고 실천한다.
    우리는 결코 악인이 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우리 자신을 반성하며 오직 성도답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5-6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악을 행하기 좋아하는 악인들이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섭리자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햇볕과 단비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치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마 5:45). 특히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해 크신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셨다(요 3:16).
    다윗은 또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자연만물 속에, 해와 달과 별들의 규칙적 운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동일하셔서(시 102:27) 우리가 신뢰할 만한 자이시며 특히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악인들의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다. 그의 의는 크고 힘이 있으며 흔들림이 없이 확고하다. 그는 공의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최종적으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다(롬 2:5).
    또 다윗은 하나님의 판단이 큰 바다와 같다고 말한다. ‘큰 바다’라는 원어는 ‘큰 깊음’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경솔하거나 불완전하지 않고 포괄적이며 심오하고 완전하다.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말했다(롬 11:33).
    다윗은 그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섭리자로서 모든 사람과 모든 짐승까지도 보존하신다. 그는 공중의 새를 먹이신다(마 6:26; 욥 38:41). 그는 특히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새 인류를 만드시고 그들을 세상 끝날까지 지키신다.
    우리는 악한 세상 속에서 악인들 가운데서 살지만, 항상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완전한 섭리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자.
    [7-8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참으로 보배롭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특별히 그가 죄인들을 구원하심에서 잘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연약성을 가진 인생들을 질병에서 건지시고 위경(危境)에서 건지셨다. 그는 무지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주셨고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게 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또 그는 장차 의인들에게 영광스런 부활을 허락하셔서 천국에서 영생케 하실 것이다.
    다윗은 인생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하심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인생이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 사람이 어떤 죽을병에 걸려보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던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그 누구도 정말 그리고 끝까지 우리를 도와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이다. 심지어 병환자를 방치하거나 버리고 도망치는 가족도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을 변화시켜 기쁨과 평안과 소망이 되게 하신다.
    다윗은 인자하신 하나님께 피한 자들이 누릴 복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그는 “저희가 주의 집의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살지고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과 같고 시원하고 맑은 시냇물을 실컷 마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영육의 그리고 현세와 내세의 풍족함과 즐거움, 즉 넘치는 즐거움이 있다. 하나님께 피한 자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복을 맛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묵상하자. 또 어려울 때 그에게 피하며, 그가 주시는 영육의 그리고 현세와 내세의 풍족함과 즐거움을 누리자.
    [9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본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면 좋은 것을 풍성히 얻는다는 앞절의 말씀에 대한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생명’은 영육의 생명을 다 포함할 것이다. 하나님은 첫 사람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셔서 산 자가 되게 하셨다. 또 그 육신의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된 생명이었다. 인간은 본래 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았고 하나님이 주신 기쁘고 복된 삶을 누렸다.
    원천 혹은 샘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근원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는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또 원천은 풍부함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 다 써서 말라버림이 없는 풍성한 생명이다. 또 원천은 신선함과 시원함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신선하고 시원한 샘물처럼 우리에게 참 기쁨과 만족을 주는 생명이다.
    ‘주의 광명 중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빛이 되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얼굴은 온 피조 세계를 비춘다. 하나님의 빛은 곧 생명이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임재하심, 그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생명과 기쁨을 준다.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의 광명 중에서 광명을 본다고 말한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지식을 상징할 뿐 아니라 기쁨과 위로와 행복도 상징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알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주시는 기쁨과 위로와 행복을 보며 맛보며 누린다.
    우리는 복된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고 그에게서 나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정직하게만 살자.
    [10-12절]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그를 아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세상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그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실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그의 의를 베푸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정직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 즉 그의 의로운 판단과 처분을 베푸실 것이다. 그는 의인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공의롭게 처리하실 것이다.
    또 다윗은 교만한 자의 발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그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악한 자는 교만하여 순진한 성도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해치려 하고 때때로 교회에 들어와 세력을 잡아 교회를 분란시키고 진실한 성도를 쫓아내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교만한 자와 악한 자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다윗은 또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라고 말한다. ‘거기’라는 말(솸 ם)은 원수들이 다윗을 해치며 쫓아내려고 그에게 다가왔던 그 곳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그 곳에서 엎드러지게 하실 것이다. 또 악인들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지만(잠 24:16), 악인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악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알고 의롭고 정직하게만 살고 악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하자.
    37편: 악인과 의인의 보응
    [1-3절]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본문은 성도들이 행악자들 때문에 불평하거나 짜증내지 말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불평하다’는 원어(티스카르 ר)는 ‘화를 내다, 짜증내다’는 뜻이다. 악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도 일시적으로 형통하고 번창할 수 있으나 그들은 풀같이 곧 쇠잔하고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은 성도들이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돈과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홀로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또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은 또 성도들이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참된 교회를 가리킨다. 3절 후반부(레에 에무나 הוּמ ה)는 뜻이 어려워 보이고 영어 번역들도 서로 다르지만 아마 그의 진리 혹은 성실함으로 살라(feed on)는 뜻이거나 성실함을 품으라(cultivate faithfulness--NASB)는 뜻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먹고 성실함을 품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번창한다고 짜증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선을 행하며 그의 진리를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자.
    [4-6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의지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경건 생활이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 부귀 영광과 육신적 쾌락을 기뻐하지 말고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올리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가장 좋아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어떤 일들을 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께 다 맡기며 그를 의지해야 하고 그의 선한 인도하심을 구하며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주권적 섭리자로 믿고 인정하는 자가 가질 마땅한 마음가짐이다.
    본문은 우리가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경건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소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에 일치하는 것, 의롭고 선한 것, 즉 성경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원문에서 5절은 이루시는 자가 바로 ‘그’(후 אוּה)이심을 강조한다. 잠언 16:3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본문은 또 우리가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호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정당함을 밝히 증거해주시고 변호해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길과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이루어주실 것이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가 우리의 정당함을 증거해주실 것이다.
    [7-8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잠잠히 바라는 삶이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러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 군대 때문에 당황할 때에 모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큰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시편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예수께서도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셨다(눅 18:7).
    본문은 또 악한 자들이 형통하며 악한 계획을 이룬다고 짜증내거나 분노하지 말라고 말한다. 공의의 하나님은 악인들의 악을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본문은 우리가 분노하고 짜증내면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혜롭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불신앙과 교만이며 또 이웃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형통한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불평하거나 짜증내거나 분노하지 말자.
    [9-11절]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본문은 우선 악인의 결말에 대해 증거한다. 이것은 앞절에서 우리가 악인들의 형통에 대해 불평하고 짜증내지 말라고 교훈한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악을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끊어진다’는 표현은 죽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형집행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악인의 형통은 일시적이다. 잠시 후에 악인은 없어질 것이다. 우리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그가 없을 것이다.
    본문은 또 의인의 특징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다. ‘기대한다’는 원어(카와 ה)는 ‘기다린다, 소망한다, 의지한다’는 뜻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그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둘째는 온유함이다. ‘온유하다’고 번역한 원어(아나우 ה)는 ‘가난하다, 고통받는다, 온유하다, 겸손하다’는 뜻이다. 의인은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소망한다.
    본문은 또 의인의 결말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도 두 가지이다. 첫째는 땅을 얻는 것이다. “땅을 차지하리로다.” 땅은 현세에서의 물질적 기업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곧 천국을 가리킬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가는 목적지는 천국이다. 둘째는 풍부한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화평’이라는 원어(솰롬 םוֹל)는 ‘평강’이라는 단어이다. 의인은 풍부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사야 48:18, “만일 [네가 나의 명령을]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의인은 현세에서도 평강을 누리고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평강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그의 뜻을 행함으로 현세와 내세의 풍성한 평강을 누리자.
    [12-15절]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를 ‘의인’이라고 부르며 또 ‘가난하고 궁핍한 자,’ ‘행위가 정직한 자’라고 부른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의인이며, 악한 세상 환경에서 때때로 가난하고 궁핍함을 경험하지만, 행위가 바르고 정직한 자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이 사랑이므로 성도는 또 남을 사랑하는 선한 자이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며 그를 향해 이를 간다고 말한다. 사람의 본성은 심히 악해져서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며 의인을 해치는 일을 계획하고 그를 미워하며 죽이려 하는 악한 자가 있다. 그는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성도를 엎드러뜨리며 심지어 죽이고자 한다. 악인의 악함은 정직한 성도를 죽이려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난다.
    본문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도 증거한다. 본문은 우선 하나님께서 그를 웃으신다고 말한다. 시편 2:4도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웃으시는 까닭은 그의 날이 오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의 날’ 곧 악인의 날이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는 날, 즉 악인이 멸망하는 날을 가리킨다. 악인은 그것을 모르고 날뛰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본문은 또 악인이 의인을 향해 빼어든 그 칼이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그 활이 부러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이라는 원어(레브 ב)는 ‘심장’을 가리킨다(출 28:29-30; 왕하 9:24). 악인이 성도를 죽이려는 계획은 좌절되고 도리어 자신이 죽게 되고 망하게 된다.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 모르드개를 죽이려 했던 하만 등이 다 그러하였다.
    우리는 악인으로 살지 말고 악인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성도답게 올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16-17절]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의인이 가진 적은 소유는 많은 악인들이 가진 풍부함보다 더 낫다. 잠언 15: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의인 한 사람이 가진 적은 소유는, 많은 악인들이 가진 풍부한 재물보다 물질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복되다.
    17절은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더 나은 이유는, 악인의 팔은 부러지지만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기 때문이다. 악인은 교만하며 이기적이며 악하고 불의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뇌물도 받고 탈세도 하고 고리대금도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악인의 팔은 부러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질병과 재난을 주실 것이다. 또 악인들은 욕심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싸운다.
    그러므로 잠언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보통]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고(잠 15:16-17; 17:1), 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두 번이나 말했다(잠 21:9; 25:24). 또 아무리 부요한 자라 하더라도 악인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곧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막 9장).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께서 붙드실 것이다. 그의 팔은 부러지지 않고 튼튼할 것이다. 의인은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다(시 128:2). 내세의 천국에서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그에게는 평강이 있고 건강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것이며 그의 삶은 행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풍부한 부요를 부러워하지 말고 적게 벌어도 정정당당하게, 의롭게 벌자. 또 그것이 하나님 앞에 복 됨을 알자.
    [18-20절]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신다고 말한다. ‘완전한 자’라는 원어(테미밈 םי)는 ‘온전한 자들’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대로 흠 없이 행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날들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세상에서 사는 날들을 아실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날들도 아신다. 성도들의 현세와 내세의 모든 삶은 섭리자 하나님의 눈앞에 있다.
    본문은 또 성도들의 기업이 영원하리라고 말한다. 성도들의 영원한 기업은 천국을 가리킨다. 성도들의 영원한 기업인 천국은 파산하거나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대로 사는 성도들은 환난 때에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기근의 날에도 먹을 것이 풍족할 것이다. 그들에게 질병이 닥쳐오고 경제적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붙드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며, 그들은 그 어려움에서 곧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르다. 본문은 악인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며 또 여호와의 원수들이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라고 말한다. ‘어린양의 기름같이’라는 원어(키카르 카림 םי רי)는 문맥적으로는 우리 말 성경같이 번역할 수 있으나(KJV), 언어적으로는 ‘초장의 영광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BDB, NASB, NIV). 그러면 20절 후반부는 “여호와의 원수는 초장의 영광같이 될 것이며 연기같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가 되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가 온전한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날들을 아시고 환난 때에도 그들을 지키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21-22절]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본문은 악인과 의인을 대조한다. 본문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악인은 갚을 돈이 없어서 갚지 못하거나 갚기 전에 죽어서 갚지 못하기도 하겠지만, 갚을 돈의 여유가 있어도 갚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정직한 인격은 정확한 돈 계산에서 드러난다. 돈 셈이 흐린 사람은 좋은 인격이 아니다.
