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임 받는 자(창세기 6장 13-22)
  • 2013.01.07 11:27:17
  • 이 해가 이제 저물어 갑니다. 특별히 이제 얼마 지나면 2000년이라 하는 새롭게 불려지는 해에 들어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2000년과 그 이후의 날들을 우리에게 계속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불과 한 10일 후에는 우리는 그 2000년이라고 불려지는 새해에 들어가게 되겠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천년을 주시면 그 다음 천년은 이천년이 아니라 이제 삼천년이 될텐데 우리는 '새 천년, 새 천년' 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한 천년을 우리에게 주신 것쯤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천년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기에 계신 저와 여러분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천년을 다 얻어서 다 살 분은 한 분도 없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새로운 2000년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한 세기 곧 2100년까지도 살아남을 분이 이중에 과연 몇 분이나 있겠는가? 집에 재워놓고 온 아이 중에는 혹시 2100년을 걸쳐 살 아이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00년도 앞으로 더 살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한 천년을 주시지만 우리의 앞날은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앞으로 약 한 세기 안에 어떤 분들은 아주 빠르게 인생의 그 결정적인 때를 모두 만나게 될텐데,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 주님께서 이 해 마지막에 혹은 새해 초에 인자의 날로 삼으시고 우주적인 종말을 행하시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주께서 혹 아주 늦게 오신다 하더라도 우리들 개인의 결정적인 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다 만년 살 것처럼 삽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머지 않아서 결정적인 때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미리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내년 새 해에 들어가서 오늘 같은 내용을 말씀드리면, 새 해에 들어가서 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큰 희망을 가지고 나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고 기분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기왕에 해 마무리 할 때 오늘 좀 부담스러운 말씀을 드려서, 이 설교는 부탁합니다마는 앞으로 한 100년 갖고 가셨으면 합니다. 이 설교의 내용을 적어도 우리 모두가 결정적인 때를 맞이할 그때까지 이끌어 가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고서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장차 우리가 그리 될 것이라 하여 표본적으로 나타내 주신 노아의 그 결정적인 때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라 불리어지는 노아 방주, 이 방주를 노아의 가족은 어떻게 지었느냐? 오늘 본문에 나타난 6장 15절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규격대로 하나님께서 지으시라는 방식대로 방주를 지었다 라고 했습니다.
    혹이는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에 바닷가에 짓지 아니하고 산꼭대기에다 지었다 라고 해서 '산꼭대기의 방주, 산꼭대기의 방주' 합니다만 제가 성경을 통해서 볼 때에는 산꼭대기에 지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상당히 높은 곳에서 이 방주를 건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들 얘기하는 '산꼭대기' 같지 않은 것은 7장 18절 이하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17절부터 볼까요? "홍수가 땅에 사십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물이 많아져 방주가 떠올랐습니다. 땅에 있다가 떠올랐습니다. 그 다음에 18절에)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점점 차 올라서 방주는 두둥실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차니까 이제 이렇게 물위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도 높은 산들은 아직 꼭대기가 물 속에 잠기지 않고 있었는데 더욱 더 계속해서 비가 쏟아지더니 이제는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다 덮였더라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은 것은 아니고 상당히 산 높은 곳에 가서 지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또 흔히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들어왔고 또 보아 왔습니다만 아주 이 노아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설명하려고 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막 홍수가 내리게 되니까 마을 해변 등지에 살던 사람들이 비를 피해서 홍수를 피해서 막 산으로 노아의 방주 있는 데로 쫓아 올라와서 "문 좀 열어주세요. 살려주세요. 노아! 함! 야벳! 샘!" 하면서 막 좀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는데 노아가 방주 문을 탁 닫아버리고 다시 열어주지 않아서 노아의 여덟 식구만 살고 다 죽었다 그렇게 이제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유년 주일학교에서부터 많이 들어서 지금도 기억이 나고 또 이 노아방주 홍수 사건을 그림으로 그린 성화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성화가 있는데 그 성화도 보면 이 방주가 덩그렇게 있고 막 비가 쏟아지는데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그 방주 밑에 와 가지고 살려달라고 막 하는 그림도 제가 보기도 했습니다마는,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렇게 그리고 또 이 장면을 더욱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와서 살려달라고 한 것처럼 설명은 하고 있어도 이 노아 방주의 사건이 기록된 창세기 6장 7장 8장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살려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또 노아가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 이런 적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6장 16절에 보면 원래 창은 높은 곳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라고 했으니까 창은 하늘을 향하여 냈지만 문은 어떻게 내도록 했느냐 하면 높은 곳에 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벽에다가 상중하 3층으로 내도록 했으니까 맨 밑바닥에도 문 하나 또 중간쯤에도 하나 그리고 또 저 상층에도 하나 그래서 각각 짐승들도 그 층별로 들어가도록 하고 또 부부와 자부들도 각각 층별로 이렇게 다 살도록 해서 만들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문들이 방주에 저 위에만 있지 아니하고 중간에도 있고 아래에도 있는데 사람들이 이 형편에 기여 올라왔다면 역청으로 발라둔 이 문을 그냥 두었겠느냐 그겁니다. 얼마나 부수고 얼마나 소리질렀겠습니까.
