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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라 01:04-11/ 약속을 성취를 위한 우리의 자세 [에스라]
  • 조회 수: 394, 2018.04.15 12:49:51
  •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작고 가난하여 교역자도 모시지 못하고 적은 무리의 교인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 이 휴가차 그곳에 갔다가 이 시골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단순한 예배인데 그 예배에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동을 받은 목사님이 예배가 끝난 후 어느 집사님 한분에게 어떻게 이렇게 은혜가 충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깜짝 놀라며 그 목사님에게 그럼 은혜가 없는 예배도 있단 말입니까? 라고 되물었다라고 합니다. 그 시골 교회 교인들은 은혜 없는 예배가 있는 줄을 모르고 사는데, 저와 여러분은 혹시 은혜가 충만한 예배가 있는 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감동을 경험하지 못한체, 교회에 왔다 갔다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 앞으로 드려질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의 감동이 충만하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축복을 선포 하는 설교를 좋아하고 그와 같은 설교를 하면 설교에 은혜가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부담이 되는 설교를 하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위로와 격려 그리고 축복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에게 부담을 주고 때로는 마음을 찌르는 설교도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은혜와 축복을 선포하는 예배와 설교에만 감동하지 말 게 하시고 부담이 되고 채찍 질 하는 말씀과 예배에도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는 사람 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찔리게 되고, 회개케 되는 말씀 앞에 우리가 감동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에스겔과 다니엘서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만 배우지 않고, 죄에 대한 징책의 말씀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70년이라는 시간동안 징책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징책하신 하나님께서는 70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드디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자유케 되는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간지 70여년 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그동안 바벨론 나라는 메대라는 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메대라는 나라는 과거 페르시아라는 나라로 불리웠습니다. 이 페르시아의 왕은 고레스라는 왕이었습니다. 고레스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과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두 자유를 주고,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다 포로의 귀환도 3차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BC538-515) 첫 번째 귀환은 1장과 2장에 나오는 데 스룹바벨의 인도로 5만여 명이 (49,897)이 귀환합니다. 두 번째 귀환은 (BC 457) 학자 에스라의 인도로 2천 여명이 (1,754명) 귀환하고 세 번째 귀환은 (BC444-425) 느헤미야 인도로 4만여 명이 (42,360)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70년 이상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범죄에 대한 징계로 벌을 내리셨지만, 그 와중에 그들을 보호하여 주셨고, 그 남은 자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보호 하신 것입니다. 1차 귀환에 나선 사람들이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하나님께서는 바벨론 땅에서 포로된 자들 중에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감동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당시에 메대라는 페르시아 나라안에 백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지만 5만명 이라는 적은 수만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고향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수많은 교회가 있고, 성도가 있지만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선택받은 자는 적은 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처럼 하나님께 감동받는 적은 사람들로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이루어졌지만 정작 그것을 내가 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위해서 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지만, 그것을 내것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70여년 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라면 과거 처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거나 매우 늙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당시 어린 나이에 끌려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중년의 청년의 사람들은 고향땅이 아닌 이방 바벨론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로민 2세 3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포로로 잡혀온 부모세대와는 달리 이 곳에서 태어나서 나름대로 직장을 구하고, 그 땅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다시 부모들의 고향, 머나먼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직장도 버려야 하고, 자신들이 힘들게 일구어온 삶의 터전들을, 안전한 삶의 장소들을 모두 포기하고 가야만 했습니다. 또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400km의 길이었습니다. 차로 가도 먼 길을 그들은 걸어서 가야만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가서 다시 조국의 재건하고 성전 건축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습니다.그들이 가야할 곳은 안정적인 곳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향땅에 돌아간다라고 해도 별다른 이익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땅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현실의 삶에 안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약속을 이루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이 듭니다. 고난도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많은 인내와 시련을 겪고 참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보다 지금의 안전한 생활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실제 비록 적은 사람이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한 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자원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향땅에 돌아와 하나님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말씀중심대로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리고 이어지는 7절에 보니깐, 고레스 왕의 마음도 움직여서, 그들이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는 경비와 고향땅에서 정착하고,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경비까지도 허락하여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됨을 확신하며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준비하면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아주 자연스럽게 기쁨 가운데 이뤄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선순위를 바로하고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내 사업의 문제, 내 직장의 문제, 내 삶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일에 우선을 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자원하여 드린 물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들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이 얼마나 되겠습니다. 그들이 고향땅에 돌아가는 경비를 겨우 감당하고, 고향땅에서 간간히 먹고살만한 돈밖에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적은 돈이지만 하나님의 향해 기쁘게 드린 백성들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선물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더 많은 것들로 채워주셨습니다.