    본문은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준다고 표현한다. 의인 욥은 고백하기를,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고 하였다(욥 31:16 -18). 옛날부터 경건한 성도는 구제에 힘썼다. 사도행전에 보면 욥바의 다비다라는 여제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으며 경건한 고넬료도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행 9:36; 10:2). 예수께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눅 12:33),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행 20:35).
    원문 22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앞절의 이유를 보인다. 의인이 구제를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가 땅 곧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얻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천국을 바라보는 자는 이 땅의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즐거이 땅의 것을 가난한 자들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악인은 영원한 죽음과 멸망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구제하는 의인으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자.
    [23-24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본문은 문맥적으로 볼 때 의인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다. 옛날 영어성경은 ‘사람의 걸음’을 ‘선한 사람의 걸음’이라고 번역했다(KJV).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걸음도 작정하셨지만, 특히 의인들의 걸음들을 정하셨고 그 길을 기뻐하신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본문은 의인이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의인도 연약한 마음과 죄악된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수하거나 낙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심으로 그는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잠언 24:16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붙드시거나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우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25-26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다윗은 일평생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구걸함을 보지 못했다고 증거한다. 의인은 자신뿐 아니라 그의 자손도 복되다. 그는 복을 그 자손에게 끼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그 자손에게 물질적 부족이 없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붙드시는 증거이다.
    본문은 21절에 이어 다시 의인의 특징이 은혜를 베풀고 구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선행과 구제는 기분적으로나 남에게 보이려고 한두 번 행하는 것이 아니다. 조건 없는 사랑과 선행이 참 사랑이며 참 선행이다. 의인은 종일토록 혹은 평생토록 남에게 그런 선과 그런 사랑을 베푼다. 그 결과, 그의 자손들도 복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인과 그 자손을 붙드시고 복 주심을 알고 오직 의인으로 살자. 오직 믿음으로 살고 성경교훈대로 선을 베풀면서 살자.
    [27-29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본문은 우리에게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라고 말한다. 죄가 사망과 모든 불행의 원인이므로 사람이 악을 떠나는 것은 영생과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 또 선을 행하는 것은 죄를 회개한 성도의 당연한 열매이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해야 할 이유로 여호와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것인데, 계명의 핵심은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의의 원리를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그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는 영영히 보호를 받을 것이지만, 악인의 자손은 끊어질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면 땅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말한다. 29절은 의인이 땅을 차지하여 거기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말한다. 본 시편은 땅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9절,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1절,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22절,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땅에 대한 이 약속은 천국에서의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에서 떠나고 선을 행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복되고 영원한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하실 것이다.
    [30-31절]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본문은 의인의 특징을 증거한다. 의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고 그 입과 혀에 지혜와 의의 말씀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혹은 부주의하여 잊어버림으로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마음으로 믿고 마음에 간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신명기 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둔 자는 그 입과 혀로 지혜와 의의 말을 할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법대로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사는 것이 의와 지혜이다. 성도는 지혜와 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입과 혀로 말한다. 또 이런 자의 걸음은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실족함이 없을 것이다.
    [32-33절]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세상에는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그를 죽일 기회를 찾는 일이 있다. 이 세상은 의인에게 위험한 세상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악인은 때때로 교회 안에도 있어서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과 종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인정하시고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않으신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매일 찾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다(삼상 23:14). 순교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다. 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도 의인이 정죄를 받지 않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고 실천하며 살자. 세상에서는 의인이 종종 죽음의 위협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키실 것이다.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본문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는 것은 의인의 삶이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경건이요, 그의 길을 지키는 것이 의와 선과 진실이다. 그것이 의인의 삶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런 의인을 높이시고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의 뜻을 높이는 자를 높이실 것이다. 사무엘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땅은 앞에서도 여러 번 나온 대로(9, 11, 22, 29절), 의인이 장차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높이시고 그에게 영원한 땅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끊어질 것이며 의인은 그의 끊어짐을 볼 것이다.
    [35-36절]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다윗은 악인의 모습을 ‘악인의 큰 세력’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이라고 묘사한다. 악인의 세력은 때때로 외형적으로 거대하고 튼튼하고 번창하여 보인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악인의 세력과 외형적 번창함이 일시적이라고 말한다. 36절에 “사람이 지날 때에”라는 구절은 영어성경들처럼 “그가 가버렸으며”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NASB, NIV). 악인은 얼마 후에 보니 가버렸다. 또 다윗은 그가 없어졌고 찾아도 발견치 못했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각양 은혜가 풍성한 세계에서 살 자격이 없다. 그는 존재 세계에서 생명의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그를 죽이시고 그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길을 지키자. 우리는 악인의 큰 세력을 두려워 말자. 그것은 일시적이며 잠시 후에 멸망할 것이다.
    [37-40절]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본문은 성도를 ‘완전한 사람,’ ‘정직한 자,’ ‘의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완전한 사람’이란 도덕적으로 크게 흠과 점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가리킨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산다. 본문은 우리에게 완전한 자, 정직한 자를 살피고 주목하라고 교훈한다.
    본문은 또한 이런 성도가 땅 위에서 누리는 복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평안을 누린다. 37절 후반절은 옛날 영어성경처럼(KJV) “이는 그 사람의 결국은 평안임이니라”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은 문맥적으로나 원문의 액센트상으로나(17, 19, 34, 38절의 액센트와 비교해 보면) 타당해 보인다. 우리는 평안을 얻으려면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정직한 자가 되어야 한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의인에게는 강물과 같은 평안이 예비되어 있다(사 48:18, 22).
    둘째로, 그는 환난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얻는다.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나온다”(39절). 또 하나님은 환난 때에 성도의 산성과 요새와 안전한 은신처가 되신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신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들과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며 그들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라고 말한다(38절).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에서 끊어질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써 온전한 자, 정직한 자가 되자. 또 하나님의 평안과 도우심과 구원을 항상 체험하자.
    38편: 병중에서 주의 도움을 구함
    [1-8절]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다윗은 지금 심히 고통스러운 병중에 있다. 그는 살에 성한 곳이 없고 뼈에 평안함이 없다고 말한다. 또 그의 상처는 썩어 악취가 나고 몸은 아파 펴지 못하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녔고 그의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그의 살에 성한 곳이 없었다. 또 그는 심히 연약해져서 마음이 불안하고 신음하였다. 그는 아마 피부에 난 심한 종기로 인해 온 몸이 매우 고통스런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은 본문에서 이런 그의 고통은 자신의 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라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화살이 그를 찔렀고 그의 손이 그를 심히 누르셨다고 말한다(2절 원문, NASB).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이런 고통 중에 있고 자신의 죄악이 자기 머리에 넘쳐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 같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 죄악이 자신의 우매함이었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와 징책에 민감하자. 하나님의 진노와 징책은 매우 두렵다. 죄는 심히 어리석은 악이며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중에서 기억나는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9-14절]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다윗은, 앞절들에서 말한 육신적 연약에 더하여, 그의 심장이 뛰고 기력이 쇠하며 눈빛도 떠났다고 말한다. 또 그는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그의 상처를 멀리하였고 그의 친척들도 그를 멀리하였다고 말한다. 욥이 큰 고난 중에 처해 있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멀리했듯이, 또 사도 바울이 고난 충만한 전도사역 중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듯이, 하나님의 종 다윗은 질병과 고통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멀리함을 당했다.
    게다가,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올무를 놓았고 그를 해하려는 자들은 그에 대해 악한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은 종일토록 악한 계획을 세웠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을 위해 열심이 많았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고난 중에서 모든 소원을 하나님 앞에 아뢰었다(9절). 그는 그의 소원을 조금이라도 사람에게 즉 가족이나 친구나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두지 않았다. 또 그는 악한 원수들에 대해 잠잠하였다(13-14절). 그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였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변론함이 없었다.
    다윗이 원수들에 대해 이렇게 대처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께 다 아뢰었고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의 주권적 처분, 공의의 처분, 긍휼의 처분을 믿고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병중에서 친구들이 멀리하고 원수들이 해하려 할 때에 오직 잠잠하며 하나님께 다 아뢰고 다 맡기고 그의 주권적 처분만 바라자.
    [15-16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원문은 15절부터 18절까지 매절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윗은 병중에서 또 원수들의 악한 비방 앞에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랐고 하나님의 응답만 기대하였다. 다윗이 비록 어리석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할지라도 다윗보다 더 악한 원수들이 그의 고난을 기뻐하고 자긍할 정당성은 없었다.
    [17-20절]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다윗은 심신의 고통으로 낙망하고 실족할 지경에 있었고 근심이 계속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근심이었다. 그런 근심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요(시 51:17) 하나님이 원하시는 근심이다(고후 7:10). 다윗의 원수들은 악한 일을 행하는 데 활발하며 강하였고 무리하게, 정당한 이유 없이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세상에는 악인들이 의인보다 많다.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은 다윗이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그를 대적하였다.
    [21-22절]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그를 버리지 마시고 멀리하지 마시고 속히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기를 구하였다. 고난 중에 회개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긍휼을 간구하면 그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병중에서, 원수들의 부당한 비방 중에서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하자.
    39편: 병중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달음
    [1-2절]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다윗은 범사에 자신의 행위를 조심하며 혀로 범죄치 않기를 원했다. 성도는 항상 그릇된 길이나 악한 길을 조심하고 바른 길, 선한 길 걷기를 구하고 힘써야 하며 혀로 범죄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다윗은 특히 악인이 그 앞에 있을 때에 자신의 입에 재갈을 먹이겠다고 말한다. ‘자갈’은 ‘재갈’로 고쳐 읽어야 하겠다. 악인은 남의 말을 오해만 하고 비난거리로만 삼기 때문에, 성도는 악인 앞에서 변론이나 변명을 하려 하지 말고 잠잠한 것이 지혜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잠잠하여 선한 말, 즉 바르고 정당한 말도 하지 아니하므로 그의 고통(케에브 ב)이 더 심하였다. 말을 참는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3-4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다윗은 악인들 앞에서 잠잠하려 할 때 마음 속에 열이 나고 화가 나서 하나님께 아뢰며 호소한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시며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우리의 일생은 제한적이고 출생한 때가 있듯이 죽는 때가 있다. 본문에 ‘연약함’이라는 원어(카델 ל)는 ‘덧없음’을 뜻한다. 우리는 죽음의 때를 생각해야 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말과 행위를 조심하며 특히 우리를 비방하는 악인 앞에서 잠잠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일생의 덧없음을 인식하자.
    [5-7절] 주께서 나의 날을 손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날을 손넓이만큼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손넓이는 1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사람의 일생은 매우 짧다. 또 다윗은 그의 일생이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짧은 일생은 하나님 앞에서 무(無)에 가깝다. 영원에 비추어볼 때 세상의 백년의 삶은 무에 가깝다. 다윗은 또 사람마다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라고 말한다. ‘허사’라는 원어(헤벨 ל)는 전도서에 38번이나 나오는 ‘헛되다’는 단어이다. 그것은 ‘숨’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또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림자’라는 원어(첼렘 ם)는 ‘형상, 허상, 유령’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죽고마는 존재라면 그의 세상 생활은 영원한 실체가 아니고 허상(虛像)과 같다. 또 사람들의 모든 분주복잡한 일들도 죽음 앞에서 볼 때 헛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죽고나면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는 그 헛된 재물을 위해 목숨을 걸 듯이 분주하게 일한다.
    다윗은 이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짧고 덧없이 지나가는 세상의 삶에서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며 살 만한 삶의 목표와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영원자존하시는 하나님,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온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는 인간의 일생이 참으로 짧고 헛됨을 바로 깨닫고 우리의 소망, 우리의 생의 목표와 가치를 돈이나 헛된 세상의 어떤 것에 두지 말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 두자. 
