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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55-93 전편 [1편]
  • 2017.01.04 22:46:05
  • 55편: 핍박하는 악인들을 멸하심
    [1-3절]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다윗은 지금 매우 불편한 심리 상태에 있다. 그는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라고 말한다. ‘근심’이라는 원어(시아크 י)는 ‘불평’ 혹은 ‘묵상’이라는 뜻이며, ‘내가 편치 못하다’는 원어(아리드 דיאָ)는 ‘내가 안정 없음을 보이다’(BDB) 혹은 ‘내가 배회하다’는 뜻이다. 2절 중간은 “내가 불평 중에 안정이 없으며”(NASB)라는 뜻일 것이다. 다윗은 지금 심리적 안정이 없고 탄식하고 있다.
    다윗이 그런 심리 상태에 있는 까닭은 원수들 때문이었다. 3절에서 그는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라고 말한다. 다윗의 원수들은 목소리로 그를 위협하였고 악인들은 핍박과 압제로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다윗은 원수들의 이러한 위협과 핍박과 고통과 분노로 인해 지금 마음의 안정을 잃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귀를 기울인다’는 원어(아잔 ןאָ)는 ‘듣는다’는 뜻이고, ‘내게 굽히다’는 원어(하크쉬바 הי)는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아뢸 때 자리를 피하지 마시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성도는 원수들의 위협과 핍박 때문에 일시 동안 심리적 안정을 잃고 탄식하기도 하지만, 그 때에라도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4-8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으로 인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한다”고 말한다. 마음의 고통은 육신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 그러므로 잠언 18:14는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한다. 다윗은 또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라고 말한다. ‘위험’이라는 원어(에이모스 תוֹמי)는 ‘공포들’이라는 뜻이다. 그는 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다윗은 마음의 큰 고통을 당하고 있고 사망의 공포와 두려움과 떨림이 그를 덮쳤다.
    다윗은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서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고 말하고 또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고 한다. 성안에서의 생활이 산이나 광야보다 편리한 점은 있겠지만, 인간 관계 속에서의 심적 고통이 매우 컸다. 그래서 그는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의 핍박과 압제를 폭풍과 광풍에 비교하여 말한다. 그는 그 폭풍과 광풍을 피하여 평온한 곳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
    세상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수 1:5-9; 사 43:1-2; 요 14:1) 주께서도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우리는 세상의 고난의 현실을 통과해야 할 줄 알고 고난을 각오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평안으로 행하자. 
    [9-11절]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다윗의 시대는 악인들이 세력을 얻고 활보하는 시대이었다. 그는 성안에서 악한 일들을 보았고 악인들은 주야로 그 성벽 위에 두루다니며 악한 일들이 성중에 또 거리에 있었다. 악인들이 세력을 얻으면 백성들은 탄식하며 그 성읍은 멸망할 것이다. 잠언 11:10-11,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악인들은 성안에서 강포와 압박, 악독과 잔해, 분쟁과 속임을 행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인생의 덕성들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하고 선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그와 정반대로 강포하고 압박하여 악독하고 잔해하며 분쟁하고 속였다. 의인들이 이런 악인들 가운데서 어찌 하루인들 편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편 84:10에서, 성도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다.
    다윗은 이런 현실에서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의인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하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의로운 처분에 맡긴다. 로마서 12:19,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우리는 인간답게 살자. 즉 온유하고 선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살자. 또 악인들이 득세할 때라도 오진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호소하자.
    [12-15절]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다윗을 책망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가 본래 다윗의 원수이거나 그를 미워했던 자가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더라면 다윗은 오히려 참고 그를 피하여 숨었을 것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본래 타고날 때부터 악하고 악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을 미워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19). 그러나 다윗의 원수는 처음부터 그런 자가 아니었다.
    다윗의 원수는 처음에는 친한 친구이었다. 다윗은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라고 말하며 또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라고 말한다. 다윗의 원수는 이전에 그와 함께 의논하던 상대이었고 함께 경건하게 하나님의 집에 올라갔던 친구이었으나, 이제 그를 비난하고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한 것같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같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같이, 그 친구는 이제 다윗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적자들의 결말은 두렵다. 황폐함이 그들에게 임하며 그들은 산채로 지옥에 내려갈 것이다. 영혼은 불멸하므로 악인은 평안하고 형통한 것 같다가 갑자기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친구의 배신까지도 각오하며 살자. 또 우리는 악인의 두려운 결말을 깨닫고 악한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자.
    [16-19절]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다윗은 큰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불평 중에 심리적 안정이 없었을 때(2절), 마음이 심히 아팠을 때(4절), 죽음의 공포들과 두려움들이 그를 사로잡았을 때(4-5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그는 하루 세 번씩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하였다.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은 경건한 자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단 6:10). 17절에 ‘근심하며 탄식했다’는 원어는 ‘불평하며 외쳤다’는 뜻이다(NASB). 그는 심적 고통 중에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었다. 그는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16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17절),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19절)라고 말한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잘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마 7:7; 요 14:14).
    다윗은 또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영혼을 평안 가운데 건져내셨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래의 확실한 일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도에게 대적자들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도우시고 건지시는 자시다. 다윗은 또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심령의 변화가 없는 자,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자는 보응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영원자존자이신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며 고난 중에도 낙망치 말고 모든 일을 그에게 아뢰며 의탁하자.
    [20-21절]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다윗을 대적하는 악인은 화목을 깨뜨리는 자이었다. 다윗은 그가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화평을 미워하는 자이다(시 120:6-7). 다윗은 또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라고 말한다. 악인의 말은 부드러워도 그 마음에는 미움과 시기와 분노와 살기가 있다.
    다툼과 불화는 지옥의 죄이다. 갈라디아서 5:20은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등의 육신의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반면에 화목은 천국의 덕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다(마 5:9).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마 11:29). 화평과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다(롬 14:17).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과 거짓과 외식과 시기를 버리라고 교훈한다(엡 4:31; 벧전 2:1). 또 성경은 우리가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하며(엡 4:29) 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한다(엡 4:32). 또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말한다(벧전 3:8). 온유와 화평은 확실히 성도의 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시기와 미움, 분노와 싸움을 다 버리고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화평하기를 힘쓰자.
    [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모든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주께서는 죄인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부르셨다(마 11:28). 인생의 짐은 죄의 짐이며, 또 죄의 결과로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 가난과 질병의 짐이다. 성도에게도 짐이 있다. 성도도 사람이므로 세상의 일로 인한 염려와 두려움, 낙심, 고통이 있고 때때로 핍박과 고난도 있다.
    다윗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시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자이시다. 그에게 무엇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함으로 무엇을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시편 68:19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져주시는 자이시다.
    다윗은 또, “[그러면 그가] 너를 붙드시리로다. 그는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요동하는 것은 낙심하거나 범죄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요동치 않도록 굳게 붙드시며 낙심치 않고 평안케 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125:1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다고 말했고, 잠언에는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며 영원히 이동되지 않는다고 말했다(잠 10:25, 30). 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다(빌 4:6).
    성도에게도 간혹 무거운 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드시고 참 평안을 주실 것이다.
    [2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다윗은 악인을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악인의 특징은 이웃을 해치고 속이는 것이다. 그는 남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 등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이웃을 해하거나 죽이기도 하며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면 언제든지 속인다. 악인에게는 인생의 기본적인 덕인 긍휼과 진실이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최종적으로 그 파멸의 웅덩이가 지옥이다. 악인은 결국 멸망의 구덩이에 떨어질 것이다. 다윗은 또한 그들이 일생의 절반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징벌이다. 하나님은 심히 악하게 행하는 자들을 벌하셔서 죽게 하실 것이다. 다윗을 끈질기게 죽이려 하였던 사울은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다윗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 압살롬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다윗의 신복들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다니엘을 모함했던 동료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지워 찢겨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는 목매어 창자가 터져나와 죽었다.
    성도는 악인과 달라야 한다. 다윗은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다윗은 악한 환경과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성도는 어떤 환경 여건 속에서도 인간 중심으로나 환경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성도가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원수가 굶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울 수 있고 끝까지 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이 까닭이다(롬 12:20-21).
    우리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웃을 해하고 속이는 악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자.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만 행하자.
    56편: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함
    [1-4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다윗에게는 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윗을 삼키려고 종일 그를 치며 압제하며 삼키려 하였다. 교만하게 그를 치며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과 압제에 두려움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때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긍휼을 구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는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수의 핍박을 허용하셨다고 느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구한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특히 고난 중에 그를 의지하는 것은 생명 있는 신자의 특징이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 처음에 좀 당황하거나 낙심하거나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곧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한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는 증거의 말씀이며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체험한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졌고 담력을 얻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탄의 시험과 원수들의 핍박을 당하는 두려운 날을 만나지만, 그 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만 굳게 의지하자.
    [5-9절]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였고 그를 대적하는 모든 사상은 사악하였다. 악한 자들은 자기의 좁은 생각과 이해력을 가지고 상대방을 오해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려 하였다. 또 그들은 은밀히 모여 다윗의 생명을 엿보며 그의 종적을 살폈다. 당을 지어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용감하지도 못한 자들이요 당당치도 못한 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때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7절 전반절의 원문(팔레트 라모 וֹמ ט)은 “[저희의] 죄악으로 인해 저희를 던지소서”라는 뜻일 것이다(NASB). 또 다윗은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라고 간구한다. 또 그는 “주께서는 나의 유리함을 계수하셨나이다. 나의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다 세고 계셨고 그의 눈물들을 그의 병에 담듯이 다 기억하고 계신다. 또 그는 그것을 그의 책에 다 기록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도 응답을 확신한다. 그는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라”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라고 말한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최선의 무기요 완전한 대책이며 해결책이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들을 위하시고 반드시 그들을 곤란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우리는 원수들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 낙심치 말자.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자.
    [10-13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10절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 . . 여호와를 의지하여”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 . . 여호와 안에서”라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또 11절에서 그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알고 그를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의지하는 자는 그의 명령에도 절대순종할 것이다.
    다윗은 또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본문 10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 안에서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 안에서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라고 한다. 말씀은 믿음의 근거이다. 또 그는 하나님께 서원했던 감사의 제물을 그에게 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는 환난 날에 서원했던 바를 기억하고 그것을 갚기를 원한다. 또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을 얻었다. 이런 평안과 담력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한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과 능력의 말씀을 체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고 그로 하나님 앞에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셨다. 원수들이 날마다 그를 죽이려 했고 그가 그들을 피하기 위해 방황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셨고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기 때문에 그는 찬송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그러면 그가 우리도 구원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하자.

    57편: 비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송함
    [1-3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다윗은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환난 때에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부족을 깨닫는다. 성도는 여전히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서는 설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재앙의 날이 지나기까지 피하기를 원한다. 환난 날에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곧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롬 8:15)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히 4:16). 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자이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고 했다(롬 8:28).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심으로 그를 삼키려는 자들의 비방에서 그를 건지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도의 응답을 믿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며 의지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진리로 응답하시며 악한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환난 중에 그의 긍휼을 구하고 그에게 피하고 그에게 기도하자.
    [4-6절]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다윗은 원수들을 ‘사자들’ ‘불사르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약한 자들을 죽이려 하고 분노한 감정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또 다윗은 그들의 이가 창과 살이며 그들의 혀가 날카로운 칼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고 죽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윗의 길 앞에 그물을 준비하였고 웅덩이를 팠다. 그들은 악하고 비겁한 자들이다. 사람은 참으로 악하다. 성경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옛시대 사람들의 악을 ‘강포함’이라고 증거하였다(창 6:11). 로마서 3장은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말한다(롬 3:13-15). 다윗은 그런 자들로 마음이 낙심되었다. “내 영혼이 억울하다”는 원어는 낙심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한다. 그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인다. 바울도 많이 매를 맞고 갇혔던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그 때 감옥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었다(행 16:25-26).
    다윗은 또 원수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 그는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라고 말한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웠던 나무에 처형되었던 하만처럼(에 5, 7장), 악한 자들은 스스로 멸망의 웅덩이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악인들의 위협과 핍박과 그물과 웅덩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찬송하고 기도하며 바르게만 살자.
    [7-11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한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절), “주여 내가 . . . 주께 감사하오며 . . . 주를 찬송하리이다”(9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절)라고 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이유는 그의 인자하심이 커서 하늘에 미치고 그의 진리가 궁창에 이르기 때문이다(10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가 우리의 죄를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심에서 드러난다. 또 그의 진리는 그의 약속 이행이나 계명대로 악인을 징벌하심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는 거짓이나 불신실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자와 진리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인자와 그의 진리로 구원을 받은 자들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감사하고 찬송하려 하였는가? 첫째로, 그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하려 하였다. 그는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말한다. 둘째로, 그는 진심으로 찬송하려 하였다. 그는 “내 영광아 깰지어다”라고 말한다. 그의 영광은 그의 영혼을 가리킨다. 셋째로, 그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려 하였다. 그는 비파와 수금을 가지고 기쁨으로 찬송하며 새벽을 깨우며 찬송하려 하였다. 넷째로, 그는 만민 중에서, 열방 중에서 하려 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온 세계 만민에게 증거하며 찬송하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그의 인자와 진리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자. 굳은 결심으로, 기쁨으로, 또 만민 중에서 그렇게 하자.
    58편: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을 갚으심
    [1-5절]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본문은 악인들에 대해 묘사한다. 그들은 공의를 말해야 할 때 잠잠하고 정직히 판단치 않는다. 침묵이 미덕인 때가 있지만, 그것이 악인 경우가 있다. 공의를 말해야 할 때 잠잠하는 것은 악을 두둔하는 일이 된다. 그들은 마침내 본심을 드러내어 악과 강포를 행한다.
    하나님의 계명이 인생의 표준이지만,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그 표준에서 멀어졌고 나면서부터 인생의 정로에서 벗어났다. 인간은 타고난 죄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원죄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셨고(창 8:21),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시 51:5).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악하다.
    악인들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다. 거짓은 마귀의 죄이며(요 8:44) 마귀와 함께 지옥에 던지울 악인들의 죄악이다(계 21:8). 또 그들의 입에서는 뱀의 독이 나온다(4절). 즉 그들은 남을 해치고 죽이는 말을 한다. 또 그들은 완고하다.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와 같다. 그들은 바른 말, 바른 충고와 유익한 조언을 듣지 않는다. 들을 귀와 깨닫는 마음이 없다. 그들은 완고하고 교만한 자들이다.
    우리는 공의를 말하며 정직히 판단하고 악심과 악행을 버리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실과 선함과 온유함으로만 행하자.
    [6-11절]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께 악인들에 대한 보응을 호소한다. 그는 그들의 입에서 어금니를 꺾으시기를 구한다. 또 그는 그들이 이리저리 흐르는 물같이(원어의 뜻) 사라지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것은 비가 오면 이리저리 흐르다가 비가 그치면 사라지는 사막의 강(와디)를 가리킨 것 같다. 또 그는 그들이,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고 소멸하는 달팽이 같게 하시기를 구한다. 또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즉 태어난 후 즉시 죽은 아기와 같게 하시기를 구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생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징벌로 악인들과 그들의 핍박들을 다 제거하실 것이다.
    다윗은 또 말하기를,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라고 한다(10절). 의인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시행하셨고 고난받는 성도를 구원하시고 그의 눈물을 씻어주셨기 때문이다. 의인은 완전히 승리할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세상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심판은 세속사회의 도덕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또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
    우리는 핍박과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자. 또 하나님만 섬기며 그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59편: 나의 산성이신 하나님을 찬송함
    [1-5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다윗을 치고 그에게 사악을 행하였다. 그들은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이다. 그들은 은밀히 엎드려 그를 해치려 하였고 강한 자들이 연합하여 그를 치려 하였다. 이런 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그들의 핍박은 다윗의 죄나 허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윗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성도는 세상에서 종종 이런 고난을 당한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의를 위해, 주님을 인해 비방과 핍박을 당할 것(마 5:10-11)과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므로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요 15:19).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상황을 살피시고 자신을 그들로부터 건지시기를 구한다. 1, 2절, “나를 건지소서,” “나를 높이 드소서,” “구원하소서.” 또 그는 악인들을 징벌하실 것을 요청한다. 4절,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5절,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 그의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죄 없이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 때에 우리는 낙심치 말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자.
    [6-8절]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다윗은 악인들의 활동을 증거한다. 그들은 저물게 돌아온다. 그들은 낮에는 감히 활동하지 못하고 숨어 있다. 악인들은 어두움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도는 빛의 사람들이며 정정당당하게 사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개처럼 운다. 그들은 먹이를 위해 찢어대는 개처럼 성도를 해하려고 으르렁댄다. 그러나 보통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신다. 순교는 특별한 경우에만 허락된다. 또 그들은 성으로 두루다닌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며 동료들을 선동한다.
    또 그들은 입으로 악을 토하며 입술에는 칼이 있다. 말은 그 인격의 표현인데, 악한 자들은 악한 말을 쏟아내며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말을 내뱉는다. 그래서 성경은 교훈하기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하였다(엡 4:29, 31-32). 악인들은 이렇게 악한 말을 내뱉으면서 “누가 들으리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인생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은밀한 악들을 다 보시고 들으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정밀한 감시 카메라와 같고 하나님의 귀는 고성능 도청장치와 같다. 그는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다(전 12:14; 롬 2:16).
    우리는 사람의 은밀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모든 악을 버리고 오직 선하고 은혜롭고 덕스러운 말과 행위를 하자.
    [9-10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요새를 말한다. 환난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산성과 요새와 피난처이시다. 다윗은 또 하나님이 힘이 있는 자이심을 고백한다. “저의 힘을 인하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시편 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다윗은 또 하나님을 ‘긍휼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라는 원어(엘로헤 카스도 וֹדּ י)는 ‘그의 자비의 하나님께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히브리서 6: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시고 그의 원수들의 보응받는 것을 보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영접한다’는 원어는 ‘만난다’는 뜻이다. 그의 자비의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그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며 그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를 건지시고 원수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산성 되심과 그의 힘과 자비를 항상 인정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특히 환난의 날에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바라자.
    [11-13절]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본문은 악인들의 악을 증거한다.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그들은 남을 저주하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며 교만한 자들이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다(딤전 3:6). 잠언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이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라고 말했다(잠 6:16-19).
    다윗은 그 악인들의 징벌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는 그들을 죽이지 마시기를 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 그는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시기를 구한다. 그들은 가족들과 친구들 간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잃어버리고 비천해질 것이다. 또 그는 그들이 사로잡히기를 구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자유를 잃고 고통과 학대를 당할 것이며 마침내 땅 위에서 없어질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 중에 다스리심이 땅끝까지 알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이 온 세상에 증거될 것이다. 실상,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족속의 왕이시다.
    다윗은 인간 원수들과의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을 방패로 삼았고 의지하였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방패는 전쟁에서 군인을 보호하는 기구이다. 어떤 칼이나 창도 막아낼 수 있는 튼튼한 방패를 가진 군인은 안전하다. 하나님은 가장 튼튼한 방패이시다.
    우리는 악인들처럼 저주와 거짓말과 교만의 악을 행치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권과 우리 방패 되심을 알고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자.
    [14-17절]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악인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들은 이전에 성도를 해치기 위해 밤에 성에 두루 다니며 부르짖었던 자들이었다(6절). 그들은 이제는 먹을 양식을 위해 밤에 성을 두루 다니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들은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투덜댈 것이다. ‘밤을 새다’는 원어(와얄리누 וּני)는 ‘유숙하다, 밤을 새다’는 뜻도 있지만, ‘불평한다, 투덜댄다’는 뜻도 가진다(BDB). 고대 역본들(LXX, Vg)이나 영어성경들(KJV, NASB)은 후자의 뜻으로 번역했다. 그들은 투덜대며 밤을 지새울 것이다.
    본문은 또한 성도의 노래를 증거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악인들에게는 불만과 불평이 있을 것이지만, 성도들에게는 기쁨과 감사의 노래가 있을 것이다. 밤 같은 고난의 날들에는 성도에게 슬픔과 두려움이 없지 않았겠지만, 구원과 회복의 아침이 밝아올 것이며 그 때 성도는 하나님께 찬송할 것이다.
    성도의 찬송의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시고 산성과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며 그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16절, “이는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절, “이는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시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힘과 산성과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오직 경건하고 의롭게만 살자.
    60편: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구함
    [1-5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주의 백성에게 환난이 있다. 그들은 주의 백성이며 주를 경외하며 주의 사랑하시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환난이 있다(3-5절). 하나님의 본심은 인생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또 주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고난과 환난을 허용하신다.
    주의 백성이 당한 환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으며, 문자 그대로 땅을 진동시켜 갈라지게 하셨거나 비유적으로 사회에 싸움과 분열을 주셨고, 그들에게 어려운 일(카솨 ה)을 보이시고 당황하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마시게 하셨다. 이런 일들은 때로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왔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단지 그들의 인격 훈련을 위해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께 그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간구한다. “[하나님이여]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그 틈을 기우소서,” “기[깃발]를 주소서,”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과 승리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하나님밖에 없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원수들을 파하시고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고 바른 길로 진행케 하시고 평강으로 함께하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환난이 있지만 전쟁의 승패는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주 하나님만 바라고 따르자.
    [6-9절]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한다. 그 말씀은 엄숙한 말씀이며 진실하고 확실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뛰놀리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다. 또 그는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세겜은 요단강 서쪽을 가리키며 숙곳 골짜기나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을 가리키고 므낫세는 요단 동서쪽에 걸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 즉 요단 동쪽과 요단 서쪽을 다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다.
    또 그는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라고 말씀하신다. ‘보호자’라는 원어(마오즈 זוֹע)는 ‘보호물, 투구’(NASB, NIV--'helmet')라는 뜻으로 ‘내 머리의 보호자’라는 말은 원수들로부터 왕권을 지키신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는 “유다는 나의 홀”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홀’이라는 원어(메콕키 י)는 ‘나의 율법을 베푸는 자’라는 뜻으로 ‘지도자, 왕’을 가리킨다. 유다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권이 계승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왕권을 지키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또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는 말씀은 모압이 이스라엘의 종이 될 것을 표현하신 것이며,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는 말씀도 에돔에 대한 진노와 경멸을 표현한 것이다. 또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라는 말씀은 이방 나라들의 견고한 성이 멸망할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원수들을 파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두려워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힘써 따르자.
    [10-12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신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가 겪은 패전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다. 그는 인생의 실패와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임을 믿었다.
    또 다윗은 사람의 구원과 도움이 헛됨을 고백한다. 사람의 도움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다. 또 하나님이 그것을 무(無)로 돌리실 때 그것은 헛될 것이다. 이방 군대의 도움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하며,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말한다.
