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하나의 은혜
  • 조회 수: 671, 2013.08.22 21:56:48
  •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길거리 골목에서 떠들던 아이들의 소리도 그치고, 모두들 자기 일에 바빠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하루가 끝나고, 달콤한 휴식 속에 피곤한 몸을 누이던 저녁이었는지, 아니면 하루를 알리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새벽 여명이 밝아오던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온통 시끌벅적한 대낮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 인간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엄청난 비밀이 세상에 공개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은 인간들의 죄악으로 가리워진 세상의 어두운 하늘이 열리는 순간이었으며, 그 하늘 바깥의 하나님의 빛이 인류를 향해 비취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계획이 계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는 고귀한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그 손님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습니다. 가브리엘이란 이름의 이 천사는 엄청난 하늘의 비밀을 그녀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얼굴 색이 변했으며,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놀랐고, 당황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뚫고 들어온 그 엄청한 손길 앞에서 그녀는 연약한 새와 같이 떨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마리아를 사로잡았습니다. 전혀 상상도 못하던 일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엄청난 일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건넨 인사를 보십시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가 마리아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기독교인들에게 은혜는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래서 은혜란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도 김은혜집사님, 유 목사님집의 딸 유은혜가 있습니다. 사하 2구역에만 은혜라는 아이들이 두 명이나 있습니다. 은혜는 좋은 것입니다. 은혜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바울 사도는 편지를 쓸 때마다 은혜가 편지를 받는 교우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하곤 하였습니다. 
       사실 바울 자신이 이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오직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러분, 은혜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으십니까?  은혜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궁궐 지붕에서 길을 가는 유명한 성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듣자 하니 하나님께서 그대의 영혼을 빛나게 하시고, 그대 또한 위대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성자가 대답합니다. <그건 간단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지금 길을 가는 지극히 천한 한 백성인 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를 임금님 곁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만약 임금님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고, 저를 부르지 않으셨고, 여기 앉게 하지 않으셨다면 저 같이 천한 백성은 이 궁궐 안에 감히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임금님, 이젠 그 비결을 아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빛을 발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의 노력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오게 하셔서 당신 앞에 앉게 하시고, 아들과 딸로 삼으셔서 대화하고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거져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고, 우리는 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은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내가 받습니다. 받아서 내 영혼의 호주머니에 넣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을 주셨습니다. 재물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행복을 주셨습니다. 다 주셨고, 우리는 받아서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은혜는 이름하여 <+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시고, 우리는 받아서 날마다 더해지는 은혜입니다.  더 많이 받아, 더 많이 가지고, 더 풍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만약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한 은혜가 이런 은혜라면 왜 마리아가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왜 놀랄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기뻐하고 환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는데도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천사가 말한 그 은혜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은혜와는 성격이 다른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색다른 은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그 차원과 질이 전혀 다른 별종의 은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초점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마리아는 받는 게 아니라, 마리아가 하나님께 내 드려야 할 은혜였습니다. 그 주고 받는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마리아의 생애 전체를 요구하셨습니다. 곧 결혼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는 처녀의 행복을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네 인생 전부를 달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네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행복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처녀에게 아기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또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장 파혼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끌려나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은혜는 아기 예수님을 낳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낳은 것으로 만으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면서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장성한 예수님이 집을 나가셨고, 들려오는 소문은 불길한 소문들 뿐이었습니다. 예수가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고 그 율법에 도전하고 있다, 성전의 권위에도 도전한다, 제사장들도 안중에 없다, 이제 제사장들이 예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또 그는 이상한 왕국이 온다고 가르치고 있다, 로마 제국이 알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아마 정신 나간 게 아니면 이런 일을 벌릴 리가 있느냐?  미친 게 틀림없다는 등 등의 말이 들려올 때 그 어머니는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그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 비극적 날이 왔을 때, 그 어머니 마리아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로 말라 버렸을 것이며,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고통은 본문의 소위 <은혜>가 임하면서부터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형벌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은혜라면 거부하고 싶은 은혜였습니다. 이걸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성경은 마리아를 가리켜 은혜를 받은 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네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 말씀들은 은혜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때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고통이 은혜임을 말해 줍니다. 십자가가 은혜임을 말해 줍니다. 가슴 졸이는 것이 은혜임을 알려 줍니다. 눈물과 땀이 은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받아서 부요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내 것을 내 놓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시집갈 처녀의 행복을 내 놓는 것입니다. 생애를 내 놓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내 놓는 것>, <부담을 지는 것>, <눈물 흘리는 것>,...이런 은혜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도 은혜라고 말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은혜입니까?  
