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눅 15:11~24)
  • 조회 수: 131, 2013.11.09 20:50:56
  •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탕자의 비유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 번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전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매력이고 성경의 깊이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나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원리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열 개의 은전 가운데 잃어버린 한 개의 은전을 찾고 있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잃은 은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왜 또 하나의 비유를 첨부해서 말씀하셨을까요? 우리가 이 비유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하나 하나의 비유마다 공통적인 비유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비유가 첨가되면서 보다 중요한 강조점을 단계적으로 첨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오늘 생각하게 되는 이 비유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목자는 잃은 양을 찾습니다. 여인은 잃어버린 은전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잃어 버린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똑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죄인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세 번째 비유는 아들 편에서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모든 것을 낭비했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졌던 탕자, 이 사람을 보세요. 한 마디로 이 사람은 희망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첫 부분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창기들을 지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버림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희망 없던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조차 불리한 일로 여겼던 것이 그 당시 사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을 상대하시고 대화를 나누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회가 내버리고 그 당시의 종교인들이 희망이 없다고, 새로운 가능성이 없다고 포기해 버린 이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그 아무개, 교회에 나가면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사람을 위해서 교회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 사람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변화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에 드나들면서도 그 삶의 모습이나 인격의 모습, 그리고 그 신앙의 모습이 변화나 발전이나 성장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을 교회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는 메시지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날 반드시 그 사람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 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리에, 아니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리에, 또한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하는 자리에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슬퍼하시면서도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상대하고 계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그것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저렇게 형편 없는 사람이 교회는 왜 다니는가?”라고 의심스러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색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그를 기다리면서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의 비유에서 특히 다른 비유와 다르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실 때 그 죄인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죄인인 인간이 이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며 돌아와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회개는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he came to himself’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또한 자기 자신을 떠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지워 버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회개하도록 눈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회개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맹목성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 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때 맨 처음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열린 눈을 자기고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탕자가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먼저 흉년을 만나 궁핍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주머니가 흥청거릴 때는 함께 몰려다니며 “오빠, 오빠”하는 여자도 많았고 “형, 형”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해서 모든 것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의 돈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오랜만에 이 모든 것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내 주머니에는 돈이 들어 있습니다. 내 머리 속에는 많은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실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돈이 없었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인데, 권력의 자리에 앉지 않았던들 그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을 터인데 돈을 가지고 있고 권력의 자리에 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인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내게 무엇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 없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탕자에게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기 위해서 또 하나의 상황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고독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 틈에 묻혀 살아갈 때, 내 주변에 같이 웃어 줄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 눈을 감고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내 주머니가 비면서 내 주변에서 “오빠, 오빠”하며 따르던 여자들, “형, 형”하면서 같이하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함께 술잔을 들어줄 친구들이 이제는 더 나타나지 않습니다. 

    몹시 고독하던 어느 석양에 나는 처음으로 내 자신의 벌거벗은 숨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묻기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고독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유익한 교사입니까? 
    하나님은 아버지 떠난 아들을 고독한 환경에 몰아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독한 시간을 통해서 정면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가장 중요한 질문을 묻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탕자의 회개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 유일의 해결책 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탕자는 자신이 형편없는 모습을 본 순간 오랜만에 아버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탕자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현재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 순간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습니다.
