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17장 11절 - 19절/ 주신 자를 기억하라
  • 조회 수: 793, 2014.03.30 20:22:51
  •  7월 첫째 주는 맥추감사주일이다 맥추절은 지나온 반 년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현대사회의 관념으로는 맥추절기가 가슴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사의 생활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맥추절기의 개념은 지나온 반년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자리잡아 가야 할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생활이 항상 감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상반기 동안 우리를 지키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알곡을 모으실 마지막 추수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예배이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 자매 -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절에만 감사하는 자여 
       범사에 감사하라 
       고난주간에만 주의 고난 기억하는 자여 
       주 죽으심 언제나 기억하라 
       위급할 때에만 기도하는 자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쁠 때만 기뻐하는 자여 
       항상 기뻐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대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곧 유월절(신16:1)과 칠칠절(출23:16)이라고 불리워지는 맥추감사절과 초막절(레23:34)이다 몰론 이 모든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속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감사의 절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감사를 생활화하고 감사하는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절기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여호와의 절기는 누리는 기쁨을 알려 준다 여호와의 절기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작은 민족이 5천년 동안의 긴 역사 속에서 생존해 오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한 것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절기를 통해 역사 속에서 맥을 이어 온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적인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절기는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에 기원을 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의미로 가득찬 생애를 사시고 죽으신 다음 부활 승천하신 후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절기와 행사를 가졌으며 이들은 오늘날까지 발전 계승되고 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다 성도가 부르는 찬송 드리는 기도 예배 봉사하는 모든 것이 다 감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은 마치 호흡이 계속될 때 생명이 유지되는 것 같이 감사의 생활을 통하여 신앙생활이 이어지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감사는 야다로 찬양 고백이라는 뜻이며 신약에서는 유카리스티아라는 기뻐하다 은혜로운 호의를 나타내는 등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성도의 오늘의 생활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는 감사의 생활이 현존해야 하겠다 초목이 비를 맞고 자라나듯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루며 이로 인하여 성장한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성도의 마음은 감사로 하나님을 향하여 천성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를 상실한 이 시대에 다시금 감사의 신앙을 정립하며 감사의 원리를 되새겨 보아야 하겠다 

       감사하는 마음은 꽃밭이요 불평하는 마음은 가시밭이다 감사는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다 돈 많은 여행자에게 거지가 구걸하고 있었다 돈 많은 여행자는 여기 있다 먹고 꺼져라 하는 심정으로 돈을 주었고 거지는 더 많이 얻기 위해서 감사를 연발하였다 주는 심정도 병들었고 받는 심정도 병들었다 진정한 사랑으로 주지 않으니 병든 마음이요 진정한 감사로 받지 않으니 병든 마음이다 

       이것은 여행자와 거지의 경우만이 아니다 요즈음은 명절이 되면 으례 인사치레로 사례를 하고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처럼 그냥 받는다 주는 자는 감사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체면이나 이권 때문에 주고 받는 자는 감사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받는 경우도 많다 감사가 형식과 제도 속에서 질식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받은 것이 기대치에 못 미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뭘 해 주었길래 자식들이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스승이 학생들에게 뭘 해 주었길래 학생들이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만족보다는 불만이 더 팽배하다 기대치가 만족되기보다 기대치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좋은 물건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웬만한 것을 주어서는 만족이 없다 물건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는 반면 기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기 때문에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만족이 없으니 진정한 감사가 없다 감사의 꽃밭을 회복할 길은 없는가? 감사의 젖줄을 풍성하게 할 길은 없는가? 

