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영혼을 찾읍시다 (눅15:1-32)
  • 조회 수: 70, 2013.08.28 17:07:40
  • 영혼을 사랑하는 떠거운 가슴을 가집시다.

    본 비유는 복음중에 복음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의미에서 성경 전체가 복음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중심에 오신 메시야 사건을 통해 볼 때 구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신약을 복음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신약중에서도 예수님의 행하신 구원사역을 기록한 사복음서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하면서 주로 사용한 것이 비유입니다. 비유의 핵심사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많은 비유중에서 특별히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를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인가? 주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면서 구원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자들은 대부분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로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사회의 불리한 여건과 도덕적인 열등의식이 그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을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배부른 자들입니다. 오만과 자존심으로 가득찬 그들은 스스로 거룩하게 생각하여 세리와 창기와는 구별하여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회개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멸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도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려면 죄인들과 멀리하고 의로운 자신들과 가까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누가복음 15:1-2)고 했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읍시다. 본문에 잃은 것을 찾으시는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어찌보면 동일한 비유를 세번이나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심에는 그속에 감추어진 진리가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속에 서로 다른 진리를 계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첫째: 선택받은 영혼은 꼭 찾아야 합니다.

    선택교리는 언약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에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백마리의 양을 가진 목자입니다. 둘째는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입니다. 셋째는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백이나 열이나 둘은 잃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주인의 정한 수 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작정한 예정된 본수입니다. 이 원리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4-5)라고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창세 전에 작정된 수라고 했습니다. 상황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조건이라면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불변하는 수요, 구원받기로 작정된 정수입니다(요한계시록 21:27).

    당신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양에게 가장 안전한 처소는 목자의 우리 안 입니다. 목자의 우리를 벗어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게 되고 맹수와 도적에게 삼킴을 당합니다. 드라크마는 만인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보물인 바로 돈입니다. 드라크마의 가치는 여주인의 줌치에 있을 때입니다. 주인의 장중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드라크마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주인의 장중에서 떨어진 드라크마는 처마 밑에서 녹슬게 되고 화폐의 가치로서는 기능이 정지되고 맙니다. 아들의 행복은 아버지와 더불어 살 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여 나간 자식은 아들이 아니라 탕자입니다. 아버지 집을 멀리하면 자연히 허랑하고 방탕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주려서 죽는 돼지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기독교는 언약에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계약하셨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믿어지는 자들은 하나님의 예정된 반열에 들어선 작정된 구원의 본수 입니다. 인생의 참된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 품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 타락했어도 회개하면 구원받습니다.

    타락(墮落)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이 타락의 기원입니다. 타락할 때 나타나는 몇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첫째가 계약의 파괴입니다. 불순종으로 타나는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17, 3:12). 둘째는 두려움인 공포입니다. 죄를 지으면 심령에 평안이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살아짐과 동시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 옵니다(창세기 3:10). 셋째는 멀리 피하여 숨습니다. 불안하니까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하여 멀리 도망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 가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시편 139편). 마지막으로 위장전술을 합니다. 나무 사이에 숨어서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워 볼려고 합니다(창세기 3:7).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택한 백성이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타락의 근본 원인은 정욕으로 인한 죄 때문입니다. 그것이 양같이 무지하고 눈이 멀어서 딴 길로 갔던지 아니면 드라크마 같이 무감각하게 떨어졌든지 아니면 탕자와 같이 의도적이며 계획적으로 아비집을 떠났든지 어떠한 모습이나 형편이든지 주인의 장중을 벗어난 것은 타락이요 불행입니다. 그 불행을 치료하는 비결이 주인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넘어져서도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잠언 24:16)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1:8-10)고 했습니다. 범죄한 인생에게 회개는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목욕한 자라도 발을 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요한복음 13:10)

    영혼의 가치는 절대적인 무한가치입니다. 잃은 것에 대한 주인의 애정은 지극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양은 백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드라크마는 열중에 하나를 잃었습니다. 아들은 둘중에 장자가 아닌 차자를 잃었습니다. 백중에 하나를 잃은 것이나 열중에 하나를 잃은 것이나 둘중에 하나를 잃은 것에 대하여 주인은 수적인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의 가치는 수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은 들에 있는 아흔 아홉이나 주머니에 든 아홉이나 집안에 있는 장자를 생각지 않고 잃은 하나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찾아내는 궁극적인 구원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30)고 했습니다.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측량이 불가능한 무한가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 하나를 건지면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셋째: 되찾은 감격은 찬치하는 기쁨입니다.

    여기에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렇게 부패하게 만든 것이 황금입니다. 황금만능주의로 착각하며 살아온 결과가 오늘의 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6)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고 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비유중에서는 황금만능의 의식구조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제성이 없는 잔치입니다.

    찬치에 나타난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 것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하여 온 집에 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찾는 다는 것은 오늘날의 경제원리로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고 아들의 신분까지 망각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기만 해도 말없이 잘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새 옷을 입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푸는 것은 너무도 격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무엇이 주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했는가? 회개을 통해 얻는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7, 10)고 했습니다.

    당신은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양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나 은전에 대한 여주인의 관심이나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무지해서 속은 것도 아닙니다. 무능해서 당한 것도 아닙니다. 상황 때문에 얼쩔 수 없이 희생양이 된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자원해서 지신 것이요, 기쁨으로 지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무거운 고난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었는가? 단 한가지 사실입니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을 때 세상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당신의 죄값은 주님의 보혈로 이미 처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잃어버린 영혼을 찾읍시다. 선택받은 영혼은 꼭 찾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종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받습니다. 타락해서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잊어버린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먼저 부름받은 우리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찾아 나서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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