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눅 1:26~38)
  • 조회 수: 451, 2013.08.22 21:59:14
  •   사도신경에서 제일 논란이 많은 부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명제입니다.  이 대목은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들 간에도 침묵으로 그냥 지나쳐 버리곤 하는 부분이기 합니다.

      이 명제에서 논쟁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내용입니다.  과연 남자 없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라는 생물학적 문제가 논란의 주된 내용입니다.  특별히 오늘과 같은 과학주의 시대에서 이 문제는 더욱 더욱 크게 걸림돌이 됩니다.  저는 이 논란의 문제에 대해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시도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의 근본 의도와는 다릅니다.  이 명제는 하나님이 인간 세상으로 찾아오실 때 하나님 스스로 택하신 신비입니다.

      사도신경에 이 명제가 고백의 내용으로 포함된 것은 동정녀가 잉태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문제로 제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명제에서 제시하는 근본 핵심은 "하나님의 성육신" (Incarnation)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순수한 인간이 되사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것을 믿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의 방법을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드린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이 명제에서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때 거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이 전 과정을 다 받아드리신 한편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선제권은 전적으로 그가 갖고 계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사도신경에서 이 명제가 빠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은 없습니다.  이 명제는 십자가와 부활의 명제를 사실화시키는 전(前)사건입니다.  이 명제는 상징도, 비유도 아닙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자신을 낮춘 사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기비하 사건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구원은 하늘과 땅 사이 어느 곳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다.  인격적인, 집단적인 역사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세계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 안에서 우리와 그 사이의 무조건적인 연대성, 동일성, 인간됨이 문제인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중요한 명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간의 현실 안에서 시작되었는가 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 안에서 우리와 그와 연대성, 동일성이 이루어졌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사도신경에서 주는 답변은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그림의 소재로 즐겨 택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수태 고지"입니다.  이 본문을 한 폭의 그림으로 상상해 볼 때 그림에서 지시하는 핵심은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시하는 방향은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 한 여인의 몸을 빌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일에 은혜를 입은 여인이 약혼한 여자로서는 너무나 위험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겸허하게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명제에는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잉태 되사"에서 "잉태되다"는 어떤 근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궁극적인 수태, 그 참된 주도권이 전적으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시작이 인간의 선제권이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그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때 "마리아는 자신이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그러한 일이 남자의 도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오심으로, 예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동시에 인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영원한 근원에서부터 우리의 시간 안으로 라는 변경될 수 없는 방향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고, 전적으로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때 어떤 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간됨에 관한 중요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 (갈 4:4)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질적 차원에 모두 참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본질적 차원으로 역사적, 생물학적, 종교, 문화적 차원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이러한 차원을 떠나서 태어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에 다 참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됨의 중심되는 실상입니다.  이 중심 되는 사건이 사도신경에서 고백됩니다.

      우리 모두와 같이 예수는 이 세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어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차원, 문화적 차원에 참여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역사와 함께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역사는 이 세상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가 오신 영원에로 그 목표를 향하고 있습니다.  쿠르트 마르티(Kurt. marti)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탄생의 울음소리에
       신상들을 부순 그 때
       마리아의 다리 사이에는
       주름 투성이의 붉은 빛
       갓난아이가 누워 있었다."

      이 시에서는 예수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단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내용만 있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 삭제될 때, 예수의 탄생은 순수한 한 인간으로서 탄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나, 상상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마리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의 경험이나 상식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 부분을 삭제하게 될 때 그것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칼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처음 시작에 인간의 이성, 행동, 경건성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문제다.  거기에 하나님 자신이 현존한다."고 했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동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어떤 동역자, 협력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에 참여 방식에는 인간을 높이고, 그의 업적을 돋보이는 것이 본질적 요소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인간은 받아들이고, 듣고, 봉사하는 과제를 수행할 뿐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입니다.  인간은 오직 선행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뿐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여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종이 매우 소극적이고 정적주의가 아닌 역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의 찬가에서 보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이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눅 1:46∼53)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인간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마리아는 매우 적극적이고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그가 가담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매우 수동적이었던 마리아는 놀라울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거기에는 후회나 한탄이 없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비천한 여인을 돌보셨다는 데 그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되어질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일인가를 봅니다.  그 일이 마리아 자신에게 국한된 일이 아니며 그를 넘어서 마리아 자신이 존경의 인물 숭배의 인물로 부각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한 여인으로 참여한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의 지식, 의지, 힘, 교만이 얼마나 방해물이 되곤 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을 봅니다.

      이 마리아의 찬가는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도신경의 명제가 역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 참여한 여인이 그 사건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입니다.  이 찬가는 사도신경의 내용과 같은 의미의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찬양인 동시에 그의 고백이며, 간증입니다.  이 찬가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주해서이기도 합니다.  이 찬가의 중심은 마리아 자신이 아닙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 하나님이 큰 일, 새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의 글에 "고독한 생애"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바클레이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그도 역시 다른 곳에서 얻은 자료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마을에 유대인을 부모로 해서 태어난 한 사내가 있었다.  어머니는 농사꾼 여자였다.  그는 또 다른, 역시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목수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지방을 떠도는 설교사가 되어 3년을 지냈다.

      책 한 권도 쓰지 않았고, 일정한 작업장도 없었고, 자신의 집도 없었다.  가정을 이룬 적도 없었고, 대학에 들어간 일도 없었다.  큰 마을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고,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서 200마일 이상 바깥으로 나간 본 적이 없었다.

      위대한 인물에게 흔히 따르게 마련인 깜짝 놀랄 만한 일은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보일 소개장 따위도 없었으므로 스스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에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알몸뚱이 하나, 타고난 힘 이외에 이 세상과 관련된 것이라곤 무엇하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은 그를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친구들은 다 도망쳐 버렸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그를 배반하였다.  그는 적의 손에 넘겨졌고, 형식적인 재판에 끌려나가게 되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두 사람의 도둑 사이에 세워졌다.  그가 죽음 직전에 있을 때, 처형자들은 그가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곧 그의 웃저고리를 놓고 제비뽑고 있었다.  그가 죽자, 그 시체는 내려졌고, 빌린 무덤에 눕혀졌다.  한 친구의 모처럼의 작별이었다.

      오랜 열 아홉의 세기가 지나가 버렸다.  오늘날 그는 인류의 중심이며 전진하는 대열의 선두에 서 있다.  일찍이 진군한 모든 군대, 일찍이 건설된 모든 해군, 일찍이 개최된 모든 의회, 일찍이 통치한 모든 왕들 - 이것들을 모두 한데 모은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생활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 저 고독한 생애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그는 진정 인류의 중심이며,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대열의 선두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이 예수는 모든 사람의 희망이며, 기쁨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신경의 이 명제는 성탄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만약 인간 역사에 성탄절이 없었다면 이 역사는 진정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은 성탄절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에서 역사, 문화, 종교가 새로운 목표를 지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역사는 영원을 지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으로 잉태 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이 하늘과 땅 사이 어느 것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셔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인간 세계에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해 사도신경의 그 다음의 명제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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