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강과 감사(골 3:15 -17)
  • 조회 수: 573, 2013.07.27 20:52:11
  • 세수, 원단, 원일, 신원이라고 하는 음력 정월 초하루날인 설날이 지났습니다. 조선시대에 설날에는 의정대신들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인사를 드렸고, 임금께 거친 무명이나 흰 명주를 바쳤으며, 전국 8도에서는 관찰사로부터 모든 지방관리들까지 공들여 그 고장 산물을 임금에게 바쳤고 남이 바라는 바를 말하는 일도 덕담이라하여 새해에 안녕하시오. 올해는 과거에 꼭 급제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등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하게 됩니다.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인한 일제의 수탈과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음력설을 없애려고 섣달 그믐전 1주일동안 떡방앗간을 못 돌리게 하거나 설날 아침새벽 새배다니는 사람, 특히 흰옷을 입었을 때는 검은 물이든 물총을 쏘아 흰옷에 검은 물이 얼룩지게 하기도 했고, 70년대 故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이중 과세라 하여 신정 연휴를 3일로 하고 구정을 공휴일에서 제외함으로 관공서는 물론 학교에까지 등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정은 민족의 명절이요, 민족의 대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만나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고향에 갈 수 없거나 가지 못한 분들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주일을 기다리면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나려는 설레임 속에 분명한 목회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엿새동안 삶의 현장에서 지치고 피곤한 심령들에게 엿새후에 있는 하늘의 신비를 나누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과 감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씀을 중심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평강이라는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귀한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 구약 히브리어에 평강은 "누아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쉬다, 정착하다, 머물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평강은 어느 한 곳에 마음을 정하고 머물며 쉬는 것을 말합니다. 여행이 아무리 좋아도 즐거워도, 가정만 하겠습니까? 계속 떠돌이처럼 짐을 꾸려야 하는 안정이 없는 것이 여행입니다. 
    내 영혼의 닻을 영원한 포구이신 주님께 내리고 거기서 머물고 거기서 쉬는 "누아흐"의 상태가 평강인 것입니다. 
    둘째, 평강을 "메누하"라고 하며 그 뜻은 고요한, 안정된 입니다. 평강의 현상은 우리에게 고요함과 안정됨을 줍니다. 즉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의 상태가 평강인 것입니다. 
    셋째, 샬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평화, 잘 있는, 행복한, 건강한, 정다운, 번영, 결국 샬롬은 행복하고 정답고, 평안하며 그리고 좋은 것입니다. 
    넷째, 신약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라고 합니다. 그뜻은 평화, 하나됨, 고요, 안식 등입니다. 즉 주로 마음의 평화, 평온을 뜻하는 것으로서 평강이라는 용어 자체만으로도 뿌듯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제 본문이 주는 평강의 의미와 그 역할을 살펴봅니다. 
    1. 첫째, 15절 첫머리에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말은 평강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평강의 근원이요, 출처이지, 내가 평강을 제조하거나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눅2:14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강,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임을 말씀합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렘33:6절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사역의 역사가 들어 있는데 먼저 치료하시고, 고치시고, 낫게 하시며, 평강을 주시고, 더 풍성케 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26: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시29:11절 이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수없이 많은 말씀들이 평강의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도가 평강을 향유하려면 평강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됩니다. 
     
    사막의 더위와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의 더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막의 더위는 제 아무리 불볕처럼 뜨거워도 그늘 아래만 들어서면 시원합니다만, 동남아와 우리 나라 더위는 그늘 아래 들어서도 숨이 막히고 땀이 줄줄 흐릅니다. 
     
    세상의 평강과 하나님의 평강을 비유해 봅니다. 하나님의 평강의 그늘 아래에 들어서면 제 아무리 무섭고 드려운 세상의 폭염과 문제도 신선해지고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 평강은 우리에게 참 시원함을 주지 못합니다. 그저 후덥지근할 뿐입니다. 참된 평강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은총이며 선물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2. 둘째로 성경은 그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평강이란 영적인 것이며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먼저 마음에 임해야 합니다. 몸이 편하다고 해서 마음도 편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보세요! 어머니 뱃속에 잇는 태아는 10달 동안 고생도, 시련도, 아픔도, 배고픔도, 춥고 더운 것도, 흉풍년도, 돈벌이 안해도 걱정 없는 아늑하고 따사로운 곳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수는 없습니다. 10개월 지나면 세상으로 나와야 삽니다. 아무리 몸이 편해도 안나오면 엄마도 죽고, 아기도 죽고 맙니다. 고생스럽고 힘든 삶일지라도 나와야만 삽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르고 하나님을 안 믿고 사는 사람들이 현재의 삶이 아무리 부귀하고 영화를 누리며 사치일락하고 향락이 있고, 평안한 생활일지라도 오래 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힘들고 교회다니기가 고달프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로 뛰쳐들어와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내 마음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전북 고창읍에는 모양 성이라는 옛성이 있는데 윤달이 있는 해 정월에 돌멩이를 하나씩 머리에 이고 십리정도의 거리가 되는 이 성둘레를 세 번 돌면 그해 동안 평안을 누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인간이 평안을 얻고자 애쓰는 모습은 가히 눈물겨운 것입니다. 안심면이라는 행정구역이 있고 이름조차도 조안심집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평안을 얻기 위해 애쓴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는 참된 평안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참된 평안과 만족은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평강이라는 것, 기쁨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들은 마음 속에서 시작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동차 한 대에 2억을 줘야 살 수 있는 BMW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닐 지라도 평강이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강이란 몇 십억짜리 저택에 산다고 그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강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가난해도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감사하는 생활, 바로 그것이 평강넘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부인 자매님들! 남편 성공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믿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세상적인 성공은 결국 죄 짓는 길입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들 자녀 대학에 떨어지는 것을 염려 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도대체 관심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구약 성경 역대하 16, 17, 18장에 나타난 아사왕과 여호사밧이란 왕의 행적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게 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대하16:9)에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신앙인들도 나라가 강성해지고 부귀한 영광이 극에 달할 때 교만하여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능력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고, 힘을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 평강을 잃어버리고 어려움을 겪게 됨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지배를 받는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 마음을 주장하게 내어 드립시다. 
    3. 셋째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유와 사명과 오늘날 교회의 존재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 말씀처럼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군인이 왜 필요합니까? 그것은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즉, 군인은 싸워도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 전쟁이 군인의 목적이나 존재 이유는 아닌 것입니다. 미국 웨스트 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입학 시험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존재합니까? 교회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합니까? 그것은 "평강"을 위해서입니다. 할렐루야 
     
