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간에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그 길이 가장 행복하고, 소중하고, 복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편 146:5에 보면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고, 허물 사함을 받은 사람, 죄로 가리워졌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연결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 했습니다. 또한 시편 32:1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그의 말씀을 꿀보다 꿀송이보다 더 달게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말을 줄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때로는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마음대로 되는 일도 있지만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인해서 우리는 더 소중한 것을 얻게 됩니다. 고난은 가치관을 바꾸어 줍니다. 건강할 때에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병들고 보니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것이 소중합니다. 사업에 성공할 때는 소중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업에 실패하고 보니 그것들이 다 의미 없고,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 귀한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기도 합니다.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꾸어 주는 것, 이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때로 행복이 무엇인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선물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있었습니다. 일국의 왕입니다. 그러나 그 왕위는 그에게는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왕이기에 전쟁에 나가야 하고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많은 산적한 업무로 인해서 피곤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지금 당한 이 어려움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범죄하면서까지 사랑했던 그 사랑하는 밧세바도 이 결정적 순간에 다윗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피곤했습니다. 많은 자녀들은 괴로운 존재였습니다. 신하들은 배신했고 아들 중에 하나가 자기 아버지를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차마 그를 대항해서 싸울 수 없어서 왕위를 내놓고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이리저리 산기슭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착잡하고 아팠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아무 미련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운 것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전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만이 그리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지금 우리 교회처럼 이렇게 지어 놓은 건물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리워하던 하나님의 성전은 성막입니다. 천막입니다. 수달피 가죽으로 만들어 놓은 몇백 년 묵은 낡아빠진 천막입니다. 먼지가 자욱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라고 하는 궤짝이 하나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본문 시편 84편은 그러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을 실은 시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어찌 사랑스러운지요." 그는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장막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행복, 하나님의 성정을 향해서 가는 발걸음의 행복, "시온의 대로가 그 마음에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행복, 하나님의 전을 봉사하는 행복, 그는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제비와 참새를 부러워했습니다. 제비와 참새는 마음대로 날아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둥지를 틀고 사는데 나는 왜 하나님의 전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래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 병원에 있던지 아니면 집에 있던지 간에 몸이 불편하여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오늘도 몇 분 심방을 했는데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이 분들에게 소원을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몇 십억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겠습니까? 아니면 큰 집, 자동차 이런 것 갖고 싶다 그러겠습니까? 그들은 너무나 소박한 것에 행복과 소원을 걸고 있습니다. 목사님, 제 다리로 항도교회 예배당 올라가서 예배드리면 정말 좋겠습니다. 얼마나 소박합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이야기들이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에는 "나, 한 번만 교회 나가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한 소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소원하는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한 번 더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그것만이 소원이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고향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유아 세례를 받고, 여기서 결혼식을 하고, 여기서 장례식을 합니다. 보십시오. 12세 된 소년 예수께서는 부모가 "너 왜 여기 있었냐"고 물었을 때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하는 것이 대답입니다. 내 아버지 집, 내 아버지 집에 내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에서 삽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교회만 만나면 반갑습니다. 누가 다니는 교회인지 모르지만 조그만 십자가만 보이면 "아, 저기 교회가 있구나." 어떻게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창세기 47:9에 보면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이 130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이 무슨 뜻입니까? 아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한 때는 세상이 좋아서 돈 따라, 명예 따라 살았는데 알고 보니 세상 쫓다가 험악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마치 탕자의 고백 같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 싫다고 유산 물려받아 세상에 내려갔는데 세상에서 험한 꼴만 당하고, 돈을 다 잃어버리고, 그제서야 아버지 집이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은 줄 알고 세상에 나갔는데 세상에서 별의별 험한 일 다 겪고, 욕만 당하다가 그렇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더란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탕자가 무엇이라고 독백합니까? 차라리 내 아버지 집의 하인 중 하나일지라도.... 라는 마음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다윗도 “내 아버지 집에 사는 하루가 밖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앙이 지대로 박히고, 철이 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인의 장막 안에서 평안히 살고, 쾌락으로 살고, 풍족하게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 밖에서 문지기가 되는 그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악인의 장막 같은 세상이요, 불의한 세상이요, 불안한 세상에 살기보다 내 아버지 집에 살고자 하는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 하는 말을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나라 없이 2천년을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안식일을 부지런히 지켰다는 일, 그런데 그 안식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두고 교회를 위해 내가 수고하고, 교회를 위해 내가 헌금하고, 나 아니면 교회가 돌아가겠나.... 이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일성수 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고, 내 명예를 지켜 주고, 내 생명을 지켜주고, 내 영광을 지켜 준다.... 이것이 바른 신앙관 아닙니까? 우리가 피곤한 이유가 있다면 주님을 위해서 예배하고, 일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 무지개를 쫓는 헛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생각하면 다 후회스러운 일뿐입니다.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한 그것만은 영원히 후회가 없습니다. 이것만이 자랑거리로 남을 것입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예,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인색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넘치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지키고, 섬기는 자에게 축복과 그 영광이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이렇게 불안하고 어수선한 세대이지만 한정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게 하시고, 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다윗처럼 주의 전을 사랑하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사, 주의 전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축복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