       1. 내용설명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촌을 통과하려고 하셨으나 사마리아인들이 허락하지 않자 예수님은 다른 길로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는 중이었다(9:51-56)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던 중 한 촌에 들어가셨을 때에 문둥병자 10명이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고 말했다(17:11-13) 그들이 멀리 서서 말한 것은 레위기 13-14장의 규레대로 문둥병자들은 부정한 자들이라 성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은 것은 1>자신의 비참한 상태와 2>그것으로 인해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3>예수님이 각종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문둥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온 몸이 망그러진 징그러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 고쳐주시기도 하셨지만(눅5:12-16) 열 문둥병자의 경우는 멀리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17:14) 레위기 14장의 규례에 의하면 제사장이 문둥병자가 나은 여부를 검사하고 나았을 경우 사회에 돌아갈 수 있다는 선언을 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둥병자 10명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17:14) 10명에게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대로 가다가 낫게 되었다 

       10명의 문둥이가 가다가 나음을 입었을 때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진물 나던 곳이 마르고 떨어졌던 손가락이 회복되고 비뚤어졌던 코가 똑바로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는 보았다 나는 나았다 나는 살았다 하는 감격이 있었을 것이다 10명이 서로 돌아보며 축하도 해주고 얼싸안고 기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치유의 감격을 맛본 10명 중에 9명은 제 갈길로 가고 사마리아인 1명만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2. 핵심교훈 - 자신이 절실히 원하던 것을 얻는 순간이 시험의 순간이다 백두산 꼭대기의 물방울이 동해로 갈 수도 있고 서해로 갈 수도 있는 것처럼 갈라짐의 순간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순간이 축복을 주신 자를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내 갈 길을 갈 것인가의 결정의 순간이다 10명의 문둥병자가 비참한 상태와 부르짖는 기도와 고침의 축복까지는 한 그룹이었다 그러나 일단 고침을 받은 순간에는 9대 1로 갈라져 버렸다 간구의 큰 소리가(17:13) 감사의 큰 소리(17:15)로 연결된 자는 10명 중에 한 명 뿐이었다 

       1>축복을 받고 축복을 주신 자를 기억하는 자는 아주 드물다 본문에서는 10명 중의 한 명 만이 축복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했다 간구의 큰 소리가 감사의 큰 소리로 연결되었다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을 기억했다 나음을 받은 자기 몸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나음을 주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했다(17:15-16) 나은 자신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나음을 주신 예수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우리는 그 아홉에 속한 자가 아닌가? 그 아홉에서 나와 감사하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감사라는 영어(thankfulness)는 본래 생각(thinkfulness)에서 나왔다 즉 감사함은 생각함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아 누리고 있는 영생의 복들을 생각해 보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박애주의자 몬테피오레경은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Think and Thank)는 것을 가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생각하면 역경 속에서도 감사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사람들은 두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take things granted)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는 사람들이(take things with gratitude) 그 두 종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것도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자들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약간 비뚤어진 것 같다 새 신발을 샀을 때는 감사하면서 두 발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는 감사할 줄 모른다 새 장갑을 산 것에는 즐거워하면서 두 손을 주신 하나님께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는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말했다 교회마다 한 당부가 감사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 제 3군에 속한 어떤 사병은 군대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휴양지에서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후에 자대에 돌아와서 조지 패턴 장군에게 특별한 휴양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의 편지를 드렸다 패턴 장군은 사병에게 보낸 회신에서 그가 지난 35년간 자기 부하들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려고 애를 써왔는데 감사의 편지를 받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35년간 수많은 사병들이 패턴 장군의 배려와 사랑을 받았지만 감사의 편지를 쓴 사람은 그 사병 하나 뿐이었다 

       감사한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는 예수님의 말씀(17:18)을 보면 다른 9명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유대인들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온갖 특혜를 누리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앞장을 서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방인으로 유대인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감사에 앞장을 섰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비교적 덜 받은 사람이 감사한 것이다 우리는 남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그 아홉이 아닌가? 그 아홉에서 어서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세 한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일지에 이런 인상 깊은 글을 기록해 놓았다 글의 제목은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였다 감옥과 수도원은 환경상으로는 매우 유사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감옥을 지옥으로 만들고 수도원을 천국으로 만드는가? 감옥에서는 하루가 불평으로 시작되는 반면 우리들 수도원의 하루는 감사로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감옥을 지옥으로 수도원을 천국으로 만들고 있는 이유였다 이 수도사의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러나 만약 수도원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감사를 잃어버리면 이 수도원이 지옥이 될 수가 있다 반대로 만약 감옥에서 감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감옥이 바로 천국이 될 수가 있다 오늘 우리의 가정에 감사가 있는가?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가정 내 직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가? 감사없는 인생은 하나님 백성 된 자의 삶의 모습이 아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이다 

