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유에 나신 주님(눅 2:7)
  • 조회 수: 1216, 2013.08.23 21:37:37
  • 한 번은 저의 집 아이가 밤 12시가 되어도 연락이 없이 돌아오지 않았습 니다. 걱정이 되어서 길가에 나가서 기다려 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버스 인지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여 여러 사람이 내리는 대도 보이지를 않습니 다. 수없이 많은 택시들이 서는 대도 불구하고 저의 집 아이는 내리지 않았 습니다. 한 30분이 지나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혹시 사고가 나지 않았는가? 아니면, 몸이 아프지 않은가?' 많은 생각이 들어졌습니다. 조이는 가슴을 안고 있을 때에 새벽 1시가 다 되어서 저의 집 아이가 택시에서 내 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반가움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왜 이렇 게 연락도 없이 늦었느냐?"고 했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이미 반가운 마음밖 에는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가야할 곳의 버스를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을 때 얼마나 마음 이 기쁩니까? 고구마를 화톳불 속에 넣어놓고 기다렸을 때에 잘 익은 고구 마를 먹을 때는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이루어질 때 에 기뻐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성탄을 몇일 앞두고 있지 않은 성탄 주일을 주일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때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기다고 있습니까? 절기만 대강절이지 주 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애타 게 기다리지, 옆집의 아저씨가 아들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가야할 곳을 가는 사람이 그 버스를 애타게 기다리지, 다른 사람이 그 버스를 기다리지 않습니 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신부입니다. 둘이 될 수 없는 신랑과 신부의 한 몸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열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주님의 오심 을 열심히 기다리시는 신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오심과는 전혀 상관 이 없는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1999년 성탄절은 내 마음속에 큰 기쁨의 생명의 잔치를 할 수 있는 하나님 의 은혜를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로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주의 성탄을 진정 열심 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서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오 시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열심과 열 정을 다하여 예수님을 기다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이 번의 성탄절이 참으로 큰 기쁨의 성탄절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먼저 생각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지 않았습니다만은 1장 2절에 보면 이 때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 마를 집권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아구스도는 시저의 조카로서 시저가 죽은 다음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고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한 황제였습니다. 이 때는 로마의 시대 중에서도 참으로 꽃을 만개 하는 것 같은 황금기였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를 정복할 정도로 영토를 넓혀 가는 시대였습니다. 실로 로마 의 세력이 인간 만세를 부르는 때였고, 모든 길은 로마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는 말이 바로 이 때 생겼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변의 나 라들이 당하는 수욕과 치욕은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식민지가 되는 나라들 은 굴종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본문 말씀의 상황은 인구조사를 한 때였습니다. 왜 로마가 식민지의 인구 조사를 했는가?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병역을 동원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했고, 또 한 가지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명분도 없는 세금을 내어야 했고, 젊은이들은 로 마를 위하여 전쟁에 나가 싸우다가 시체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 다. 거기다가 이스라엘 경내에 그 당시에 흉년이 들어서 기아로 허덕이고 있 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유대인의 자존심은 땅에 다 떨어 져 버렸고, 최소한의 생존권 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살 아갈 때가 바로 이스라엘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가 이스라엘의 총독이 되어 있을 때였는데, 이 사람 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출세에 늘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치적 출세를 위하여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준 사람 입니다. 거기에다가 헤롯이 유대의 본봉왕이었는데 겉으로는 자기 민족을 사 랑한다 하면서 사실은 로마에 아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욕심이 바로 세례 요한을 죽이는 일까지 자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 던 안나스와 가야바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었 지만, 눈에 보이는 권력과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위 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당시의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암울하고 힘든 시대 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시기였다고 말 할 수 있습 니다. 정치적으로는 나라를 잃어버린 어려운 시대였고, 경제적으로는 기아에 허덕이는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어두움은 하나님을 믿는 믿 음이 상실되어진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에 있었던 시대가 바로 그 당시의 모 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암울하고 어두운 때에 베들레헴 말구유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 나라를 다 빼앗 겨 버렸고, 먹지 못하는 고통이 절정에 달하였고, 영적인 어두움은 이미 그 깊은 어두움 이상으로 어두워져 있었던 때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때 베들 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의 상황을 통하여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신앙을 이어간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우구스티누스는 17살에 사생아를 낳았습 니다. 