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태신자를 도울 것인가?(골 1:21-23)
  • 조회 수: 127, 2013.07.25 06:51:03
  •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지난주일 우리는 같은 성경말씀으로 "누구를 태신자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동일한 본문으로 "어떻게 태신자를 도울 것인가?"를 듣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 입각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저는 여러분에게 태신자를 정하셨는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달리 말해서 전도대상자를 파악하셨느냐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나의 태신자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이 떠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여러분의 태신자로 정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은 가장 인내심이 요구되는 태신자입니다. 혹 친척이나 친구를 태신자로 정한 분은 없습니까? 변함없는 사랑이 요구되는 대상입니다. 가장 확실한 태신자는 옆집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을 바로 옆집에 살게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한 날 우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을 바로 옆집에 두고 매 주일 혼자만 교회에 다녔느냐"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제가 전도사시절에 한 곳에 기도소가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큰 강을 건너서 5킬로쯤 들어가서 예배를 드린적이 있었습니다. 큰 강을 건너자마자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늘 그 가게 앞을 지나가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해야할 곳은 5킬로를 더 들어가야하기 때문입니다. 훗날에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때에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할말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은 그나마 주님을 알게 되어서 그렇지 나중에 천국에서 울부짖는 영혼들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내가 당신의 앞집에 살았는데 왜 그렇게 나에게 무관심했느냐"고 소리지를 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태신자는 최근에 여러분의 동네에 이사온 사람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중요한 삶의 어떤 계기가 있을 때에 복음에 대해서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습니다. 이사를 했다든지, 혹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었다든지, 하다못해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게 되었다든지, 새 해를 맞이했다든지 이런 특별한 계기는 사람들이 무상한 삶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네가게 주인처럼 조건부 태신자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울산교회 가까이에 있는 가게를 두고 성도들이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끈기 있게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주는데 그 가게 주인은 1년에 딱 한 번만 나와주고 맙니다. 그래도 계속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발행된 금세기 마지막 총력전도 주일신문에 글을 썼습니다만 동일한 사실을 말로 해야할 필요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글을 읽고 잘 이해하고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습니다만 아예 글로 된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하는 분도 사실 있습니다. 무슨 말이든지 귀로 들어야만 움직여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계십니다. 오늘까지 여러분은 태신자 카드를 작성해서 제출하셨습니까? 작성하지 않으면 출발은 좋았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신자 카드를 기록하셔서 절반은 제출하시고 나머지 보관용은 성경책 표지 속에 붙이고 매일 그 이름을 불러 기도하십시오. 이번 주간부터 구역모임 시간에도 반드시 태신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태신자를 위한 여러분의 마음자세는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늘의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은 그 새생명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 일에 여러분들은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일을 그리고 보람있는 일을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물론 가벼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임산부가 해산을 앞두고 한가한 마음으로 지내겠습니까?. 어쩌면 목숨을 걸고 생명을 잉태하는 위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여러분들도 마음의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요일날 일본에 같이 가셨던 분들이 2,000장의 전도지를 건네느라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평생에 이렇게 많이 걷기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말이 통해야 전도를 할텐데…"라고 하면서 복산동에 돌아가면 잘 할 수 있는 한국말로 전도를 많이해야 되겠다는 각오로 돌아왔습니다. 2,000장의 전도지를 돌리면서 부담이 되었던 마음이 확 트였답니다. 한 번은 극복을 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태신자 카드를 제출하므로 충성하였다는 표시로 "예"라고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태신자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도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실패하지 아니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그들의 영혼을 맡기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간에 여러분이 하실 중요한 일은 태신자의 마음이 복음을 향해 열릴 접촉점을 만드는 일입니다. 태신자의 집을 가볍게 방문하거나 한 번쯤 전화로 안부를 물어 보십시오. 방문하는 경우 이웃에 살면서도 그 동안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문 앞에서 정중하게 말씀드리십시오. 

    가능하면 안으로 들어가서 부담 없는 대화를 시도하십시오. 그러나 상냥한 태도로 만나시고 시간을 오래 끌지는 마십시오. 처음부터 복음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일본의 박영자 선교사님께서 방송국 P.D.를 하시는 분을 처음에 호감을 가지고 만났는데 가자마자 복음의 전율이 가득해서 매 주 만나서 성경을 읽어 주고 하다보니 그 사람과 친구관계에서 끊어지고 말았답니다. 뒤에 미안하다고 몇 차례 편지를 했지만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썩 내밀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냥 이웃집을 찾기가 쑥스러우시면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전할 수 있는 선물을 준비하면 쉬워집니다. 물론 부담스럽지 않아야 하고 받는 사람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쑥국을 끓여서 한 그릇을 갖다 줄 수도 있습니다. 부추전을 주면 말하지 않아도 '나를 좋아해서 주는구나'라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어 있습니다. 선물을 주는 것은 사랑한다는 언어가 없어도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물은 이웃집을 자연스럽게 방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자연스런 태도로 대화하십시오. 공동 관심사를 나누고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순간마다 지혜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선물은 서로의 관계를 친밀하게 발전시켜 줍니다. 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방문할 상대방에 따라서 어떤 선물이 좋을지 구역에서 서로 의논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것 하나가 봄 향기 배인 먹거리일 것입니다. 가장 자신 있는 품목으로 음식을 마련해서 이번 주부터 태신자의 가정에 접근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자 그러면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태신자에게 접근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그들을 영적으로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태신자를 도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지혜를 찾아봅시다. 