       사람이 생각이나 의지만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단순히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로 롬8:28절에 그런 신앙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하나님의 섭리를 당장 현실 속에서 모두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수긍하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섭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을 삶의 스타일로 삼자 - 바울 서신의 특징은 서두에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서두에 감사를 넣음으로써 그것이 그의 편지 스타일이 되도록 하였다 감사는 바울의 편지 스타일만이 아니라 그의 삶의 스타일이었다 감사가 그분의 삶의 스타일이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모든 신자들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야 한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늙은 인디안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인디안은 그 지방에서 아주 존경받는 인물이었는데 그들은 호텔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식탁에 앉자마자 곧장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인디안은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식탁에 앉자마자 음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곧장 식사하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는지 아세요? 아니오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은 그런 일은 개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계속 식사하는 그 사람에게 그 인디안은 이렇게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밤나무 밑에서 밤을 주워 먹으면서도 그 밤들이 어디에서 떨어지는지 위로 쳐다보지도 않는 돼지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명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그 사람이 오히려 인디안보다 더 감사해야 할 텐데 그 사람은 감사하지 않고 문명의 혜택을 비교적 적게 받고 있는 그 인디안이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 역시 감사는 소외된 사마리아인이 한다는 말이 맞다 감사하지 않는 그 아홉은 왜 감사하지 않았을까? 성경에 아무 말이 없으니 알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경우를 분석해 보면 대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변명 
       1>나는 몰라서 감사하지 않았다 알았으면 안했을리 있겠는가? 
       2>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감사하지 않았다
       3>나는 누구에게 나타나기 부끄러워서 그렇다 
       4>감사하는 것보다 내가 그 동안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못한 것들을 하기가 바빠서 감사하지 못했다 

       도전 
       5>나는 나고 그분은 그분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자유인이다 
       6>오히려 그분이 내게 감사해야 한다 내가 그분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7>내가 어디 낫고 싶어서 나았나 따라가다 보니 나았지 내가 문둥이로 있었으면 구걸특권을 누리는데 이제 나았으니 먹고 살 걱정이 태산같다 

       회피   
       8>그분은 문제있는 인물이다 그분과 관련을 맺으면 내가 곤란하다
       9>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나를 고쳐주는 것은 당연지사다 


       만일 위의 어느 경우 중의 하나 때문에 주님에게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탄식과 책망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감사의 결과 - 감사하지 않고 제 길로 간 9명은 육체적 질병을 고침 받았으나 주님과의 생명의 관계는 맺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와 감사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들었다(17:19) 주님이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육체적으로 병이 나은 것만이 아니고 영적으로 생명의 주님과 생명적으로 연결되는 구원을 말한다 그 9명도 믿음이 있었다 주님이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기적신앙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인격신앙은 없었다 한 사마리아인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생을 누리는 축복 선언을 받은 것이다 

