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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94-150 전편 [1편]
  • 2017.01.04 22:49:48
  • 94편: 악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실 것임


    [1-4절]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 . . .
    시편 저자는 악인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들을 ‘교만한 자,’ ‘지껄이며 오만히 말을 하는 자,’ ‘죄악을 행하는 자,’ ‘자긍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는 태도이다.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서는 안 될 자이다. 교만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자기 숭배와 같다. 악인은 교만하고 교만한 말을 한다. 그러나 성도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고 겸손한 말을 하며 또 자신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위해 힘쓴다.
    시편 저자는 선악을 판단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을 ‘보수(報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두 번 표현하며 또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는 도덕적인 존재이시다. 그는 완전한 공의로 의와 불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시고 판단하시고 의인에게 영생의 상을, 악인에게는 영벌, 즉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내리신다.
    또 시편 저자는 그 하나님께서 자신이 처한 혼란한 현실을 판단하시고 공의로 보응해주실 것을 호소한다. 그는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나타내시기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내버려두신 듯한 기간이 길었으나, 시편 저자는 이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라고 아뢴다.
    우리는 세상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교만치 말고 오직 온유와 겸손으로 옷입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5-11절]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 . .
    시편 저자는 악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수며 하나님의 기업을 괴롭히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자기 기업으로 삼으신 백성을 부수며 괴롭히는 일, 특히 그 가운데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자들,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를 죽이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게다가, 악한 자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고 한다. 그들은, 살아 계셔서 모든 일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말한다. 그는, 보거나 듣지 못하는 신이 어떻게 인간의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만드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치에 맞는 생각이 아닌가?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악행을 아시고 징벌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라고 말한다. ‘징벌한다’는 원어(야사르 ר)는 ‘교훈한다’는 뜻으로도 번역된다(대상 15:22). 사람을 교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의 악함과 허망함을 다 아시고 악인의 악행을 징벌하실 것이라는 뜻 같다. 무신론은 허무하고 악한 사상이다.
    우리는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또 사람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공의로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오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12-17절]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 것은, 이런 자는 환난의 날에 벗어날 것이며 악인을 위해 구덩이 곧 지옥 구덩이가 준비될 때까지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책은 사람의 회개를 가져오고 의와 선을 행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마침내 지옥 구덩이에 던지울 것이다.
    원문에는 14-15절의 초두에 각각 ‘왜냐하면’(키 י)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성도들이 환난 날에 벗어나고 평안을 누리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의 기업 곧 이스라엘을 떠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까닭은,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의로 돌아간다’는 말은 의롭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은 세상에 불의가 득세하고 불법이 난무한 것 같으나, 장차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마음이 정직한 자 곧 참된 성도는 항상 의를 좇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세상의 행악자들을 치실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 나를 위해 일어나서 행악자를 치며 누가 나를 위해 일어서서 죄악 행하는 자를 칠꼬?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악인을 징벌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거의 죽었을 것이다. 17절의 ‘벌써’라는 원어(키메앗 ט)는 ‘거의’라는 뜻이다(BDB, KJV). 성경에서 모세, 다윗, 다니엘, 모르드개 등의 예들이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책을 감사히 받고 회개하자. 성도가 의만 따르면 결코 실패치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물리쳐 주실 것이다.
    [18-23절]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 . . .
    시편 저자는 자신이 처한 악한 현실에 대해 말한다. 그는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악한 재판장”에 대해 말한다. ‘악한 재판장’이라는 원어(킷세 하우옷 תוֹוּ א)는 ‘멸망의 보좌’라는 뜻이다. 보좌는 재판석을 가리킨다. 그는 율례를 운운하며 악한 일을 도모하고 의인을 멸하려 하는 자이다. 또 시편 저자는 악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악을 계획하고 행한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 시편 저자의 마음은 연약하였다. 그는,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또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라고 고백한다. 그는 연약하여 실족할 뻔하였고 그에게는 근심과 염려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또한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투성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으로 그를 붙드셨고 그의 복잡한 영혼을 위로하셨고 기쁘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산성’과 ‘나의 피할 반석’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어떤 환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피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또한 시편 저자는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시며 저희의 악을 인하여 저희를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대적하는 악인들을 징벌하고 처단하실 것이다.
    세상에는 악한 현실이 있다. 대적자들이 있고 악한 재판자도 있다. 또 우리는 연약한 마음을 가진 인생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하나님과만 교통하자. 그러면 항상 승리할 것이다.


    95편: 하나님께 노래하며 순종하자


    [1-5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 . . .
    시편 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고 말한다. 찬송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할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노래이다. 성경에서 찬송과 감사는 동의어처럼 쓰인다.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글로 표현한 것이 찬송가이다. 찬송의 글, 즉 찬송시를 써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피조 세계에서 인간만의 특권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로, “이는 여호와께서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심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라고 말한다. ‘그 위에’라는 원어(베야도 וֹד)는 ‘그의 손 안에’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깨닫고 알기 때문에 찬송한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시며 그의 지혜와 능력, 그의 도덕성, 특히 그의 사랑이 지극히 크시다. 그는 하늘과 땅과 산과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그것들은 다 그의 소유물이다. 그는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신보다 크신 왕이시다. 세상의 신들은 다 헛된 것이지만, 여호와는 살아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위대하신 왕이시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시다. 그는 우리를 영육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을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깨닫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시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자.
    [6-11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 . . .
    시편 저자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한다. 모든 인생은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는 그가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임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된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시요 섭리자 곧 목자이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일들을 회상시키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한다.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므리바’라는 원어는 ‘다툼’이라는 뜻이며, ‘맛사’라는 원어는 ‘시험’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10가지 재앙, 애굽에서 나온 후 첫 번째 장애물인 홍해를 건넘, 날마다 만나를 내리심, 불기둥과 구름 기둥 등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았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시험하였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향해 원망하며 대항하였다.
    그 기간이 40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해 근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맹세하며 확실히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은 일차적으로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또한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예표한다. 천국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음성을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
    우리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노엽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그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96편: 하나님께 노래하며 합당하게 경배하자
    [1-5절]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 . . .
    시편 저자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세상에서 불렀던 노래들은 다 옛 노래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은 후에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이다. 그것은 날마다 새로운 감격을 가진 노래이다. 시편 저자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찬송의 대상이시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그의 구원을 찬송해야 하며 또 날마다 그러해야 한다. 또 시편 저자는 “그 영광을 열방 중에서,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서 선포할지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그 행하신 일들은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내용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세계 역사의 목표이다.
    원문에는 4, 5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이 있다. 그것은 찬송의 이유를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극진히 찬양하고 경외해야 할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다. 둘째로,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는 하늘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헛것’이라는 원어(엘릴림 םיי)는 ‘우상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므로 온 세상은 그를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새 노래로, 날마다 하나님을 찬송하자. 우리는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위대하신 참 하나님을 극진히 찬송하며 만방에 증거하자.
    [6-9절]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 . . .
    시편 저자는 “존귀와 위엄이 하나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고 가장 존귀하신 분이시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우신 분이시다. 또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크신 분이시며 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 곧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고 존귀하시며 가장 두려우시고 가장 능력이 크시며 가장 아름다우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권능을 그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최상의 경배, 최선의 예배를 올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에게 예물을 드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예물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의 창조자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라는 원어(베하드랏 코데쉬 שׁ ת)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KJV), ‘거룩한 치장으로,’ ‘거룩한 예복을 입고’(BDB, NASB; 시 29:2; 대하 20:21)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룩하고 아름답게, 고상하고 위엄 있게,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경박하지 않고 소란하지 않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을 깨닫자. 또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올리자.
    [10-13절]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해 말한다. 그는,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라고 말한다. 세상은 치안부재의 무법천지가 아니고 통치자 하나님이 계시다. 그의 공의의 통치로 인해 세계는 안정을 얻는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시행하실 것이다. 그는 인간의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 악인들은 변명하고 불평할지 모르나, 대다수의 회중은 양심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공의와 진실로 세계와 거기 사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 그 때 천지만물은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하늘에 나는 모든 새들과, 땅의 모든 짐승들과, 바다와 거기 충만한 모든 물고기들과, 들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식물들, 삼림의 나무들이 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것은 만물의 회복의 시작이다. 현재 피조세계는 썩어짐에 종노릇하면서 고통하며 탄식하고 있다(롬 8:20-22). 그러나 장차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계 21:5). 장차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 의가 드러나고 죄의 형벌이 다 이루어지고 죄가 없어지며 만유가 회복될 것이다(행 3:21).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마지막 심판을 깨닫고 천지만물과 더불어 기뻐하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다 회개하며 범죄치 말자.


    97편: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함


    [1-6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 .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섭리자, 통치자이시며 왕과 목자이시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5:7). 세상의 모든 나라와 백성들은 통치자 하나님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통치의 방식에 대해 말한다. 그는 “구름과 흑암이 하나님께 둘렸다”고 말한다. ‘구름과 흑암’은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 혹은 심오함을 나타내는 것 같다. 또 시편 저자는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고 말한다. 그는 의와 공평으로 통치하신다. 시편 저자는 또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와 통치의 일에 번개와 천둥과 벼락을 사용하신다. 그는 그것들을 사용하여 대적자들과 악인들을 징벌하신다.
    그 결과, 시편 저자는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라고 말한다. 지금 세상은 죄와 불법으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가 나타날 때, 즉 악인들이 징벌을 받고 의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통치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왕이시며 목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자. 그가 장차 의로, 불의 심판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의 안에서 의를 행하며 살아가자.
    [7-9절]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여호와여 주의 판단을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 . . .
    시편 저자는,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말한다. ‘허무한 것’이라는 원어(엘릴림 םיי)는 ‘우상’이라는 뜻이다. 우상은 사람이 조각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며 참 신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고 능력도 없다. 그것은 허무한 것이다. 시편 115:4-7,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며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다. 우상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한, “여호와여 주의 판단을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1절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인해 온 땅과 모든 나라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했고, 12절에서도 의인들이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라고 하였다.
    시편 저자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무엇인가? 원문에는 9절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까닭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시고 모든 신 위에 초월하신 자이시며 모든 신보다 훨씬 존귀하신 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홀로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며 심판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세상의 우상들과 다르다. 그는 참 신(神)이시다. 그는 모든 우상을 파하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변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우상이 헛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심을 알자. 또 그의 공의로운 통치를 인해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10-12절]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10절)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본문은 또 하나님의 백성을 ‘성도’(10절)라고 부른다. ‘성도’라는 원어(카시딤 םיי)는 ‘경건한 자들, 친절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경건하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친절하다. 본문은 또 하나님의 백성을 ‘의인’(11, 12절)이라고 부른다. ‘의’는 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본문은 또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이 정직한 자’(11절)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을 올바르게 가진 자들이다. 특히, 본문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악을 미워하고 멀리하는 자들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증거한다. 옳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것이지만, 악을 미워하고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의인을 위해 빛이,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해 기쁨이 뿌려졌다고 말하면서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라고 말한다. 빛은 기쁨과 동의어로 보인다. ‘거룩한 기념’은 ‘거룩한 심판’을 가리킨 것 같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신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성경은 우리에게 주 안에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빌 4:4; 살전 5:16).
    우리는 성도답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건하고 친절하며 의를 행하며 정직하며 악을 미워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항상 기뻐하자.


    98편: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을 찬양함


    [1-3절]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 .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새 노래’는 우리가 구원받은 후, 즉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섬기기로 결심한 후에 부르는 노래이다. 그것은 형식적 노래가 아니고 새로운 감격을 가진 노래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해야 할 이유는 그의 구원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기이한 일 또 하나님의 오른손 곧 능력의 손으로 행하신 일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과 죽음과 부활로 오늘 우리의 구원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거룩한 팔로 행하신 일이며 거룩하고 의롭다.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신약시대에 온 세계에 밝히 증거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롬 3:21-22).
    하나님의 구원은 또한 그의 인자와 진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인한 것이다(딤후 1:9).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그대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온 세상이다. 본문은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세계복음화가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 증거한다(눅 24:47). 끝으로, 본문은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그의 은혜를 찬송케 하기 위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을 깨닫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감사하며 항상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4-6절]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찬양할지어다.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본문은 “온 땅이여”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말한다. 3절 끝에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했는데, 그러므로 온 땅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라고 한 것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각 민족, 각 나라에서 구원얻는 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며 그들은 다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본문은 “즐거이”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말한다. 본문에는 ‘즐거이’라는 말이 3번 나오고(4, 4, 6절) 8절에도 한 번 더 나온다. 찬송은 즐거운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슬픈 자들은 찬송을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하였다(약 5:13).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과 표정으로 찬송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께 찬양할 때 목소리와 악기를 사용하여 하라고 말한다. 4절,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5절, “음성으로.” 6절, “소리할지어다.” 사람의 목소리는 악기 중에도 좋은 악기이다. 그것을 잘 다듬고 연습하면 좋은 찬송을 부를 수 있다. 본문은 몇 가기 악기를 언급한다. 수금을 두 번 언급하고 나팔과 호각을 언급한다. ‘호각’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말한다. 시편 150편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 퉁소, 큰 소리 나는 제금, 높은 소리 나는 제금 등 하나님을 찬송할 때 사용한 여덟 가지 악기가 언급된다(3-6절). 우리는 악기를 잘 연습하여 연주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찬양을 올릴 수 있다.
    우리는 시와 찬미로 하나님께 찬송하자(엡 5:19). 우리는 즐거이 또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께 찬송하자. 찬송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며 그의 이름을 증거하는 우리의 입술의 열매이다(히 13:15).
    [7-9절]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본문은 우주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한다. 앞에 4절에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라고 말했었다. 7절, 8절에서 시편 저자는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라고 말한다. 바다에 충만한 것은 고기들과 해초들을 가리킬 것이다. 세계에 거하는 자는 사람들, 짐승들, 식물들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은 또 큰물 곧 홍수가 난 강물들이나 폭포들이 박수하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표현한다. 또 산들과 언덕들도 함께 즐거이 하나님께 노래를 부르라고 말한다. 자연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만물은 창조자를 찬송해야 한다.
    본문은 즐거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앞에서도 본문은 즐거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4, 4, 6절). 찬송은 즐거운 마음으로 불러야 찬송답다. 시편 96:11-12에서도,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라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그가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9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저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공평으로 백성들(암밈 םי)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온 땅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세상에는 지금 불의와 불법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탄식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시행될 때 온 세상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우주만물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찬송하자. 또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낙심치 말고 오직 의를 힘써 행하자.
    99편: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함
    [1-5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 . . .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신다. 그는 그룹 사이에 앉아계시며 천사들은 그를 옹위하고 섬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크시며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시온 즉 그의 백성의 삶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들을 위해 많은 은혜로운 일들을 행하셨다. 하나님의 그 능력의 일들은 모든 나라에 증거되었다.
    본문은 특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은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는 공의를 사랑하시고 공의를 행하신다. 그는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공의로 도덕질서를 세우시고 선을 장려하시고 악을 징벌하신다. 또 본문은 두 번이나 그가 거룩하시다고 말한다(3, 5절). 그는 모든 피조세계를 초월해 계시고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신다.
    본문은 땅의 만민이 하나님 앞에서 떨며 그의 이름을 찬송하며 그에게 경배하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라고 본문은 말한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 공의로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의 이름을 찬송하고 그에게 참된 경배를 올려야 한다.
    우리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특히 그의 거룩과 의를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찬송하며 참된 경배를 올리자.
    [6-7절] 그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중에는 사무엘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 . .
    본문은, “그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중에는 사무엘이라”고 말한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이다. 그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또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한 자이었고 아론은 하나님의 명하신 제사장 가족의 가장(家長)으로서 그의 아들들만 합법적 제사장이 되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와 교통하며 섬기는 자를 가리킨다. 사무엘은 경건한 선지자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말한다.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가 부르짖어 간구할 때 응답하신다. 그는 모세와 아론, 사무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성도의 특권은 살아계신 하나님, 능력의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자마다 그의 응답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에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니 저희가 그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구름 기둥에서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33: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민수기 12: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행할 바를 지시하셨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다(출 40:16). 사무엘은 거역하는 것을 사술(邪術)의 죄와 같다고 말하였다(삼상 15:23).
    우리에게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성경책이 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자.
    [8-9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응답하셨다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 행위대로 갚으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또한 그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12:6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사람들에게 징계하시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그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의 상태로부터 회복된다. 그들은 참된 평안과 기쁨,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제, 시편 저자는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물론이요 땅의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온 세상의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참 하나님을 높이고 그를 경배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그 성산에서 그를 경배해야 한다. 오늘날, 그 성산(聖山)은 주 예수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신약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과 구별되며 도덕적 완전에 있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행위대로 갚기는 하시나 용서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경배하자.


    100편: 창조자와 목자이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함


    [1-3절]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 . .
    시편 저자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열방이 다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 말씀은 세계복음화의 전망을 품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즐거이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은 기쁨으로 불러야 한다. 마음으로 기뻐하며 불러야 찬송답다. 구원은 기쁨을 주는 소식이며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을 즐거이 찬송한다. 또 시편 저자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예배와 봉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기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싫어하는 표일 것이다. 하나님과 천국이 우리의 삶의 최고의 목표일진대,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가까이 나가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너희는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신 줄 알지어다”(원문)라고 말한다. 여호와만 참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다 헛것이다. 시편 저자는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라고 말한다. 원문의 뜻은, “우리를 지으신 이는 그요 우리 자신이 아니며”이다(MT, LXX, Syr, KJV, NASB).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권과 삶의 목적도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또 시편 저자는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목장의 양이로다”(원문)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이며, 또 우리의 복된 특권과 순종의 의무도 보인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자이시며 우리가 그의 백성과 양임을 깨닫고 즐거이 그를 찬송하며 섬기고 순종하자.
    [4-5절]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시편 저자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감사하다’(야다 ה), ‘찬송하다’(힐렐 ל), ‘송축하다’(바라크 )는 거의 동의어(同義語)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그를 높이는 말이다.
    시편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문에 들어갈 때, 그 궁정 즉 성전 뜰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곳, 즉 그에게 예배드리는 곳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불평과 원망의 태도가 아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5:19-20,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이유로서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칠 것임이로다”라고 말한다. 우리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악하거나 경우에 맞지 않게 행동하지 않으시고 기쁨과 평안과 유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하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그 죄를 용서하신다. 또 그는 진실하고 믿을 만하시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다. 천국과 부활과 영생에 대한 그의 진리와 약속은 확실하고 불변하시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도 그러하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그의 진실하심과 성실하심을 깨닫고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를 섬기며 찬송하며 감사하자.


    101편: 완전한 길에 주목함


    [1-2절]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 . .
    시편 저자는 “내가 인자와 공의를 노래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송의 노래를 부르리이다”(원문)라고 말한다. ‘인자’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 ‘공의’는 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이다. 인자와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의 도덕적 성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해 인자하시고 항상 의로우시고 또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공의는 의인들에게는 기쁨과 위로가 되지만, 악인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고 또 그 성품을 귀중히 여기고 사모하며 그 덕성을 소유하기를 원하자.
    시편 저자는 또한,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완전한’이라는 원어(탐 ם)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앞 절에 말한 인자와 공의를 겸비한 상태이다. 시편 저자는 개인적으로 완전한 길에 주의하겠다고 고백한다. 또 그는 가정적으로도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도덕적인 삶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의 임하심을 사모하는 것은 그와 교제하며 힘과 위로, 평안과 환경적 회복을 얻고자 함일 것이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오심을 구할 것이지만, 죄인들은 그를 만나기를 꺼려하고 피할 것이다. 의인에게는 그의 복이, 악인에게는 그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자. 또 우리는 인자와 공의를 겸비한 도덕적 완전의 길을 사모하며 그 길을 걷기를 힘쓰자.
    [3-5절]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비루하다’는 원어(벨리야알 ל)는 ‘무가치하다, 악하다’는 뜻이며, ‘배도자’는 진리를 저버리고 바른 신앙을 버린 자를 가리킨다. 성도는 도덕적으로 악하고 무가치한 것을 용납지 말아야 하며, 배도자들의 행위를 책망하고 미워하며 멀리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사특하다’는 원어(익케쉬 שׁ)는 ‘비뚤어지다’는 뜻이다. 사특한 마음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마음이 아니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또 오해하기 잘 하는 마음이다. 또 이런 마음에서 악한 일이 나온다. 성도는 사특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고 또 악한 일을 멀리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그윽히 헌다’는 말은 ‘은밀히 비난한다’는 뜻이다.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것은 앞에서는 상대를 위하는 것처럼 처신하지만, 뒤에서는 그를 비난하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또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이웃을 멸시하고 욕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남의 명예와 신임성을 훼손시키고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은 악한 일이다. 성도는 남의 유익을 위해 힘써야 하고 남을 그윽히 허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런 자를 다 물리쳐야 한다.
    성도는 무가치하고 악한 것과 배도적 행위를 미워하고 사특한 것과 악한 일을 멀리하고 교만하고 남을 은밀히 비난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6-8절]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시편 저자는,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라고 말한다. ‘충성된 자’는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쾌락을 따라가지 않는 자이다. 성도는 그런 자와 함께 거해야 한다. 또 시편 저자는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고 말한다. ‘완전한 길’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길이다.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는 신앙사상이 바르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는 자이다. 그런 자와 함께 동역하는 것은 행복이다. 같은 생각과 뜻, 같은 목표와 가치관을 가진 자들은 함께 일할 만한 자들이다.
    시편 저자는 또,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정죄하는 악이다(잠 6:16-19).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계 21:8). 성도는 거짓된 마음과 말과 행동을 다 버려야 한다.
    또 시편 저자는 말하기를,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남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것이 악이다. 악이 왜 나쁜가?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의지와 반대되기 때문이다. 마귀는 악하여 세상과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교회를 속화시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만든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하나님의 교회에 합당치 않다.
    우리는 충성되고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와 함께 거하며 일하자. 거짓말하거나 거짓을 행하는 자 또 악을 행하는 자를 교회에서 물리치자.


