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가는 길(히11:13-16)
  • 조회 수: 424, 2013.08.01 22:02:38
  • 오는 9월 24일은 추석 명절입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날씨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초가을에 맞는 추석은 우리 조상 때부터 참으로 아름다운 명절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나왔나 봅니다. 설 명절과 더불어 추석 명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습니다. 견디기 힘든 교통 체증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어김없이 고향 가는 길을 떠납니다. 마치 연어가 넓은 바다에 나가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 고향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절에 고향으로 파도처럼 밀려가는 무리들이나 온갖 고생도 감수하며 자기가 산란되었던 곳, 고향 찾는 연어를 생각해 보면 마치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바다 같은 세상에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 우리 영혼의 영원한 고향을 찾는 믿음의 무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로 믿음의 길은 더 나은 본향을 찾아 먼길을 떠나는 고향 가는 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도 고향 가는 길이라고 정하고 본문을 통해 교훈과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아름다운 사랑의 장이라고 한다면,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논문이요,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은 웅장한 믿음의 장이요 믿음의 역사요 믿음의 실증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 접어들면서 인류의 조상 아벨과 가인의 믿음을 비교한 후, 선사시대의 에녹 같은 이의 믿음을 논거하면서,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 믿음, 야곱 등의 삶을 마치 고향 가는 길로 묘사하여 믿음생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그 곳을 향하여 인생길을 걸어간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I.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살았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본문 13절에 ""이 사람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라고 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 길을 따라 어느 정도 가면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곳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열차나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직접 자가용을 운전하여 교통 법규를 따라 가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이 예비하신 우리의 영원한 고향, 하나님 앞에 가는 길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그 분의 존재하심과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분명히 우리의 고향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고향은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볼 수 없고 약속에 의해 바라보기만 하지만 그래도 지금 고향에 와 있는 것같이 마음속에 그리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예언된 말씀을 지금 현재 이루어진 것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처녀가 한 총각을 마음에 두고 흠모하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그 총각이 처녀에게 청혼을 해 왔습니다. 처녀는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결혼 날짜가 두 달이나 남아 있지만 벌써 결혼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보다 더 진한 행복감에 젖어 있습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을 마치 지금 이루어진 것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검사도 아니요,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 될 것을 믿기에 벌써부터 검사가 되고, 판사가 된 것 못지 않은 기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면 도착할 것을 믿고 그 곳에서 부모님과 친구와 친척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과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할 때 벌써부터 우리는 기쁘고 즐거워집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미 그 약속이 성취된 것처럼 살았기에 신앙의 선조들이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만일 자동차를 타고 고향 가는 사람이라면 교통 법규를 제대로 지키며 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호를 지키고, 제한 속도도 지키고, 차선도 지키며 안전하게 운행해야 고향에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길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면,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과 형제와 다투지 않는 것,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인줄 믿으시고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II. 그들은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본문 13절에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 했습니다. 천국, 그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면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그네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셨고, 또 1장 17절에서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19편 54절에 ""나의 나그네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나그네의 여정은 여행이나 관광과 다르고 방문과도 다른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 수행을 위해 자기 고향이나 집을 떠나 있는 사람이며, 그 목적 수행이 끝나면 사명을 주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하여 세상이라는 곳에 와서 얼마동안 그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자기를 위하여 살아서도 안되고, 그 곳에 주저앉아 정착하거나 향락이나 육욕에 젖어서도 안되는 사명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그네가 성공적으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인내입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지루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고통과 위험도 따릅니다. 그때마다 자기의 힘과 능력을 잘 안배하여 체력을 관리하고 인내해야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습니다. 나그네 인생 길에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고통과 난관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인내하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신앙생활 즉 영적인 나그네 길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때로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질병과 우환으로 인해 상상외로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부딪히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생명을 내어놓고 희생과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둘째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인생 나그네 길에는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명예의 유혹, 물질의 유혹, 향락의 유혹 등이 많습니다. 세상의 달콤한 것에 현혹되면 그만 나그네 길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멧돼지 우화가 있습니다. 숲 속의 멧돼지가 늦은 가을 감나무 아래를 지나가다가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를 발견하고 이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달콤한 홍시 맛을 본 멧돼지는 홍시를 찾기 위해 땅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지쳤습니다. 벌렁 드러누웠는데 홍시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높이 감나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멧돼지는 그만 화가 나서 발악을 하다가 결국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우화입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합니다. 개미귀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래 위에 함정을 파 놓고 지나가는 개미가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함정에 빠진 개미의 다리를 물어 통째로 잡아먹습니다. 이 세상에는 믿음을 버리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만드는 세력이 있습니다. 조심하고 유혹에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III.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본문 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 생활의 세 가지 동기를 제공합니다. 첫째는 희망의 기초입니다. 더 나은 본향은 오늘을 사는 용기가 되고 희망의 샘터가 됩니다. 둘째는 감사의 힘이 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그것도 은혜로 주신다고 생각하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는 기쁨이 됩니다. 희망과 감사와 기쁨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증입니다. 나그네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증거가 됩니다. 
    데레사 수녀가 수녀 후보생을 면접할 때 세 가지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잘 웃는 사람, 둘째는 잘 먹는 사람, 셋째는 잘 자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잘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웃어야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웃지 못하면 남을 위로할 수 없고, 자기 자신도 불행해 집니다. 특히 대인 관계에서 웃음은 소속감을 주고 공감대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의심과 불신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 가슴을 터놓고 서로 대할 수 있게 하고 의논할 수 있게 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을 때 비로소 삶의 활력소를 찾을 수 있게 되고 비록 부부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잠시 집을 나갔다가도 들어 올 때 씩 웃어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만이 웃을 수 있고, 건강한 사람이 잘 먹을 수 있고, 건강한 사람이 잘 잘 수 있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지극히 단순한 것 같고 좀은 엉뚱한 것 같은 선발 기준을 제시한 것은 인생의 자기 관리와 인간관계, 사회 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향상된 내일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또 희망 때문에 날마다 용기를 새롭게 하는 자들입니다. 나그네 인생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년 명절의 고향 가는 길에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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