    그리고 또 뭐 부수고 들어가지 못한다면 기여 올라가서 붙어 있으면 살지요. 그러나 기여 올라가 붙어 있은 놈도 없고 그리고 뭐 살려 달라고 그렇게 한 적도 없고 만약에 누가 올라와 가지고 "노아 할아버지, 샘 야벳 문 열어주세요. 살려주세요." 한다면 당대에 의인이던 노아가 그저 '내 가족만 살겠다. 이놈아, 죽어라. 맛 좀 보아라. 아 고소하다' 그렇게 할리도 없습니다. 당장 열어주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라 하셨고 닫은 후에는 누가 열어 달라고 해도 열어주지 말라 혹 지시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지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런 지시를 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깊은 샘이 폭발해서 물이 확 뒤집혀져 버리고 보통 때에 이 비구름이 떠다니면서 비를 내리듯 이렇게 홍수가 진 것이 아니라 창세 이래 처음으로 윗물이 터져서 내려왔다 그겁니다.

    하늘에 창이 열려서 그냥 쏟아 부어서 위서부터 아래로 쏟아 내리는데 비가 굵은 빗줄기로 와도 산에 올라가기가 힘들거늘 하물며 이 형편으로 쏟아지는데 그냥 들어붓는 것처럼 이렇게 들어붓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느냐?
    7장 11절 12절에 보면 그날에 큰 깊음의 샘이 터져 버리고 하늘에 창들이 열려서 사십주야를 쏟아 내렸는데 어떻게 마을 사람들이 이 높은 곳으로 올라올 수 있었겠느냐? 그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깊은 샘이 그 깊은 물 샘이 확 뒤집어지면 말이죠, 어떻게 되었겠느냐? 여러분 상상을 한번 해 보시려면 알루미늄 냄비에다 라면 끓여 잡수시려고 물을 팔팔 끓이면 확 뒤집어지는데 거기에다가 스프입니까? 양념을 그것을 한번 넣어보세요. 확 뒤집어 집니다. 물이 이렇게 뒤집어지는데 거기에 어느 놈이 살아 가지고 거기에 올라와서 '노아씨, 노아씨' 할 형편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아마 다 멸절되고 방주만 남게 된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노아와 그 가족은 그 짐승 암수 여러 짐승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갈 수 있었느냐? 지금부터 이제 드리는 말씀이 앞으로 갖고 갈 말씀입니다. 결정적인 순간까지 갖고 가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데,
    우선 짐승 등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홍수 있기 전에 암수 한 쌍씩 건강한 여기에 불임증 있는 짐승은 없습니다. 다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한 암수 한 쌍씩을 이제 다 스스로 오도록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홍수 전에 다 안으로 이제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어떠했느냐? 방주 짓는 일이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방주는 어떻게 지었다고요? 하나님의 뜻대로 높이는 어떻게 또 넓이는 어떻게, 길이는 어떻게, 다 몇 규빗 몇 규빗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그 규격대로 방주를 다 지었습니다.
    방주를 다 지었으니 그 동안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지도 않는 것 이 가족 몇이서 이렇게 고생을 여러날 얼마 걸렸는지 모르지요. 이렇게 고생을 했으니까 일 끝났으니까 '아이구, 아버지 이제 끝났습니다. 아이구 좀 놀다가 오겠습니다' 하고서 마을에로 내려갔다면 마을에 내려가서 그저 한번 놀아보자 쉬어보자 노래방에도 가고 또 마을에 가 가지고서 한잔하고 춤도 추고 뭐 좋아 가지고 마을에 푹 빠져 들어있었다면 이 결정적인 때에 아무리 노아 가족이라도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방주에까지 올라온 사람이 없다 그겁니다. 올라오기 싫어서 못 올라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멸하시려 역사하시면 그것을 뚫고 살아남을 자는 없다 그겁니다.
    그래서 이 아들들이 하나도 예외 없이 또 그 자부들이 하나도 예외 없이 노아와 함께 모두 방주에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어떠했기 때문이냐? 그들의 구원선인 방주를 다 지었다고 해서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방주 근처에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온다할지라도 무슨 위기가 닥친다면 바로 방주로 연결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이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마을 사람들이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으로 거기에 푹 빠져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노아라도 아무리 노아 아들이라도 이 결정적인 때에 만약에 마을에 들어가서 푹 빠져 있었다면 그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방주는 오늘날 무엇을 가리킵니까?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결정적인 때를 맞을 때에 교회와 더불어 살고 있어야지, 교회를 지을 때까지는 열심하고 또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키울 때까지는 열심하다가 이제 다 이루어내어 가지고 교만하고, 다 이루어내고 이제는 교회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어떤 교회를 이제 만들려고 합니다.
