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17:11-19/ 감사
  • 조회 수: 273, 2021.12.13 10:28:33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1-19)

     

    추수 감사절은 성경에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비슷한 절기들이 있습니다. 수장절이라고, 추수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가 있는데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라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후조건 때문에 지금 미국에서 지내는 시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또 성경의 전 정신이 요약되어서 추수감사절이 드려졌습니다마는 성경 어디에도 추수감사의 절기를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이 절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 살면서 지키는 전통일 뿐입니다.

     

    청교도들로부터 시작된 추수감사절의 유래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얼마 지난 다음에 하나님 한 분만 바로 믿고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면서 영원한 천국의 승리의 삶을 살겠다고 작정했던 청교도들이 당시 완전한 종교개혁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던 네덜란드로 떠나서 11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도 저들이 바로 신앙 생활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또 카톨릭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서도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스피드웰호"라는 배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배가 항해를 하는 도중 고장이 납니다. 더 이상 그 배를 탈 수 없는 것을 알고 배를 바꿔 탔는데 그것이 "메이플라워호" 입니다. 이 사람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앙을 위해서 나아갔던 땅 아메리카에 도착했습니다. 원래는 북 버지니아에 그들의 삶의 터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이미 영국의 왕권이 거기까지 미쳐서 그곳에서도 바로 신앙 생활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겠다는 것을 먼저 감지합니다. 그래서 허드슨 강 유역, 그러니까 오늘의 뉴저지 지역에 자리를 펴려고 했습니다. 지명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는데 선장이 거기의 항구사정이 여의치 않으니까 이 사람들을 속이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플리머스'라는 장소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들을 내려줍니다. 이들은 아메리카의 지형을 모르니까 '여기가 허드슨강이 있는 뉴저지 지역이겠거니' 생각하고 내려섰습니다. 그들은 모두 102명이 도착했는데 1년이 지나면서 반수 이상이 풍토병과 영양결핍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디언들에게 옥수수 씨를 얻어다 심고 경작해서 석 달 먹을 양식을 수확해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이 그 다음에 한 것이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 한 것이 예배당을 짓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번 잘 믿어보려고 여기까지 왔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그래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우자.' 라고 해서 학교를 지었습니다. 오늘날 그 정신이 소위 미국의 명문대학이라는 IVY League 대학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가서야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추수감사절에 청교도들에게 있었던 겉으로 드러난 카렌다적인 몇 가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지키시고 보호했습니다. 저들이 허드슨 강가로 가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당시에 유럽 사람들이 신대륙을 찾는다고 탐험대를 조직해 그곳에 와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성이 난 원주민 인디언들이 백인이면 무조건 잡아죽였는데 가장 극심하게 전쟁을 치뤘던 장소가 바로 뉴저지 지역이었습니다. 만약 원래 가려고 의도했던 그곳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배를 정박했다면 전혀 무장하지 않은 이 청교도들이 십중팔구 인디언들에 의해 죽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사람의 거짓말까지 사용하셔서 그들을 살 수 있는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북쪽의 플리머스, 뉴잉글랜드 지방은 페스트가 지나갔습니다. 95%의 사람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랬기에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들어오니까 백인들을 향해서 여러 마술사들을 동원해서 주술을 행하여 저주를 퍼부었지만 그것으로 이 백인들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의 인디언이 이 백인 청교도들 마을에 와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고 영어로 이야기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스칸토라는 분인데 이 분은 전에 영국 탐험가들에게 붙잡혀서 스페인의 노예로 팔렸었습니다. 스페인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간신히 탈출해서 영국으로 갔는데 영국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영어를 좀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마음 따뜻한 몇 사람들이 돈을 모아 주어서 6개월 전에 이 곳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스칸토가 이 백인들이 선량한 백인인줄 알고 함께 지낼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는 뉴잉글랜드 지방, 메인 주, 그 주변 여러 지역들을 총괄하는 가장 큰 추장이 있었는데 그 추장을 데리고 와서 함께 평화조약을 맺어 청교도들은 거기서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길은 그 역사 배후에서 계속 준비하셨습니다. 애굽에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기 전에 요셉을 먼저 보내 준비시키신 하나님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우연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눈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입니다. 그랬기에 청교도들이 인디언 원주민들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화친하면서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감사절,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립니다.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사해야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해야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감사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혼자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때까지는 믿음 아닙니다. 