참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식적인 능력 때문에 마니교에 빠져서 7년 동안이나 이단에 빠져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부정하고 멸시했던 사람입니다. 참 으로 그 개인의 실존의 삶, 그 개인의 모든 삶이 어두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 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읽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 자"라는 이 말씀 가운데 그는 내동댕이치면서 회개합니다. 그의 어두운 인생 의 모든 것들을 다 떨쳐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인생의 주인이 된 새로 운 삶으로 태어나게 되고, 거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쓰시는 우리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이어가는 귀한 그릇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장 11절에 나타난 "오늘 날"이라는 말씀도 어떤 날인가 하면, 슬픔의 날, 절망의 날, 고통의 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절망과 고통이 극에 달 했을 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이런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40대 중반이 된 여집사 님이십니다. 이 분이 위암 말기가 되어서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많은 환자를 만났지만, 이 분 만큼 바로 죽음 직전에 있으 면서도 얼굴이 환하고 밝은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참 기쁩니다. 아직까지 젊은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상에서의 모습은 천사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제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간절히 기도 해 주면, 저는 갈 때마다 이 집사님에게 위로를 받습니다. 제게 어떤 말을 하시는 가 하면, "목사님 제가 고통이 한번 시작되면 견딜 수가 없지만, 그때 마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게 이미 천국의 자 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분에게 책을 한 권 선물을 받았는 데, 카우만이 쓴 '사막의 생수'라는 책입니다. 아주 의미 있는 책을 제가 선 물로 받았습니다. 참으로 그의 삶이 얼마나 어두운 때었습니까? 그는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이미 이제는 천국 가셨습니다만- 아직 젊은 남편이 있고,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이 둘 있는데,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고 참으로 죽음에 대 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참으로 집사님이야 말로 그 고통스럽고 어두 운 병상의 자리에 주님이 그 마음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 다. 지금 이 시간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내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에게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나를 둘러싸고 있지 않습니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의 어둠 속에 내가 갇혀있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말하 지 못하는 죄악의 깊은 어둠 속에 가둬져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거짓이 진 실을 침묵시키고 있는 역사의 어두움의 한가운데에 내가 서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나의 마음속에, 이러한 나의 환경 속에, 예수님이 탄생하고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 모든 문제가 없는 사람, 물론 이런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역사적인 상황을 볼 때에 오늘날의 정치적인 상황이 어둡고, 우리 나 라의 경제적인 상황이 어둡고,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가 어두운지 모르겠고, 그리고 내 마음이 죄악으로 어둡고, 문제의 고통으로 어두워져 가고 있고, 견딜 수 없는 실존의 고통과 아픔과 근심의 어두움이 가득차 있을 때에 이 어두움을 다 몰아내는 빛으로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탄생하신다는 것, 내 마 음에 다시 사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여시는 여러분 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때에 우리는 거듭나는 그리스도인, 성숙 하는 그리스도인,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 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의 그릇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탄생하는 하나 님이 인간이 되신 주님께서 다시 여러분들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그 은혜 를 성령으로 체험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준비할 것은 전혀 없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내 인생의 어두움 속에, 이 역사의 어두움 속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이 어두움 속에, 주님이 내 마음속에 탄생하게 하 기 위해서 내가 준비해야 될 것은 전혀 없겠습니까?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 하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겨울이 점점 더 추워지면 나무의 뿌리가 점점 더 땅 속 깊숙이 자란다고 합니다. 참 신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이 추운 겨울에도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또 한 가지는 내년에 봄이 되면 잎을 새롭게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 뿌 리를 깊이 깊이 겨울에 내린대요. 한 나무도 내년에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준비하 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 준비하여야 예수님을 내 마음에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열 처녀는 모두가 똑같 이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였고,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기름 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더디 와도 계속 불을 켤 수 있음으로 신랑과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렸지 만 신랑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준비하는 자와 준비하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실 수 있는 마음에 준비를 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마음의 그릇을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읽은 7절의 말씀처럼 예 수님이 오신 곳은 사관이 아니라 구유였다는 사실입니다. 