    만약에 또 저 세상에 빠져 가지고서 타락한 상태로 그냥 거기에 머물고 있을 때에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라고 해 봅시다. 노아의 아들인들 노아의 자부인들 구원받을 수가 있겠느냐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바다의 물고기를 식물로 준지가 노아 이전 오래 되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식물로 삼으려고 하면 배가 왜 없었겠습니까. 바다에도 배가 있고 강에도 강이 있고 호수에도 다 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십주야 홍수가 내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멸하신 이 홍수 내린 후에 살아남은 배가 한 척이 없었습니다. 배가 없어서 다 깨진 게 아닙니다. 전부 인간들이 보통 때 쓰려고 자기들 계산대로 자기의 뜻대로 지었던 배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결정적인 때에는 효과가 없었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역사하시려는 이 결정적인 때에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여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한 하나님의 뜻대로 된 배를 붙잡아야 사는 것이지, 인간의 뜻대로 이끌어간 교회, 인간의 뜻대로 만들어간 어떤 신앙 이런 것은 승리 할 수가 없다 그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지으라고 한 그 뜻대로 지은 배만 살아남았으니 노아의 배만 유일하게 남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우리 앞에 주님의 날이 곧 다가올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매우 더디 오신다 하더라도 우리 앞날에 개인적인 결정적인 날은 새 천년을 주신다 하더라도 천년이 내 천년이 아닙니다. 새 천년이나 만년이 내 천만년처럼 생각하지만 천날 만날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천년 살지 못합니다. 우리 개인의 결정적인 때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를 여러분에게 하려고 하니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려고 하니 새해에 가서 못하겠더라니까요. 새 해에 들어가서 한참 신나게 영원히 살 것처럼 하실 분들에게 이런 소리하면 '목사가 년초부터 초치나?' 이럴까봐서 좀 미리 한다고 하지 않습디까. 왜 이렇게 생각하든지 저렇게 생각하든지 각 개인의 결정적인 때는 그렇게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때에는 구원의 방주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살아남을 곳이 영원한 곳에 우리 새로운 몸을 들여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이 교회밖에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노아의 때에 방주 하나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정적인 때를 줄 때에는 우리가 속하고 있는 이 교회 하나만 가능할 것인데, 우리는 교회의 교인으로서 주님을 머리로 하고 그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지체된 우리는 이 교회를 이끌어가되 이 교회를 인도해가되 이 교회와 함께 우리가 나아가되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 그때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는 지체여야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교회는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아지고 아무리 변화가 오고 아무리 상황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사람의 뜻대로 되어버리는 그런 교회, 안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결정적인 때를 맞을 때까지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아름다운 교회를 우리가 유지하면서 이 아름다운 교회에 붙어있어야지, 교회를 다 이루었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해서 이 교회로부터 멀리 떠나가서 마을과 함께 있다면, 세상에 즐거움 속에 빠져버린다면 결정적인 때에 "저 산언덕에 나의 방주가 있어. 내가 헌금했던 교회가 있어. 내가 전에 다녔던 교회가 있어." 하면서 쫓아 올라가려고 해도 여러분, 이 방주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어야 맞는 겁니다. 방주에는 세상 사람이 올라와 문을 두들긴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 결정적인 순간을 언제 맞을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 항상 나팔수가 우리더러 경성하도록 깨우쳐주는 나팔소리로 듣고 세상에 빠져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세상이 더욱 좋아진다 하더라도 세상에 잠깐 잠깐은 갔다 올지 몰라도 가더라도 끄나풀이라도 교회에다가 묶어 놓고 갔다가 "더 가면 안되지. 더가면 안되지. 이 이상은 못 가지." 하면서 올라오는 여러분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 내려간다는 말은 못하지요. 방주를 짓는 동안에 노아의 자녀들도 아마 역청 가지려고도 내려갔을 것이고, 로프(rope) 가지려도 내려갔을 것이고 그렇게 큰배를 지으려면 도끼가 여러 자루도 부러졌을 것이니까 그런 것 구하러 가고 도끼 구하려고도 내려가고 마을에 많이 갔겠지만, 마을에 내려가 가지고 마을 좋다고 그냥 거기에서 지낸 것이 아니라 항상 쫓아 올라왔고 다 이룬 다음에도 잠깐 잠깐 볼일이 있어 마을에 가고, 잠깐 잠깐 마을 사람들의 사람들과 함께 잔치나 결혼식이나 참석하고 다 이렇게 어차피 직장을 가지고 산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어떤 직장 어떤 일로 세상에 얼켜설켜 살아도 세상 중심의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의 사람이 되셔서 결정적인 때가 올 때까지 그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세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이것은 저의 소망일 뿐이고 어찌 꼭 안 빠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가더라도 그냥 통채로 내려가지 마시고 발목에다 교회하고 묶어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는 가지만 영영 가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슨 기미가 있다. 이상하다. 때가 오는 가보다. 내 죽을 날이 다 되어 가는가보다. 내 생각이 이상해지고 정신도 없어지고 이상하네. 몸에 좀 이상이 오네' 이렇다 싶을 때에는 빨리 교회로 다시 한번 확인해 가지고서, 잠수부가 저 물밑에 들어가 있어도 저 위로부터 내려온 줄 그것을 한번씩 확인을 해 보듯이 항상,