원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주신 선물을 받는 손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으면서 입으로 나오는 말은 "감사합니다."입니다. 아무리 장작을 많이 쌓고 석탄을 많이 채굴해도 타지 않으면 불이 아닙니다. 종은 칠 때까지는 쇠붙이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날 때만 사랑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믿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대답입니다.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감사하지 않으면 믿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감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감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말에 감사라는 단어에는 'remember'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시편 103편 2절에는 "너희는 여호와의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 분이 내게 행하신 일을 기억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렇지요? 그것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배은망덕이지요. 나는 그처럼 애쓰고 수고했는데 상대편이 잊어버리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망덕입니다. 감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감사해야될 민족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사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 건설에 있어서 '라인강의 기적', 일본의 기적, 싱가폴, 홍콩, 대만의 경제 기적을 말하지만 이 나라들은 기적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들입니다. 이미 일본과 독일은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일으킬 만큼 강한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계를 향해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국가로 자란 국가들이 패전해서 조금 고통받았다가 다시 회복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이 아니라 회복에 불과합니다. 그런가하면 대만이나 홍콩이나 싱가폴의 경제부흥은 기적 아닙니다. 이미 세계 도처에 흩어져 나가서 살고있는 화교들의 자본력과 그들의 시장 구조가 저들을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을 활용한데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봉건 이씨 왕조, 그 다음이 식민지입니다. 그 다음 해방하자마자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서울시내 전체가 몇 개 건물 외에는 다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겨울에 얼어죽었고, 연탄가스에 질식사했습니까? 그것은 오래 전 일이 아닙니다. 우리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20년 전 일입니다. 우리가 자본력이 있습니까? 자원이 있습니까? 기술력이 있습니까? 마케팅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던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되어야될 이유는 우리나라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계 역사에 자생력으로 저개발국가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역사가 없습니다. 이 시장경제가 계속 가동되면 이 세계 질서도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부자 나라는 계속 잘 살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는 계속 무너질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그 격랑을 뚫고 선진국에 진입한다면 세계 역사상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잘 사는 국가가 되는 첫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잘 되어야될 이유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뿐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 저개발국가의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대로 주저앉으면 안됩니다. 이대로 망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된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한국의 교회 부흥과 경제 부흥이 함께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 부흥이 끝나니까 경제 발전이 멈추고 계속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냥 보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역사 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됩니다.
    제가 1996년 크리스마스 때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당시의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께서 자기 모 교회인 충현교회 성탄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예배 중에 "대통령 각하 오셨으니 한마디 해주십시오." 하니까 김영삼 대통령이 앞에 나가 한 소리가 무슨 소리인줄 압니까? "우리나라 경제만 잘 되면 일등국가가 된다." 제가 그 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니 그 날이 무슨 날인데, 지금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이런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하는가? 큰 일 났다.' 제가 다음 주일 그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1997년에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요즘, 경제만 잘되면 나라 잘된다고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이 나라 여기까지 온 것이 누구의 힘 때문인데요? 그리고 경제 가지고는 경제는 안 자랍니다. 경제 보다 더 높은 뜻에 마음 두지 않으면 경제 발전 안됩니다. 어느 나라도 도덕적인 힘의 뒷받침 없이 잘되지 못합니다. 경제 이상의 높은 논리 없이, 윤리 없이 잘된 나라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의 거짓이 대우 사태 만들었고 우리의 불성실이 현대 사태를 만들고 있고, 앞으로도 거짓과 불성실은 이 나라를 반드시 망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어려움에서 오늘까지 이 나라를 인도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기억하지 않으면 그 사건들은 눈앞에 지나가는 해프닝입니다.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께서 무슨 일 하셨는가를 기억하기 시작하면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주님은 그 사건 곁에 계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께서 이 민족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내 개인의 삶 속에 함께 하신 그 축복들을 헤아려가면서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는 교만에서 구해줍니다.