    102편: 곤고한 자를 긍휼히 여기소서


    [1-7절]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말한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살아계신 인격적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특히 괴로운 날에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저자는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라고 말한다. ‘냉과리’라는 원어(모케드 דוֹמ)는 ‘불타는 덩어리’라는 뜻이다. 우리말에 ‘냉과리’는 덜 타서 연기와 냄새가 나는 숯을 가리킨다. 시편 저자는 그의 날이 연기가 희미해지다가 사라짐같고 그의 뼈들이 불타는 덩어리같이 고통스럽지만,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또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고난 중에 낙심하였으며 식욕도 잃었고 또 탄식 중에 그의 살이 뼈에 붙을 정도로 야위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자신을 “광야의 당아새[사다새],” “황폐한 곳의 부엉이,” “밤을 새우는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에 비유한다. 그것은 아마 피신 중인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외롭고 쓸쓸할 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에게 부르짖어 기도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우리는 큰 고난 중에, 몸이 쇠하고 고통이 심하고 심신이 연약할 때, 또 외롭고 쓸쓸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자.
    [8-11절]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시편 저자는,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원수들은 잠시 동안이 아니고 한두 번이 아니고 온종일 또 날마다 성도를 비방하고 욕하였다. 또 그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사리에 맞게 제시하는 인격자들이 아니고, 미친듯이 날뛰며 맹세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 논리와 사리를 중시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강변하고 상대의 말을 들어보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맹세하며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의 극치, 고집의 극치이다.
    시편 저자는 또,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9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이 있어 원수들의 비방의 이유를 보인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분노 때문임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땅에 끓어 앉아 눈물로 통회자복하며 재를 먹고 눈물을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더 원수들의 비방의 이유가 되었다.
    시편 저자는,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본문 앞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이 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죄에 대해 무섭게 징책하셨다. 그는 그를 들어 던지셨다. 성도의 날은 거의 끝나는 것 같았고, 그는 심히 쇠하여졌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우리는 원수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치 말자. 우리는 고난 중에 진심으로 또 철저히 회개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기도하자.
    [12-17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 . . .
    시편 저자는 인간이 쇠약하여 죽음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대조한다. 원문은 12절이 ‘그러나’(웨 )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또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시편 저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시온 전체가 고난 중에 있으나 하나님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시키실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원문 14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실 때가 된 까닭은 하나님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했고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며 또 이방나라들이 여호와의 이름,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연휼이 여기다’는 원어(카난 ן)는 ‘좋아하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을 무시하고 좋아하지 않았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그 변화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징조로 여겨진다는 뜻일 것이다.
    또 16절은 그들의 이런 변화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셨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포로귀환과 예루살렘성전과 성의 재건 등에서 나타났고 보다 깊게는 신약교회의 건립에서 나타났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셨고 그들의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다”고 고백한다. 세상 사람들은 없는 자들을 무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로우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시다. 우리는 곤고한 날에도 낙심치 말고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18-22절]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 . . .
    시편 저자는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 일’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며 열방들이 그를 경외하게 되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시편 저자는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해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장래 세대’는 신약시대를 포함하는 것 같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회복의 예언은 신약교회의 설립을 예표한다. 시편 저자의 증거는 그의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를 내다보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창조함을 받을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새 피조물이 될 신약성도를 가리킬 것이다.
    원문 19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내려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땅의 모든 일들을 자세히 보시고 그의 기쁘신 뜻을 행하신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을 내려보시고 감찰하시는 목적이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며, 그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다(엡 1:6, 12, 14).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의 은혜를 증거할 것이다.
    그 때에, 즉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 곧 신약교회 시대에 온 세상의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상당히 이루어졌음을 본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구원 섭리의 목표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권적으로, 또 은혜와 긍휼로 섭리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며 의지하며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며 충성하자.
    [23-28절]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 . .
    시편 저자는 다시 자신에 관해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셨고 그의 날을 단촉케 하셨다고 말한다. 또 그는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말한다. 인간의 생명과 건강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우리가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 영양 있는 음식물을 섭취하고 영양제를 먹고 규칙적 운동을 하고 의학적인 치료도 받지만, 우리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다시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해 말한다. 그는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말한 것은 우리의 생명이 그의 영원하신 생명에 근거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천지는 영원하지 않다. 또 천지는 지금 옷같이 낡아지고 있고 어느 날 바꾸어야 할 상태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언제나 변함이 없이 동일하시다.
    시편 저자는 또,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택하신 자들의 영생이다(요 6:40; 딛 1:1-3).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마다 영생을 얻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건강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자. 또 낡아지는 세상에서 영생의 하나님과 영생의 약속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자.


    103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함


    [1-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 . .
    다윗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한다. ‘은택’이라는 원어(게물 לוּמ)는 ‘처분, 은택’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선하게 대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를 찬송하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진심으로 그를 찬송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택들을 열거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악, 즉 영육의 크고 작은 모든 죄악을 사하셨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질병, 즉 육신의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질병까지도 고쳐주셨다고 뜻일 것이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덤에서 건져내셨고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하셨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로 자신에게 관을 씌우셨다고 말한다. 우리의 죄사함과 질병 치료와 생명 구원은 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서 나왔다. 다윗은 또 그가 좋은 것으로 자기 소원을 만족케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의 좋은 것을 주시는 자이시다. 다윗은 또 그가 자신에게 독수리 같은 젊은 새 힘을 주신다고 말한다. 독수리는 지치지 않는 힘의 상징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생활의 영원한 활력을 얻었다.
    하나님의 이런 은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과 영생과 모든 좋은 것과 힘을 인해 그를 찬송하자.
    [6-10절]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 . . .
    다윗은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재판장이셔서 세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의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변호하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신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그의 길들’(데라카우 וי)을 모세에게, 그의 행사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다고 말한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듣고 보고 체험하였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가 풍성함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의 길을 구하며 행하는 자에게는 은혜가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다고 말한다. 자비는, 죄의 결과인 불행 아래 있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거저 주는 호의를 말한다. 지옥 갈 죄인이 죄사함과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며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는 것이 성도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고 말한다. 노(怒)는 하나님의 의(義)의 한 속성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실수가 많고 흠과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심이 풍성하시다. 그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항상 경책하지 않으시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않으셨다.
    우리는 압박이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의를 실행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고 본받자.
    [11-14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 . . .
    다윗은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그는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 때문에 죄사함을 받고 그의 진노와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또 다윗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말한다. 인간의 용서는 심히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한 용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않으시며(사 43:25)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미 7:19).
    다윗은 또 말하기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한다. 아비가 자식의 잘못을 가급적 용서하려는 것은 인간 본성인 것 같다. 그것은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긍휼히 여기는 다윗의 모습에서 나타나 있다(삼하 18장). 또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겨 영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눅 15:11-32). 하나님께서는 특히 그를 경외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며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
    다윗은 또 말하기를,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한다. 인간은 몸도 마음도 약한 존재이다. 늘 먹어야 힘을 얻고 병에 걸리기도 잘 한다. 또 외로움과 슬픔을 잘 탄다. 게다가, 죄악된 성향이 있고 결심과 의지가 약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그를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결심하며 애쓸 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과 완전한 용서와 불쌍히 여기심을 깨닫고 오직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고 죄를 회개하고 그에게 순종하자.
    [15-18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 . . .
    다윗은 인생이 짧고 덧없다고 말한다. 그는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라고 말한다. 풀은 뿌리에 따라 1년 살이 풀, 2년 살이 풀, 다년 살이 풀이 있지만, 땅 위의 그 줄기 부분은 보통 1년 살고 말라버린다. 또 그 꽃도 필 때는 아름답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찬바람이 불면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고 만다. 인생이 그와 같아서, 일평생 수고하여 영광을 성취하여도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여 곧 쇠하여지고 마침내 죽음의 시간을 맞는다.
    다윗은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의가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영원하시며 거기에 인간의 구원의 소망이 있다. 또 그의 영원하신 의(義)는 인간의 구원이 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그 의 안에 평안과 영생이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의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들에게 영원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고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말하며 그런 자는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고 행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자기 맘대로 살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언약과 명령을 지킬 것이다. 보수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입장이며 그것은 바른 길이다.
    우리는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소망하자. 우리는 그를 경외하고 그의 인자와 의를 의지하며 그의 언약과 명령을 지키자.
    [19-22절]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 . .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왕권, 통치권이 ‘섭리’의 개념이다. 하나님은 섭리자, 곧 통치자, 왕이시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고 그의 통치 영역은 온 우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 되심, 주권적 통치자 되심을 깨닫고 알자.
    다윗은 또 천사들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에 천사 창조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우리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아마 천지창조의 7일 중 첫째날에 지음을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창조하셨다(골 1:16). 다윗은 또 천사들이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온 우주를 빠르게 이동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또 전쟁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거한다. 다윗은 또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을 행하며 그의 말씀을 이룬다고 증거하며 또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 세계 모든 곳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수행자인 것이다.
    다윗은 이제 말하기를,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한다.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천사들이 다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이다(사 43:21; 엡 1:6, 14).
    우리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복하자.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섬기며 충성하는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자.


