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찬식 재정 (마태복음 26:26-30)
  • 조회 수: 380, 2013.10.06 17:54:12
  • 여호수아 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40년을 지나 요단강을 건너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게 하여 요단강을 건널 때 그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가지고 오게 했습니다. 그 돌을 길갈에서 진칠 때 그곳에 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돌을 세우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중에 너희들의 후손들이 이 돌들을 왜 이곳에 세웠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여 마른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했으며, 이 여호와 하나님은 홍해를 건너게 하심같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심을 알고 그분을 항상 경외하고 섬기라고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것들은 너희들을 위해 주는 자신의 살과 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함께 했던 만찬의 의식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기념이라는 것은 이후로 계속하여 기억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귀한 교훈이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광복절을 지키는 것이 일본에게 식민지로 고통을 당했음과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가 해방되었음을 기억 하는데 있습니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할 때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일본에게 당한 치욕들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기억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 성찬을 기념하라고 했으며, 성찬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성찬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성찬은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왜 죽어야 했습니까? 그것은 주님밖에 인간을 구원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 빚을 다 갚아준 것과 같습니다.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로 시작됩니다. 십자가가 아닌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우리 주님이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 아니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속량’이라고 합니다. 보통 노예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자유 할 수 있는 방법은 몸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대부분이 돈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돈을 갚아주면 노예에서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그렇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우리의 죄값을 갚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제자들이 기억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에 최후의 만찬을 통해 각인시켰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떡은 인류를 위해 대속하는 자신의 몸을, 포도주는 자신의 피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리셔서 구원을 이루었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버리시기까지 섬기시는 섬김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치욕적인데, 인간이 받아도 치욕적인 십자가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은 치욕 중에 치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극치를 말합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지체들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도 섬김이 기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특징은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도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성찬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깊으신 뜻입니다.

     

    2. 성찬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바울은 성찬에 참여할 때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전 11장 27-29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는 공공연하게 죄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음란과 교만과 미움 다툼 등으로 교회가 사분오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셨습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영적인 환경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서 속히 빠져나와야 합니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새가 머리위에 앉아 둥지를 트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쫓아내야합니다. 머리로 스쳐지나가는 나쁜 생각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생각들을 깊이 묵상하고 그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즉 성찬은 주기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죄를 피하게 하는 축복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마음에 두고 습관적으로 죄에 빠져 있다면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청산하지 않고는 주님과 하나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성찬을 재정하신 것은 성찬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올무에 갖혀 있지는 않은 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는 지, 자신의 죄에 대해 눈물로 주님께 고백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찬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임하시는 복된 성찬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3. 성찬은 성도의 교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성만찬 때의 교제는 곧 교회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한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눈다는 것을 어느 때 어느 곳에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됨을 말해 주며 그러한 효험을 가지게 합니다. 즉 성만찬의 본질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 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 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바로 성만찬의 독특한 면인 것이다. 성찬을 영어로 '커뮤니온'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주는 단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바로 이 성만찬 가운데서 완전히 나타나 진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거행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의 실현이 가져온 결과적 현상인 것이다. 또한 성만찬 예전은 개 교회를 중심한 개체적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성만찬을 거행하는 무리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제들과 자매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 간의 화해와 참여를 요청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에 있어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계속적인 도전인 것이다. 이런 관계가 초대교회 때에는 강하게 결속력을 과시하여 중세까지 오게 되었는데 중세 때 교황은 이걸 세속적으로 남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카놋사의 굴욕이라 붙여지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입니다. 그 당시 하인리히 4세는 굉장히 리더십이 강한 왕이었는데 그가 행한 인사권에 대해서 교황이 반대하자 그는 교황을 무시하고 인사권을 감행합니다. 이에 교황은 그의 성찬식 참여를 정지시킵니다. 이것은 같은 믿음의 형제가 아니라는 선언인데 이렇게 되면 그를 따르는 종들까지도 그를 버리게 됩니다. 이런 파문을 당하자 한동안은 견뎌냈지만 결국은 교황의 성찬식 정지는 황제를 코너에 몰아넣고 결국 황제는 독일에서 눈 덮인 알프스 산을 넘어 교황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탈리아 카놋사의 성에서 사죄를 비는 의미로 여름의 얇은 옷에 맨발로 서서 1월의 차디찬 눈발을 받으며 교황이 문을 열기까지 밤새도록 기다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의 결합은 아니지만 성찬식을 통하여 강한 영적, 신앙적 결속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의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이 특별히 거친 환경 속에 제자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습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애로 결속하여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있을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만찬은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즉 성만찬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축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을 축하하고 예상하는 축제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현현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열어 주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종국적 왕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이다. 한스 큉은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현해 주는 귀한 예전임을 이렇게 표현 하고 있다. "과거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회상과 감사의 식사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교제의 식사요 언약의 식사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메시아의 종말적 식사에 대한 예견이다."

     

     진실로 성만찬은 종말의 기쁨과 영광 중에서 함께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식사의 예표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성만찬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또한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제사요 성령을 초대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성도들의 교제임을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적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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