    내가 내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고 자원하는 마음,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에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해결해주십니다. 사실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는 것,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는 일들이 얼마나 환경가운데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도, 헌신을 하려고 해도 내 주위의 환경이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자신들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신들의 사업과 직장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는 올바르십니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그분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로할 수 있도록,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려는 강한 의지가 생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왕 고레스왕을 움직이셨습니다. 이 방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기에 만물을 통치할 권리와 권능을 가지셨습니다. 이러하신 하나님께서 이방의 왕을 들어서 쓰시는 일은 오히려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를 위하여서 이방의 왕이라도 기꺼이 움직이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역사만 움직이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친히 저와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주관하시고 움직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의 약속을 성취해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와 성도, 저와 여러분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한 나라의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분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한 나라의 주권자의 마음을 움직이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신비한 역사가운데, 환경을 변화시키시기도 하십니다. 러분, 역사의 주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분명히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 역사의 배후에 계셔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이러한 여호와의 섭리를 깨닫는 자는 절망 중에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또 고난가운데 인내하며 결국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머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분의 선택된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난과 환란이라는 환경을 감당해내야 할 믿음의 인내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 보시면 두 종류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하나는 이방의 나라, 페르시아 왕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고레스 왕은 하나님을 진정 믿거나 섬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고레스가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자유를 선포하고, 고향땅에 돌아가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짓도록 허락을 하였습니다. 이 때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 일부가 마음의 감동을 받았고, 이일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감동함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이방 왕 고레스 왕은 일회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해서 그를 감동시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잠깐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환경적인 형통함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것입니다.(일회적)

    하나님은 어느 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고자 이방나라 왕인 고레스의 왕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이루고,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외부적인 상황이 잘되는 경우는 언제나 많지가 않습니다. 고레스 왕처럼 일회적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에스라서를 공부하시면 아시겠지만 외부적인 상황과 여건이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기 좋은 환경으로 바뀌어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여건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있다고 해서 그것은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고레스왕의 도움은 일회적으로 끝이 납니다. 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고레스 왕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세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땅에 돌아가 성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백성들과 이방 백성들이 이를 방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는 형통한 환경이었지만, 돌아와서는 그러한 형통한 환경이 끝나고 고난과 어려움의 환경이 계속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너무 환경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문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회를 잘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우리는 상황과 환경, 여건을 너무 의지하면 안된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라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환경이나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레스 왕이라는 형통하고 좋은 환경적인 요인은 일회용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고레스 왕의 도움도 일시적이었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생활에서 귀환시키기 위한, 오랜 포로생활에 힘들어하던 그들을 돕기 위한 일시적인 도움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환경조차 없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예 고향 땅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생각조차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환경적인 요인은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의 길을 열어주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환경적인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하겠지만, 그것인 항상 계속 된다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시적인 환경과 느낌을 의지하지 말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동을 소멸하지 않고, 그 감동을 끝까지 가지고 주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 감동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다시 한 번 그 감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감동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주신 감동이 있습니까?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그 감동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사업과 직장의 문재, 삶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소멸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번 우리를 감동케 하셨던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우리의 감동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주의 일을 위해,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감동케 될 수 있도록,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내 삶의 문제 때문에, 어려움 때문에 내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지 못해 잃어버리고 소멸되었던 주님의 감동, 내가 했던 서원을 기억하고, 그 감동을 다시 기억하고, 내 우선순위를 바로 함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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