    여러분, 2000년 들어간 이후에 언제든지 이 교회로부터 갖고 내려오는 끄나풀 끊어진 뒤에까지 마시고 끊어지기 직전까지만 약간 내려갔다 구경하고 올라오고, 구경하다가 올라오고, 맛 조금 보다가 올라오고, 그 맛도 안 보면 더 좋습니다마는도 그리 하십시다. 2000년 들어간 이후에 결정적인 때가 우리에게 다 옵니다. 이날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6장 14절을 다시 확인해 볼까요?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이렇게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께서 주님의 교회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섬기며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이렇게 말씀들 많이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네가 주를 위하여 교회를 섬기느냐?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느냐? 너는 교회를 위하여 하고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마는 진정 따지고 보면 그런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이다." 했습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랬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함이 있습니까? 이 지상에 교회들이 세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이구 슬퍼, 외로워…' 하나님이 그러실 분입니까? 저 하늘의 별들과 저 티끌들과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영광 돌려줄 자가 모자라서 하나님 괴롭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지상에 교회를 짓고 "섬겨라. 주님을 너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네 자신보다 더 귀하게 따르라. 섬겨라." 한 것은 따지고 보면 우리는 주님을 나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 주의 교회를 위하여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계산해볼 때 그것은 바로 너를 위한 것이다 그겁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의 그 결정적인 때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아니하고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교회를 더욱 이루고 이 교회는 건물적인 교회도 됩니다만 전체적으로 모인 교회, 이 교회를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건물을 볼 때 유형교회라고 그러고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 자체를 무형교회라 해서 에클레시아(ecclesia)라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모임 성도들이 모임, 주님을 머리로 해서 하나가 된 이 모임, 이 모임을 튼튼하게 하고 이 지체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끝까지 교회 중심으로 여러분께서 결정적인 날이 더디 올지라도 그때까지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고 교회 중심 생활을 하시면 안전한 방주에로 들어가 크게 보호를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 같은 보호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소돔 고모라에서 롯과 그의 가족이 결정적이던 때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 그 내용은 창세기 18장에 나타나 있습니다만 이 구약 성경에 결정적인 때를 대표적으로 노아의 때와 소돔 고모라의 때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 작디작은 이런 환난과 사건들은 있어도 이 구약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가장 큰 두 때는 결정적인 노아의 때와 결정적인 소돔 고모라의 때를 이제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데 이 창세기 18장과 19장을 잘 살펴보면 롯과 그의 가족은 참으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아찔했던 가족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아찔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늘에 어떤 소식이 들려졌느냐? 천사들에 의해서 항상 보고가 올라가지요. 세상 어떤 사람이라도 한 아이에게까지라도 천사가 따라다녀서 24시간 언제나 그의 주변을 하나님 앞에 아뢴다고 마태복음에도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니 세상 모든 되어지는 것을 낱낱이 보고해 올리는데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서 보고를 받다보니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관영하여 넘쳤으니 이제는 끝 날을 저들이 만들었도다. 더 이상은 참고 견딜 수가 없도다." 하면서 천사들에게 그 성을 다 태워버릴 불씨를 잡혀 가지고서 내려가자 해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내려오신 하나님께서 그저 바로 불을 때리지는 않습니다. 그 얘기를 들어보시니까, 보니까 뭐냐하면 과연 내 귀에 들여진 대로 현장이 그렇다면 불씨를 가지고 이것으로써 바로 멸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고 바로 가시지 않고 평소에 항상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순종한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있는 아브라함이 사는 동네가 그리 멀지 않아서 "기왕에 지방까지 내려왔으니 아브라함 사는 동네로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 보고 지나가세." 해서 하나님께서 길을 그렇게 잡았던 것 같습니다. 참 이게 아주 롯에게는 아주 운이 좋았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무리 상수리 수풀 근처 아브라함 집 앞을 지나가는데 "아브라함이 어찌 살꼬?" 하고서 그 집 옆으로 지내 가시려고 가는데 아브라함이 또 이게 참 하나님 일행이 지나갈 때 문 앞에 나와 가지고서 정처 없이 앉아 있다가 일도 안고 고개를 쑥 빼고 앉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고개를 들어보니 하나님과 그 일행입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입니다.
    "아이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우리가 어디를 좀 가는구나." "내 집 앞을 지나서 그냥 가실 수는 없습니다. 내 집 앞으로 하나님이 통과하신다는 것 자체가 나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이 은혜 입은 종에게 하나님이 드셔서 그저 발을 닦으시고 간단한 음식을 잡수시고 유쾌히 하신 후에 가시옵소서." 이제 발을 닦아 드리면 먼지도 씻고 피곤도 풀어지고 그 사람들이 아주 참 가장 그 섬김의 표시를 그렇게 하지요. 들어오면 발을 씻어 드리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자기 마음으로 피곤도 푸시고 가라 했지만 하나님과 천사가 무슨 피곤이 있겠습니까? 사람들 같으면 피곤이 있겠지만 하나님과 천사는 피곤 그런 것 풀지 않아도 될 판인데 아브라함이 모셔들여 가지고 발도 닦아 드리고 부인에게 시켜 가지고 "좋은 가루에 빵을 만드세요."