    다윗은 이러한 국가적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고 하나님만 의지한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라는 원어(하바 라누 에즈랏 밋차르 ר ת וּנ־ה)는 “환난에서의 도움을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뜻이 옳을 것이다(BDB, KJV). 다윗은 하나님께서 환난당한 자를 도우실 수 있음을 믿고 구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시 3:8). 또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시편 18:29에서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고 말했고, 시편 20:7에서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며 또 인간의 도움이 헛됨을 알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하자.
    61편: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함
    [1-4절]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성도는 기도할 대상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께서 바로 그 기도의 대상이시다. 이것은 성도에게 큰 특권이며 복이다. 하나님을 모신 자는 복되다.
    다윗은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지금 마음이 눌린 상태에 있다. ‘눌리다’는 원어(아탑 ף)는 ‘연약하다, 기진하다’는 뜻이다. 그는 지치고 기진해 있다. 또 ‘땅끝에서부터’라는 표현은 사람들의 핍박으로 나라의 변방에 쫓긴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다. ‘높은 바위’는 든든한 반석, 안전함과 평안이 있는 곳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현재의 고난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한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까닭은 하나님을 그의 피난처와,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로 의지하기 때문이었다. 전쟁 때에 안전한 방공대피소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이시다. 다윗은 또 영원히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며 그의 날개 밑에 피하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장막과 하나님의 날개 밑은 안전한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 같다. 감히 그곳을 공격할 자는 아무도 없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전과 영원한 평안을 누린다.
    우리는 마음이 지치고 기진할 때 우리의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피하며 그의 구원과 도우심을 구하자.
    [5-8절]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원문에는 5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그를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서원은 하나님의 기업인 이스라엘 나라에서 왕권을 유지함을 포함한 것 같다. 오늘날 우리의 기업은 현세의 교회와 내세의 천국이다.
    다윗은 또한 장수(長壽)를 확신한다.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이 말씀은 다윗의 왕권의 계속을 암시하지만, 일차적으로 영생을 내포한다. 생명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께 달렸다. 장수는 하나님의 복이며(출 20:12) 영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이다(시 133:3; 요일 4:13).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거하는 것은 가장 큰 복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거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라고 말한다. 인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이유이며 진리는 하나님의 복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이다.
    다윗은 이제 결심한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고 구원해주시면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겠다는 것이 그의 서원에 포함된 내용이었던 것 같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며(사 43:21) 성도의 복된 의무이며 특권이다.
    우리도 우리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과 영생과 천국을 확신하고 그의 인자와 진리로 우리를 보호하시기를 구하면서 그를 영원히 찬송하자.
    62편: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
    [1-4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다윗은 그를 핍박하는 악인들에 대해 증거한다. 악인들은 항상 남을 해할 궁리를 한다(3절 상반절의 원문, KJV, BDB). 그들은 그를 그의 존귀한 지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며 입으로는 축복하나 속으로는 저주한다. 악인은 거짓되고 이중적이요 위선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부서질 것이다(3절 하반절의 원문, KJV, BDB). 악인은 갑자기 망할 것이다.
    다윗은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다.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는 것이 믿음이다. 그는 또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만 그의 반석과 산성으로 의지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며 완전한 구원자이시다.
    다윗은 또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성도는 환난 중에 조금 혹은 잠시 요동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크게 또 오랫동안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이다.
    남을 해할 궁리나 하고 남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거짓되고 위선적인 악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5-8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다윗은 고난 중에, 원수들의 핍박 중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것이 믿음이다. 세상에는 환난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며 의지한다. 그는 또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성도의 힘이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다윗이 하나님만 바라는 이유는 그의 소망이 하나님께로부터 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만 그의 반석, 그의 구원, 그의 산성이심을 믿었다. 다윗은 그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고 그의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다. 인생의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고 지키시고 새 힘을 주실 수 있는 자시다. 성도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자이므로 때때로 피곤해지고 두려워하고 낙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앙망할 때 그의 구원과 도우심과 위로와 회복시키심을 얻게 된다. 성도의 든든함과 안전함은 하나님 안에 있다.
    다윗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까지 권면한다. 그의 확신은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한 권면으로까지 나타난다. “백성들아 항상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시시로’라는 원어는 ‘항상’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고난 중에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것이 없다. 오직 간절한 기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참으로 복되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자.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우리의 마음을 토하며 특히 환난날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자.
    [9-12절]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다윗은 고난 중에 인생의 무가치성을 깨닫고 고백한다. 그는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는 세상에서 좋은 음식을 먹거나 좋은 옷을 입거나 좋은 집에서 살지 못하며 고생스럽게 인생을 사니 참 허무하고, 존귀한 자는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며 고상하고 품위 있어 보이나 죽어 썩고마니 속이는 것과 같다. 천한 자도 높은 자도 저울에 달면 그 가치성은 입김보다 가볍다.
    다윗은 또 재물의 헛됨을 고백한다. 그는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일꾼들을 억압하고 강탈하여 돈을 버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취하실 때 그의 재물이 헛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재물을 의지하거나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권면한다. 잠언 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 내용은 능력과 인자하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갚으시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신다. 그러나 그를 경외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의 원수들을 파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평안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허무한 인생을 자랑하지 말고, 헛된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자. 우리는 오직 능력의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인자하심만 바라자.
    63편: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송함
    [1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면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또 그는 하나님에 대해 막연히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겼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9에서 하나님을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런 친밀한 개인적 관계이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하나님을 찾고 앙모한다고 말한다. 그는 본시편의 표제어의 말대로 지금 유다 광야에 있다. 그것은 아마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나간 때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육신적으로, 환경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환난 중에 매우 피곤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는 것 같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의 육체도 하나님을 앙모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굴을 감추신 것 같고 그를 멀리하신 것 같고 그를 버려두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계셨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극심한 환난 중에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함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후 1:8-9).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친밀히 의지하며 교제하며 섬기자.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간절히 찾자.
    [2절]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것은 이전에 다윗이 성소에서 행했던 바를 말한 것 같다. 특히 ‘성소에서’라는 말은 지금 그가 있는 유대 광야와 대조되는 것 같다. 그는 이전에 하나님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성소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는 지금 유대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다윗이 갈망하며 보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었다. 하나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권능은 피조세계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권능은 전능(全能)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능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존재의 완전함, 그의 지혜와 능력의 완전함, 그의 도덕성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독특한 영광, 고유한 영광이다. 우리는 그 영광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것을 보고 깨닫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주관적으로 그것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다윗은 전에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 성소는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구약의 성소는 단순히 예배당 이상이었다. 그 곳은 하나님의 속죄의 언약이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언약의 피가 뿌려지는 속죄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25:22).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상징한 것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다윗은 지금 광야에서도 아마 성소를 향해 혹은 광야를 성소로 삼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를 갈망하자.
    [3-4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사람의 생명은 귀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낫고, 생명 없는 무생물보다 생명체가 더 낫다. 특히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일을 축하하고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 고귀한 생명은 너무 연약하고 유한하다. 그것은 늙고 병약하고 마침내 죽고마는 생명이다. 누가 사람의 늙음과 병과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기의 생명보다 더 낫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때 인간이 건강과 장수와 안전과 또 영생까지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의 연장과 건강과 안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러므로 잠언 3:7-8은 은 말하기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했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다윗은 또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라고 말한다. ‘내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며 결심하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딤전 2:8). 재난이나 질병이나 원수들의 위협에서, 특히 지옥 형벌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인자가 자기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윗처럼 평생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의 감격은 평생에 미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의 한계성을 바로 알고 하나님만 높이자. 하나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귀함을 알고 평생에 하나님만 찬송하자.
    [5-7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같이 그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육신이 영양 있고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힘을 얻고 기분을 좋게 하듯이,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불치의 병자가 병이 낫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 위기에서 구원받고, 지옥 갈 죄인이 구원받은 것은 모두 다 기쁨과 즐거움의 일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하겠다고 말한다(시 4:7)
    다윗은 이제 기쁜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그를 기쁘게 찬송할 것이다. 또 다윗은 밤중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사람은 낮에 땀 흘려 바쁘게 일하며, 밤에 고요히 잠자며 쉰다. 성도가 바쁘게 지내는 낮에는 혹시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했을지라도, 쉬는 밤에는 그를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밤중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도움이 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서도 그에게 위로와 평안과 용기를 주셨고 그를 건져주셨고 원수의 핍박을 막아주셨고 피할 길을 주셨고 승리케 해주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겠다고 말한다. 그 날개는 평안과 위로와 구원의 날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만족하며, 밤중에 그를 기억하고 그의 날개 그늘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찬송하자.
    [8-11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 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다윗은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라”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따름으로 그의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고백이다. ‘가까이 따른다’는 원어(다바크 ק)는 신명기에 나오는 말로서 ‘부종(附從)한다, 꼭 붙든다’는 뜻이다(신 11:22).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고 꼭 붙들고 따르면 그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다윗은 또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악인에 대한 보응을 증거한 것이다. 악인들은 성도를 찾아 죽이려고 애쓰지만 그들은 땅 깊은 곳, 즉 멸망의 지옥에 들어갈 것이며, 또 그 육신도 칼에 죽임을 당하고 시랑의 밥이 될 것이다. 시랑은 여우나 늑대와 비슷한 사나운 들짐승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의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므로 그들의 마지막은 비참할 것이다.
    다윗은 또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고 말한다. 경건한 왕 다윗은 세상의 부귀 영광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겠다고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는다(시 119:14, 24, 72, 77, 92, 103).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다물어질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고, 악을 버리고 하나님편에만 굳게 서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자. 거기에 참 행복이 있다.
    64편: 은밀한 원수들을 멸하소서
    [1-2절]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성도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당한다. 다윗은 고난 중에 근심하며 하나님 앞에서 불평어린 말을 하였고 생명을 위협하는 원수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성도의 가장 큰 원수는 사탄이다. 사탄은 우리를 범죄케 하여 영원한 지옥으로 끌어가려 한다.
    다윗은 행악자의 비밀한 꾀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 대해 말한다. 악인들은 보통 양심 때문에 공공연히 악을 행치 못하고 이중적으로, 위선적으로 행한다. 그들의 비밀한 꾀에서 벗어나게 할 자가 누구이랴. 또 악인들은 처음에는 은밀히 악을 꾀하다가 때가 되면 소란을 피운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유대 지도자들도 처음에는 그를 죽일 계획을 은밀히 하다가 나중에는 공공연히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사람들은 어려울 때 친한 사람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한다. 한두 시간, 때로는 그 이상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처한 상황을 그대로 자세히 아뢰며 그의 도움과 구원을 청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성도는 비상한 때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이 있을 때, 원수들의 은밀한 꾀와 사회적 소란이 있을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자.
    [3-4절]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본문은 악한 자들의 악행을 증거한다. 악인들은 말로 성도를 비난한다. 본문은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눈다”고 말한다. 칼을 갈아서 날카롭게 하듯이, 악인들은 그들의 혀를 연마하여 악한 비난의 말을 잘 한다. 그들은 악한 말을 하는 데 능숙하다. 그 말을 듣는 성도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또 악인들은 쪼뼛한 화살같이 독한 말로 성도를 겨누어 쏜다. 그 말을 듣는 성도는 마음에 치명적 상처를 받을 것이다.
    또 악인들은 숨은 곳에서 갑자기 남을 쏜다. 본문은 “[저희가]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쏜다”고 말한다. 악인들이 숨은 곳에서 쏜다는 말은 자신의 악한 정체와 미움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공격한다는 뜻이다. 의인들은 그들이 그렇게 악하게 자신들을 비방할 줄 미처 예상치 못할 것이다. ‘완전한 자’라는 원어(탐 ם)는 ‘흠 없는 자, 순전한 자’라는 뜻으로 경건한 성도를 가리킨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며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다. 오늘날 완전한 자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이런 성도를 해치려 하는 것이다.
    또 악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을 행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다. 그들의 담대함은 사탄과 악령들의 역사로 완고해진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을 징벌하실 때 그들은 두려워 떨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하였다(잠 28:1).
    우리는 남을 비방하고 해치는 악인이 되지 말고 또 그런 악인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순종으로 온전한 자가 되자.
    [5-6절]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악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한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악을 행한다. 로마서 2:8은 악인을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악한 일을 위해 서로 격려하고 협력한다. 또 그들은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죄악을 도모한다. 인간의 양심은 어느 정도 선한 일을 좋아하고 선한 여론을 만들기 때문에, 악인들도 드러나게 악을 행하지는 못하고 은밀하게 악을 계획하고 의논한다. 악을 행한 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자기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그들은 남을 해치고 남을 죽이는 일을 연구하고 묘책을 찾았다고 좋아한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선한 일에 쓰지 않고 악한 일에 쓰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과 악령들의 지혜이다. 악인들의 속뜻과 마음은 깊어서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도는 악을 경계해야 하고 악한 일에 미련한 것이 좋으며 선행을 서로 격려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 로마서 16:19,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6:17-18,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우리는 은밀히 당을 지어 악을 도모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선한 일을 좋아하고 서로 격려하며 열심히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
    [7-9절]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벌하실 것이다. 원문 7절을 전통적 읽기로 직역하면,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갑자기 화살로 쏘시리니 그들의 상함이 있도다.”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화살로 그들을 쏘실 것이다. 그가 그렇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을 그들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확실하다. ‘있도다’라는 원어(하유 וּי)는 ‘있었도다’라는 완료형으로서 확실한 미래를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그 결과,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갑작스런 화살로 큰 상함을 입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의 화살은 악인들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힐 것이다. 또 본문은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엎드러질 것이다. 또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한다’는 말은 그들이 성도에 대하여 말한 악한 말 혹은 저주의 말 때문에 해를 당한다는 뜻이다. 악인들은 그들의 악행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받을 것이다.
    또 악인들의 멸망을 보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다 피할 것이다. ‘머리를 흔든다’는 원어(잇노데두 וּדוֹנ)는 ‘멀리 피해버린다’는 뜻이다(BDB, KJV).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는 이방나라의 왕 다리오가 나라에 조서를 내려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증거하였다(단 6:26-27).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반드시 벌하실 것이며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증거하고 그에게 순종하자.
    [10절]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본 시편은 4절에서 성도를 ‘완전한 자’라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흠과 점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또 본절은 성도를 ‘의인’이라고 말한다. 의(義)는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 도덕적 표준은 그의 계명이다. 사람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신자는 실제로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의롭게 살아야 한다. 또 본절은 성도를 마음이 정직한 자라고 말한다. 정직하다는 말은 올바르다는 뜻이며, 그 개념은 의(義)와 비슷하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 의로운 것이며 올바른 것이다.
    본문은 성도가 하나님을 인해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해 즐거워할 것이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하나님을 자랑하며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을 인해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인해, 그의 기도 응답을 인해, 그의 보호하심을 인해,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인해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극심한 고난과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하심과 보호하심, 도우심과 돌보심을 받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인해 즐거워할 것이다.
    본문은 성도가 하나님께 피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고난과 환난을 직면할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피한다. 찬송가 342장,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우리는 성도답게 살자. 믿음으로 살고, 도덕적으로 흠과 점이 없이, 의롭게, 정직하게 살자. 하나님을 인해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자.
    65편: 하나님의 돌보시는 세계에서 찬송함
    [1절]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다윗은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표현한다.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이름과 그의 하신 일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다. 시온은 성소, 즉 성막이 있는 곳이다.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의 피가 뿌려진다.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마다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성소는 또한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다. 성도들은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송한다. 찬송은 창조의 목적이며(사 43:21) 구원의 목적이다(엡 1장).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히 13:15).
    다윗은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기다린다’는 원어(두미야 ה)는 ‘잠잠함’이라는 뜻인데, 시편 62:1에서는 ‘잠잠히 바란다’고 번역되었다. 찬송은 정신 없이 부르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으로 조용히 생각하며 깨달음을 가지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부르는 것이다. 성도들의 잠잠한 묵상은 은은한 혹은 힘찬 찬송으로 나타난다.
    다윗은 또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서원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께 엄숙히 약속하며 간구하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그 서원을 이행할 것이다. 한나는 자신이 서원한 바를 하나님께 그대로 이행하였다(삼상 1:27-28).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전 5:4). 또 서원의 이행에는 하나님을 찬송함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의 깨달음을 가지고 구원의 하나님을 항상 찬송하자. 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면 다 행하자.
    [2절]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라고 부른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소원을 아뢰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각하시고 응답하신다. 그는 우리의 찬송과 감사를 기쁘게 들으시고 우리의 죄 고백을 듣고 용서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듣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예수께서는 교훈하시기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고(마 7:7-8),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요 14:13-14).
    다윗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고 말한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받은 육체들이다. 죄로 인해 연약해져서 피곤하거나 병들기 잘 하는 육체들, 정신적으로도 불안함과 두려움, 우울함과 슬픔을 잘 가지는 육체들,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쇠약해지는 육체들이며,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육체들, 원하는 선을 행할 능력이 부족하여 죄를 이기지 못하는 육체이며(롬 7:14-15, 18),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며(마 26:41) 죽음에 굴복하는 육체들이다. 그러나 이런 연약한 육체들이기 때문에 모든 육체가 하나님께 나아온다.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소원을 아뢰어 힘과 평안과 구원과 도우심의 응답을 받는 것이다(사 40:28-31; 빌 4:6-7).
    우리는 연약한 육체이지만,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확신하자. 아무것도 염려치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소원을 아뢰자.
    [3절]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죄악은 성도의 찬송에 걸림돌이며 기도에 걸림돌이다. 아니, 우리 삶 전체에 걸림돌이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람은 죄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다. 죄의 결국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멸망이다.
    다윗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악은 인류 전체를 삼켰다.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해 심히 부패되고 더러워지고 연약해졌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다윗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죄를 이길 힘은 사람에게는 없다. 죄를 이길 힘은 하나님께서 긍휼로 우리의 죄과를 사해주실 때, 즉 죄에서 해방될 때 얻는다. 찬송과 기도에 걸림돌이 되고 사람의 삶 전체에 걸림돌이 되는 죄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사유하심밖에 없으며 그 때 사람은 새 삶을 살 수 있다. 미가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사죄가 곧 구원이며 영생의 길이다. 거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대함이 있고 성도의 찬송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날마다 죄와 싸우며 의와 선을 행하자.
    [4절]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본문은 성도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 성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엡 1:4).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둘째, 성도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게 하신 자이다. 구약의 성막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증거한다. 죄인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히 10:19-22). 셋째, 성도는 하나님의 뜰 안에 거하게 된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뜰 안에 거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자이다.
    본문은 이런 성도가 복되다고 말한다. 인생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모신 것,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연합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거기에 영생이 있고 영육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있다. 하나님 안에 모든 복이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는 것, 그것이 가장 불행한 일이다. 그것이 곧 죽음과 영원한 멸망이다.
    본문은 또한 성도의 만족에 대해서 증거한다. 본문은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원어(투브 בוּט)는 ‘복’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성전의 복은 하나님 자신이며 죄사함의 은혜이며 영생의 약속이다. 성도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의 육신적, 물질적 만족은 밑빠진 독처럼 끝이 없지만, 하나님 안에는 인생의 참 만족이 있다. 시편 23:1-2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 안에 성도의 참된 만족이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 믿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집에서 찬송하며 기도하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에게는 참 만족이 있다.
    [5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본문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죄의 결과들인 병, 기근, 재난, 전쟁, 죽음, 그리고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딤전 1:1; 딛 1:3).
    본문은 또 하나님을 ‘땅의 모든 끝과 먼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자’라고 증거한다. 인간은 종족, 언어, 피부색, 문화, 문명 정도를 불문하고 본질적으로 똑같다. 하얀 피부의 서양 사람이나 우리나라 사람같이 누런 피부의 사람이나 인간 본성은 똑같다. 외딴 섬에 사는 사람이나 밀림 속 오지에 사는 사람이나 인간 본성은 똑같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자이시며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도우실 수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은 온 인류,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증거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의를 좇아 응답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일만 행하신다. 의(義)는 도덕 규범에 맞는 것, 인간의 양심에 맞는 것, 올바르고 정당한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는 불의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의로운 일뿐이다.
    본문은 또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일로 응답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는 기이한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 보기에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 보기에 절망적인 것을 변화시켜 소망과 기쁨이 있는 일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다.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공의로 징벌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와 선만을 행하며 살고자 하는 자들을 모든 악에서 기이한 방법으로 건져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자. 하나님은 의를 좇아 응답하시는 자이시므로 우리는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6-7절]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라는 원어(엘로힘 םי)는 ‘강하다, 능력이 있다’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본문은 그가 권능으로 띠를 띠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이다. 욥기 42:1-2,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모든 일을 할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누가복음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산을 세우셨다. 저 크고 험하고 높은 산은 사람이 흙을 삽으로 파서 만들 수 없고 굴착기를 동원해도 어림도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 그의 전능을 잘 증거한다.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사람들이]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끄러운 것들을 조용케 하신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은 사람들에게, 심지어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자란 어부들에게도 큰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피하여 가던 요나가 탄 배는 폭풍으로 인해 거의 깨어지게 되었었다(욘 1:4). 또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배에 탔던 276명의 사람들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으로 인해 두 주간이나 거의 죽을 뻔하였었다(행 27:14-44). 또 인류 역사상 혁명이나 구테타, 데모나 민중 폭동은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조용케 하실 수 있다. 자연만물도, 인간 사회도 그의 손 안에 있다.
    우리는 자연만물과 인간 사회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고 능력의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의지하며 바르게만 살아가자.
    [8절]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본문은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들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땅 끝에 거하는 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주의 징조들’은 자연의 특별한 현상들, 예를 들어 천둥과 번개, 지진, 홍수, 태풍 등을 가리킬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자연의 특별한 현상들을 보고 느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징조들을 두려워한다.
    본문은 또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원문을 다시 직역하면, “당신께서 아침과 저녁의 나오는 것을 기뻐 외치게 하시나이다.” ‘나오는 것’이라는 원어(모차에 יוֹמ)는 ‘나오는 것’(KJV, 한글개역) 혹은 ‘나오는 곳들’(BDB, NIV)이라는 뜻이다. 후자의 뜻이라면, 본문은 동양이나 서양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뜻일 것이지만, 본절의 앞부분과 잘 조화되지 못하는 것 같다(Poole). 전자의 뜻이라면,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아침과 저녁을 즐거워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지구의 운행을 주관하신다. 그는 낮과 밤을 오게 하시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순환케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침과 저녁을 감사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맞는다. 어둠이 가고 날이 밝아온다. 아름다운 자연만물이 드러나고 일하고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 저녁은 사람에게 쉬는 시간이다. 노동자들에게 저녁은 고된 일들을 끝내고 개인적인 일을 볼 수 있는 자유시간이다. 개인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이며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며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아침과 저녁은 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사람들은 아침과 저녁을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며,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침과 저녁을 즐거움으로 맞이하자.
