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36:1-15/ 하나님께 감사하라
  • 조회 수: 280, 2013.10.31 19:55:23
  •  이 뜻깊은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위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무려 스물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왜 감사하라고 했어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인자하심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훌륭해서가 아니고, 저희가 깨끗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래서 택하셨습니다. 저희가 애굽에서 말할 수 없이 고생하며 하나님께 울부짖는 호소를 들으시고, 저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애굽에서부터 기적적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을 생각한다고 해도 이스라엘 민족은 만 입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인자하심에 대하여 다 감사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감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위하여 봉사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사회봉사의 동기는 우리가 구원받은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합니다. 사랑의 동기도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9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그 주신 사랑을 받은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것도 감사의 표현으로 헌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는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노력과 시간과 정성의 결정체인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도 어떤 여인이 아주 값비싼 나드 기름을 마련해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정성어린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감사한 나머지 그녀의 정성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감사의 생활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의 일군들이 맡은 일에 충성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감사한 마음에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이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일을 맡을 수 없는 사람인데, 이처럼 충성되이 여겨 주셔서 귀한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감사 때문에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찬송을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너무 감나 감격하여 자연히 입에서 노래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넘치면 자연히 찬송이 흘러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하는 생활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감사하라’는 말씀이 거듭거듭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받은 바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편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하면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요사이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계절이 되면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중앙우체국에는 산타크로스에게 보내는 편지가 전국에 있는 어린이들에게서부터 수천 수만 통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대개가 “금년 크리스마스 때 좋은 선물을 많이 보내 주세요”하는 어린이들의 소원이 담긴 내용의 편지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체국에서는 이 전달할 수 없는 편지를 받아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전 미국에 있는 교회와 유지들에게 전부 그 편지를 보내서 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보내도록 도움을 청한다고 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미국의 교회와 교인들 그리고 유지들은 비록 알지는 못하는 아이들이지마는 산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보내달라고 보낸 편지를 받고 정성껏 선물을 준비해서 그 어린애들 주소로 크리스마스 때 받을 수 있게 보내준다고 합니다. 미국이니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 우체국 당국자들이 하는 말은 분명히 교회나 교인들 그리고 유지들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보내준 것은 틀림없는데 몇 달이 지나도 “선물을 주셔서 고맙습니다”하는 감사의 편지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선물을 보내 주세요”하는 편지는 수천 수만 통 오는데 “선물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편지는 거의 안 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원로 목사님한테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과거 36년 동안 200에 달하는 개척교회와 수십 곳의 기관을 도와 왔는데 도움을 청할 때는 편지도 하고, 찾아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도움을 받고 나서는 찾아와서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으로라도 고맙다는 내용의 글을 써 보내는 것을 받아 본 일 별로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감사할 줄을 몰라요.”
      그러시면서 “과거 100년 전에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전해 받은 우리 한국교회가 이만큼 자랐으니 이제 1984년 한국 교회 100주년 때 여러 가지 기념 사업을 많이 해야겠지만 특별히 미국 선교사들의 고마움을 나타내는 뜻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따로 모이는 교회가 있는데 한국 교회가 힘을 모두어서 예배당을 하나 지어 드리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퍽 의미깊게 들었습니다.
      사실 감사하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생활에서 무시되고 잊혀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감사가 없는 생활처럼 삭막한 것은 없습니다.