    [8-11절]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다윗은 죽음에 이를 만한 큰 병에서 그 원인이 자신의 부족과 죄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회복을 기도할 때 자신을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기를 구했고 그에게 닥친 고난이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이라고 말하였다. 실상 죄는 모든 불행의 근본적 원인이요 다윗의 큰 질병의 원인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질병이 하나님의 징책임을 바르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불평하는 말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참으로 깨닫는 자는 하나님의 징벌을 달게 받을 것이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심으로 쇠망하였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견책하시고 징계하실 때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하시므로 각 사람은 참으로 헛되다고 말한다. 사람이 일시적으로 건강하고 부귀영광을 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치시면 하루아침에 헛되게 될 것이다.
    다윗은 이런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모든 죄과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징책을 그에게서 옮겨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이 병으로 그를 치셨으므로 치료도 그에게 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시다(출 15:26). 그러므로 우리는 병 낫기를 기도해야 한다(약 5:14-15). 다윗은 또 그의 병이 우매한 자에게 비난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징책과 인생의 헛됨을 깨닫고 오직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회복을 구하자.
    [12-13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다윗은 병중에서 부르짖는 눈물의 기도를 올린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며 그의 치료와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가 눈물 흘릴 때 잠잠하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병상에 있는 그에게 죽음의 그늘이 졌고 그의 일생이 짧은 나그넷길같이 끝날 것 같음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인생의 세상생활은 나그넷길인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레 25:23). 다윗은 다른 곳에서도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기도했다(대상 29:15). 베드로도 성도들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불렀다(벧전 2:11).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 질병의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간구한다. 13절의 ‘주는 나를 용서하소서’라는 원어(하솨 밈멘니 י ע)는 ‘나로부터 주의 얼굴을 돌리소서’(NASB)라는 뜻인 것 같다. 여기의 ‘주의 얼굴’은 하나님의 노하신 얼굴을 가리킨다. 그는 또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고 기도한다. ‘건강을 회복시키다’는 원어(아블리가 היאַ)는 ‘미소를 짓다, 기쁜 얼굴을 하다’는 뜻이다. 그는 기도 응답으로 건강 회복을 얻을 때 기뻐할 것이다. 성경은 병든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친다(약 5:13-18).
    우리는 고난 중에서, 병상에서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과, 인생이 나그넷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와 치료를 간구하자.
    40편: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기다림
    [1-2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고 표현한다. ‘기가 막힐 웅덩이’라는 원어(보르 솨온 ןוֹא רוֹבּ)는 ‘소요(roar -ing)의 웅덩이’(BDB), ‘멸망의 웅덩이’(게세니우스, NASB), ‘무서운 웅덩이’(KJV) 등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고난의 상황을 가리킬 것이다. 옛날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실제로 웅덩이에 던지워 죽을 뻔하였고(창 37:24),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깊은 바다에 던지워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욘 2:2-3). 다윗은 지금 그런 상황 속에 처해 있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부르짖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가리킨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예레미야 29: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다윗은 부르짖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표현은 인내하며 기다렸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교훈하셨다(눅 18:7).
    다윗의 부르짖고 기다리는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얻었다. 주께서는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고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또 그는 그를 그 구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셨고 그의 발을 반석 위에 두셨고 그의 걸음을 견고케 하셨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낙망치 말고 그의 응답을 기다리고 기다리자.
    [3-4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새 노래를 그의 입에 두셨다고 말한다. 새 노래는 새로운 마음가짐과 감격과 감흥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의 노래를 가리킨다. 그것은, 소요와 멸망의 웅덩이와 같은 고난 중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간구하고 인내하며 기다린 결과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탄식을 변화시켜 기쁨과 찬송이 되게 하신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다윗의 체험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많은 사람은 다윗의 큰 구원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보고 그의 살아계심을 볼 것이다. 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절망적 고난에서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도 환난 중에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증거하였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아는 모든 자가 의지하며 믿고 따를 대상이시다. 우리의 삶도 다른 이들에게 증거가 되기를 원한다.
    다윗은 이제 교만한 자나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크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복되다고 증거한다. 교만하고 거짓된 자들은 조만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셨다(사 2:22). 그러므로 성도는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경한다(시 15:4).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자. 말씀과 기도로 진행하며 의와 선을 행하자. 그러면 늘 승리하며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5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나의 부모님’ ‘나의 선생님’이라고 표현하듯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개인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친밀함을 보인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그를 경외하고 경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동시에 ‘나의 하나님’으로 가까이 섬겨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생각들도 많으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부터 기적이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도 그의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기이하게 건져내셨다. 그는 그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을 마시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는 하나님의 행하신 기적들이 가득한 역사이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생각들은 포괄적이고 주밀하고 완전하다. 그것들은 개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포괄하며 교회의 설립부터 완성까지를 포함한다. 사람은 앞의 일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는 온 세계 역사를 만세 전에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세계를 다스리며 그 뜻을 이루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그 모든 기적들과 생각들을 말하고자 할지라도 다 열거할 수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다고 고백한다. ‘베풀다’는 원어(아라크 )는 ‘순서적으로 열거하다’(KJV, NIV)는 뜻이다. 우리의 생애 전체와 인류의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과 완전하신 섭리를 깨닫자. 또 완전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며 사랑하고 순종하자.
    [6-8절]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사들을 기뻐하시거나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통하여 들리신다’는 원어(카라 ה)는 ‘(우물이나 구덩이 등을) 판다’는 뜻이다.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신다는 말은 (1) 나의 귀를 여셨다, 혹은 (2) 나의 귀를 뚫으셨다는 뜻이다. 율법에는 평생 주인과 살기를 원하는 종은 귀를 뚫었다(출 21:5-6). 헬라어 70인역은 “주께서 나를 위해 한 몸을 준비하셨나이다”라고 번역했고 그 구절은 신약성경 히브리서 10:5에 인용되었다. 그것은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을 삼음으로 종의 몸을 준비하셨다는 뜻 같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삼상 15:22-23; 사 1:13-14, 16-17).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메시아 예언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 증거한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누가복음 24:44,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또 메시아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고 그의 뜻을 즐거이 행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34). 또 그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빌 2:8; 히 4:8-9).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도 여시고 뚫어지게 하셔서 그의 영원한 종을 삼으심으로 그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의 뜻을 즐거이 행하는 자가 되자.
    [9-10절]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은 대회 즉 큰 무리들 가운데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기쁜 소식이다.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의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 즉 심판하실 공의를 가리키지 않는다. 다윗은 12절에서 그 자신도 죄가 많음을 말한다. 본절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본다. 다윗은 시편 4:1에서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의 기쁜 소식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고(롬 1:17), 그것은 율법과 별개의 하나님의 한 의이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었다(롬 3:21).
    다윗은 하나님의 의의 소식을 전하는 입술을 닫지 아니할 것이며 그것을 하나님도 아신다고 말한다. 촬스 웨슬리는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라는 시를 썼다. 다윗은 또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은휘한다’는 말은 ‘숨긴다’는 뜻이다.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성실하심,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등과 동의어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확실하고 믿을 만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것을 성취하셨다. 그의 의와 그의 구원은 완전하다. 그것은 그의 크신 인자의 결과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깨닫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그 구원은 하나님의 의이며 그의 신실하심의 표이며 그의 인자와 긍휼과 사랑이다. 또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증거하자.
    [11-12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다윗은 무수한 재앙이 그를 둘러쌌다고 말한다. 그는 시편 34편에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했다(시 34:19). 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신다고 말했다(욥 7:17-19). 히브리서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했다(히 12:8). 성도에게는 고난이 많다.
    다윗은 그를 둘러싼 재앙이 그의 죄를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크고 머리털보다 많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우리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깨닫는다. 다윗은 시편 38편에서도 병중에서 주의 진노로 그의 살에 성한 곳이 없고 그의 죄로 인해 그의 뼈에 평안함이 없다고 말했고 또 그의 죄악이 그의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므로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3-4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우리가 그의 명령을 순종하였더라면 평강이 강과 같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사 48:18). 인생의 고난은 대체로 죄 때문에 온다.
    다윗은 이제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그는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소서”라고 말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거두시면 우리는 죄 가운데 버려져 멸망할 것이지만, 긍휼을 베푸시면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누릴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는다(엡 2:4-5; 딛 3:5).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로 자신을 항상 보호해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이 항상 보호해주실 때 우리는 항상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 우리의 부족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며 그 안에 거하며 그의 계명을 힘써 지키자.
    [13-15절]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다윗에게는 그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는 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를 해치기를 기뻐하며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성도에게는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해치려는 자들이 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원수는 사탄이다. 그는 성도를 속이며 범죄케 하는 자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사탄과 악령들과 영적으로 싸우며 그 싸움의 과정에는 많은 고난과 핍박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다윗은 원수들이 그를 해하려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한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는 그들을 도우시고 지키시고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했다(시 23:1, 4). 또 주 예수께서는 그의 양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0:28).
    또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들로 수치와 낭패와 욕을 당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성도를 위하신다. 그는 성도와 싸우는 자들과 싸우시고 대적하는 자들을 대적하신다(시 35:1). 사탄과 악령들과, 또 성도들을 핍박했던 악한 자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내리시는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마 25:41; 계 20:10; 21:8).
    우리는 우리와 싸우는 사탄과 악령들과 인간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성도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16-17절]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다윗은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러하였다고 본다. 이삭이나 욥같이 물질적 부요의 복을 얻은 자들도 있지만, 주의 말씀과 같이 일반적으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고(마 19:23),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약 2:5).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정신적으로도 가난한 자이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과 재 같은 자라고 고백하였고(창 18:27), 사도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표현하였다(엡 3:8). 성도는 가난한 자이다.
    다윗은,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하시고 그의 도움이시며 건지시는 자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생각하는 자가 별로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성도를 생각하시고 돌아보시며 그를 도우시고 그를 위험한 상황에서 건지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며(시 23편) 환난 날에 큰 도움이시다(시 46:1).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며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게 하실 것이다. 또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하며 하나님의 신속한 도우심을 구한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곧 응답될 것이다.
    우리는 가난과 궁핍을 두려워하지 말자.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도우시고 건지심을 깨닫고 어려울 때 그만 의지하고 간구하자.
    41편: 빈약한 자를 돌보는 자가 복됨
    [1-3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다윗은 빈약한 자를 생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빈약한’이라는 원어(달 ל)는 ‘비천한, 연약한, 가난한’이라는 뜻이며 ‘권고하는 자’라는 원어(마스킬 לי)는 ‘생각하는 자, 돌아보는 자’라는 뜻이다. 빈약한 자를 생각하는 자가 복이 있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아를 도우시는 자시요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한다(시 10:14; 68:5).
    다윗은 그런 자가 받을 복에 대해 말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재앙의 날에 그를 건지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고 살게 하실 것이다. 그는 땅 위에서, 세상에서 복을 받은 자이다.
    다윗은 또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또한 “주께서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으시리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수들에게 해를 당치 않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또 다윗은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중에, 그의 연약한 병상에서 그를 붙드시고 치료하셔서 건강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만병의 의사이시며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뜻대로 살아가자. 특히 빈약한 자를 생각하는 자가 되자. 이것은 재앙의 날에도 구원을 얻는 복된 길이다.
    [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병중에서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영혼의 치료를 간구하였다. 육신의 병의 치료보다 영혼의 회복이 더 중요하고 영혼이 회복되면 육신의 치료도 뒤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16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5-9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다윗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고 원수들로 인한 심적 고통도 컸다. 그의 원수들은 그가 언제나 죽고 망할 것인가라고 악담하였다. 그는 다윗을 동정하기는커녕 그를 보러 와서는 그를 위하는 것같이 거짓을 말하고 심중에 간악을 품었다가 나가서는 그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렸다. 그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은 그에 대해 수군거리고 그를 해하려고 꾀하며 그가 악한 병이 걸렸으니 이제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선전하였다. 악인은 빈약한 자를 생각하는 성도와 너무 다르다.