    또 종을 시켜서 "살찌고 좋은 것 있지? 그것 잡아 가지고 와서 빨리 구워." 이렇게 해서 대접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부인도 자식이 있으리라." 이렇게 도 축복도 해 주시고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한 후에 천사들은 시간 되어서 갑니다. 바빠서 갑니다.
    그래서 떠나가고 하나님과 이제 아브라함이 남게 되는데 하나님이 떠나기 전에 "내가 자네한테까지 뭐 말 안 할 필요가 없지. 내가 이번에 이 지상에 내려온 출장 목적을 얘기하지. 저 소돔 고모라에 죄악이 관영했다는 말이 내 귀에 들렸는데 아마 사실일거야. 이제 내려가서 그대로이면 그저 불씨를 갖고 왔으니 이 밤에 다 멸할 것이라."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소돔 고모라 깨어지는 것은 별 것 아니지만 그 성에 자기 조카 가족이 살고 있는데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겁니다. 그래서 가만 하나님이 그 말씀하시는데 참으로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롯은 만약에 하나님이 아브라함 집 앞으로 가지 않았으면 바로 벌써 깨졌을텐데 그래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인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니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아니하는 줄 압니다. 소돔성에 의인이 오십명 정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의인 오십명이 있으면 혹 의인 오십을 인하여 그 성을 멸하지 않을 수 있나이까?" 이렇게 묻습니다.
    자기 조카 있다는 말 못합니다. 왜 못합니까? 조카는 벌써 삼촌과 함께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될텐데 그러나 벌써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소돔 고모라 죄악의 성 한복판에 집 짓고 지금 사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살던 사람들 같으면 몰라도 하나님 섬기다가 가 가지고 그 복판에 가 있으면 이것은 불이 내려와도 뭡니까? 더 뜨거운 불이 먼저 가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뭐 아브라함이 '내 조카 롯이 거기 있습니다' 그 얘기 아예 하지 못합니다. 그것 해봤자 되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저 그 동네 혹 의인이 안 있겠느냐고 그러면서 자꾸 그 간절하게 부탁하는 부탁을 한번 읽어볼 수가 있는데 18장 22절 이하를 한번 보실까요.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이것은 불씨 가진 천사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지금 아브라함의 관심은 의인은 살려야 된다는 겁니까? 의인 때문에 성을 살려야 된다는 겁니까? '의인 때문에 성을 그냥 두면 내 조카 놈도 살아남을 것이고, 뒤에 내가 회개를 시켜도 시키고…' 그런 뜻입니다.
    또 25절에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혹 성경을 읽으시는 중에 이 구절만 보면 의인만 살리라는 뜻이고 소돔 고모라 악인은 다 죽이라는 것 같지만 이 전체 흐름을 보면 아브라함의 관심은 의인이 아닙니다. 성(城)입니다. 왜 성이냐? 조카가 사는 성이다 그겁니다.
    자, 그 뒤를 이제 또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그러니까 오십을 살리겠다는 뜻이 아니고 "오십 있으면 그 지경을 용서하리라" 벌써 아브라함의 그 매달리는 간구의 핵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벌써 그 성을 살리겠다.

    또 27절에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지금 오인이고 사십오인이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하여간 성을 멸하실 겁니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얘기는 뭡니까? 아브라함의 핵심의 내용은 뭡니까? 의인만 살리고 죄인 죽이라는 뜻입니까? 의인이 혹 몇 개 있으면 그 의인 몇으로 인하여 성을 두겠느냐 라는 뜻으로 물으니까 하나님도 의인을 살리겠다가 아닙니다.
    "성을 살리겠다 의인 있으면…." 그런데 자꾸만 자꾸만 얘기하고 계산해 내려가는데 하나님의 컴퓨터가 보통 컴퓨터입니까? 말 하자마자 보니까 오십도 없어 사십도 없어 삼십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막 아브라함이 바빠집니다.
    31절에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를 살려보려고 조카 얘기를 꺼내어보았자 안될 것 같으니까 성을 어쩌든지 살려보려고 다른 의인 찾아서 한 오십명 안 있겠는가 싶었더니 오십 명은커녕 열 명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더 이상 말씀을 드릴수가 없어서 돌아서니까 하나님도 바쁘시게 가시고 자기도 자기 집으로 가서 "오늘밤 끝났네. 이제 끝났네." 이렇게 크게 근심하면서 이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헤어진 것을 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그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아요. 요즘 우리 성도님들 기도하는 모습을 가만 보면 참 강력해요. "하나님 복을 줄 겁니까? 안줄 겁니까? 주시옵소서!" 달라고 할 때에는 미안해서 "주시옵소서…" 이렇게 해야 할텐데 "주시옵소서!" 굉장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하는 것을 살펴보면 '안주기만 안 줘봐라' 이런 정도까지 쌔신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야 뭐 아버지니까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시니까 그럴지 몰라도 그 하나님도 자식을 이기지 못해서 워낙 독하게 쌔게 나오면 해준다고 또 약속이 있어요. 마음에 안 들어도 귀찮아서라도 해준다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기도하든지 기도하면 하고 나서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여자가 가서 자꾸 부탁을 하니까 싫어도 해주는 것처럼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일까 보냐?" 했으니 그런식으로 빼어내는 자식도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마는도 하나님이 주시고 나서도 "참, 저게 문제야. 어찌 저런 게 났을꼬?" 아마 주시고서도 그럴텐데 이 아브라함의 겸손함을 보십시오. 조카 때문에 말하면서 조카 이름도 대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이름이 못됩니다.
