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치못함이 없는 말씀(눅1:13)
  • 조회 수: 725, 2013.08.22 21:55:40
  •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성탄의 계절을 지키면서 우리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낳을 것을 알려주는 수태고지의 유명한 장면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 중에서 강하게 우리 마음을 잡아끄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구절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말씀이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의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가진 능력과 동일한 힘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몸도 일으켜 세우기가 어려울 만큼 많이 아픈 사람이 일손 바쁜 농부에세 <여보게, 내가 내일 밭에 나가서 김을 매 주겠네>고 한다면 그건 아무런 힘이 없는 말입니다. 하나 마나한 말입니다.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체 건장한 젊은이가 <어르신, 제가 내일 밭에 가서 김매는 일을 도와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은 아주 신빙성이 있습니다. 말이 능력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말은 그 말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서 힘있는 말이 되기도 하고, 힘없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연유로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약속은 능력 있는 말씀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언제쯤 무엇을 사 주겠다고 약속만 해도 기뻐합니다. 벌써 손에 들어온 것처럼 좋아서 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은 아버지는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보다 힘있는 아버지가 약속했으므로, 말씀만 들어도 아이들은 기뻐요. 능력 있는 분의 말씀은 그 말씀만 들어도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편 119편 165절의 말씀입니다. 또 시편 119편 14-16절에 보면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잊지 아니하리이다!"  주의 말씀이 즐거워서 잊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말씀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희 집 꼬마들이 가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쫒아와서 붙잡고 확인합니다. <아빠, 전에 나랑 어디 간다고 했지요?>  그런데 저는 다 잊어서 생각이 나지를 않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면 또 기분이 좋아서 뛰어 나갑니다. 아이들은 제가 한 약속만으로도 기뻐서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여러분, 그런데 저는 약속을 왜 잊었을까요?  그거야 제가 하나님이 아니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보세요. 말하고 잊기도 하고, 약속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한 말도 때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면 하물며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 절대로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한 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능력 많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가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가로막을 세력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우리에게 감격이요, 아멘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비길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과학자들이 사람의 힘으로 씨앗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자연계의 씨앗을 가져다가 성분 분석을 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성분을 섞어서 씨를 만들어도 그것은 가져다 심으면 썩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에 널려 있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갖 종류의 씨앗들은 싹이 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창조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되라는 명령입니다. 일단 그 입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됩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더니 빛이 있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사야 55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바로 그 능력 있는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그 능력 있는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본문은 이 엄청난 말씀을 들은 마리아가 어떻게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계집종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종이란 주인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주인이 오늘은 장을 보러 가자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장에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 종이란 주인의 말씀에 오직 순종 밖에 없습니다. 그게 종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게 바로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이루어지이다>란 말은 단순한 수동적인 태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그렇게 명령하시니 할 수 없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수동 속에는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는 <적극적인 동의>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루어지이다>란 말은 헬라어로 <게노이토,        >라고 합니다. 이 게노이토는 문법적으로 부정과거로서 <소망법>입니다. 마음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낼 때 쓰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란 말은 그 일이 자신에게 반드시 되길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을까 봐 염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말씀의 적용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말씀을 잘 적용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증거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적용하였습니다. 말씀에 대하여 <아멘>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2장 13절 후반부에 보면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 살아 역사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으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로 적용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 말씀이 여러분 속에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말씀은 어떻게 마리아 속에서 역사하였습니까? 우선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마리아는 대대로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음을 알았습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 이하를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마리아 뿐입니까?  누구든지 말씀을 받아 믿음으로 적용하는 모든 사람은 영광을 얻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4절을 보면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네가 비록 나이 많고, 아내 사라가 늙었지만 네가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20절 이하에 보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결과로 무슨 영광을 보았습니까?  그는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낳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줄을 확신하십시오.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이 담겨 있는 그릇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트레이드마크는 손에 성경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방 속에 성경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어디를 가든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휴대폰 보다 더 중요하게 휴대해야 할 것이 성경입니다. 휴대폰으로부터 애인의 음성이 들려온다면 성경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오는 것입니다. 심방을 가실 때 빈손으로 가면 안됩니다.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갈 때도 빈손으로 가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배 드릴 때 성경을 가져오지 않아서 가만히 있으면 덕이 안됩니다. 그건 심방 간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성경>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내 성경을 들고 교회와야 합니다. 집 안 여기저기 성경이 널려져 있어서,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와서는 안됩니다. 내 손때가 묻고, 내 마음이 담긴 내 성경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의 기초입니다. 기초를 잘 지키면 신앙이 든든히 세워질 것입니다. 