    심지어 다윗이 믿고 신뢰했던 자, 그와 친근히 식탁 교제를 나누었던 그의 가까운 친구도 그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들었다. 다윗은 마음에 큰 상함과 슬픔을 가졌을 것이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3:18에서 메시아의 예언으로 인용되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3년간이나 주를 따르며 많은 말씀과 기적들을 듣고 보았고 주의 사랑을 받아 재정관리까지 맡았으나 주를 배신하고 팔아 넘겼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안팎으로 싸우는 전쟁과 같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10-13절]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다윗은 고난 중에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긍휼을 구한다. 또 그는 그의 긍휼로 그를 병상에서 일으키심으로 원수들에게 되갚음이 되기를 원한다. 성도의 구원과 승리는 단지 자신의 명예를 위함이 아니고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명예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다윗은 또 그의 원수들이 그를 이기지 못함을 볼 때 주께서 그를 기뻐하시는 줄을 안다고 고백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원수들이 그를 이기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성도를 기뻐하시는 확실한 증거이다.
    또 다윗은 그의 원수들과 대조하여 주께서 그를 그의 완전함 가운데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실 것을 확신한다. 완전함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다 포함할 것이다. 칭의는 법적 의이며 성화는 실제적 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義)로 구속하셨고 또 평생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칭의와 성화는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 ‘영영히 그의 앞에 세우신다’는 말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참고 견딜 것이다(빌 1:6).
    이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 것이라고 말하며 ‘아멘, 아멘’으로 글을 마친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신 자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며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일이다(엡 1장). 참으로 그러하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케 하심과 붙드심을 깨닫고 확신하고, 경건하고 의롭게만 살고 하나님을 늘 찬송하자.
    42편: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람
    [1-3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성도에게는 환난의 때가 있다. 사슴이 보통 때에는 시냇물을 쉽게 찾고 물을 마시겠지만, 매우 가물 때에는 시냇물을 찾지 못해 갈급해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시편 저자는 평소에 하나님과 동거하고 동행하며 교통하며 평안을 누렸으나, 지금 환난 중에 있고 하나님과 멀어진 느낌을 가지고 있다.
    시편 저자는 이런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 . .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말하며 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히스기야도, 예레미야도, 바울도 하나님을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인정하였다(신 5:26; 수 3:10; 삼상 17:26; 시 18:46; 왕하 19:4; 렘 10:10; 딤전 4:10). 파사왕 다리오까지도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지내신 하나님을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였다(단 6:26). 성도는 환난의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한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성전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즉시 없었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사람들의 계속된 조롱 속에서 그는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즉시 없는 것 같은 환난의 때에도 낙심치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4-5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이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섬겼다. 그는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무리와 함께 성일(聖日)을 지켰고 그들과 함께 기쁘게 찬송하였다. 또 그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갔다. ‘저희를 인도하였다’는 원어(엣닷뎀 ם)의 뜻은 분명치 않아 보인다. 언어학자들이 그것의 전통적 마소라 모음부호를 고쳐 ‘그들을 천천히 인도하였다’라고 읽기(아닷뎀 ם)를 제안하고 근래의 영어성경들이 그 제안을 채택하지만(NASB, NIV), 마소라 본문은 아마 옛날 영어성경의 읽기대로 ‘그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갔다’는 뜻일 것이다.
    시편 저자는 그러나 지금 절기와 성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고 기쁨의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추방된 상태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전의 일을 기억하고 마음이 상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그의 영혼이 왜 낙망하고 불안해 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에 맞아 죽을 스데반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힘을 얻은 것처럼(행 7:55), 성도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을 보면 힘과 위로를 얻고, 그의 슬픔과 낙심은 기쁨과 찬송으로 변할 것이다. 그는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서 차꼬에 채인 중에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이다(행 16:25).
    성도에게는 때때로 큰 고난이 있지만,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바라자. 하나님은 결코 그를 버리시지 않고 그의 얼굴의 도우심을 주실 것이다.
    [6-8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큰 고난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심이 되었다. 그는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을 말한다. 요단땅은 요단강 주위이고, 헤르몬산은 팔레스틴 북쪽 끝의 높은 산이며, 미살산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낮은 산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원수들의 압제를 피해 이런 지역들을 방황하며 다닌 것 같다. 또 그는 “주의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갈릴리 바닷가에 서서 바다의 흉흉한 파도소리와 물결소리를 표현한 것 같다. 그는 그것을 자기에게 덮친 환난에 비교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를 큰 고난 중에 버려두셨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환난 때에 자포자기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믿음 있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요나는 바닷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였다(욘 2:7).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신 8:18; 전 12:1).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자요 섭리자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또 시편 저자는 낮에는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그에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고백한다. 낮에 원수들이 그를 해하려고 찾지만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으로 그를 보호하실 것이며, 밤이 되면 그는 그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 그에게 인자를 베푸신 그 하나님께 찬송할 것이다.
    우리도 낙망할 만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자. 낮에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실 하나님을 기억하자.
    [9-11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그를 잊으셨나이까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잠시라도 잊지 않으신다. 그는 젖먹이를 가진 여인보다 더 우리를 잊지 않으시며 우리를 그의 손바닥에 새기셨다(사 49:15-16). 그러나 시편 저자는 지금 원수의 압제를 인해 슬프게 다니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원수의 비방은 칼로 뼈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되었고 그것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낙망이 되고 불안하였다. 성도는 세상에서 낙심할 만한 고난을 경험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해야 하고(행 14:22)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딤후 3:12).
    그러나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기억하고(6절)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내 반석이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반석은 든든한 피난처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든든한 피난처이시다. 그는 또 하나님을 ‘내 얼굴을 도우시는 자’이시며 ‘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슬프고 낙망되고 불안한 우리의 얼굴을 평안과 용기와 기쁨의 얼굴로 변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힘과 위로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자신에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한다. 또 그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가 그의 얼굴을 도우시는 그의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우리는 큰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 우리의 힘과 도움,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심을 깨닫자.
    43편: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람
    [1-5절]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경건치 아니한 나라 가운데서 간사하고 불의한 자로 인해 환난을 당하였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원수의 압제로 인해 슬프게 다녔으며 그의 마음은 낙심하고 불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며 구원을 요청한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진리의 깨달음과 성령의 기쁨을 주셔서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그는 자신에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한다.
    이제 그는 구원과 회복을 기대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러 하나님께 단을 쌓을 것을 기대한다. 또 그는 하나님을 나의 극락(極樂) 즉 지극한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으로 인해 큰 기쁨을 얻을 것을 기대한다. 또 그는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기쁨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힘과 지혜와 기쁨으로 삼고 섬기며 살자. 성도에게 환난이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승리하자.
    44편: 고난 중에 주의 구원을 구함
    [1-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들의 날에 행하신 일들을 전해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이스라엘 열조를 심으셨고 이방 백성들을 괴롭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번성케 하셨다. 이것은 여호수아 때의 가나안 정복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신 것은 그들의 가증한 우상숭배와 음란의 큰 죄악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열조들이 그 땅을 얻은 것은 그들의 칼이나 그들의 팔로, 즉 그들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빛으로, 즉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과 힘으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엄위하신 심판의 능력이지만,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긍휼하신 구원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까닭은 그가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도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에게 보응치 않으시고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딤후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셔서 오직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깨닫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자.
    [4-5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른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르는 말씀이 몇 번 나온다. 시편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시편 74:12,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시편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또 예수 그리스도는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라고 불리운다(계 17:14). 왕은 백성을 통치하고 원수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공의롭고 선하신 왕이시며 전쟁에 능하신 큰 용사이시다. 시편 저자는 그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대적을 누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는 자이시다(신 1:30; 3:22; 시 35:1).
    [6-8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원문 6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시편 저자는 원수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활이나 칼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힘과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에게서 구원하셨고 그들을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신 과거의 경험을 말한다. 또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다고 증거하며 또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에 근거하여 현재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삼고 살자. 또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 즉 재능이나 돈이나 건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행하자.
    [9-16절]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시편 저자는,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이 심한 고난 가운데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 모욕을 당하게 하셨고 전쟁 때에 그들의 군대와 함께하시지 않았다. 그들은 대적들에게서 패하여 돌아섰고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탈취를 당하였다. 그들은 먹힐 양같이 잡혔고 열방 중에 흩어졌다. 그들은 아무 몸값도 받지 못하는 자들과 같았다. 그들은 이웃 나라들에게 욕을 당했고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말거리가 되었고 이방 나라들 가운데서 머리 흔듦을 당했다. 그들의 불명예가 종일 그 앞에 있었으며 수치가 그 얼굴을 덮었다. 그것은 그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었고 그들의 원수와 보수자 때문이었다.
    성도에게는 환난의 때가 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실패하고 탈취를 당하고 무가치하게 취급을 당하고 조롱과 욕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본문은 여섯 번이나 “주께서”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것은 주께서 이 모든 고난의 현실을 주셨음을 증거한다. 또 여기에 고난의 현실로부터의 회복과 해결의 실마리도 있다.
    성도는 고난 중에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심치 말고 믿음의 훈련을 받고 또 자신을 반성하며 생각나는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하며, 고난의 해결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며 그에게 구원을 간구해야 한다.
    [17-21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이 모든 어려운 일, 앞절에서 말한 모든 일들이 닥쳤다고 말한다. 그들은 대적에게 모욕을 당했고 패전했고 흩어졌고 놀림을 받았다. 시편 저자는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시랑’(탄님 םי)은 여우와 이리의 중간쯤 되는 재칼이라는 짐승이다. 이스라엘이 처한 곳은 죽음의 위협과 위험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성실히 행했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다.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주의 언약에 대해 거짓되이 행치 아니하였다, 즉 성실히 행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주의 계명을 성실히 지키려 해야 한다. 또 그는 우리 마음이 퇴축(退逐)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진실한 성도는 고난 중에도 주를 따르는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
    시편 저자의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신을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비밀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 마음도, 변질된 마음도 아신다.
    우리는 큰 고난 중에도 마음이 변치 않도록 지키고 뒤로 물러나지 말고 언약에 충실하며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22-26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의 고난의 현실을 증거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그 고난은 온종일 계속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고난과 압제를 받았다. 사도들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또 시편 저자는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하나님은 주무시고 그들을 영영히 버리신 것 같았고 얼굴을 가리우시고 잊으신 것 같았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낙망치 않고 기도하였다. 그는 “주여 깨소서 . . . 일어나소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한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소리를 좋아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고(신 4:7)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은 우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들고 간절한 기도는 그의 응답을 가져온다.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구원을 간구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救贖)하소서.” 우리는 부족함이 많으므로 우리의 의(義)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 때문이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주의 이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자의 이름이다.
    우리는 죽음에 이를 극심한 고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하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며 간구하자.
    45편: 왕의 영광
    [1-2절]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시편 저자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왕에 대해 시를 지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혀가 필객의 붓과 같다고 말한다. ‘필객’은 ‘능숙하게 글 쓰는 이’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가 노래한 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신적인 존재이다. 그는 인생보다 아름답다고 표현된다. 그것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성경은 외모의 아름다움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잠 31:30). 베드로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외모 단장은 조금만 하면 된다. 내면적 아름다움, 인격의 아름다움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혜와 덕, 인격적 감화가 더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시편 저자는 왕이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고 말한다. 자비로운 왕이 훌륭한 왕이다. 잠언 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은혜로운 말씀이었고(눅 4:22) 그는 은혜가 충만하신 자이셨다(요 1:14). 우리도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엡 4:29).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하나님께 영원한 복을 얻으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과 천국의 복을 얻었다.