      현대인의 생활 특징은 모두가 상거래식입니다. 주고 받는 식(Give and take)의 생활입니다.  상점에 가서 돈주고 물건 받고, 나도 감사할 것 없고 장사하는 사람도 감사할 것이 없어 합니다.  나는 돈주고 물건 받았으면 그만이고, 장사하는 사람은 돈받고 물건 주었으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고마운 것도 없고, 저 사람이 나에게 고마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모두가 이런 사고 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를 하면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할 일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고 싶어 났느냐? 부모들이 낳았지. 그리고 자식을 낳으면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요, 또한 부모된 사람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지 내가 부모에게 감사할 것이 무엇이 있나? 나도 다음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 위해서 해 준 것처럼 나도 내 자식 위해서 해 줄꺼야. 나도 내 자식을 사랑할 것이고, 나도 내 자식 공부시킬 것인데 뭐,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만 세상에서 독특하게 나를 사랑했나? 우리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거나, 내가 앞으로 내 자식을 사랑하는 거나,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야, 부모에게 고마울게 뭐 있느냐?”하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선생님들은 우리가 수업료 내는 것으로 월급받고 우리 가르쳐 주는데 그리고 우리는 등록금 낸 것만큼 배워 오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으로 깨끗이 끝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상거래식의 사고 방식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점점 퍼져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유물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각박하고 냉혈적인 사고 방식이 날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엄제나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가 있어야 하며, 우리 생활 전부가 감사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데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다면 그 생활은 마치 사막을 걸어가는 나그네에게 오아시스가 없는 것 같아서 그 심신이 메마르고 거칠고 드세어서 생명의 풍족함이 없는 생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해에 큰 풍년이 들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곡식을 그렇게 많이 거두게 되었어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저 이 부자에게는 ‘이 많은 곡식을,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창고를 가지고는 부족하겠으니 어디에다 썩지 않게 간수하느냐?’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거기에 곡식을 가득하게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배를 쓸면서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잘 살자. 잔뜩 곡식을 쌓아 놓았다. 여러 해 동안 먹을 것이 넉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에게 “오늘 저녁 내가 네 영혼을 불러 가면 그 창고에 쌓아 둔 것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풍년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창고를 늘린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문둥병을 고쳐 주어도,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풍성한 수확을 얻어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엽전 두 푼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앉아 계실 때 어떤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서 자기의 가지고 있는 것 전부 엽전 두 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감사할 줄 아는 사람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물행한 사람은 아무것도 못가진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말은 의미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두 가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는 보통 은혜요, 다른 하나는 특별 은혜입니다. 가령 이 우주 삼라만상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보통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주시고, 만물이 생성하고, 구름에서 비가 내리고 이슬이 내리게 하십니다. 땅에는 오곡백과가 열매를 맺게 하고, 산천초목이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단풍이 들고, 산 높고, 물맑아 아름다운 경치를 주시고, 공중의 새, 땅의 짐승, 물 속의 고기가 풍족합니다.
      아름다운 태양빛을 받으며 살아도 햇빛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으며, 5분간이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공기를 그렇게 마시며 살아도 공기값 내라는 고지서를 받은 일 없습니다. 모두가 거저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지혜와 지식을 주시고,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주시고, 자녀를 주셨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모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기본적인 보통 은혜입니다. 이것만 해도 만족한데 그 중에 조금 모자라는 것 때문에 전체를 항상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 속의 믿음의 빛깔 따라서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과 원망 속에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 은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만이 깨닫는 은혜입니다.
      골로새서 2장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 만물인 보통 은혜를 주셨고, 우리의 영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 은혜로 예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한 몸에 책임지시고 십자가로서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슬픔에서 기쁨을 주셨고, 절망에서 소망을 주셨으며, 암흑에서 광명을 주셨고, 지옥에서 천국에 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특별한 은혜를 받을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꼭 믿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크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고난도 초월해서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분 가운데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었는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오히려 그 고난이 축복이 되신 것을 체험하신 분이 많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손해를 끼치지 아니 하십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습니까? 요셉은 그를 해하려던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수학에서 숫자 앞에 부호가 붙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 플러스가 붙는가, 마이너스가 붙는가 하는 데 따라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마이너스가 앞에 붙으면 단위가 늘어날수록 숫자는 적어집니다. 그래서 어떤이가 “적은 것으로 만족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많은 것으로 만족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플러스가 붙으면, 우리 앞에 십자가 플러스가 붙으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내 심령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모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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