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요 6:42-59)
  • 조회 수: 554, 2013.10.21 19:08:25
  • 요한복음 6장 22~40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무리를 향하여 증언하신 그 제 1부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2부와 3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 1부에서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다”라는 것을 증언하셨습니다. 제 2부에서는 대략 제 1부에서 말씀한 대로 예수님의 생명의 떡이시라는 사실을 반복하면서 이제는 믿음으로 그 생명의 떡을 먹으라고 강조합니다.

    41절에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하신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수군거린다’는 말은 불평하며 불신하며 비난한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고향 지방의 유대인으로 육신적인 예수님의 가문을 잘 아는 것이 탈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수군거리는 것을 나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들이 수군거리다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을 보세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수군거리는 것은 퇴폐한 백성의 생태입니다. 
    예수님의 증거는 점점 신령한, 진리의 신비경을 말씀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육적이었습니다. 육적으로만 그리스도를 아는 자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무엇이나 인간적인 가치와 외면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의 증거에 직면한 유대인들이 그가 목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예수가 나사렛에서 성장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수네 집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사자가 될 수 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 유대인들처럼 혈통을 강조하는 민족이 없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주장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특히 이삭의 후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의 후예가 아니고 사라가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의 후예라고 말합니다. 이만큼 유대인들은 혈통을 중요시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 메시야로 믿게 된 빌립이 너무 감격스러워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가서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여보게, 나사렛은 내가 잘 아는 곳이 아닌가? 아니, 나사렛 같은 데서 무슨 선한 사람이 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외부적인 것을 봅니다. 혈통을 봅니다. 가문을 봅니다. 학벌을 봅니다. 재산을 봅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 기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평가와 사회적 가치관의 세속적 기준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예수께 대하여, 그의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렸고 결국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T. E.로렌스는 같은 시인 토머스 하아디와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로렌스가 영국 공군의 사병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 종종 시간이 있는 대로 사병의 제복을 입은 채 토마스 하아디 부부를 방문하였습니다. 
    한번은 하아디 가정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돌체스터의 시장의 부인이 방문하게 되어서 손님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장 부인은 낯모를 공군 졸병과 같이 응접실에 앉아 있게 된 것입니다.

    전통과 권위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영국인, 특히 사회적으로 상위층에 속하는 이 시장 부인은 보잘것없는 공군 졸병과 같이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매우 언짢았습니다. 이 시장 부인은 이 공군 졸병이 그렇게 훌륭한 로렌스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저 일개 이름없는 영국 공군 사병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체스터 시장 부인은 토머스 하아디 부인에게 서투른 불란서어로 “내 생애에 이런 졸병과 같이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아디 부인은 불어를 잘 몰라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때 T. E. 로렌스가 완벽한 불어로 “부인! 죄송합니다. 제가 통역을 해드릴까요? 하아디 부인은 불어를 모르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잘난 체하고 무례했던 돌체스터 시장 부인은 외면적이고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가치 기준을 가지고 그를 판단했기 때문에 그만 엄청난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복음 전달자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최대의 메시지는 한 갈릴리 목수의 가정을 통해서 왔습니다.

    43~44절에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망하고 수군거리는 그들을 경계하시면서 37절의 말씀을 다시 강조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기 “이끄신다”(ἑλκύω)는 말은 본래 ‘그물을 잡아끈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신령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이끄시는 자는 어떤 악인이라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존 칼빈은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의지까지라도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를 이끄시는 것은 죄인을 사형대에 이끄시는 것 같지 않고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누구든지 기꺼이 가고자 하는 자의 은혜로운 부르심이요 이끄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그의 앞으로 이끄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하지 아니하시면 사실 하나님께로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회에는 출석합니다. 그러나 대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오히려 육신적인 귀로 듣는 불우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혹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경우가 있어도 더 이상 듣기를 거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령이 자기들에게 시끄럽고 성가시게 한다고 생각하여 아주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자연인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죄의 빚을 갚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값 없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어 오순절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였고, 오늘까지 계속하여 성령으로 우리를 꾸짖고, 경고하고, 예수께로 이끌고 계십니다.

    본문 44절이 바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5절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44절에서처럼 하나님의 이끄심을 말씀하면서 성령으로 이끄시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듣고 배울 마음이 일어나고, 또 이런 사람들은 다 주님께로 나아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웨스트코트라는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45절은 하나님과의 교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학교의 종신 학생입니다.”

    47절에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가 배운 것처럼,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그가 세상에 왔는데도 그를 영접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육신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니며, 사람의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를 영접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 10장 1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영생의 축복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무리 크신 축복이 마련되어 있으나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할 때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48~51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말씀은 예수가 생명의 본질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대와 그 계명을 거절하는 것은 곧 생명을 놓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민수기에 기록된 이야기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의 보고를 받은 후 믿음의 보고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던 비겁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방랑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영원히 약속의 땅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의 생명을 잃을 뿐만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서도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고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축복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52~59절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말하는 예수님의 살이란 그의 완전무결한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성을 부여잡고 고수해야 할 것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뼈와 우리의 살과 같은 살을 지닌 분이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이 된 하나님의 정신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적인 삶을 입으시고 우리 인간적인 상황과 직면하시면서 우리 인간적인 문제들과 투쟁하시고 인간적인 유혹과 싸우며 인간적인 관계를 수행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 안에서 보게 됩니다. 
    “나의 인간 됨에 대한 생각으로 너희 심정을 배부르게 하고, 너희 정신을 배부르게, 너희 영혼을 배부르게 하라. 너희가 실망하고 낙심될 때, 너희가 생에 지쳐 있을 때, 생에 대해 혐오를 가졌을 때, 너희의 삶과 그 삶의 이런 싸움을 내가 담당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그의 인성의 사상을 공급받아서 우리의 인간성이 힘을 얻게 되고, 깨끗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피를 마셔야만 된다고 하였습니다. 유대 사상에서 피는 생명을 나타냅니다(창 9:4, 신 12:23).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의 존재 바로 중심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생활의 체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의 심정과 영혼과 정신을 그의 인성으로 채우라고 한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흠뻑 젖어 그 생명이 우리에게 스며들고 배여서 새로운 활력을 가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모든 식사는 하나의 성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찬이 하나님과의 어떤 특수한 약속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식사는 가난한 가정의 식탁이나, 부한 가정의 진수성찬이나, 잔디 위에서 먹는 식사나 모두 하나의 성찬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에는 성만찬의 기사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격식대로 드리는 예배 의식에만 국한하지를 않았습니다. “어떤 식사에서든지 너희는 주의 인성을 말해주고 있는 떡과 생명이 되는 피를 나타내는 포도주를 거듭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에만 제한되어 있다면 기독교는 빈약한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편만해 있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요한의 믿음이었습니다. 요한이 성례전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넓히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교회의 성찬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게 되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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