    [9-13절]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 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사는 땅에 물을 주셔서 심히 윤택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땅은 물을 필요로 한다. 물이 있어야 풀과 나무가 자랄 수 있다. 또 본문은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강’은 하나님께서 시기 적절하게 내려주시는 비를 가리킨 것 같다(Calvin, Poole). 이렇게 땅이 수분이 넉넉할 때 곡식이 잘 자라고 풍성한 수확을 얻는다(행 14:17).
    본문은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라고 말한다. ‘연사’(年事)는 한 해의 일이라는 뜻이며 ‘주의 길’은 한 해의 과정을 가리킨다. 한 해 전체가 하나님의 은택으로 가득하다. 하나님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시고 단비로 그 이랑을 부드럽게 하시고 곡식의 싹이 나오게 복 주신다. 땅이 기름지므로 곡식도 잘 자라고 풍성한 열매를 내고 양떼는 좋은 꼴을 뜯어먹고 잘 자라며 새끼들도 많이 낳는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
    본문은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택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수확과 양떼들의 풍성한 출산으로 인해 사람들은 추수와 수확의 기쁨과 즐거움이 넘친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우리는 땅의 모든 풍성함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인 줄 바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66편: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찬송함
    [1-2절]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본문은 온 땅이 하나님께 즐거이 찬송하라고 말한다. 성도 한 개인만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 아니고 또 성도들만 하나님을 찬송할 것도 아니고,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 심지어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온 세상의 사람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외치며 선포하는 것이다.
    본문은 온 땅이 하나님께 즐거이 찬송하라고 말한다. 찬송은 즐거운 소리이다. 찬송은 즐겁고 기쁘게 불러야 한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하였다(약 5:13). 성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하며 또한 주 안에서 항상 찬송하는 자이어야 한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는 찬송을 부를 때 기쁨 마음과 기쁜 표정으로 불러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는 천사들과 같은 모습으로 찬송을 부를 것이다.
    본문은 또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시편 96:8-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 . .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영화롭게’라는 말은 ‘속되지 않고 엄숙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이름도 영화로운 이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찬송해야 마땅하다.
    온 교회가, 아니 온 세상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과 즐거운 표정으로, 또 엄숙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찬송하자.
    [3-4절]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
    ‘하나님께 고하기를’이라는 표현은 찬송의 내용을 말한다. 본문은 우리가 주의 일이 심히 엄위하심을 찬송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위하다’는 원어(노라 אוֹנ)는 ‘두렵다, 놀랍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들은 심히 두렵고 놀랍다. 우주 만물 속에 나타나 있는 그의 창조 사역이 그러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 행하신 그의 일들이 다 그러하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두렵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일들은 특히 그의 큰 권능으로 인해 그의 원수들을 복종시키심에서 나타났다. ‘주의 원수들’은 이스라엘 나라 안팎에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 안의 반역자들이나 이스라엘 나라 주위의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물론 사탄과 악령들이 있다. 모세에게도, 다윗에게도, 심지어 예수님께도 원수들이 많이 있었다.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바로 왕이나, 합법적 지도자 모세를 대적한 고라와 그 동료들과 250명의 족장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다윗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이나 세바도 그러하였다.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는 그 원수들을 이길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큰 권능으로 그들을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은 애굽에 내린 열 재앙으로 바로의 교만을 꺾으셨고, 지도자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그 동료들과 250명의 족장들을 다 징벌하셨다. 다윗의 대적자들도 다 멸망하였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엄위하신 일들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온 땅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찬양하라고 말한다. 몇 명의 경건한 성도들만 찬송할 것이 아니고 온 교회가, 아니,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원수들, 곧 교회의 원수들을 복종시키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일들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자.
    [5-6절]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본문은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고 말한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증거하고 기록한 책이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고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다고 말한다. 특히 그의 기적들과 능력들에서 그러하다. 인생은 동물과 같이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가지는 존재이다. 사람은 그 언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범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며 의인들에게 구원을 주실 때 그의 엄위하신 행위가 드러난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육지 되게 하시고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한 일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첫 번째 난관은 홍해이었다. 애굽 군대의 추격은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위험과 위협이었다. 그러나 그 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를 가르셨고 그들로 육지처럼 건너가게 하셨고 뒤따르는 애굽 군대는 물에 빠져 죽게 하셨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한 후 요단강 앞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마르게 하셔서 그들로 그 강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다. 그것은 두렵고 놀라운 일이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때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했다고 회고한다. 극한 위험과 위기 속에서 사람의 기쁨은 다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이다. 성도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다. 땅의 것들은 다 헛되지만,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소망과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신다.
    엄위하신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을 확신하자. 세상 환난을 두려워 말고 오직 우리의 소망과 위로와 기쁨이 되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7-9절]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셀라).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영원히 통치하시며 그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은 능력의 통치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왕이시다. 또 그의 눈은 완전하셔서 열방을 감찰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까지 살피시고 바르게 판단하시고 공의롭게 보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셔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말과 행위를 감찰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요, 그를 대항하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시며 보살피신다. 시편 저자는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육신의 생명을 지키시고 연장시키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영혼의 생명을 지키신다. 우리 영혼의 생명은 믿음과 의 가운데서 보존된다. 믿음과 의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마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실족함을 허락지 않으신다. 실족한다는 것은 불신앙과 죄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불신앙과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믿음과 의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 성도는 잠시 동안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지만, 그런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거나 주저앉아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를 붙드시고 다시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감찰하시고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특히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로 실족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자.
    [10-12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원문에는 10절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실족지 않게 하신다고 말한 이유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같이 단련하신다. 은은 귀하게 쓰인다. 은은 은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제거한 것이다. 성도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이지만, 지금 죄악된 성질과 습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통해 성도다운 인격으로 점점 변화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고난들을 묘사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허리에 두셨고 사람들로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고 그들로 불과 물을 통행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물에 들게 하셨다는 말은 이방 나라에 포로됨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강제 노역으로 무거운 짐을 졌다. 사람들이 머리 위로 타고 다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굴복과 모욕을 당했다는 뜻이다. 또 불과 물을 통행했다는 것은 불같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현실, 물같이 숨막히는 현실을 통과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그 고난에서 끌어내셔서 풍부한 곳에 들어가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큰 고난을 당했던 욥의 노년에 처음 복보다 더한 복을 주셨듯이,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지만 결국 좋은 결말을 주신다. 그러므로 로마서 8:28은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도 당하지만 그것을 통해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거룩하고 온전해지고 평강을 얻고 마침내 천국에 이름을 감사하자.
    [13-15절]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셀라).
    시편 저자는 고난을 통해 믿음의 단련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서원을 갚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환난 때에 그 입으로 하나님께 말한 것이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의 말씀이다. 사람은 환난 때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더욱 결심하게 되며, 그것이 서원으로 표현된다. 사사 시대에, 입다는 암몬 자손들과의 전쟁에 나가기 전에 서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붙여주시면 그가 돌아올 때 그의 집 문에서 나와 그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였다(삿 11:30-31). 사무엘의 모친 한나는 자녀가 없어서 당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그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였다(삼상 1:10-11).
    본문에 의하면, 시편 저자가 환난 중에 한 서원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라고 말한다. 번제는 소나 양과 염소 같은 짐승을 죽여 토막을 내어 잘라서 깨끗이 씻은 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온전히 불태우는 제사이었다(레 1장).
    번제는, 일차적으로 속죄를 의미하지만, 또한 온전한 헌신과 순종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려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과 결심을 이행하자.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순종하자.
    [16-20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곧 모든 참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을 선포하기를 원하며 모든 성도들이 와서 그것을 들어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은 기도 응답의 일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성도들의 특권이며 그 때 성도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간증하게 된다.
    물론 모든 기도가 다 응답받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기도를 해도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본문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마음에 죄악을 품는다면 우리는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교만, 미움, 욕심 등을 품고 기도하는 기도는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편 저자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의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고 그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셨고 그 인자하심을 그에게서 거두지 아니하셨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선하고 진실하였거나 회개를 동반한 기도이었음을 나타낸다. 시편 저자는 이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그의 혀로 높이 찬송하며 간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음에 죄악을 품지 말자.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며 또 기도 응답을 받을 때 하나님께 더욱 찬송하고 간증하자.
    67편: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1-3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복을 구한다. 죄인은 하나님께 무슨 복을 구할 수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불쾌를 가져오며 죄의 값은 죽음과 불행뿐이다. 하나님께서 긍휼로 죄인을 용납하심 자체가 죄인에게는 큰 복이며 또 그 때 죄인은 복을 구하며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긍휼로 주시는 복은 사죄와 칭의와 화목과 새 생명의 복이다. 또 부수적으로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평안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과 복을 구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민 6:25-26).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의 도를 땅 위에, 그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기를 원한다. 그것은 전도의 소원이다. 구원의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마 28:19; 눅 24:47; 행 1:8). 전도는 전도하는 내용이 너무 복되어서(눅 2:10) 또 멸망하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해서(롬 1:18) 행해져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편 저자는 세계복음화를 소원하며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온 땅의 각 민족, 각 나라에 전파되어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긍휼과 복을 받아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들이 되기를 구한 것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사 11:9; 계 11:15).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계복음화는 교회의 첫 번째 기도제목이며 첫 번째 활동목표다.
    [4-5절]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저자는 열방이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같은 자연을 노래하는 동요나, 인간의 간절한 사랑이나 사모함이나 그리움이나 이별의 슬픔에 대한 노래가 아니고,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그가 베푸신 은총에 대한 노래이다.
    원문에는 “노래할지니”라는 말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열방이 기쁘고 즐겁게 노래하는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가 땅 위에 있는 열방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치리한다’는 원어(나카 ה)는 ‘인도한다’는 뜻이다(BDB, NASB, NIV). 이 두 가지가 다 열방의 찬송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공평하게, 공의롭게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불법을 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객관적 공정성을 가지고 우주적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통치하시며 판단하시고 선인에게 상주시고 악인에게 벌주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열방을 인도하신다. 특히 그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심이다. 그것이 신약교회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족속을 인도하셔서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여 그의 친 백성을 삼으셨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계복음화에 대한 간절한 기도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신약교회의 최대의 과제이며, 우리의 날마다의 기도제목이다.
    우리는,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자. 우리는 또 세계복음화를 기대하며 기도하며 전도하자.
    [6-7절]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땅이 그 소산을 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문자적으로도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해마다 땅이 풍성한 소산을 내게 하신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땅의 소산들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 복뿐 아니라 영적인 복도 하나님께서 땅에 주신 열매들이다. 그것은 온 땅에 주신 구원의 열매들을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온 세상은 많은 구원의 열매들을 맺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6절과 7절에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절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취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라고 말했다. 시편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복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복을 가리키며 또한 구원받은 자가 하는 전도의 복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은 택한 백성의 구원이며,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큰 복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놀라운 예언적 발언이다. 하나님의 뜻은 온 세상에 구원받은 자들이 일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고(막 16:15), 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세계복음화는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상당히 이루어졌다. 한국은 땅 끝의 나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곳이 있다면 그 곳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며 택한 백성이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는 온 세상에서 전도의 결실을 기대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인 세계복음화를 기대하자. 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힘쓰자.
    68편: 원수를 파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함
    [1-2절]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본문은 하나님께 원수들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는 원수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사탄과 악령들과 그들의 종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그들은 또한 성도들의 원수들이기도 하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파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잠잠하시고 악인들의 악행을 못 보신 체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는 살아계시며 전지전능하시며 그가 일어나시면 원수들을 파하실 것이다. 그들은 흩어지며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것이다. 그들은 연기같이 몰려가고 불 앞에서 초의 녹음같이 멸망할 것이다. 시편 37:20에도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는 표현이 나오며, 시편 97:5에는 “산들이 . . . 밀같이 녹았도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담대히 서야 한다. 에베소서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원수들의 강함을 두려워 말자.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활개치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3-4절]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
    시편 저자는 의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의 긍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곧 구약시대에 피의 제사로 나타난 언약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실제적으로도 의롭게 사는 자들이다. 반면에, 악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자들, 긍휼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 또 실제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해야 한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3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4절). 악인들은 혼자 있을 때나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기뻐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 서면 두려워 떨며 피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의 주신 구원과 위로 때문에, 그의 기도 응답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의 열매가 기쁨이라고 말하며(갈 5:22) 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빌 4:4).
    또 시편 저자는 의인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는 원문은 영어성경들처럼 “광야에서 행하시는 자에게 노래소리를 높일지어다”라고 고쳐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NASB, NIV). ‘대로를 수축한다’고 번역된 원어(살랄 ל)는 ‘[노래소리를] 높인다’는 뜻이다(BDB). 죄는 슬픔을 가져오지만, 의는 기쁨을 주고 하나님을 찬송케 한다. 천국은 의와 기쁨과 찬송으로 충만한 곳이며, 성도는 세상에서도 의와 기쁨과 찬송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의인된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의롭게만 살아가자. 또 천국 백성인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5-6절]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처소에 계시다고 표현한다. 거룩하다는 말은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본질이 다르시다. 피조물은 다 유한(有限)하지만,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무한과 유한의 차이는 무한하다. 또 거룩하다는 말은 죄와 불결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죄와 더러움이 전혀 없으시다.
    본문은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표현한다. 시편 10:14,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신명기 10:18,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살피시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을 위해 공의로 판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본문은 하나님께서 고독한 자들을 가족들 가운데 있게 하시며 옥에 갇힌 자들을 이끌어내시며 형통케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소외된 자들을 동정하신다. 하나님 나라에는 외로운 자들이 없을 것이다. 지상 교회도 그래야 할 것이다. 모든 성도는 다 한 가족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옥에 갇힌 자들을 구원해주신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죄와 질병과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에게도 의와 건강과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신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복을 거두시고 영육의 기근을 보내실 것이다. 그들에게는 영육의 궁핍과 부족이 있을 것이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자. 또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
    [7-8절]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앞에서 행하신다고 말한다. 출애굽기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신명기 1:33,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우리의 인도자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과하여 행진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하셨다. 광야는 황무지이며 거친 땅이다. 그 곳은 물과 양식이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셨고 시시때때로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다. 광야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사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지키시고 영육으로 공급하신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천지가 진동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며, 또한 그의 통치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고 능력으로 그들을 돌보시고 도우신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고 염려할 것이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실 것이다(롬 8:31-32).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능력의 통치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앞서 행하심을 깨닫고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그를 따르자.
    [9-10절]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성도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곤핍할 때가 있다.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가 때때로 그런 상황에 처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혹은 저런 이유 때문에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래서 성도는 성경에서 종종 가난한 자, 외로운 자, 가련한 자로 표현된다(시 9:12, 18; 10:2, 9, 10, 12, 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런 곤핍하고 가난한 상황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흡족한 비를 보내주시고 그의 은택을 준비하신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하나님이여 . . .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흡족한 비를 성경은 ‘이른비와 늦은비’라는 말로 표현한다. 신명기 11:14-15,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이른비는 곡식의 파종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가을비요, 늦은비는 곡식을 여물게 하는 봄비이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자기 백성의 영육의 필요를 공급해주신다.
    본문은 그 결과 성도들이 다시 힘을 얻어 견고케 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된 산업의 땅에 거하게 된다고 말한다. 곤핍했던 산업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영육의 은혜로 원기회복을 얻게 되었다. ‘주의 회중’이라는 원어(카얏카 )는 ‘주의 생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만드신 모든 생물이 하나님의 산업에 거하게 될 것이지만, 특히 그를 경외하는 성도가 그러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성도에게도 때때로 곤핍과 가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흡족한 비를 보내사 견고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자.
    [11-14절]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이며 큰 무리가 승리의 소식을 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원수를 물리친 승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불붙여서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다.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도 이런 기쁨과 감격으로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은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라고 말한다. 얼마나 승리가 크고 갑작스러웠으면 집에 거한 여자들에게까지 탈취물이 돌아갔을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큰 승리를 주시는 또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본문은 성도들의 모임이 금빛, 은빛 날개를 가진 비둘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것처럼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그가 택하신 성도들은, 비록 부족과 연약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무리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신다.
    또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방의 열왕들을 눈같이 흩으셨다고 말한다.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살몬은 세겜 부근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삿 9:48). 이방의 열왕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협적 적대세력이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하시고 흩으셨다. 그 때 그 열왕들은 마치 살몬 언덕에 눈이 날림같이 도망치며 흩어졌다.
    원수들을 눈같이 흩으시고 자기 백성을 아름답게 여기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자. 또 그의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하자.
    [15-16절]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15절은 어떤 영어성경처럼 “하나님의 산은 바산의 산과 같으며 높은 산은 바산의 산과 같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KJV, NASB). ‘높은 산’이라는 원어(하르 가베눈님 םי ר)는 ‘봉우리들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산은 시온산을 가리키는 것 같다. 시온산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요단강 북동쪽에 있는 바산의 산은 높이가 약 1,900미터(한라산 정도) 되는 높은 산이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산 곧 시온산은 바산의 산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으로, 영적 특권에 있어서 하나님의 산, 즉 이스라엘 나라는 바산의 산처럼 높다.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이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의 산을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이라고 표현한다. ‘거하시려 하는’이라는 원어는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이라는 뜻이다. 또 본문은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영영히 거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영적 특권이다. 시온산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 곳이며 장차 성전이 세워질 곳이었다. 시온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었다. 그 곳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예표하며 또한 성령의 영원한 내주(內住)하심을 예표하는 뜻이 있다.
    본문은 높은 산들이 하나님의 산, 즉 시온산을 시기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무시하고 멸시하며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임을 인정치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주신 특별한 기적들과 도우심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비방한다.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무시와 시기를 각오해야 한다.
    [17-18절]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의 병거’는 하나님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병거는 사람이 타고 다니는 수레인데, 천사들은 항상 하나님 곁에서 그를 섬기며 그의 일들을 수종든다. 본문은 그들의 수를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5:11도 천사들의 수를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말한다. 천사들은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고 그들의 지혜와 능력도 매우 크다. 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계심같이, 성소에 계심같이 그들 곧 천사들 중에 계신다. ‘시내산 성소에’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시내산에, 성소에’라는 뜻이다(KJV, NASB).
    본문은 하나님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신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구원하시고 그 원수들을 다 멸하신 후에 하늘로 오르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의 귀환이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았던 원수들을 사로잡으시고 그들에게서 전쟁노획물을 받으신다고 말한다.
    옛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전쟁노획물들을 그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나누어줌으로 그 전쟁의 승리를 확인하고 축하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셨고 또 승리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죄와 사망과 사탄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보이는 뜻이 있다. 주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후 이전에 계시던 곳으로 올라가셨다(요 3:13, 62). 또 그는 택한 백성, 곧 우리와 함께 또 우리 속에 영으로 거하신다. 그것은 가장 큰 복이다.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신 하나님, 원수들을 파하시고 승리하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19-20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본문은 하나님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라고 말한다. 우리는 날마다 져야 할 짐이 있다. 가정의 일, 직장의 일, 건강, 인간 관계, 특히 원수들 등의 짐이 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죄의 짐이 있다. 죄책과 죄의 결과로서의 고난과 고생이 많다. 인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져 주신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했다(벧전 5: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건강도, 경제도, 자녀들도, 인간 관계도 다 맡아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본문은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지만, 특히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그는 우리의 죄짐을 져 주신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씻어주셨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또한 본문은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라고 말한다. 구원의 중요한 한 내용은 사망에서 건짐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에서, 원수들에게서, 사고나 재앙에서 우리 생명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죄로부터, 사탄의 권세로부터,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의 영적 생명을 지켜주신다. 우리는 구주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특히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고 섬기며 그를 찬송하자.
    [21-23절]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머리 곧 그 죄 가운데 항상 행하는 자들의 정수리를 부수시리라고 말한다. 원수들은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의 원수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죄 가운데 항상 행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죄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을 파하실 것이다.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또 악인들은 결국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계 19:20; 20:10; 21:8).
    본문은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다. 본문의 ‘저희’는 ‘자기 백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KJV). 그러면 이 말씀은, 옛날 바산왕 옥과의 전투에서 승리케 하셨듯이(민 21:33-35), 또 홍해 바다 깊은 곳을 통과케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극심한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건져내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신 것 같다. 고린도후서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본문은 또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치시고 이스라엘로 승리케 하실 것을 말한다. 그 승리는, 이스라엘이 원수들의 피에 발을 담그고 그들의 개들도 그 원수들에게서 먹을 것을 얻는다는 말로 표현된다. 그것은 완전한 승리를 표현한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원수들을 완전히 이기게 하실 것이다. 로마서 16:20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원수들이 있고 그들로 인한 어려움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들을 파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24-27절]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행차하신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왕을 백성들이 환호하며 축하하듯이,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하나님의 행차를 보며 환호하고 축하해야 할 것이다. 개선 축하식은 성소에서 거행된다. 하나님께서는 성소 안으로 행진하여 들어가신다. 지성소는 그의 임재의 영광을 나타내는 곳이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자들은 육적 이스라엘과 신약교회를 다 포함할 것이다. 가객들 즉 노래하는 자들은 앞서고, 악사들 즉 악기 연주자들은 그들을 뒤따른다. 또 어린 딸들은 작은북을 두드리며 따른다. 가객이 악사보다 앞선다는 말은 진리의 증거가 악기 연주보다 우선됨을 보이는 것 같다. 찬양에서 가사는 곡보다 더 중요하다. 가사는 하나님과 그의 행하신 일들을 고백하며 증거하고 영광을 돌린다.
    본문은 그 모임에, 원수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들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들과 납달리의 방백들이 있다고 말한다.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은 작은 지파, 쇠약해진 지파일지라도 원수들을 주관한다는 뜻일 것이다. 베냐민과 유다는 이스라엘 땅의 남쪽의 지파이고,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 땅의 북쪽의 지파이다. 그들은 온 이스라엘을 대표할 것이다. 온 지파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하나님은 승리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자.
    [28-29절]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본문은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 62:11). 인간의 힘은 보잘것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심히 두렵고 떨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명령을 하시듯이 그는 우리에게 힘을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른 곳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18:1).
