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십 인의 귀환(눅10:17-20)
  • 조회 수: 17, 2013.08.26 07:52:40
  •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온 구도자 여러분, 현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할 말이 많습니다. 그것이 사고 현장이든지 선교의 현장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9장 10절을 보면 돌아온 열 두 사도들의 흥분된 보고의 열기가 배여 있습니다. 열 두 사도는 앞을 다투어서 자기들의 사역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보고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 분위기를 돌아온 칠십 인으로부터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온 칠십 인을 만나 봅시다. 벌써 그들의 표정을 보면 그들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칠십 인의 얼굴마다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실패나 실망의 보고를 들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그들을 흥분시켰던 것은 귀신들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항복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파송하실 때에 주께서 가서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도록" 분부했습니다. 가서 병자들을 고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조차 쫓아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일까요? 여러분은 그런 체험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 내어 본 경험을 한 것 같지를 않습니다. 표정이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직접 귀신을 내어 쫓아 봤다고 하면 제자들과 함께 감격해 할 것입니다. 

    주님이 변화하는 그 순간까지 사실 제자들은 무력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주께서 내려왔을 때에 제자들이 귀신들린 한 사람을 붙들고 쩔쩔 매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주님께 그래서 도와 달라고 요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능히 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지금 그들은 해내었습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들의 기쁨은 이 사실에 근거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도록 지시를 받았는데 귀신까지 쫓아내었으니 흥분과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대하지 않던 수확 때문에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흥분된 제자들을 향해서 조용히 요긴한 교훈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와 같은 기쁨을 맛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까? 흥분된 보고를 할 사역 현장을 여러분은 가지고 있습니까? 현장에서부터 돌아온 사람들은 할 말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오후 전도부 모임을 통해서 능력 있는 사역의 현장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들은 다시금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할 말이 있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현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현장을 가져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 기쁨은 귀신들이 항복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 나가서 전도해 보십시오. 물론 복음을 들은 사람이 그 복음을 영접하면 여러분의 기쁨은 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접하지 아니해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그 기쁨을 여러분은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지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순종하는 제자들이 누리는 이 기쁨에 대해서, 아니 그 기쁨의 일 부분이라도 알고 계십니까? 올해는 유난히도 지진 참사가 많은 해였습니다. 주의 말씀에 따르면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동일한 소식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매몰현장에는 각국에서 구제품들을 급파하기도 했습니다. 매몰되는 사람을 구하는 일도 수고한 이에게는 남다른 기쁨을 안겨 줍니다만 영원한 생명을 구해 주는 일은 지극한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매몰된 현장에서 구출된 것을 일컬어서 소위 죽음의 문턱에서 회생했다고 말한다고 하면 진노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것은 죽음 한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매몰된 현장에서 구출된 모든 사람은 언젠가 다시 한 번 죽을 것입니다. 반드시 또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돌아선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새로운 삶이 펼져질 것입니다. 다시금 제자들의 보고를 새겨 들어봅시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유한 능력에 대해서 그들은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흥분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들은 차분히 주님의 말씀을 곰곰이 새겨들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근거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별로 한 일이 없는 한 주간을 보내고 교회 나오면 어깨에 힘이 빠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을 했느냐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들의 흥분은 이해가 되지만 그들은 주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는 변화 산상의 하늘 음성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주님 말씀은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첫 째는 주님은 "내가 보았다"고 사탄을 이긴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주님은 "내가 주었노라"고 제자들이 받은 권세를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주님은 기뻐하라는 명령을 통해서 그들의 기쁨이 어디에 근거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주님이 하신 말씀을 하나씩 한 번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인 지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동문서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기쁨에 넘친 제자들의 보고의 이면을 공개하십니다. 귀신들이 항복한 이면에는 사단의 패배가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졸개들이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일컬어서 성경은 사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항상 사탄은 단수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대장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나라든 하나님의 나라든 대장이 둘셋 되어서는 나라가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이든 국가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한사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졸개들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두목이고 그들의 졸개들, 마귀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들 몇몇이 예수 이름에 굴복한 이면에는 그 두목 사탄 자신이 패배한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상적으로 말하면 칠십 인이 나가서, 동네에 있던 귀신들을 몇 사람 내어쫓았습니다. 하지만 그 승리는 결정적인 더 큰 승리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귀신들의 항복은 이 사탄의 패배에 결과라는 설명입니다. 