    그런가하면 감사는 인생을 멸망시키는 교만에서 구해줍니다. 교만은 필망(必亡)입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말씀했습니다. 교만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법칙입니다. 예외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참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성공한 목사들이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시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교만해지면 소망이 없어집니다. 지난 신동아 10월 호 보니까 어느 목사가 자기를 공격하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것이라고 오만 방자한, 무엄한 소리를 함부로 뱉었습니다. 어느 인생을 예수님께 비교해서 말합니까? 물론 그 분이 말하는 뜻은 따로 있는데 표현은 그렇게 했더라구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부자 세습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소위 성공한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요즘 들어보면 "내가 그 어려울 때 얼마나 고생하고 수고했는 줄 아느냐?"고 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신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자기 노력과 수고만을 설교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교만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 교만의 시작은 에덴 동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행복했던 에덴동산, 거기에 거칠 것 없이 뛰노는 아담과 이브에게 사탄이 찾아와서 "너 이것 먹기만 하면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덜컥 먹었습니다. 그 교만의 뿌리가 우리에게 흐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하나님의 사람은 교만이 원죄라고 말합니다. 정말 교만에서 이기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요즘 열왕기상, 하를 묵상하고 있는데 열왕기상, 하에 나오는 훌륭한 왕들도 성공하고는 꼭 망하더라구요. 히스기야가 죽을 지경에 하나님 앞에 목숨 건 기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15년을 더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저 같은 놈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좀 이상하고 죄송스럽긴 합니다만 제가 그 성경을 보면서 히스기야가 차라리 15년 안 살았으면 참 좋은 왕으로 끝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어느 것이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히스기야의 생애를 보면 생명 연장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이 더 축복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실패의 쓴잔을 통해서 더욱 축복하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을 주셔서 망하게도 하십니다. 그런고로 두려워해야 됩니다. 주께서 주시는 성공을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돌려야 됩니다.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돈이 많든지, 사회적인 신분이 높아지면 교만하다가 생애가 끝납니다. 전부 '나 잘났다'는 말 뿐이예요. 그리고 이 교만은 항상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대편을 깎아 내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 교만에서 늘 승리합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로 쫓길 때에도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쫓겨다닙니다만 그러나 주께서 나를 처음 붙잡아주셨던 그 은혜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손을 바랍니다. 그리고 국가를 크게 통일해놓고도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길래 저 푸른 목장에서 나를 부르셔서 이곳에 인도하셨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심지어는 임종의 기도를 봐도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길래 이 푸른 초장에서 천한 목동 신분을 부르셔서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생애를 축복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에 눈을 떼지 않고 기억하면서 평생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보고있는 한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는 한 '나 잘났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공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할 때도, 기쁠 때 뿐 아니라 쓰라린 감정과 생애의 깊은 좌절과 고통을 맛볼 때에도 감사하게 합니다.
    다멘이라는 사람, 나환자촌에 복음 전도하러 갔다가 그들이 복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도 나병에 전염되었습니다. 자기가 나환자 된 것을 발견하자 그는 뛰어나와서 외칩니다. "형제들이여, 나도 당신들과 같이 되었다.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서 나를 당신들과 똑같은 인생으로 만들어주셨다."고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감사문
    우리 손양원 목사님의 감사문을 지금 이 시간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분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사랑하는 두 아들을 폭도들에 의해 잃었습니다. 그 분은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6년 동안 옥고를 치루셨습니다. 1년 반 밖에 형기가 아니었는데 형기 마친 다음에도 전향하지 않는다고 그 분을 계속 붙잡고 있다가 1945년 8월 20일 지나서 죽이기로 작정했는데, 15일날 해방이 되어 감옥 문이 열려 살아났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서 그 분은 서울의 큰 교회나 부산의 여러 교회의 초청을 뿌리치고 "내 형제들에게 가야 됩니다."하고 다시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습니다. 해방되어 얼마 안 있다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사랑하는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장례식 때 이인제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11장을 설교했습니다. 순교자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찬송 드리며 탄원하는 기도를 읽으면서 설교했습니다. 약사, 애도사, 찬양이 이어지고 드디어 아버지의 답사 차례가 되었습니다. 흰 두루마기에 누런 두건을 쓰시고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고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직 양아들 삼기 전입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감사합니다. 불신앙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교만하고 불평합니다. 믿음은 감사의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추수감사절에 진정한 감사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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