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니엘 3:13~18)
오늘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95개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가톨릭의 잘못된 가르침을 향해 던진 영적 선전포고였습니다. 그후 3년 6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1521년 4월 17일,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 섰습니다. 심문관이 루터에게 묻습니다. “그대가 쓴 글 가운데 취소할 부분이 있는가?” 루터는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람들은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혹시 루터가 죽음의 위협 앞에 굴복하지는 않을까?’ 다음 날 루터가 던진 고백은 5백 년이 흘러도, 그 마지막 한 마디는 오늘까지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지혜로운 일도 아니요,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죽음을 각오해야 나올 수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이 피로 시작했고, 삶으로 완성시킨 진리의 승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외쳤던 전사들, 그 자랑스러운 개혁가들의 후예들로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는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올해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 드래그 퀸, 여장을 한 남성들, 트랜스젠더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조롱하는 패러디를 하며, 타 종교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했습니다. 반면에 유도 세계챔피언인 세르비아 선수 네마냐 마이도프(28세)가 경기장에 입장할 때 십자가를 표시했다는 이유로 5개월간 ‘출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은 개막식 때 환호를 받지만 예수님을 높이는 신앙은 자격 정지를 받는 모습...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목소리는 들불처럼 온 세상을 태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무시를 넘어 차별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이런 문화가 안방까지 침투해서 우리 아이들의 눈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물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이 시대의 조류는 어떠합니까? 거대한 세속주의의 물결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시대,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속화의 폭풍은 젠더 이슈입니다. 미국 뉴욕주는 성을 구분할 때, 공식적으로 31개의 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젠더 플루이드(Genderfluid)’, 유동하는 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매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여자가 되고 오후에는 남자가 되는 것처럼, 심지어 자신이 원하면 동물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한 아이가 교실에서 변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양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제대로 훈육할 수 없다는 현실입니다. 미국뿐 아니라 지금 많은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개입해서 가르치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이를 가로막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아이에게 성을 바꾸기 위해 호르몬 주사를 투여하는 상황, 문제는 부모도 모르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토록 성에 대한 해방을 집요하게 강조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일까요? 성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단순히 젠더에 관한 이슈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결코 변개할 수 없는 것이 남성과 여성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바꾸려는 것은 단순한 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지막 대적입니다.
이것은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한국도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합법화하려는 목소리가 법정에서 거대한 망치 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7월 18일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동성 커플에게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동성혼 법제화가 초읽기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로 빠르게 치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를 향해 외칠까요?
오늘 본문에는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으로 만든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집어 던져 죽이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천지를 울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참석한 모든 사람이 금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던 세 사람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처지에 높은 관직까지 주었는데,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소에 이들의 충정을 잘 알고 있던 왕이 묻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정말 절하지 아니했느냐? 이제라도 음악이 울리거든 절하라, 그리하면 내가 살려주리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가 있겠는가?”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6-17절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세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절 한번 한다고 신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타협이란 단어가 사람들에게는 매우 지혜롭게 보입니다. 왜 우리나라 대법원이 동성으로 구성된 부부에게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허락했습니까?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부부의 정의를 결혼하여 법적으로 가정을 이루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이것이 우리나라의 법적 부부의 정의입니다. 이런 법적인 가족과 부부의 정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추세가 그러하니까 우리도 할 수 없지.... 이런 식으로 적당하게 타협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묻고 싶습니다. 판사들이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해서 결정하는 것이 무슨 판사입니까? 자신의 아들과 딸들이 동성애로 살고, 동성으로 결혼해도 세상이 그러니 할 수 없다고 인정하겠습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사람은 주변을 보면서 생명이나 보존하려고 적당하게 타협한 게 아니라 단호하게 신앙고백을 하고서는 결국 왕의 불타는 진노로 인해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풀무붙을 지켜보던 느부갓네살 왕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풀무불 안에는 세 사람 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머리털 하나 타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사야 43:2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약속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풀무불 속에 들어갈 정도로 결단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됩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가게 뇌는 것입니다. 천하를 지배했던 왕. 그 교만한 왕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단 3:28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신앙은 위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생명을 드리는 심정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상 앞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드러내십니다.
대한민국의 1950~1960년대는 '피의 역사', 1970~1980년대는 '땀의 역사',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는 '갈등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갈등의 역사의 후유증으로, 민족의 가슴마다. 또 우리 자녀들의 마음이 전쟁터가 되어 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어둠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자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영광을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언젠가 세월이 흘러 우리 자녀들이 질문할 것입니다. "이 나라를 무너뜨릴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이 들어오려 할 때 어머니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나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인간의 고귀함을 상실한 채 꿈을 잃고 방황할 때 그 때 부모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나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류의 근본을 흔드는 사상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던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셨나요?"
우리는 '오늘 오후' 자녀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스토리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향해 들려줄 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한국과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뜨거운 가슴으로 예배하고. 간절한 열망으로 찬양하고, 심장을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노라고.... 2024년 10월 27일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시대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진리의 복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간증할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모임이 미스바에서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던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으로 부르짖는다면, 그래서 한국이 악법제정을 막아내고, 하나님의 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도 우리를 따라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 거룩한 복음의 역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다음 세대의 생사가 우리의 모임과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이 나라를 새롭게 할 골든타임이니 함께 각오를 다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는 함성으로 나아갑시다.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 잎드려 비오니 한국교회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옵소서. 세상이 창조 질서에 대항하고. 성경적 가치관에 분노하며 조봉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공동체. 아름다운 가정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지려 합니다. 주여, 풀무불 속에서도 주녹 들지 않도록 용기를 주옵시고.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적 기백을 가지고 주님의 주 되심을 선포하게 하어 주옵소서. 대한민국 위에 은혜를 베푸셔서 이 나라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되게 하시고. 한국교회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명과 소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