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이 다른 사람들(히 11:13-16)
  • 조회 수: 483, 2013.08.01 22:04:19
  •  올해도 추석 연휴를 맞아 고향을 찾는 행렬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특히 추석귀향은 내가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형제와 조상을 찾아 길을 떠난다는 특성이 있는 명절입니다.
     특별히 금년 추석은 이산 가족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하는 추석입니다. 잘만 되면 고향을 찾아가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마지 하는 추석입니다. 이 꿈은 북한에 고향을 둔 760 만명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하지만 7 천만 겨레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유럽사상사'라는 책을 쓴 볼케나우는 죽음에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다음 세 가지로 크게 나누었습니다.
     그 하나가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죽음 부정(death-denial) 문명입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미이라로 만들어 피라미드 속에 두고 지금도 살고 있다고 믿는 문명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죽으면 끝장이라는 죽음의 수용(death-acceptance)의 문명입니다.
     그 대표적 경우가 희랍 문명으로서 죽음은 모든 곳의 끝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문화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나라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혀있어도 철마다 성묘와 차례라는 의식을 통해 죽고 없어진 조상과 살아 있는 가족이 만나고 음식도 더불어 먹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곳이 바로 조상들이 묻혀있는 고향이라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내가 추석이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 서로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나는 장소가 고향이라는 것 입니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고향을 어찌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문화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여사는 "이 세상에서 한국사람처럼 죽어서도 오래 사는 사람은 없다. 한국인은 제사를 통해 죽은 사람과 만나고 있다"하였습니다.

    유럽에서는 부활절 연휴와 크리스마스 연휴가 가장 깁니다. 그 모두가 연휴를 즐기는 인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추석을 고향에서 보내기 위한 귀성행렬인 것입니다.

     오늘도 추석 연휴를 앞두고 1천300만 명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마 전쟁 빼놓고는 이 지구 위에서 이처럼 큰 이동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추석은 모든 사람들을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첫째, 더 좋은 고향이 있습니다.

      

     16절에서 말하는 "더 나은 본향"이란  세상 고향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고향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위치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란 높은 곳, 고상한 곳, 거룩한 곳,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그 위치부터가 세상 고향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 끝을 보면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했고,마태복은 25:34을 보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고향의 특성을 간추려서 말한다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위해 만드신 곳입니다.

     셋째는, 그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넷째는,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다섯째는, 그곳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사글셋 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18년 만에 25평 짜리 내 집을 마련한 어느 성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집을 계약하던 날 그 성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합니다. 흥분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지만, 눈을 감으면 기쁨이 깨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하는 우리의 현실은 두 가지입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고향이 있는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지만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은 고향을 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 그들을 실향민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돌아갈 영원한 고향이 없는 영적 실향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영원한 고향이 있다면 그들은 실향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더 좋은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그네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13 하반 절에 보면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들의 현실적인 삶이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미국에 일시 체류하는 거류민이나 나그네는 조국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합니다. 우리는 가끔 TV에서 연예인들이 해외 동포 위문 공연을 하는 것을 봅니다. 가수들이 '아리랑'이나 '타향살이 몇 해던가' 하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굵은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가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어리석게 그곳에 만리장성을 쌓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물 설고 낮선 땅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어려움이 슬프지 않습니다. 부모 형제가 기다리고 정든 산천이 기다리는 고향을 가는 사람들은 하룻길도 멀지 않고 10시간, 20간 교통체증도 괴롭지 않고 여유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그네길임을 아는 사람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일이 괴롭지 않고 처마 밑이나 나무그늘도 넉넉하고 물 한 모금도 고맙고 빵 한쪽도 감사할 뿐입니다. 다투거나 원한을 맺을 일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원에 한 나그네가 벤치에 앉아 생각에 한참 잠겨 있었습니다. 황혼이 되자 공원 청소부가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빗질에 먼지가 나는데도 벤치에 정신 없이 앉아 있던 나그네를 보고 청소부가 물었습니다. '당신 누구요?' '글쎄요, 나도 내가 누군지 몰라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디서 왔소?' '그것도 몰라 생각 중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거요?' '그것을 알면 내가 이렇게 앉아 있겠습니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저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였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도 갈곳을 모르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나그네는 괴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향을 향해 가는 길은 즐거운 법입니다. 나그네처럼 고향보다 나은 본향을 가는 즐거움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나그네 생활의 특징은 고난의 생활입니다.

     

     히 11:35-38위 말씀을 읽어보면 어떤 이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더 나은 생명을 누리려고 석방도 거부하고 고문도 달게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돌아 다녔으며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정말로 고향이 다른 사람들로 사는 것은 고난의 연속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향살이이기 때문입니다.야곱은 그가 바로 왕의 앞에서 (창 47:9) "내 나그네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인데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꿈과 희망이 있는 곳이 아니며 궁극적인 관심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아름다운 사랑의 얘기가 있는 곳도 아닙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언제나 고독한 곳이 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의 이 세대를 보면 진실성과 믿음이 없는 세대입니다. 부도덕 부조리, 거짓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입니다. 미움, 시기, 권력 투쟁, 명예 추구..... 조금 더 있다는 사람, 안다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곳, 온갖 거짓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고난의 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왜 다른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미국의 소설가 토마스 월프(Thomas Wolfe)의 작품 가운데 다시 갈 수 없는 고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크게 성공한 주인공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어느 날 그의 고향 애쉬빌(Asheville)을 찾아가지만 실망합니다. 고향과 친구들이 너무나 변해 있었고 옛날의 그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제 나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순 없다. 길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 가야 한다. 뒤돌아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졌다"

     우리의 고향은 앞에 있지 뒤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돌이나 나무나 흙으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사라지고 변하는 유한한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불변하는 고향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고향을 위해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 높은 곳, 영원한 고향, 더 좋은 고향을 향해 전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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