    우리는 아름답고 은혜롭고 복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감사하자. 또 그의 내면적 아름다움과 은혜로운 입술을 본받자.
    [3-5절]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본 시편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는 위엄 있는 왕이시다. 그는 능한 자이시며 칼을 허리에 차고 영화와 위엄을 입으시는 자이시다. 그는 위엄 있게 말을 타고 전쟁하시는 자와 같고 오른손으로 두려운 일들을 행하시는 자이시다. 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우리 주 예수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마 24:30).
    또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왕의 특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다. 진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충만하신 자이시다(요 1:14). 온유도 하나님의 한 속성이다. 그것은 강퍅하고 거역하는 마음과 대조되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자이시다(마 11:29). 공의는 도덕적 기준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의의 기준 자체이시다. 그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그의 길은 의롭고 참되며(계 15:3) 그의 심판도 그러하다(계 19:2). 주 예수는 다시 오실 때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실 것이다(계 19:11). 그는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대로 믿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왕이 원수의 심장을 찌를 것이라고 말한다. 왕은 승전(勝戰)할 것이다. 그의 살은 날카로워 원수의 염통을 뚫을 것이며 만민이 그 앞에 엎드러질 것이다. 재림하실 주께서는 사탄과 악령들, 그의 일꾼된 거짓 목사들, 또 악을 행하며 회개치 않는 모든 사람들을 영영한 지옥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마 25:41; 계 19:20; 20:10; 21:8).
    만왕의 왕 예수께서 오셔서 사탄과 악령들과 악인들의 심장을 찌르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진리와 온유와 공의의 편에만 서자.
    [6-7절]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본문은 왕의 영광을 증거한다. 본 시편에 묘사된 왕, 곧 메시아는 신적인 왕이시다. 본 시편에 ‘왕은’ ‘왕의’ 등의 말은 ‘당신은’ ‘당신의’라는 뜻이다. 6절을 다시 번역하면, “당신의 보좌는, 오 하나님이시여, 영영하며”이다. 본문은 왕을 향해 ‘하나님이시여’라고 부른다. 이 왕은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인간 왕을 가리키지 않고 신성을 가지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이사야서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로 예언된 자이시다(사 9: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요 1:1) 참 하나님이시며(요일 5:20)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딛 2:13).
    또 왕은 영원하시다. 본문은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라고 말한다. 세상의 왕들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 나라들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메시아는 영원한 왕이시며 그의 나라도 영원하다. 메시아는 죽지 않으시고 그의 나라는 망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단 2:44).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또 왕은 공의를 행하신다. 왕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며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신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공의를 변질시키고 악을 행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공의의 왕이시다(사 9:7).
    또 하나님께서는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으실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께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히 있다. 죄는 슬픔을 가져오지만, 의는 기쁨을 가져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시고, 천국은 기쁨이 충만한 곳이다(롬 14:17).
    영원하신 신적인 왕, 공의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따르자. 또 우리도 공의를 사랑하며 악을 미워하는 가운데 그의 즐거움을 누리자.
    [8-9절]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본문은 왕과 왕비의 영광을 증거한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다. 몰약과 침향과 육계는 값비싼 향료이었던 것 같다. 출애굽기 30:23-25에 보면, 몰약과 육계는 거룩한 관유를 만드는 원료이었다. 왕의 모든 옷의 향기는 인격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 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아름다운 인격이시다.
    또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한다고 표현된다. ‘현악’이라는 원어(민니 י)는 ‘현악기’를 가리키는 단어(멘 ן)에서 나왔다고 본다. 세상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천사들과 성도들의 찬양과 악기 연주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것이다.
    또 본문은 왕의 귀비들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다고 말한다. ‘왕의 귀비(貴妃)들’은 왕을 섬기는 존귀한 여인들을 가리킨다. ‘열왕의 딸들’은 궁중 교육을 받은 아름답고 교양과 품위를 갖춘 자들이다. 왕의 귀비들은 성화된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또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선다. 성경에서 ‘오빌의 금’은 유명하다(왕상 9:28; 10:11; 22:48; 대상 29:4; 욥 22:24; 28:16; 사 13:12). 왕후가 오빌의 금으로 매우 아름답고 존귀하게 꾸민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교회에게 주신 완전한 의(義)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 같다. 또 왕후는 왕의 우편에 선다. 왕의 우편은 존귀와 특권을 가진 곳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린다.
    왕 되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아름다움을 알고 주께 영광을 돌리자. 또 특권 있는 자녀답게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격자로 살아가자.
    [10-12절]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본문은 왕후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증거한다. ‘딸이여’라는 말은 왕후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본문은 왕후에게 몇 가지를 교훈한다. 첫째, 그는 왕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왕후는 왕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듣고 생각하고 주의를 집중하고 귀담아 들어야 한다. 둘째, 그는 자기의 백성과 아비의 집을 잊어버려야 한다. 모압 여인 룻이 자기의 백성과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고 어머니 나오미의 백성을 그의 백성으로, 어머니의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삼았던 것처럼(룻 1:16), 그리스도의 신부된 모든 성도는 옛 사상과 사고방식, 옛 관습, 옛 가치관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사상 즉 성경의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규례 즉 성경의 규례, 성경적 교회의 규례를 배우고, 하나님의 가치관 즉 성경적 가치관을 취해야 한다. 셋째, 그는 왕께 경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왕은 그의 주(主)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는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해야 한다.
    본문은 또한 왕후가 누릴 복에 대해 증거한다. 왕후가 위와 같이 하면, 왕은 왕후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 것이다. 남편은 아내가 완전히 자기 사람이 되어 자기만 생각하고 위할 때 그를 더욱더 사랑하고 사모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부모나 처자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의 제자 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38). 또 본문은 두로의 딸이 왕후에게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들도 그의 은혜를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세상적으로 부한 자들도 교회에 소속하게 될 것을 보이는 것 같다(행 17:4).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의 음성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며 옛 사상과 풍습과 가치관을 버리고 주만 경배하며 따르자.
    [13-15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본문은 왕후의 복을 증거한다고 본다. 13절의 ‘왕의 딸’은 왕후를 가리킨 것 같다. 문맥상 왕후는 단수명사로 표현되고(9-12절) ‘딸’이라고 불리웠고(10절) 금으로 단장되었다(9절). 왕후는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며 그 옷들은 금으로 수놓은 것이다. 성경은 성도가 누릴 영광에 대해 많이 말한다. 성도는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다(빌 3:21). 그것은 보석으로 단장된 거룩한 예루살렘성으로 묘사되었다(계 21:10-11). 성도는 장차 나타날 그 영광을 소망하며(롬 8:18) 그것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롬 5:2).
    또 왕후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신부에게 가장 큰 복은 신랑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일 것이다. 교회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 자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였다(계 21:3). 또 성경은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말씀하였다(계 22:3-4).
    왕후와 시녀들은 또 왕궁에서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천국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친다(롬 14:17). 천국에는 슬픔과 애통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왕후는 영광을 누리며 왕궁으로 인도되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도 이 복을 감사히 누리자.
    [16-17절]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본문은 왕의 아들들 즉 왕자들이 누릴 영광을 증거한다. 왕의 아들들은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며 왕은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을 것이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노래하기를,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고 했다(계 5:9-10). ‘나라’라는 말은 전통본문에 ‘왕들’이라고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요한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자신이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일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져 간다. 전도서 1: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서 2: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그에 대한 풍성한 증거들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또한 모든 사람이 왕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은혜를 받은 자마다 그를 영원히 찬송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13,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 세상의 왕들로 삼으심을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자.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기억하고 찬송하자.
    46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심
    [1-3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며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그를 경외하며 회개하며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시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하며, 또 시편 118:8-9는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라고 말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세상에는 환난들이 많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는 것 같은 천재지변도 있다. 전쟁도 있고 흉년도 있다. 질병도 많고 사고도 있으며 경제적 어려움이나 가정적 어려움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난처와 힘과 도움으로 삼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3:1-2, “너는 두려워 말라. . .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하고 계명을 순종하며 살고,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와 힘과 도움으로 삼고 환난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4-5절]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 곧 예루살렘성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한 시내가 그 성에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한 시내’는 흉용한 바닷물과 대조되는 잔잔한 시냇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와 역사를 상징할 것이다. 시편 36:8은 하나님의 은혜를 ‘복락의 강수’로 표현한다. 한 시내가 나뉘어 흐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한두 사람이나 한두 교회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들과 교회들이 함께 누리는 것임을 나타낸다.
    본문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기쁨이 있다. 4절,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평안함과 견고함이 있다. 5절,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개인과 단체에는 평안함과 견고함이 있을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빠른 도우심이 있다. 5절,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새벽에’라는 원어(립프노스 보케르 ר תוֹנ)는 ‘아침이 될 때’라는 뜻이다. 이것은 밤중에 기도하였는데 아침이 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역사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밤에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만 5천명을 치셨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그들이 다 시체가 되었었다(왕하 19:35). 시편 30:5는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 가운데 시냇물처럼 임재하셔서 기쁨과 견고함과 빠른 도우심을 주심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따르자.
    [6-7절]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본문은 이방인들이 떠들썩하고 나라들이 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하고 대적하고 대항하였다. 시편 2:1-2,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이나 형식적 교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하며 대적한다.
    본문은, 그 때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니 땅이 녹았다고 말한다. 그 하나님의 소리는 분노의 소리이며 책망과 책벌의 소리이다. ‘땅이 녹았다’는 말은 떠들썩하던 일이 잠잠해지고 대적하고 반역하던 세력이 파하여졌다는 뜻이다.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와 그 동료들과 족장 250명의 세력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음으로 잠잠해졌고, 다윗을 대적하던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세력은 하나님께서 꺾으심으로 파하여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했던 가룟 유다는 비참하게 죽었고 위선적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예루살렘성은 40년 후쯤 처참하게 망했다.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신 까닭은 그가 우리편이시기 때문이다. 7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사용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가 ‘우리’ 편이시고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한 그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성경 교훈대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시며 그들의 피난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에게 분노와 책망의 소리를 발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들의 떠들썩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성경 말씀대로만 믿고 회개하며 순종하고, 환난 날에 하나님께 피하자.
    [8-9절]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증거이다. 죽은 자는 행동하지 못한다. 산 자만 행동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 창조 세계가 그의 행하신 일들이요 그의 섭리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다. 온 세상과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행적들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시편 104:24는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행하신 많은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 중에 특히 땅을 황무케 하심과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고 활을 꺾고 창을 끊으시며 수레를 불사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 무리들을 다 파하셨다. 그는 인류 역사 가운데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도 그는 모든 불의와 거짓을 파하시고 의와 진리가 이기게 하시며 온 땅에 참 평안을 주실 것이며 온 세상에 전쟁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호세아 2:18, “그 날에는 내가 . . .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스가랴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시편 저자는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와서 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관심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서 역사상 행하신 일들을 확인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전도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자세히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창조와 섭리의 일들, 특히 성경에 기록된 그의 구원역사를 확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10-11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이르시기를’이라는 작은 글자는 인간 저자가 갑자기 하나님으로서 말하기 때문에 보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 저자는 때때로 하나님으로서 말한다(신 11:14). 이것은 성경의 영감성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 두려워하지 말고 요동치 말고 조용히 바라보고 확인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확인하는 데는 사람의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보면 된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신구약 성경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며(요 17:3) 거기에 인생의 참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고 있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욕하고 멸시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말한다.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거느리시고 쓰시는 능력의 하나님,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며 회개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을 그의 백성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며 환난 때에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힘과 보장, 구원과 도움,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시다.
    우리는 조용히 참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영광을 알자. 우리는 그를 높이고 그가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고 환난 때에 오직 그에게로 피하자.
