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순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권위에 대하여 한 번 순종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일생을 붙드는 운명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라고 말씀하면서 어떤 권위에 대한 순종이 얼마나 중대한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아담과 하와의 예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다가 어느 날 그냥 무심코 사탄에게 속아 사탄의 말을 들었는데 바로 그 한 번의 순간이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종으로 넘어가게 된 개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순종이 우리의 일생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한 번의 불순종이 사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 받고, 이스라엘 왕의 자리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되 그들에게 속한 것들, 사람, 가축, 제물 할 것 없이 완전히 멸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사람과 동물과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뽑아둔 다음에 나머지만 처리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9절에 보니까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멸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울이 사무엘에게는 뭐라고 말합니까? 13절에 보니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 행했노라고 대답합니다. 사울의 이러한 대답을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볍게 대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신앙적인 예의도 갖출 줄 알았습니다. 겉보기에는 신앙인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저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는 수준입니다. 신정국가에서 왕으로서 이정도도 안 한다면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이나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드러나는 예배와 신앙의 행위를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의 진면목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지은 ‘레디컬’이라는 책에 보면 사람들이 찬양 중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속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경배하는 행위일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진실된 신앙의 됨됨이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이고,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약간은 판단할 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평소에 말씀에 대한 그의 자세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드리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19절에 보면 사울이 계속해서 사무엘에게 변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로 나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갈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 이렇게 하죠. 그런데 처음에 사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3절에 보니까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말하자면 사람이나, 그 소유된 가축이다 제물.... 심지어는 젖 먹는 아이까지 다 멸하라 그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아니했던지, 아니면 알고도 그리했던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는 그 만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그의 신앙의 수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정말 심각한 표현이 무엇이냐 하면 사울은 한 번도 자기의 하나님, 나 사울의 하나님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고 할 때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이 말을 너무 자주 쓰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이렇게 되어 있고, 21절에도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30절에도 보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사울이 한 번도 하나님을 진지하게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런 태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드릴 수가 없는 거죠. 나중에는 무당을 불러들여 국사의 운명을 논하는 그 지경에까지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 사울의 이런 불순종 이면에는 왕의 자리라는 위치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자기에게 전하는데 이는 마치 사무엘이 왕인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다는 거죠. 사무엘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울에게 전하는 것뿐인데 사울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인간 사무엘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의 말에 순종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명령을 주시면 모를까 저따위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일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순종하는 흉내나 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온전한 순종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6절에 보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단 한 번의 불순종이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한 번 그렇게 불순종 한 것 갖고 어떻게 그렇게 가차 없이 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용서가 없는 분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냥 순간적인 실수나 연약함 때문에 불순종 한 게 아니라 사울의 경우는 불신앙에서 오는 불순종이란 게 문제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울은 한 번도 진지하게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삶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불순종은 연약한 데서 오는 불순종이 아니라 불신앙에서 오는 불순종이란 뜻입니다. 이게 참 큰 차이를 만듭니다. 약간의 차이지만 사실은 큰 차이죠. 다윗의 경우도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신앙의 사람이었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윗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도 되고,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말하자면 신앙생활에서 하나의 옵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은 불순종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게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22절에 보면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 만약 어떤 성도가 무당집에서 점치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합시다. 그러면 그게 얼마나 큰 죄처럼 다루어집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 위에 있는 문수사에 가서 부처 앞에 절하고 나왔다 칩시다. 그걸 알면 교회에서 얼마나 난리가 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이렇게 무당에게 점을 치는 행위나, 부처 앞에 절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더 심각한 표현은 22절 끝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도 나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표현이고,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교회 안팤으로 권위를 무시하는 뉴에이지 문화로 충만해 있으므로 ‘순종’ 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어떤 자녀가 그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아버지가 나에게 하는 말은 다 기분 나쁘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아버지로서 걱정이 되어 자식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자식의 표현인 즉은 하는 말마다 다 기분 나쁘다고 하니... 차라리 입을 닫고 사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이래가지고서야 가정이 바로 서겠습니까? 이런 풍조가 지금 가정뿐만 아니라 나라와 교회.... 모든 면에서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내가 기분이 좋아야 순종하는 것이지 기분 나쁘면 성경이고, 하나님이고 뭐고 다 없다. 이런 식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거죠.
그리고 순종하는 상황이라는 게 인간적으로 보면 상식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에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게 상식적입니까? 베드로에게는 깊은 데로 가서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 고기 잡을 때도 아니고, 더더욱 깊은 물에 그물을 던지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인데 고기잡이 전문가인 베드로에게 이런 명령을 하셨단 말입니다. 이게 상식적입니까? 그리고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주님의 말씀은 물독에 물을 붓고 그 물을 잔치 상에 올리라는 것인데 이게 상식적입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게 될 때 얼마나 큰 축복을 받는가 하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불순종 한 번에 왕위가 떨어져나갔다면 한 번 순종에 그 보다 얼마나 더 큰 축복이 오는가 하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순종하면 우리가 여러 가지로 축복을 받습니다.
첫째는 그 권위에 순종하므로 그 권위가 주는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이삭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그 한 번의 순종으로 초대교회의 최고의 지도자가 되고 베드로의 그 뒤를 교황들이 잇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야말로 초대 교황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작은 권위는 작은 권위가 주는 것을 받고, 모든 권위의 최상위에 위치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실로 엄청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순종을 안 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권위에 순종하게 됨으로 그 권위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순종하기 전에는 그저 비범한 한 인간 정도로 예수님을 알았다가 예수님께 순종하고 보니까 이 주님이야말로 하나님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 같은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를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순종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깊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러면 우리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평생 그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권위에 순종하면 평생 그 잘못된 권위에 매여서 삽니다. 한 번 잘못해서 주먹의 권위에 순종했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주먹질만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한 번 불순종하니까 온 인류가 사탄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복을 받아 천대에까지 그 복이 미치며,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순종하면 그 삼, 사대까지 저주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명문가족을 이루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영 폐족이 되느냐....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am로 우는 순종을 거스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여 하나님이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주시고, 순종하여 복 받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처럼 그런 충만한 복과 은혜를 다 누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