사관이라는 곳은 일반 숙박업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에 아마 호적을 하러 온 많은 사람 들이 모이게 되었고, 모든 사관이 다 차버려서 -예수님의 일행- 마리아와 요 셉의 일행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 습니다.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님께서 헤롯의 궁전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전능의 하나님이 따뜻한 여관에도 오실 수가 없 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헤롯의 궁전은 인간의 권력이 춤을 추는 곳입니 다. 사람의 권력이 주인이 된 곳입니다. 사관은 어떠한 곳입니까? 그 당시의 사관의 모습이 요세프스의 역사서 속에 기록이 되어져 있는데 그 당시 일반 가격의 몇 배의 윗돈을 받고 그 여관에 투숙하게 해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곳이 어떠한 곳입니까? 인간의 영리가 통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리가 통하는 곳에서도 탄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오셨습니 다. 구유가 무엇입니까? 마구간에 있는 말 먹이통, 말 밥통이지요. 바로 이곳 에 주님이 탄생하셨고, 아기 예수님은 그곳에 누우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 니다. 이곳이 어떠한 곳입니까? 구유라고 하는 곳이 어떠한 곳입니까? 자랑 할 것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예수 님이 어떤 마음을 준비한 사람에게 탄생하시는가? 구유와 같은 마음을 준비 한 심령들에게 주님이 다시 탄생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구유 와 같은 마음이 어떠한 마음일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8가지의 복 을 말씀하시면서 제일 첫 번째 복이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가난한 마음, 이것이 구유와 같은 마음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이 어떠한 마음입니까? 깨끗 이 비워진 마음입니다. 철저하게 비워진 마음입니다. 조금도 그곳에 인위적 인 마음이 섞이지 않는 깨끗하게 비워진 마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사람의 권력이 주인이 되어져 있지 않습니까? 물질이 주인이 되어져 있지 않습니까? 지식이 주인이 되어져 있지 않습니 까? 자기가 주인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곳에는 주님이 오실 수가 없습니 다. 이 어두운 때에 예수님이 내 마음에 다시 탄생하셔서 주님과 나와 한 몸 이 되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되고, 생명의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면, 내 마 음의 그릇에 내가 주인이 되어진 모든 것을 깨끗이 비우는 회개의 심령이 될 때에 1999년에 성탄절에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작년이나 예년이나 똑같은 마음, 전혀 비워있지 않는 마 음, 회개하지 않는 마음, 자기의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마음속에는 주님 이 오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 해야 됩니다. 사관이 아닙니까? 내 마음이 헤롯의 궁전이 아닙니까? 그렇다 면 주님은 그곳에 오실 수가 없습니다. 깨끗이 비워진 회개하는 마음, 죄를 다 하나님 앞에 토설 하는 빈 마음, 그 회개한 마음의 그릇 속에 주님이 오 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 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가 예수님을 경배했습니까? 헤롯이 가서 경배했습 니까? 안나스와 가야바가 가서 경배했습니까? 빌라도가 가서 경배했습니까? 들에 있는 밤에 양을 치는 목자들,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 내 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는 목자들, 그들이 예수님께 찬양을 하고 경배했습니다. 동방박사들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면서 주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두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점점 더 가까워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의 그릇이 구유입 니까? 헤롯의 궁전입니까? 아니면 사관입니까? 어떤 시인은 이런 노래를 불 렀습니다. "아기 예수님 이 성탄절에 외마디 울음 섞어 간절히 부릅니다. 올 해의 성탄절에는 이 마음을 말구유로 꾸며 주옵소서. 굳어 병든 무릎을 꿇고 주름진 이마를 마른풀에 비비며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회개하는 마 음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시를 썼습니다. 1999년 성탄절에 여러분들 어떤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관 과 헤롯의 궁전과 같은 우리의 모든 마음을 비운 베들레헴 말구유처럼 빈 마음, 청결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만들어서 주님이 내 마음속에 다시 탄 생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되시는, 주님과 한 몸이 되시는 이 은혜를 체험하시 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실까요? 참으로 많은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 때 마다 인사하는 '샬롬'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참 평강을 주십니다. 모든 어두움이 다 물러가고, 모든 문제와 고통과 아픔들이 물러가고, 내 인생에 참 평강을 주 십니다. 평강은 곧 어떤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느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마굿간이 되고, 구유가 되어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샬롬의 은혜, 주님의 일을 대신 할 수 있는 주님이 쓰시는 귀한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뻐꾸기가 나이가 많아져서 슬피 울고 있었습 니다. 옆에 있던 비둘기가 물어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슬피 울고 있습니 까?" 그랬더니 이 뻐꾸기가 이러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많은 자식 들을 낳았는데 한 자식도 나에게 찾아와 효도하는 자식이 없습니다. 노년이 너무 외롭습니다." 그랬더니 비둘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곁에서 보 니까 한 평생 동안 자식을 기르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자식이 그렇 게 많습니까?" 그랬더니 이 뻐꾸기는 이러한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알을 낳을 때 마다 그 알을 다른 둥지에 넣었지요. 왜냐하면 화창한 봄날에 둥지 에서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때 비둘기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수고도 하지 않고 어떻게 효도를 바랍니까?"하는 얘기를 했다는 이 야기가 있습니다. 기다리기만 하지 준비도 하지 않고, 어떻게 열매를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어두 운 시대입니다. 또 여러분들 자신의 개인의 실존이 어두운 마음이지 않습니 까? 오늘 여러분 모두 빈 마음, 가난한 마음의 회개하는 심령의 구유가 되시 어서 예수님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탄생하시는 새 은혜를 체험하심으로 말미 암아 평강의 새로운 출발, 하나님의 일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출발을 할 수 있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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