    그래서 다른 의인 붙여서 때문에 조금 살려보려고 애를 애를 쓰다가 "티끌같은 나라도 한번만 더 말씀을 드릴 기회를 주시옵소서." 하다가 열명 되었으면 또 다섯 명 두 명 한 명까지 계속 버틸텐데 더 이상 못하고 돌아서는 이 참 온유하고 겸손하고 그러나 조카를 살려보려는 간절한 심정의 이 아브라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즉시 먼저 간 천사들에게 에스오에스(SOS)를 친 모양입니다. 텔레파시를 보냈던 것 같아요.

    그래 원래 이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18장 20절로 21절에도 보면 이 조카 롯이 있는 이 성 전체를 멸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만 그것을 멸하려고 왔는데 아 그날 천사들은 막상 가 가지고서 불 가지고 불사르러 들어갔으나 불사르기 이전에 이보다 먼저 뭘 하려고 몸부림을 쳤느냐?
    롯을 만나고 롯을 구출하려고 애를 씁니다. "나갑시다. 나갑시다. 딸들도 데리고 나갑시다. 사위들도 데리고 나갑시다. 빨리 가야 합니다." 하면서 롯을 먼저 찾았고 롯을 보호하겠다고 하고 그리고 강제로 끌어내겠다고 합니다.
    그래 롯이 천천히 천천히 나가겠다고 이렇게 하니까 "바쁩니다. 이 해가 이 밤이 지나기 전에 해가 뜨기 전에 이 성을 무너뜨려야 되는 벌써 시간의 약속이 정해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넘길 수가 없는데 빨리 가야 됩니다." 하면서 재촉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천사 둘이 갔지요. 두 사람 천사가 갔는데 롯은 따라 나옵니다. 그 부인도 따라나옵니다. 그리고 딸들도 이제 나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사위들 오자고 하니까 사위들은 세상 좋다고 안 오고 이렇게 하고 나오는데 두 사람이 가서 강제로 끌어냅니다. 빨리 빨리 나가자고….
    그러니까 천사들이 손 두 개씩이니까 하나씩 잡고 이 네 식구를 빨리 끌고 이렇게 강제적으로 나간 것을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데 이렇게 나가면서 하는 말이 "빨리 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불 지필 시간이 늦었는데 너희들 때문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 빨리 도망가서 저 먼 산으로 올라가라."고 말했더니,
    그랬더니 롯이 하는 말이 "아이구, 다리야. 저 먼 산까지 이 밤중에 어찌 터득거리고 갑니까? 우리 못 갑니다. 이 중간에 작은 언덕 소알이라고 있는 저기를 우리가 갈테니까 거기로 피하게 해 주시요." 그래서 천사들이 알았다고.
    원래 소돔 고모라의 갖고 온 불을 확 붙여 버리면 그 작은 성 그것까지 그냥 확 타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막아주면서 그러면 거기 가 있으라 하면서 그저 이쪽 성만 하면서 바람을 이쪽으로 불게 해서 그 성은 보호를 받도록 이렇게 갑자기 변해 가지고서 롯과 그 가족을 살려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께서 아시겠습니다만 창세기19장 1절에 보면 성문에 앉았다가 천사들이 들어올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하듯이 이 롯도 넙죽 인사를 했습니다. 집으로 모시고 들어가 가지고서 19장 3절에 보면 무교병을 구워 가지고서 대접을 하는 등 참 잘했습니다. 천사들에게 아주 잘했습니다. 천사들과 상관을 하겠다고 싸우겠다고 마을 사람들이 술 퍼먹고 와가지고 깡패들이 오니까 "내 딸들을 내어놓겠으니 내게 온 사람에게는 아무손도 대지 말라." 이렇게 하면서 이 롯이 점수를 많이 땄습니다만
    롯이 이 막판에 가 가지고서 떡 한 조각 구워바쳤다고 죽을 놈을 살립니까? 공의로운 심판을 할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절 한 번 하고 했다고요? 천사들 대신에 그저 내 딸 내어놓겠다고 했다고요. 그랬다고 과연 롯을 이렇게 보호하고 빼어주려고 했는가? 롯이 구워다 바친 그 무교병이 이 천사들에게 뇌물이라도 되었느냐?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은 뇌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사이 세상 사람들 그렇게 하듯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은 그것 때문에 롯이 구출 받은 것 같으나 결과는 단 한마디로 19장 29절에 가면 롯을 구원해준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9장 29절에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그러니까 롯과 그 성을 그 엎으시기로 되어있던 겁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롯이 살아남은 것을 롯 자신 때문입니까? 삼촌 아브라함 때문입니까? 삼촌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의 정직하고 아브라함의 진실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아브라함의 아주 간절한 모습 그 진실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강력하게 "살려주어야 됩니다. 거기에 내 조카가 있습니다." 그런 말씀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죄짓고 저 죄의 성읍 복판에 가서 살고있지만 그 조카가 같이 죽는 것이 저렇게 안타까워서 저렇게 하는가? 그저 삼촌을 떠나서 제 가고 싶은 데로 갔는데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저렇게 하는가 싶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 어려운 지경에서 롯을 구출해 주셨다 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결정적인 큰 두 사건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노아의 때 마지막 사건과 그리고 롯의 때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큰 두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는 표본으로써 이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있게 했고 이 사건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건의 성격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 노아의 때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지난 후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이제 노아가 땅에 내렸을 때에는 그저 새로 뿌린 씨앗이 나고 새로 들어갔던 그 방주에 들어갔던 그 짐승들이 다시 새끼를 낳아 가지고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되었으니 이 노아 때의 결정적인 순간은 무엇을 설명해주느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하시면 아멘 합시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다음 세상을 살아가면서 먹고 즐길 수 있는 자연도 음식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던 방주 안에 저축하여야 다음 세계에서도 풍요롭게 산다고 했던 것입니다. 