    104편: 창조와 섭리의 일들을 찬송함


    [1-4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 .
    시편 저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심히 크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다고 증거한다. 창조자 하나님은 광대한 우주보다 크시며 그의 지혜와 능력도 그러하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시며 가장 큰 권위를 입으셨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계셔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의 빛은 도덕적 완전성을 포함한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한 후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 예수께서는 높은 산에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셨다(마 17:2). 장차 새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 때문에 해나 달이 쓸데없을 것이다(계 21:23). 하나님께서는 또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 하늘은 크고 넓으며 아름답고 신비하다.
    시편 저자는 또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신다”고 말한다. 대기 중 수증기량은 약 14조 4,560억 톤이라고 하며 천국은 그 공중 위에 위치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구름이나 바람을 자유로이 사용하며 섭리하신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신다”고 말한다. 본절은, 고대 헬라어 칠십인역(LXX)이나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히 1:7).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바람같이 자유로이 또 불같이 능력 있게 사용하며 일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존재와 존귀, 권위와 영광, 자유로이 또 능력으로 활동하심을 알고 그를 찬송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따르자.
    [5-9절]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기초가 약한 땅 위에 높고 튼튼한 집을 짓기는 어렵다. 높고 튼튼한 집을 지으려면 우선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땅은 둥근 공 같고 팽이처럼 하루에 한 바퀴씩 시속 약 1,670킬로미터로 돌고, 또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1년에 한 바퀴씩 시속 약 10만 7천 킬로미터로 돈다고 한다. 그러나 땅은 어지럽지 않으며 그 기초는 튼튼하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탁월하시다.
    시편 저자는 또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던 첫날,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위에 운행하셨는데, 본문은 그것을 묘사한 것 같다. 8절 하반절은, “그것들[물들]이 산들로 오르고 골짜기들로 내려가서 주께서 그것들을 위해 정하신 곳에 이르나이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NIV). 이것도 창조 때의 일을 묘사한 듯하다. 창세기 1:9-1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시편 저자는 또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닷물의 경계를 정하여 주셨고 바닷물이 넘쳐 육지로 덮쳐 오지 못하게 하셨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튼튼히 만드셨다. 또 그는 산들과 바다들, 호수들, 강들을 만드셨다. 또 그는 물들로 지정된 경계를 넘어오지 않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탁월하심을 찬송하자.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바르게만 살자. 그 안에 참 평안이 있다.
    [10-18절]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 . . .
    여호와께서는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신다. 땅 속에는 물줄기가 있고 그것이 터져 샘이 되고 샘들에서 흘러나오는 물들이 모여 시냇물이 되어 흐른다. 들짐승들은 그 물을 마시며 들 나귀들도 목마름을 해소하며 공중의 새들은 그 물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노래하며 지절거린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듯이 비를 내리신다. 그가 행하신 일들의 결과는 땅에 풍성하다. 식물들은 새싹을 내고 풀들은 잘 자라고 꽃들을 피고 열매들을 맺힌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을 위한 풀들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들을 자라게 하신다. 본래, 땅위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는 사람의 식물로 창조되었고(창 1:29) 풀은 새나 짐승를 위해 창조되었다(창 1:30).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다.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감람유 같은 기름을 바르며 빵이나 밥을 먹고 몸과 마음에 힘을 얻는다.
    여호와의 나무들, 즉 그가 만드시고 심으시고 기르시는 나무들, 예를 들어 레바논의 백향목 같은 나무들은 비를 잘 받아 크게 잘 자랐다. 새들은 그 나무들 속에 깃을 들이며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았다. 높은 산들은 산양들의 숙소와 놀이터가 되고 바위는 너구리들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산과 골짜기에 샘과 시냇물을 주셨고 공중의 새와 들짐승이 마시게 하셨다. 그는 비를 내려 풀과 채소와 곡식이 나게 하셨고 포도주와 기름과 양식을 주셨다. 그는 새와 짐승에게 거처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배려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지키시고 공급하실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순종하자.
    [19-23절]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 . . .
    여호와께서는 달을 만드셨고 달로 절기를 정하셨다. 옛날 사람들은 달의 변화를 따라 1달이라는 시간을 계산하였고 1년의 계절들을 예측하였으며 농사짓는 데 활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해가 일정하게 뜨고 지게 하셨다. 사람들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1일이라고 불렀다. 또 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을 만들고 또 24절기를 설정하였다. 그것은 한 해씩 비슷하게 반복되며 거기서 1년이라는 단위가 나왔다. 창세기 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四時)와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이 이루라.”
    또 여호와께서는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셨다. 해가 지면 밤이 시작된다. 밤은 사람들에게 휴식의 시간이지만, 많은 짐승들에게는 활동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밤이 되면 삼림의 모든 짐승은 기어 나온다. 젊은 사자들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먹이를 사냥한다. 시편 저자는 사자가 그 먹이를 하나님께 구한다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자이시다.
    그러나 해가 돋아 낮이 되면 짐승들은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는다. 그러나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한다. 낮은 짐승에게 휴식의 시간이지만, 사람들에게는 활동하는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일하라고 낮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 동안에 놀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을 만드셨고 그것들로 사시(四時, 네 계절)와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을 이루고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우리는 밤에는 편안히 휴식하지만, 낮 동안에는 힘써 일해야 한다.
    [24-27절]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천지만물을 만드셨고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온 땅에 가득하다. 앞절에 말한 대로, 하늘과 땅, 빛과 구름과 바람, 물과 샘과 강, 풀과 채소와 나무, 각종 짐승들, 해와 달 등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다.
    시편 저자는 또 바다와 거기에 사는 생물들에 대해 말한다. 그는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라고 말한다. 지구 표면의 약 70퍼센트가 바다라고 한다. 지구는 거대한 바다에 큰 섬 같은 대륙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구에는 다섯 개의 거대한 바다가 있다. 태평양을 비롯하여 대서양, 인도양, 북빙양, 남빙양 등이 그것이다. 바다는 보통 그 깊이가 4-5킬로미터나 되며 가장 깊은 곳은 약 11킬로미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 높이는 땅 위에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의 길이 8,848미터보다 약 2킬로미터 이상이나 더 깊다. 배들은 그 넓고 깊은 바다 위로 다니고 바다 속에는 고래, 하마, 악어, 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도 있으나 멸치나 열대어같이 작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물고기들도 무수하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그 모든 바다 생물들을 다 지으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다 섭리하신다. 시편 저자는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보존하시고 모든 생물들을 기르시고 먹이신다.
    크고 넓은 바다들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뿐 아니라 작은 물고기도 만드셨고 그것들을 다 먹이시는 섭리자이시다.
    [28-30절]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 . .
    시편 저자는,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물들의 양식을 주관하신다. 그가 모든 생물들에게 먹을 것을 주실 때 그것들은 그것을 취하여 먹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그것들로 배부르게 하시고 만족케 하신다.
    시편 저자는 또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라고 말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식물 공급을 중단하신다는 뜻이다. ‘떤다’는 원어는 ‘놀라다, 당황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양식 공급을 중단하시면 모든 생물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떨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들의 양식뿐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도 주관하신다. 그것들의 호흡 곧 생명을 취할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취하시면 그것들은 곧 죽는다. ‘본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물이 흙으로 지은 바 되었음을 증거한다. 창세기 2:19는 땅의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이 흙으로 지은 바 되었음을 증거한다. 물고기들도 그러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천지 창조 때에도 활동하셨다.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과 세상의 회복 때에도 성령으로 활동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과 생명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양식과 영원한 생명의 보증자요 공급자이시며, 우리의 평안과 복이시다.
    [31-35절]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증거하기를,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영광과, 그의 공의와 긍휼의 영광이 영원하시다. 그는 자신의 행한 일들로 인해 즐거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엄위하셔서 그가 땅을 보시면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시면 산들이 연기를 발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죄 때문에 슬픔과 탄식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실 것이며 죄인들이 없어질 때 땅에 기쁨과 평강의 회복도 있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을 찬송하며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라고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찬송과 영광을 돌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마다 하나님을 즐거이, 영원히 찬송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묵상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또 그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시다. 하나님의 지식이, 하나님을 의지함이, 하나님을 체험함이, 그의 구원과 보호와 기도 응답이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깨닫자. 또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즐거워하고, 평생에,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며 즐거워하자.
    105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함
    [1-2절]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라,”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기쁠 때 노래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함으로 노래하며 찬송해야 한다. 시편 95편의 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고 말했다(시 95:1-2).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행사와 그의 모든 기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행사와 그의 모든 기사란, 그가 악을 행한 자들을 공의로 징벌하시고 심판하신 일들과 그가 자기 백성을 긍휼과 능력으로 구원하신 일들이다. 그 모든 일들은 성경에 다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요 21:25),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일들, 모든 사람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일들은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찬송의 내용을 이룬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을 찬송하는 목적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찬송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지만,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목적도 있다. 그러므로 시편 96:3은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 가운데 택한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행사들, 특히 그의 섭리와 구원의 일들을 찬송하며, 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자.
    [3-4절]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남편이나 자식, 집이나 재산, 좋은 옷이나 반지나 목걸이, 자동차 등을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그 어떤 자랑거리보다 더 자랑스러우시다. 그는 우리의 최고의 자랑거리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며 홀로 섭리하시는 자이시며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자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피조물이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이시다.
    시편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얼굴, 그의 능력을 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능력을 주신다. 힘은 생활의 필수적 요소이다. 우리는 힘이 없으면 활동할 수 없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힘을 얻기 위함이다. 음식은 우리에게 영양과 힘이 된다. 음식물에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무기질, 비타민 등 다섯 가지의 영양소가 있다고 한다. 탄수화물은 주 열량의 원천이며, 밥은 주로 탄수화물이다. 단백질은 콩, 달걀, 생선, 고기, 우유, 치즈 등에 많다. 무기질과 비타민은 야채, 과일, 미역, 김, 멸치 등에 많다.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2,700킬로칼로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이 일하는 데 필요한 육신의 힘은 음식을 통해 공급된다. 그러나 순종과 봉사, 헌신, 전도 등을 하기 위한 영적인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인 힘을 구해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슬픔은 부족과 불만에서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완전한 만족, 영원한 만족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자. 또 하나님과 그의 얼굴과 그의 능력을 항상 구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체험하자.
    [5-7절]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 . .
    시편 저자는 자기 동족을 “[하나님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창 15:6),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자이었다(창 22:12). 야곱은 도덕적으로 약점과 실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이었다(창 25:23; 롬 9:11-12).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창세 전에 은혜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야곱의 자손이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우리를 소유하시며 우리를 통치하시고 돌보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잘못할 때 우리를 징벌하실 것이지만, 우리가 그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자 할 때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판단 곧 심판이 온 땅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행위를 공의롭고 공정하게, 또 철저하게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세계적 통치권을 깨닫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얻을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판단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악한 원수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시고 자기 백성을 그들로부터 건지시고 지키신 일이다.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또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8-10절]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고 구원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그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과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과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아 약속이었다(창 17, 26, 28장).
    하나님의 언약은 몇 가지 성격을 띤다. 첫째로, 그것은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며 ‘명하신 말씀’이라고 불리운다. 언약과 명령은 동의어이다. 그러나 그 명령에는 약속된 복이 있다. 둘째로,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셨고 은혜로 그 자손들을 구속(救贖)하셨다. 이것은 구약 아래서는 제사 제도와 성막 제도를 통해,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밝히 증거되었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한 은혜언약이다. 셋째로, 그것은 영원하다. 그 언약은 “천 대에 명하신 말씀”이다.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단지 죄를 깨닫게만 하지만, 율법의 한 주요내용인 제사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救贖)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영원하고 불변적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아래서 동일한 성격의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구속으로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 오늘 신약 성도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롬 4:16; 갈 3:29).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의 구속(救贖)과 영원한 언약을 감사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만 의지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와 선만 행하자.
    [11-15절]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 . . .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중에는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받았을 때 그들 가족의 수는 매우 적었다. ‘영성(零星)하다’는 말은 ‘수가 적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직 가족 단위에 불과하였다. 야곱 때에라도 그 가족들의 총수는 66명 정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에도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나그네처럼 유리하며 방황하였다.
    실상,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실 천국을 예표한다. 성도들의 기업은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천국의 삶은 더 이상 나그네 삶이 아니며 더 이상 유리, 방황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그네처럼 유리할 그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셨다. 그들이 이방 세계에서 때때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셨고 심지어 그들 때문에 열왕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우거하러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겼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아내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창 12:17). 또 그가 그랄에서도 아내를 빼앗겼으나, 하나님은 그날 밤 꿈에 그랄왕에게 나타나 그를 위협하셨다(창 20:3). 또 후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하란에서 몰래 떠나올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뒤쫓아오는 외삼촌 라반에게 밤에 꿈에 나타나셔서 그를 해치지 못하게 경고하셨다(창 31:24).
    우리는 이 세상이 나그네 삶임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 천국을 소망하자. 또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바로 행하자.
    [16-20절]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 . . .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과 그 주위의 땅들에 극심한 기근을 주셨다. 극심한 기근으로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고 생명이 쇠약해졌고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하나님은 평안도 주시고 환난도 주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사 45:7). ‘그 의뢰하는 양식’이라는 표현은 밥이나 빵이 사람 사는 데 꼭 필요함을 말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몰라도 돈은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실상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 4:4).
    하나님께서는 이때를 대비하여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다. 그 사람이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었다. 그는 형들의 미움으로 은 20개에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려갔지만, 후에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 가족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그를 먼저 보내신 것이었다(창 45:5). 그러나 요셉은 종으로 팔려간 것이었고 또 그가 팔린 집 주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그의 발은 차꼬에 상하였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섭리하시며, 또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요셉의 종살이와 옥살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이었다. 젊을 때 그에게 주셨던 꿈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작정하신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요셉은 고난의 여정을 가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연단의 기간이었다.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애굽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하였고 그 이방의 통치자는 저를 자유케 하였다. 우리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며 우리가 단련을 받은 후에는 우리가 정금같이 나올 것이다(욥 23:10).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고난도 각오하자. 세상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 그의 선한 인도하심을 믿고 인내하자.
    [21-25절]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 . . .
    하나님의 섭리는 신기하게 진행되었다. 종살이하고 감옥살이하던 요셉은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삼상 2:6-7).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애굽 왕 바로는 요셉을 자기 집의 주관자로 삼았고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모든 장관들을 임의로 통제하며 또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다. 시편 119:98-100,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의 자녀들을 애굽으로 부르셔서 거기 우거하게 하셨다.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간 지 22년쯤 되는 때이었다. 그 후 430년간 애굽에 거주하였던 것은 야곱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서 크게 번성케 하셨다. 출애굽기 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자녀를 많이 낳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 들어가 함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셨고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섭리 중에 그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셨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도, 미움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의 손 안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 거하며 미움을 받는 것은 그들이 애굽을 떠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을 존귀케 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 또 미움을 받게 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선하게만 살자.
    [26-36절]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 . .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미움과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종 모세와 그의 택하신 아론을 보내셨고 그들은 그들 중에서 그의 표적들을 보였고 함의 땅에서 기적들을 행하였다. 그는 흑암을 보내셔서 어둡게 하셨고 그들은 그의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다”는 원문은 “그의 말씀에 반항치 못하였다”는 뜻이다. 또 그는 그들의 물들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셨고 그 물고기들을 죽이셨다. 본문에 언급된 재앙들은 순서대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빛과 물을 친히 주장하심을 증거하셨다.
    그 땅에는 개구리들이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다. 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떼가 왔고 그들의 사방에 이가 생겼다. 또 하나님께서는 비 대신에 우박을 내리셨고 그들의 땅에 화염을 내리셨다. 성경은 그가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다고 말한다(출 9:23). 그는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셨고 그 사방의 나무를 찍으셨다. 또 그가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렀고 그들의 땅의 모든 채소를 먹었고 그 밭의 열매를 먹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끄러운 개구리들이나 귀찮은 파리들과 이들을 주장하시며, 비도, 나무와 풀도 다 주장하시고, 메뚜기 떼도 주장하신다.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다. 장자는 사람의 기력의 시작이며, 가문의 대를 잇는 자요 부모의 소망이며 한 가정의 재산 1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여종의 장자까지, 심지어 가축의 첫새끼도 다 죽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었고,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겸비하라는 뜻이 있었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따르자.
    [37-41절]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 . .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로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셨다. 그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구하여 얻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들이 중노동에 시달렸던 것의 대가이었다. 또 그 지파들 중에는 약한 자, 즉 몸이 아픈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픈 자가 있었으면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모든 경우에 적당하게 섭리하셨다.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 사람들은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큰 재앙을 당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여호와께서는 구름을 펴셔서 덮개를 삼으셨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표시이었다. 또 구름은 낮의 뜨거운 햇볕을 가려 더위를 피할 그늘을 주고 불은 밤의 어두움을 밝혀 어느 정도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머무는 곳에 머물고 그것이 움직일 때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고, 그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양식과 물을 주셨다. 장정만 60만명이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함하면 200만명 이상일 그 회중을 위해, 어디에서 그 많은 양식과 물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필요뿐 아니라, 육신적 필요도 아셨다. 그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할 때 날마다 메추라기 떼를 오게 하여 먹게 하셨고, 날마다 하늘의 양식 곧 만나를 주어 먹게 하셨고, 또 반석에서 물이 강처럼 흐르게 하여 마시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42-45절]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 . . . .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고 그에게 하신 거룩한 약속을 지키셨다. 그 약속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학대와 고통으로 가득했던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즐거이 나오게 하셨고 노래하며 나오게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또 하나의 속박인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절대적 순종의 관계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속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는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다. 우리는 자유로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이방인들의 땅이었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고 가나안 땅의 족속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다. 실상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가나안 땅을 얻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성이요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처럼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며 하나님의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 관계는 명령하고 순종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명하실 수 있고 인간은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며 그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신다. 그것이 의요 생명이며 평강과 행복이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온전하게 그를 섬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천국을 기업으로 약속받은 것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만 순종하며 살자.
    106편: 이스라엘의 거역함과 하나님의 인자하심
    [1-3절]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또 그는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라고 말한다. 찬송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높이며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감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찬송과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원문).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심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한두 번 혹은 어느 기간 선하신 것이 아니고 또 외식적으로 선한 것처럼 보이시는 것도 아니고 계속적으로, 진실하게, 영원히, 변함없이 인자하시다. 또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특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와 원수들을 징벌하실 때 그의 능력의 일들로 나타났다.
    시편 저자는 이제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의(義)는 표준에 맞는 것을 가리키며, 표준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되셨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이제 성경의 교훈대로만 의롭게 살아야 한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능력의 일들을 깨닫고 감사하며 찬송하자. 또 항상 의를 행하는 자가 되자.
    [4-5절]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세상의 현실은 죄와 슬픔 가운데 있다. 세상은 죄가 많고 슬픔이 많은 세상이다.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마 11:28). 의를 항상 행하는 자가 복되지만(3절),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며, 그 결과, 파멸과 고생이 사람의 길에 있고 사람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다(롬 3:11-12, 16-17).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소서”라고 말한다. ‘은혜’라는 원어(라촌 ןוֹצ)는 ‘호의’라는 뜻이다(KJV, NASB, NIV).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와 호의로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불행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을 말한다.
    또 시편 저자는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형통을 체험하며 하나님 나라의 국민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형통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이다(롬 14:17).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동정하였고 자신의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는데,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천국 백성된 성도는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롬 12:12).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죄를 떠나고 의와 기쁨 중에 살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의를 행하며 기쁨을 누리자.
    [6-7절]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 . . .
    시편 저자는,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열조와 함께’라는 표현은 열조들의 범죄가 곧 자신들의 범죄이었고 또 자신들이 그 열조의 자손으로 ‘열조처럼’ (NASB, NIV) 범죄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선조들의 죄값을 받았다. 실상 본성의 죄악성은 비슷하다. 그들은 “악을 지으며 사악하게 행하였나이다”(원문).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의 명예를 짓밟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사회를 혼란시킨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열조들의 죄악을 회상한다. 그는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베푸셨으나 열조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또 시편 저자는 “[그들이]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해 그들에게 많은 인자를 베푸셨다. 고센 땅에 거하였던 그들은 하나님의 구별된 호의를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많은 자비를 기억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 곧 홍해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그들은 바로의 마병들이 가까이 올 때에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모세에게 말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 . .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출 14:10-12). 그들은 어려운 현실을 당했을 때 믿음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불신앙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우리는 성경 역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증거된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하심을 깨닫고 기억하자.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 불신앙과 거역의 죄에 빠지지 말고, 그의 인도하심을 믿고 소망하며 순종하자.
    [8-12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 . . .
    이스라엘 자손이 불신앙적이었음에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 그들을 구원하며 그의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홍해를 꾸짖으셨다. 마치 주께서 큰 풍랑을 꾸짖으심같이(마 8:26), 또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심같이(눅 4:39),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을 꾸짖으시고 다스리신다. 그가 명령하시면 모든 만물은 그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물을 마르게 하셨다. 홍해 바다는 마른 땅같이 변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를 광야같이 지나갔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했던 애굽 왕 바로와 그 장관들의 병거들은 홍해까지 쫓아왔다. 이스라엘 자손은 홍해 앞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위기를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에서 그들을 건져주셨다. 원수들 때문에 당한 그 위기는 그들에게 오히려 구원이 되었다. 홍해의 바닷물은 애굽 군대를 덮었고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들을 삼켰다. 그들은 다 멸절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미워하시는 자들을 미워하셨다. 그는 공의로 그들을 징벌하셨고 다 멸하셨다. 참으로 두려운 심판이었다.
    시편 저자는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라고 말한다.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에게 찬송을 불렀다. 대적자들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찬송케 하였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찬송할 것이다.
    성도에게 위기가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기에서 그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찬송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자.
    [13-15절]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 . . .
    시편 저자는 “저희가 오래지 않아 그 행사를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잊는 것은 유익할 때도 있다. 괴로운 일은 잊어야 좋으며 그래서 “세월이 약이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잊는 것이 병인 경우가 있다. 심각한 건망증이나 치매는 병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큰 병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잊지 말아야 할 일들 즉 하나님께 받은 크신 은혜의 일들을 너무 빨리 잊었다.
    시편 저자는 또 그들이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과거의 하나님의 일들은 현재의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는 옛날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심같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신다. 우리는 모든 현실 속에서, 특히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주시는 만나에 대해 싫증을 느꼈고 애굽에서 먹던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탐하였다(민 11:4-6).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에 만족치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였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였다. 그것은 불신앙이었다.
    시편 저자는 이제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사람의 잘못된 기도도 들어주신다. 그는 그들이 싫증내기까지 고기를 먹게 하셨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는 그들의 영혼을 쇠약케 하셨다. 영혼의 쇠약함, 믿음과 소망의 쇠약함은 육신의 질병보다 더 무서운 벌이다.
    우리는 땅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범사에 자족하면서 하나님을 잊지 말자. 또 단지 육신의 건강보다 영혼의 강건을 중시하자.
    [16-18절] 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 불이 그 당 중에 . . . .
    이스라엘 자손들, 특히 고라와 그 동료들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였다. ‘하나님의 성도’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구별하셨다. ‘진에서’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라는 뜻이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고 대적하였다. ‘질투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시기와 질투는 미움과 살인을 낳는 큰 죄악이다. 그것은 훗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악이었다(마 27:18). 고라와 그 동료들은 공개적으로 모세와 아론의 지도에 도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비난과 도전을 불쾌하게 여기셨고 진노하셨다. 그는 땅을 갈라 그들을 삼키게 하셨다. 민수기 16:31-33,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또 그들을 지지하던 250명의 유명한 족장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화염에 불살라졌다. 민수기 16:35,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250인을 소멸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무섭게 징벌하신 까닭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와 지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들을 비난하고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민 16:30).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의 성경적 교훈과 지도를 존중하고 복종하자.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멸시하는 자가 되지 말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자.
    [19-23절]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 . . .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에서 송아지를 만들었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십계명을 받은 지 몇 날 되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제2계명을 범한 큰 죄악이었다. 하나님은 인생의 영광이며, 인간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개나 소도 자기 집을 알고 자기 주인을 기억하거늘 하물며 인간이랴!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으로 또 홍해에서 큰 기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나, 속히 잊어버렸다. 그것은 실제적인 무신론이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큰 죄요 그 결과는 불행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심히 연약함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고 그들을 멸하려 하셨다. 출애굽기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죄에 대한 진노는 비록 두려운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며 공의로운 일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게 마시고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기를 간구하였다(출 32:11-13).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었다. 구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지옥 가기에 합당했던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우상숭배치 말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섬기자. 우리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잊지 말자.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요 행복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감사하며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24-27절] 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 . .
    이스라엘 백성은 낙토(樂土)를 멸시하며 그들의 장막에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다. ‘낙토’라는 원어(에레츠 케므다 ה ץ)는 ‘기뻐할 땅’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그것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열두 정탐꾼 중에 믿음이 있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은 믿음 있는 바른 보고를 하였지만, 나머지 열 명은 불신앙적 보고를 하였다. 그들은 그 땅을 악평하여 말하기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믿음은 감사를 가져올 것이지만, 불신앙은 원망과 불평만 만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음성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다. 그는 그들을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셨었다(출 3:8).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두려워했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시면서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 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 흩어지게 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는 것은 그의 말씀이 항상 진실하지만, 그 진실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이다. 맹세는 진실을 증거하는 인간의 최후의 수단이다. 맹세는, 만일 그 증거가 거짓이라면, 천벌을 각오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고 그 후손이 이방인들 중에 엎드러지고 각지에 흩어지게 하겠다고 맹세하셨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에 떨어지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을 사모하고 그의 모든 말씀을 믿자.
    [28-31절]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 . . .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들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었다고 말한다. ‘바알브올’은 ‘브올의 바알 즉 주(主)’라는 뜻이다. ‘죽은 자들’은 이방신들이나 그 우상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달리 생명 없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이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 초청을 받아 함께 먹었고 그 신들에게 절했고 그 여자들과 음행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알브올에게 연합되었다.
    이 일은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하나님은 온유하시고 화평하신 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이시다. 그러나 그는 죄에 대해서는 격노하시고 진노하신다. 그는 그 죄에 대해 징벌을 내리셨다. 그는 백성의 모든 지도자들을 대낮에 목매어 달게 하셨고 회중 가운데 염병을 보내셔서 2만 4천명이나 죽임을 당케 하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려웠다.
    그때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었다. 백성의 지도자들을 목매어 달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인해 온 백성이 회막문에서 슬피 울 때,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서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느하스는 일어나 창을 들고 따라 들어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배를 꿰뚫어 그들을 죽였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염병의 재앙이 그쳤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고, 그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셨다(민 25:11-13).
    우리는 죄를 크게 여기고 우상숭배자와의 교제를 조심하자. 오늘날도 비느하스같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충성된 신자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자.