    본문은 또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라고 말한다. 원문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이여 강하소서”라는 뜻일 것이다(BDB, NASB). 그러나 하나님의 강건함을 구한 것은 결국 그가 우리를 위해 시작하신 일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을 구한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란 전쟁에서 원수들을 물리쳐 승리케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강하셔서 시작하신 그 일을 다 이루실 것이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본문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라고 말한다. 다윗 당시에 성막은 기브온에 있었고 법궤와 그것을 위한 장막만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장차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질 것을 내다보았고 그것은 솔로몬 왕 때 이루어졌다. 왕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신약 시대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온 세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본다.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명하시고 공급하신다. 특히 그는 구원의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신다. 마침내 온 세상이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30-31절]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본문은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소서”라고 말한다. ‘갈밭의 들짐승’은 애굽을 가리킬 것이다. 애굽왕은 때때로 갈대 숲이 있는 나일강에 누운 큰 악어로 묘사된다(겔 29:3). ‘수소의 무리’도 수소같이 강한 왕들을 가리키며 ‘만민의 송아지들’도 열국의 왕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대적하는 이방나라 왕들을 책망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은 조각들을 가지고 자신을 복종시키면서”라는 말인데, 아마 “자신을 낮추어 은 조각들을 가져오는 자들”이라는 뜻 같으며(NIV), “은 조각들을 가지고 복종할 때까지”라고 번역한 옛날 영어성경(KJV)의 본문도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꾸짖고 굴복케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하실 것을 암시한다. 열방의 굴복은 이스라엘에게는 승리가 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한다. 그는,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라고 말한다. ‘전쟁을 즐기는 백성’은 이방 백성을 가리킨다. ‘방백들’이라는 원어(카쉐만님 םי)는 고대의 번역들에는 ‘사자(使者)들’이라고 번역되었다(LXX, Syr, Vg). 애굽과 구스는 다윗 시대에 남방 강대국들이다. “사자들이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해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는 표현은, 지금 이스라엘에게 강한 적대 세력인 나라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개입하심으로 급속히 항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과 악한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완전히 복종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진리 안에서만 행하자.
    [32-35절]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셀라).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본문은 땅의 열방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한다. 장차 온 세계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장차 세상이 회복되고 새로워질 것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다. 우리는 지금 온 세상의 구원이 상당히 이루어졌음을 본다.
    본문은 하나님을,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 “웅장한 소리를 발하시는 자,” 능력이 많으신 자로 표현한다. 하늘은 옛적 하늘이며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 위에 계신 자시다. 또 하늘은 지극히 높고 하나님은 하늘들의 하늘 즉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자시다. 또 그는 웅장한 소리를 발하시는 자 곧 능력이 많으신 자시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대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34절의 ‘하늘’이라는 원어(쉐카킴 םי)는 ‘구름들’이라는 뜻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낸다. 또 본문은 하나님의 위엄이 성소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성소는 때때로 구름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또 본문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있고 그가 그들에게 힘과 능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시고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시고 구원하심에 있어서 또 그 원수들을 징벌하심에 있어서 그러하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깨닫고 체험하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힘과 능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자.
    69편: 고난 중에 구원을 간구함
    [1-4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
    다윗은 지금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다. 그는 말하기를,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라고 한다. ‘물들,’ ‘깊은 수렁,’ ‘깊은 물,’ ‘큰 물’은 막을 수 없는 환난, 피해 나올 수 없고 해결책이 없는 환난, 목숨까지 위협하는 환난을 가리킨다. 불치의 병이라든지, 경제적 파탄이라든지, 전쟁 같은 것은 다 그런 환난이다.
    또 다윗은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나 속히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목이 마르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바라며 앙망하였으나, 하나님의 응답은 더딘 것 같았다.
    또 정당한 이유 없이, 정당성 없이 다윗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는 그들이 그의 머리털보다 많고 또 강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그들 때문에 억울하게 물질적 손해를 입는 일도 있었다.
    이런 환난의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기도는 성도가 환난날에 대처할 최선의 방책이다.
    성도는 때때로, 해결책 없고 목숨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환난에 직면하지만, 환난날의 최선의 방책은 오래 참고 간절히 구하는 기도이다.
    [5-7절]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다윗은 환난 중에 자신의 우매함과 죄악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고 또 의롭다고 여기지만, 참된 성도는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다. 다윗의 깨달은 부족은 사람 앞에서의 부족이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부족이었다(4절). 우리는 환난 중에 우리 자신의 부족, 즉 하나님 앞에서 더 경건하고 더 깨끗하고 더 충성되지 못하였음을 깨닫자.
    또 다윗은 환난 중에 다른 성도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까봐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다. 다윗이 망하면, 다윗을 바라보던 성도들, 곧 ‘하나님을 바라고 찾는 자들’이 낙심하고 믿음을 잃고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염려한다. 다윗은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할 때 단순히 자신의 유익 때문에 기도한 것이 아니고, 또한 다른 성도들, 즉 교회의 유익 때문에 기도한 것이다.
    특히 그는 그 이유로서 “이는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7절의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 앞절의 이유를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살며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가 믿고 위하며 섬겼던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지금 비방과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을 깨닫자. 또 범사에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며, 또 하나님을 위해 비방과 수치를 당할 것도 각오하자.
    [8-12절]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형제들에게 객이 되고 모친의 자녀들에게 외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그의 형제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멀리하였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려면 가족을 초월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가족들을 초월하지 못하면 주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눅 14:26). 신앙생활은 때때로 가족들의 이해와 협조를 받지 못하는 고독한 길이기도 하지만, 주 안에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다 한 가족이다.
    원문 9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다윗이 그의 가족들과 멀어진 까닭은, 주의 집 곧 성소를 위한 그의 열심 때문이며 또 하나님을 비난하는 불경건한 악인들의 비난이 그에게 미쳤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주의 집 곧 성소를 위한 열성이 있었고 그것은 교회의 거룩함을 위한 열성이었을 것이다. 후에 주 예수께서는 이런 열심을 가지셨다(요 2:14-16). 또 하나님을 비난하는 불경건한 자들의 비난이 다윗에게 미쳤다. 즉, 다윗의 형제들은 그의 열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받는 비난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그를 멀리하였던 것이다.
    또 다윗은 곡하며 금식하였고 굵은 베로 그의 옷을 삼았다. 그것은 주의 집을 위한, 즉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열성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행동들은 도리어 비난으로 돌아왔고 사람들의 말거리가 되었다. 성문에 앉은 자들 곧 노인들과 장로들은 그를 오해하며 욕했고 술취한 사람들조차도 그를 말거리로 삼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려면 가족을 초월해야 하고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열심을 낼 때 사람의 오해나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13-15절]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다윗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한다. ‘열납하시는 때’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 은혜받을 만한 때를 가리킨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시는 때가 있다. 홍수 심판이 이미 시작된 때나 유황불비가 이미 내리기 시작한 때가 그런 때이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부지런히 부르짖어도 이미 은혜받기에 늦은 때가 있다(잠 1:24-28). 그러나 우리는 열납하시는 때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 때는 아직 많은 인자를 베푸시는 때이며 구원하시는 때이다.
    다윗은 심각한 곤란 중에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한다. ‘수렁,’ ‘깊은 물,’ ‘큰 물,’ ‘깊음’ ‘웅덩이’ 등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 “나를 수렁에서 건지소서.”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소서.” 다윗은 극심한 곤란 중에서 구원을, 또 좌절이나 죽음의 모면을 간구한 것이다. 또 그에게는 그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또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라고 말한다.
    어떤 종류의 어려움이라도, 어려움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기도하는 것임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의 열납하시는 때 그에게 나아가 기도하자.
    [16-18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한다. 그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우매함과 죄악을 고백하였다(5절). 그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뿐이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감추시고 그를 멀리하신 것같이 느낀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시지 않는 것 같고 그에게 도움의 손을 펴시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하나님의 빠른 응답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의 원수들은 그를 몹시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19-21절]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가 받는 비난과 수치와 능욕을 다 아신다고 말하며, 또 그의 대적들이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과 주권을 믿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므로 또 원수들이 다 그 앞에 있으므로, 그가 모든 일을 공의롭게 처리하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원수들의 비난이 쓸개나 초를 마실 때처럼 그의 마음을 쓰리고 상하게 하며 그의 근심이 충만하였다. 또 그는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아무도 없었고 위로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만 바라고 호소하며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 특히 원수들의 비난 중에,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인자와 긍휼만 의지하며 기도하자. 그는 우리의 참된 위로자이시다.
    [22-25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다윗은 그를 비방하고 괴롭혔던 악한 원수들이 받을 저주에 대해 말한다. 그는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밥상’은 보통 즐겁고 복된 것이다. 그것은 정상적으로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건강이 되고 행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때로는 악을 음모하거나 악에 연관되게 하는 곳이 되고 여러 가지 병의 원인이 되고 결과적으로 불행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니엘 5장에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은 잔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전의 금그릇으로 술을 마시므로 그의 불경건과 교만을 드러내었고 그 일로 인해 그날 밤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또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경건했던 모세는 죽을 때 나이 120세이었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거한다(신 34:7). 그러나 다윗의 원수들은 건강과 체력이 쇠약해질 것이다. 그들의 눈의 쇠약과 허리의 떨림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또 다윗은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것이며 또 가정의 황폐함을 겪을 것이다. 그들은 자녀가 없어 어린것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뛰노는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 사는 것 같은 가정적 행복이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악인들의 죽음은, 모든 자녀들 앞에서 맞은 야곱의 복된 임종과는 너무 대조된다.
    우리는 의인이 되자. 그래서 우리의 밥상은 즐겁고 복된 상이 되고 우리의 눈과 허리는 강건하고 우리의 집에는 기쁨과 행복이 있게 하자.
    [26-28절]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다윗은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라고 말한다. ‘대저[왜냐하면]’라는 말은 앞에서 원수들에게 저주를 선포한 까닭을 보인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고 상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4절에서 그가 사람들 앞에서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의 원수들은 그의 고난에 고난을 더하여 그를 핍박하였다. 그들은 고난당하는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이다.
    다윗은 또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평소의 악행에 성도를 핍박하는 큰 죄를 더하였다. 성도도 죄성(罪性)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값없이 주시는 의를 얻었다. 그것이 ‘칭의’(稱義)라고 부르는 의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시는 그 의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또 다윗은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고 말한다. ‘생명책’이라는 원어(세페르 카이임 םי ר)는 ‘산 자들의 책’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KJV, BDB).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결과 영생할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이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다(계 20:12). 구원받을 자들은 창세 이후로 거기에 기록될 것이다(계 13:8).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움을 면할 것이며 복된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이다(계 20:15; 21:27).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만 믿고 주의 의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자. 그것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증거이다(요 3:16; 5:24).
    [29-31절]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다윗은 고난 중에 처해 있다. 그는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라고 말한다. 그는 환난으로 인해 물질적 궁핍이 있었을 것이며 심적 고통과 슬픔도 있었을 것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고난을 증거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말했다(고전 4:11-13).
    다윗은 고난의 현실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라고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고난의 구덩이에서 자신을 건져내셔서 높은 곳, 안정된 곳에 세워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시는 자이시다. 참으로 인생을 도우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고린도후서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이제 다윗은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릴 것이다. 감사의 찬송은 짐승의 번제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형식보다 예배자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 구원과 도우심을 간구하자. 또 구원을 체험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자.
    [32-33절]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온유한 자,’ ‘하나님을 찾는 자,’ ‘궁핍한 자,’ ‘수금된 자’라고 표현한다. ‘온유한 자’라는 원어(아나윔 םי)는 ‘비천한 자’(KJV, NASB), ‘가난한 자’(NIV), ‘고난당하는 자, 겸손한 자, 온유한 자’라는 뜻을 다 가진 단어다. 성도는 하나님을 찾는 자이며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때때로 가난하고 궁핍하고 비천하며 온유해지고 겸손해진 자이다. 또 성도는 때로는 하나님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하는 자이다.
    그러나 본문은 성도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보고 기뻐하고 그 마음의 소생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32절에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라는 구절은 “너희 마음이 소생할지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마음에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며(빌 4:4) 또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사 40:31).
    성도가 고난 중에 기뻐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33절의 원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며, 성도가 기뻐할 이유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을 인해 옥에 갇힌 자들을 멸시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출애굽기 2:23,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또 사사기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는 고난 중에 온유와 겸손으로 단련받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자.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힘을 얻자.
    [34-36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본문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천지만물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35절은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찬송의 이유를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사역 때문이다. ‘시온’이라는 말(ןוֹיּ)이 원문에 있다(한글개역에 작은 글씨로 된 것은 고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온 곧 예루살렘성을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견고하게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고 하나님의 종들의 후손이 그것을 상속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가운데 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본문은 성도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롬 8:28).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고전 16:22). 시온의 구원과 유다 성읍들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 대대로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에 이르게 하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천국에서 영생하게 하셨으므로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송하자. 또 하나님의 백성답게만 살아가자.
    70편: 속히 나를 도우소서
    [1-5절]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
    다윗은 고난의 현실에 처해 있다. 원수들은 그의 생명을 찾고 그의 상함을 기뻐하고 있으며 그들은 자긍하며 교만하였다. 그는 구원과 도움이 속히 필요하였다. 그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땅 위에서 사탄과 악령들, 그리고 그들의 종들인 악한 자들로 인해 환난과 핍박을 당하며 물질적 궁핍도 경험한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라고 하나님께 구원과 도우심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5절)라고 말한다. 또 그는, “[그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 . .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그들이]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라고 말한다(2-3절). 기도는 환난을 대처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기뻐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항상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현실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간구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을 체험하며 기쁨의 찬송을 올리게 될 것이다.
    71편: 노인이 주의 의의 구원을 간구함
    [1-3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수치를 당치 않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다. ‘풀어주소서’라는 원어는 ‘피하게 하소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는 다 누더기 옷과 같다(사 64:6). 우리의 담력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의밖에 없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고 그의 복을 받을 자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값없이 주시는 의 안에서(롬 3:21-22)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얻는다.
    성도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시편 저자는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시로, 언제나 가서 거할 바위이시며 우리의 반석이시며 산성이시다. 또 그는 우리의 구원을 명하시는 자이시다. 그것은, 아마 천사들에게 내려지는 명령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환난 중에도 너무 염려할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피할 바위와 산성이 되심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고 특히 환난 때에 그에게 피하자.
    [4-6절]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른다. 그것은 개인적인 친밀한 고백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친밀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섬기고 있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는 지금 악한 자들, 불의한 자들, 흉악한 자들 가운데서 위협을 느끼고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주 여호와” 즉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셔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자로 부르면서 고백하기를,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고 한다. ‘의지’라는 말도 원문에는 ‘나의 의지’라고 되어 있다. 그는 세상의 것들, 즉 돈이나 자녀를 소망으로 삼지 않았다. 또 그는 현실의 고난 중에서 낙망치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으로 그의 소망을 삼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즉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알았고 그를 섬겼고 그를 의지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시편 저자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태에 있을 때에 벌써 그를 택하시고 붙드셨다. 실상,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한다(엡 1:4).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감사하며 악한 세상에서, 악인들의 위협 속에서 항상 하나님만 소망하며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며 살자.
    [7-9절]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시편 저자는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나이가 상당히 든 자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이 든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놀리고 대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심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이 때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라고 말하였다. 견고한 피난처는 어떤 환난과 역경도 피할 수 있는 곳이다. 인간 관계에서의 큰 고통 중에서 하나님은 시편 저자에게 견고한 피난처가 되셨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겠다고 말한다. 그는,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는 자는 마음에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은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어떤 환난과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종일토록 그러할 수 있게 한다.
    시편 저자는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기도한다. 사람은 젊을 때, 힘있게 일할 때에는 자기 능력대로 대접을 받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지만, 늙어 힘이 쇠약한 때에는 때때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인생의 삶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사람 중심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믿자.
    [10-13절]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원문에는 1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절에서 자신을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기를 구한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그의 원수들이 그를 위협하고 당을 지어 그를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고 그를 건질 자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를 모해하려 하였다. 성도는 죽을 것 같은 고난의 환경을 당할 때가 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때가 있었음을 증거하였다(고후 1:8-9).
    시편 저자는 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한다. 시편에는 ‘속히’ 도와주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구한 기도가 종종 나온다(시 22:19; 38:22; 40:13; 70:1, 5; 71;12; 141:1). 성도는 어려울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고 더디 도우시는 것 같은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신다(고전 10:13).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께 원수들을 파하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성도가 그런 기도를 올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와 의의 증거를 위해, 그리고 땅 위에서 도덕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다.
    성도에게는 원수들의 위협이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딘 것 같은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그가 원수들을 파하실 것이다.
    [14-16절]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시편 저자는 ‘주의 의’ 곧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한다. 본 시편에는 ‘주의 의’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2, 15, 16, 19, 24절). ‘의’는 도덕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주의 의’는 하나님의 긍휼과 대속(代贖)의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성도들을 그들의 행위대로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긍휼과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대하셔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의 대속제물 됨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밝히 증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의를 이루셨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으며(롬 10:2-4),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 되셨다(롬 3:21-22; 고전 1:30).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항상 소망하며 더욱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구원, 기도 응답과 승리를 항상 소망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성도들은 그를 항상 소망할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더욱 더욱 찬송하기를 결심한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며 체험하며 그를 더욱 찬송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모든 자들은 그러할 것이다(엡 1장).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종일 전하며 또 주의 의만 진술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곧 죄인들을 구원하는 복음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사도 바울은 이방세계에 나아가 전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만 알기로 작정하였었다(고전 2:1-2). 그 외의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많은 죄와 부족을 용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며 또 평생 주를 전하자.
    [17-18절]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교훈하고 교훈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신명기 6:4-7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를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교훈하였다. 잠언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성경 진리로 교훈해야 하고 자녀들은 그 교훈을 잘 받아야 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흰머리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간구한다.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사람은 평안을 잃고 불행에 떨어지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실수하고 범죄할 것이다. 우리의 생애의 끝날까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지켜주시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이다. 단지, 우리편에서 깨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실히 살고 고의로 불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을 전하는 자가 되었고 또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되기를 구한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대해 말하기를,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벧전 2:9).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을 전하는 자가 되자. 또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자.
    [19-2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大事, 큰 일)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지극히 높고 고상하며 순결하며 그것은 큰 구원의 일로 나타났다. 이런 큰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인가?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라고 표현한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지고 성도가 당하는 심히 어려운 많은 일들도 다 그러하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말했다. 우리의 부족과 실수에 대한 징벌의 고난이든지 단순히 신앙 인격의 훈련을 위한 고난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것들을 많이 경험케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라고 말한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전도할 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했고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지경에 떨어졌었으나, 증거하기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하였다(고후 1:8-10).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큰 고난에서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창대케 하시고 위로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우리를 큰 고난 중에 두기도 하시지만, 그의 의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창대케 하시고 위로하심을 알자.
    [22-24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주의 성실’을 찬양하겠다고 말한다. ‘성실’이라는 원어(에메스 ת)는 ‘성실’ 혹은 ‘진리’(KJV, NASB)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가리킬 수 있고 그것에 근거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실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는 또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도에게 참으로 복된 일이다. 자기 만족과 자기 위안은 음악의 작은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노래하고 악기 연주를 해야 옳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찬송은 기쁘고 즐거운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고난받을 때 기도하지만, 구원을 체험할 때 찬송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라고 말한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행위가 완전한 자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부족을 용서하셨고 우리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로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시켜주셨음을 감사하며 찬송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구원하실 것을 깨닫고 항상 기뻐하고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의를 증거하자.
    72편: 의의 판단력을 구함
    [1-4절]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본 시편의 저자인 솔로몬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의와 판단력을 구한다. ‘주의 판단력’이라는 원어(미슈파테카 י)는 ‘당신의 판단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의 ‘판단’은 ‘의’와 같은 개념이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판단은 완전하고 공명정대한 의이다.
    그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의와 판단력을 구한 것은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을 공의로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2절의 ‘판단하리니’라는 원어는 ‘판단하게 하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고 본 시편의 모든 절이 그러하다(NASB). 좋은 왕은 결코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감정에 따라 행하지 않고 모든 일을 공의롭게 재판하며 특히 가난한 자의 송사를 공의롭게 재판할 것이다.
    공의의 재판의 결과는 평강이다. “의로 인해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산들 혹은 작은 산들’은 나라들이나 마을들을 가리킨다. 불의는 나라들과 동네들을 혼란과 불행에 빠지게 만들지만, 의는 질서와 평강을 가져온다. 그것은 율법에 규정된 하나님의 약속이다(레 26:3-6). 또 의로운 왕은 백성의 가난한 자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고 압박하는 자를 꺾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상적인 의의 왕이시다.
    의로운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자. 우리도 하나님의 의의 판단력을 구하며 의롭게만 살자. 거기에 풍성한 평강이 있음을 알자.
    [5-7절]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5절의 ‘저희’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 곧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해와 달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해와 달에 근거해서 시간을 세기 때문이다. 해와 달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오늘까지 제 궤도에서 움직이고 있다. 왕이 하나님의 의로 나라를 다스릴 때 성도들은 해와 달이 있는 동안 즉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송과 기도를 올리고 그의 계명을 지혜롭게 순종하는 태도를 말한다.
    시편 저자는 의의 통치자가 백성에게 벤 풀에 내리는 비 같고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다고 말한다. 벤 풀은 곧 말라지고 풀을 다 벤 풀밭도 말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풀에게도 땅에게도 단비가 필요하다. 의의 통치자는 기쁨과 행복이 사라지고 슬픔과 곤고함만 가득한 메마른 밭과 같은 세상의 현실에 단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편 저자는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고 말한다. 불경건하고 악한 왕이 다스리는 때에는 악인들이 흥왕하고 의인들이 고통과 핍박을 당할 것이지만, 경건하고 의로운 왕이 다스리는 때에는 의인들이 흥왕하고 악인들은 공의로운 형벌을 받을 것이다.
    또 그 때 땅 위에는 평강의 풍성함이 있을 것이며 그 풍성한 평강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잠언 14: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우리는 의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만 살자. 거기에 풍성한 생명과 평강이 있다.
    [8-11절]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본문은 의의 왕 곧 장차 오실 메시아의 통치 영역이 크심을 증거한다. 그는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곧 온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다. 시편 2: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스가랴 9:9-10,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 . .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요한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하니.”
    본문은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라고 말한다. ‘광야에 거하는 자’는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주위의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었다. 그러나 그 원수들은 의로운 왕 앞에 완전히 굴복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라고 말한다.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이나 아라비아 반도의 나라들, 즉 온 세계 열방이 이스라엘의 의의 왕을 섬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솔로몬 왕국을 가리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표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계의 주이시며 세계 열방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주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섬길 것이다.
    우리는 의의 왕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자.
    [12-14절]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메시아는 의의 왕이실 뿐 아니라, 또한 긍휼이 풍성하신 왕이시다.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 도울 자가 없는 자, 고난당하는 자, 압박과 강포를 당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그들은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하지만, 메시아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피를 귀하게 본다.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는 온 천하보다 크다(마 16:26).
    메시아는 가난한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시며(12절),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시며(13절),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실 것이다(14절). 세상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지만, 메시아는 그들과 달리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러한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했다. 또 잠언 29:14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왕은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약성경도 우리에게, 서로 마음을 같이 하고 불쌍히 여기라고 하였다 교훈하였고(엡 4:32; 벧전 3:8), 또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며(약 1:27)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와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약 2:15-16; 요일 3:17-18).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긍휼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늘 그를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를 본받자.
