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고전 15:51∼51-57)
  • 조회 수: 361, 2013.07.10 16:47:24
  • 2000년의 부활절 아침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사는가 하면 어린 아이 때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살게 됩니다. 청소년이 되면 꿈을 통해서 앞으로의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청년의 때는 기력으로 산다고 할 수 있고, 40대가 되면 열심히 일하는 정욕으로 삽니다. 그리고 50대가 되면 그 동안 쌓은 경륜과 지위나 권력과 재력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으로 살게 되는 것인가? 성도는 부활의 소망 때문에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동안에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표제로 특별 새벽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억울해도 죽어야 되고 손해를 보고도 죽어야 되고 모함을 당해도 죽어야 되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죽어야 됩니까? 그것은 부활의 약속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구약의 약속이 되기도 하고 우리 주님의 약속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내가 고난을 받고 죽은 뒤에 삼일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10장 1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예수님의 약속이고 또 우리에게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 죽음 앞에 좌절하거나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은 3번 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번은 페르시아 원정 갔을 때 고레스 왕의 묘비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인생이 아무리 위대하여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 개의 무덤밖에 남는 것이 없구나. 참으로 허무하다" 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인도를 정복하러 인더스 강까지 왔는데 부하 장병들이 다시 돌아가자고 하여 "저 인더스 강만 건너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라고 하면서 돌아 가다가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부하와 함께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그 넘어진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린 부하가 하도 무안하여 "왜 우십니까?" 라고 물으니 그가 하는 말이 "내가 네게 져서 원통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래 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는 "내가 지금은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마는 나도 죽으면 이렇게 무덤하나 표시만을 남겨놓고 사라질 존재가 아닌가? 생각하니 인생이 무심하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렉산더는 여러 가지 일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 남긴 말이 있는데 "내가 죽으면 내 두 손을 관 밖으로 내놓게 해달라" 라고 했답니다. 또 알렉산더가 죽을 때에 그는 천하를 지배했지마는 모기에 물려 학질에 걸려 열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 한국사람만큼 죽음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민족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호텔에 가면 4층이 없고 F층이라고 표시합니다. 병원에 가면 4층은 없고 F라고 표시하거나 아니면 3층에서 5층으로 건너뛰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라는 글자가 한문의 사와 소리가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죽으시고 부활을 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55절에 있습니다. 55절에서 57절까지 읽어봅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역사상 죽음을 이긴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에는 교회의 가장 큰 기쁨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죽음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15장 26절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왜 죽음을 원수라고 하였습니까? 죽음은 우리의 생명은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죽음은 단절시켜 버립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와 단절되게 합니다. 부모님과 형제와 부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죽음입니다. 친구와 이웃을 단절시킵니다. 그리고 모든 삶의 의미를 파괴시킵니다. 소망과 우리의 꿈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류의 숙적이면서 원수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썩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5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썩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본체가 흙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자연의 원소로 만들어 졌습니다. 죽음은 이 모든 것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썩는 것입니다. 이 썩는다는 것을 우리가 화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산소와 결합되어 산화되는 것입니다. 천천히 산화하면 냄새가 납니다. 이것이 썩는 것입니다. 급하게 산화하면 불이 붙어 타버리는 것입니다. 천천히 썩으나 급하게 불에 태우나 결국 남는 것은 뼈만 남는 것입니다. 무덤에 썩어서 장사지내는 것이나 화장하여 장사를 지내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허물어져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남편과 자녀가 아무리 좋아도 죽으면 관에 넣어서 빨리 무덤에 묻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고 여러분의 감성과 지성을 찔러서 파괴시킵니다. 쏘는 것의 본질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죄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이 모든 것은 죽음 즉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음부요 지옥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햇빛을 보고 삽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햇빛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햇빛을 못 보게 되고 캄캄한 곳으로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무덤은 어둠의 세계요. 그곳은 빛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죽음은 우리를 애통하게 만들고 비참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57절을 읽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어서 그 분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을 우리는 확신하셔야 됩니다. 이것을 좀 쉽게 표현하자면 물고기는 물에서 삽니다. 그러면 물고기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공기로 호흡을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공기에 있습니다. 공기가 끊어지면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성도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도 그 분 안에 있고 죽어도 그 분 안에 있습니다. 부활도 그 분 안에서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축복은 바로 부활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으면 신령한 부활, 영혼의 부활을 먼저 얻고 마지막 날 주님 오실 때에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입니다. 지금 설교하고 있는 저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이 육신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죽어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를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떠났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 가 만나리" 라고 찬송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님 오실 때에 우리가 할 그 부활은 주님이 부활한 것과 같은 부활입니다. 완전한 부활로 육과 영이 완전히 새로운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 제자들은 문을 꼭 잠근 상태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유령은 아닐까?"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유령은 살도 없고 뼈도 없다. 그러나 너희들은 본 바와 같이 만져 보아라. 뼈가 있고 살이 있다. 먹을 것도 가져오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령한 몸의 부활은 무엇과 같겠습니까? 저는 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생각하곤 합니다. 벌레 때는 기어다니다가 나비가 되면 날아다닙니다. 여러분, 마치 우리의 육신의 부활도 그와 같아서 신령한 몸의 부활 즉 금세 에서 내세로, 유한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축복인 것입니다.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으로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천국은 영원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곳에는 썩을 것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천국은 금, 은, 보석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곳에는 12대문이 있는데 문마다 한 진주요. 길도 수정같이 맑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재질로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라에 들어갈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영원히 죽지 아니할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지키시고 있는데 우리도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금방 엠마오의 마을에 나타나셨다가 금새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가, 금새 제자들에게 오실 수 있었고 제자들 앞에서 음식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과는 다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을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층천에 올라가서 보았을 때에 그 세계가 너무나 좋아서 세상의 말을 가지고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이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도 좋고 또 내가 이 땅에 남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좋으니 이 두 사이에 끼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문제를 초월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특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나이가 65세인 어떤 목사님이 폐암에 걸렸습니다. 