    [32-33절]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 . . .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민수기 20장에 기록된 사건이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다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라고 원망하며 말했다(민 20:4-5).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고 참고 기다리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거역했고 모세는 그 입술로 경솔히 말했다. ‘그 심령’이라는 원어(루코 וֹחוּר)는 ‘그의 영’이라는 뜻으로서 모세의 심령(KJV)보다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NASB, NIV, BDB). 그 이유는, ‘그들이 거역하였다’는 원어(히므루 וּר)가 성경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DB).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함에 노하여 망령되이 말했다. ‘망령되이 말하다’는 원어(바타 א)는 ‘성급히 말하다, 경솔히 말하다’는 뜻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말하면서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민 20:10-11).
    하나님께서는 그의 경솔한 말과 행동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그에게 징벌을 내리셨다. ‘얼이 미치다’는 원어(라아 ע)는 ‘해가 되다’는 뜻이다. ‘얼’은 ‘언걸’이라고도 하며, 남의 일 때문에 당하는 해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민 20:12). 모세는 이 일 때문에, 그가 그렇게 사모하였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처분은 참으로 두려웠다.
    우리는 하나님과 다투지 말고, 진리 문제나 죄 문제가 아닌 한 하나님의 종들과도 가급적 다투지 말자. 우리는 경솔히 말하지 말자.
    [34-39절] 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 . . .
    시편 저자는 사사 시대를 회고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고 이방 족속들 즉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멸하지 아니하였고 이방 민족들과 혼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라고 명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의 불순종은 잘못된 교제로 나타났다.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인들의 행위를 배웠고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경고하여 두신 일이었다. 잘못된 교제는 신앙의 부패와 변질을 가져온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귀신들에게 제물로 드렸다. ‘사신(邪神)’이라는 원어(쉐딤 םי)는 ‘귀신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가나안 땅의 신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참 신이 아니고 귀신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잘못된 종교적 지식 때문에 자기 자녀들을 귀신들에게 제물로 드렸다. 그들은 무죄한 피, 순진한 자들의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가정에 주신 기업과 선물이다. 또 귀신들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해치고 죽이는 영들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된 교제는 종교적 부패를 가져오는 올무이며 시험거리이었다. 성도가 신앙의 부패를 방지하려면 교제를 조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로 가나안 땅은 다시 피에 더러워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행위로 더러워졌고 그들의 행동은 음탕하였다.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의 행위이었다. 사회는 부패했고 윤리는 땅에 떨어졌다. 개인의 도덕성도, 사회의 도덕성도 그러하였다.
    교회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교회가 이 속성을 유지하려면 교제를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무지와 악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바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 계명을 지켜야 한다.
    [40-43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 . . .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자녀들을 귀신들에게 제물로 드리는 악한 행위들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시고 구속(救贖)하신 자기 백성, 그가 친히 기르시는 사랑하신 백성이라도 범죄할 때 크게 노하셨다. 그는 자기 기업, 곧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을 미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범죄를 미워하시며 노하신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방인들의 손에 붙이셨고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들에서 패하였고 원수들은 그들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원수들의 압박과 학대를 받았고 그 손 아래 복종케 되었다. 그들은 낮아졌고 비천해졌으며 여러 날 큰 고통과 슬픔을 당하였다. 이것이 사사기가 증거하는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고 징벌을 당한 역사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여러 번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이었고 오래 참으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여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그 고통에서 건져내어 주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꾀로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또다시 낮아짐을 당하였다. 사람은 생각이 부패할 때 악한 행동을 한다. 사람의 죄악성은 그 심령 깊은 곳에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을 깨달았다고 증거하였다(전 7:29). 인간은 심히 부패된 존재이며 선을 행하기에 무능한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인간의 죄에 대해 진노하심을 깨닫고 범죄치 말자. 우리는 인간 본성이 심히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성령의 도우심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자.
    [44-46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 . . .
    비록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고 무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가 많으시며 그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그 소리를 들으신다. 사람은 고난 중에 자신을 반성하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새롭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잘 들으시고 그 고통과 곤고를 돌아보신다. ‘권고(眷顧)한다’는 말은 ‘돌아본다’는 뜻이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한다. 율법에는 회개할 때 회복을 약속한 내용이 있다. 레위기 26:40-42,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른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엄격히 심판하지만, 그의 긍휼과 인자는 죄사함과 구원을 준다. 그가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은 인간적 표현법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불변적이지만, 그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회복과 구원을 허락하셨다. 그는 파사 왕 고레스를 감동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에게 호의를 얻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좋은 환경이든지 나쁜 환경이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범죄치 않도록 조심하며 인내하자. 또 하나님을 의지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자.
    [47-48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구원은 포로 생활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나 성경의 구원은 포괄적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 즉 죄사함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다. 또 그것은 죄의 결과인 죽음과 모든 불행과 슬픔, 비천함과 비참함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시편 저자는 또 “열방 중에서 모으소서”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방 나라들에 흩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는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모이는 곳이며 모여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이는 교회이었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성경의 교훈을 받기 위해, 서로 교제하며 위로와 힘을 얻기 위해, 또 전도하고 봉사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시편 저자는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그를 찬송하게 하시기 위해서이었다(사 43:21; 엡 1:6, 12, 14). 찬송은 인간의 본분이요 성도의 본분이다. ‘아멘’(ןאָ)은 ‘참으로, 진실로’라는 뜻이며, ‘할렐루야’(הּוּל)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열심히 모여야 하며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진실한 감사와 찬송을 항상, 영원히 올려야 한다.
    107편: 하나님의 인자하신 일들을 찬양함
    [1-3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감사는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마음과 말로 보답하는 것이다. 감사와 찬송은 거의 동의어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이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은혜를 베푼 이웃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로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고 지혜를 주셨고 만물을 주셨고 또 그것을 다스리게 하셨다. 더욱이, 그는 범죄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영생을 주셨다. 그는 우리를 오래 참으셨고 여러 번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 구속(救贖)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라고 말한다. ‘남’이라는 원어(얌 ם)는 ‘바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방 나라들에 포로로 잡혀가고 흩어졌었지만,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을 받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은혜로 죄와 죽음, 사탄 권세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영생,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천국의 약속을 얻었다.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4-9절]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 . . .
    시편 저자는, “저희가 광야 사막 길 혹은 황량한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라고 말한다. 광야는 황량한 길이며 바른 길을 잃기 쉬운 곳이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거할 성이 없는 광야 황량한 길을 방황하였었다. 그들은 식량이나 물도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한 것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보냈던 열두 정탐꾼들 중 열 명의 불신앙적 보고를 받아들인 잘못 때문이었다(민 14:33-34). 성도는 세상에서 종종 이런 고난을 당한다.
    시편 저자는,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말한다. 본 시편에는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네 번 나온다(6, 13, 19, 28절). 사람은 환난과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는 경향이 있다. 전쟁 중에는 무신론자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고난 중에 부르짖는 기도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고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셨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그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위해 부르짖는 특권이 있다.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이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그의 영혼을 만족시키시는 자이시다.
    우리는 때때로 방황함과 부족과 피곤함이 있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신 구원과 선한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찬송하자.
    [10-16절]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 . .
    시편 저자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평안 중에 사는 것은 정상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행과 사망의 그늘에 두시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하신다. 생명과 평강은 빛으로 상징되고 불행과 죽음은 흑암으로 상징된다. 시편 저자는 또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라고 말한다. 고된 노동과 수고는 사람의 교만한 마음을 낮춘다. 또 고난 중에 아무도 그를 도와주거나 돌보아주지 않는다. 그는 쓸쓸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시편 저자는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말한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편 저자는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를]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라고 한다. 얽은 줄을 끊음, 놋문을 깨뜨림, 쇠빗장을 꺾음 등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를 그 고난에서 기이하게 건져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자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의 현실도 감사하자. 모든 고난을 달게 받자. 그러나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러면 그는 놋문 같고 쇠빗장 같은 고난도 깨뜨려주실 것이며 우리를 그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17-22절]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 . . .
    시편 저자는 미련한 자에 대해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악한 일을 하는 자이다. 하나님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며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그는 불행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범과와 죄악 때문에 여러 가지 곤란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질병도 그것들 중에 하나이다. 범죄한 영혼은 심각한 질병에 걸려 식욕이 떨어지므로 각종 음식을 싫어하고 몸은 쇠약해 사망의 문에 가까운 자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근심 중에서,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생각하며 하나님께 나아오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 고난은 확실히 은혜이다. 하나님의 징책의 고난은 확실히 그의 심령을 치료하는 약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받는 성도들이 그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보내어 주셔서 그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그들을 그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을 깨우쳐 회개시키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며 슬픔과 낙심 가운데서도 위로를 준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과 치료의 능력이 있다.
    시편 저자는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그 은혜를 간증하며 전할 것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범죄치 말자.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붙들자. 또 그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하며 간증하자.
    [23-32절]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 . . .
    시편 저자는,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는도다”라고 말한다. ‘바다’라는 원어(메출라 הוּצ)는 ‘깊은 바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의 직업 현장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다.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는 어부들은 바다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라고 말한다. 바다에서 광풍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고 그것을 허락하셨다. 배를 탄 채 광풍을 만난 어부들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며 그 위험을 인해 그들의 영혼이 녹는다. 그들은 이리저리 구르며 술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며 지각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광풍은 자신의 죄 때문에 오기도 하지만 단순히 신앙 훈련을 위해 오기도 한다.
    그들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온케 하시고 물결로 잔잔케 하신다. 그는 광풍을 잔잔케 하실 수 있다. 어부들은 광풍이 조용함을 인해 기뻐하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며 살 소망까지 끊어진 것이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었다고 간증하였다(고후 1:8-9).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자마다 마땅히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자. 또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고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33-43절]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땅을 임의로 변하게 하신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옥토로 소금밭이 되게 하신다. 옛날 소돔 땅은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같이 비옥했으나(창 13:10) 하나님의 불 심판으로(창 19:24-26) 오늘날 염해 즉 소금 바다 아래로 잠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거친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도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도 하신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주관하신다고 증거한다. 그는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시며 그들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소산을 취하게 하신다. 그는 어떤 이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그 가축들이 감소하지 않게 하시지만, 그들은 또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해 감소하여 비굴하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죄의 징벌이나 훈련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는 또 궁핍한 자와 환난당한 자를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인도하기도 하신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통치 기준이 의(義)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옥토를 광야로 변하게 하시는 것은 그 거민들의 악 때문이었다(34절).그러므로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악인은 자기 입을 봉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을 것이다. 정직한 자는 성경 말씀을 달게 받으며 그 말씀대로 살며 그 뜻을 행하는 자이며, 그들이 지혜자요 복받을 자들이다.
    우리는 땅을 임의로 변케 하시고 사람들의 높고 낮음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또 우리는 범죄치 말고 하나님만 순종하고 그의 말씀대로만 살아가자.
    108편: 하나님을 찬송하며 구원을 간구함
    [1-5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 .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정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고자 하는 마음의 결심이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송하되 비파와 수금의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고 사랑하고 사모하며 높일 때 나온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다.
    다윗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말한다. 새벽은 하루 중에서 가장 좋은 시간일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하는 것은 성도의 간절함과 사모함과 정성을 나타낼 것이다. 돈 벌기를 사모하는 자는 새벽에도 잘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올릴 것이다.
    다윗은 또 열방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겠다고 고백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려 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크시며 그의 진실이 하늘까지 미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국가적이며 세계적이다. 또 그의 진실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이며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기초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실 자이시다. 그는 온 세상의 구주이시며 소망과 기쁨이시요 생명의 근원이시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며 새벽을 깨우며 찬송하기로 결심하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송하자. 그의 영광을 온 세상에 전하자.
    [6-9절]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 . . .
    다윗은,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실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그는 그 오른손 즉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 또 그는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하며, 그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시편 60:5-11에도 똑같이 나오는 이 말씀은 가나안 땅의 약속의 확실함을 증거한다.
    “내가 뛰놀리라”고 말씀은 승리의 기쁨을 나타낸다. 또 그는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세겜은 요단강 서쪽을 가리키며 숙곳 골짜기나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을 가리키고 므낫세는 요단 동서쪽에 걸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 즉 요단 동쪽과 요단 서쪽을 다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라는 말씀은 왕권의 보호를 가리키며, “유다는 나의 홀이며”라는 말씀은 왕권의 계승을 가리킬 것이다.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는 말씀은 모압이 이스라엘의 종이 될 것을 나타내며,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질지며”라는 말씀은 에돔에 대한 진노와 경멸을 표현한다.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는 말씀은 이방 나라들의 견고한 성이 멸망할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되었음과 그의 구원의 능력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교회의 승리와, 그의 약속하신 천국 기업을 확신하자.
    [10-13절]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 . . .
    다윗은,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매우 연약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려두셨다. 그들이 이렇게 연약해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증거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 만일 그들이 그의 계명을 어기면 원수 앞에서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이미 경고해 두셨었다(신 28:25-26).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승리가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고 그의 약속과 그의 인자와 진실을 믿었다. 시편 20:6-7에 보면,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 승전(勝戰)을 호소한다. 그는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대적은 모압과 에돔과 블레셋 등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약 성도인 우리의 대적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를 원한다.
    우리는 환경적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승전을 호소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자.
    109편: 보응의 확신과 구원의 간구
    [1-5절]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 . .
    다윗은 말하기를,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라고 한다. 그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책망의 말이라면 달게 들어야 하지만, 거짓된 입과 혀로 악한 말로 그를 비난하는 것은 몹시 마음 상하는 일이다. 그의 대적자들은 그를 미워하며 까닭 없이 그를 비난하였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도 덮지만, 미움은 상대방의 작은 허물도 크게 여기며 없는 허물도 상상해낸다.
    다윗은 또 말하기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또 “저희가 악으로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라고 말한다. 다윗의 대적자들은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었다. 다윗은 그들을 사랑했으나 그들은 다윗을 대적하였다. 그들은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었고 미움으로 그의 사랑을 갚는 자들이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도 주께서 금하시거든 하물며 선을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는 것이랴! 그러므로 성경은,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경고하였다(잠 17:13).
    다윗은 이제,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또 “나는 기도할 뿐이라”라고 말한다. 그의 하나님은 그가 평소에 섬기며 찬송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지금 원수들의 많은 비난을 당하는 어려운 처지에서 그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호소한다. 그는 하나님께 그의 공의로운 처분과 자비하신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과 미움으로 남을 비난하거나 악으로 선을 갚지 말고 또 우리의 대적자들과 싸우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하자.
    [6-13절]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 . . .
    본문은 악인에 대한 보응을 하나님께 간구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다윗은 “악인으로 그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악인을 다른 악인으로 제어하신다. 둘째로, 그는 “그가 심판받을 때에 정죄받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소서”(원문)라고 말한다. 악인은 심판 날에 정죄될 것이다. 또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가 될 뿐이다.
    셋째로, 그는 “그 연수를 단축하게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일찍 데려가실 것이며 그의 교회 직분도 거두실 것이다. 그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해를 끼칠 자이다. 의인은 장수하고 충성된 자는 교회 직분도 오래 가질 것이다. 넷째로, 그는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악인은 가정적인 불행, 가족적인 불행을 당할 것이다.
    다섯째로, 그는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그 소유를 빼앗기고 물질적으로 낭패를 경험케 하실 것이다. 여섯째로, 그는 “그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 자가 없게 하실 것이다. 일곱째로, 그는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후손들이 땅 위에서 끊어지게 하실 것이며 그의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서뿐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의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서도 악인이 되지 말자. 우리는 끝까지 충성된 의인으로만 살자.
    [14-20절]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 . . .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라고 말한다. 부모와 선조들의 죄로 인해 그 자손들이 고통과 불행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신다. 그들의 죄악은 항상 하나님 앞에 있을 것이다. 그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5).
    악인들은 남을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다.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의 매우 기본적 마음인데, 그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하게 그런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또 악인들은 다른 사람을 저주하기를 좋아하고 그를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였다. 악한 자를 저주하는 것도 삼가야 할 것인데, 경건하고 의로운 자를 저주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 또 그들은 남을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바르게 징벌하셨다. 악인이 남을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저주가 자기에게 임했고 그가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다. 그가 남을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의 내부에 들어갔으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다. 다윗은, “저주가 그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런 후, 그는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고통 중의 기도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우리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에게 악하게 행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돌아보자. 또 남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자.
    [21-25절]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 . . .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나를 선대하시며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한다. 성도의 무기는 기도이다. 살아계신 섭리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시면, 그가 우리를 위기에서 건지시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였다(빌 4:6).
    다윗의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인자하심의 선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한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이라는 이름 때문에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택하신 백성이라는 이름이 있다. 또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선하시며 성도가 의지할 바는 그것밖에 없음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이 세상 사는 동안 그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받는다.
    다윗은 자신의 처한 어려운 형편을 말한다. 그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심적인 고난과 물질적 궁핍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또 그는 그의 가는 것이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같이 불려가며 금식함을 인해 그의 무릎이 약하고 그의 몸이 수척하다고 고백한다. 그는 몸도 마음도 심히 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를 비방하며 그를 향하여 머리를 흔드는 원수들이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형편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려울 때 기도하자.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또 그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과 구원을 기도하자. 특히 물질적 궁핍과 심신의 연약과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기도하자.
    [26-31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 . . .
    다윗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이 필요하다. 지혜와 힘이 필요하고 원수의 비난으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며, 심령의 두려움, 몸의 연약,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구원도 필요하다. 그는 또한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라고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손길을 가져오는 길이다. 하나님의 손길은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이 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믿고 있었다.
    다윗은 그를 대적하고 비난하는 원수들이 수치를 당할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라고 말하며 또 “나의 대적으로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악으로 갚으실 것이다. 그는 의로운 성도를 비방하는 자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즐거움을 얻고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릴 것을 확신하며 기도한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또 그는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라고 말하며,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 이는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정죄하려(KJV, NIV, BDB)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의 도우심의 응답으로 즐거움을 얻고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기도 응답을 믿자. 그는 의인들에게 도우심과 구원을 주시고 악인들에게 공의로 보응하신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만 살자.
    110편: 메시아 시대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본 시편은 메시아 시대를 증거한다.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른 그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主)이시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도 본절을 인용하시면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었다(마 22:43-45).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주 메시아에게 “너는 내 오른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한 통치권과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가진다는 뜻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비방과 핍박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2:69). 주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신약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바이다(행 7:55-56; 롬 8:34; 엡 1:20; 벧전 3:22; 히 1:3).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예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이 완전히 그의 발 아래 굴복될 때까지 메시아를 그의 오른편에 두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때 그의 원수들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실 때에도 그는 왕이시며 주님이시다. 그는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시며 영혼들을 구원하시며 교회들과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지금도 통치권을 발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또 주의 재림의 때가 가까움을 생각하자.
    [2절]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홀은 왕권, 통치권을 가리킨다(창 49:10; 민 24:17).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신다는 것은 능력으로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메시아는 지금 능력으로 그의 왕권과 통치권을 발휘하신다. 그는 지금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활동하신다. 복음 전도와 영혼 구원은 그의 능력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또 교회를 세우시고 보호하시고 원수들을 징벌하심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권능의 홀을 시온에서부터 내어 보내실 것이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마 28:18). 복음 전도와 영혼 구원은 시온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다윗은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라고 말한다. 메시아의 권능의 활동은 원수들 가운데서도 드러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0:19). 또 그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1:20). 주께서는 주와 주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 같은 이를 회개시키고 구원하셔서 그의 귀한 일꾼을 삼기도 하셨고 다른 이들을 제압하시고 징벌하시기도 하셨다.
    전도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자. 우리는 오늘날도 그의 교회를 지키시고 그의 원수들을 징벌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자.
    [3절]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주의 권능의 날’은, 그의 권능의 홀을 보내시는 날, 곧 신약시대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와 성령의 능력으로 그 날에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고(눅 24:49),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행 1:8).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은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할 것이다. ‘거룩한 옷을 입고’라는 원어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과 거룩함을 얻은 자들이다(고전 6:11). 그들은 주의 의(義)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옷을 입었고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하였고(롬 12:1), 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증거하였다(롬 14:7).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주의 일에 자원해 참여하였다(고후 8:1-5).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원어는 ‘새벽부터, 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 날에 주의 백성은 새벽부터, 정성을 다해 즐거이 하나님께 헌신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 헌신한 청년들이다. 사람은 아직 젊고 힘이 있을 때, 세월을 아끼며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한다(엡 5:15-16).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권능의 날이다. 주의 백성이 새벽부터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하며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주께 나아온다. 우리도 그런 자가 되자. 또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4절]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셨고(원문) 변치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는 말이다. 맹세는 인간 사회에서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다(히 6:16).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확실한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맹세하셨다(창 22:16).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는 표현은 그의 말씀이 얼마나 더 진실하고 불변적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에게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맹세하셨다. ‘반차’라는 원어(디브라 ה)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는 멜기세덱의 모습을 좇은 제사장이 될 것이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조차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를 맞았던 인물로서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아브라함은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창 14:17-20). 히브리서는 그가 멜기세덱 곧 ‘의의 왕’이며 살렘 왕 곧 ‘평강의 왕’이고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증거한다(히 7:1-3). 구약시대의 멜기세덱은 신약시대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메시아는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고 말한다(히 4:14). 그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1-12). 그는 우리를 위해 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중보사역을 하신다. 그의 공로로 우리는 담대히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들이 되었다(히 10:19; 벧전 2:5, 9).
    우리는 크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자. 우리는 오직 믿고 의지하며 담대히 하나님을 섬기자.
    [5-7절]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주의[당신의] 우편에 계신 주(主)’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메시아의 노하시는 날이 있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대해,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 . .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라고 증거했다(습 1:14-15). 사도 요한은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천재지변이 있는 진노의 큰 날의 환상을 보았다(계 6:12-17). 그 날은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이며(롬 2:5)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이다(롬 2:16).
    메시아께서는 그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다. 메시아는 용맹한 전사(戰士)이시다. 그 어떤 왕도 그를 당하지 못한다. 그는 모든 왕들을 파하실 것이다. 그는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실” 것이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세상 나라의 권세자들을 죽이실 것이다. 요한은, 주의 재림의 때에 적그리스도와 땅의 왕들과 군대들이 모여 재림하시는 주님과 하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혀 지옥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증거했다(계 19:19-21).
    다윗은 또 메시아께서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나귀의 새 턱뼈로 천 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후 심히 목말라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한 곳을 터치셔서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된 삼손같이(삿 15:15-19), 메시아께서 전쟁에서 피곤해지거나 지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의 날을 두려워하자. 그러나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는 말자. 그의 진노의 날에 그가 다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111편: 하나님의 의로운 행사를 찬송함
    [1절]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인정하고 높이는 행위이다. 이것은 ‘감사’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내가 . . .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시편 33: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시편 저자는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교회는 위선자들의 회가 아니고 정직한 자들의 회이어야 한다. 성도의 특징은 정직과 의이다. 정직과 의는 하나님의 법과 기준, 즉 성경 말씀에 맞는 것을 말한다. 실상 찬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직한 삶이다. 주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고(마 15:8), 바울도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을 지적하였다(딛 1:16).
    시편 저자는 또한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겉모습으로가 아니고 마음으로, 즉 우리의 온 마음으로 찬양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에베소서 5:19,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자. 우리는 정직한 자들의 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자. 또 우리는 전심으로, 즉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2절]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크시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일들보다 더 위대하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일이 그러하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옛날 노아 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일이 그러하다.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창 7:21).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신 일이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내셨다(신 3:34).
    하나님을 아는 자, 그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들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즐거워하는 자마다 그것을 연구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연구한다. 별을 좋아하는 자는 별을 연구하고 음식을 좋아하는 자는 음식을 연구하고 자동차를 좋아하는 자는 자동차를 연구한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연구한다.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행사를 연구하는 자는 성경을 연구한다.
    복된 성도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다(시 1:2).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다(시 19:10). 그는 하나님의 법을 종일 묵상하며 새벽 전에 바라며 야경이 깊기 전에 깨어 묵상할 것이다(시 119:97, 147-148).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였고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다(스 7:10). 베뢰아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행 17:11-12).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행사들을 깨닫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연구하자. 우리는 성경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사모함으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자.
    [3절]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하나님의 행사는 존귀하고 엄위하시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일들이 그러하고 그의 심판하신 일들이 그러하고 그의 구원의 일들이 그러하다. 거기에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과 능력과 위엄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행사는 그의 의를 드러낸다. 의는 도덕적 표준에 맞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도덕적 표준에 비추어 어떤 일을 옳다 혹은 그르다고 판단한다. 사람의 도덕적 표준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이다(시 89:14). 하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하였다(롬 14:17). 장차 거기에 사는 자들은 의만 행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의 일들에서 의가 드러난다. 또 하나님의 의는 그가 사람의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벌하심을 포함한다. 죄는 하나님의 권위와 속성을 침해하고 손상시키고 다른 이들에게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진노하신다.
    현재 세상에는 불의와 죄악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지막 공의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때 사람들은 공의가 무엇인지 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영원하시다. 메시아는 영원한 의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주실 아기 메시아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며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 영원히 공의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9:6-7). 천사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했다(눅 1:31-33).
    하나님의 행사는 존귀하고 엄위하며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앞에서 의롭게, 오직 성경말씀대로 믿고 성경말씀대로 살아가자.
    [4절]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의 행사는 기이한 일들이다. 창조도, 섭리도, 심판도, 구원도 그러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기이하신 분이시다. 그는 ‘기묘자’라고 불리신다. 그의 탄생도, 기적 행하심도, 그의 부활도, 승천도, 재림도 기이한 일들이다. 사도 바울은 재림하실 예수께서 믿는 이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했다(살후 1:10).