    [15-16절]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15절에 “저희가 생존하여”라는 원문(위키 יי)은 “저가 살아계시며”라고 다시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NASB). 의의 왕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히브리서 저자도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심이니라”고 증거했다(히 7:24-25). 그는 지금도 살아계시다.
    본문은 살아계신 메시아께 사람들은 스바의 금을 드리고 그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찬송한다고 말한다. 금은 세상에서 대표적인 보물이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금 120달란트를 예물로 주었듯이(왕상 10:10),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황금을 드렸듯이(마 2:11),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귀한 보물들을 드릴 것이다. 또 사람들은 그를 위해 항상 기도하며 찬송할 것이다.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의 나라와 교회와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한다는 뜻일 것이다.
    본문은 또 “산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고 말한다. ‘화곡(禾穀)’은 ‘곡식’이라는 말이다. 산꼭대기에는 보통 나무나 곡식이 거의 없다. 그러나 메시아 왕국에는 산꼭대기 같은 곳에서도 구원받을 영혼들이 많고 또 예루살렘성 같은 곳에 사는 자들은 왕성할 것이다. 메시아 왕국의 백성들은 그 수가 많고 또 왕성할 것이다.
    영원히 살아계신 주께 귀한 보물을 드리며 기도하고 찬송하자. 또 산꼭대기 같은 곳에도 믿는 이들이 많고 왕성할 것을 믿고 힘써 전도하자.
    [17-19절]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본문은 메시아의 이름이 영구하며 그 이름이 해 앞에서 번창하리라고 말한다. ‘장구하다’는 원어(야닌 ןי)는 ‘증가하다, 번창하다’는 뜻이다. 메시아는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처럼 잊혀지는 이름이 아니고 영원하고 번창하는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유대 땅 갈릴리의 나사렛 마을에서 시작되어 유대 나라 전체와 소아시아와 마케도냐와 로마, 그리고 온 유럽과 미국과 온 세계에 퍼져나간 이름이다.
    본문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복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창 12:3),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구원의 복, 곧 영육의 영생의 복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충만하게 미쳤다(갈 3:14).
    본문은 또한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이라고 말한다. 온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할 것이다. 또 그들은 홀로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할 것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 것이다. ‘아멘’은 ‘진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시편의 제2권(42-72편)은 주로 다윗의 시들이었고, 본문은 이제 다윗의 기도가 그쳤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이 복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하자.
    73편: 악인의 종말과 참 성도의 복
    [1-3절]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편 저자는 자신이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한다. ‘실족하거나 미끄러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결국 낙심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왜 그렇게 실족할 뻔하고 미끄러질 뻔하였는가? 그 이유는 3절의 말씀대로 그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시기하였기 때문이었다. 악인이 왜 평안하고 형통한가? 왜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악인을 평안 중에 내버려두시는가? 세상에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 이것이 시편 저자가 불신앙과 죄에 떨어질 뻔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참으로”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는 실족하거나 미끄러지지 않았고 불신앙과 죄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속(救贖)하신 백성이다. 그들 중에는 불경건하고 악하게 행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들, 곧 미움과 음란과 거짓과 탐심의 더러운 죄들을 버린 순결한 성도들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신다. 그들은 복을 얻고 평안과 형통을 얻고 어려울 때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말씀에 굳게 서서 불신앙에 떨어지지 말자. 하나님을 확신하자. 또 미움과 음란과 거짓과 탐심을 버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자.
    [4-7절]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본문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증거한다. 본문은 그들이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나 재앙도 없다고 말한다. “그 힘이 건강하다”라는 원문(발리 울람  םוּא אי)의 뜻은 “그들의 몸이 살찌다”이다. 죄는 질병들의 원인이지만, 이 악인들은 건강하다. 7절에서도 그들은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난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경제적 유여함도 누린다. 본문은, 그들의 소득이 마음의 소원보다 더 많다고 말한다.
    또 그들은 환경적으로도 평안하다고 말한다. 본문은, 그들이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다고 말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라고 하였다(렘 12:1). 욥도 말하기를,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하였다(욥 12:6).
    욥기 21장도,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않으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라고 증거한다(욥 21:7-10).
    또 악인들은 교만하고 강포하다. 본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라고 하였다. 온유하고 겸손함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성품이지만, 악인들은 다르다.
    악인들은 형통할 때가 있다. 그들이 건강하고 여유롭고 평안하면서 교만하고 강포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죽지 않았다.
    [8-9절]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본문은 악인들이 악한 말을 한다고 말한다. ‘능욕한다’는 원어(무크 קוּמ)는 ‘조롱한다’는 뜻이다(NASB, NIV). 악인들은 남을 조롱한다. 또 그들은 악하게 압제하여 말한다. 또 그들은 거만하게 말한다. 악은 교만에서 나온다. 또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라는 원문은 “그들의 입은 하늘을 대적하고”(KJV, NASB)라는 뜻일 것이다. 교만하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또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다닌다. 악한 자들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악한 말을 퍼뜨린다.
    이것은 성도들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가르치며(엡 5:4) 또 “주인들아 너희도 종들에게 공갈을 그치라”고 말한다(엡 6:9). 또 성경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교훈한다(잠 20:19).
    [10-11절]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그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 그 중에서도 형식적인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고, ‘잔에 가득한 물’은 악한 자들의 악한 말들과 영향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대신에 악한 자들에게로 돌아와 그들과 친근히 하며 그들의 말을 자꾸 들음으로써 악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고 불신앙적인 말을 내뱉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을 다 아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거만하고 위협적이고 조롱하는 말을 하는 악한 자들과 가까이 하지 말자. 우리는 경건하고 덕스럽고 선한 말만 하자.
    [12-14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편 저자는 악인들과 자신을 대조하며 말한다. 그는 앞에서 말한 이런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이 더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분명히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평안과 풍족함과 형통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내 마음을 깨끗이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게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사람의 마음에서 말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손을 깨끗이 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손은 사람의 일과 행위를 가리킨다. 사람은 손으로 모든 일을 한다. 성경은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한다(약 4:8). 그러나 시편 저자는 성도의 정결한 삶이 실로 헛되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일마다 성도를 간섭하시고 어떤 잘못이 있을 때 그를 징책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하며(히 12:5-6), 또 그 징계가 우리의 유익을 위하고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는 것이며 그것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후에는 그것으로 연단을 받은 자들에게는 의와 평안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히 12:10-11).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믿음과 성결과 겸손과 온전함을 위해 유익하다.
    우리는 악인들의 형통을 인해 불평하거나 낙심치 말자. 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책을 그의 사랑의 표로 감사하게, 달게 받자.
    [15-17절]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편 저자는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는 말은 13-14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종일 재앙을 당하니 마음을 정하게 하고 손을 깨끗게 한 것이 헛되다고 말하겠다는 뜻이다.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라는 말은 주의 자녀들의 세대를 배반하여 잘못된 말을 할 뻔하였다는 뜻이다. 시편 저자는 악인들의 형통을 보고 믿음 없이 잘못 판단하는 죄를 범할 뻔하였다. 사람은 어떤 사건의 현재적 면모만 보고 잘못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 일의 현재의 면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말이다.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이 가장 중요하다.
    시편 저자는 “내가 어떻게 이것을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라고 말한다. 어떤 현실이든지 사람이 그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시편 저자는 악인들이 어떻게 그와 같이 형통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매우 곤란함이 있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성소에 들어갈 때에 그것을 바르게 깨닫게 되었다. 성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곳이다. 성소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는 곳이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곳이다. 그 곳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는 곳이다. 성령께서는 거기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빛을 더욱 밝히 비추어 주신다.
    우리는 자신의 판단을 너무 신뢰하지 말자.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것을 인정하며 그의 말씀과 기도로 그의 뜻을 깨닫자.
    [18-20절]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시편 저자는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멸망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 참으로”라는 표현은 악인들의 멸망이 진리임을 강조한다. 악인들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일이다. 악인들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또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재앙은 졸지에, 한 순간에 임한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은 하루아침에 시작되었다.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도 하루아침에 임하였다. 대형사고가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듯이,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한 순간에 황폐케 하시고 전멸케 하신다.
    시편 저자는 또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본문은 세상의 일들을 꿈과 같다고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의 악인들의 형통은 꿈과 같다. 꿈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다. 물론 이 말은 현실도피적인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한 긴 안목에서 현실을 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아무리 꿈에 영광과 권세를 누렸다고 할지라도 꿈을 깬 후에 그 꿈을 무시하듯이,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아무리 부귀와 권세와 영광을 누린다 할지라도 주께서 일어나 심판하시면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헛되며 영원한 멸망에 던지울 것이다.
    악인들은 참으로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은 갑자기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그 앞에서 바로 살자.
    [21-23]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산란하다’는 원어(잇캄메츠 ץ)는 ‘쓰라리다, 괴롭다’는 뜻이다(BDB). 시편 저자는 자신의 잠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쓰라리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우매무지함을 깨닫고 자신을 “주의 앞에 짐승”이라고 고백한다. 지혜로운 인생이 기본적 진리를 알지 못했으니 어둡고 무지한 일이며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인간의 인간다움은 지혜와 지식에 있는데, 이런 기본적 지식이 없었으니 어찌 짐승과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런 연약하고 무지한 자이지만, 항상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무지한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자이었다. 그는 경건한 자이었다. 성도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성도는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고 의(義)가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섬기게 되었고 그와 날마다 교통하고 교제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듣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는 자이다. 이것이 성도의 복이며 가치이다.
    시편 저자는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주와 함께하는 자, 곧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그의 붙드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 주께서 그를 붙드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낙심했을 것이며 불신앙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붙드심으로 그는 범죄치 않았고 하나님을 인정했고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확신했고 위로를 얻었던 것이다.
    인생은 무지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와 항상 함께하는 자, 곧 말씀과 기도로 교통하는 자는 그의 붙드심을 얻을 것이다.
    [24절]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본문은 성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성도를 그의 교훈으로 인도하신다. ‘교훈’이라는 원어(에차 ה)는 ‘조언, 충고’라는 뜻이다(BDB, KJV, NASB, NIV). 하나님의 조언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조언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 속에 다 들어 있다.
    성경은 캄캄한 밤에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나침반과 같고 등대와 같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한다. 성경은 또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한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삶을 가리킨다. 성경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의의 길로만 가게 한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또 하나님께서는 후에 영광으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다. ‘후에’라는 말은 죽은 후를 가리킨다. 사람의 일생은 죽음으로 내세와 이어진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 성도가 죽은 후 들어갈 천국은 영광의 세계이다.
    성경은 성도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을 밝히 증거한다.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교훈을 잘 받아 의의 길로만 행하자. 또 우리는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의 천국으로 영접하실 것을 믿자.
    [25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편 저자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라고 고백한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치 않는다. 그것이 유일신(唯一神) 사상이며 유일신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선포하셨다(출 20:3). 또 신명기 6:4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증거하기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다(고전 8:5-6).
    시편 저자는 또한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성도는 부모, 남편, 아내,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모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한다(사 2:22).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사랑할 뿐이지 하나님과 사람을 감히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신 6:5). 주께서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0:37), 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4:26).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만 가장 사랑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자.
    [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 저자는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젊은 때도 피곤하고 쇠약할 때가 있다. 30세 청년도 죽을병에 죽기도 한다. 환난 중에는 누구나 심신이 쇠잔해진다. 이사야 40:30은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진다”고 표현한다. 사람이 노년에는 더욱 그러하다. 전도서 12:2-6의 표현대로, 노년기에는 손과 팔이 떨리고 등이 굽어지고 얼굴과 눈이 어두워진다. 목소리가 쇠해지고 머리에 살구꽃이 피고 식욕도 떨어진다. 두뇌도, 심장도, 신경조직도, 근육도, 핏줄도 다 약해진다. 거기에 마음까지 약해진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라고 고백한다. 그는 심신이 쇠잔해도 하나님만 의지한다. 그는 하나님을 “내 마음의 반석”이라고 말한다. ‘반석’이라는 원어(추르 רוּצ)는 ‘지지물, 방어물’이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힘’이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그는 힘이 없고 의지할 곳이 없을 때 하나님을 힘으로 삼았고 의지할 곳으로 삼았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은 피곤함이 없으시며 자기를 의지하며 앙망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 이사야 40:31은 말하기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을 “영원한 분깃”이라고 말한다. 분깃은 몫, 유업, 상속받을 기업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시다. 그는 이 땅에서도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실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심신은 약하여 때때로 쇠잔해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자.
    [27-28절]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대저’ 혹은 ‘왜냐하면’이라는 말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모하며 하나님을 마음의 반석과 영원한 분깃으로 삼는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가 망할 것이며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섭과 속박으로 여겨 싫어하여 그를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영적 음행과 같다고 표현한다. 모든 피조물의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헛되고 죄악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음녀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망한다. 그것은 단지 위협의 말이 아니고 진리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악되며 또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온갖 죄악에 떨어지게 되며, 따라서 그 결과는 멸망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와 성경 역사에서 증명된 바이며 성경이 밝히 경고하는 바이다. 지옥은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를 가까이 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는 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의지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기를 결심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그에게 복이라고 고백한다. 사죄와 의와 영생, 평안과 위로와 용기가 다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또 그는 하나님을 그의 피난처로 삼는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그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만 의탁하였다. 또 그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 즉 그의 기도 응답과 구원과 도우심의 복된 체험들을 전파하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지 말자. 그것은 멸망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우리는 그를 피난처로 삼고 체험하며 그를 증거하자.
    74편: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함
    [1-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에 대해 증거한다. 그 징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버리셨는가 생각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연기나는 불의 징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표가 아니고 사랑하시는 표이었고 이스라엘의 성결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잘 받고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치시는 양이라고 표현한다. 또 그는 이스라엘을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이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이라고 표현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자기 기업으로 삼으시고 그 가운데 거하시는 백성이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을 기억하시고 생각해주시기를 구한다.
    지금 성소는 심각히 파괴되어 다시 복구하기 어려워 보인다.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히 구별한 성소, 그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 황폐한 곳을 돌아보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도록 항상 순종하자. 그러나 징계받을 때는 달게 받고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간구하자.
    [4-8절]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그 땅에서 어떻게 악을 행했는지 증거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주의 대적’이라고 표현하며 이스라엘을 ‘주의 회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대적자들인 원수들은 하나님의 회중, 즉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시끄럽게 떠들어대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모욕하였을 것이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그 땅을 자기의 소유물로 표시하였다.
    시편 저자는 또 그 원수들이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과 같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었다고 증거한다. 국한문 성경에는 ‘철퇴’(鐵槌) 대신에 ‘철추’(鐵椎)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의 모든 조각품들이 세속적인 물건들처럼 부서졌다. 또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소를 불사르며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다고 말한다. 성소는 하나님의 성소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인데, 그 원수들은 그 곳을 불사르며 그 곳을 더럽혔다. 또 시편 저자는 그들이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다고 말한다. ‘회당’이라는 원어(모아데 יוֹמ)는 ‘집회소들’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만 모독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섬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성소의 조각품들을 부수고 성소를 불사른 죄악은 심히 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셨지만, 이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어나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성소가 부서지고 불탄 것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큰 심판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불태운 큰 죄에 대해 벌하실 것이다.
    [9-11절]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시편 저자는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이었다. 회복의 표적 즉 구원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중의 갈 길을 지시하는 선지자도 없었다. 또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성도는 때때로 이런 절망적 상황을 직면한다. 사도 바울도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적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고후 1:8-9).
    더욱이, 대적자들은 계속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비방하였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라고 말한다. 다윗도 그의 생애에서 많은 대적자들을 만났다. 그는 시편 3편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라고 표현하였다(시 3:6). 사도 바울에게도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다. 그는 존경도 받았고 비난도 받았다(고후 6:8).
    시편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간구하기를,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의 오른손을 거두시면 대적들이 이기겠지만, 그 손을 빼어 그들을 향해 펼치시면 대적들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을 구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시 3:8).
    우리는 구원의 가망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원수들의 비방이 가득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자.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구하자.
    [12-15절]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 시작 때부터, 아니 영원 전부터 왕이시며, 우리가 출생한 때로부터 우리의 왕이시다. 그는 우리를 만드셨고 통치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 우리는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할 존재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그의 구원을 베푸심에서 나타난다. 그는 능력의 왕이시다. 그는 우리의 연약과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고 또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인 사탄과 악령들로부터 또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또 악어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들에게 식물로 주셨다고 표현한다. ‘용’이라는 원어(탄닌 ןי)는 고래나 상어 같은 ‘큰 바다짐승’을 가리키고, ‘악어’라는 원어(리웨야산 ן)는 악어 같은 ‘바다 괴물’을 가리킨다. 이 짐승들은 애굽의 장관들을 비유한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고 뒤쫓아오는 애굽의 장관들을 다 죽이셨다. 그들의 시체는 사막에 거하는 새들의 식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놀라웠다.
    또 하나님께서는 바위를 쪼개셔서 큰물을 내셨고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다. ‘큰 물’이라는 원어는 ‘샘과 강’이라는 뜻이고 ‘길이 흐르는 강’이라는 표현은 ‘마르지 않고 항상 흐르는 강’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위에서 샘물을 주셨고 요단강을 마르게 하셨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베푸신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왕권을 깨닫고 그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만 따르며 섬기고 순종하자.
    [16-17절]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고 말하며, 또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섭리적 손안에 있다. 천지만물이 그의 것이며 우리의 모든 시간도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하며 밤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쉬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0:3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셨다”고 말한다. 땅도, 바다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셨고 각 나라의 경계도 정하셨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산도, 들도, 흙도, 나무들과 풀들도 다 하나님의 것이며, 강도, 호수도, 바다도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만물의 혜택을 누리며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계절들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사계절을 주셨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하나님께서 주신 계절들이다. 더위도, 추위도, 더운 지방도, 추운 지방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계절들 속에서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법을 터득하였다. 우리는 이 사계절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아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온 세상의 놀라운 창조자요 섭리자시며, 낮과 밤, 땅과 바다, 여름과 겨울을 주관하시는 왕이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섬기며 따르자.
    [18-19절]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세상에는 원수가 있다.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원수이다. 그러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자식이 부모를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큰 진노의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중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의 이름을 욕하고 있었다.
    한편,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은 고난 가운데 있다. 시편 저자는 그들을 ‘주의 멧비둘기’이며 ‘주의 가난한 자’라고 표현한다. 집비둘기는 늘 보호를 입고 먹이의 공급을 받을 것이지만, 멧비둘기 곧 산비둘기는 들짐승들에게 잡아먹힐 위험을 항상 안고 산다. 또 ‘가난한 자’라는 원어(아니 י)는 ‘핍박당하는 자’라는 뜻도 있다(NASB, NIV). ‘들짐승’이라는 원어(카야 ה)는 ‘짐승’이라는 뜻 외에, ‘무리’라는 뜻도 있다. 옛날 영어성경은 그 단어를 ‘악한 무리’라고 번역하였다(KJV). 원수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을 위협하고 죽이려 하고 있다.
    시편 저자는 이런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산비둘기의 생명을 악한 무리[혹은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그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비방과 악행들을 기억하시고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들과 위협들을 돌아보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의 악행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의 처한 상황을 돌아보시고 반드시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성도를 핍박하는 원수들이 있는 세상에서 성도는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보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20-21절]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시편 저자는 “땅의 어두운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흑암 중에서 빛을 만드셨었다. 세상에는 실제로 어두운 곳들도 많고 영적으로 어두운 곳, 즉 죄악된 곳들도 많다. 죄악된 세상의 특징은 강포함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강포한 자의 처소가 땅에 가득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한 자는 강포하다. 그러므로 창세기 6:11은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했던 옛 세상의 사람들의 특징이 강포함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시편 저자는 또 성도의 고난에 대해 말한다. 그는 성도를 ‘학대받은 자’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표현한다. 이 세상이 악하고 강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심적이게 사는 자들은 때때로 미움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하고 궁핍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당하는 현실이며 또 성도는 이런저런 고난 중에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더욱 성숙해진다.
    시편 저자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언약을 돌아보소서”라고 말한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도덕법과 의식법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세상에서 항상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할 것밖에 없다. 또 시편 저자는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셔서 그를 찬송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강포한 세상,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자. 또 우리는 고난 중에도 믿음과 온유함으로 살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22-23절]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
    시편 저자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종일 하나님을 비방한다고 표현한다. 그들은 어쩌다 실수로 한두 번 하나님을 비방한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종일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하며 떠들어댄다고 표현한다. 그들은 조용히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을 하거나 고민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비난하며 모욕한다. 그러한 대적의 절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이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 총독 빌라도에게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데모하듯이 외쳤었다(눅 23:18-23).
    시편 저자는 그들을 ‘우매한 자’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더라면 그를 찬송하고 그에게 감사를 올렸을 것이다. 또 그들이 능력의 하나님을 대적하니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과 싸워 이길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자신을 해롭게 할 뿐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자신을 변호하소서”라고 아뢴다. 그것은 주께서 자신이 정당하시고 비난을 받을 자가 아님을 증거하시라는 호소이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악행을 기억하시고 잊지 마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 한마디까지도 마지막 날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은밀한 행위까지 다 심판하실 것이다(롬 2:16).
    우리는 악하고 어리석은 세상 사람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자가 되지 말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바라자.
    75편: 하나님은 교만한 악인들을 꺾으심
    [1-3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하나이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많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우리의 생명도, 재능도, 건강도, 일용한 양식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다. 특히 우리의 구원과 천국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풍성한 감사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움을 감사한다. 주의 이름이 가깝다는 말은 그의 심판이 가깝고 우리의 구원의 완성도 가깝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신 4:7). 1절 끝부분은, “주의 기이한 일들이 그것[하나님의 가까움]을 전하나이다”(KJV)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에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2절의 “내가”라는 말은 성경의 영감을 보인다. 시편 저자는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심판하실 때 의와 선을 행한 자들은 칭찬을 받을 것이지만, 불의와 악을 행한 자들은 진노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둥을 견고히 세우셨지만, 땅에 살면서 악을 행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 죄악으로 인해 땅에서 멸망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경건한 자들에게는 가까이하시지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정하신 때에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바로 알자.
    [4-7절]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저자는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히 행치 말라고 말하며 행악자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고 말한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악을 행한다. ‘뿔을 든다’는 표현은 힘을 자랑하듯이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또 그들에게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교만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됨과 무가치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크게 여기는 태도이므로 참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을 매우 미워하신다. 잠언 6:16-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사람은 교만하면 멸망한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시편 저자는 자기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제시하기를, “이는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심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이 높임을 받고 존귀한 지위에 오르는 것은 그 주위의 유력한 사람들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율법의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실 수 있다(신 28:13), 또 다니엘 4:17의 말씀대로, 지극히 높으신 그는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다.
    우리는 교만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인간적 방법으로 높아지려고 하지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자.