    47편: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함
    [1-2절]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시편 저자는 만민들이 손뼉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말한다. ‘만민들’은 특정한 제한이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것 같다. 우리는 어떤 높은 사람이나 존경받을 인물을 치하할 때 손뼉을 친다.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운 소리로 찬양할 만한, 찬양해야 할 분이시다.
    원문에는 2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고 그것은 만민들이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해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지존하신 여호와께서 엄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자 곧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다. 창조 이전부터 계신 그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 곧 육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고상한 것만 생각하신다. 또 하나님은 엄위하시다. 인간은 심히 추하고 천박하며 인간 세계에는 심히 부도덕한 것들이 가득하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다. 죄인인 피조물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고개를 들 수도 없다(사 6:5; 눅 5:8).
    만민들이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해야 할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가 온 땅에 큰 왕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홀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왕이시다. 인류의 역사는 그의 손에 있다. 다니엘 4:17,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심을] . . . 알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지존(至尊)하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 온 땅에 큰 왕이신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높이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3-4절]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셀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만민과 열방을 우리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를 가리킨다. 이 말씀은 사람을 복종시키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인다. 이것은 그의 왕권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만민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복종케 하시며 학생들로 하여금 선생에게 복종케 하시며 교인들로 하여금 인도자에게 복종케 하신다.
    또 이 말씀은 세계복음화를 예시한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로마서 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업은 온 세계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교회는 택자들의 모임이며 그들의 수효는 셀 수 없이 많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들은 장차 영광스런 천국의 기업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다(벧전 1:4).
    우리는 사람을 복종시키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자. 하나님께서 뜻하신 세계 복음화를 바라보자. 또 장차 주실 천국의 영광을 바라자.
    [5-7절]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면서 올라가신다고 말한다.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종종 땅에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셨다. 창세기 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것은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이루신 후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 그는 확실히 영광 가운데서(딤전 3:16) 천사들과 하늘의 성도들의 찬송을 받으시면서 승천하셨다.
    원문 7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온 땅에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온 땅에 왕이시다(6, 7절). 2절도 하나님은 온 땅에 큰 왕이시라고 말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되 즐거운 목소리로 하라고 말한다(5절). 즐거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약 5:13). 또한 본문은 나팔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악기들의 최상의 용도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편 150:3-5는 우리가 나팔과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현악과 퉁소와 제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은 또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지혜의 시’라는 원어(마스킬 לי)는 ‘이해력’이라는 뜻으로서, 시편의 표제어들에서 ‘묵상시’(BDB) 혹은 ‘교훈시’(게세니우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KJV)는 뜻 같다. 찬송시들은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는 시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깨닫고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자. 하나님을 찬양하되, 즐거운 목소리로, 악기로, 또 이해력을 가지고 하자.
    [8-9절]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열방의 왕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열방을 다스리신다. ‘치리한다’는 말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왕이신 그는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또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다니엘서에 증거된 대로, 지극히 높으신 그는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단 4:17, 25, 32; 5:21). 또 하나님의 통치는 거룩하고 의로우시다. 그에게 복종하는 자는 영생과 행복을 누릴 것이지만, 그를 거역하는 자는 영원한 멸망과 불행을 당할 것이다.
    본문은 또 하나님께서 열방의 방백들을 모아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이방의 존귀한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존귀한 자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의 영혼 구원에서 가장 은혜롭고 능력 있게 나타나신다(엡 1:11, 19).
    또 본문은 세상의 방패들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한다. 방패는 대적자의 공격을 막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방해하거나 어지럽히는 자들을 막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자들에게서 지키신다. 주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8).
    또 본문은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지존하다’라는 말은 ‘크게 높임을 받는다’는 뜻이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크게 높임을 받지 못하고 계시지만, 마지막 날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방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심을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하나님만 높이며 살자.
    48편: 시온에서 하나님을 찬송함
    [1-3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시편 저자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성에서 극진히 찬송하라고 말한다. ‘광대하다’는 말은 ‘위대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위대하시다. 그는 이스라엘을 해하려고 침입한 열방을 다 멸하셨다. 하나님의 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산이며 거기에는 그의 임재하심과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절기 때마다 거기 모여 그를 섬긴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그를 극진히 찬송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북방의 시온 산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이 터가 높으며 아름답고 온 세계가 그것을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구약 시대에 예루살렘성이 그러하였다. 그 성은 오늘날 교회에 해당한다. 세계의 참된 성도들은 교회를 사모하고 사랑한다. 그 성의 영광은 새 예루살렘성 곧 천국에서 충만하게,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다(계 21장).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특히 그 성의 여러 궁궐들에서 자신을 피난처로 알리셨다고 말한다. 견고한 성이나 그 성에 있는 아름다운 집들이 피난처가 되지 못하지만, 그 성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거처이시며(시 90:1-2), 우리의 반석, 우리의 요새,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시 18:1-2).
    하나님의 성, 곧 참 교회는 터가 높고 아름다우며 세계의 모든 성도는 그것을 사모하며 즐거워한다. 또 하나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교회 안에서 극진히 찬송하자.
    [4-8절]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원문 4절은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피난처시라고 증거한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이방의 왕들이 모여 연합군을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했으나 그 왕들이 다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함께 지났다’는 말은 ‘함께 지나갔다’는 말로서 죽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보고 놀랐고 두려워 빨리 갔으며 패배로 인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고통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았고 다 죽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들을 깨뜨리셨다. 다시스의 배들은 튼튼한 전함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한 동풍으로 그것들을 침몰케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연만물을 자유로이 사용해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치시며 그의 의로운 뜻을 이루셨다. 그는 여호수아 때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내려 아모리 다섯 왕들의 군대를 치심으로 여호수아 군대를 지원하셨고(수 10:11), 사무엘 때에는 큰 우뢰소리로 블레셋 사람들을 어지럽혀 그들로 이스라엘 앞에 패하게 하셨다(삼상 7:10).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관해 전달되어 내려오는 증언을 들었을 뿐 아니라, 친히 시온 성에서 그의 행하심을 보았다고 말한다. 신앙 열조들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성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친히 교회를 견고히 세우시고 우리들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마 16:18; 요 10:28; 빌 1:6; 딤후 1: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패배케 하시며 그의 성을 견고히 지켜주신다. 그는 교회를 세우시고 끝까지 지켜주신다.
    [9-11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그의 전에서 그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할 때 그러했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강대한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인자하심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이다(엡 2:8-9).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그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다고 아뢴다. 이 말은 인자하신 그 하나님의 이름이 땅 끝, 즉 이방 세계까지 전파될 것이며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과연 이 예언적 말씀대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세계에 전파되었고 각 나라, 각 족속에서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오른손에 정의가 충만하였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오른손으로 공의를 행하신다. 그는 자기를 거스려 악을 행하는 자들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신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시 7:11). 그러므로 시편 98:9는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고 말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인해 시온 산이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판단으로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시기 때문에, 성도는 비록 이 세상에서 악인들로 인해 때때로 환난과 핍박, 슬픔과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공의로우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을 올리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12-14절]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저자는 유다의 딸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시온을 거닐고 그것을 돌고 그 망대들의 수를 세고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피라고 말한다. ‘편답한다’는 말은 ‘거닌다’는 뜻이다. 시온성을 두루 거닐며 돌아보고 그 망대와 성벽을 자세히 살피라는 것은 시온성이 이상이 없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호하셨고 그들의 피난처가 되셨고 그것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이 사실, 즉 하나님께서 시온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사실을 후대에 전하라고 말한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온다. 이것은 세상 종말까지 반복될 것이다. 그 동안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의 백성에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신 11:18-19; 욜 1:3). 그러므로 모세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말했다(신 6:6-7).
    14절 원문은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후대에 전해야 할 이유를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자녀들과 후대에 전해야 할 이유는 이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백성에게 인자를 베푸시고 세상에 공의를 시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의 길이며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 평안과 행복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을 개인의 삶이나 성경에서 자세히 살피며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순종하고 또 다음 세대에게 힘써 전하자.
    49편: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음
    [1-4절]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시편 저자는 ‘만민들’과 ‘세상의 거민들’에게 말한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고 피부색과 국적과 언어의 구별이 없다. 시편 저자는 또한 ‘귀천빈부를 물론하고’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경제적 여유, 지식 수준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시편 저자가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고 말한 ‘이를’은 5절 이하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그것을 ‘지혜’와 ‘명철’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와 명철의 말씀이다. 잠언 3장에 지혜를 얻는 것이 정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혜가 진주보다 귀하다고 말씀한 그 지혜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을 가리킨다(잠 1:7; 9:10). 시편 저자는 그것을 또 ‘비유’와 ‘오묘한 말’이라고도 표현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심오하며 때때로 금방 잘 깨달아지지 않으나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밝히 깨달아진다.
    시편 저자는 세상 만민들에게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고(롬 10:17), 그래야 온전한 자가 되며(딤후 3:16-17)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시 1:2-3; 계 1: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섬기고 그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5-9]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시편 저자는 그를 속이는 자들의 악이 그를 둘러싸는 환난의 날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담대히 고백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이라는 원어는 “나를 속이는 자들의 악이 나를 둘러싸는”이라는 뜻이다. 원수들은 그를 속이고 해치고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그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다윗도 시편 3:6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또 시편 저자는 사람의 영혼의 구원이 재물을 가지고 되지 않는다고 증거한다. 그는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救贖)하지 못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속전(贖錢)도 바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돈으로 다른 이를 영존하게 하거나 그 몸이 죽어 썩지 않게 못할 것이다.
    사람의 육체의 생명도 고귀하여 천하를 다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이 없을 것이지만(마 16:26), 영생은 더욱 그러하다. 주께서는 우리가 지옥 형벌로부터 구속받는 것을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는 것으로 비유하셨다(마 18:24).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며 그것은 약 3조 6천억원이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죄인의 영혼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만 가능하다(벧전 1:18-19).
    우리는 우리를 해하는 악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하고 감사하며 기뻐하자.
    [10-12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田地)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람은 지혜 있는 자나 우준하고 무지한 자나 모두다 죽으며 그의 재물이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을 볼 것이다. 인생은 실로 죽는 존재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는 자도, 그렇지 못한 자도 결국 죽으며 그가 죽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자식이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다윗은 “진실로 각 사람은 . . .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다(시 39:6).
    그러나 사람들은 속으로 자기 집이 영원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고 생각하며 그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불러 ‘아무개의 땅’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은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을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이다. 그래서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말했다(전 7:2).
    시편 저자는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존귀한 존재이지만, 죽고만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 죽는 것뿐이라면 참으로 허무하다(전 12:7-8).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참된 가치와 소망은 이 땅의 것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죽을병에 걸렸을 때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39:7).
    우리는 우리에게도 죽음이 오며 우리의 재물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소망을 허무한 땅의 것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그가 주신 영생에 두고 하나님만 바라며 순종하며 살자.
    [13-15절]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본문은 인생들의 우매함을 증거한다. “저희의 이 행위”는 그들의 집과 땅을 영원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며 사는 자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들의 이 행위는 그들의 우매함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죽으면 그들의 소유가 그들의 것이 되지 못하고 남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은 오히려 그들의 말을 칭찬할 것이라고 말한다. ‘후세 사람’이라는 원어(아카레헴 םיאַ)는 ‘그들의 후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후손들은 그 선조들과 같이 우매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마치 양들이 양우리에 모이듯이, 모든 인생은 양같이 무덤에 두기로 작정되었다. ‘음부’(쉐올 לוֹא)는 무덤을 가리킨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히 9:27). 목자가 양을 치듯이, 사망은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시편 저자는 돌연히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라고 말한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새 세계에서 악인들을 통치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장차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며(눅 22:30)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을 것이다(계 2:26). 그러나 악인들은 죽을 때 세상에서 누리던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그 거처들도 없어질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말하기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영접하시며 그의 영혼을 무덤과 지옥 권세에서 구속(救贖)하실 것이라고 한다. 성도는 죽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의 나라 곧 천국으로 인도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과 그가 주시는 영생의 가치를 깨닫고 그를 믿고 따르자.