    하나님의 행사는 또한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다. 특히 그의 구원의 일이 그러하다. 그는 죄로 멸망할 인생을 용서하고 구원하고 회복시키신다. 그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다윗은, 시편 103:2-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救贖)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신약성도가 받은 구원의 은혜도 그러하다(엡 2:4, 8).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이한 일들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다. 우리는 나쁜 일을 기억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들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행사들은 우리가 기억할수록 유익한 내용들이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교훈하였고(신 6:12), 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라고 말했다(신 8:11). 또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했고(시 103:2),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들은 말씀들을 떠내려보내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삼가라고 교훈하였다(히 2:1).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의 일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또 감사함으로 그를 섬기자. 또 우리는 그의 뜻대로 남을 긍휼히 여기자.
    [5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신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두려움으로 받고 그것을 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천지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채소와 곡식과 과일은 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다. 물고기도, 소나 양도 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도 양식을 주신다. 풍년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며, 기근과 흉년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다. 그러나 그는 기근 중에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듯이, 자기 백성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
    시편 37:25에서, 다윗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증거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고 말씀하신 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마 6:33). 이것은 양식을 보장하시는 약속이다. 히브리서 13:5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모든 복, 즉 사회적인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을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6).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믿고 의지하고 오직 그의 명령과 교훈대로 의와 선만 행하자.
    [6절]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온 세계와 열방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가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고 말씀하셨다(출 19:5). 모세는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이 본래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말했고(신 10:14), 다윗도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했다(시 24:1).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가 모든 일을 임의로 행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공의로 통치하시고 악에 대해서만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셨다. 물론 그것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가득했던 우상숭배와 음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가 약속하신 선한 일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이루어졌다(수 21:43, 45). 가나안 땅의 성읍들과 밭들, 포도원들과 과수들은 다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다.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행하시되 자기 백성에게 유익되도록 행하신다(롬 8:28).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서 그의 능력을 보이셨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강대국 애굽의 왕 바로는 장정만 60만명, 여자와 아이를 합하여 2백만명이 넘을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내보낼 리가 없었고, 또 가나안 원주민들은 건장하였고 그 성들도 견고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셨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영혼구원의 전도도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은 영혼들을 그의 능력으로 살리시고 병든 영혼들을 고치신다.
    우리는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며 그의 주권 아래 있음을 깨닫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맡기며 오직 열심히 전하고 권면하자.
    [7-8절]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하나님의 손의 행사는 진실하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시편 31:5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그의 말씀도 진실하시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범죄한 인간은 거짓되어 겉과 속이 다르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며 기회주의적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진실함이 있다. 시편 89:14,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하나님의 손의 행사는 또한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30:18은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공의는 도덕적 표준에 맞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신다. 시편 99:4는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징벌하신다. 죄악된 인간은 죄에 대해 포용적인 속성이 있으나 죄를 묵인하고 용납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죄를 살피시고 죄에 대해 징벌하신다. 시편 7:9, 11,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본문은 하나님의 법도가 다 확실하며 영원히 견고하다고 말한다. 진실하신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께서 주신 법도는 다 진실하며 확실하다. 그것은 영원히 견고하다. 그 법도를 폐지하거나 변경시킬 자는 아무도 없다. 또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라는 말은 “진실과 정직으로 행해야 할 바로다”라는 뜻인 것 같다. 하나님의 모든 교훈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요 우리의 행위의 지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하시고 의로우심을 깨닫고 그의 진리들을 확신하고 그의 약속들을 굳게 붙들자. 또 우리는 그의 진실과 의를 본받자.
    [9절]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救贖)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셨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하셨다(출 6:6-7). 구속(救贖)이란 값을 주고 사신다는 개념이다. 그것은 죄값을 지불하고 그 형벌을 대신 받음으로 구원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죄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아야 마땅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긍휼로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의 형벌로부터 건져주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다. 그 언약은 영원하며 불변적이다. 이사야 55:3,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히 8:6), ‘새 언약의 중보’(히 9:15; 12:24)이시며, 그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이다(히 13:20).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님은 거룩하고 지존하시다. ‘지존하시다’는 원어(노라 אוֹנ)는 ‘두려우시도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두려우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으로 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히 12:28).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언약을 감사하자. 우리가 우리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벧전 1:18-19). 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자.
    [10절]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다. ‘근본’이라는 원어(레쉬스 תיא)는 ‘근본’ 혹은 ‘시작’(KJV, NASB, NIV)이라는 뜻이다. 잠언에서, 솔로몬은 증거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 혹은 시작이라고 하였다(잠 1:7; 9:10). 욥도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다(욥 28:2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지혜자이지만, 하나님을 경외치 않거나 무시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는 사망과 불행의 길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義)이며 의를 행하는 것은 생명과 평강의 길이다. 신명기 4:5-6,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세상적 지혜가 있어도 죄를 짓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 길에는 사망과 불행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구원하신 주요 목적이 그를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엡 1:4-6).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할 중요한 한 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며 성도는 천국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의지하며 그의 계명과 교훈을 지키고 그를 찬송하자.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가자.
    112편: 올바른 자가 복됨
    [1-3절]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며 그의 권위와 명예가 달려 있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성경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실 것이다.
    본문은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하며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부모와 자식은 연대관계가 있다. 부모가 의로우면 자녀들이 복을 얻고 부모가 악하면 자녀들이 화를 당할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2세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했던 역사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러나 의인의 자손은 땅에서 강성할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강건하고 육신적으로도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번영할 것이다.
    본문은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고 그 의가 영원히 있다고 말한다. 경건한 가정에 주시는 복은 영적인 부요가 첫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부요도 주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므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부자가 되었고 양과 소는 떼를 이루었다고 기록한다(창 26:12-14).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토지 소산과 가축의 생산과 떡 반죽 그릇의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다(1-6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자손손 복을 얻을 것이다. 그의 의와 하나님의 복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며 힘써 실천하자. 그것이 땅 위에서도 복된 일이며 자녀들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4-5절]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본문은 경건한 성도에 대해 묘사한다. 첫째로, 그는 정직하고 의로운 자이다. 정직함이란 하나님의 법에 맞게 바르게 행하는 것을 가리키며 의로움도 도덕적 표준에 맞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는 정직하고 의로운 자이어야 한다. 둘째로, 그는 어질고 자비하며 은혜를 베풀고 꾸이는 자이다. ‘꾸인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성도는 이웃에게 너그럽고 선하고 자비롭고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5절 상반절은 “선한 자는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나니”라는 뜻이다(KJV). 성도는 가난한 형제에 대해 손을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서 그의 필요를 따라 꾸어주어야 한다(신 15:7-8).
    본문은 이런 경건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말한다. 본문은 정직한 자에게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흑암은 고난과 환난을 가리킨다. 그것은 질병이나 경제적 궁핍, 혹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홍수 등의 사회적 재난을 가리킬 것이다. 경건한 성도에게도 고난은 있으나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 구원과 회복의 빛이 비췬다. 그는 질병으로부터의 치료, 일용할 양식의 공급, 환경적 평안까지 얻는다.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자는 잘 될 것이다. 잠언은 말하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했다(잠 11:24-25). 본문 5절 끝에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라는 원문의 뜻은 법정에서의 송사에서 잘 견딘다는 뜻인 것 같다(BDB, NASB).
    우리는 정직하고 의롭고 너그럽고 자비롭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자가 되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늘 누릴 것이다.
    [6-8절]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본문은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라고 말한다. 경건한 성도도 고난 중에 일시적으로 요동할 수 있다. 다윗도 엘리야도 고난 중에 잠시 그러하였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는다. 그는 믿음을 잃지 않고 소망을 잃지 않고 완전히 망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천국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는 세상에서 때때로 무시와 멸시와 비방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원히 기억하시고 또 다른 성도들도 그를 기억할 것이다.
    본문은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흉한 소식’이란 지진, 기근, 무서운 전염병, 전쟁 등의 소식이다. 사람들은 이런 때 두려워 떨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굳게 정한다. 하나님께는 보호함이 있다. 시편 91:1, 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또 하나님께는 영원한 생명도 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0:28).
    본문 8절 하반절은 또 성도들이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며 대적자들을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롭게 살고 그 계명을 즐거워하며 힘써 행하자. 그러면 우리도 환난 중에 두려워하지 않고 요동치 않을 것이다.
    [9-10절]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구제에도 힘쓴다. 그는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준다. 5절에서도, 그는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자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이며 구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제할 때 너그럽게 해야 한다(신 15:7-8, 10). 또 예수께서는 우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라고 하셨다(마 6:3-4).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구제하기를 힘쓰자.
    본문은 그러한 성도의 의가 영원히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이다. 구제하는 것은 의의 행위, 즉 의의 열매이다(고후 9:10). 구제를 힘쓰는 자는 그 의가 영원히 있을 것이다. 또 그의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라고 본문은 말한다. 뿔은 힘을 상징한다. 즉 의인은 쇠하거나 망하지 않고 영화롭게 번창할 것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또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악인은 의인의 형통함을 보고 한하며 이를 갈 것이다. ‘한한다’는 말은 마음이 상하여 고통스러워한다는 뜻이다. 악인은 자신을 반성함이 없다. 그는 끝까지 회개치 않고 오히려 의인을 미워하고 그를 향해 이를 간다.
    그러나 그는 소멸할 것이다. 그의 돈도, 건강도, 권세도 없어질 것이다. 그의 소욕도 멸망할 것이다. 그가 의인이 망하기를 소원했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이기기를 소원했지만, 그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소원을 다 폐하시고 오히려 그의 두려워하는 일이 그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자. 특히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기를 힘쓰자. 우리는 결코 악한 자가 되지 말자.
    113편: 영원히,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함
    [1-4절]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본문은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들은 영원자존(永遠自存)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고 찬양해야 한다. 찬송은 정직한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시 33:1).
    본문은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을 몰랐고 죄 중에 살며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었으나, 이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케 하신 것도 알았다(사 43:7, 21; 엡 1:6, 12, 14).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 갈 죄인들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영원히 돌리자(계 5:13).
    본문은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다. 그는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그는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본문은 또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강대한 나라들 위에, 모든 존귀한 왕들 위에 높으시다. 그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찬양하자. 온 세상에 모든 나라의 성도들은 다 하나님을 찬양하자.
    [5-9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본문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하심과 능력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위에 거하시는 자시지만, 자신을 낮추셔서 하늘과 땅의 일들을 살피시며 통치하신다. 그는 온 우주의 왕이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비교할 자가 누구인가?
    특히 그는 가난한 자를 흙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때때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었다. 요셉은 애굽에서 10여년의 긴 종살이를 하였었고 다윗도 10여년 간이나 피신하며 다니는 긴 세월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한 사람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잉태치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시고 자녀들의 즐거운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출산은 여자에게 복된 특권인데 잉태치 못하니 열등감과 수치감을 가졌을 여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들을 얻고 즐거움으로 그들을 안는 자가 되었다. 한나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사무엘 대신 세 아들과 두 딸을 얻었다(삼상 2:21).
    고난은 성도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성도에게서 모든 인격적 불순물을 제하여 거룩하게 만들며 그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며 또 겸손한 인격이 되게 한다(시 119:67, 71; 고후 1:9; 12:7).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얼마 동안 고난 중에 두시다가 그를 건지시고 그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능력을 증거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모든 죄를 버리고 회개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기대하자. 또 하나님을 찬송하자.
    114편: 출애굽시대
    [1-8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 . . .
    본 시편은 출애굽 시대에 대해 말한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을 보호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셨고 능력의 손으로 그들을 도우셨고 그들을 위로하셨다.
    시편 저자는, “바다는 그것을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산들은 숫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양같이 뛰었도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너희 산들아 숫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양같이 뛰놂은 어찜인고?”라고 말한다. 홍해는 그들의 출애굽 행진에 처음 만난 큰 장애물이었고 요단강은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제거해주셨다. 홍해는 갈라졌고 요단강도 그러하였다.
    또 무감각해 보이는 산들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그 앞에서 어린양처럼 크게 진동하며 떨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장정 60만명의 이스라엘 회중에게 매우 부족했을 물을 반석에서 솟아나게 하시며 못과 샘이 되게 하셨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라고 외친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전 3:16).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 앞의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따르자.
    115편: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함
    [1-3절]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적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님을 강조하여 말한다. 그는 두 번이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임을 분명하게 아뢴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고전 10:31) 살든지 죽든지(롬 14:7-8)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또 그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이유는 그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택하신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은 끝까지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방인들이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앗수르 왕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부르짖었던 히스기야의 믿음도 같았다(사 37:17).
    시편 저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는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고 기도하자.
    [4-8절]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방인의 우상은 신이 아니다. 그것들은 금이나 은, 나무나 돌이며 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다. 그런 물질은 신일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이 없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한다.”
    그것은 아무 힘이 없다. 그것은 사람을 도울 수 없고 인간의 삶 속에 무슨 일을 행할 수 없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다. 악한 영들이 있다. 마술사나 무당은 악한 영들과 교통하며 신비한 일을 행하기도 한다. 애굽왕 바로의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였다(출 7:11-12).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제한적이다. 애굽의 술객들은 그 술법으로 이를 내게 하지 못했다(출 8:18). 또 그들은 도덕성이 없다.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도덕적인 영들이지만, 악한 천사들은 악하고 거짓되고 불결한 영들이다.
    참 하나님은 금이나 은, 나무나 돌 같은 물질이 아니고 영이시다(요 4:24). 그는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고 말씀하시고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도덕적인 영이시다.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그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고 참으로 우리를 도울 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상들을 의지하는 자는 헛되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그 우상에게서 아무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참 신이 아니며 생명 없는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상들의 헛됨을 바로 깨닫고 또 다른 이들에게 일깨우자. 우리는 우리를 참으로 도우실 수 있는 참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전파하자.
    [9-11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아론의 집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그 언약의 표인 할례를 받은 자들이다. 아론의 집은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다. 오늘 신약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 자들이다(벧전 2:9).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에 대해 말한다. 그는 사람이 은과 금과 나무와 돌로 만든, 생명 없고 사람에게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는 우상들과다르다. 여호와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 이름의 뜻대로 ‘영원히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며 그에게는 영생이 있다.
    특히 그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저자는 그가 우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심을 세 번이나 반복해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건강, 죄사함과 의, 평강과 힘과 위로를 주신다. 또 그는 우리를 원수들 즉 마귀와 악한 자들과 세상의 죄악된 풍조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신다. 그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 강조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 즉 그의 긍휼과 능력을 그저 믿는 것이다. 물론,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 참으로 믿는 자는 의와 선과 사랑을 행할 것이다(갈 5:6).
    우리는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 곧 영원히 스스로 계시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를 의지하자. 또 그를 사랑하며 순종하자.
    [12-15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신다”고 말한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을 가진 하나님 명칭이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自存者)이시다. 그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시다(15절).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만복의 근원이시다. 인생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분뿐이시다.
    그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짐승들을 생각하셔서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므로 물이 감하였다(창 8:1). 하나님께서 라헬과 한나를 생각하시므로 그들이 잉태하였다(창 30:22).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를 생각하셔서 복을 주신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 그는 이스라엘 집에 복을 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그는 아론의 집에 복을 주신다. 아론의 집은 구약의 성전 봉사자들인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신약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그는 큰 자나 작은 자를 물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신자들에게 복을 주신다.
    여호와께서는 성도들과 그 자손들을 번창케 하신다. 그것은 영육으로 그러하다. 그는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믿음의 성장, 인격의 성화와 성숙을 주시며 육신의 건강, 물질적 여유도 허락하신다. 수적인 증가도 하나님의 주시는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영육으로 복 주시고 번창케 하셨다(창 22:17; 26:12-14).
    우리는 영원자존하신 여호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셔서 복 주시고 번창케 하심을 믿고 구하고 기대하자.
    [16절]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본문은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고 말한다. 하늘은 별들이 있는 우주 공간 전체를 가리킨다. 아홉 개의 유성들이 해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것을 태양계라고 하는데 이 태양계는 거대한 우주 공간이다. 1000억개 이상의 별들이 모여 한 무리를 이루는데 이것을 은하계라고 부른다. 그 직경은 약 10만 광년이라고 한다. 1광년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말하는데 약 9조 킬로미터이다. 그러면 10만 광년은 얼마나 먼 거리인가? 그런데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수백만 개 이상 혹은 수십억 개가 있다고 한다. 우주는 참으로 거대하다. 인간은 수천 년 역사에 겨우 달이나 화성과 목성 같은 가까운 유성들에 우주 탐사 로켓을 쏘아 올린 정도이다. 하늘은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신비의 세계이다.
    본문은 “땅은 인생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산과 들과 바다와 강들을 관리할 권한을 주셨다. 사람들은 논과 밭을 가꾸어 곡식과 채소와 과일을 수확한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산에서는 금은동철을 캐낸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은 사람들이 가꾸고 집을 짓고 일하고 사는 터전이다.
    “땅을 인생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특히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땅에서 복을 누리게 하셨다는 뜻이 있다. 앞절들에서 말씀한 하나님의 복은 성도들이 땅에서 누릴 복을 포함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복은 천국이지만, 우리는 땅에서도 하나님의 복 없이 살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받으며 산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명령과 도를 행하면 그가 주신 땅에서 복을 누릴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신 5:32-33; 11:8-9; 28:8-12).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섬기자.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며 복을 누리자.
    [17-18절]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생명은 참으로 귀중하다. 그러나 사람은 그 가치를 잘 모르다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비로소 그것을 깨닫는다. 생명과 죽음은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이다. 모든 생물은 생의 애착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시 36:9). 그는 “생수의 근원”이시다(렘 2:13). 그 속에 생명이 있고(요 5:2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딤전 6:16). 그는 “만세(萬歲)의 왕”이시다(딤전 1:17).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질서 속에 있지 않았고, 인간의 범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온 침입자와 같다.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죽은 자의 시신은 말하지 못한다. 그는 땅에 묻힌다. 사람이 모인 곳은 항상 시끌벅적하지만, 시신이 묻힌 공동묘지는 조용하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또한 실상, 영적으로 죽은 자들, 즉 거듭나지 못한 자들도 마음으로 진정한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지 못한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목소리로 찬송할 수 있고 찬양대 봉사도 할 수 있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오직 거듭난 자들, 즉 구원얻은 자들만 하나님께 진심의 찬양을 올릴 수 있고,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고 영육으로 산 자임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죽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산 자답게 하나님을 힘써 찬송하자.
    116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함
    [1-4절]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셔도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섬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자요 섭리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니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에 평생에 그에게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기도는 성도의 의무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표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에게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일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또한 성도의 특권이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의 모든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성도는 기도로 세상을 사는 자이다.
    성도는 특히 고난 중에 기도한다. 시편 저자는 “사망의 줄(혹은 고통)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라고 말한다. 성도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며 그것을 받는다.
    우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항상, 평생 그에게 기도하자. 특히 고난의 날에 두려워하지 말고 그에게 기도하자.
    [5-8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라고 말한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도덕적이시다. 그는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시지만,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속성, 특히 그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한다. 본문의 ‘어리석은 자’라는 원어(페사임 םיאּ)는 ‘어리석은 자’라는 뜻도 있지만, ‘단순한 자, 순진한 자’라는 뜻이다(KJV, NASB, NIV). 순진한 자는 악의 유혹에도 쉽게 빠지며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진한 자를 지키신다. 시편 저자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그가 낮게 되었을 때, 즉 고난 중에 있었을 때 그가 그를 구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시편 저자는 이제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라고 말한다. 평안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주요한 복이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포하셨다(요 14:27; 20:21). 사도들은 그 서신들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평안을 기원하였다(롬 1:7; 고전 1:2; 벧전 1:2; 벧후 1:2). 성도는 고난 중에 평안을 잠시 잃기도 하지만, 즉시 평안을 회복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후대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구체적으로,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은혜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자. 고난 중에 기도하자. 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9-14절]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편 저자는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는 이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곧 경건이다. 그것이 말씀과 기도의 생활이며 순종과 회개의 생활이다. 그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구원을 체험했으므로 이런 결심을 한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간증한다. 그는 자신이 큰 곤란을 당하였고 경겁 중에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고 말했었다. 물론 그것은 좀 과장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고난에서 건져주셨던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말한다.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비교할 만한 보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억만 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편 저자는 그 보답으로서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체험한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하고 찬송하며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또 그는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서원은 대개 환난 날에 하는 약속과 결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그 서원을 갚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목숨이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보답하여 찬송하며 순종하자.
    [15-19절]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 . .
    시편 저자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았었다. 그는 지금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았고 죽음을 겁내지 않고 있다. 성도의 죽음은 짐승의 죽음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귀중하게 생각하신다. 성도의 죽음은 결코 슬프거나 허무한 사건이 아니다. 성도의 죽음은 그의 생의 완성이며 결산이며 열매이다. 성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간 후에 죽음을 맞는다. 세상에서 행한 그의 선행은 좋은 상을 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죽음은 특히 그의 영혼이 천국으로 이동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순간이 혹 고통스러울지라도 참으면, 그는 깰 때 천국에서 일어날 것이며, 천사들은 그의 입성(入城)을 환영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공언하며 고백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결박을 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의 결박, 불행의 결박, 사망의 결박을 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죄사함과 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영생을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예루살렘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 정(庭)에서 내가 갚으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마다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에게 한 서원을 갚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잘 준비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자답게 순종과 감사로 살며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갚자.
    117편: 모든 나라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1-2절]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 . . .
    참된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인 동시에 사랑의 고백이다. 누가 찬양할 것인가? ‘모든 나라들’과 ‘모든 백성들’이 찬양할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온 세계를 포함하는 말이다. 그것은 세계복음화의 전망을 보여준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는 신약 시대인 오늘날 그것의 실현을 본다. 이사야 11:9,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박국 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누구를 찬양할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여호와는 영원자존자이시다. 그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그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창 1:1)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던 자이시다. 그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그가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시 90:2).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왜 찬양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망과 불행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심을 말한다. 그의 진실하심이란 그의 인자하심과 구원하심이 변함 없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적 구원 경륜, 즉 세계복음화의 비젼을 깨닫고, 또 그의 크신 인자하심과 영원하신 진실하심을 깨닫고 그를 찬양하자.
    118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모퉁잇돌로 삼으심
    [1-5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편 저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언약 백성 이스라엘, 하나님을 섬기는 아론의 집 제사장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가 포함된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인 신약 성도도 포함된다.
    시편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는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영원하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악을 행치 않으시고 좋은 것을 주시고 좋은 길로 이끄시며 악에서 건져주신다. 또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와 허물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회개할 때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
    시편 저자는 특히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구체적인 한 예이다. 그는 고통 중에 있었다. 성도는 세상에서 원수들로 인한 마음의 고통도 있고 육체적인 질병에도 떨어지며 경제적 궁핍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여러 가지 고난의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조를 요청하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를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광활하고 편안한 곳에 세우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의 영원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리자. 우리는 또 고통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6-9절]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편이심을 확신한다. ‘내 편’이라는 말은 ‘나를 위하시고 도우시고 지지하시고 옹호하시고 지키신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는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라고 말한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때 생기는 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를 위하신다(롬 8:31-32).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하면 이런 확신을 잃어버리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이 되심을 느낄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그의 편이시라는 확신 속에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한편인 자를 미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셈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상당한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성도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라고 말한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표현은 그를 의지한다는 뜻이며, 그런 자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그 일을 고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낫다고 한 것은, 사람의 힘은 유한하나 하나님의 힘은 무한하시며, 또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 그가 하나님을 신뢰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다고 한 것도, 방백들의 권세는 유한하고 일시적이나 하나님의 권세는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편이심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롭게만 살자. 특히 환난 날에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10-14절]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 . .
    본문에 ‘에워쌌으니’라는 말은 ‘에워쌌으나’라고 읽어야 뜻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시편 저자는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나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나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나라는 때때로 주위의 이방나라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다. 성도는 때때로 많은 대적자들의 비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도우시고 역사하심으로 그들을 이길 것이다. 신명기 28: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시편 저자는 또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윙윙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에워싸 독침을 쏘려 하는 무서운 벌떼같이 원수들이 그를 에워싸지만, 가시덤불의 불이 요란하게 타나 오래가지 못하고 곧 꺼지듯이, 그들의 공격도 그러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라고 말한다. 원수들은 그를 말로, 폭력으로 넘어뜨리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고 원수들을 물리쳐 주셨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자들이 벌떼같이 많을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모든 일을 아뢰며 올바르게만 살자.
    [15-18절]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 . .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비록 완전한 의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긍휼로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이다. 성도는 의인으로 불린다. 시편 저자는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기쁨이다. 원수들의 비난과 핍박과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의 슬픔과 두려움은 변해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도 기쁨을 동반한다(롬 5:2-3; 빌 4:4).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의 구원이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으로 말미암은 것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오른손은 권능의 오른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권능을 베푸셔서 의인을 해치는 자들을 벌하시고 그를 구원하셨다.
    시편 저자가 그 다음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또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의 징책을 받아 거의 죽을 지경에 떨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5절에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구원하여 주셨고 그는 기쁨을 얻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내가]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의 일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간증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람은 체험한 것이 있어야 남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다. 받은 것이 있어야 남에게 무엇을 바르게, 힘있게 전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만 살자. 고난의 징책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오른손을 확신하고 체험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는 자가 되자.
    [19-21절]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 . .