    [8-10절]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편 저자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해 말한다. 그는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거품이 일어나는도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다. 또 그는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신다”고 말한다. 혼합된 술은 더 취하게 하는 술로서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적당한 진노가 아니고 두렵고 무서운 진노이다. 또 그가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철저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며 악인들은 그 진노를 남김없이 다 받게 될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제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는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리라”고 말한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야곱이 인간적 약점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단련시키신 하나님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가 야곱의 하나님을 선포하고 찬양하는 까닭은 그가 연약한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의 악한 원수들을 공의로 징벌하셨기 때문이다. 참된 찬양과 전도는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할 때 나온다.
    시편 저자는 또 “[나는]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고 말한다. 악인들의 권세가 일시적으로 크고 강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깨뜨리시고 파해버리실 것이며 참된 성도들도 그와 같이 행할 것이다. 또 의인의 권세는 비록 지금 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하시고 마침내 높이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악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자. 또 우리같이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신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증거하자.
    76편: 전쟁을 파하신 하나님을 노래함
    [1-3절]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그는 이방 백성에게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은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체험하였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시다고 말한다.
    시편 저자는 또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라고 말한다. 살렘과 시온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 가운데,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 거하셨다. 특히 그는 예루살렘성전에 자신의 임재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소(출 25:8)이며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이었다(왕상 8:13).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큰 특권이요 행복이었다.
    시편 저자는 또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뜨리시도다”라고 말한다. ‘화살’이라는 원어는 ‘활의 불꽃’이라는 말로서 화살을 가리킨다(BDB). 세상은 육적으로, 영적으로 전쟁터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들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보호자이시며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 성경과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큰 특권과 복으로 알고 늘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르고 담대하게 살자.
    [4-7절]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시편 저자는 “주는 약탈의 산들보다 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말한다(KJV, NASB). ‘약탈의 산들’이라는 말은 세상의 왕들과 나라들, 혹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가리킬 것이다. 세상의 왕들과 나라들,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비록 외적 영광이 크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들보다 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지혜와 능력이 지극히 크시며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신다.
    시편 저자는 또 말하기를,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며 자기 잠을 자고 장사(壯士)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잠을 잔다,’ ‘잠이 든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이고,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한다’는 말은 힘을 쓰지 못한다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이방 나라들을 치시면 마음이 강한 용사들이라도 탈취를 당하며 죽고 힘이 센 장사들도 그 손으로 공격하거나 방어하지 못하고 패배를 당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면 병거와 말도 다 죽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노(怒)는 심히 두렵다. 그것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과 같은 힘이 있다. 선지자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를 증거하기를,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라고 하였다(나 1:6).
    우리는 세상의 권세자들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그의 진노의 능력을 알자.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8-10절]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한다. 그는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마치 최고법정의 대법관처럼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 세상에는 마지막 대심판이 있고 하나님은 그 심판장이시다. 요한계시록 20:11-12,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시편 저자는 또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잠잠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심히 두렵기 때문이요 그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또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원수들의 분노가 위협적일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인해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또 주께서는 그들의 남은 노를 금하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악인들을 벌하시고 의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 때에 악인들은 벌을 받을 것이지만,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 그 인격이 온유와 겸손으로 준비된 그들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믿자. 그 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온유한 자로만 살자.
    [11-12절]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시편 저자는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라고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키며,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 이름으로 엄숙히 서원하고 그 서원을 성실하게 갚아야 한다. 그러나 본문은 또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방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예물을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뜻을 내포한다.
    시편 저자는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라”고 말한다. 방백들의 심령은 대체로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이기보다는 교만하고 강포한 심령이다. 교만은 사람들 앞에서,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태도이다. 강포는, 사랑으로가 아니고 힘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지위가 높아지면 교만해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과 강포를 미워하신다. 그는 세상의 방백들보다 더 권세와 능력이 크시며, 또 그들의 교만과 강포한 심령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방백들의 교만하고 거친 심령을 꺾으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왕들보다 더 크시고 높으신 왕, 곧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크신 왕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을 심판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악한 왕들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며 그의 심판과 징벌은 참으로 두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날 때 세상의 모든 왕들은 그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서원하고 그것을 갚자. 또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자. 또 우리는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자.
    77편: 하나님의 옛적 기사들을 기억함
    [1-2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편 저자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였다. 그는 그의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음성으로 하는 기도는 장점이 있다. 음성으로 하는 기도는 묵상으로 하는 기도보다 더 명확하고 자세한 내용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음성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화와 같다. 그런 기도는 공상과 졸음을 피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특히 음성으로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음성으로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편 저자는 환난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밤에 그의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응답받기까지 기도를 중단치 않았다. 기도의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끈질긴 기도를 해야 한다. 사람의 심리적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한다. 참 위로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늘 기도하되 특히 환난 때에 부르짖어 기도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까지 기도를 중단하지 말자.
    [3-4절]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시편 저자는 환난 중에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생각하다’는 원어(자카르 ר)는 ‘기억하다’는 뜻이다. 그는 과거에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과거에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도우심을 기억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기억할 수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하였다(롬 15:4).
    그러나 지금 시편 저자는 심령이 상하고 괴로운 상태에 처해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불안하고 근심하며 그의 심령은 상해 있다. 그는 밤에도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지내고 있다.
    그가 지금 이런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은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현재를 비교해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과 능력을 체험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현재 하나님의 버려두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를 고난 가운데 내버려두신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버려두시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버려두시는 기간을 잘 참자. 우리는 그 때에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반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자.
    [5-9절]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시편 저자는 옛날 곧 이전 해들을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이전 해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으로 도우시고 구원하셨던 때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사건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많은 은혜의 일들을 경험하였다. 성경은 옛날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는지에 대해 증거한다. 우리 개인의 생의 발자취를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많은 은혜의 일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자신이 밤에 한 노래를 기억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과거의 잘못된 일들은 우리 자신을 겸손케 하고 앞으로 더 조심케 하고, 과거의 잘한 일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를 더 의지하게 만든다. 시편 저자는 그 일들을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한다고 말한다. ‘묵상’은 조용히 되새기는 것이고, ‘궁구’는 좀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고 대처하기 위해 우리의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시편 저자는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며 자신에게 회의적인 질문을 하였다. ‘허락’이라는 원어(오메르 ר)는 ‘약속’이라는 뜻이다(BDB, KJV, NASB). 그러나 성도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 성경 역사와 우리의 옛일들을 기억하고 묵상하자. 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기다리자.
    [10-12절]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절망적 상황에서 회의적인 질문을 하며 괴로워하였다. ‘연약함’이라는 원어(칼로시 יוֹלּ)는 ‘찔림, 쓰라림, 상함, 괴로움’ 등의 뜻이다. 그러나 그는 곧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였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라는 표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셨던 시대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놀라운 기적들을 베푸셨다. 국한문 성경에 記事(기사)라는 말은 奇事(기사)로 수정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지금 그 기적들을 기억하고 있다. ‘진술한다’는 원어도 역시 ‘기억한다’는 뜻이다(KJV, NASB, NIV).
    우리는 성경에서 또 우리의 삶의 발자취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기억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를 더욱 잘 섬기며 따르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교훈하였다(신 9:7).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고 말하였다(욜 1:3).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그의 행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일과 그의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 그의 선하심과 그의 선택적 사랑을 나타낸다. 우리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일을 묵상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시 1:1-3). 또 우리는 모든 들은 말씀을 더욱 간절히 조심하여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히 2:1).
    우리는 환난 중에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과 능력의 일들을 기억하고 묵상하자. 과거의 일들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위로와 지침이 된다.
    [13-15절]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라고 말한다. ‘주의 도(道)’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길, 곧 하나님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극히 거룩하다’는 원어(바코데쉬 שׁ)는 ‘거룩함 안에 있으시다’ 혹은 단순히 ‘거룩하시다’(NASB, NIV)는 뜻이다. ‘거룩함’은 존재적 초월과 도덕적 성결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죄악과 불결이 전혀 없으시다. 그의 행위들은 모두 깨끗하고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사(奇事)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무한하셔서 천지에 충만하시며(렘 23:24), 지혜와 능력, 긍휼과 은혜도 충만하시다. 세상에 신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참 하나님과 같은 신은 아무도 없다. 특히 그는 그의 능력이 크셔서 때때로 기사(奇事)와 능력의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까닭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이셨다. 야곱과 요셉의 자손들은 비록 인간적 연약성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백성이며 그 고난 중에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 백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자. 또 우리는 그의 지극히 크심과 능력과, 택한 백성을 향한 구원적 사랑을 믿고 감사하자.
    [16-20절]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무리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물들, 곧 바다를 인격체처럼 묘사한다. 이것은 물론 비유적 표현이다. 바닷물은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하였고 바다 깊은 곳도 두려워 떨었다. 또 구름, 아마 구름기둥은 물보라를 쏟았다.
    또 시편 저자는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번개와 천둥을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의 살’ 즉 ‘주의 화살’은 번개나 벼락을 표현하는 말이다. 시편에는 종종 그런 표현이 나온다. 시편 18: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시편 144:6에도). 궁창은 천둥소리를 발하며 땅을 뒤흔들었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번개나 벼락은 화살같이 빠르게 세계를 비취었다.
    하나님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그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지만 그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다. 이런 두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무리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건져내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Poole, 요세푸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구원과 인도를 위해 자연 현상들을 사용하셨다.
    우리는, 자연만물을 주장하시며 모든 일을 자기 백성의 구원과 인도를 위해 행하시는 전능하시고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자.
    78편: 거역하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
    [1-8절]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편 저자는, 모두가 듣고 아는 바이며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인 ‘옛 비밀한 말,’ 곧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세우시고 이스라엘에게 정하신 증거와 법도를 그의 교훈으로 후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곧 성경의 내용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이며 또 우리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교훈을 알게 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신 6:7; 잠 22:6; 엡 6:4). 하나님께서 이것을 명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딤전 4:9-10; 6:17) 그의 행사를 잊지 않고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치 않은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행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의 책인 성경을 묵상하며 또 그것을 특히 자녀들에게 힘써 가르치자. 또 우리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자.
    [9-16절]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奇事)를 잊었도다.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火光)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패전하였다. 잘 훈련된 많은 병사들과 좋은 성능의 무기들은 전쟁에 필수적인 요소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지는 못한다.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스라엘이 패전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그 율법 안에서 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奇事)를 잊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달려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들, 곧 10가지 재앙을 행하심과,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로 지나게 하신 홍해사건과,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火光)으로 인도하심과,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샘에서 나는 것같이 그들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고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음을 언급한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라면,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이 역사적 사실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과 우리의 과거를 통해 하나님을 알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언약을 지키고 그 율법 안에서 행하고 하나님 앞에 성실하자.
    [17-22절]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계속 범죄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함으로 계속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특히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였다. 그들은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생각하며 고기 먹기를 구하였다.
    그들은 또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해 고기를 예비하시랴”고 하였다.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말로 그를 대항하였던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의 말을 들으시고 노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노가 맹렬하셨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노하신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불순종에 대해 노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고 시험하지 말고 대적하지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의 구원을 감사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자.
    [23-28절]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저가 동풍으로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저희에게 고기를 티끌같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 같은 나는 새라. 그 진 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둘리셨도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저가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셨고 사람들이 그 떡을 배부르게 먹었다고 말한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린 양식,’ 또는 ‘권세 있는 자’ 혹은 ‘천사들’(KJV, NASB, NIV)의 양식이라고 불리웠다. 아침에 이스라엘 진 사면에 있던 이슬이 마른 후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만나이었다(출 16:13-14). 만나는 깟씨나 흰색 진주 같은 모양이었고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았다(출 16:31; 민 11:7). 그들은 나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거두어 들여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거나 가마에 삶아서 과자를 만들었다(민 11:8). 그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를 먹었다(출 16:35).
    하나님께서는 또 그 권능으로 동풍과 남풍을 불게 하셔서 메추라기를, 바다 모래같이 나는 새를, 이스라엘 진영 중에 떨어지게 하셨고 그 거처에 둘리셨다. 민수기는 메추라기가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 약 90센티미터나 내렸고 백성이 일어나 이틀 동안 그것을 모았다고 기록한다(민 11:31-32). 출애굽기는 메추라기가 저녁마다 와서 진에 덮였다고 말한다(출 16:1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 모든 생물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도 그러하셨다.
    우리는 만물을 먹이시고 특히 자기 백성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를 믿고 기도하며 그의 뜻대로 의롭게만 살자.
    [29-33절]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저희 소욕대로 주셨도다.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진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그럴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여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그들은 먹고 배불렀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시편 저자는,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진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라고 말한다. ‘청년’이라는 원어(바쿠림 םיוּח)는 ‘청년들’이라는 뜻도 있지만, ‘선택된 자들’(바카르 ר의 수동분사)(BDB, KJV, NASB)이라는 뜻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는 것에 탐심을 품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로 만족하지 않고 애굽에 있을 때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을 생각하며 고기 먹기를 원하였다(민 11:4-6).
    시편 저자는 “이 모든 일들에서”(원문) 그들이 범죄하여 그의 기사(奇事)를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셨고 그들의 해들을 ‘갑자기 두렵게’(원문) 지내게 하셨다고 말한다. 민수기 성경은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었고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컸다고 기록하며(11:10), 또 고기가 아직 잇새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다고 기록한다(11:33). 그래서 그 곳을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불렀다(민 11:34).
    우리는 먹는 것에 대해 욕심을 버리자.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자(딤전 6:8).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바르게만 살자.
    [34-39절]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하나님께서 음식을 탐하던 자들을 죽이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다. 사람은 징벌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율법을 배운다. 성도의 징벌은 그의 영적 성장을 위해 유익하다(시 119:67, 7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는 온전치 못하였다.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께 아첨하며 그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다. 거짓된 회개나 신앙고백은 하나님께 대한 아첨에 불과하다. 그것은 감히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 또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에는 정(定)함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다. 그들에게는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견고한 마음이 없었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실히 지키며 그의 율법에 순종함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과 자비로 그들의 죄악을 사하셨고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셨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셨고 그의 분노를 다 발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까닭은 인생이 육체뿐이며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범죄치 말고 하나님께 대한 진실과 견고함, 또 그의 언약에 대한 성실함을 구하자. 또 그의 긍휼과 자비만 믿자.
    [40-42절]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 저희가 그의 권능을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죄를 사하셨고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셨고 그 분노를 다 발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여러 번이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범죄하며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근심시킨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돌이켜’(KJV) 하나님을 시험하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제한하였다. ‘돌이켜’라는 원어(와예슈부 וּבוּשׁ)는 ‘반복하여’(NASB, NIV)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격동하였다’는 원어(히테우 וּו)는 ‘표시하다’ ‘제한하다’(KJV)는 뜻이 일반적이고, 또 ‘괴롭게 하다’(NASB, NIV)는 뜻이 언어학자들의 추측으로 제안되기도 하였다(BDB). ‘제한하였다’는 말은 아마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의 능력을 믿는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 자체가 죄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권능을 기억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대적에게서 구속(救贖)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그 구속의 날이란 그들이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건짐을 받았던 날을 가리킬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는 열 가지 재앙을 눈으로 보았었고 홍해를 통과하는 기적을 체험하였었다. 만일 그들이 그 일을 기억했었더라면, 하나님을 알았을 것이며 믿었을 것이며 경외했을 것이며 범죄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알자. 우리는 하나님께 반항하지 말고 그를 근심케 하지 말고 시험하지 말고 제한하지 말자.
    [43-53절]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 징조를, 소안 들에서 그 기사를 나타내사 저희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저희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파리 떼를 저희 중에 보내어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저희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시며 저희의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저희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저희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저희 가축을 우박에, 저희 양떼를 번갯불에 붙이셨으며 그 맹렬한 노와 분과 분노와 고난 곧 벌하는 사자들을 저희에게 내려 보내셨으며 그 노를 위하여 치도하사 저희 혼의 사망을 면케 아니하시고 저희 생명을 염병에 붙이셨으며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같이 지도하셨도다. 저희를 안전히 인도하시니 저희는 두려움이 없었으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도다.
    12절에서도 말했지만,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소안 들에서 징조와 기사를 나타내셨음을 말한다. 소안은 고센 땅의 중심도시인 타니스로서 라암셋(창 47:11; 출 1:11; 12:37)과 같은 도시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었다. 본문은 그 중에 몇 가지만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셨고(제1재앙), 파리 떼를 그들 중에 보내어 물게 하셨으며(제4재앙),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다(제2재앙). 그는 메뚜기와 황충으로 그들이 수고한 토산물을 먹게 하셨고(제8재앙), 우박과 서리로 그들의 포도나무와 뽕나무, 그리고 그들의 가축과 양떼를 죽이셨다(제7재앙). 마지막으로 그는 맹렬한 노로 벌하는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셨다(제10재앙). ‘치도(治道)한다’(50절)는 말은 ‘길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이다(BDB, KJV, NASB, NIV).
    또 그는 자기 백성을 양떼같이 안전하게 인도하여 내셨고 그들의 원수인 애굽 사람들은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 하셨다(출 14:27-29).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 백성을 향하신 그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54-58절]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또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 내시며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게 하셨도다. 그럴지라도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여 그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며 저희 열조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같이 빗가서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구출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 그는 그들을 그 성소의 지경 곧 그가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의 능력의 오른손으로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셨다. 그는 거기 거하던 가나안 족속들, 심히 음란하고 우상숭배적이었던 이방 족속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셨고 그 땅을 분배하여 이스라엘 지파들로 거기서 그들의 장막에 거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 곧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그들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하였다.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의심하고 시험하였고 하나님께 반항하며 그의 율법과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같이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하나님 앞에 궤사를 행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이 회개하였고 거짓되이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속이는 활같이 빗나갔다.
    특히, 그들의 죄는 우상숭배의 죄이었다. 그들은 산당에서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였다. 불경건과 우상숭배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거기에서부터 모든 부도덕한 죄들이 나온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할 때 악에서 떠날 수 있다(잠 16:6).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그를 배반치 말자. 우상숭배하거나 그를 시험하지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성령의 은혜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자.
    [59-64절]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 백성을 또 칼에 붙이사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저희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저희 처녀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으며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사람이 회개치 않고 패역을 부릴 때 마침내 그에게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무섭다. 그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하는 말들을 들으시고 진노하셨고 그들을 크게 미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실로에 세우셨던 그의 성막을 버리셨다. 그가 친히 명하시고 세우신 성막(聖幕), 그에게 거룩히 드려진 성막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버리셨고 그것을 떠나셨다.
    또 그는 그의 능력을 베푸셨던 자들을 포로에 붙이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 61절의 원문은 “그의 힘을 포로로 주셨다”인데, 그것은 그가 능력을 보이시고 영광을 나타내셨던 자기 백성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심판과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전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범죄함 때문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칼에 붙이셨다. 그것은 전쟁에서 그들을 칼에 죽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기업된 그들에게 분내셨으며 그들의 청년들을 불에 타 죽게 하셨다. 죄의 최종적 징벌은 죽음이다. 또 그들의 처녀들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어졌다. 혼인은 처녀들에게 가장 기쁜 일인데, 그러한 기쁨의 일이 사라졌다. 존귀한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졌다.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다. 포로 상태에서는 장례식을 치루는 일도, 심지어 우는 자유도 가지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땅은 죽음과 슬픔의 그림자로 뒤덮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징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범죄치 말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며 순종하자.
    [65-72절]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 자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일어나사 그 대적을 쳐 물리쳐서 길이 욕되게 하시고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이방인들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케 하셨다. 그러나 잠잠하시던 그는 자다가 깬 자같이, 포도주로 인해 외치는 용사같이 일어나셔서 그 대적들, 즉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블레셋 등의 이방 나라들을 쳐 물리치셨고 영원한 수욕을 당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깨어 일어나시면 원수들은 패하여 물러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요셉의 장막도 버리셨다. 그는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셨다. 그 증거는 실로에 세워진 성막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에브라임을 버리셨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거기에 그의 성소를 높은 곳같이, 영원히 세우신 땅같이 지으셨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택하시고 성소를 세우신 것은 그의 전적인 긍휼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의 종 다윗을 양 치는 자리에서 취하셔서 그의 기업된 백성인 이스라엘을 기르는 자가 되게 하셨다. 다윗은 마음의 성실함과 지혜로운 손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였다. ‘그 마음의 성실함’이라는 원어(톰 레바보 וֹב ם)는 ‘그의 마음의 온전함’이라는 뜻이다. 다윗의 온전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그의 뜻대로 섭리하신다. 우리는 오직 그의 긍휼의 선택을 감사하며 온전한 마음과 지혜로 그의 일을 받들자.
    79편: 황폐한 예루살렘을 건지소서
    [1-4절]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시편 저자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정황을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소유자이신 예루살렘성에 이방인들이 들어와 그것을 파괴하였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표가 되었던 성전을 그들이 더럽혔다. 도적이 집에 침입해왔듯이, 이방인들이 그 땅에 침공해와서 그 땅을 더럽혔다.
    시편 저자는 또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종들과 그의 성도들의 귀한 생명을 단지 미움과 이욕 때문에 많이 죽였고 많은 피를 흘렸다.
    시편 저자는 또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존귀함은 그의 인격의 명예로 표현된다. 모욕과 조롱은 인간으로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이방인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당했다. 이 모든 일이 그들의 죄 때문에 왔다.
    땅과 생명과 명예를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와 선을 행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오직 그의 계명을 지키자.
    [5-8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크고 두려우며 또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라고 부르짖었다. 그 불 같은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가망성이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을 삼키고 황폐케 했던 이방 나라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심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가 그렇게 간구한 까닭은 불경건한 그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그들의 많은 죄를 용서하심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우리 열조의 죄악’이라는 원어(아오놋 리쇼님 םיא תוֹ)는 ‘이전의 죄악들’(BDB, KJV)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물론 선조들의 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들의 이전의 죄악들을 기억하며 고백한 것이라고 본다. 또 그는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라고 말한다. 사람이 과거에 지은 죄의 징벌을 면하고 심히 천해진 상태에서 구원얻는 길은 하나님의 긍휼밖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자. 그를 경외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오직 그의 긍휼만 구하자.
    [9-13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흘림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7배나 갚으소서.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이 처한 고난의 현실을 고백한다.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에게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조롱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포로로 잡혀가 자유를 빼앗기고 감금되어 탄식하고 있다. 그들은 사형이 작정된 자들같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런 불행스러운 처지에서 시편 저자는 ‘구원의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들을 도우시고 건져주시기를 구했다.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며 그의 사랑받는 자녀인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구하였다. 죄사함은 모든 불행의 원인 치료이다. 또 그는 하나님께 원수들을 7배나 갚으시기를 구하였고 죽음으로 작정된 자 같은 그들을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보존하시기를 구하였다.