    영국 옥스퍼드 대학안에는 39개의 예배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학문과 신앙의 밀접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없는 정치, 신앙 없는 학문, 신앙 없는 역사, 신앙 없는 재벌, 잘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가 평강을 주지 못하면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로 인해 세상이 평화롭고, 크리스천으로 인해 사회가 조용해져야합니다. 
     
    90년대 초에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과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아라파트 의장 사이에 평화기본 조약이 체결되는 세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두 나라가 서로 국가를 인정하는 대신 P.L.O에게 거주할 지역을 주는 것으로 한 나라 같은 지역 안에 두 나라가 공존하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소련 70년간의 공산주의 몰락으로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망하고 시장 경제체제의 민주화 사건이나 동.서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서 동.서독이 하나가 되는 사건보다도 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완전히 이룩된 것은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은 극우파에 의해서 암살 당했습니다. 
    그러나 실로 약 3400년간의 비극의 역사를 회복하는 시초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 생활 끝에 도착한 가나안 땅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는 이미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한 땅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의 7족속을 다 물리치고 땅을 차지했는데 문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땅 족속을 진멸 하였으면 오늘날 고생하지 않았을 것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그 땅 족속들을 농사짓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노예로 살려둔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조금씩 평화를 회복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총성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듯 평강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린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제 우린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평강을 소유해야 합니다. 즉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늘 차고 넘쳐야 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2) 그리고 나 자신의 몸과 말과 행동으로 평강을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내 눈빛 때문에, 내 말 한마디 때문에, 때로는 내 손짓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평강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평강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을 가졌든지, 무엇을 소유했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그리고 평강을 위하여 사용될 때 가장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힘으로 권력을 잡고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날 그의 부인 조세핀은 화려한 드레스에 진주목걸이, 수없이 반짝이는 보석들, 드레스에 걸쳐진 망또의 길이가 12m나 되어 황제의 두 여동생이 그 자락을 잡아주는 호화스런 대관식의 결과는 이혼과 유배 생활로 끝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권력도, 미모도, 보물도 가졌으면 뭐 합니까? 올바로 사용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감사에 대한 교훈을 잠깐 살펴봅니다. 
    15절 끝에 보면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감사와 평강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마음에 평강이 계속 머무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평강이 있는 사람이라야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몹쓸 병에 들린 환자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심방을 합니다 여러 권면의 말씀 가운데 목사님 그 성도의 마음속에 진정 평강의 마음으로 감사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목사님 말씀하시길 "형제여! 하나님께 무엇인가 아직 해결되지 않거나 고쳐지지 않은 것이 있어 눕혀 놓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다 해결되고 고쳐질 때까지 일어날 생각 마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평생을 누워 있으라고 하시면 누워있기로 결심하십니까?"  -아멘-   이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감사가 있으면 마음에서 원망과 불평이 틈을 타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평강이 머물면 감사는 저절로 샘솟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없다는 것은 평강이 없다는 것이고 평강이 없는 이유는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소천하신 벧엘교회를 담임하셨던 故 하해룡목사님께서 생전에 목사님의 아들이 군대에 갔다와서 복학하여 서울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4학년 여름에 중.고등부 수련회에 교사로 갔다가 물에 빠진 학생을 구해내고 자신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후에 그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뽑아 가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교회의 위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에서 원망과 불평을 쫓아냅니다. 
     
    "비참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한번 자신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하라, 당신에 관해 이야기를 하라, "나"라는 단어를 가능한 한 자주 사용하라, 상대방의 의견 속에 당신 자신을 계속 반영하라, 인정받기를 기대하라, 의심을 품어라, 시기와 질투를 하라. 다른 사람을 경멸하라, 당신을 비판하거든 누구든 용서하지 말라. 아무도 믿지 말고 자신만 믿어라, 배려와 존경받기를 주장하라, 모든 일에 대해 당신 의견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라. 만일 당신이 보여준 친절에 감사하지 않거든 화를 내라, 당신이 베풀어준 봉사를 결코 잊지 말라. 가능한 한 당신의 의무를 회피하라, 남을 위한 일을 가능한 적게 하라. 
    이 내용에 공감하시는 분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비참한 길에 빠질 것입니다. 소위 아이들 말로 "왕따"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관심을 끄는 초점의 대상이 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시는 "지존하시고 무상하신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평강을 주십니다. 
    성도여러분! 
    크리스천이나 교회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고 사회가 시끄러워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직 우리는 평화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 날마다 "평강과 감사가"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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