    시편 저자는 ‘의의 문’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예루살렘성전 문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그 문을 ‘의의 문’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 문이 성도가 의를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성전 문 자체가 의를 주는 것은 아니다. 죄인이 그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뿐이다. 구약의 짐승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상징했고 구약성도는 신약성도와 똑같이 그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 문은 또한 ‘여호와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그 문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가 제공하시므로 죄인이 들어가 의를 얻는 문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자랑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언약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신을 말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이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갈 2:16). 구약 백성도 하나님이 주신 의를 확신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시편 저자는,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특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기 때문이며 그를 심한 고통 중에서, 죽을 것 같은 곤경에서 구원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의롭다 하신 자들을 위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곤경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구원을 체험한 자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릴 것이다. 우리도 항상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22-23절]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으실 것을 예언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고 배척했고 그를 정죄하여 죽였다.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유월절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집뜰에 모여 그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였고(마 26:3-4), 유월절 새벽에 그들은 그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마 27:1-2). 또 그 날 그들은 백성을 부추겨 빌라도에게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게 하였다(마 27:22-23). 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거절했고 미워했고 배척했고 죽였다.
    그러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예수 그리스도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머릿돌은 건물에 요긴한 기초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기초석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이 구절이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말씀하셨다(마 21:42; 막 12:10-12). 사도 베드로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증거하였다(행 4:11). 또 그는 그의 서신에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하였다(벧전 2:4).
    시편 저자는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그는 실패처럼 보이는 일을 승리의 일이 되게, 사람들의 심히 죄악된 사건을 하나님의 의의 방법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신기한 일을 행하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자. 우리는 악한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자.
    [24-26절]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편 저자는,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고 말한다. 이 날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날, 곧 메시아의 부활의 날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다. 그것이 주일(主日)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호산나’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원수들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원일 뿐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형벌인 죽음과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또 그 구원의 결과는 형통이다. 그것은 평안, 건강, 물질적 유여를 포함하며, 영생과 영광의 나라 천국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것은 그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을 포함한다(마 21:9; 23:39). 메시아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이시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의 일과 영광을 위하여 천국에서 세상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그는 참으로 복된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뿐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르는 그의 모든 제자들과 성도들도 복을 얻을 자들이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온 모든 예배자들이 복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또 세상에서 구원과 형통을 믿고 구하며, 우리가 행복자임을 알자.
    [27-29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비추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구절은 “하나님은 여호와시라”고 번역하는 것(KJV)이 나은 것 같다. ‘여호와’는 영원자존자, 주권자, 언약이행자, 은혜를 베푸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추셨다고 말한다. 무엇을 비추셨다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빛을 비추셨다는 뜻일 것이다. 그 빛은 죄사함과 구원, 평안과 건강과 영생을 주시는 빛이시다.
    시편 저자는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희생제물을 줄로 매어 끌고 와서 제단 뿔에 매어두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다. 제단 즉 번제단은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고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곳이다. 번제단의 뿔은, 드려지는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되며 제사 드리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됨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편 저자는 또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두 번이나 부르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고백한다. 그것은 죄사함과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한 관계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의 도우심과 구원과 능력의 체험을 말한다. 그 체험은 또한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빛을 항상 구하자. 또 그의 선하심을 늘 체험하도록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친밀한 관계를 항상 유지하자.
    119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
    시편 119편은 8절씩 단위로 된 22개의 문단으로 되었고, 각 문단 8절들의 첫글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의 순서대로 동일하다.
    [1-8절]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행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도덕적 온전함을 원하신다. 우리는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불의를 행치 말고 주의 도를 행하며 그것을 근실히 지키고 우리의 길을 굳게 정하고 그의 모든 계명에 주의하고 그의 의로운 판단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온전한 성도의 모습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복됨을 강조한다. 그는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하며 또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그것이 의인이 누리는 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행하자.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그의 말씀에 주의하며 그 계명을 근실히, 부지런히, 굳게 지키자.
    [9-16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청년 성도의 생활의 주요 목표는 행실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인격적, 도덕적 성숙이 조금 더 나아지겠지만, 젊을 때는 좀더 실수와 연약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라고 말한다. 죄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의 행실을 깨끗이 하는 것 곧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청년 성도가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시편 저자는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그의 계명에 거하게 될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범죄치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두는 수밖에 없다. 또 그는 하나님께 그의 율례를 가르쳐 주시기를 구하였다. 또 그는 하나님의 입의 모든 규례를 그의 입술로 선포하였다. 가르치는 것은 배운 것을 확실케 하는 좋은 방법이다. 또 그는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그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고 그의 법도를 묵상하였고 그의 도에 주의하였으며 그의 율례를 즐거워하였고 그의 말씀을 잊지 않기를 결심하였다.
    성도의 삶의 일차적 목표는 행실을 깨끗이 하고 범죄치 않는 것이다. 그 중요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을 따라 삼가는 것이다.
    [17-24절]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 . . .
    시편 저자는 고난의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는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가 지금 죽음의 위험 속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죽을병으로 고생하든지 원수들로 인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또 그는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았고, 또 사람들에게 훼방과 멸시를 당했다. 그러므로 그는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이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후대하여 살게 하시면 그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고백했다. 또 그는 “내 눈을 열어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계명을 그에게서 숨기지 마시기를 하나님께 구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라고 했다. 또 그는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라고 말했다.
    성도가 고난 중에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라고 말하며, 또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우리는 극심한 고난 중에도, 사람들의 훼방과 멸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며 지키자. 거기에 기쁨과 승리가 있다.
    [25-32절]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의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는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표현했다. 또 그가 자기의 행위[길들]를 고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족한 행위들과 고난의 걸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또 그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해 녹사오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내 영혼이 슬픔 때문에 흐느끼오니”라고 번역하는 것(NASB)이 더 나아보인다. 그는 원수들의 훼방 때문에 심적 고통이 컸던 것 같다(22-23절). 그는 거짓 행위[길]에 빠질 위험이 있었고 수치를 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이런 고난의 형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길을 구하였다. 그는 거짓되고 죄악된 사람의 길과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의 길을 대조하며 바른 길을 강조한다. 그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또 그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거짓된 길]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진실한, 확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라고 말하며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꼭 붙들었사오니],”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길, 바르고 확실한 길을 택하고 꼭 붙들고 그 길로 달려가자.
    [33-40절]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완전한 선생님이시다. 또 그는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사모해야 한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 목적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길]으로 행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전심으로 지켜야 한다. 또 그는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라고 말한다. ‘세운다’는 말은 ‘견고케 한다’는 뜻이다. 주의 말씀이 그의 삶 속에 견고케 되기를 구한 것이다.
    그는 또한 탐욕과 허탄한 것을 멀리하기를 원한다. 그는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탐욕과 허탄한 것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악이다.
    시편 저자는 또 “주의 도에[도 안에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의에[의로 말미암아]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소성한다’는 말은 ‘심신의 회복과 부흥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또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탐욕과 허탄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말씀을 배워 그 말씀을 끝까지, 전심으로 지키자. 또 그로 말미암아 새 힘 얻기를 구하자.
    [41-48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 없이 지키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라고 이어서 말한 것을 보면 그는 그를 훼방하는 자들로부터 구원을 얻기를 구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심한 비방으로 마음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또 그는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원수들의 비방 때문에 자유롭게 생활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지도 모를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면 자유롭게 행하며 수치를 모면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붙들고 앙망하며 그것을 영영히, 끝없이 지키기를 결심하였고 또 그것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는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도하자. 우리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붙들고 지키기를 결심하며 그것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자.
    [49-52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그로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약속하는 소망의 말씀이다. 그는 또 하나님의 말씀이 곤란 중에 위로가 되었고 그를 살리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환난과 고난 중에 위로의 말씀이다. 교만한 자가 그를 심히 조롱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성도의 승리의 비결이다. 그는 하나님의 옛 규례를 기억하며 자신을 위로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함이 그의 위로가 되었다.
    [53-56절]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나의 나그네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해, 그들의 악행들을 인해 맹렬한 분노에 잡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그네된 인생길의 거처에서 하나님의 율례는 그의 노래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기쁨과 위로와 힘이 된 것이다. 또 그는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라고 말한다. 밤은 해이해지거나 두려움과 불안을 줄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는 밤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 그러므로 그는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소유는 장차 불타 없어질 땅의 재산보다 값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가 됨을 깨닫고 체험하자. 또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지키자.
    [57-59절]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그의 분깃 곧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고백한다. 또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긍휼히 여김받기를 기도한다. 사람이 평안과 복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밖에 없다. 또 시편 저자는 자기 행위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발을 돌이켰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의 부족하고 잘못된 행위를 고치고 하나님의 교훈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회개를 원하신다.
    [60-64절]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 지킴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였고 지체치 아니하였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지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악인의 줄이 그에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한다. 성도가 그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면 승리할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를 인해 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이 세상이 무법천지가 아니고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의인들에게는 큰 행복이다. 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와 그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친구라고 표현한다. 참 우정은 참 믿음에서 가능하다. 또 그는 하나님 말씀 배우기를 원한다.
    우리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자신의 부족을 반성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의 말씀을 잊지 말고 그것을 신속히 지키자.
    [65-67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그의 종을 선대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긍휼로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심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믿었고 ‘명철’(투브 타암 ם בוּט) 곧 ‘선한 판단력, 분별력’과, ‘지식’을 그에게 가르쳐주시기를 구하였다. 고난은 그에게 유익하였다. 그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과거를 반성하고 계명을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68-72절]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선을 행하신다고 말하면서 그의 율례로 그를 가르치시기를 구한다. 또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그를 치려 하였지만, 그는 감정적으로 사람에게 대응하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겠다고 결심한다. 악인들의 마음은 살쪄 지방 같지만, 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였다. 그는 다시 고백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질병이나 궁핍, 대적자의 비방이나 전쟁 등의 고난은 그 자체로는 힘든 일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고 그 말씀대로 행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깨달은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 그에게 천천금은보다 낫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우리를 선대하는 자이시다. 우리의 고난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며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해준다.
    [73-75절]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손이 그를 만드셨고 형성하셨으므로 그의 계명도 깨닫고 배우게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육의 삶을 다 주관하신다. 또 시편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그를 보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진실한 형제를 볼 때 기쁨을 얻는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우시다고 고백하면서 그가 자신을 괴롭게 하심이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의 공의와 진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76-80절]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교만한 자가 무고히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저희로 수치를 당케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의 증거를 알리이다.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에 완전케 하사 나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의 위안이 되고 그의 긍휼하심으로 그가 살게 되기를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을 기도한 것이다. 그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법을 그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교만한 자들은 무고히 그를 엎드러뜨렸으나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그의 법도를 묵상한다. 그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증거를 아는 자들로 그에게 돌아와 교제케 하시기를 구한다. 그는 또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행함으로 완전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가 그의 긍휼로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알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고 즐거워하고 순종하며 실천하기를 결심하며 힘쓰자.
    [81-84절]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중의 가죽병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나이다.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
    시편 저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있다. 참된 믿음은 인내를 동반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안위하시겠나이까?’라고 말하였고 그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였다. 그는 고난 중에 참고 하나님의 말씀을 앙망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연기 중에 검게 그을린 가죽병같이 심신으로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율례를 잊지 아니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괴로움 중에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라고 아뢴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한다.
    [85-88절]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하나님의 법을 좇지 않는 교만한 자들은 그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고 무고히 그를 핍박하였다. 그는 그들이 세상에서 그를 거의 멸하였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신실하며 그가 그의 법도를 버리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 그는 “나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심신으로 회복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피곤하고 핍박과 위험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붙들고 그의 구원과 회복을 기도하자.
    [89-91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말한다. 그것은 천체의 제도와 그 규칙적 운행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또 그는 그의 성실하심, 곧 진실하고 확실하심도 영원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다고 말한다. 안정된 땅이기 때문에 우리는 땅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시편 저자는 이와 같이 만물, 곧 하늘과 땅 전체,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변함 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92-96절]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를 찾았나이다.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이 그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그는 고난 중에 멸망하였을 것이라고 간증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살게 하셨기 때문에 그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않고 지키겠다고 말한다. 사람이 영육으로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또 그는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를 찾았나이다”라고 아뢴다. 하나님의 백성된 표는 그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 악인이 그를 멸하려고 엿보았으나 그는 하나님의 증거를 생각하겠다고 결심한다. 또 그는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에 속한 모든 완전한 것은 다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내용이 풍부하고 그 효력이 영원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닫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묵상하며 사랑하고 고난 중에도 가까이 하고 붙들고 순종하자.
    [97-104절]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 . .
    시편 저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말씀을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그는 또 하나님의 계명이 항상 그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그를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하며, 그가 하나님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그의 명철이 그의 모든 스승보다 낫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므로 그의 명철이 노인들보다 낫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그 어떤 인간적 지혜보다 낫고 그의 어떤 선생의 가르침보다 낫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사람은 없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의 발을 금하여 계명을 어기는 모든 악한 길, 즉 우상숭배와 불효와 미움과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말과 탐심 등의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한다. 성도는 악을 멀리하도록 그의 발걸음을 항상 조심하고 제재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치셨으므로 그가 하나님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또 그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은 최상의 맛을 가진 말씀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치 않은 자는 말씀의 맛을 모른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도로 인해 그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 모든 불의하고 악한 행위를 미워하겠다고 말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종일 묵상하자.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단 것을 체험하자. 또 그 지혜의 말씀을 힘써 지키자.
    [105-112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시편 저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인생의 여정에 죄악된 유혹, 의심, 슬픔, 낙심, 고난 등의 어두운 날들이 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의와 선을 지시하고 믿음과 확신을 주고 위로와 기쁨과 힘을 준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키고 안 지키고 해서는 안 된다.
    시편 저자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신으로 회복되고 구원얻기를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규례로 그를 가르치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그의 생명이 항상 원수들의 위협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았다. 악인들은 그를 해치려고 올무를 놓았으나 그는 하나님의 법도에서 떠나지 않았다. 육신의 해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 짓는 것이며 그로 인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즐거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요 경건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율례를 끝까지 행하려고 그의 마음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사람은 마음을 어디 두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발에 등으로 삼자.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자. 그 말씀을 우리의 즐거움으로 삼고 힘써 행하자.
    [113-120절]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저희 궤사는 허무함이니이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
    시편 저자는 두 마음 품는 자, 곧 의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를 미워하였고, 또 행악자를 멀리하였다. 두 마음을 품는 자나 행악자는 권면의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성도가 그런 자들과 교제한다면 의심과 악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도 그의 율례를 떠난 자들을 다 멸시하시며 버리셨고 그들의 거짓 행위는 허무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실 것이라고 말한다.
    시편 저자는 오직 하나님을 은신처와 방패로 삼았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큰 복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고 두려워했다. 그의 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떨었고 그의 판단을 두려워하였다. 이것이 바른 성도의 모습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그를 붙들어 죽지 않고 살게 하시고 그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기를 다시 기도한다. 그러면 그는 악인들의 미움과 비난과 핍박과 해하려 함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도 두 마음을 품는 자나 행악자를 멀리하고 하나님만 은신처와 방패로 삼자. 또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며 기도하자.
    [121-128절]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주의 인자하신 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주의 율례로 내게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편 저자는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는다. 또 그는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그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과 그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때때로 더딘 것 같다.
    또한 시편 저자는 “주의 인자하신 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주의 율례로 내게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배우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은 행위의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또 그는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하실 때는 성도에게 교훈하시고 악인을 징벌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실 때를 가리킬 것이다.
    또한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금보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자.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고 사모하며 배우고 힘써 지키자.
    [129-136절] 주의 증거가 기이하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사람의 압박에서 나를 구속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들이 놀라운 내용들이며 그의 영혼이 그것들을 지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말씀하심, 성경의 예언과 성취, 그 기적들은 다 놀라운 일들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설이 어리석은 자들에게 비취어 깨달음을 준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복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즉 도우심과 구원으로 그를 향하셔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도한다. 또 그는 그의 행보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셔서 말씀대로 행케 하시고 아무 죄악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성도는 성경 말씀대로만 살고, 그것을 떠나고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죄악된 일은 버려야 한다. 또 그는 “사람의 압박에서 나를 구속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저자는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말한다. 말씀의 바른 지식이 경건의 시작이다. 또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그의 눈물은 시냇물같이 흘렀다. 그것은 의분의 눈물인 동시에 긍휼의 눈물일 것이다.
    성경 말씀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바르게 깨닫기를 사모하자. 또 우리의 행보가 그 말씀에 굳게 서고 죄악된 길에 서지 않기를 기도하자.
    [137-144절]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그의 판단들은 정직하시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시다, 즉 진실하고 믿을 만하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고 있으므로 그의 마음의 열심, 즉 그 진리를 전하고 옹호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열심은 그를 삼켰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다고 말한다. ‘정미하다’는 원어(체루파 הוּר)는 ‘단련되다, 깨끗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극히 순결하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그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자신이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지만 하나님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한다. 남에게 멸시를 당할 때 인간적으로 대응하기 쉬우나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교훈하신 대로 사랑과 긍휼의 원리로 행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다시 하나님의 의는 영원한 의요 그의 법은 진리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영원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도 그러하다.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또 하나님의 법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환난과 우환이 그에게 미쳤으나 하나님의 계명이 그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하며, 또 하나님의 증거들이 영원히 의로우시므로 그로 깨닫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의롭고 진실한 말씀, 순결한 말씀임을 깨닫고 그 말씀을 잊지 말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믿고 지키자.
    [145-151절]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를 지키리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악을 좇는 자가 가까이 왔사오니 저희는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시편 저자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시기를 구한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며 전심 기도는 큰 믿음의 표현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나 회개하며 순종을 결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를 지키리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저자는 또 새벽 전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랐다고 고백한다. 새벽은 사람에게 황금시간이다. 새벽기도는 정성과 자기 부정과 간절함의 표현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그의 눈이 밤이 깊기 전에 깨었다고 말한다. 그는 밤이 깊기 전에 말씀을 읽고 또 읽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유익과 복이 크다. 그는 또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라고 말한다.
    악을 좇는 자들이 그에게 가까이 왔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서 먼 자들이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와 가까이 계심과 그의 모든 계명이 진리임을 믿었다. 그는 예전부터, 아마 어릴 때부터 성경을 연구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알았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전심으로 또 새벽에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믿자. 성경을 묵상하며 그 진리를 믿고 행하자.
    [153-160절]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구원이 악인에게서 멀어짐은 저희가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궤사한 자를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나의 고난을 보소서”라고 말하며 또 그는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고난 중에 있고 그의 주위에는 그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다.
    시편 저자는 이런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다. 그는 “나를 건지소서,” “나의 원한을 펴소서,” “구속하소서”라고 말한다. ‘원한’이라는 원어(리브 בי)는 ‘송사’라는 뜻이다. 그는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는 말을 세 번 했는데, 그것은 심신을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건강과 힘과 위로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았고 그의 증거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사랑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구원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궤사한 자들’ 즉 ‘배신자들’(보그딤 םי)을 보고 슬퍼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소성케 되기를 기도하였다. 또 그는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강령’이라는 원어(로쉬 שׁא)는 ‘머리, 전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시며 의로우시며 영원하시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떠나지 말고 사랑하고 지키면서 하나님께 구원과 심신의 회복을 간구하자.
    [161-168절]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을 행하였나이다. . . .
    시편 저자는 핍박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는 방백들이 무고히 자기를 핍박하였다고 말한다. 161절,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또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랐다고 말한다. 166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경건한 성도도 고난을 당한다.
    시편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크게 즐거워하고 지극히 사랑하고 행하고 힘써 지켰다. 161절,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절,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절,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64절,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7절,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6절, “[내가] 주의 계명을 행하였나이다.” 167절,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 168절, “내가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함을 교훈한다.
    시편 저자는 이제 큰 평안을 확신하며 증거한다. 165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평안(솰롬 םוֹל)이라는 말은 심리적 평안, 육체적 건강, 물질적 안정과 여유, 환경적 평안 등을 다 포함한다. 이것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경건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고난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행하고 지키자. 약속된 큰 평안을 누리자.
    [169-176절]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찬송을 발할지니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지금 고난 중에 있다. 169절,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소서.” 170절,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73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174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175절, “내 혼을 살게 하소서. . .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176절,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 깨닫기를 원하며 그 말씀을 붙들며 그 말씀을 택하고 잊지 않았다. 169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71절,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173절,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176절,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도 그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였다. 170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하였다. 172절,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174절,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5절, “주를 찬송하리이다.” 성도의 즐거움의 찬송은 진실한 믿음의 표시일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며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자.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지키며 즐거워하면서 그렇게 하자.
    120편: 거짓과 불화로부터 건지소서
    [1-7절]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 . .
    시편 저자는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라고 말한다. 그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그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어주시되 그의 뜻에 맞는 우리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며 간구한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라고 말한다. 그의 주위에는 거짓말로 그의 심령을 괴롭히고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며 그의 생명을 해하려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며, 속이는 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선언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날카로운 화살로 그런 혀를 찌르시며 로뎀나무 숯불로 태우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6, 7가지 죄악 중에 거짓된 혀가 들어 있다(잠 6:17).
    시편 저자는 또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라고 말한다. 이방 세계의 특징은 미움과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그가 말할 때에 사람들은 그와 싸우려 하였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고 서로 사랑함이 그의 제자된 표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교훈하였다(롬 12:18).
    우리는 환난 중에 기도하며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자. 우리는 항상 진실한 말을 하고, 주의 제자답게 화평과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자.
    121편: 하나님께서 지키시리라
    [1-8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 . .
    시편 저자는 그의 도움이 올 ‘그 산들’(헤하림 םי)을 향해 눈을 든다고 말한다(KJV). 그가 말한 그 산들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임재의 영광을 시온산에 두셨다. 여호와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참된 도움이 되실 수 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로 바른 길을 벗어나게 하거나 마귀의 올무에 걸려 범죄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그는 피곤하여 졸거나 주무심이 없이 늘 깨어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전능하신 그는 항상 깨어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면 혹독한 더위도 혹독한 추위도 우리를 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셔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우리의 영혼을 지키실 것이다. 또 그는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직장 일도, 집안일도 지키실 것이며 미래의 일까지도 지키실 것이다.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께서 늘 깨어 우리를 지키시며 모든 환난에서, 아니 우리의 모든 일에서 영원히 지키시고 도우심을 확신하자. 물론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리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성도의 평안에 기본적인 조건이다.
    122편: 예루살렘을 사랑하며 축복함
    [1-5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1절의 원문은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내게 말하는 자들을 기뻐하였도다”라는 뜻일 것이다(NIV). 시편 저자는 혼자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뿐 아니라, 서로 권면하여 올라가는 일을 기뻐하였다.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요 찬송과 기도와 말씀과 교제가 있는 곳이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교회를 상징한다. 우리는 서로 권면하여 교회로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모임을 폐하지 말고,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5).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성은 복된 성이다. 성도들의 발은 그 성문 안에 선다. 시편 저자는 예루살렘성이 조밀한 성읍, 즉 집들이 밀집해 있는 성같이 건설되었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성은 본래 여부스 사람들이 살던 곳인데, 다윗이 그곳을 점령하여 다윗성으로 만들었다. 그 성은 본래 동서의 길이가 약 150미터, 남북의 길이가 약 400미터 정도의 작은 성이었다. 오늘날 확장된 예루살렘성도 동서나 남북의 길이가 1킬로미터 정도의 작은 성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은 그들의 규례대로 그리로 올라간다. 거기에 다윗의 왕궁이 있고 백성을 판단하는 보좌가 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 정치적, 행정적 중심지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살아야 했다.
    우리는 교회로 모이는 것을 기뻐하며 피차 권면하여 모이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자.
    [6-9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법궤가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찬양과 기도가 있는 곳이다. 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왕 다윗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평안을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평안과 다윗 왕가의 평안을 간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온 이스라엘의 평안이 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성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런 자에게가 아니고 누구에게 형통의 복을 주시겠는가.
    시편 저자는 또다시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에 평안이 있어야 하고 다윗의 왕궁에 형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성이 평안해야 온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평안할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성이 평안해야 성전도 평안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와 찬송과 기도의 생활도 잘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시대의 예루살렘성은 신약 시대의 교회와 비슷하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이 있고 찬송과 기도와 교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와 국가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선 교회의 평안과 형통을 위해 간구하며 또 교회를 사랑하자.
    123편: 멸시 중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함