천국에서 부요하려면 무조건 잘만 믿고 들어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 교회를 통하여 충성한 만큼 천국에 부요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쪽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겸손한 만큼 천국에서의 대우를 받는 인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주 속에 저축하라. 그것이 다음 세계를 살 것이다." 천국 가서 부요할지 못할지는 이 세상에서 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 하는 것이고 이 롯의 때는 어떤 것이냐? 노아 때처럼 이 천지는 없어지고 새 천지가 다시 나온 게 아닙니다. 롯의 때는 소돔 고모라만 멸하여졌지 아브라함 동네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또 피하여간 동네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때처럼 죽어서 영 다른 세계에 간다든지 또 인자의 날 세상 끝이 오는 그런 비유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무엇이냐?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죄를 많이 지으면 환난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런 환난을 받을 동안에 어떻게 하면 이 결정적인 환난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느냐?
    물론 자기가 믿음으로 살면, 롯처럼 아브라함이 좋은 기름진 곳에 가지 못하고 산악지대에 있었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주시니 가병 318명을 거느리는 엄청난 부자가 되게 해 주셨거니와 이 롯처럼 세상을 향하여 갔을지라도 본인이 죄를 지어 소돔 한 복판에 가 있으니 불을 갖고 온 이 불씨를 가진 천사가 제일 뜨거운 불을 제일 먼저 롯의 머리에다 가서 지필만큼 타락했고 빠져 들어갔고 배신한 자이지만 롯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롯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요? 삼촌 때문에.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와 충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입에다 롯의 리을(ㄹ)자도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롯을 살려주셨으니 이 롯의 사건은 세상 끝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살아가노라면 사업에도 큰 위기를 당할 수 있고, 악한 사람들 만나 가지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고 또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할 수도 있고, 큰 병에 들어서 죽게 될 수도 있는데
    혹 그것이 죄 때문에 왔다면 혹 그것이 죄악의 성 소돔같은 곳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성에 살지 않고 세상 도성에 내가 살고 있다가 그렇게 죽을 일을 당했을 때에 혹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냐?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지켜서 살수가 있고 롯의 경우에는 믿음을 잘 지킨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부탁을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임을 이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롯을 그 환난 가운데서 그 불 가운데서 건진 것은 그 삼촌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했다고 했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밤시간까지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저보다도 오히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결정적인 때가 온다 할지라도 성공적으로 살 줄 믿습니다. 또 여러분은 큰 환난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이 보호를 받은 것처럼 악조건 속에서도 훌륭하게 재산을 키우고 가정을 키워갈 줄로 믿습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새해에 들어가 2000년이라는 해에 들어가서도 천년 동안 우리가 살지 못합니다. 지금 집에 자고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우리 자녀들, 그 아이들도 10일 후 2000년에 들어가서 한 세기 백년도 살 사람 많지 않습니다. 그것 여러분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보다 자녀들이 문제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중 3짜리 고 3짜리 대학 고등학교 입학 시험 친다고 목사가 축복해 달라고 해서 가서 기도회를 인도해본 적이 있는데 평소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너무 실망하고 너무 놀랐습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믿음도 크지 않습니다. 그저 급하니까 '아멘, 아멘' 그날 밤에는 하지만 시험 끝나고 나니까 아멘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없고 하나님을 순간에만 이용하려는 그런 기술은 있는데 이 아이들의 신앙을 보니까 전에 우리의 어린 때를 비교해볼 때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저는 중3 때에도 교사가 없으니 유초등부 맡아 가지고 교사노릇 했어요. 그 다음 고2 고3 때에는 뭐 아주 대단한 교사노릇을 했어요. 성경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니까 주 뜻대로 사는 법을 많이 알았어요. 그때 이후로 죄를 안 짓고 경건하게 살아보려고 나름대로 정말 애를 썼어요.