    맨 먼저 우리는 태신자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므로 도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되면 과거의 삶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전에"와 대조적인 "이제"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새로운 삶이 도래한 것을 알리는 말입니다. 

    여러분, 22절 초두의 "이제는"이라는 말속에 감격이 담겨 있습니다. 버림받고 소외된 상황을 극복한 감격스런 상봉과 화목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암울한 상황을 기억하신다면 화목으로 펼쳐진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경이를 감탄할 것입니다. 21절이 그 때의 형편을 기술한 것은 22절이 말하는 "이제"가 주는 감격스런 전환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22절의 하나님의 놀라운 행동을 돋보이게 하는 서론으로서 21절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전에"의 기억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제"의 새로운 감격을 경험하셨습니까? 3년 동안에 하지 않던 일중의 하나를 요즈음의 설교 시작에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오신 구도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와서 앉아 있다고 해서 다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이전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이전에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어떻게 산다는 것을 구별해서 말할 수 있어야 이제 신앙인의 자리에 들어 온 것입니다. 

    확실하게 여러분의 삶에 "전에"와 "이제"의 구분이 되고 있습니까? 왜 삶에는 "이전"과"이후"의 구별이 있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놀라운 것은 이 선을 넘어 본 사람만이 이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태신앙이고, 신앙의 가정에서 계속 자라서 언제나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심각한 사람입니다. "우리 부모는 비록 신앙은 없었어도 어릴 때부터 착하고 살아라고 해서 나는 꽤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해 왔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며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괜찮다고 느끼시는 분은 아직도 자기의 실상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빛 속에서 자기 모습을 보게되면 "내가 지금껏 이러한 삶을 살았구나!"라며 정말 안타깝게 생각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선을 넘어설 때에 비로소 "전에"의 삶과 "이제"의 삶에 대해서 구별이 가능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이같은 대조적인 삶의 경력을 가진 자입니다. 이천 년 전 골로새 성도들만 아니라 20세기 말 울산에 살고 있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 되면 그는 무엇보다도 본문이 말하는 "전에"와 "이제는"이라는 대조적인 삶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이전의 삶과 하나님과 화목한 지금의 삶이 완전히 다른 것을 경험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그 때와 가까이 그 앞에 서게 된 지금이 어떻게 서로 판이한지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과 우리와 같은 놀라운 새로운 삶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보십시오. 신약 성경 곳곳에 "전에"와 "이제"를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 누구보다 자주 이 말을 사용해서 새로운 삶의 감격을 묘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전의 우리와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으로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사실을 대조합니다.(엡 2:1-3). 어제 아침에는 지난번에 우리교회에 오신 요꼬다 목사님의 교회에서 아침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식사를 하고나서 자연스럽게 소개를 하다보니 우리 권사님 한 분이 사모님께서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저는 거기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사모님은 위의 대(代)가 모두 주지 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것은 하나의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은 무섭고 잘못하면 벌하는 신이었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그 메시지에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하니까 세상이 다 그 사실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끔찍히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부지기수로 많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자라며 어른이 되어서 죽기까지 한 번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하고 혹 들어도 "정말 그럴까?"라고 의심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1-13). 

    바울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베드로를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10, 25; 히 12:25 참조). 

    여러분의 삶에 "전에"와 "이제"를 알고 계십니까? 자신의 삶에 "전에"와 "이제"가 구별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물어 보십시오. 빛 가운데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사람은 "그 때" 죄악된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때"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요, 그 잘못을 씻어 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고 나오는 것이 세례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죄악된 것으로 고백합니다. 21절의 골로새 성도들의 이전 삶의 기술이 바로 자기 과거의 기술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자신의 것으로 읽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이전의 골로새 성도들의 삶의 기술은 바로 자신의 옛 자화상이요 이력서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그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설득할 필요가 없고 다만 확인만 필요합니다. 그런 자에게는 그 영적 진리를 설명하는 시간이 지루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결코 따분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 관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 진리가 선포되는 현장에서 딴 생각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영적으로 중병에 걸려 있지 않다고 하면 주일마다 그렇게 반응을 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이야기를 설교자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인들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있던 우리는 어떻게 이제 그 생명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신자에게 이 성경의 진리를 전함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의 육체" - 누구의 육체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의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화목은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이 그 창조된 본래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창조의 주이시고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몸의 죽음만이 가능케 합니다. 우리 인간이 옛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믿어야 합니다. 

    "육체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주의하십시오. -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의 육체의 몸의 죽음"이란 좀 어색한 그러면서도 장중한 표현으로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천사 같은 영적 존재를 통한 화목을 주장했지만 사도 바울은 "육체의 죽음"이란 표현을 통해서 화목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고 그 육신의 죽음을 감당하신 분의 사역임을 강조합니다. 