    시편 저자는 또 말하기를,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영예’라는 원어(테힐라 ה)는 ‘찬송’이라는 말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것이다.
    주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자.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자.
    80편: 우리를 돌이키소서
    [1-3절]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용력(勇力)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부른다. ‘요셉’은 북방 이스라엘을 가리킨 듯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양떼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을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거룩한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자이시다. 또 ‘그룹 사이’는 언약궤 위 곧 속죄소 위이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속죄와 긍휼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 언약과 속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얼굴빛을 비추시기를 구한다. 그의 얼굴빛은 그의 능력과 구원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힘을 내사 구원하러 오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은 실상 그의 백성을 도우실 힘이 있으시다. 무엇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간구한다. 그것은 회개를 가리킨 것 같다. 애가 5:21,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회복은 죄의 회개에서 시작된다. 회복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회개 자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행 11:18).
    우리는 하나님의 목자 되심과 그의 언약과 속죄와 긍휼을 의지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구하며 참된 회개의 은혜를 구하자.
    [4-7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이나 부른다. ‘만군의 하나님’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그들에게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특히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천사들을 사용하여 이루신다. 천사들은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받들며 행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그의 백성의 고통당하는 현실을 고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대해 호의적으로 응답하시지 않고 계속 불쾌히 여기시고 분노하시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눈물의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수들에게 학대를 당했고 눈물을 먹고 마셨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다툼의 대상이 되게 하셨고 원수들은 그들을 보고 비웃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구한다. 그것은 회개를 구한 것이라고 본다.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능력과 긍휼의 얼굴빛이다. 또 그는 하나님께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고난의 현실에서 구원해주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평안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범죄치 말자.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 중에서라도 우리는 그의 능력과 긍휼과 참된 회개를 구하자.
    [8-14절]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한 포도나무에 비유하였다. 그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히 퍼졌다. 그 그늘은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았고 그 가지가 바다 곧 지중해까지 뻗고 그 넝쿨이 강 곧 유브라데강까지 미쳤다. 선지자 이사야도 노래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라고 하였다(사 5:1-2). 이스라엘은 좋은 포도를 맺어야 할 포도나무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대를 접으시고 포도원의 울타리를 허시며 길에 지나는 모든 자들로 따게 하셨다. 수풀의 돼지들은 그것을 해치며 들짐승들은 그것을 먹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었다. 이스라엘의 패망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께서 돌보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거두시고 그들을 돌아보시면 그들은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며 살리기도 하시고 상하게도 하시며 낫게도 하시는 자이시다(신 32:3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포도나무같이 잘 자라 좋은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대로 많은 열매를 맺자.
    [15-19절]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편 저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이스라엘의 멸망을 고하였다.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그를 위해 힘있게 하신 가지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불에 타도록 버려두셨다. 그것은 찍힘을 당하였고 주의 얼굴의 책망을 인해 멸망하였다.
    이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구하기를,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이다”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과 능력의 손을 이스라엘에게 얹으시면 이스라엘은 힘을 얻고 구원과 회복을 얻을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말한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고 부흥케 하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부흥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또 시편 저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라고 말한다. ‘돌이키다’는 말은 ‘회개시키다, 회복시키다’는 뜻이다. 우리의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이다(행 11:18). 또 ‘주의 얼굴빛’은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의 얼굴빛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긍휼의 얼굴빛을 비추어주시면 이스라엘은 힘을 얻을 것이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 심령의 부흥과 참된 회개도, 회복과 구원도 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미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항상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긍휼과 능력을 구하자.
    81편: 내 백성이여 들으라
    [1-7절]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 . . .
    시편 저자는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하라”고 말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즐거이 노래하라는 뜻이다. 또 그는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연주하라”고 말한다. 인간의 아름다운 말과 소고와 수금과 비파 등의 악기의 아름다운 소리로 찬송하라는 것이다. 또 그는 “월삭과 월망과 우리의 절일에 나팔을 불라”고 말한다. ‘월삭’은 초하루이며 ‘월망(月望)’은 보름이다. 정한 절기들에 나팔을 불라는 것이다. 민수기 10:10,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또 그는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임이로다”(원어)라고 말한다.
    5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시 114:1) 애굽 땅에서[혹은 땅을 지나서](KJV, NASB) 나가실 때 요셉의 족속 즉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이를 증거로 제정하셨도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주셨다(출 2:23-25). ‘은은(隱隱)한 곳’이라는 원어(세세르 ר)는 ‘은밀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 그들은 거기에서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였었다(시 17:3, 7).
    우리는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송하자. 그러나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원망치 말고 기도하자.
    [8-16절]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 . .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신, 이방신을 섬기지 말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속(救贖)하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네 입을 넓게 열라”는 말씀은 찬송과 기도의 입을 넓게 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찬송과 기도의 입을 넓게 열면 주께서 영육의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았고 그를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권면하신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道) 행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진실한 순종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이 순종하면 그가 그들의 원수를 속히 제어하며 그의 손으로 그들의 대적들을 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수들을 제압하실 수 있다. 15절 본문은, 좀 어려워 보이지만, 아마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은 그에게 굽실거릴지라도 그들의 [징벌의] 날은 영원할 것이라”(BDB, NASB)는 뜻일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징벌을 받을 것이다.
    또 16절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는 그들을 또한 가장 좋은 밀로 먹이실 것이요 나는 너를 반석의 꿀로 만족시키리라 하셨도다”이다. 율법에 말씀된 대로(레 26:5), 순종의 대가는 내세의 영생 뿐만 아니라, 또한 현세에서의 의식주(衣食住)의 풍족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자. 순종의 대가는 영생 뿐만 아니라, 또한 원수들의 제압과 풍성한 양식이다.
    82편: 불의한 재판들과 하나님의 판단
    [1-8절]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고 말한다. ‘재판장들’이라는 원어(엘로힘 םי)는 ‘신들’이라는 단어이다. 재판장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들로서 가난한 자들과 고아들을 위해 판단하며 곤란한 자들과 빈궁한 자들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내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들은 공의의 시행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악인들의 낯을 보았고 불공평한 판단을 하였다. 그들은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어 어두움 중에 왕래하였고 그로 인해 땅의 모든 도덕적 기초가 흔들렸다. 세상의 극심한 도덕적 부패와 혼란은 법정의 부패에서 증거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너희는 신들(엘로힘 םי)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인정하셨으나 그들이 불의한 재판을 통해 그들의 직무와 권위를 저버렸으므로, 그들은 그 죄로 인해 평범한 사람같이 죽고 방백의 하나같이 엎드러졌다.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 일어나실 것이다. 그는 모든 불의를 벌하시고 땅 위에서 도덕 질서를 세우실 것이며 이 세상에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심을 증거하실 것이다. 그 때 이 세상은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으로 변화될 것이다.
    공의롭게 행하며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공의로 온 세상을 판단하실 것이다.
    83편: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1-8절]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라고 기도한다. 우리의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깨우는 것과 같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을 깨우려는 까닭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교만하게 머리를 쳐들고 대항하기 때문이었다. 핍박자들과 대적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고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치려고 간계를 꾀하였고 그가 귀하게 숨겨두신 자들을 치려고 서로 의논하였다. 그들은, “가서 그들을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고 말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말살 계획이었다. 모세 시대에 애굽 왕 바로의 간계가 그러했고 에스더 때에 하만의 간계가 그러했고 예수님 때에 헤롯의 간계가 그러하였다. 그 배후에는 항상 사탄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을 말살하려는 계획에 여러 나라가 일치단합하였다. 에돔, 이스마엘, 모압, 하갈인,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심지어 앗수르까지 연합하였다. 그들은 일심으로 의논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서로 언약하였다. 역사상 참 교회는 때때로 소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을 말살하려는 계획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가장 반대되는 악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말살시키려는 사탄의 간계를 깨닫고, 핍박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하자.
    [9-18절]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패망시키신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 사람들을 굴복시키셨다(삿 7-8장). 또 그는 여선지자 드보라 때에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한 여인의 손에 죽게 하셨고 그 왕 야빈을 진멸케 하셨다(삿 4장). 미디안 사람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의 거름같이 되었다. 엔돌은 미디안 전쟁에서의 격전지이었다.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은 죽임을 당했고 두 왕 세바와 살문나도 그러하였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스라엘과 함께하셔서 원수들을 물리치셨듯이, 즉 미디안 사람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시스라와 야빈에게, 오렙과 스엡에게, 또 세바와 살문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도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저 연합군을 물리쳐 주시기를 구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고 말하며 이스라엘을 멸하려 한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람에 날리는 검불 같게 하시고, 삼림을 사르는 불같이, 광풍과 폭풍같이 그들을 쫓으시며 두렵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는 또 그들로 그 얼굴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게 하시고 그들로 영원히 놀라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시기를 구한다. 과거의 하나님은 또한 현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동일하시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실 수 있고, 또 역사하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악인들의 멸망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되고 또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에 지극히 높으신 자로 알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즉 구원과 심판의 섭리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할 것이다.
    온 세상의 유일하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은 원수들을 물리치셨고 또 물리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만 따르자.
    84편: 하나님의 집을 사모함
    [1-4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생존하시는 하나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므로 우리가 그와 동행할 수 있고 그에게 기도하여 응답을 받을 수 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통치하시며 우리는 그의 통치에 복종한다. 또 그는 ‘나의 하나님,’ 즉 내가 교제하며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를 의지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는 삶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장막을 심히 사랑하며 그의 뜰을 사모하여 쇠약할 정도라고 고백한다. ‘궁정’이라는 원어(카체르 ר)는 ‘뜰’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그가 거하시는 집을 사모할 것이다. 거기에 그의 임재하심이 있고 그의 영의 감동이 있고 그의 사랑하는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과 그의 성도들과 그의 일을 사랑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보잘것없는 새들도 거기에서 쉴 곳을 얻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아마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말한 것일 것이다. 그는 지금 어떤 이유로 성소를 떠나 있으며 저 새들이 자신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주의 집에 거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자. 또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며 그 집에 거하여 하나님과 늘 교제하며 살자.
    [5-8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 . . .
    시편 저자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향하여 간절한 마음을 가지는 자는 힘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능력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를 의지함으로 힘을 얻고 시온을 향해 힘있게 나아가는 자는 복이 있다.
    시편 저자는 또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라고 말한다. ‘눈물’이라는 원어(바카 א)는 ‘발삼(balsam)’이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눈물의 골짜기’를 ‘바카의 골짜기’라고 번역한다(KJV, NASB, NIV). 바카의 골짜기는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을 가리킨 듯하다. 그와 대조하여 ‘샘’과 ‘이른 비’는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얻는 기쁨과 위로와 만족을 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4:14).
    시편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장막과 뜰을 사랑하며 사모하는 자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구한다. 그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 되기를 구한 것 같다. 하나님을 멀리서 사모하던 그는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모하며 성령의 생수를 늘 마시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영광의 천국을 사모하자.
    [9-12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이 세상에 많은 원수들의 공격을 막아주시는 방패와 같은 분이시다. ‘주의 기름 부으신 자’는 자신을 가리킨 것 같다. 10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는 또 하나님을 ‘해’라고 부른다. 이사야 60:19의 말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영한 빛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해는 깨달음, 명령, 기쁨과 힘 등을 뜻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달음과 명령과 기쁨과 힘을 주신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집과 뜰을 사모한다. 그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는 이처럼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보기를 원한다. 또 그는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한다. 악인들의 장막에서는 육신적 쾌락과 세상적 향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된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런 생활보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집을 사모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집과 뜰에 거하며 그를 의지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난다. 그는 하나님의 법도대로 정직하게, 올곧게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을 현세와 내세에 복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해와 방패로 삼자.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집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서 정직하게만 살아가자.
    85편: 온전한 회복을 구함
    [1-7절]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이미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인정하며 고백한다. 그는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온 일을 말한 것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으며 그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고 그의 진노를 돌이키셨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음을 고백한다. 그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케 하시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으나 그가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 진노를 거두실 때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또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회복이 완전치 못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방인들과 혼인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지었고 또 주위의 원수들은 그들을 대적하고 어지럽히려 하였음을 아마 암시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분을 내시겠나이까?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그것은 심령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온전한 구원과 회복을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인식하고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로 우리의 구원과 회복이 온전케 되며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기를 구하자.
    [8-9절]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화평’이라는 원어(솰롬 םוֹל)는 ‘평안’이라는 뜻이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복이다. 평안이라는 말 속에는 건강과 물질적, 사회적 안정도 포함된다. 죄는 근심, 질병, 가난, 및 자연적, 사회적 재난을 가져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평안을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일마다 때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하나님이시다(살후 3:16).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구원으로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할 것이라고 말한다. 영광은 창조 세계의 본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 3:23).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 영광에 이를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는 장차 영광을 볼 것이다(롬 8:18; 계 21:10-11).
    그러나 시편 저자는 두 가지 단서를 말한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의 긍휼을 구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는 우리가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망령된 데’라는 원어(키슬라 ה)는 ‘어리석은 데’라는 뜻이다. 그것은 죄악된 일을 가리킨다.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은 다시 범죄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는 의를 행하지만, 죄를 짓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데로, 즉 범죄하는 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그의 영광을 받고 소망하자.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자.
    [10-13절]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 . .
    시편 저자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라고 표현한다. 긍휼은 하나님의 구원의 동기이며, 진리는 구원의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진리로 구원을 얻었다. 또 의(義)는 구원의 방법이며, 평안은 구원의 결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평안을 얻었다. 그 평안은 심적,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또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서 탄생하셨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선언되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결과는 좋은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좋은 것일 뿐 아니라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도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마음의 평안, 육신적 건강, 물질적 안정,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죄는 땅의 저주를 가져왔지만, 구원은 땅의 회복을 가져와 땅이 그 소산을 낼 것이다. 즉 구원받은 자들이 거주할 땅은 물질적인 복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의(義)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라고 말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의 소식이다. 이것은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다. 후반부는 “우리로 그의 걸음의 길로 가게 하리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 안에서 의의 길을 걷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도는 의의 길을 걷는다.
    죄인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과 모든 좋은 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의 안에서 의의 길을 행하자.
    86편: 곤고함 중에 도움을 구함
    [1-5절]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곤고하다’는 원어(아니 י)는 ‘가난하다, 고난당하다’는 뜻이다. 시편 저자는 육신적으로, 환경적으로 가난하고 곤고한 지경에 처해 있다.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는 그의 기도는 그가 죽음의 위험까지 느끼고 있음을 보인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믿음이 있는 자이었다. 그는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을 ‘나의 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주를 의지하는 종’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 자신의 주관자로 섬긴 경건한 자이었다. 또 그는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소망하였다. 그의 믿음은 그의 기도로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께 종일, 계속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 ‘종일’이라는 원어(콜 하이욤 םוֹיּ־ל)는 ‘계속하여’라는 뜻이다.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내용은, 첫째 내 영혼을 지켜주소서, 둘째 나를 구원하소서, 셋째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시편 저자는 자신이 이렇게 기도하는 근거로, “이는[원문] 주께서 선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선하신 자이시며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죄악들을 다 용서하셨고 또 용서하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도우심을 간구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의 긍휼과 죄 사유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힘써 기도하자.
    [6-10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기도를 받으시고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간구의 소원을 들으신다. 특히 환난 중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의 영육의 모든 소원을 들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 힘과 용기를 주시고, 육신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거처할 집을 주시고, 또 사회적 평안을 주신다. 특히 그는 환난 날에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고 우리를 건져주신다.
    시편 저자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라고 말하며 또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심이니이다(원문)”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다른 신들과 다른 점은, 여호와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신 까닭은, 그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때때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기적들은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한 근거들이다.
    시편 저자는 또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세계복음화의 전망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온 세상의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므로 세상의 모든 열방은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에게 경배하며 그의 뜻을 행함으로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온 땅에 복음이 충만하게 전해질 것이며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될 것이다.
    우리는 환난 날에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 바로 섬기며 또 그의 뜻인 세계복음화를 기대하자.
    [11-13절]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말한다. ‘주의 도’ 즉 하나님의 길이란 하나님께서 교훈하신 생활 지침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교훈 받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길 배우기를 사모하는 자는 복되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의 도 배우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라”고 말한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요한이서와 삼서에서 강조되고 장려된 교훈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 그의 진리를 믿고 그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내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첫 번째 내용이며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그를 의지하고 그의 모든 말씀을 믿고 그의 모든 계명에 순종할 것이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는 원어는 “주의 이름을 경외하도록 나의 마음을 묶으소서”라는 뜻이다. 우리는 나뉘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한 마음으로, 곧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6:24),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
    또 시편 저자는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를 전심으로 찬송하며 영원히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크신 인자를 베푸셔서 그를 지옥 깊은 곳에서 건져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소원한다고 말한다. 지옥에서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 돌릴 것이다.
    우리는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자. 또 하나님의 진리 안에 행하며 일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전심으로 또 영원히 그를 찬송하자.
    [14-17절]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강포한 자의 무리가 내 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를 치는 교만한 자들과 그의 생명을 찾는 강포한 무리를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악한 자들은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포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또 여럿이 무리를 지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롭고 선한 자들을 대적한다.
    시편 저자는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셨고 자격 없는 자들을 사랑하셨다. 그는 거룩한 분노를 오랫동안 참으셨고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시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을 굳게 믿었다. 그는 그의 원수들의 핍박이 심할 때 은혜의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그의 도우심을 호소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한다. 부족과 실수가 많고 죄성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할 것밖에 없다. 또 그는 하나님께 “주의 종에게 ‘주의 힘’[원문]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는 고난을 이길 힘이 필요하였고 그 고난에서의 구원이 필요하였다.
    그는 특히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이다”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기 종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식으로 도우시고 역사하신다. 시편 저자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셨고 위로하셨음을 언급하며 그의 ‘은총의 표증’을 다시 구한다.
    우리는 악인들의 대적을 두려워하지 말고 긍휼의 하나님을 의지하자. 또 하나님께 힘을 구하며 구원을 구하며, 특히 은총의 표증을 구하자.
    87편: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랑하심
    [1-3절]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시편 저자는 “그 기지가 성산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루살렘성의 기초가 거룩한 산에 있다는 뜻이다. 시온산은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으로 인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예루살렘성을 세우셨다. 예루살렘성은 구약교회를 대표하였다. 성막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것은 거룩하고 튼튼한 기초이다(고전 3:11).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야곱의 모든 거처가 다 하나님의 나라이었지만,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시온의 문들은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성에는 성전이 있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가 있었고 속죄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성은 참 교회와 천국을 예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새 예루살렘성이라고 불리울 것이다(계 21:2, 10).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라고 말한다.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의 성이여 너에 대해 영광스런 일들이 말해지는도다.”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있는 하나님의 성이다. 거기에는 속죄와 구원이 있고 완전한 회복에 대한 예언과 약속이 있다. 장차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고 의만 가득하고 평강이 넘친 새 예루살렘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구약 백성이 예루살렘성을 사랑했듯이, 오늘 우리는 주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와, 영광의 천국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자.
    [4-5절]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 . .
    시편 저자는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고 말한다. 그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代言)한다. 이것은 성경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성을 보인다. 라합(ב)은 ‘바다 괴물’을 가리키는 말로서 애굽에 대한 상징적 명칭이다(사 30:7). 애굽과 바벨론은 남쪽과 북쪽의 강대국들로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원받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시편 저자는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고 말하며 또 “시온에 대해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고 말한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서쪽에 있는 나라요 두로는 북쪽에, 구스는 남쪽 먼 곳에 있는 나라이다. ‘거기서’ 즉 시온에서 났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르던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 다시 태어났다, 즉 중생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주위의 나라들, 심지어 먼 곳의 나라들에서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고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다. 성전 건립은 사람의 힘과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된다(슥 4:6).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친히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마 16:18). 교회의 건립은 하나님의 일이다. 신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며 사람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다(요 3:5).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나 구원받은 자를 양육하는 목회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사람을 중생시키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고전 3:7).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의 사명이다. 그가 친히 사람을 구원하며 교회를 세울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를 의지하며 충성하자.
    [6-7절]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 즉 시온에서 난 자들의 이름을 책에 기록하실 때 그 수를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세실 것이다. 창세 전에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다(엡 1: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표현된 그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 구원을 얻고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이다(요 6:39). 그들은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를 것이다(요 10:27).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행 13:48). 그가 택하신 자들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쁨의 간증을 묘사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근원, 즉 구원과 영생의 근원이 시온에 있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출 것이다. 그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 때문에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다.
    사실,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기쁨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주의 은혜로 구원받은 형제들을 볼 때에 기쁨을 가진다. 바울은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다(빌 4:1). 또 그는 다른 곳에서 그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그가 복음을 전하고 양육했던 성도들이라고 말했다(살전 2:19-20). 물론, 우리는 또한 장차 들어갈 영광의 천국을 소망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롬 5:2; 12:12).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다 찾아 구원하실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인해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충성하자.
    88편: 곤란 중에 부르짖음
    [1-7절]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불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자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 주야로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열심으로, 간절히,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 후 그의 응답을 기대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 있는 기도자의 태도이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까닭은 그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음부 즉 무덤에 가깝다고 말하며 자신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고 힘이 없는 자와 같다고 말하였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다 큰 고통 중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사망한 자들 중에 던지웠다고 말하며 살륙을 당해 무덤에 누운 자와 같다고 한다. ‘던지웠다’는 원어(카프쉬 י)는 ‘자유로이 떠돈다’는 뜻이다(BDB).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다시 기억지 않으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들인데, 그는 자신이 바로 그런 자와 같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슬픔과 절망의 웅덩이에 빠져 있다. 또 그는 하나님의 노가 그를 심히 누르시고 그의 모든 고통의 파도로 그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성도에게 때때로 큰 고난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참 구원자이심을 알고 고난 중에 그에게 주야로 기도하자.
    [8-12절]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 . . .
    시편 저자는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구들로 그를 멀리 떠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친구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갇힌 자와 같이 친구들과의 교제가 끊어졌다. 또 그는 곤란으로 인해 그의 눈이 쇠하였다고 말한다. 사람이 심신으로 피곤하고 고통스러울 때 눈이 쇠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눈의 핏줄이 터져 시력을 잃기도 할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을 사망한 자나 무덤에 있는 자 또는 흑암 중에, 잊음의 땅에 있는 자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죽고 말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곤란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는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루 이틀 기도하다가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날마다, 여러 날 계속해서 기도하였다. 그는 하늘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는 간절하였다.
    시편 저자는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기사 곧 그의 기이한 도우심을 받기 원한다. 또 그는 “유혼(幽魂, 죽은 자의 영)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선포하기를 원한다. 또 그는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살아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과 그의 의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성도가 환난 중에 기도하는 것은 특권이다. 인간 관계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죽음 앞에서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믿고 간구하자.
    [13-18절]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 . . .