    [1-4절]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시편 저자는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 아마 이방 사람들의 심한 멸시와 조롱을 당하고 있었다. 평안 중에 거하며 교만한 자들인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그 멸시와 조롱은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에 넘쳤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시편 저자는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으로 인한 심적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앙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세상을 통치하신다. 시편 저자는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종의 평안 여부가 주인의 손에 달렸듯이, 인생의 평안 여부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특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는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긍휼’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자마다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것이다.
    우리도 고난 중에, 원수들의 심한 멸시와 조롱 중에 하나님을 바라자. 생각나는 부족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간구하자.
    124편: 우리편에서 우리를 도우심
    [1-8절]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엄몰하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 . .
    시편 저자는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고, 사람들의 노가 마치 시냇물의 엄몰함같이 우리를 향해 맹렬하였고, 사람들이 사냥꾼처럼 우리를 잡으려 했다고 말한다. 사탄과 악령들, 그리고 그들의 이끌림을 받은 악한 나라들과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항상 핍박하였다. 신약교회는 유대인들과 로마 황제들의 핍박, 천주교회와 이슬람 제국의 핍박,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경험하였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편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노가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들의 이(齒)에 우리가 씹혔을 것이며, 우리는 올무에 걸려 사냥꾼 같은 그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올무를 끊어주셔서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우리를 도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는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하며 또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말한다. 아주 드물게, 순교하는 일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체험한다.
    이 세상은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노가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편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만 살아가자.
    125편: 하나님을 믿는 자는 요동치 않음
    [1-5절]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요동치 않게 하시고 두루 감싸며 지키실 것이라고 증거한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바다는 때때로 요동하지만, 산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서 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요동함이 없을 것이다. 또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원히 감싸며 보호하실 것이다. 또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업’은 ‘땅’이라고도 번역된다(NASB, NIV).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낙심하거나 범죄치 않도록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땅에 미치지 못하게 섭리하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선한 자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평강과 선을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와 죄악을 짓는 자를 동류로 여기시며 공의의 징벌의 대상으로 삼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악된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강 가운데서 요동치 않게 지키실 것이다.
    126편: 사로잡힘을 돌이키심
    [1-6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말한다. 파사왕 고레스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허락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큰 일(大事)을 행하셨다고 증거하였다.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은 세계복음화의 일을 예표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때에 입에 웃음이 가득하였고 혀에 찬양이 찼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기쁨을 주시는 자이시며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며(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이 충만한 나라이다(롬 14:17).
    시편 저자는 남은 포로의 귀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또 그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에는 때때로 눈물이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 눈물의 사역에는 반드시 결실의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구원과 세계복음화를 이루시며 그 일은 우리에게 기쁨과 찬양을 준다. 우리는 오직 눈물로 씨를 뿌리며 일하자.
    127편: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심
    [1-5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 . .
    시편 저자는 가정 건립에 대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표현한다.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결혼과 가정 건립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그가 허락하셔야 복되게 건립되고 그가 허락지 않으시면 실패할 것이다.
    사람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다고 다 성공하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 모든 인간의 수고가 헛되게 될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시편 저자는 말한다. 잠은 인간의 육신의 건강과 행복에 필수적 요소이다. 보약과 같은 단잠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녀들은 복된 가정의 모습이다. 시편 저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녀의 기원과 소유권과 의미와 양육의 원리를 잘 보인다. 하나님의 기업이요 상급인 자녀는 하나님의 교훈대로 양육되어야 한다. 또한 시편 저자는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자녀는 용사의 화살통의 화살같이 많아야 복되다. 다산(多産)은 하나님의 복이요 부모에게도 기쁨이다. 그것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영광과 사업을 위해 유익하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헛되지 않는, 복된 가정을 세우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단잠과 건강 유지, 또 자녀의 다산과 번창의 복을 누리자.
    128편: 복된 가정
    [1-6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그 도에 행한다’는 말은 ‘그의 교훈대로 산다’는 뜻이다. 인생의 행복의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 순종하는 데 있다.
    시편 저자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 안정과 유여와 형통의 복을 말한다. 복은 게으름에서 오지 않고 근면과 수고와 더불어 온다.
    시편 저자는,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정적 복을 가리킨다. 집안일을 하는 가정적인 아내와 아름답고 건강하고 희망적인 자녀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복, 즉 가정적인 복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속죄의 피가 있는 성전으로부터 얻는 영적인 복을 말하며, 오늘날 교회를 통해 얻는 복을 말할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평생에 누릴 영적인 복, 자자손손이 누릴 복, 또 평강의 복을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 교훈대로 사는 삶은, 물질적인 복, 가정적인 복, 교회적, 영적인 복, 평생의 복, 평강의 복을 포함하는 복된 삶이다.
    129편: 시온을 미워하는 자
    [1-8절]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 . .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시초로부터 이웃 나라들의 침략과 괴롭힘을 당해왔다. 시편 저자는,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라고 반복해 말한다. 또 그는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핍박자들의 오랜 핍박을 묘사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이었다. 성도의 세상의 삶은 고난의 여정이다. 성경은 의인이 고난이 많다고 말하며(시 34:19)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한다(딤후 3:1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승리하였다. 시편 저자는,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로 인한 것이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공의로 징벌하신다. 악인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 것이며 지붕의 풀같이 마를 것이다. 지나가는 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의 세상 생활에는 고난과 핍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로 인해 성도는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을 힘써 행하자.
    130편: 긍휼의 구원을 기다림
    [1-8절]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 . . .
    성도는 때때로 큰 환난 중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말한다. 성도가 살아계신 전능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큰 특권이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성도는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깨닫는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죄의 사유하심이 있고 거기에 인간의 피할 길이 있고 고난 중에도 구원의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로 그를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기다리며 바란다. 시편 저자는,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 약속의 말씀을 붙든다. 그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하나님을 더 기다린다고 반복해 말하며, 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외친다. 그는, 여호와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救贖)이 있고 그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는 큰 환난 중에 낙심치 말고 모든 일을 살아계신 전능자 하나님께 맡기며 그의 구원을 간구하자. 우리는 그가 우리의 죄악을 사유하심을 믿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131편: 큰일을 힘쓰지 않음
    [1-3절]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자학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바로 교만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미워하시며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벧전 5: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교훈하였다(롬 12:16).
    시편 저자는 또한,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한다.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올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아는 자는 그런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사람이 어떤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는 계획에 대해 그것은 허탄한 자랑이며 악한 것이라고 말하며(약 4:13-16), 그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약 4:15).
    시편 저자는 자신이 젖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음같이 그의 심령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바른 마음가짐이다. 일은 어머니가 다 하며 아이는 그의 품에 있기만 하면 되듯이, 하나님은 모든 일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우리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높은 마음을 버리고 큰일을 도모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맡은 일에 충실하자. 또 모든 일의 섭리자이신 하나님만 고요히 바라자.
    132편: 하나님의 성막을 사모함
    [1-9절]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사울왕의 총애 속에 공직을 시작했으나 10여년간 그의 칼날을 피해 피신생활을 해야 했고 사울이 전사(戰死)한 후에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힘든 과정을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른 후 먼저 하나님의 법궤를 시온성에 모셔왔고 하나님의 성막을 찾아와 그의 명하신 성막 제사와 예배 드리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고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성막 제사와 경배를 가장 크게,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는 드디어 하나님의 성막을 찾았다. 그는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직후 우선 법궤를 시온성으로 모셔왔었다(삼하 6:2). 그러나 그는 성막까지 찾아서 시온성으로 모셔와 법궤를 들여놓고 정상적인 성막 제사와 예배를 드리게 된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였다. 그는 에브라다에서 그것에 대해 들었고 나무 밭 혹은 야알의 땅에서 그것을 찾았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 앞에서 경배하기를 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라고 말하며, 또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고난 많은 세상에서도 법궤와 성막 중심의 삶, 곧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붙든 삶을 살아가자.
    [10-18절]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 . . .
    본문의 표현을 보면, 본 시편의 저자는 솔로몬인 것 같다. 그는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혹은 ‘다윗 때문에’)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아들을 그의 위에 두며 그의 후손도 영원히 그의 위에 앉으리라고 맹세하신 것을 지키시기를 간구한다. 물론 그 언약과 맹세는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교훈하신 증거를 지킨다는 조건 아래서 맺어진 것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 의무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시온을 복되게 하셨는지를 자세히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 성에 식료품의 풍족한 복을 주시고 가난한 자도 양식의 풍족함을 얻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 요소인 육신의 양식을 충족시켜 주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히시고 그 성도들은 즐거움으로 외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구원과 그 기쁨, 즉 영적인 복을 가리킨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서 뿔이 나게 하시고 등을 예비하실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 즉 능력의 구주를 보내시고 백성을 참된 빛, 곧 지식과 행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가리킨다. 또 원수들은 수치를 입을 것이며 메시아에게는 승리와 영광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시온의 복, 육신의 양식은 물론이거니와 영적 구원과 그 기쁨, 능력과 밝은 빛, 또한 승리와 영광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직 참된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아가자.
    133편: 형제가 동거함이 아름다움
    [1-3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 . . .
    시편 저자는 형제에 대해 말한다. 형제는 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들을 말한다. 그러나 영적인 형제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5:11에는,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형제와 형제 아닌 자를 구별할 수 있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우리는 서로 형제들이다.
    시편 저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에 대해 말한다. 사람이 연합하여 동거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첫째, 생각의 일치가 요구된다.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면 동행할 수 없고(암 3:3) 동거할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우상을 섬기는 자는 연합할 수 없다. 둘째, 겸손과 온유가 요구된다. 교만은 분열의 원인이다(빌 2:2-3). 셋째, 사랑과 용서가 요구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교훈하시면서 먼저 제자의 발을 씻어 주시는 본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용서의 뜻을 담고 있었다. 용서가 없이는 서로 사랑할 수 없다.
    시편 저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름답다’는 원어(나임 םי)는 ‘사랑스럽다, 기쁘다’는 뜻이다. 다툼과 분열은 보기 흉하고 슬픈 일이나 연합은 아름답고 기쁜 일이다. 또 시편 저자는 연합이 보배로운 기름같이 향기롭다고 표현한다. 또 그는 성도가 교제하는 시온에는 하나님의 영생의 복이 있다고 말한다.
    주 안에서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은 선하고 기쁜 일이다. 우리는 생각의 일치, 온유와 겸손, 사랑과 용서로 천국의 모습을 힘써 이루자.
    134편: 밤에 성소에서 하나님을 송축함
    [1-3절]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 . . .
    시편 저자는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한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두고 말한다. 신약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벧전 2:9).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밤에도 등불을 지켜야 했다(출 27:21). 밤은 피곤한 시간이다. 그러나 밤은 또한 조용한 시간이다. 우리는 낮에 하나님을 섬기며 밤에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시편 저자는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한다. ‘성소를 향하여’라는 원어(코데쉬 שׁ)는 ‘거룩함’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성소를 향하여’(NASB, LXX, Vg)나 ‘성소에서’(KJV, NIV)보다 ‘거룩함으로’(Targum) “너희의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뜻일 것이다. 손을 드는 것은 간절함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깨끗한 손을 들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딤전 2:8).
    시편 저자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말한다. 천지 창조자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며(시 96:5; 렘 10:11) 능력의 하나님이시다(롬 1:20). 그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영육의 평안과 형통과 영생을 주셨고 또 주실 것이다. 시온은 성전이 있는 곳, 곧 하나님의 언약과 속죄가 있는 곳이다. 우리가 받을 모든 복은 시온으로부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과 하나님의 언약과 그 은혜로부터 온다.
    우리는 밤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거룩한 손을 들고 그를 찬송하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주시는 영육의 복과 영생을 받자.
    135편: 살아계신 주권자 하나님을 찬송함
    [1-6절]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하나님의 전정에 섰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 . .
    시편 저자는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하나님의 전정에 섰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말한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물론, 하나님을 섬기려고 성전뜰에 모인 모든 백성이 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답다’는 원어(나임 םי)는 ‘사랑스럽다, 기쁘다’는 뜻이다.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는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기쁜 일이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해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라고 말한다. 창조와 선택과 구원의 목적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특별한 소유’라는 원어(세굴라 ה)는 ‘특별한 보화’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들을 특별한 보화로 여기셨다. 그는 우리를 택하시고 특별한 보화로 여기셨고 그의 독생자를 희생하셨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위대하시며 세상의 모든 신보다 크심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풍성함을 무엇에다 비교할 수 있으랴! 또 그는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데서 다 행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그의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는 섭리자이시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제외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 그의 은혜의 선택, 그의 위대하심, 그의 주권적 섭리를 깨닫고 묵상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자.
    [7-14절] 안개를 땅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 . . .
    시편 저자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안개를 땅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라고 말한다. 위대한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안개와 비와 바람, 즉 자연 세계를 주장하신다. 그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그것들을 일으키어 사용하기도 하시고 또 그것들을 제거하고 물러가게도 하신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를 주관하심을 말한다. 그는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 징조와 기사를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복에게 임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한다.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마지막 재앙으로 그는 모든 사람의 장자와 모든 짐승의 첫새끼, 특히 애굽 왕 바로의 장자까지 다 죽이셨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열국을 다스리심을 말한다. 그는 “저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열국을 다스리시는 한 증거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과 그 역사를 주장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시편 저자는 특히 여호와의 이름이 영원하시며 그가 자기 백성을 특별히 섭리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허물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징벌하시지만, 그들을 긍휼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하신 여호와께서 자연계와 인간 세계를 주장하시고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며, 특히 자기 백성을 돌보심을 깨닫고 그를 찬송하자.
    [15-21절]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 . .
    시편 저자는 열방의 우상이 헛됨을 증거한다. 그는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라고 말한다. 과연 우상은 나무나 돌로 깎거나 다듬어 만든 다음 금이나 은을 입힌 ‘사람의 수공물’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생명이 없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숨을 쉬지 못한다. 시편 115편에 보면, 우상은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내지 못한다고 덧붙여 말했다(시 115:6-7). 우상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만든 자나 우상을 의지하는 자는 다 헛되다. 우상은 실상 속임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여호와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는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며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특히 “예루살렘에 거하신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라고 말한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교회를 예표한다(요 2:21; 고전 3:16).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이방신들과 우상들이 헛됨을 알자. 또 우리는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고 그를 찬송하자.
    136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함
    [1-4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감사하라’는 원어(호두 וּדוֹה)는 ‘찬송하라’는 뜻도 내포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은 거의 동의어이다. 감사하는 것은 받은 호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본문에서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불렀다. 여호와는 영원자존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또 시편 저자는 그를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신(神)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많고 주(主)라고 불리는 자들도 많지만, 여호와는 신들 중의 신, 주들 중의 주, 참 하나님, 참 주이시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를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기이한 일 즉 기사(奇事)를 행하시는 자”라고 자주 표현한다(출 15:11; 욥 5:9; 시 72:14; 77:14; 86:10). 창조의 세계 전체가 그 사실을 증거하며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짧은 삶에서도 때때로 그의 기이한 손길을 체험한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본 시편 전체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의 섭리는 선하시다. 특히 그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그들의 죄를 사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시며 돌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마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크고 영원하심을 인해 그에게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해 그에게 감사와 찬송을 올리자.
    [5-9절]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 .
    시편 저자는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한다. 하늘은 광대하다. 지구가 속한 은하계는 1000억개 이상의 별들이 모여 있고 그 직경은 약 10만 광년, 즉 약 9조 킬로미터의 10만배의 거리라고 한다.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1000억개 이상이 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이 광대한 하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다.
    시편 저자는 또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한다. 지구는 거대한 공과 같은데, 바다가 70퍼센트이며 육지가 30퍼센트이다. 땅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산인데 높이가 8,848미터이며 가장 깊은 바다는 태평양의 괌 남서쪽 마리아나 해구인데 깊이가 약 11,000미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대한 땅과 물을 만드셨다.
    시편 저자는 또 큰 빛들을 지으신 하나님,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태양은 지구보다 약 109배 더 크며 가스가 불타는 불덩이이다. 그 표면의 온도는 약 5,500도이며 그 중심의 온도는 약 1,500만도라고 추정한다. 이 태양은 지구로부터 약 1억 5,000만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어도 지구를 밝고 따뜻하게 만든다. 달은 지구의 4분의 1정도의 크기로서 빛을 반사하여 밤에 지구를 은은하게 비친다. 별들은 주로 가스 뭉치로서 우주에는 약 2억조 개 이상의 별들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저 광대한 하늘과 땅과 바다, 태양과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겐 복된 선물들이다. 이 전능의 창조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셨고 큰 구원을 베푸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한다.
    [10-15절]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 . .
    시편 저자는,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심한 고역과 학대를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셔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들을 내리셨다. 애굽 왕 바로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 즉 모든 사람의 장자와 모든 짐승의 첫 새끼가 죽는 재앙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께 굴복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시편 저자는 또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지만,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평탄치 않았다. 그들이 첫 번째로 직면한 난관은 홍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그 홍해를 통과하였고 바로와 그 군대는 홍해에 엎드러져 다 몰살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가 자기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또 그들을 구원하신 후에도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생생하게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과 홍해를 통과한 것은 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자손들을 돌아보신 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편에서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고난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과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하셨고 인도하셨으며 모든 난관들을 극복케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셨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셨고 여러 난관들을 극복케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자비하심을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16-20절]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 . .
    시편 저자는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광야는 물이 없고 농사나 목축을 하기에 불편한 곳이다. 거기에는 생활의 불편과 불안정과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족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낮추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들로 광야를 잘 통과하게 하셨다.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았고 그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으며 그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
    시편 저자는 또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하나님께서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일과 바산왕 옥을 죽이신 일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가나안 땅에 접근한 이스라엘 백성은 큰 왕들과 전쟁을 해야 했다. 바산왕 옥 같은 이는 르바임, 즉 거인 족속의 남은 자로서 그의 철 침상은 길이가 약 4미터나 되었다(신 3:11). 그런 자들과 전쟁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두렵고 힘든 과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지키셨고 인도하셨다. 그들이 큰 왕들을 이긴 것도,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죽인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을 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 앞서 행하심으로 이긴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와 같이, 구원받은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며 큰 시험거리들을 만나며 영적 전쟁들을 치른다. 그러나 우리는 죄짓지 말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겸손히 하나님만 믿고 따르자.
    [21-26절]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 .
    시편 저자는,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땅의 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레 25:23). 땅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 즉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 때문에 그 땅을 빼앗아 그의 종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종이 가져야 할 덕은 온유와 겸손과 순종이며,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기념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비천한 데 처해 있었을 때, 즉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을 때나 이웃 나라의 지배를 받아 학대를 당했을 때,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대적에게서 그들을 건져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헤쳐 나올 힘을 없을 때 그들을 도우셨고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었다.
    시편 저자는 또,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까마귀 새끼가 그를 향해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 오락가락할 때 그것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이시다(욥 38:41). 그는 모든 생물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시다(시 104:27-28). 주의 말씀대로,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기르신다(마 6:26). 그는 자기 백성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함을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늘의 하나님께 우리 모두는 감사해야 한다.
    만물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고난 중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그의 인자하심을 인해 감사하자.
    137편: 시온을 가장 사랑함
    [1-6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 . . .
    시편 저자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말한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의 임재와 그에 대한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은 시온을 인해 눈물을 흘릴 것도 없겠으나 경건한 이 시편 저자는 시온을 사모하기 때문에, 시온의 황폐함을 슬퍼하기 때문에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우리는 교회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
    시편 저자는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을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그들에게 노래를 청하며 그들을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은 어느 때나 부를 수 있겠으나, 찬송을 사람을 즐겁게 하는 노래로 부를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예루살렘을 기억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그의 악기 연주도, 그의 노래도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위해서만 드려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예루살렘, 즉 오늘날 교회를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며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하자. 그것의 평안과 번창을 기도하며 힘쓰자.
    [7-9절]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 . . .
    유다는 여호야김 왕의 때(주전 605년), 여호야긴 왕의 때(주전 597년), 시드기야 왕의 때(주전 586년), 이렇게 세 차례 바벨론에게 굴복하였고 마침내 완전히 멸망케 되었다. 그것은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과 징벌이었다.
    그 때 에돔 자손들은 유다를 저주하였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사촌간이 아닌가? 에서의 자손들과 야곱의 자손들 사이가 아닌가? 그러나 에돔은 멸망당하는 유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고 무정하게 외쳤다.
    그 때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 백성에게 어떻게 행동하였던가? 그들은 유다 백성에게 악을 행했다. 그들은 유다의 어린것들을 바위돌 위에 메어쳤다. 어린것들은 죽기도 하고 불구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칠고 인정이 없는 자들이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라고 호소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를 다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이다. 그것이 공의이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우리는 이웃의 징벌받는 것을 긍휼히 여기고 이웃에게 거칠고 인정 없게 행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알고 두려워하자.
    138편: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림
    [1-3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 . . .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반심(半心)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전심(全心)으로 감사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경건이다.
    다윗은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신들’이라는 말은 이방신들(헹스텐버그, JFB)이나 천사들(LXX, Vg, 칼빈)이나 왕들(Targ, Syr, 델리취)을 다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또한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한다”고 말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법궤와 속죄소가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표가 있는 곳이다.
    다윗은 또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감사의 이유를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해 좀더 설명한다. 그것은 주께서 그의 말씀을 그의 모든 이름 위에(KJV) 혹은 이름대로(NASB) 높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들은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나타낸다. 성경 역사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밝히 증거하셨다.
    다윗은 특히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그가 응답하시고 그 영혼을 격려하시고 강하게 하신 일을 통해 그것을 체험하였다. 그는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기도는 성도의 심령을 강건케 만든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체험하고 심령의 강건함을 얻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며 찬송하자.
    [4-6절]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 . . .
    다윗은 땅의 열왕, 즉 땅의 모든 왕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4절은, “여호와여, 땅의 열왕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을 때에 주께 감사하리이다”라고 번역된다(KJV, NASB).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며 모든 왕들이 그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께 감사를 올릴 것이다.
    다윗은 또한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의 영광의 크심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신적 기적들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복음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친다(고후 4: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치셨느니라”고 말했다(고후 4:6).
    다윗은 또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떠 있는 별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계신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낮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 특히 죄로 인해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비천한 인생들을 돌아보시며 도우시고 구원하시고 위로하신다. 그러나 반면에 그는 교만한 자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 사람을 무시하는 자들도 아신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과 그 악한 행실들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그것들을 미워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예언대로, 비천한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며 그를 증거하자.
    [7-8절]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 . . .
    다윗은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신다”고 말한다. ‘소성케 한다’는 원어는 ‘소성케 한다’는 뜻도 있으나, 또 ‘계속 살게 한다, 생명을 보존한다’는 뜻도 있다(BDB, NIV). 성도는 환난 중에 낙망하기도 하고 죽음의 위기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지키시고 그 생명을 보존하시며 그를 위로 격려하신다.
    다윗은 또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성도들의 삶에 능력으로 개입해 도우신다. 그는 그 손으로 성도의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고 그들이 성도를 위협하거나 비방하거나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또 그는 그의 능력의 오른손으로 그를 그 환난과 위기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다윗은 또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고 말한다. ‘내게 관계된 것’이라는 원어(바아디 י)는 ‘나를 위하여’라는 뜻으로 ‘나를 위하신 그의 뜻’(NIV)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계된 일들, 우리를 위해 작정하신 바, 우리를 위한 그의 선하신 뜻을 다 이루실 것이다. 모든 일이 합력해 선을 이룰 것이다.
    다윗은 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족한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과 인자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셨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돌아보시고 공급하시고 구원하셨고 또 영원히 그러하실 것이다. 그는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다 이루어질 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139편: 하나님의 전지하심
    [1-6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 . .
    다윗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라고 말한다. ‘감찰’은 샅샅이, 구석구석 찾는 것이다. 그는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신다”고 말한다. ‘앉고 일어섬’은 육신의 활동을, ‘생각’은 영혼의 활동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활동을 다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활동 즉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향 등 우리의 내면의 활동도 다 아신다.
    다윗은 또 하나님께서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활동들도, 우리의 쉬는 것까지도 감찰하신다. ‘감찰한다’는 원어(자라 ה)는 ‘체질한다, 정사(精査)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를, 우리의 쉬는 시간까지도, 마치 체질하듯이 자세히 살피신다.
    다윗은 또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4절). 이 구절은, “내 혀에 말이 없을 때 여호와여 주께서 그것을 다 아시나이다”라는 뜻이다(KJV, NASB, NIV).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 전에도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신다.
    다윗은 또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돌보신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이 지식은 얼마나 놀라운 지식인가. 누가 이 지식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전지(全知)하시고 우리 가까이 계신 하나님 앞에 참된 믿음을 가지고 늘 두려움으로, 진실하게, 올바르게, 감사함으로 살아가자.
    [7-12절]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 . . .
    다윗은 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예레미야 23: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다윗은 또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높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기도 계신다. 오바댜 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또 아무리 깊은 바다 속에 던지웠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기도 계신다. 요나 2:2, “내가 스올[음부]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다윗은 또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새벽 날개’는 새가 날아오듯이 빠르게 오는 새벽빛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다 끝에도 계신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과 우리를 붙드시는 오른손은 거기에도 계신다.
    다윗은 또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는 자이시다(단 2:22). 악을 행한 자가 숨을 만한 흑암이란 없다(욥 34:22).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사람은 항상 그 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항상 진실하고 범죄치 말고 또 위로를 얻자.
    [13-18절]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 . . .
    다윗은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말한다. 몸은 수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었고 매일 약 2백만개의 세포가 낡아지고 교체된다고 한다. 사람은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로 구성되었고, 뇌와 심장, 폐, 입, 위, 간, 창자, 쓸개, 신장 등이 있다. 뇌는 80억개 이상의 세포로 구성되었다고 하며 심장은 매일 쉬지 않고 약 10만 번 수축운동을 한다. 사람의 몸은 참으로 신비한 조직체이다.
    다윗은 또,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태에서의 우리의 존재의 시작부터 다 아신다. 다윗은 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한다. ‘나의 형질이 이루기 전에’라는 원어(골미 י)는 ‘나의 태아’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태아를 다 보셨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의 삶을 다 책에 기록하시듯이 작정하셨다.
    다윗은 또,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출생, 성장, 구원, 봉사의 모든 부분을 다 작정하셨고 섭리하신다. 우리는 그 일들을 다 셀 수 없고 그 지식은 우리에게 참으로 보배롭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죽을 때에도, 죽은 후에도, 그리고 부활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의 능력을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복종하자.
    [19-24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 . .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악인은 본문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하나님께 대해 악하게 말하는 자,’ ‘그를 미워하는 자,’ ‘그를 치러 일어나는 자’로 묘사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을 벌하시고 그들을 죽이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엄위하신 심판자이시다.
    다윗은 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악인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싫어한다. 그들은 그의 원수들이다. 성도는 악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전도하고 선을 베풀 수 있으나, 그들의 악을 인정하고 용납하거나 그들과 친근히 교제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우리의 원수들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윗의 담대한 고백이며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살피신다. 평소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바르게 살고자 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마음을 가진다. 다윗은 또,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말한다. 평소에 바로 산 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담대히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길’은 ‘영생의 길’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과 순종 속에서 구원과 영생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악인과 친구가 되지도 말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140편: 악인에게서 건지소서
    [1-5절]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저희가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 . . .
