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에서는 침묵하고 있는 이 사실, 즉 모든 백성들을 위해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사주하던 이는 바로 그 해 대제사장의 장인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를 잡는 일에 그가 깊이 관여했고, 영향력도 행사했으며, 대제사장의 장인으로 막후에서 조종했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아무튼 종교와 정치에 혈연적 친분이 얽혀지면 부패가 만연하고 신앙의 타락은 필연적이란 것을 알게 해줍니다.
본문에는 대 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란 여러 설이 있지만, 사도 요한 자신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안나스와 가야바의 관계를 잘 알고 있고,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의 상황을 세부적으로 잘 알고 있었는데 이는 베드로 외에 누군가가 그 현장에 없고서는 이렇게 자세히 알 수가 없는 법이지요. 참고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배를 수척 소유하고 어부들을 고용한 지역 유지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요한의 배경을 살피면서 가룟인 유다와 요한의 운명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겠지만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짓게 된 결정적 요인은 바로 자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납니다. 대제사장이나 당시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수뢰인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요한이 아니였을까요? 그런데 요한이 아니고 가룟 유다였거든요?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요한이 워낙 철저한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요한을 이용할 엄두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마귀가 보나, 사람이 보나 짝퉁처럼 보였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 속담에도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고 했죠.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해할 일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귀의 하수가 되는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고 언제나 마귀가 슬며시 들어오도록 틈을 주어서는 안 되겠지요?
사도 요한은 범죄자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그는 주님을 따르는 자세를 매사에 반듯이 했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그런 신앙의 기백이 있었지만 가룟 유다는 의인인척, 지식인인척 했지만 그 속은 엉큼하고 언제나 이를 찾아 이리 저리 냄새나 맡는 더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틈타지 않겠습니까?
사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자세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당당하게 대제사장의 뜰까지 쫓아가면 될텐데 멀찌기서 애매모호하게 그런 자세를 치하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 것 아닙니까? 저는 사도 요한이 베드로처럼 모르는채 하고 거기에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아는 처지에 숨길 게 뭐 있습니까? 그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도 예수님의 모친을 잘 모시라는 유언을 받았거든요?
오늘 새벽에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고 엉큼하거나 더러운 일을 같이 하자고 부추키는 그런 사람들이 감히 틈타지 못하도록 주님 믿는 자답게 매사에 행실을 바르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