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21:01-14/ 주님 찾아 오신다
  • 조회 수: 356, 2013.10.29 07:10:02
  • 오늘은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사실 이 날이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는 이 땅 위에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날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헤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부활의 권능이 나타난 날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이 우주와 인간 역사를 다스리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주간에 되신 일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게 될 때 예수를 적대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반역자 유다의 협력을 얻어서 예수를 체포하였습니다. 공회에서는 불의한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빌라도를 위협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마음을 조작해서 말하자면 데모를 일으켜서 결국 빌라도로 하여금 본의는 아니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시게 될 때 원수들은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우리의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가슴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될 때에는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몰랐고,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보고 희롱을 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원수들은 개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우리가 이겼다’고 만족해하면서 잠을 잤을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불의가 이렇게 정의에게 승리하였었습니다. 선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악은 개가를 불렀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두움이 빛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과는 정반대로 환멸에 빠졌습니다.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상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다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현상이 오래 갈 수 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어두움의 세력이 오래 지배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두움을 헤치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신 예수님은 이처럼 상심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픔 가운데서 눈물 흘리며 한편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의 다시 사심을 친히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일은 2,000년 전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현상을 우리 생활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악의 검은 구름이 온통 뒤덮은 북한을 보세요! 보이는 교회를 없이 하고 예배당 건물이 있다 해도 창고로나 사용하는 이런 처지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의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 어두움을 헤치고 다시 일어나게 될 때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기사입니다. 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본래가 이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바다에 대하여는 퍽 익숙하였습니다. 3년 동안이나 손을 놓긴 했어도 그래도 익숙한 직업은 역시 고기잡이였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다른 여섯 사람이 함께 따라 나서 일곱명의 제자는 갈릴리 바다로 다시 돌아와 3년 동안이나 놓았던 그물을 다시 잡았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 잡노라 무던히 애써 보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성경학자 풀루머는 “처음의 실패는 그리스도의 어부들의 공통 운명이다. 실패를 다시 성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때마다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맡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하는 일이 꼭 그렇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패 중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의 방향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제자들은 어떤 친절한 어른이 언덕에서 바다에 밀려오는 고기 떼를 보고 가르쳐 주는 줄로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의식중에 주님께 순종하였더니 큰 고기 떼를 잡았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신령한 어부인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영혼을 얻는 유일의 비결임을 배우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 찾아오셨는데 누가 먼저 주님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요한 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다른 제자들은 나중에 하나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눈이 가장 밝은 사람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먼저 찾아냅니다. 주님이 떠난 것도 제일 먼저 알고 돌아오셔도 제일 먼저 보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많이 배운 것이 눈에 먼지처럼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사랑 가운데서 장성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인류의 조상이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했다면 낙원 한 가운데 살며 생명의 나무 열매만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예수를 사랑하는 그 제자가‘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비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물으셨다면 자기 중심으로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이가 부활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먼저 보실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찾게 되는 법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주님 찾아오셨는데 언제 주님을 보았습니까? 그물에 고기가 많이 잡힌 순간 요한이 ‘저 분이 주님이십니다’고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여기에 계신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결과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온 교우가 시간을 따라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는 일입니까? 여러분이 동원 지시를 받고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이곳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작년 5월에 빌리 그레함 대전도 대회에 하루에 100만의 신도가 모여 예배한 것이 우연한 일입니까? 이런 일을 볼 때 주님이 찾아오신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 찾아오셨는데, 주님을 본 사람이 비밀을 지켰습니까? 아닙니다. 그와 배에 함께 있는 사람에게 귀속말로 말했습니다. “저분이 주님이십니다” 자, 여러분 가운데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시는 분이 있다면 가만히 자기만 알고 지날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 사실을 말할 것입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라도 이 기쁜 소식을 말해서 기쁨을 나눠야 겠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 형님! 저분이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그러면 이 사실을 가장 가까운 분에게 말씀하세요. 말씀하세요. 한 번만이라도 말씀하세요. “주님이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의 못 자국난 손을 보세요. 창자국난 옆구리를 보세요. 똑똑히 보세요. 그리고 같이 기뻐합시다. 여러분!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우리 교회에 주님이 찾아 오셨다고 말씀하세요.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곧 알게 될 것이고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교회학교 유 초 중 고등학생들은 선생님의 인도를 따라 서울 시내 전역에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가가 호호 방문하러 나아갔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말 못해도 가까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라도 말씀하세요. 베드로는 요한의 말을 듣자마자 벗었던 옷을 주어 입고 물에 뛰어내려 헤엄쳐 주님께 달려 갔습니다.

    베드로는 열심있는 사람들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어떤 이의 전도를 받고 그분보다 더 열심히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봅니다. 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베드로와 같은 열심의 불을 붙혀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요한과 같이 주님을 밝히 보고 이웃에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구름 떼처럼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활 주일은 주님의 다시 사심을 이웃에게 알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찾아오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 새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밤을 새워 고기 잡노라고 애쓴 제자들, 그것도 고기를 많이 잡았으면 재미가 나서 좀 힘도 덜 들겠는데 아무리 애써도 고기 한 마리 못 잡는 제자들은 몹시도 피곤하고 배도 고팠을 것입니다. 주님 주신 조반을 먹고 배도 불렀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던 우리가 영적으로 피곤하고 배고파서 하나님의 집에 나왔습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강단의 목사를 바라보면 실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위해 죽으시고, 우리 위해 다시 사신 그리고 지금 찾아오신 주님을 바라볼 때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고 신령한 양식으로 배부름을 얻고 새 힘을 얻어 힘차게 이 집을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오후 1시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떡과 포도즙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어떻게? 주님이 주시는 살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생각하며 주님을 기념할 때 의미가 새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 속에 들어오시기를 구하세요.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식사만 한 것이 아닙니다.

    2. 사랑의 다짐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어떤 사람이 유명한 설교가를 찾아가서 ‘설교를 잘 알아 듣기 쉽고 힘이 있게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유명한 노설교가는 대답하기를 첫째 요소는 전개(delivery)요, 둘째도 전개요, 세째도 전개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참된 기독교의 요소가 무엇일까? 첫째 요소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요소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세째 요소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믿음에 튼튼히 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을 사랑하는데 깊이 뿌리를 박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경건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 중심에서부터 주님을 사랑할 때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계명도 무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마음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찾아 오셔서 제자들에게 새 힘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을 시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3. 위대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오늘 부활하신 몸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으므로 새 힘을 얻었느냐? 너 자신을 시험하여 보았느냐?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냐? 그러면 이젠 네 신들메를 매고 내 몸인 교회를 봉사하기 위하여 준비하라.” “네게 있는 시간, 지식과 기술, 재물로 봉사하라.”
    그 손은 우리 위하여 못에 박혔습니다. 그 발은 우리 위해 못에 뚫렸습니다. 그 머리는 우리를 위하여 가시로 관을 엮어 쓰시었습니다. 가슴은 우리 때문에 창에 찔리셨고 물과 피를 몽땅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해 다시 사셨습니다. 지금 우리 위해 여기 찾아오셨습니다. 새 힘을 주시기 위해, 사랑을 다짐하기 위해, 새 사명 맡겨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드립시다. 
    “지금부터 제가 사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주님이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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