    다윗은 악인(1, 4절)에게서 그를 건져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한다. 악인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가리킨다. 본문은 그들을 ‘강포한 자’라고 두 번 말한다(1, 4절). 악인은 말과 행동이 거친 자이다. 본문은 또 그들이 남을 해치기 위해 중심에 꾀하고 싸우기 위해 매일 모인다고 말하며, 또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며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들은 남을 해치기 위해 특별한 열심을 내고 그들의 말은 악하고 독하다. 또 본문은 그들을 ‘교만한 자’라고 표현한다. 악한 자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높인다. 본문은 또 그들이 성도의 걸음을 밀치려 하며 그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다고 말한다. 남의 앞에 올무와 함정을 놓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다윗은 악인들이 그를 해치려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는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또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위험한 상황에서 건져주시고 그를 보전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
    성도와 악인은 판연히 다르다. 악인은 악하고 강포하고 교만하지만, 성도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화평하고 선하다. 성도는 말과 행위가 선하다. 우리는 결코 악인이 되지 말고 의롭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또 어려울 때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6-8절]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 . .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그의 신앙고백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인정했고 경외하며 경배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겨 주야로 묵상하였으며 그의 모든 계명과 법도를 순종하려 하였다. 그것이 참된 경건이며 믿음이다. 선지자 엘리야도 아합 왕에게 하나님을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고 표현하였다(왕상 17:1).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단 6:16, 20)이라고 불렀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행 27:23).
    다윗은 또 자신의 과거의 체험을 말한다. 그는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윗이 블레셋이나 모압이나 아람이나 에돔 등과의 전쟁에서 체험한 바이었다(삼하 8장).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위험에서 그의 목숨을 지켜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그를 지켜주셨다. 그의 과거의 체험은 그의 현재와 미래의 체험을 보증한다.
    다윗은 이제 그의 소원을 아뢴다. 그는,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악인들의 소원과 악한 꾀는 성도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해치고 죽이려는 것이며 그것이 이루어지면 그들은 더욱 자신들을 높일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대처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친밀히 그를 섬기며 살자. 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자. 또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는 우리를 모든 위기로부터 심지어 죽음으로부터도 보전하실 것이다.
    [9-11절] 나를 에우는 자가 그 머리를 들 때에 저희 입술의 해가 저희를 덮게 하소서.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 . . .
    다윗은 또, “나를 에우는 자가 그 머리를 들 때에 저희 입술의 해가 저희를 덮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입술의 해(害), 즉 남에 대한 비난과 저주와 악담을 일삼는다. 악인들과 의인들은 그들의 말부터가 판연히 다르다.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악인들의 악한 말은 자기에게 해가 된다. 시편 7:16, “[악인들의]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잠언 18:7,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다윗은 또,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악인들에게 불의 징벌이 있다는 것이 성경 진리이다. 시편 11:6은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악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라고 말했다. 최종적으로 악인들, 즉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할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증거한다(계 21:8).
    다윗은 또,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강포한 자에게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케 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이웃에게 악담하며 강포한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여 결국 멸망케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시편 1:4, 6,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잠언 12:21,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악인은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우리는 입으로 악을 행치 말고,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만 하고, 온유 겸손하고 선하게만 살자.
    [12-13절]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 . .
    다윗은 성도를 ‘고난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로 묘사한다. 성도는 세상에서 때때로 악인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비난과 따돌림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와 핍박도 당하며 또 경제적 어려움도 당한다. 사도 바울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후욕과 핍박과 비방을 당하였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간증하였다(고전 4:11-13). 히브리서는 증거하기를, 어떤 이들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했다(히 11:37).
    다윗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공의로 처리하실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고난당하는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실 것이다. 그는 무조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공의로 처리하실 것이다. 바울은 성도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자들에게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라고 말하며 주의 재림 시 악인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살후 1:6-9).
    다윗은 또한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는 것은 그의 기도 응답 때문이다. 또 성도는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거할 것이다. 의인과 악인은 그 마지막이 다를 것이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시편 125: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세상에서는 성도에게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141편: 악인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4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 . .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말한다. 기도는 성도에게 짐이 아니고 특권이다. 기도는 특히 환난과 궁핍과 위험을 당할 때에 살아계신 섭리자 하나님께 긴급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다.
    다윗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분향함같이 된다. 기도는 향기로운 향과 같다. 찬송과 감사, 죄의 고백, 선한 소원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기도 내용이다. 또 성도의 기도는 저녁 제사와도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저녁마다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되 소제와 전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출 29:41-42). 그것은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함과 헌신과 순종의 결심을 상징한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선한 삶을 위한 기도이다. 그는 선한 말만 하도록 그 입 앞에 파수꾼을 세워 지켜 달라고 기도하며, 악한 일을 행치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악한 자들과 함께 좋은 음식을 먹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잘못된 교제는 사람의 마음을 부패시키고 나쁜 마음에서 나쁜 행실이 나온다. 우리는 나쁜 말, 나쁜 행실, 나쁜 교제를 피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기도하고 특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믿자. 또 우리는 무엇보다 선한 삶을 위해, 즉 선한 말, 선한 행실, 선한 교제만 힘쓰기를 위해 기도하고 결심하자.
    [5-7절]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 . .
    다윗은 자신들의 극심한 고난을 표현하기를,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서뜨림같이 우리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졌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죽은 자들과 같았고 다시 살기 어려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에스겔의 환상 중에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회생하듯이(겔 37:1-10), 하나님께서 하시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다윗은 고난을 달게 받으려 하였다. 그는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만일 그가 어떤 잘못이 있어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달게 받겠다는 뜻일 것이다. 의인이 그를 친다면 그는 그것을 은혜로 여기며 그를 책망한다면 그것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 거절치 않을 것이라고 한다. 교만한 자는 남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지만, 지혜자는 남의 책망을 달게 듣는다. 잠언 25:12,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재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저희’가 의인들인지 악인들인지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우리는 재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해 또 원수까지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다윗은 “저희 관장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지웠도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형통한 것 같으나 장차 하나님께서 그들을 재난에 던지시고 그 지도자들을 죽임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또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때, 무리들은 깨닫고 교훈을 받고 다윗의 말을 달게 들을 것이다.
    우리는 책망을 달게 듣는 자가 되자. 또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는 멸망할 악인이 되지 말고 오직 경건하고 선한 길을 붙들자.
    [8-10절]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 . .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절망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께 피한다. 하나님 안에는 구원과 보호와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하는 영혼을 빈궁한 대로, 그래서 낭패하거나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은 또,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다윗 앞에 은밀한 올무와 함정을 설치하여 그로 큰 낭패를 당하게 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악인의 올무와 함정으로부터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거나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은 믿음이 아니요 실패하는 길이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를 따라가는 것은 승리하는 길이다.
    다윗은 또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는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악인은 자기가 쳐 놓은 그물에 자신이 걸릴 것이다. 시편 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편 57:6,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있다. 에스더서에 보면, 파사 왕의 신임을 받던 악한 신하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 설치한 높은 장대에 자신이 처형되었다(에 7:10). 또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동료 총리들과 방백들은 다니엘을 던져 넣어 죽이려 했던 사자굴에 자신들과 자신의 처자들이 던지워 죽임을 당하였다(단 6:24).
    성도에게 절망은 없다. 하나님 안에 보호와 구원과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악인들의 올무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142편: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1-4절]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 . . .
    다윗은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라고 말한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들로서 누리는 특권이다. 예수께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기도 응답의 약속을 주셨다(마 7: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요 믿음의 증거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되,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다. 때때로 우리의 심정은 묵상 기도로 만족지 않고 소리내어 부르짖어 간구하게 된다.
    우리는 특히 어렵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 부르짖어 기도한다. 다윗은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라고 말하며, 또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라고 한다. 그는 심령이 상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그의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그의 우환을 그에게 진술하였다.
    다윗은 또,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라고 말하며, 또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원수들은 그의 길에 올무를 숨겼고, 그에게는 그를 아는 자도, 그의 피난처도, 그의 영혼을 돌아보는 자, 즉 위하여 도울 자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라고 말한다(3절). 그것은 그가 하나님만 의지했음을 뜻한다. 그 믿음이 그로 기도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확신하는 자는 하나님께 힘있는 기도를 올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자. 특히 어려운 일을 당해 피할 곳이나 도와줄 자가 없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5-7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 . .
    다윗은 자신이 심히 비천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피난 생활로 인해 육신적으로, 환경적으로 심히 낮아져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자기보다 강한 자라고 말한다. 그를 죽이려 했던 자는 그보다 강한 자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옥에 갇혔다고 표현한다. 그가 지금 심히 부자유스럽게 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고 하였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은 참된 믿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모든 일을 섭리하심을 믿는 자만 할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분깃’이라고 표현하였다. 시편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 119: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분깃’이라는 표현은 ‘재산, 기업, 보화’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만족, 행복’이라는 뜻도 내포한다. 세상 사람들은 땅이나 집이나 유산을 분깃으로 여기겠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으로 여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이시요 만족이시다.
    다윗은 그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의 기도 응답을 확신한다. 그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요청하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게 하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너그러이 대하시고 의인들이 그를 두르며 그와 함께 기뻐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와 분깃, 즉 우리가 의지할 자시요 우리의 행복이심을 믿고 어떤 고난 중에도 그를 의지하며 기도하자.
    143편: 원수의 극심한 핍박에서 건지소서
    [1-6절]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 . . .
    다윗은 극심한 고난 중에 이 시편을 썼다. 그는,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심령의 상함과 참담함과 고통을 당하고 있고 육신적으로도 죽음의 위험 속에 숨어살고 있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는,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진리와 의에 호소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대로 행하시며 그의 의(義)대로 보응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소에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고자 힘쓴 성도가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담대한 기도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나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원문)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서 감히 설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그의 엄격한 공의의 심판에 호소하는 것은 아님을 부언(附言)한 것일 것이다.
    다윗은 또한 옛날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사모한다. 그는,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과거에 그를 위해 은혜로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를 위해 역사하실 것을 사모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원수들의 극심한 핍박으로 인한 고난을 당하지만, 평소에 양심적으로 순종 생활함으로써 담대함을 가지고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고 의지하고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7-12절]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 . . .
    다윗은 지금 고난 중에, 환난 중에 있다(11절). 그의 영혼은 피곤하고 그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은” 지경에 있다(7절). 그의 원수들은 그를 해치려 하였고(9절) 그의 영혼을 괴롭게 하였다(12절).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뢰하였다. 그는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말하며 또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라고 한다(8절). 또 그는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한다(9절).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며(10절),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고백한다(2, 12절). 이런 말씀들은 그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하였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라고 속한 응답을 기도한다(7절). 그는 그의 원수들과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한다: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9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11절).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한 땅으로 인도하시기를 구한다: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평평한, 안전한] 땅에 인도하소서”(10절). 또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할 길을 알기를 소원한다: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8절). 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배워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한다: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10절).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징벌하실 것을 호소한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12절).
    우리는 세상에서 극심한 고난 중에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원과 공의로운 처분과 우리의 행할 길을 구하자.
    144편: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함
    [1-4절]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 .
    다윗은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라고 말한다. ‘반석’이라는 말은 의지하고 피할 곳이라는 뜻이다. 성도의 지상 생활은 영적 전투의 현장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투 방법도 가르쳐 주신다. 성도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며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을 쓰는 법을 배운다(엡 6:11, 16-17).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라고 말한다. ‘나의 인자(仁慈)’라는 말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다윗은 영적 전장(戰場)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요새, 그의 산성, 그의 구원자, 그의 방패, 그의 피난처라고 고백하며 또 그의 백성을 그에게 복종케 하시는 자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시다. 이 모든 일들은 그가 왕으로서 나라의 안팎에서 체험한 것들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은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을 왜 선대하시는지 묻는다. 우리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승리, 우리의 구원과 보호가 되시는 하나님, 허무한 인생을 선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자. 또 항상 그를 의지하고 섬기며 단마음으로 그의 모든 계명과 율례를 순종하자.
    [5-11절]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하소서.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 . . .
    다윗은 지금 원수들과의 싸움 속에 있다. 그는 그 싸움을 ‘큰 물’에 비유한다. 그것은 큰 어려움의 환난이다. 원수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을 행한다.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그는 두 번이나 그 사실을 말한다(8, 11절). 또 그는 그를 해치려는 칼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10절).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을 구한다. 그는 특히 하나님께서 자연 현상들을 사용하셔서 원수들을 징벌하시기를 호소한다.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하소서.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옛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천둥과 벼락, 우박 등의 자연 현상들을 사용하셨다(수 10:11; 삼상 7:10; 사 29:6).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들의 해치려는 위험에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라고 반복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을 펴셔 도우실 수 있다.
    다윗은 또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함에서 나온 고백이다. 그래서 그는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새 노래’는 바로 구원의 체험에서 나온 감사와 감격의 노래이다. 그는 열 줄 비파의 악기까지 사용하여 하나님께 찬양하겠다고 말한다. 구원의 체험을 하는 자들마다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할 것이다.
    우리는 악하고 거짓된 원수들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믿고 위험할 때 구원을 간구하자. 또 구원을 체험했을 때 그 구원의 하나님께 새 노래로, 열줄 비파로 감사의 노래와 찬양을 올리자.
    [12-15절]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 . . .
    원문에는 12절 초두에 ‘그리하면’이라는 말(아쉐르 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막으시고 파하시며 다윗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면”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결과로 그의 백성이 복될 것을 증거한다.
    다윗은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라고 말한다. 그는 그 자녀들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잘 자란다고 표현한다.
    또 다윗은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百穀)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라고 말한다. 곡식 창고에는 온갖 곡식이 가득하고 들에는 양들이 많고 수소들은 무겁게 짐을 싣는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풍성한 모습이다.
    다윗은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라고 말한다. 침략을 당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즉 사회적 안정이 있다. 또 거리에 백성의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 것이다. 백성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탄식함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안정과 평안이 있는 것이다.
    다윗은 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그는 평안의 원인이 하나님임을 말한 것이다. 율법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계명에 순종하고 의롭게 살면 평안과 행복을 약속하셨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고 죄 가운데 살면 슬픔과 근심과 불행을 경고하셨다(레 26장; 신 28장).
    우리는 하나님만 모시고 살자.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자. 또 원수 마귀의 시험이 많고 악인들의 장난과 대적이 있어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자. 거기에 참된 평안이 있다.
    145편: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은혜로우심
    [1-7절]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 . . .
    다윗은 하나님이 왕이시며 광대하시다고 말한다. ‘왕’이라는 말은 통치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통치자, 즉 섭리자이시다. ‘광대하시다’는 말은 ‘위대하시다, 크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또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에 있어서 크시다. 다윗은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광대하신 하나님,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반응은 무엇인가? 첫째는 찬양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고 날마다, 영원히 그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훌륭한 사람을 보면 그를 높이고 칭찬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날마다, 영원히, 크게 찬양할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들을 묵상하는 것이다. 다윗은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을 묵상하고 연구한다. 성도는 하나님과 그의 모든 놀라운 일들을 묵상한다. 시편 111:2,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셋째는 하나님을 전파하는 것이다. 다윗은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전해야 할 가장 귀한 보배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자. 또 날마다, 영원히 그를 찬양하고 묵상하고 전파하자.
    [8-13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 . . .
    다윗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다. 그는 죄인들에게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오래 참으신다. 그는 모든 인생에게 그러하시지만, 특히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러하시다. 다윗은 또,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뿐 아니라, 산천의 초목들과 들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도 선대하신다.
    다윗은 또,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즉 들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선대하심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그에게 감사한다. 특히 인생들, 그 중에도 그의 백성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자비를 인하여 그에게 감사하며 찬송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모든 피조물에게 마땅한 일이다.
    다윗은 또,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나라와 그의 통치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은 크시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그의 통치도 영원하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의 한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마 4:17; 행 28:31).
    우리는 자연만물과 인생들과 특히 구원하신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자.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를 깨닫고 그에게 복종하며 그를 전파하자.
    [14-16절]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 . . .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비굴하다’는 말은 ‘엎어지다’는 말로서 낙심하고 비천해짐을 말한다. 사람은 시험에 넘어져 범죄하거나 환경적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거나 비천해진다. 사람은 악한 세상 환경과 마귀의 시험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대개 자신의 부족 때문에, 즉 생각과 감정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하고 교만이나 자존심이나 욕심이 남아 있어서 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굴복된 자를 일으키신다. 시편 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이것은 특히 성도에게 해당된다.
    다윗은 또 “중생(衆生, 모든 것)의 눈이 주를 앙망한다”고 말한다. 모든 짐승도 하나님을 앙망한다. 시편 104:27,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영육의 필요를 가진 인생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연약한 인생들도 조물주 하나님을 앙망한다.
    다윗은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104:28,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시편 147:9,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에게 육적 양식을 주실 뿐 아니라, 심령의 소원도 만족케 하신다. 그는 특히 그의 자녀들이 낙심하거나 환난을 당할 때 그들에게 심리적 위로와 힘도 주시며 그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인생을 붙드시며 일으키시며 인생의 영육의 필요를 채우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며 그의 명령과 교훈대로만 살아가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만 구하자.
    [17-21절]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 . . .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라고 말한다. ‘의’는 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 기준대로 의롭게 행하신다. 그는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다. 그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 그들의 많은 죄를 용서하신다.
    다윗은 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진실히 부르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찾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신명기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또 그는 그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위험에서 건지신다. 시편 34:9-10,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또 하나님은 환난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다윗은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보호하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거룩한 이름을 송축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인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악을 행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항상 기도하자. 그러면 그는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위험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와 선을 행하자.
    146편: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자
    [1-5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 .
    시편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친다. 시편 저자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생전에’ 또 ‘그의 평생에’ 그의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결심한다. 그것은 성도에게 마땅한 일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방백들이나 인생을 의지함이 헛됨을 말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참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생은 그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그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소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셨다(사 2:22).
    시편 저자는 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만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줄 바로 알고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을 두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또 그는 자기 백성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시편 118:8-9,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시편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자. 우리는 방백이나 아무 인생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자.
    [6-10절]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 . . .
    시편 저자는 우리가 의지하고 소망을 두어야 할 자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다. 그는 우리의 참 도움이 되신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대해 자세히 말한다. 우선, 그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신다고 증거한다. 사람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분이시다. 또 그는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이시다. 사람이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당연한 것이지만, 부당하게 압박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시고 그를 구원하신다. 또 사람이 하나님의 징벌로 기근을 당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 기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
    시편 저자는 또한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소경의 눈을 여시며 비굴한 자[엎드러진 자]를 일으키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자를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고 소경의 눈을 여시고 엎드러진 자를 일으키신다.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사람을 더욱 사랑하신다. 또 그는 선한 섭리의 손길로 객이나 고아나 과부를 보호하시고 붙드시고 도우신다.
    시편 저자는,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실 것”이다. ‘굽게 하신다’는 말은 ‘둘러엎으신다’(KJV)는 뜻이다. 그는 악인들의 행위를 미워하시고 그것을 막으시고 좌절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진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자. 또 그를 본받아 진실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147편: 이스라엘을 복주신 하나님을 찬양함
    [1-6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 . . .
    시편 저자는, “할렐루야. [이는]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라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그것이 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치 않거나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높이는 것은 나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둘째,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다. 셋째, 그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섭리자시며 생명의 근원이며 복의 근원이시므로, 인생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고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신다. 그는 별들의 수효를 세시듯이, 그 백성을 한 영혼씩 한 영혼씩 다 부르신다. 그것이 영육의 구원이다.
    시편 저자는 또,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셔서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신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공의의 통치를 깨닫고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지라도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를 찬송하며 따르자.
    [7-11절]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저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 . . .
    시편 저자는,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한다. 감사는 찬송의 동기요 내용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를 찬송할 수 있다. 또 악기는 목소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도구로 거룩하게 사용된다.
    시편 저자는 자연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노래한다. 그는, “저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주관하시고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세계의 기후까지도 주관하시고 식물세계도 돌보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들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그렇다면 그가 인간들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그러하실까?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말의 힘’은 군대의 힘 즉 군사력을 가리키며, ‘사람의 다리’는 군인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세상적, 인간적 의지물들, 예컨대 우리의 건강, 재산, 자녀들 등을 가리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런 외적인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 즉 그들의 마음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도 저주의 책망을 받았고(마 23:13-36), 사도 시대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값을 바치고도 죽었음을(행 5:1-10)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송을 올리자. 자연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오직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긍휼만을 바라며 그의 뜻에 즐거이 순종하자.
    [12-20절]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 . .
    시편 저자는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예루살렘과 시온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곳이며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기도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찬송의 이유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복주심을 말한다. 그는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라고 말한다. 국가의 안보는 단지 군대와 군사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또 자녀들의 복, 사회적 평안, 경제적 유여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이다. 그것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들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일하심을 증거한다.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자연만물을 섭리하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말씀으로 표현되고 그 말씀은 신속하게 시행된다. 그는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같이 뿌리신다. 그는 눈과 서리와 우박을 주관하신다. 그가 보내실 추위를 감당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는 또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니 물이 흐른다. 추위를 녹이고 봄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특히 그 백성에게 말씀으로 교훈하심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셨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고 그의 규례를 안 자들도 없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은 의의 규범이며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며 구주 앞으로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우리는 자연만물과 자기 백성을 말씀으로 섭리하시고 보호하시고 복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를 찬송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자.
    148편: 모든 피조물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1-14절]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 . . .
    시편 저자는 하늘에 있는 것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 곧 하늘 군대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해와 달과 밝은 별들이, 하늘의 하늘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며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시편 저자는 또 땅과 바다에 있는 것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는 용들(탄니님 םיי) 즉 큰 바다 짐승들과 바다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불과 우박, 눈, 안개, 광풍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열매 맺는 나무들과 모든 백향목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새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과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홀로 높으신 자요 그의 영광은 온 천지에 뛰어나시다.
    시편 저자는 특히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저가 그 백성의 뿔[기쁨과 힘]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힘과 기쁨을 얻고 하나님을 항상 찬양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또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친근히 하며 경건하고 거룩한 길을 가야 한다.
    149편: 하나님의 백성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1-4절]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 . . .
    시편 저자는 “할렐루야” 곧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하라”고 말한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 즉 노래 내용이 새롭고 노래 방식도 새롭고 노래하는 마음가짐도 새로운 노래이다. 성도의 회중은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는 경건한 성도의 모임인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교회의 첫 번째 임무는 찬송하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子民)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시다. ‘왕’은 섭리자를 가리킨다. 섭리는 통치의 개념이다.
    시편 저자는 또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小鼓)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춤은 사람의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기쁨으로 또 악기를 사용하며 한다.
    시편 저자는 또 “이는(원문)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이 찬송의 이유임을 보인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심에 기인하였다(슥 3:17). 구원받은 성도는 ‘겸손한 자’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겸손히 구주를 믿는 자들이다. 또, 구원의 결과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되었다(롬 8:30). 이런 복된 구원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새 노래로, 교회 안에서, 창조주와 섭리자 되신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복된 구원을 인하여 기쁨으로 또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자.
    [5-9절]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 . . .
    시편 저자는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전에 죄로 인해 고통과 슬픔이 많았고 부끄러운 삶을 살았었다. 그것이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의 현재의 모습이요 구원받은 성도들의 과거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후에는 변화를 얻었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고 천국 기업을 상속받는 자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시편 저자는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밤에도 평안이 없었다. 모든 죄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었다. 휴식의 밤에도 참된 휴식이 없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제 평안을 누린다. 성도는 침상에서 참된 휴식을 누리며 거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시편 저자는 또 성도가 심판의 영광을 누림을 증거한다. 그는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성도가 증거하는 복음의 효력을 가리키는 동시에 장차 성도가 하나님의 심판의 수종자가 됨을 뜻하는 것 같다. 복음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인간의 죄악성을 드러내고 죄인을 굴복시키며 회개시킨다. 또 성도는 장차 세상을 심판하는 자가 될 것이다(고전 6:2).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광을 모든 성도에게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영광, 즉 칭의(稱義), 하나님의 자녀 됨, 천국 기업의 상속, 및 심판의 수종자 됨을 인해, 기뻐 찬송하자.
    150편: 각종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1-6절]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 . . .
    시편 저자는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 성소 즉 천국에 계신 하나님, 그 권능의 궁창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 같다.
    시편 저자는 또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찬송의 이유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의 크고 위대하심을 묵상하며 그 위대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양해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찬송의 도구를 보인다. 우리는 모든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나팔이나 퉁소 같은 관악기나 비파와 수금 같은 현악기나 소고(小鼓)와 큰 소리나는 제금과 작은 소리나는 제금 같은 타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거기에 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우러지면 좋을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가장 훌륭한 악기와 같다.
    시편 저자는 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말한다. 이것은 찬송의 주체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주신 자마다, 다시 말해 모든 생물과 인생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찬송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창조의 목적이다(사 43:21).
    찬송은 성도의 삶이며 시편의 결론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모든 악기와 목소리를 사용하여 찬송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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