    두목이 패배했기 때문에 그의 포로들을, 그 손아귀에 있는 자들을 이제는 내어놓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귀신의 두목 사탄의 패배라는 이 배경 속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칠십 인이 나가서 거둔 일련의 승리는 그 배후에 사탄이 패배한 사실 때문인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쫓는 제자들의 사역은 사탄의 무력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한 때 사탄은 그 세력이 하늘에 치솟았으나 지금은 거기서부터 추락했습니다. 그는 정복당했고 그의 무장은 해제되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선언을!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더 이상 사탄은 인간을 자기 수중에 넣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적인 책략은 더 이상 승리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물거품이 되어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진심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나온 여러분과 저는 사탄의 권세가 무력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그의 손에 힘이 빠졌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벗어났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사탄의 권세아래 속해 있었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했습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추종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따라서 죽는 순간까지 어디로 치닫는 지도 모르고 달려가던 자들이었습니다. 죄악된 본성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던 우리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성경은 우리의 과거를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 큰사랑으로 우리를 구출하셨습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빛 가운데로 옮기셨습니다. 사탄의 손아래 있던 자들을 아들의 사랑의 통치권 아래로 옮기셨습니다. 더 이상 죄악된 욕망대로 살지 않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소원을 따라 사는 자리로 이같이 나아 왔습니다. 우리 마음의 감사와 우리 입술의 찬양은 새로운 삶의 증거입니다. "내가 보았노라"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승리로 말미암는 해방을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찬송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승리자 예수께 속한 무리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일격에 사탄을 치명적으로 물리치시고 승리자로 계셔서 지금 선언하십니다. 사탄의 패배를 승리자로서 바라보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전도자들에게 항복하는 이면에는 그 두목 사탄의 결정적인 패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았노라"고 선언하시는 그때뿐 아니라, 그 이후 모든 동일한 승리를 내다보고 계십니다. 이미 당신의 사역과 당신의 제자들의 사역에서 나타났던 사탄의 패배는 장차 나타날 그의 파멸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세력은 점점 위축되어져 가고 있으며 한날 결정적으로 그 영향을 상실케 될 것입니다. 곧 우리주님의 최후 승리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승리자 예수와 함께 다시 일으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승리자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 그의 군사들입니다.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서 이제 하늘 보좌에서 군림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영원히 하나된 우리도 주님과 더불어서 지금 벌써 통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여러분의 참소자가 쫓겨났습니다. 여러분의 지위는 이제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권세는 확보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9절, 우리 한 번 큰 소리로 읽어볼까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권세를 주었노라"고 선언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그분이 그 제자들에게 동일한 권세를 이미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주님은 먼저 상징적인 언어로서 그리고 나서 사실적인 언어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뱀과 전갈을 밟을 권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우리는 제대로 음미해 보기가 힘듭니다. 뱀을 한 번 밟아 보신 분이 있습니까? 이슬이 내린 풀밭을 지나가다가 물컹해서 보니까 뱀 때문에 놀란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뱀을 밟은 권세를 준다고 해도 "나는 안가지겠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금수강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본래 주어진 동네는 저 팔레스틴이라고 하는 사막지대 이야기 입니다. 사막에서 무서운 것은 불 뱀들 그리고 햇빛을 피해서 그늘에 잠들면 바퀴벌레가 기어 나와서 무는 전갈들 물리면 끝장나는 것들입니다. 뱀과 전갈이라고 하는 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아주 무시무시한 짐승들이요, 독충들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뱀과 전갈을 밟을 권세를 주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지를 그들은 알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 광야를 정복해 나갈 권세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땅에 모든 세력을 짓밟는 권세를 주께서 이미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상징적인 언어로서 설명합니까? 그렇게 설명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실감을 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상징적인 언어로서만 말하지 않고 다시 설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뱀을 밟을 수 있고 전갈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식으로 누가 오해하면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오해이기 때문입니다."…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상징적인 언어 다음에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보호자이십니다. 그 백성에게 권세를 주셔서 그 아들의 승리에 동참케 하십니다. 옛날 출애굽의 위험에서 그 백성을 지키신 하나님께서 오늘 광야를 지나는 하나님의 백성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 어떤 불 뱀과 같은, 전갈과 같은 세력도 여러분을 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그 피난처로 삼는 자들을 주께서는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옛날 40년 광야시절에 그 백성을 보호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장차 마지막 환난에서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최후에 싸움에서 악한 세력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는 그날까지 유효할 것입니다. "아무도, 그 무엇도 너희를 해할 수가 없으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여러분을 파송하셨습니다.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위압하거나 여러분을 이겨낼 수 없다고 여기 선언하고 있습니다. 승리는 여러분의 것으로 보장되었고 안전은 여러분의 것으로 확보되었습니다. 가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이제 순종해 보십시오. 두 주간 동안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제 남은 한 주간은 기도하면서 순종해 보십시오. 비록 어린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냄 같지만 그 양들을 끝까지 보호하실 목자가 우리에게는 계십니다. 

