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20:19-29/ 부활하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
  • 조회 수: 805, 2013.10.29 07:09:14
  • “그 날 곧 그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인 집에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오셔서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두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를 뵙고 기뻐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여 주면 사하여질 것이요, 사하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 저녁에 있은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달려가 무덤 속에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과 삼베가 한 구석에 따로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던대로 부활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돌아갔으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해 무덤 밖에서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달려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난 일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 저녁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 한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 마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으라”

    오늘 아침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눈 다락방에 계속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독기 어린 간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는데 넘겨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다음 차례에 자기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 것을 예감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두려운 마음으로 계단에 오르는 발자국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산헤드린의 척사가 올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 앉아 있는 제자들 가운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물론 이 말씀은 우리 동양 사람들이 매일 주고받는 인사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흔히 만나면 “평안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만날 때, 헤어질 때 같은 말을 씁니다. 샬롬!(Shalom) “평안하십니까? 평안하십시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주신 이 말씀은 단순히 인사만은 아닙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한 이 말씀 가운데는 좀 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사로 잡혀 있는 제자들이 이런 공포 속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는 말씀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시기를 바란다”는 그런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네 번 나타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시몬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예수님 스스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을 빌었습니다.

    사실 온 세계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입니다. 또 가장 갈급히 찾고 있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평화가 어디서 옵니까? 
    예수님 나실 때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노래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 14:27)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합니다. 참된 평안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동안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도 누가 높으냐 하는 것 때문에 서로가 시기하고 속으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의 첫 번 말씀이 “평안”을 빌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 한국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인 한국 교회에 나타나서 제일 먼저 주실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왜? 우리 한국 교회에 참 평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를 더 잘 믿느냐? 누가 정통이냐? 누가 보수냐? 누가 시대에 맞게 예수를 믿느냐?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다투었습니까? 남이 좀 잘 되는 것 같으면 얼마나 시기하였습니까? 어떤 미국 사람이 한국에 다녀가서 하는 말이 “한국 교회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더군요” 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하시고 두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의미 있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들이 평화하지 못하므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너희는 십자가로 평화하라”는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평화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평화하게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의 두 손의 못 자국을, 옆구리의 창자국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의 평안을 누리십시다. 가정이 평화할 때 그 가정이 행복하고 교회가 평안할 때 교회가 부흥합니다.
    2. 내가 너희를 보낸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무엇하러 보내셨습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섬김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섬기는 종교입니다.

    소금처럼 녹아지고 빛 되기 위해 내 몸을 불 사르는 종교입니다. 내가 살고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몸으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만이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찬송가에도 있듯이,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한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이웃을 위한 가장 큰 봉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떡과 생선으로 이적을 행해서 백성의 배나 부르게 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또한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라고 보내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전에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애굽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라는 특별한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사양했습니다. “주여! 저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여러분! 그 다음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때 스스로 하시지 아니하시고 그의 택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런데 보내실 때에는 그냥 보내시지 아니하시고 분명한 약속 한 가지를 하십니다. 무슨 약속이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 가운데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면서 그 다음 주신 말씀도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우리만 보내시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비겁한 영이 아니라 권능과 사랑과 절제의 영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분을 잘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이 내게 맡겨진 것을 그날까지 지켜주실 수 있으리라는 것도 확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시간도 우리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사망의 권세 밑에 있는 오천만 겨레를 위하여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두려워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을 받으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을 들으니 자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흙으로 만든 사람 그것이 물체이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기가 들어갈 때 사람이 되었습니다. 산 영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37장에 보아도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이 죽음의 골짜기를 보았습니다. 마른 뼈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에게 명하라는 말씀을 에스겔이 듣고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가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때 생기가 그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살아서 일어나 서는데 지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마치 죽고 말라빠진 뼈가 살아서 군대를 이루는 것과도 같습니다. 옛날 하나님의 사람 스가랴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이 사명을 다하려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도 없을 뿐더러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일 부활절에 세례받은 분들이 물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교회가 교회로써의 맡겨진 
    과업을 바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부흥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이 많이 있겠지만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이 제일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무엇이나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어디에서 옵니까?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평안이 어디서 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이 충만한 때에 맺는 열매입니다.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이웃의 허물을 사하여 줄 때입니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내가 너희를 보낸다(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성령을 받으라(그래서 새로워지고 능력있는 종이 되라).

    오늘 아침 우리 하나 하나에게 이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 Www.blackbenhee.com

    2021.05.26 17:11

    BLACKBENHEE
    부활절 설교자료 - 요한복음 20:19-29/ 부활하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47 admin 488 2013.10.29
146 admin 355 2013.10.29
admin 805 2013.10.29
144 admin 490 2013.09.28
143 admin 290 2013.09.25
142 admin 524 2013.09.09
141 admin 339 2013.07.10
140 admin 364 2013.07.10
139 admin 360 2013.07.10
138 admin 675 2013.07.10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