    [16절]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세상 사람이 부자가 되고 집이 크고 아름답고 사치할 때에 성도는 마음이 위축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성도는 세상적, 물질적 부귀영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17-19절]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원문 17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성도가 세상적, 물질적 부귀영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부자가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힐 때 수의 한 벌과 관 한 개면 족하다. 그는 그의 땅이나 집, 그의 금은보석, 그의 돈을 가져갈 수 없다. 그것을 무덤 속에 넣어준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사용하거나 누리지 못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스스로를 축하하며 남들의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는 결국 역대의 열조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성경은 죽은 자를 그 열조에게 돌아갔다고 말한다. 우리는 죽은 영혼들이 천국 혹은 지옥에 모임을 안다. 무덤에 묻힌 육체가 햇빛을 보지 못하듯이, 영광의 부활에 참여치 못하는 자들은 다시는 밝은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지으셨지만, 사람이 하나님과 그의 계명과 자신의 죄악됨과 세상의 헛됨을 깨닫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깨달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혜와 지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적 부귀영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이 죽는 존재임을 알자. 또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바로 알고 그에게만 소망을 두자.
    50편: 감사로 제사드림
    [1-3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한다. 본문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자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다고 말한다.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는 동양과 서양,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 각 피부색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 불러모으신다. 그가 세상을 모으시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그에게는 세상을 불러모으실 권한과 권세가 있으시다. 그가 오라, 모이라 말씀하시면 다 오고 다 모인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빛을 발하셨다고 말한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그 곳은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된 곳이다. 그 곳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요 또 땅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빛을 발하신다. 그 빛은 불의와 죄악의 어두움을 추방하는 공의와 진리의 빛일 것이다. 그 빛은 세상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심판의 기준이 된다.
    또 본문은 우리 하나님께서 임하사 잠잠치 않으시며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라고 말한다. 그는 말씀으로 의와 불의,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밝히시고 불과 광풍, 즉 능력과 위엄으로 온 세상을 공의롭고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자. 심판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그의 영광을 깨닫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4-6절]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그들을 모으신다. 본문은 그가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도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증거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하였고(롬 14:10), 고린도후서에서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하였다(고후 5:10).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구약의 중요한 규례는 제사이었고 그 핵심은 속죄이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거기에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고 거기에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믿음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의 특징을 증거한다. 본문은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특징은 공의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그의 도덕적 의지에 일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과 의지가 나타난 것이 그의 계명이다. 하나님은 계명을 따라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의이다. 구원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 신앙을 가지고 오직 힘써 의와 선을 행하자.
    [7-15절]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책망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그들의 제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수소나 숫염소를 취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삼림의 짐승들과 수천의 산들에 있는 짐승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산의 새들도, 들의 짐승들도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배가 고프시다 하더라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그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단지 자기 백성의 제사 행위 즉 형식적 예배 행위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신 것은 첫째로, 감사로 제사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 특히 그의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참 믿음과 하나님 섬김의 일이 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서원한 것을 갚기를 원하신다. 쉽게 서원하고 쉽게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는 것은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바른 태도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난 날에 그에게 부르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환난 날에 그를 의지하고 그의 도움을 간구할 것이다.
    우리는 형식적 교회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그에게 서원한 것을 갚고 환난 날에 그에게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16-21절]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위선을 지적하신다. 악인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그 입에 두면서 실제로는 악을 행하는 위선적인 자이다. 주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셨다(사 29:13). 우리는 위선자가 되지 말자.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또한 악인의 실상을 지적하신다. 그는 그가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고 그의 말씀을 뒤로 던진다고 지적하신다. 사람의 죄악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다. 그는 또 그가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된다고 지적하신다. 성경은 복 있는 자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한다(시 1:1). 악한 친구와의 교제는 우리의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전 15:33). 그는 또 그가 악하고 거짓된 말을 하고 형제를 공박하며 비방한다고 지적하신다. 악인은 말과 행위로 악을 행하는 자이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또한 악인의 결말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잠잠하실 때 악인이 그를 무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을 낱낱이 다 드러내시고 그 행위대로 공의롭게 보응하실 것이다(롬 2:6).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믿고 행하며 악인과 동류가 되지 말고 스스로 말과 행위로 악을 행치 말자.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22-23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본문은 성도의 본분을 증거한다. 성도는 우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를 기억하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잊어버린 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돌이켜 그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들을 찢을 것이며 그들을 건질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불경건이요 모든 죄의 근원이다. 시편 9:17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인들이 사망과 지옥 형벌 아래 처할 것이라고 말씀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의지하며 또 그의 뜻을 힘써 행하게 될 것이다.
    성도는 또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감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은혜를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할 때 그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그를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그에게 욕을 돌리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을 인정할 때 그의 뜻을 힘써 행하고 그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8).
    성도는 또한 행위를 옳게 해야 한다. 성도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바로 살기를 결심하고 행해야 한다. 사람은 참된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를 것이다. 성도가 행실을 옳게 하지 못한다면,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는 자이며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참된 구원의 증표이다. 사랑의 행위는 그의 구원을 확증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에게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를 옳게 하자.
    51편: 회개의 기도
    본 시편은 표제어에 설명된 대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며 죄 씻음을 간구하는 내용의 시이다.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하여 죄사함을 간구하였다. 우리의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죽음의 형벌을 내리시지만, 그의 긍휼은 죄사함을 가능케 하신다. 패역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완전히 멸절되지 않았다(애 3:22).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엡 2:4-5).
    [2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깨끗이 제하시기를 간구하였다. 죄는 더러운 때와 같다. 몸이 더러울 때 깨끗이 씻듯이, 우리의 죄는 깨끗이, 말갛게 씻음받아야 한다. 우리는 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 더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고후 7:1).
    [3절]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다윗이 죄씻음을 간구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죄를 알고 그의 죄가 항상 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그것을 부끄럽고 두렵고 고통스럽게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더러운 죄를 말갛게 씻어주신 긍휼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죄 없는 삶을 목표로 삼고 힘써 달려가자.
    [4절]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께 범한 죄임을 고백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는 원문(레카 레밧데카 카타시 יא )은 직역하면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범죄하여”이다. 다윗은 그가 밧세바와 그 남편 우리아에게 잘못한 것이 단지 사람에게 잘못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임을 강조하여 고백한 것이다.
    성경은 죄가 단지 인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죄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을 취한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다”고 말씀하셨고(창 20:6), 요셉은 그와 동침하기를 청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했다(창 39:9). 율법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법을 범한 죄는 그의 속성을 침해하고 그의 권위를 손상시킨 악인 것이다. 여기에 도덕법의 근거가 있고 또한 그것을 어긴 죄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아야 할 근거는 하나님이시며, 도덕법을 어긴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며 그에게 보응을 받아야 할 악이다.
    다윗은 또한 자신의 죄를 지적하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고백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증거한다(스 9:15; 느 9:8, 33; 시 7:9; 116:5; 119:137; 145:17; 렘 12:1; 단 9:7, 14 등등).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법을 내시고 또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도덕적 완전자이시며 모든 도덕의 기준과 근거가 되신다. 또한 그가 우리의 인격과 행위의 부족을 지적하심은 항상 정당하시고 그가 우리에 대해 내리시는 판단은 항상 공의로우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깨닫고 모든 죄를 멀리하고, 성경을 통해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지적을 받고 의의 길만 가자.
    [5-6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죄 가운데서 잉태되어 죄 가운데서 출생하였다고 고백한다. 욥도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라고 고백하였다(욥 14:4). 인간은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다. 그것이 왜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으며 왜 모든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한가 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자녀를 출산한 후 자신을 속죄할 번제와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레 12:6-8). 모든 인간은 부패된 본성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만 가능하다. 죄인의 신분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악된 본성의 극복은 우리의 노력과 결심과 선행으로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가 예비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만 가능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엡 2:8-9).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의 진실함과 지혜의 깨달음을 원하신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마음의 변화이다. 구원은 우리의 마음의 변화이다.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우리의 심령이 변하여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교훈하였다(엡 4:22-24).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의 부패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의 대속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진실함과 지혜를 항상 가지자.
    [7-9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은 입법자와 재판자이시다. 그는 세상의 도덕 질서의 원천이시며 완성자이시다. 그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실 때 우리는 깨끗함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방법은 우슬초로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우슬초 가지는 속죄 제물의 피에 담가 죄인에게 뿌리는 도구이다(레 14:4-7; 히 9:19).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상징한다. 죄는 물과 비누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어진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죄씻음의 정도는 완전하다. 본문은 그것을 눈에 비교하였다. 이사야 1:18,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43:25,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씻음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죄씻음의 결과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12절도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씻음의 구원을 받았을 때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받았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에 나아가서 항상 죄의 완전한 씻음을 받고 그로 인한 심령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자.
    [10-11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부정(不淨)한 마음, 즉 깨끗지 못한 생각, 깨끗지 못한 감정, 깨끗지 못한 의지이다. 주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마음의 변화, 즉 생각의 변화, 감정의 변화, 의지의 변화를 가져온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 자기 속에 견고한 영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정직한 영’이라는 원어(루아크 나콘 ןוֹכ וּר)는 ‘견고한 영, 믿을 만한 영’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의지의 새로움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의지가 새로워져서 굳센 의지, 견고한 의지를 가지고 결심하며 거룩과 의와 선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또 자신을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기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성도의 가장 큰 특권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은 곧 멸망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사울을 떠나셨고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지 않으셨다(삼상 28:6).
    다윗은 또 주의 성령을 그에게서 거두지 마시기를 기도한다. 성경은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였다고 기록했다(삼상 16:14). 이단자들은 성령이 없는 자이다(유 19).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 믿는 자 안에 오셨고 영원히 거하신다(요 14:16; 롬 8:9). 또 그는 거룩한 영으로서 우리에게 거룩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시며 우리의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되신다.
    우리는 항상 정결한 마음과 견고한 영 소유하기를 구하며 또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큰 복으로 여기자.
    [12-13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자기에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죄는 우리에게 근심과 두려움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죄사함의 구원은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18).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곳이다(롬 14:17).
    다윗은 또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그를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이 구절을 옛날 영어성경은 “당신의 자유하신 영으로 나를 붙드소서”라고 번역했다(KJV; LXX도 비슷함).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며 그의 기뻐하신 뜻을 자유로이 행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성경들은 한글성경처럼 번역한다.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었으나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죄씻음을 통해 자유함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억지로 순종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즐거이 행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또 말하기를,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고 한다. 큰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회복함을 얻은 성도는 그의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간증함으로써 자기와 같은 죄에 빠진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전할 주의 진리는 죄의 심각성과 죄씻음의 필요성, 즉 하나님의 진노와 자신의 불행에 대한 진리와, 죄씻음의 길과 죄씻음의 행복에 대한 말씀일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주를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14-15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질병에서 구원하여 건강을 주시며 환난에서 구원하여 평안을 주실 뿐 아니라, 특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의를 주신다. 다윗은 자신의 피흘린 죄에서 그를 건져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는 밧세바의 남편 충성된 신하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장에서 죽게 하였다. 그런 종류의 죄를 지은 자는 죽어야 마땅하였다. 살인자나 간음자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다. 요한계시록 21:8은 살인자, 행음자, 우상숭배자 등이 지옥불에 참여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다윗은 그런 죄인의 하나이었고 우리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을 용서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리고 우리 같은 많은 죄인들을 구원해주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정죄할 수밖에 없으나 대속 제물을 통해 그 의가 만족되었고 우리의 구원이 된 것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의이다(롬 3:21-22, 25-26).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 우리의 의가 되셨다(롬 10:4; 고전 1:30).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고전 6:11).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이 의, 이 구원을 찬송하고 노래하며 전파하기를 소원한다. 영원히 죽을죄인,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만입이 있어도 다 찬송하고 감사할 수 없는 복되고 귀한 은혜이다. 여기에 성도의 찬송이 있다(찬 23, 192, 405장).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를 은혜로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할 것이다.