            자 이처럼 성경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 잘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는 성경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주의자가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는 말씀주의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성경이 말씀 아니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말씀은 다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약 성경이 오늘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도 350이나 더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성경이 없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초기 수 백년 동안은 성경이 없었으니까 말씀도 없었던 시대였을까요? 아닙니다.  그 당시 선배들의 신앙은 지금보다 수 백 배 힘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세워진 십자가와 으르렁대는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을 향해서 찬송하면서 걸어 나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 속에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말씀, 이 세상의 짧은 환난이 자신들에게 줄 면류관에 대한 말씀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도 없는 마당에 무슨 말씀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분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후배들에게 물려준 그 말씀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성령 안에서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경은 없으나, 말씀은 있는 시대였습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성경 보다 말씀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주의자가 되어야 옳습니다. 성경주의자가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은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가졌으나, 말씀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몇 몇 여성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였으나, 그 말들이 거짓말임이 드러났습니다. 성경만 가진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도 거짓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참 말씀을 가진 사람은 감히 거짓을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외친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성경은 집집마다 널려 있으나, 영혼을 배부르게 하고 인생을 위로할 말씀 한 구절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찾고 찾다가 <닭고기 스프 시리즈>로 만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직장인을 위한 닭고기 스프>등의 이름이 붙어 있는 책들 말입니다.  영혼을 위한 말씀이 고갈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진 것으로 만족치 마시고, 말씀을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성경책 자체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성경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역사합니다. 
            성경은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성경을 빛내는 내용물입  니다. 
            성경은 돈으로 삽니다. 그러나 말씀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성경은 눈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성경은 지식을 줍니다. 그러나 말씀은 생명을 줍니다.   
            성경책 자체는 능력이 아닙니다만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성경은 다 같이 읽어서 집단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각자  의 영혼에 개인적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이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들어올 때 비로소 성경이 제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경을 말씀되게 합니까?  어떻게 성경 안에서 말씀을 찾습니까? 그 방법은 단순합니다. 기도하면서 읽으십시오.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성령 안에서 읽으십시오. 아멘의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간절함으로 받으십시오. 그럴 때 그 성경이 말씀이 되어 여러분의 가슴 속으로 쏟아져 들어 올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말 중에 말로 인정되는 것은 아라비아산 말입니다. 아라비아산 말이 이처럼 뛰어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아라비아는 광활한 사막 지대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좋은 말을 많이 가졌느냐 하는 것은 그 집단의 세력을 가늠하는 잣대였습니다. 모하멧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100마리의 암말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우리 안에 먹을 것을 충분하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물은 절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말들은 목이 말라서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리 아래편에는 아름다운 시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우릿간에 있는 말들을 자극했습니다. 마호멧은 말들이 물 때문에 정신이 나갈 정도가 되도록 기다렸다가 갑자기 우리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말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언덕을 내리 달려서 시냇물로 향했습니다. 말들은 입으로는 거품을 물었고, 말들의 달리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거의 시냇가에 도달할 쯤 되었을 때 마호멧은 뿔피리를 힘차게 불었습니다. 그러나 말들은 피리 소리에도 불구하고 물 생각만 하면서 시냇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 백 마리의 말 중에서 네 마리는 뿔피리소리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섰습니다. 네 마리의 말들은 물 마시는 것이 아무리 급해도 뿔피리 소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마호멧은 나머지 말들은 돌려보내고, 이 네 마리 말을 종자로 삼아서 아라비아말들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라비아말들을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여러분,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부시는 나팔 소리와 같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욕망의 시냇물을 향해 달려 들 때, 우리를 멈추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는 나팔 소리입니다. 말씀은 길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입니다. 아모쪼록 성경 속에서 말씀을 발견하시고, 그 말씀 속에서 여러분을 위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팔 소리를 듣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따라서 멈출 때는 멈추시고, 달릴 때는 달리시고, 방향을 바꿀 때는 바꾸면서 말씀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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