       첫째로 이것은 하나님이 믿어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너는 내가 믿을 수 있다. 너 정도면 내가 내 놓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너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줄 믿는다. 너 밖에 없어서 네게 명령한다. 이로서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마리아가 들은 그 엄청난 소식은 예루살렘의 고관 집무실에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제단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에게 전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의 서재에 전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유한 부인의 사치를 즐기는 고관집 아낙네들의 그 안방에 전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소식은 세상의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나사렛 한 모퉁이의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처녀 마리아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신뢰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은혜였습니다.

         둘째로 이런 요구가 은혜인 이유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 농사하던 많은 이들이 도시로 와서 공장 근로자가 되었습니다.  영세 수공업자들도 다 실패하고 대기업의 노동자로 취직했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간신히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죠지 휱필드와 요한 웨슬레로 시작된 부흥 운동은 도시의 소외된 근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가장 가난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자 이 세상에서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 세계 인류보다 더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이 세상 최악의 극빈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들이 마른 빵과 영양가없는 스프를 먹고 있을 때, 주님은 굶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기름이 찌들은, 떨어진 작업복을 입고 있을 때, 주님은 그 옷마져 벗기운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약해지는 육신을 매만지면서 탄식할 때, 주님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음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오 주여, 저는 너무 부자입니다. 저는 너무 많이 가졌나이다. 우리의 것을 받으옵소서> 저도 낼 수 있습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즉석에서 1불씩 모았습니다.  한 달 생활비가 겨우 50불인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의 1불은 대단한 금액이었습니다.  1불의 눈물과 1불의 믿음, 1불의 감사와 1불의 경건, 1불의 절제하는 삶이 모아졌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그 돈은 아프리카의 검은 사람들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1불은 가치를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암흑의 땅에 돈으로 살 수 없는 빛을 비추었습니다. 리빙스턴과 같은 불멸의 선교사들을 파송한 런던 선교회의 선교비의 대부분은 이름있는 몇 사람의 몫돈 헌금보다는 노무자들의 1불의 눈물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1불을 내면서 자신들도무의미하게 스러질 존재가 아니라, 가치있게 쓰여질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도 자신이 할 수 있음에 놀랐습니다. 1불을 선물 받을 때의 기쁨 보다 1불을 낼 때의 기쁨이 더 컸습니다. 자신들의 주머니는 비어도 영혼은 채워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이것이 은혜인 이유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모세의 시종일 때 그는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세를 따라 다니기만 하면 충분했습니다. 모세의 그 고뇌, 모세가 민족을 위해 허덕이는 모습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큰 짐을 지고 애를 쓸 때, 그는 옆에서 작은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고 모세가 지던 짐이 여호수아의 어깨로 넘어 왔습니다. 그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상한 은혜를 그에게 베푸시는 순간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덕에 그는 요단강이 갈라지고 물이 멈춰설 때 그 기적의 현장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성에서는 어떠하였습니까?  그의 신호가 떨어지자 백성이 함성을 외쳤고, 그 순간 견고하던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순간 여호수아는 자신이 엄청난 기적의 한 복판에 주인공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영광이요, 명예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려면 일을 맡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명을 붙들고 씨름을 하는 중에 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일을 맡지 않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일을 맡은 사람은 무거운 부담감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 무거운 짐이 그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 일군된 것이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우리를 진정으로 명예롭게 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만약 마리아가 이 은혜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녀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땅에 무수하게 많은 마리아 중의 한 명으로, 그녀가 요셉과 결혼하든, 뒷집 야곱과 결혼하든, 옆 동네 시몬과 결혼하든 아무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 놀라운 은혜에 아멘하는 순간 마리아는 우리 앞에 위대한 신앙의 대선배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천년도의 교회 일군을 임명합니다.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힘든 일도 있고, 속상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아 들이십시오. 충성하십시오. 그럴 때 이 또 하나의 은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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