수술할 때도 늦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쓴 글이 있는데 이 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처음 불치의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에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으니 나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다른 병 같으면 많이 아프겠지마는 폐암은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미리 사실을 사실대로 알았기 때문에 그 동안 못 다한 일들을 정리도 하고 못 만나본 친구도 찾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너무나 시간이 귀해서 한 순간도 아껴서 썼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전보다 더 정확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인생의 끝이 정말 영원한 끝이라면 두렵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보다 풍성한 삶의 시작일 뿐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의 모습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 혹시 안 계십니까? 내가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죽음 앞에서 소망을 가지고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부활 신앙의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로마에 갔을 때에 카타콤에 가 보았습니다. 옛날 초대교회시대에 지하 무덤을 파 놓고 살았던 성도들의 유적입니다. 그곳에 있는 통로들은 미로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통로 층마다 관을 넣어 놓았습니다. 이런 카타콤이 도처에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숨어서 예배를 드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바로 부활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맨 처음 발견할 당시에는 그곳에 들어가는 입구를 몰랐답니다. 후에 입구를 발견하여 관광객들을 위하여 입구를 만들어 놓았답니다. 또 신기한 것은 그곳은 지하인데도 밑으로 들어가도 어둡지를 않았습니다. 위에서 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은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답니다. 그 당시의 성도들이 부활의 신앙 때문에 목숨 걸고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이 믿음 가지고 주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기를 중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분들은 "부활이 무슨 소리냐? 그것은 거짓말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짓말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속담에 풍문은 칠 십일도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2000년 동안이나 유지될 수 있습니까?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허위로 선전했다면 제자중의 한 사람만 사실을 고백했어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교를 해 가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변화되었습니다. 도마는 "내가 만져 보지 않고는 나는 믿을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도마야, 나를 만져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라고 했습니다. 그 때 도마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도마는 순교자가 되었고 인도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인도의 남부 지역에 가면 도마 교회가 있습니다. 도마 교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예전에는 인도이었기 때문에서인지 파키스탄에도 도마교회가 참으로 많습니다. 파키스탄의 수도인 카라치에 있는 신학교도 성 도마 신학교입니다. 그러니까 도마가 옛날에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것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의 삶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겸손과 인내를 나의 생활에 반영하게 되어 집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우리가 배우고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다 도망간 제자들을 만나서 "너희들이 나를 배신하고 도망갔느냐?" 라고 말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했으며, 베드로를 보시고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내가 잘못해도 부활하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격려를 해주시는 분이신 줄을 우리가 믿고, 나도 다른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인 줄을 믿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감사가 있고 찬미의 인생으로 바뀝니다. 가치관이 전환이 있습니다. 내 중심의 삶이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바뀌어 집니다. 지금까지 사업하신 분들이 돈을 벌려고 사업을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업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출세를 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시(市)로부터 개인 택시를 허가 받았습니다. 그 분은 저를 초청해서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개인 택시를 하니까 성수주일을 하셔야지요?" 라고 물으니 그분이 하는 말이 "개인 택시에는 4개조 (가 조, 나 조, 다 조, 하 조) 가 있는데 하 조는 하나님 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기사들이 만든 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수주일을 하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도 하 조에 많이 들어와서 자리가 없어서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이 땅위에 부활의 주님 즉 예수를 믿는 기사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하 조를 만들고 또 그 분들이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고 고아원에서 봉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나를 헌신할 때까지는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기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기도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되지를 않습니다. 기도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 물질봉사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물질로 봉사할 때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 몸을 바칠 수 있는 헌신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국제 선교회에 김 ** 장로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상도 * * 교회의 장로님이시며 치과의사입니다. 이제 곧 선교사로서 출국하려 합니다. 연세가 50이 넘었습니다. 이 분이 선교관 구입한다고 2000만원 헌금하셨습니다.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위해서 열악한 환경의 선교사로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는 이렇게 변화됩니다. 마지막으로 산 소망을 소유하게 됩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제자였고 일본 동경대학 총장으로 지내셨던 "야나이하라 다다오" 라고 하는 박사가 한 말을 제가 요약해서 들려 드리겠습니다.

    "불신자들은 세상의 일 때문에 울고 낙심하지마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 잃고 자산 잃고 인생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면 전에 잃어 버렸던 것의 손실을 다 메우고도 남음이 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에 의해서 힘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생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혼자서 자녀들을 데리고 사는 경기도 성남의 어떤 여 집사님은 직업이 목욕탕에서 때 미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삶을 기쁘고 밝게 살고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성실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그 분을 보는 주위 사람들이 혼자 살면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감동을 받아서 교회를 나오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를 받기 전에는 우리 하나님은 제게서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기도를 하시면 서두에 꼭 "전지 전능하사 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라고 하여서 어릴 때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 아버지는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를 받고 나니까 그 하나님은 멀리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가 495장을 매우 좋아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이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마음속에 이루어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것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모시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영원한 부활의 약속의 소망을 바라보는 그것 때문에 내가 날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곧 부활의 영광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될 때에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살아도 행복하고 죽어도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죽음을 이긴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오늘 2000년의 부활 아침을 맞이하시고 이 부활의 약속과 소망 가운데서 승리하여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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