    [16-17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이었다. 레위기 1장부터 5장까지에서 하나님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섯 가지의 제사를 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사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며 번제를 기뻐 아니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제사가 있다. 그가 기뻐하지 않으시는 제사는 범죄자들이 회개치 않고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다(사 1:11, 13).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도 있다. 그것은 순종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 또 범죄했을 때 통회자복하며 드리는 제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제사는 죄인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지만, 단지 제사드리는 죄인편에서 참된 회개의 심령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고(사 57:15), 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고 하셨다(사 66:2). 하나님께서는 참된 회개를 원하시고 그런 자를 구원하신다(시 34:18).
    우리는 죄를 회개치 않고 숨긴 채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는 상한 심령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18-19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은 회개의 기도를 간절히 올린 후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시기를 기도하였다. ‘은택’이라는 원어는 ‘선한 뜻, 기쁘신 뜻’이라는 뜻이다. 지도자의 죄는 자신에게뿐 아니라 그가 책임 맡은 단체에 불행을 가져올 것이지만, 그의 회개와 죄사함은 그 단체에 회복이 될 것이다. 부모가 범죄하면 자녀들에게 불행이 오겠지만, 그가 회개하면 회복이 올 것이고, 어떤 회의 회장이 범죄하면 그 회에 불행이 오겠지만, 그가 회개하면 회복이 올 것이고, 나라의 왕이 범죄하면 그 나라에 불행이 오겠지만, 그가 회개하면 회복이 올 것이다. 다윗 왕의 범죄로 이스라엘 나라에는 어려움이 있고 성의 허물어짐이 있고 이방 나라의 침입의 위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죄를 회개하며 주의 선한 뜻 가운데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아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다윗은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라고 말한다. ‘그 때에’는 그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를 가리킨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올바른 제사,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기뻐하신다. 실상, 인간의 모든 문제는 영적 문제 곧 신앙의 문제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신앙이 바르면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지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 불행과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마 6:33).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항상 드리자.
    52편: 악인의 영원한 멸망
    [1-5절]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 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본 시편은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 앞에서 다윗과 아히멜렉에 대해 거짓되고 악하게 말하여 아히멜렉과 제사장들 85명 등을 칼로 죽게 하였을 때 다윗이 지은 시이다. 도엑이 다윗과 아히멜렉이 공모하여 사울을 대적하고 죽이려 한 것처럼 말한 것은 잘못된 추측이며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악인은 자기의 권세를 악한 일에 쓴다. ‘강포한 자’라는 원어는 ‘권세 있는 자’라는 뜻이다. 악인의 특징은 악함과 거짓됨에 있다. 악인은 심한 악 혹은 멸망을 꾀하며 날카로운 칼같이 거짓을 행하며 선보다 악을 사랑하고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한다. 그의 혀는 거짓되며 그는 잡아먹는 말, 즉 남을 죽이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다(1절). 인자하심은 인생이 본받아야 할 하나님의 속성이며 성도가 의지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를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있다(시 103:17).
    그러나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영원히 멸망시키시며 생존하는 땅에서 제거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와 거짓된 자에게 공의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원수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신 32:35; 롬 12:19). 하나님의 보응은 참으로 무섭다.
    우리는 모든 악과 거짓을 버리자. 남을 해하고 죽이는 말을 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것만 말하고 행하자.
    [6-9절]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의인과 악인의 삶은 현저히 대조된다. 악인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악으로 자신을 든든케 하는 자이다. 재물은 일시적으로 힘이 될지 모르나 갑자기 없어지기도 하고 전쟁의 날이나 죽을 때 아무 소용이 없다. 또 악으로 자신을 든든히 하는 것은 심령을 완악케 할 뿐이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멸망시키실 것이며 의인은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말한다. 악인은 일시적으로 잘되는 것 같으나 망하지만, 의인은 일시적으로 고난당하는 것 같으나 다시 일어난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의와 사랑, 평안과 기쁨이 넘친 집이다. 푸른 감람나무는 죽었거나 시든 나무가 아니고 생기가 넘친 나무이며 감람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이다. 감람유는 식용과 약용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다윗은 또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거짓되고 악한 말들에도 불구하고 성도 다윗을 보호하셨고 구원하셨고 악인들을 멸망시키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성도에게 그의 인자하심으로 주신 선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영영히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의지할 것이다.
    우리는 악인의 모습을 버리고 의인답게 살자.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53편: 어리석은 자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본 시편은 시편 14편과 내용이 거의 같다. ‘어리석은 자’는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래서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자신에게 불행하고 해로운 결과를 피하지 못하고 당하는 자이다. 우선, 어리석은 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입술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며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어리석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며 그가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와 인간 역사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자신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부정하는 것이 큰 무지요 어리석음이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도 똑같다.
    또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는 행위가 부패하게 되어 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는 악을 떠나지 못한다(잠 16:6).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는 죄악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때때로 큰 악, 가증한 악을 행한다. 그런 자들 중에는 부모 살해, 강간, 강도, 뻔뻔스런 위증 등의 악을 행하는 자도 있다. 그들 속에서는 참된 선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 안 믿는 자들 중에도 착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착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부터가 착하지 못한 것이며 또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선은 환경 여건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고 불리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선이다. 그것은 결함이 많은 선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따라 모든 악을 버리며 참되고 온전한 선을 배우고 실천하자.
    [2-3절]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다고 계신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도 저 하늘 너머에 빛나는 태양이 있듯이, 세상에 무신론자들과 부도덕한 자들이 가득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다. 그는 세상에 하나님을 깨닫고 찾는 자가 있는지, 사람의 피조물 됨과 죄악됨과 허무함을 깨닫는 자가 있는지 살피신다. 인생은 하나님을 깨닫고 찾아야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신즉 모든 사람이 다 물러가 더러워졌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물러갔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법도로부터, 즉 인생의 정로(正路)로부터 탈선하였다는 뜻이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고 인생의 정로에서 탈선하였다.
    그것이 곧 죄이며 죄는 또한 더러움이다. 살인, 간음, 도적질 같은 죄는 사람의 인격을 더럽히는 요소들이다. 그것은 다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고 타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인간 관계를 병들고 황폐하게 만들고 온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더러워졌고 온 세상이 더러워졌다. 사람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깨끗해야 하지만,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의 뜻은 선한 사람이며 그것이 인간다운 사람이며 인간다운 모습이지만, 죄인은 선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답지 못하고 때때로 사나운 짐승과 같다. 본문은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강조해서 말한다. 세상의 종교나 도덕적 교훈도 선을 이루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새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자. 성경의 교훈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 가운데서 힘써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
    [4-5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본문은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라고 묻는다. 그렇다. 무지하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죄악을 행치 않았을 것이다.
    본문은 죄악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는다고 말한다. 떡 먹듯이 먹는다는 말은 너무 쉽게, 양심의 가책 없이 해치고 죽인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의 죄악은 경건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해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다(마 25:42-45; 행 9:4).
    또 본문은 죄악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의 은총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불경건함이다. 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므로 악을 행한다.
    그러나 죄악을 행하는 그들, 곧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던 곳에서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그것은 성도를 대적하는 그들의 뼈를 하나님께서 흩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피부나 인대를 다친 정도가 아니고 뼈가 부서져 흩어져버리면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두려운 징벌일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고로 성도는 원수들을 이기고 그들로 수치를 당케 할 것이다. 원수들은 한때 교만하고 자랑하고 당당하게 보였으나 이처럼 하나님의 징벌로 패망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을 알고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형제를 사랑하며 선을 행하자.
    [6절]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원문은 시편 14편과 똑같이 “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노라”이다. 이것은 경건한 자들의 소원인 동시에 또한 예언적 간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온에 보내주셨다. 다윗의 예언적 간구는 성취되었다. 동일한 예언이 이사야 2:2 이하에도 나온다.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누가복음 24:47의 말씀대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것이다. 이것은 육신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뜻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모든 인생이 죄와 사망과 불행과 사탄의 포로된 상태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삶을 살 것을 보인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마 1:2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 가운데 속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사실상, 죄와 사망과 불행과 사탄으로부터의 구원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며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고(눅 10:20),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했다(살전 5:16, 18).
    시온에서 나온 주 예수의 복음이 우리의 영육의 구원이 됨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항상 기뻐하며 살자.
    54편: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이심
    [1-3절]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다윗은 지금 고난 중에 있다. 다윗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낯선 자들이 일어나 그를 쳤다. 강포한 그들은 다윗의 생명을 찾았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사울은 까닭 없이 다윗을 오해하고 죽이려 하였고 사울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생각한 자들은 다윗을 잡는 일에 앞장섰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 앞에 모시지 않는 자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었다. 경건한 다윗에게도 고난의 현실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현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단련을 위해 그 현실을 주셨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왕으로 작정하시고 기름부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였다. 그는 도망다니며 피곤하고 힘이 빠졌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힘으로 그를 판단하시고 변호해주시기를 의탁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고난의 현실이 찾아오지만, 우리는 고난 중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자.
    [4-5절]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돕는 자이시라고 고백한다. 돈이나 세상 권력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상당히 도움은 되겠지만, 결정적 도움, 완전한 도움은 되지 못한다. 돈이 질병을 막아내지 못하고 돈이 사고나 천재지변을 막아내지 못한다. 성도에게는 재력이나 세상 권력의 도움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도움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결정적 도움, 완전한 도움이 되신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붙드는 자들과 함께하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자신이 다윗의 생명을 붙드는 자이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그에게 주셨다. 사무엘상 23:14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매일 찾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다. 원수들은 성도의 생명을 해치려 하고 죽이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실 때 그를 해치지 못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들을 멸하시기를 구한다. 성도의 원수는 궁극적으로 사탄이다. 가까이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는 사람들, 악하고 거짓되고 무지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해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원수들을 재앙으로 갚으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라고 말한다. ‘성실히’라는 말은 진리대로, 하나님의 율법대로, 공의롭고 시종일관하게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시종일관하게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 로마서 13:19,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돕는 자이심을 깨닫자.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그러므로 원수가 많은 세상에서도 성도는 두려워 말며 하나님만 의지하자.
    [6-7절]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낙헌제로 제사드리며 그의 이름에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낙헌제로’라는 원어(비네다바 ה)는 ‘자원함으로, 혹은 자원제물로’라는 뜻이다. 구약의 제사는 일차적인 속죄의 의미 외에 예배와 헌금의 의미도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의무적 제사나 형식적 제사, 즉 오늘날 말로 하면 의무적 예배나 형식적 헌금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자원함의 예배와 헌금을 드리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감사도 의무와 형식에서 나오기 어렵다. 참된 감사는 기쁨과 즐거움에서 나올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자원함으로 제사를 드리고 감사를 올리는 이유가 하나님의 이름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윗의 자원적 제사와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을 때 나온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체험함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람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헌금하며 감사할 수 있겠는가.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7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지셨고 그의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그로 보게 하신 것이었다. 다윗은 많은 환난을 겪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주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미워하고 핍박했던 원수들에게 보응하셨고 다윗으로 하여금 그것을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그것이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의 선하심이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씻음의 구원을 체험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환난을 두려워 말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자원함으로 예배드리며 감사하자. 우리는 언제나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편에만 굳게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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