    당시 골로새에 침투한 잘못된 가르침을 의식하고 "그의 육체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수된 관계에서 화목된 관계로 바뀌는 것은 여러분의 주관적 경험이 기초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역사적 그리스도의 죽음이 기초입니다. 화목의 터전은 "그의 육체의 죽음"이라는 결정적 사건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믿습니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한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죄 값으로 "그의 육체의 죽음"이 지불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악을 위해 쏟아졌습니다. 

    당시의 잘못된 가르침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삶을 부인했습니다. 또한 그의 죽음을 실제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아니 했습니다. 이단의 특징은 다른 모습으로 반복 출현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소위 역사적 예수보다 신앙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죽음보다 죽음이 나타내 보이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적 복음은 "그의 육체의 죽음"을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신 분이 피를 흘리심으로 화목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습니까? 더러운 죄 깨끗케 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합니까?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습니까? 마음속의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습니까?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십시오(찬 193장). 

    자,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화목케 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22절이 새롭게 강조하는 진리는 화목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가 태신자를 도우려고 하는 목표입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시고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2하). 

    화목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세우는데 있습니다. 여기 세운다는 말은 법정에 세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성도는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죄인으로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섭니다. 기소 당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누가 정죄 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는 자시니라"(롬 8:34).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날의 환희를 내다보며 살아갑니까? 영광스럽게 서게 될 그 순간의 감격을 지금 맛보고 계십니까? 원수된 것은 십자가로 소멸되었습니다. 이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이미 허락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더 이상 외인도 손도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동일한 하늘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특권을 가진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맛보는 은혜는 다만 맛 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가게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엿장수가 큰가위를 흔들면서 들어오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아이들만 모여든다고 해서 엿장수가 장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잘라서 입에 넣어주면 아이들이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집에있는 고무신이나 멀쩡한 양동이를 가지고 나와서 엿과 바꾸어 먹는 것입니다. 그게 맛뵈기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여기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될 것의 다만 맛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날에는 모든 죄에서부터 자유 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오랫동안 열망해온 바대로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소원만큼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해서 기도할 때 지난 한 주간의 죄고백을 하게됩니다. 그 때는 우리의 소원 이상으로 영광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이 영광스런 소망을 우리는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을 태신자로 삼아 그들도 한날 우리와 함께 이 소망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쓴 빌립보서를 보면 이러한 바울의 소원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 날까지 이르고"(빌 1:10). 또한 같은 옥중서신 에베소서에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와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공개합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 역시 동일한 소원을 성도를 향해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동일한 소원을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사도 요한은 어떻게 말합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은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사도 요한의 계시록 표현을 빌면 그 영광스런 모습은 신랑을 위해서 예비한 신부의 아름다움과 같을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유다 역시 동일한 축복을 선포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유 24-25). 하나님 그 분이 능히 여러분을 보호할 것이고 거침이 없게 하실 것이고 여러분을 그 영광 앞에 흠이없이 기쁨 가운데 서게 하실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날은 사도들의 소원이 활짝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 날은 또한 선지자가 내다보던 영광이 충만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사랑의 표현은 기뻐 외치는 것도 표현이지만 잠잠히 사랑하심에도 표현입니다. 아무 말하지 않고 사랑이 담긴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랑한다는 말이 됩니다. 

    태신자를 향한 궁극적 목표는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화목으로 오늘 이루어진 변화는 그 날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은 그 날 그 백성을 합당한 자로 준비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세우는 그 일이 여러분과 저의 꿈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28절).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 받은 자는 그 날 그리스도 안에서 무죄선언이 선고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화목은 다만 이전 관계의 회복 정도가 아닙니다. 멀어진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며 더 내밀한 교제를 누리는 놀랍고 풍성하며 영광스러운 관계를 나누게될 것입니다. 

    지금 그의 육체의 죽음을 믿는 자는 그 날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롬 5:25).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고린도 성도 뿐 아니라 동일한 약속은 그 때 골로새 성도를 위한 약속이요 오늘 울산교회 성도들을 위한 약속입니다.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가슴에 간직한 태신자를 위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와 대조적인 현재 삶에 기약된 복된 미래의 소망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소망을 선한 일에 여러분의 남은 삶을 쓰십시오. 태신자를 품으셔서 그들에게 새 삶을 살게해 주십시오. 새로운 비젼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선한 일에 열심있는 친백성으로 지금 부르셨습니다. 선한 일에 열심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동안 여러분이 마음에 정한 태신자에게 가까이 접근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새 삶과 소망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분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되는 그 순간에 여러분 홀로 서게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말미암아서 영광의 주 앞에 서게될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서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함께 찬송하는 그 영광의 날이 우리에게 속히 올 것입니다.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모두 버리십시오. 복스러운 소망,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날을 사모하십시오" 

    복음의 터 위에 굳건히 서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킨 들은 바 복음의 말씀에 굳건히 서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케 하셨습니다."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함께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복된 한 주간 되십시오. 주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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