    그런 우리 어릴 때에 비하여 요즘 자녀들 영 아닙니다. 더욱이 살기가 좋아진다는데 우리 부모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더 큰복을 누리게 될텐데 세상이 지금보다 더욱 살기 좋아진다면 세상이 살기 좋아질수록 이 아이들의 믿음이 좋아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기대는 더 좋아지기를 바라고 기대하지만 그렇게 된다는 예상은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의 대가 걱정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서 직장의 주인공이 되고 사회의 중심 인물들이 되었을 때, 우리 자녀들이 혹 병들어 죽게 될 때, 우리 자녀들이 사업에 실패하게 될 때, 우리 자녀들이 어떤 모함을 받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 그 자녀들의 믿음이 스스로 이겨낼 만큼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지하기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만 그렇지 못할 자녀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기에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 지금 잘 믿으시는 여러분들께서 자녀들을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형편을 보지 아니하고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자기 스스로 믿어야 되지만 이 세상 환난을 면하고 복을 받은 것은 부모를 인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롯의 때처럼 우리의 후손들이 롯처럼 세상에 빠져 들어간다 하더라도 잘 믿었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멸함을 받지 않고 적어도 멸할 때에 그 사람은 뽑혀 나오는 천사의 손에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에게 불리우고 붙들린 바 되도록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서도 오늘날의 이 믿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인자의 날이 곧 오실 것 같지만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2000년에 곧 들어가게 됩니다. 2000년 들어가서 한 천년을 얻는 것 같지만 한 천년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과 100년 가기 전에 우리는 다 결정적인 순간을 맞게 될 것인데 우리의 살아갈 살 날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하루가 중요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찌 살꼬 어찌 살꼬 창창히 많은 날 2000년 왔으니 또 한 천년 또 한 만년 살리라." 하고 들어갔지만 그 많은 살 날들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마지막 한 순간이 심각한 줄 알아야 할텐데 이 결정적인 때를 위하여 천 날 만 날을 살아야 할텐데 그저 천 날 만 날을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생각하고 결정적인 순간은 신경도 안 쓰고 살아가는 성도가 우리 가운데는 없을 줄로 압니다만 우리 자녀들이 그리 될까 두려우니 살아가는 동안에 롯처럼 한 환난에서도 여러분의 기도 인하여 구원을 받게 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한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 충성한 충성을 인하여 여러분의 자녀들을 이 세상 사는 질병과 환난과 실패와 곤경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실 줄 믿습니다. 솔로몬이 솔로몬 된 것도 그 아버지 다윗 때문에 된 것처럼 여러분의 자녀가 그같은 복을 저들 일생에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오며,
    그러나 노아의 때처럼 한 자기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에는 부모 때문에 환난 면함을 받는 그 수준은 소용이 없고 자기 스스로가 믿어야 하는 것인즉 여러분의 믿음 가진 만큼 아들딸들에게 믿음 갖게 하시고, 태어나는 손자 손녀들에게 믿음 갖게 하시되 여러분만큼은 못할지라도 교회의 끈을 매고서 살도록 아주 잘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것들 사는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결정적인 한 순간을 위하여 많은 나날들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진실로 이해가 가기 전에 2000년을 맞이할 여러분들에게 롯과 같은 환난이 온다할지라도 아브라함을 인하여 조카 보호받듯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이 이 세상 환난을 면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오며, 다시 한번 노아의 때와 같이 우리 개인의 결정적인 때가 와서 이 세상에 이 육신 가지고 살지 못하고 새로운 몸을 입어 새 천지에 들어갈 그때에는 각각 개인이 주의 몸 된 교회를 붙들고 멀리 가지 않고 세상에 빠지지 않고 교회 근처에 맴돌고 있어야 살아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열 아홉 살 우리 교회 지금 될 때까지는 혹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기분이 상하고 교회 생활하면서 마음에 안 들면 "에이 내가 교회 떠나면 되지." 그런 얘기를 제가 들어도 "아직은 어리니 그렇겠지." 하지만 여러분, 성년식을 하고 나면 그 전처럼 말하면 얻어터집니다.
    이제 우리가 20년으로 자랐는데 이제 우리의 몸 된 교회 우리의 영혼을 노아의 때 같은 때에 결정적으로 살려줄 이 교회를 은혜 된다고 붙들고 은혜 안 된다고 차버리고, 목사 좋다고 붙들고 작은 목사 서면 작게 참석하고 큰 목사 참석하면 거기 우르르 모이고,
    여러분, 그것은 어릴 때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마는 이제는 시험이 오나 환난이 오나 우리의 구원의 방주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짓고 우리가 지은 이 방주를 끝까지 붙들고 세상에 일보러 나간다 할지라도 끄나풀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이 마지막 때에 방주를 들어올릴 때에 그 방주 속에 든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멀리 가서 혹 방주에 못 들더라도 꼭 줄이라도 붙잡고 따라오시기를 바랍니다. 구출받을 때 헬리콥터 타고 갈 때 헬리콥터 타지 못하고 줄에 매달려 가지고 주르르 가는 사람 상당히 춥겠습니다만도 그래도 살아남지 않습디까. 어디를 가든지 교회에 속한 끄나풀 이것 붙들고 이 몸 된 교회 내 구원의 방주를 원망 없이 결정적인 때가 올 때까지 붙드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종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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