    시편 저자는 자신이 처한 고통의 현실을 묘사한다. 그는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시고 그를 향해 은혜의 얼굴을 숨기신 듯하였다. 시편 저자는 또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고난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의인은 고난이 많다(시 34:19).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고난을 주셨고 그를 두렵게 하셨으며 시편 저자는 그 때에 당황하였고 죽을 지경이었다.
    시편 저자는 또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노하심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다. 홍수가 그에게 넘치듯이 그런 두려움이 온종일 그를 에워쌌다. 시편 저자는 또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고 말한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멀리 떠나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외로움은 사람의 큰 고통들 중의 하나이다. 그를 사랑하던 자들이나 친구들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다. 특히 그는 새벽기도를 하였다. 새벽기도는 세상일을 하기 전, 가장 좋은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일이다(막 1:35).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성도는 고난이 많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고난 중에서도 우리는 기도에 힘쓰자. 특히 새벽기도에 힘쓰자.
    89편: 주의 인자와 성실을 간구함
    [1-4절]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국가적 재난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언급한다. 그는,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라고 고백한다. ‘성실함’이라는 원어(에무나 הוּמ)는 ‘진실함, 신실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죄인을 공의로 갚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용납하시고 용서하심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특히 그의 약속을 진실하게 지키심에서 나타난다. 성도는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찬송하며 증거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는[원문]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그 어떤 환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과 구원 의지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그의 확신의 근거로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든다. 원문에는 ‘주께서 이르시되’라는 말이 없다. 시편 저자는 돌연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선언한다. 이것이 성경 저자의 영감성이다. 그는,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영원하며 불변하며 우리의 구원은 그의 언약은 근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찬송하며 증거하자.
    [5-10절]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 . . .
    시편 저자는 또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라고 말한다. ‘거룩한 자’는 천사를 가리킬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창조와 섭리의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奇事)와 신실하심을 찬양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이는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함이라”고 말한다. ‘권능 있는 자’도 천사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시며 찬송을 받으실 만한 자이시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천사들 가운데서 심히 엄위하시며 그를 둘러 있는 모든 천사들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이시다.
    시편 저자는 다시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라고 말한다. 원문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강한 여호와시여”(NASB)라고 번역할 수 있다. 또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라고 말한다. 능력이 크신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진실하심이 충만하시다.
    또 시편 저자는,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 주께서 라합을 살육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자연만물 가운데 바다의 흉용함을 잔잔케 하심에서 나타날 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을 멸하심에서도 나타났다. 라합은 애굽을 가리킨다.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크신 능력과 위엄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천재지변과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르게만 살자.
    [11-14절]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 . .
    시편 저자는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므로 온 우주가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는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건설하신 자이시다. 시편 저자는 또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라고 말한다. 동서사방이 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다. 시베리아의 추운 땅도, 저 남쪽의 호주 대륙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다볼은 갈릴리 남쪽의 산이며 헤르몬은 먼 북쪽의 산이다. 시편 저자는 그것들이 창조자 하나님의 이름을 인해 즐거워한다고 표현한다.
    시편 저자는 또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증거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무엇보다 그의 능력을 믿는 자이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크신 능력의 하나님은 또한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신다. 그는 편견이나 편협함을 가지고 행치 않으시고 항상 올바르게, 공정하고 공평하게 사물을 판단하시고 다스리신다. 또 그는 인자하시다. 그는 피조물을 향해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시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 또 그는 진실하시다. 그는 생각과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신다. 그는 처음과 끝이 같으시다. 그에게는 거짓이나 속임이나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것이 없으시다. 그는 항상 진실하시고 믿을 만하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자와 주인이시요 능력이 심히 크시고 지극히 도덕적이심을 알고 그를 믿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하자.
    [15-18절]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 . .
    시편 저자는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고 말한다. 살아계신 창조자, 섭리자, 능력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아는 자들이며 그들은 복이 있다. 시편 저자는 또 “저희가 주의 얼굴빛에 다니며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얼굴을 쳐다보며 놀듯이, 하나님의 얼굴빛 안에서 살며 기쁨과 평안, 위로와 힘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이의 이름을 기뻐하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또 하나님의 의, 즉 죄인에게 값없이 주시는 죄사함과 구원의 의로 인해 높임을 받을 것이다.
    원문에는 17절과 18절 초두에 각각 ‘왜냐하면’(키 י)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를 보인다. 성도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힘의 영광이시며 그들의 뿔이 그의 은총으로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이어서 말하기를, “이는 우리 방패가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 왕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이다”라고 한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KJV)의 번역대로 “여호와는 우리의 방패이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우리의 왕이심이니이다”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다. 환난 중에, 절망적 상황에서 그는 우리의 힘이시다. 성도가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이 힘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다. 빗발치는 적의 화살들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평안히 살아간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좋은 왕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인도하며 원수들을 물리치고 백성을 보호하는 왕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방패이시며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자.
    [19-24절]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 . . .
    시편 저자는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원문)에게 하신 말씀을 전한다. 이것도 시편 저자의 영감성을 보인다. 그 내용은,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라는 말씀이다. ‘돕는 힘’이라는 원어(에제르 ר)는 ‘도움’이라는 뜻이다. ‘능력 있는 자’나 ‘백성 중에서 택한 자’는 다윗을 가리킨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 다윗에게 어릴 때부터 이미 힘을 주셨다. 그는 후에 그를 백성 중에서 구별하여 거룩한 기름을 부었고 그로 존귀한 왕이 되게 하셨다. 그는 다윗에게 이미 주셨던 은혜 위에 더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윗에게 힘을 주셨다. 그는, “내 손이 저와 함께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번역하면, 그는, “내 손이 그와 함께 견고하며 내 팔이 또한 그를 힘있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의 원수들을 막아 주시며 물리쳐 주실 것이다. 그는,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곤고케 못하리로다.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미워하는] 자를 치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실 것이며 끝까지 진실하게, 신실하게 행하실 것이다. 그는,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다윗의 부족과 실수를 불쌍히 여기시며 끝까지 언약을 지키신다. 그로 인해 다윗은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더욱더 사모하자. 그는 다윗에게 힘을 주셨고, 그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고, 인자와 성실을 그에게 베푸실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도 그런 은혜를 주실 것이다.
    [25-29절]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 . . .
    하나님께서는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다윗 왕국의 세력이 지중해와 유브라데 강까지 확장될 것을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영적으로 말해, 교회가 온 지구에 확장될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증거한다. ‘나의 아버지’라는 말은 자신을 창조하시고 양육하시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또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한다는 개인적 관계를 나타낼 것이다. 또 ‘나의 구원의 바위’라는 말은 자신을 죄와 환난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윗을 향해 베푸실 그 외의 복된 은혜들에 대해 증거하신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이다. 하나님은 그를 장자로 삼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성도 중 ‘맏아들’이라고 불리신다(롬 8:29). 또 하나님은 그를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다(계 19:16). 또 하나님은 그를 위해 그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의이시다. 또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굳게 세우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히 9:15). 또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을 영원히 있게 하실 것이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있을 것이다. 또 하나님은 다윗의 보좌를 하늘의 날과 같이 영원하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이시다.
    우리는 참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자. 우리는 또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과 언약을 감사하며 굳게 붙잡자.
    [30-37절]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 . . .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그의 자손들이 죄만 짓는데도 유효(有效)한 언약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손들이 그의 율법을 버리며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의 범과를 다스리실 것이며 그들에게 평안 대신 징계의 채찍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히 12:8).
    하나님께서는 또,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징책은 미움의 표현이 아니고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다(히 12:6). 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맹세로 하신 언약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에 충실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속에는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그 후손’이라는 원어는 단수명사로 일차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도 가리킬 것이다. 또 메시아의 왕위는 해와 달같이 하나님 앞에 항상 있고 영원히 견고케 될 것이다. 히브리서 13:8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우리는 범죄치 말자.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것을 알자.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알자.
    [38-45절]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노하사 . . .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노하사 물리쳐 버리셨으며 그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다. 한때 그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언약을 맺어 친밀한 관계를 가지시고 영광의 관을 씌우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행하신 것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주셨던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들을 부수셨으므로 그는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 이웃 나라들에게 욕을 당하였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 모든 원수들로 기쁘게 하셨으며 그의 칼날을 둔하게 하사 그로 전쟁터에 서지 못하게 하셨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있다. 그가 원수를 힘있게 하셔서 우리를 이기게도 하시고 우리를 힘있게 하셔서 원수를 이기게도 하신다. 그는 우리의 칼날을 날카롭게도 하시고 둔하게도 하신다. 그가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었으나, 지금 그는 원수들이 그들을 이기게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보좌를 땅에 엎으셨다. 또 그는 그 소년의 날을 단축하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다. 개인과 국가의 영광과 존속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영광과 장수를 주실 수 있으나 지금 그들에게 영광 대신 수치를, 장수대신 단명(短命)을 주셨다.
    하나님은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노하시고 그들의 울타리와 요새를 파괴하시고 그들로 패배케 하시고 그들에게 수치와 죽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신 까닭은 그들의 범죄 때문이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당연히 전제된 진리이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조심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그 앞에서 바르게만 행하자.
    [46-52절]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 . . .
    시편 저자는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고백한다. 그는,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라고 말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의 응답하심이나 도우심을 주지 않으신 것이 그의 진노 때문이라고 깨닫고 있다.
    시편 저자는 또 지금 이스라엘이 죽음 앞에 서 있다고 고백한다. 그는,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라고 말한다. 죽음 앞에 선 자는 인생의 짧음과 허무함을 실감하게 된다.
    시편 저자는 또 이스라엘이 많은 원수들의 훼방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주는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범죄했을 때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의인들이 까닭 없이 비난을 받기도 한다. 예수님도, 바울도 그런 비난을 당하였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언급하며 의지하는 그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는,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그의 인자하심으로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셨고 맹세하셨다. 그는 그 언약을 영원히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며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하시고 신실하시고 믿을 만하시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우리는 범죄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자. 그러나 그를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평강과 회복과 승리가 있음도 알자.
    90편: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인생의 덧없음
    [1-6절]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저자 모세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집은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막고 도적을 방지하는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 되신다. 그 집은 낡아서 재건축이 필요치 않는 완전하고 영원한 집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우주와 인생의 해답이 되신다.
    모세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조하여 인생은 너무 짧고 잠깐임을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며 또 “너희 인생들아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인생을 허무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또 그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을 말한다. 그는, “이는(원문) 주께서 보시기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비록 노아 시대의 홍수가 있기 전의 선조들처럼 천 년 가까이 산다 할지라도 죽고나면 그 긴 세월은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할 것이다.
    모세는 또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홍수처럼 생의 모든 것들을 쓸어가며, 죽음은 인생의 복잡다단한 삶을 꿈과 같이 헛되게 만든다. 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과 같다. 풀이 자라고 꽃을 피다가 베어지듯이, 인생의 삶과 성공은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인생의 짧음과 마침내 죽음을 깨닫고, 오직 우리의 영원한 집이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진리와 교훈 안에서만 살아가자.
    [7-12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 . .
    모세는 인생이 죽는 원인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인류의 시조가 범죄치 않았더라면 인간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본래 죽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범죄하자 경고하신 대로 죽음의 형벌을 내리셨다(창 2:16-17; 창세기 5장).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수명을 7, 80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오늘날도 80세 이상 사는 사람은 건강한 자요 장수한 자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인생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한다. 또 게다가 그 수고로운 세월도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른다고 한다. 세월은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가고 흐르는 강물같이 빠르게 흘러간다.
    모세는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라고 말한다. 인생은 이런 빠른 세월 속에서, 이런 짧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노의 능력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죄 짓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무지한 자인가.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어느 날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지 않고 선한 일을 구별하지 않고 또 짧은 생에 일의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인생의 짧음과 죽음의 원인이 죄임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죄를 멀리하고 일을 구별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며 지혜로이 살자.
    [13-15절]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모세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인간을 멀리 떠나셨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삶이 되었고 세상은 죽음의 그늘진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구하며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구한다.
    모세는 또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진노와 죽음의 형벌만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죽음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시고 영생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이 평생 슬프게 사는 것이 아니고 평생 기쁘게 사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의 기쁨을 회복시킨다. 천국은 기쁨과 희락의 나라이다.
    모세는 또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우리가 10년 동안 곤고함을 당했다면 10년 동안 기쁨을 얻게 해달라는 소원이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훨씬 그 이상을 주신다.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옷니엘 때에 징계를 8년간 주셨으나 평안을 40년간 주셨고 에훗 때에 징계를 18년간 주셨으나 평안을 80년간 주셨음을 증거한다. 또 그는 드보라 때에 징계를 20년간 주셨으나 평안을 40년간 주셨으며 기드온 때에 징계를 7년간 주셨으나 평안을 40년간 주셨다. 인생의 수고로운 삶은 7, 80년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복락은 영원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항상 기뻐하며 살자.
    [16-17절]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모세는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라고 말한다. ‘주의 행사’ 곧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일이며 인생을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구원을 받아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영생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약속이다.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라는 말씀은 인생의 구원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임을 증거한다.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신 일이다(요 1:14). 칭의(稱義)의 의(義)나 부활과 천국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이다.
    모세는 또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은총’이라는 원어(노암 ם)는 ‘기뻐함, 즐거워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할 수 있다.
    ‘우리 손의 행사’는 우리의 모든 행위들에 관계될 것이지만, 특히 문맥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시작하신 구원의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고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해져야 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라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소서”라는 뜻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선한 일들은 헛되지 않으며 또 다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히 받고 기뻐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를 이루고 전도와 교회 건립과 선행의 열매를 힘써 맺자.
    91편: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얻음
    [1-4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 . . .
    시편 저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각과 능력과 도덕성이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며 성도는 지존하신 그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즉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와 은밀히 교통하는 자이다.
    세상은 위험한 일이 많은 세상이다. 시편 저자는 세상에 새 사냥꾼의 올무와 같은 것이 있고 극한 염병 같은 것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넘어뜨리려는 일들이며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방해하는 사탄과 악령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이시며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이런 위험한 일들과 심각한 재앙들로부터 건져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라고 말한다. 새끼 새들은 아직 약하고 악한 환경을 두려워하지만, 어미새가 그것들을 품어주며 그 품은 안전하고 평안하다. 전쟁에서 튼튼한 방패와 손방패가 있다면 안전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환난과 재앙 중에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성도들은 어려울 때마다 그를 의지하며 그에게 피신한다. 이것이 성도의 힘이요 특권이다.
    우리는 환난과 재앙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은밀히 교통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의 날개 아래 피하고 그를 방패로 삼자.
    [5-8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 . .
    세상에는 여러 가지 두려운 재앙들이 많이 있다. 시편 저자는 그것을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라고 표현한다. 한밤중에 들이닥치는 도적이나 강도, 갑자기 생긴 고열이나 복통을 동반한 무서운 질병, 대낮의 전쟁 등은 그런 재앙들 중에 속한다. 이런 재앙들의 날에 성도의 전후좌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의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실 것을 믿는다. 혹시 성도가 그 재앙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부활과 영생을 믿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 11:25).
    또 실상, 성도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작정된 때가 아니면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고 담대히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유익하고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고 또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악인들의 경우는 다르다. 세상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향해서 내리시는 것이며 악인들은 재앙의 날에 넘어질 것이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받을 보응이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악인은 재앙으로 넘어지나 의인은 보호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세상의 재앙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자.
    [9-13절]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 . . .
    9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네가 나의 피난처 여호와 지존자를 네 거처로 삼았음이로다”이다(KJV, NASB). 이것은 시편 저자가 앞에서 재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오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을 보인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피난처와 거처로 삼는 자마다 그의 특별한 보호와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또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11절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화가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그 천사들을 명하셔서 그의 모든 길에서 그를 지키게 하시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의 명하시는 일들을 받드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도들의 모든 길 즉 그들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들을 지키고 그들을 도울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뜨거운 풀무불에 타지 않도록 도운 것처럼, 또 다니엘을 사자에게 먹히지 않게 도운 것처럼, 또 감옥에 갇혀 내일이면 죽게 된 베드로를 기이하게 빼어내심같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로 성도들을 도울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라고 말한다. 사자와 독사, 젊은 사자와 뱀은 성도를 해치는 악한 세력들 즉 사탄과 악령들과 악인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했다(벧전 5:8). 성도는 재앙을 피할 뿐만 아니라, 또한 악의 세력을 발로 밟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말하였다(롬 16:20).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재앙을 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어 그를 지키시고 도우실 것이며, 그는 악의 세력을 밟을 것이다.
    [14-1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원문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없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하나님께서는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자를 환난과 재앙 중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도우시고 건지신다.
    하나님께서는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알고 그를 찬송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그를 의지하는 자를 도우셔서 환난에서 건져내어 주시고 재앙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높이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약속은 성도에게 참으로 크고 복된 일이다. 기도의 응답 속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시편 50:15에서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장수로 내가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을 보게 하리라”(원문직역)고 말씀하신다. 장수(長壽)는 영육의 생명의 강건함을 포함한다. 사람은 죽음을 가장 싫어한다. 사람에게 가장 위협적인 말은 ‘죽인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복은 장수의 복이며 그 절정이 영생이다. 또 ‘나의 구원’이라는 말은 환난과 질병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다 포함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져서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기도하자. 또 죄사함과 평안과 영생의 구원을 체험하며 감사하자.
    92편: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찬양함
    [1-4절]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 . . .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찬양함이 좋다고 말한다. 그는 아침에 그리고 밤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선포하기를 원한다. 그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선포함이 좋으니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의 성실하심을 선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심을 말한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의 성실하심은 그의 은혜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심을 말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에 관하여 “십현금으로, 비파로, 또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원문) 찬양한다고 말한다. 그는 목소리로 뿐만 아니라, 악기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정숙한 소리’라는 원어(힉가욘 ןוֹי)는 ‘묵상’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엄숙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가리킨 듯하다.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찬송의 소리는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소리가 아니고, 엄숙하고 부드러운 소리, 질서 있고 아름다운 소리이어야 할 것이다(시 96:9; 빌 1:10).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의 손의 행사로 그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4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손의 행사 즉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기쁨의 이유이며 또한 찬송의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뻐하면서 아침에도 밤에도 항상 정숙한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자.
    [5-8절]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 . . .
    시편 저자는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특히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신 일이 그러하고 또 그의 섭리의 모든 일이 그러하다. 노아 홍수 심판이나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를 마르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지나게 하신 일, 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등도 하나님의 심히 크신 일들이다.
    또 하나님의 생각은 심히 깊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을 작정하셨고 특히 인류 구원을 계획하셨다. 그는 그의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모든 일을 섭리하신다. 그는 우리 개인의 성화와 세계복음화의 전과정을 섭리하신다. 그의 섭리의 전과정은 심히 깊고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우준한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들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들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인간의 존재 목적도 알지 못한다.
    시편 저자는 또한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흥왕할지라도 결국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은 성경 진리이다. 시편 73편의 저자도 악인이 건강하고 항상 평안하고 재물이 더하는 일시적 형통을 누리지만, 주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시므로 갑자기 황폐케 된다고 증거한다(시 73:3-12, 18-19).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영원토록 지존하시다. ‘지존(至尊)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이 심히 크심을 나타낸다. 악인들의 영광은 일시적이나,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섭리의 모든 일들을 통해 영원히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고 그를 영원히 높이고, 또 범사에 그를 의지하자. 또 우리는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흥왕해도 영원히 멸망함을 알자.
    [9-11절]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지리이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심을 내 귀로 들었도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지리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원수들’이란 하나님과 그의 진리와 그의 나라와 그의 일들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죄악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 그의 뜻과 진리를 거슬리는 것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불쾌함을 드리고 그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며 자신에게도 해와 불행을 가져온다. 그들은 결국 패망하고 다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더욱 힘을 얻는다. 시편 저자는,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라고 말한다. 뿔은 힘을 가리킨다. 들소의 뿔은 가장 강한 힘을 나타낸다. 또 기름은 성령을 상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그들에게 상쾌하고 향기로운 기름, 즉 성령의 지혜와 위로와 기쁨을 주신다.
    시편 저자는 또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심을 내 귀로 들었도다”라고 말한다. ‘주의 원수’는 또한 ‘성도의 원수’이었다. 그들은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고 대적하였다. 그들은 악을 행한 자들이었다. 세상은 악인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며 인간의 본성은 심히 악하게 변질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지옥 형벌을 내리실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을 보고 들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말고 그의 친구가 되자. 또한 악인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치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자.
    [12-15절]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시편 저자는 의인의 번창함을 말한다. 그는,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요단 계곡에 많이 번식하는 종려나무는 가늘고 키가 크며 잎이 많이 달린 아름다운 나무이다. 그것은 기쁨과 승리의 상징으로 쓰인다. 집 재목으로 쓰인 레바논의 백향목은 키가 매우 크고 우람하고 수명이 길고 향기가 좋은 나무이다. 의인은 쇠하거나 망하지 않고 그 인격이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강건하고 마침내 영생을 누릴 것이다.
    시편 저자는 특히 의인이 하나님의 집에 심겨져 흥왕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계시며 그의 돌보심과 가꾸심이 있는 곳이다. 거기에 풍성한 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크신 감동과 위로가 있다. 그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자이며 거기서 힘을 얻어 번창하는 자이다. 시편 저자는 그가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고 말한다. 모세가 120세에 그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던 것처럼(신 34:7) 갈렙이 85세에 힘이 강건해 싸움에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수 14:10-12), 의인들은 늙어도 심신의 강건함이 있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의인들이 하나님의 정직함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는 의와 정직함만 있고 불의가 없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지만, 그를 경외하고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들로 흥왕케 하실 것이다. 의인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정직함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만 살고 하나님의 집에만 거하자. 또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정직을 나타내자.
    93편: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통치하심
    [1-5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 . .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가 만드신 우주만물을 홀로 통치하신다. 그는 왕과 재판장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입으셨다. 그의 명령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다. 또 하나님이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붙드시므로 온 세상은 요동치 않고 견고히 서 있다. 또 그는 세상의 도덕적 질서도 견고히 세우시는 자이시다.
    시편 저자는 또한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자이시며(창 1:1) 영원히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출 3:14-15).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시 90:2). 그의 보좌는 옛부터 견고히 섰다. 그는 옛부터 왕이시다. 그는 개인이나 국가나 세계의 역사를 홀로 주장하셨고 다스리셨으며, 그는 지금도 온 세상을 홀로 섭리하신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더 크시다고 말한다. 홍수 때의 물들이나 바다의 흉용한 파도는 매우 위협적이지만,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보다 더 크시다. 그가 명령하시면 그 모든 것들이 잔잔케 되고 평온케 될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하나님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를 다 믿고 그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즉 그의 통치하심을 깨닫고 믿고 그 앞에 순종하자. 또 그의 모든 진리를 신뢰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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