       감사하면 영생을 누리고 그렇지 않으면 영멸에 처한다는 행위 구원 사상을 뽑아내는 것은 잘못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주님과의 생명적 관계에서 오는 풍성한 삶을 누린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는 감사를 모르는 현대에 살면서 감사생활을 힘씀으로써 풍성한 주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말자 신문을 찾아드는 사람들이 있다 주식시세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TV와 신문 인터넷 휴대폰을 이용해서 매 시간마다 포인트를 확인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대학생부터 직장인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번진 주식열풍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 주식투자를 무조건 죄악시할 수는 없다 좋은 기업에 투자하여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건전한 투자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의도가 빨리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이나 집착인 경우에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 그런데 그러다 보니 주가가 올라도 문제 내려도 문제였다 주가가 많이 오르면 손쉽게 재산이 늘어나니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하는 일을 경시하게 된다 그러다가 또 주가가 내려가면 빌린 돈으로 투자를 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소화도 안되고 잠도 잘 안 오는 것이다 결국 빨리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잠28: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 주식투자 자체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보다는 주식 투자를 통해 속히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1998년 이후 주식투자의 수익률이 급등하면서 너도나도 주식에 손을 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 주식투자는 많은 투자 방식 중에서도 쉽지 않은 것 중 하나다 모든 사람이 쉽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미국과 달리 상당히 변동이 심하고 불안정하다 수익률도 최근의 비정상적인 시기를 제외하면 평균적으로는 정기 예금보다도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실제로 피터 린치라고 하는 학자는 1>현재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느냐? 2>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여유자금으로 투자하려고 하느냐 3>IQ가 상위 3%와 하위 10%에 속하는가 4>냉정하고 유연하며 참을성이 있는가 등의 투자자격 판별법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쉽지 않고 불안정한 투자 방법이라는 것이다 

       영남대 박정윤 교수(서울대 대학원 아리조나 주립대 켄터키 대학교 외한은행 7년 재직) - 주님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 대구동신교회 장로
       1>기본적으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돈과 물질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우리는 단지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원칙이 흔들리면 돈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기 쉽다 2>절대 빌린 돈으로 투자하지 말라 일단 빚 자체가 경제적으로나 영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그 돈으로 주식투자를 할 경우 이자 부담에 대한 압박감과 심리적인 불안으로 인해 매매 타이밍을 놓칠 확률이 굉장히 높다 3>조급한 투자 결정을 하지 말라 요즘 투자광고를 보면 마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을 것처럼 유혹하는 경우가 많다 4>전문가와 상담을 하라 물론 우리의 가장 좋은 상담자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투자를 하기 위해 기도할 때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투자하지 않는 것이 낫다 5>시장평균수익률을 목표수익율로 하라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얻기 위해 애쓰고 또한 자신이 다른 투자자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6>투자소득도 십일조를 하라 노동으로 얻은 소득도 십일조를 드리지만 투자로 얻은 소득도 하나님께 구별해 드려야 한다 이것은 청지기라는 우리의 본분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투자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도록 도울 것이다 

       산업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된 듯하다 돈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섬길 만한 주인이 둘 있다 마6:24 눅16:13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재물을 섬길 것이냐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 엘리야가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바알은 OWNER(소유주)라는 뜻으로 풍요를 의미하는 이방신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느냐 재물을 섬기고 있느냐를 늘 자문해 보아야 한다 주식도 주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된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서 主님대신 株님이 떠오른다면 명확히 잘못된 것이다

       재물은 진짜 주인을 섬기기 위한 대상이고 이것을 충성되게 관리하는 것은 분명한 우리의 의무이다 눅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이 재물인데 이것에서부터 충성되지 못하면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충성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마치 우리의 진짜 주인인양 착각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현대 사회를 살면서 그러한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한히 크신 하나님과 아주 작은 재물의 가치 개념을 우리 머리 속에 명확하게 정리하고 재물은 반복적으로 상대화하여 작게 생각해야 한다 재물을 자꾸 크게 생각하면 불의한 청지기가 되기 싶다 진정한 만족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긴밀하게 교제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식 투자도 주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된다면 그만 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主님대신 株님이 떠오른다면 명확히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 때에 비를 내려 주시고 태양을 비춰 주시어 오곡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이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오늘 지금 여기 주의 백성들이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렸사오니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죄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한 죄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따라간 죄 그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합시다 - 우리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 죄를 깨끗하게 영원히 용서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복된 약속을 하셨으며 성령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믿음으로 용서와 구원과 평안을 얻은 우리는 감사함으로 주 앞에 예배드리십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제 여러분의 죄는 용서되었고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생활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되신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새로운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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