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 감사합니다(고후 9:6-15)
  • 조회 수: 282, 2021.12.13 10:08:15


  •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겠습니까만 이처럼 1년에 한번 한 주일을 정해서 일년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퍽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 가정에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더구나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기관과 단체가 평안한 가운데 각자의 책임을 잘 감당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본 교회에서 후원하는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농어촌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의 새 성전건축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지금 공정이 약 80퍼센트 진전이 되었고 이제 내부공사와 조경공사만 되면 정말 아름다운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2000년 봄에 입당하게 될 것인데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그 동안 10여 년 동안 불편한 장소에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제 서너 달만 더 고생하면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가 한국동란 이래 처음으로 IMF라는 국난을 겪게 되어 우리 국민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IMF 2년의 터널을 지나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배우고 깨달은 바도 많습니다.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어려운 경제가 다소 회복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 데 대하여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년동안 하나님께서 온 세계교회와 온 세계 나라 위에 축복을 더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는 언제든지 제일 먼저 성도들을 향해 문안을 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권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와 같은 글을 쓴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만 감사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사무쳐 있었고 따라서 그의 하루 하루의 생활, 한 달 한 달의 생활, 아니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사도 바울은 감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의 감사 생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아야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는 좋은 환경이나 평안한 생활 때문에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하반부를 보세요.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일생을 기록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를 몇 번 맞고, 감옥에 몇 번 들어 갔고, 몇 번 파선을 당하고, 길의 위험과 산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메섹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고린도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은 거의 핍박과 환난과 곤고의 생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의 몸이 건강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병들고 몸이 괴로운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사업이 잘 되어서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 많은 손해를 보았는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몸이 건강해서 혹은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육체 가운데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분명히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냥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찌르는 가시를 그냥 가슴에 안고 지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한 내용 중에도 그가 병이 나서 다른 곳에 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몸이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그가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 몸이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 가정이 다 평안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가정에 베푸신 축복입니다. 우리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경우는 이 가정에서 오는 기쁨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평안히 들어와 쉴만한 집 일정한 가정이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울은 일생동안 나그네로서 이곳 저곳을 방랑하며 육신적으로도 평안히 쉴 곳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가끔 전도집회 때문에 지방이나 외국에 가면 평안한 숙소를 마련해 주고 좋은 것으로 대접을 해 줍니다. 그러나 내 집, 내 가정만큼 평안하지는 못합니다.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평생을 가정이 없이 살았으니 그 불편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의 감사한 생각과 생활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것은 밖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처한 환경이나, 그의 건강이나, 그의 가정이나, 그의 재산이나, 그의 명예나, 그의 지위나, 그의 성공이나 그런 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감사생활은 그 속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대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아까 우리가 부른 찬송대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합니다. 이구난설(以口難說)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필난기(以筆難記)입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지 말로다 할 수 없는 큰 은사를 마음속에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무슨 은사였을까요? 그 은사는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은 말하자면 그의 삶의 뿌리요, 그의 감사는 거기서 자란 나무에 맺는 열매였습니다. 로마서 7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세기적인 고민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심각한 도덕적인 고민을 느꼈습니다. 그는 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구약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옳은 사람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사람 앞에서뿐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이 살아 꼭 옳은 사람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구약은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려고 하면 계명을 지켜라. 율법 따라 살아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는 양심대로 계명을 지키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양심적으로 계명을 지키기를 힘써도 자기 육체 속에 다른 힘이 있어서 그대로 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또한 죄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육신을 기초로 하는 죄의 세력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긴 탄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새 생명의 복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망극하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바울은 외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구속과 해방의 기쁨은 언제든지 그로 하여금 이 은혜를 감사하여 보답하려는 감사의 생활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옛날 승천하신 그리스도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나 자기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육에 속한 자기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아 계신 것을 항상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변명할 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습니다.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강한 힘을 주고 주께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죄가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기회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유대 사람들은 벌떼와 같이 일어납니다. 그때 주님께서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으니 입을 닫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 살아 계신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사도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중해에서 큰 풍랑을 만났었습니다. 사실 그 배에는 바울뿐만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과 뱃사람 그리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많은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이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276명이나 되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은 그대로 있어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절망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풍랑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망 중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고 있는 한,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가 계속되고 있는 한 풍랑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이유와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임을 각성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알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아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노래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랑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풍랑 만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마침내 이 풍랑을 극복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IMF의 거센 풍랑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부통계에 의하면 IMF체제 2년 동안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20퍼센트는 전보다 오히려 나아졌는데 나머지 80퍼센트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국민 한 사람의 최저 수입이 월 23만원인데 이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편에 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풍랑 만나 어쩔 줄 몰라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그들이 조금만 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더 주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면, 풍랑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배의 갑판에 사람을 모으고 축사를 했습니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기를 시작하매"(행 27:34∼35). 상상해 보세요. 지금 큰 풍랑이 일고 있습니다. 배는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잠잠하게 한 자리에 모아놓고 떡을 떼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풍랑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늘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찬양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4장 13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스도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재에 자기와 같이 계셔서 간단없이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만날 때도, 핍박을 받을 때도, 돌에 맞을 때도, 파선을 당할 때도,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당할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에서 구속을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을 아는 이 새로운 믿음, 참 믿음, 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순경이나, 역경이나, 괴로울 때나 평안할 때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의 생활에는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우선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죽은 심령을 구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게 되니 자연히 마음속에서부터 감사함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를 맺든지 열매를 맺는 사람일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 많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주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옷 한 벌이라도 줄 수 있고,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많지는 않지만 선교비를 매달 꼭 내고,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에 손을 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기쁨이 있을 것이고 감사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도바울은 항상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조금 환난을 당하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늘나라의 큰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언제나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이 자연히 북받쳐 올랐습니다. 사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마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말처럼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물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평안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괴로우면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해도 병이 나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점점 자라나면 평안할 때도 괴로울 때도,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성공해도 실패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척도"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신앙에 들어가게 될 때는 문자 그대로 성경말씀처럼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만 모였기 때문에 불평이라고는 없습니다. 불만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는 기도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목사의 설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도 찬송과 감사만 있습니다. 이 세상 교회에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요? 기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교회에서는 예배 드릴 때 목사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예배할 때 찬송과 감사밖에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오직 찬송과 감사로 충만하다면 이 자리가 곧 하늘나라의 그림자가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서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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