    여러분,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무력증은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순종하는 장을 가진 제자들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쁨의 보고를 할 수 있습니다. 열 개 넘는 전도팀들이 모두 나와서 사역을 할 때에 여러분들이 현장에서 들어보셨다고 하면 할말을 가진 사람들이란 것을 금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힘이 없습니까? 사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힘을 거두십니다. 

    하늘과 땅의 대권을 가진 주께서 우리에게 그 권세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권세를 우리가 가지고 행사합니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제자의 길에는 핍박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때로는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엄연히 순교자가 수없이 생겼는데 주님은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실패나 좌절, 핍박이나 순교 그것조차도 사탄의 세력 때문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께서 그 백성의 유익과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에 난관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만약의 제자의 삶에 시련이 있다고 하면 아니 죽음 그 자체도 우리를 패배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할 뿐입니다. 오히려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지킴으로서 사탄의 패배케 하는 영광스러운 승리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들이 순교자입니다. 순교자는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말로 인해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순교자는 승리자로서 죽는 순간 사탄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는 자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사탄은 최초에 뱀을 통해서 유혹함으로서 인류를 그 본래의 위치에서 떨어지게 했지만 이제 여러분은 주님이 부여하신 권세로서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권세를 유린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권세가 결단코 하나님의 백성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지옥의 모든 권세가 달라붙더라도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를 넘어뜨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요즘 이 진리를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귀신이 들어와서 병도 주고 어려움도 주고 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종이 되어서 쩔쩔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세상보다 크십니다. 그리스도의 승리하신 영은 만물 위에 계십니다. 어떤 악의 영도 대면할 수 조차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약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시는 주님은 강하십니다. 우리를 본래 위치에서 떨어지게 한 자는 이미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땅에서 그의 모든 졸개들의 세력을 짓밟는 권세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가서 사탄의 종되었던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그들을 만나고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싸움의 본질을 바로 파악하셔야 합니다. 귀신이 쫓겨나는 현장을 가지십시오. 병자가 치유되는 사역 현장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 권세가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전도자의 현장 아닙니까? 