    그전에 이 탕자는 오랫동안 언제나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구세주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아니 자기 주변에서 자기를 추켜주는 친구들이 자기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이 사라진 판국에서 그는 이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최후 소망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시편의 말씀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 위대한 메시지가 중요한 메시지로 그를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탕자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생각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탕자의 머리 속에 스치고 지나갔던 그 많은 생각들 가운데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것은 생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탕자가 계속해서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안 믿어야 하는가를 10년이 넘도록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탕자는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출발입니다.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그러나 탕자는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 생각을 가지고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0절을 보세요. “이에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서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해야지’라고 생각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가지만 예배가 끝나자마자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옛날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생각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들으세요. 생각만으로는 우리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탕자가 어떻게 회개했습니까? 이제 그는 생각을 결단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비참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 돌아가는 그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 먼저 돼지우리에 대한 미련을 청산했습니다. 그에게는 전에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도 그것을 즐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쥐엄 열매를 입에 넣는데 쓴맛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 인정을 끊게 됩니다. 이전에 내가 즐기던 이 모든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던 그 끈끈한 정을 끊는 결단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돼지우리를 걷어차고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교회라는 종교적 분위기에서 안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향한 끈끈한 인정을 끊지 못하고 아버지 앞에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아버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기의 삶의 상태를 구차하게 변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내가 그동안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한 변명이 아닙니다. 변명은 절대로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많은 자복을 하지만 그 기도하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옛날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회개를 변명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자기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문제를 도덕적인 실수라고,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뭐라고 고백했어요? “하늘과 아버지께 내가 죄를 얻었습니다.” 
    탕자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자기의 삶의 상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의 벌거벗음과 곤고하고 가련한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이 탕자가 먼 나라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리기 전에 그 동안 사귀던 친구들을 만나 “내가 이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는 의논을 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아마 그 옛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아, 이제는 돌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 자네 아버지가 절대로 받아 주지 않을 거야. 아니 이제 와서 이 꼴로 돌아가면 뭣해?” 
    그러므로 신앙의 결단은 때때로 가장 고독한 결단일 수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못할 사연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 친구들이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사연을 이해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아니,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을 해도, 나를 규탄하고 비웃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있어서 이 결단이 고독하지만 얼마나 중요한 결단인지 모릅니다.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탕자는 그 모습 그대로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췌해진 모습 그대로, 돼지우리에 있었으니 냄새나는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체면을 생각해서 ‘옛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라도 된 다음에 돌아가야지’ 했다면 이 탕자는 영영 돌아갈 기회를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탕자는 있는 모습 그대로,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어느 정도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모양새를 갖추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아들이 돌아옴으로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그가 돌아올 때 그는 온전히 과거를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정리하는 일에 대해서 세상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하나는 “그게 왜 죄가 되냐? 그런 것 가지고 괴로워 할 필요는 없어”라고 충고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가치관의 기준에 대해서 세상적인 방법을 적용시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냥 잊어버려”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떠나게 하실 때 우리의 과거를 완전히 용서하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멀리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기억도 안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망각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너는 이렇게 이렇게 네 잘못을 고쳐”라고 야단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용서는 받아 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아버지가 멀리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펄전의 말처럼 주님의 자비와 긍휼의 눈은 회개의 눈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측은히 여긴 것은 당연히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함께 아파하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여나 아버지가 나를 받아주실까 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 걸음 옮겨 놓을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렸을 것입니다.”
    아들이 한 발을 옮겨 놓았을 때 열 걸음을 옮기시던 아버지의 사랑, 여기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오늘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것을 주었습니다. 몸에는 좋은 옷, 손에는 가락지를, 발에는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한 번도 죄를 범한 것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과거에서 완전히 떠나게 하실 뿐 아니라 이 누더기를 벗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십니다. 손에 낀 가락지는 새로운 언약을, 발에 신은 신발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탕자를 통해서 잃어버린 죄인을 찾기 위해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며 부르십니다. 이 아들은 먼 나라에 있으면서 벌써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야 한다.”
    자기 입에 넣는 그 쥐엄 열매에 환멸을 느낄 때마다 그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갈곳이 없어 정처 없이 들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때 그는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에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참으로 돌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음성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초청입니다. 아니,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주님에게서 멀어져 간 사람들을 향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오라, 지금 곧 나아오라.”

    먼 곳에서부터 나를 향해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주님과 확실한 관계를 맺지 못한 분이 계시면 속히 돌아오세요. 지금 이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일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을 그냥 그대로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앞에 돌아와 걸친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옷을 입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살 길은 아버지께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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