    그러나 권세의 행사가 최후의 관건이 아닙니다. 최후의 관건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마지막 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귀신들이 항복한 배경이 무엇 때문인지를 설명하신 주님께서는 결론적인 권면을 하십니다. 사탄의 세력을 정복한 그들의 사역만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사역으로 기뻐하는 자는 열매가 없으면 실망할 자입니다. 그러기에 사역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가 누구인지 그 사실로 인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으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눈앞에 나타날 때에 열광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능력은 나타날 때도 있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변치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역자로서 무엇을 했느냐 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기억할 때 우리는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속적인 기쁨의 근거는 우리가 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이같이 경배하는 자리에 나오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 여러분과 제가 지금 예배하는 것은 주님의 사역의 구체적인 열매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는 일,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는 일은 우리 주님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부과된 임무이기도 합니다. 구역마다 모두 참석, 사람마다, 성도마다 영적 추수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사역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기억하면 언제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사역에 근거한다면 한번 웃고 한 번 울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누구인지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신다면 언제나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영원히 변치 아니할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삶이 그의 사역자로서 보잘 것 없다고 사탄이 속삭이는 순간에도 여러분의 영원한 신분은 변치않다는 사실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성취한 일에서부터 주님이 성취해 주신 그 엄청난 사실로 눈길을 돌리십시오. 여러분의 승리의 생활 그 곳이 목표점이 아니라 확실하고 불변하는 주님의 승리의 업적에 마음을 항상 쏟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구도자 여러분, 오늘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기뻐해야 할 참된 승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여러분이 무엇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독생자를 내어 주셔서 사랑하셨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실패해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로 인해서 기뻐하십시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귀신조차 항복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을 여러분의 삶에서 확보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는 마십시오. 땅의 일에만 시선을 두지 말고 하늘로 여러분의 눈을 돌리십시오! 하늘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진 여러분의 이름으로 인해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권세는 땅에서 패배한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입니다. 대적 사탄이 하늘로서부터 떨어진 시대를 살아가면서 땅에서 그 졸개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수치스럽고 패배하는 삶을 살아서는 이제 안됩니다.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답게 순종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능력을 부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 가운데 무한한 힘을 공급하십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서 모든 능력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그가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지금 다스리십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려는 소원이 여러분 마음속에 있을 때에 그 삶을 살 수 있는 전능자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원이 가득하게 될 때에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권세와 능력을 활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답게 순종하는 삶을 이제 사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을 이 새로운 영역에 옮겨 주신 하나님의 사역이 정말 놀랍게 생각될 것입니다. 땅에서 귀신들이 항복하는 순간에 귀신들을 항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여러분에게 감사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기 그러나 라고 하는 말은 앞의 기쁨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기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의 것도 중요하다, 앞의 것도 귀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능력도 없으면서 내 이름이 하늘에 있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라고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그 문맥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해석의 원리입니다. 주님이 지금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돌아온 기쁨의 보고를 하고 있는 칠십 인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만 기뻐하지 말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한 사실로 인해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래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어"그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땅에서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누리고 있는 맛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거기에 머물지 말고 더 큰 신령한 기쁨을 맛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보적인 기쁨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양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자위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반드시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와 함께 승리하도록, 아니 넉넉히 승리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승리자의 기쁨을 누리도록 의도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망각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땅의 승리를 기뻐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 하나님의 백성이된 사실로 인해서 더욱 기뻐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더욱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미 기뻐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서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도록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나는 그래도 내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어'라고 자족하도록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뻐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고 있습니까? 승리의 기쁨을 맛보시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여러분이 또한 알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항복을 받는 기쁨을 땅에서 체험하십시오. 나아가서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로 인해서 더욱 감사하십시오. 

    거기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사탄에 대한 최후의 승리의 증표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인류를 송사 했습니다. 고자질했습니다. 하늘에서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했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욥을 괜히 사랑하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욥처럼 축복하고 사랑하면 하나님 사랑 안 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욥이 알 수 없는 시련이 시작되었던 것을 우리는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탄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승리가 주의 십자가에서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는 쫓겨났습니다. 사탄의 시도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는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이름은 이제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하늘 백성의 명부에 우리 이름이 기록된 것은 사탄을 정복한 주님의 공로입니다. 땅에서 귀신의 항복으로 기뻐하는 백성들은 하늘에서 그들의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것을 보고 감격해야 할 것입니다. 땅에서 맛보기 시작한 기쁨을 그 날 하늘에서 충만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생명을 구하는 일에 참여하십시오. 한 생명 돌아보고 한 생명 구원하자 라고 여기 지금 걸려 있습니다.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이 큰 소리를 지르듯이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마귀의 손아귀에서부터 형제 자매를 구출하는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지진 현장 콘크리트 무더기 속에서 한 생명 구하여 내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언젠가 다시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보내셔서 '가라 내가 권세를 주었노라'고 명하시는 주님은 사탄의 세력에서부터 영원히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잃은 양을 찾자 하고 그렇게 구호를 거니까 어떤 구역장은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구역에는 나오다가 안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지구마다 새벽에 이름을 띄우니까 아마 저 사람 말고는 잃은 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 지 모르지요.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생 모두가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 살아가기 전에는 당신이 오신 목표를 이루시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구역모임에 나오다가 지금 나오지 않는 사람, 구역 모임에 참석하지만 나오지 않는 자녀들 그들이 우리의 잃은 양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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