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축제(눅 15:1-7)
  • 조회 수: 87, 2013.08.28 17:08:45
  • 오늘까지 저희 교회 인근에 위치한 브루크라인 컨츄리 클럽(Brookline Country Club)에서 Ryder Cup이 열리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제일 잘하는 골프선수 24명이 모여 '미국이 강하냐 유럽이 강하냐'를 놓고 경기를 벌이고 있습니다. 브루크라인 신문인 Brookline Tab에서도 이 Ryder Cup 경기를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골프 게임인 Ryder Cup 특집기사에 골프선수가 아닌 프로 농구의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리워지는 마이클 조단(Michael Jordon)의 사진이 실려있었습니다. 운동의 귀재인 마이클 조단이 이젠 프로 골프로 전향해서 곧바로 Ryder Cup에 출전해서 그의 사진이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이클 조단 사진 밑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마이클 조단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아십니까?(Do
    you know where Michael Jordon is staying?)"
     마이클 조단이 Ryder Cup을 구경하러 오는데 어느 집을 아주 비싼 값에 일주일간 빌리기로 하였다는 기사입니다. Tab 기자는 마이클 조단이 일주일간 집을 빌리는데 소문에 의하면 최저 3만불에서 최고 65만불 상당의 렌트비가 책정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금세기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일주일에 65만불의 렌트비를 내면서까지 세계적 골프게임을 구경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골프 선수들의 사진보다 마이클 조단의 사진을 실어 놓은 것입니다. 희한한 세상
    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통계를 실어 놓았습니다.
    Ryder Cup을 구경하러 매일 3만명이 골프 클럽에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 Ryder Cup으로 인한 전체 수입은 6천 3백 만불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6천 3
    백만 중에 순수이익은 천7백 5십 만불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번 대회로 인한 컨츄리 클럽의 수입은 5-6백 만불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브루크라인 타운
    의 수입은 3백만불이라고 합니다. 이번 경기를 NBC에서 중계하는데 전세계의 4천만명이 시청할 것이고 이에 대해 1,300만불의 중계료를 낼 것이라고 합니
    다. 그 외에도 많이 있는데 하나만 더 소개해 드리면 이번 경기를 위해서 2백만 개의 꽃이 심겨졌다고 합니다.
     지난 여름엔 All Star 야구가 Fenway Park에서 열려서 한참 요란했는데 이번 가을은 Ryder Cup으로 보스톤 인근이 계속 떠들썩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일개 농구 선수가 골프 경기를 보기 위해 1주일간 65만불을 쓴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세상이 아닐까요? 마이클 조단이 그만한 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돈 있는 사람이 돈을 쓰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도전하고 싶은 것은 오늘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길래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허쉘(Abraham Heschel)이라는 유대교 신학자가 말한것입니다. "오늘날 Celebration의 자리
    에 Entertainment가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축제의 동물입니다. 리듬의 동물입니다. 축제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축제가 사라지면 그곳을 무엇인가로 대체해
    야 합니다. 오늘날 축제의 자리에 오락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우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진정 축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 자리를 오락이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축제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말씀에는 축제에 참여하고 계신 주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울러 주님은 우리들의 잃어
    버린 축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의 말씀을 들으러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장면이 먼저 소개되어 집니다. 이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
    난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문맥으로 보면 죄인들과 세리가 가까이 나아오고 또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했다는 문맥으로 봐서 아마도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를 위해 잔치를 베푼 모양입
    니다. 그런데 사실 한 귀인 내지 부자가 죄인과 세리를 위해 잔치를 베풀 수도 있습니다. 아니 유대교의 입장으로 보면 마땅히 그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음식을 같이 먹는데 있었습니다. 귀인내지 부자가 잔치를 베풀어주는 것까지는 유대교인 입장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의 더러움이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음식을 같이 안먹었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같
    이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제 세상사람들에게 말할 것이 생겼습니다. "예수는 죄인이다. 그러
    므로 너희는 그를 따르지 말고 죄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지 않는 우리를 따르라."
     이를 듣고 있던 주님은 입을 열어 유명한 잃은 양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매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은 지금 죄인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축제를 벌이시고 계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죄인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까지 축제가 벌어
    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는 축제, 이 축제가 바로 하늘의 축제로 연결됨을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축제가 바로 우리들의 축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축제가 우리의 잃어버린 축제가 아닐까요? 우리가 이 축제를 잃어버릴 때 우리의 삶은 오락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전도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이 전도주일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잃어버린 축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함께 이 축제를 되찾게 되길 바랍
    니다.
     한 여행자가 미국 북부지방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농장을 지나가는데 한 농부의 뒤를 수십 마리의 돼지들이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가 따르는 것이 아니고 양들이 목자를 따르듯 농부의 뒤를 돼지들이 그냥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자는 하도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뒤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돼지 도살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돼지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농부를 따라 서슴없이 도살장 안으로 들어가서 차례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여행가는 하도 이상해서 그 농부에게 물었
    습니다. "어떻게 돼지들이 도살장까지 저항 없이 따라 왔습니까?"
     그때 농부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보이면서 말합니다. "이 바구니 안에는 콩이 들어있어요. 걸어가면서 이 콩을 한줌씩 떨어뜨리면 미련한 돼지는 떨어진
    콩을 주워 먹으러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따라왔으니 미련한 놈들이지요."
     잃은 양의 비유에 대해 설교하면서 돼지의 예화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사실 이 돼지들의 모습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은 양들의 모습일 줄 압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하루하루 자기의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도살장과 같은 파멸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잃은 양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 주변에 살고 있습니까?
     이러한 잃은 양들에게 대해 오늘날 종교인들이, 아니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두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행함입니다. 이
    들은 잃은 양들을 위해 자비를 베풉니다.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죄인들의 죄가 오염될까봐 그 자리에 가 앉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이 어려움을 당하면  check를 써주면서 그 돈으로 생활에 보태 쓰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잃은
    양들에 대해서 취하는 첫 번째 우리 기독교인들의 자세입니다. 이 잔치는 하늘과 연결된 잔치가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움만 나타내려는 잔치입니다.
     이에 반해 참 기독교인들의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같이 죄인들과 함께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에 가서 함께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축제요 하늘나라에 연결되는 축제입니다. 그러나 이 삶은 쉬운 삶이 아닌가 봅니다.  이 참 축제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주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축제에 참여하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애씀이 필요합니다. 이 참 축제의 삶의 특징은 주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 한마리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나머지 양 아흔 아홉 마리는 그냥 들에 두
    고 한 마리를 찾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제 목자에게는 두 가지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잃은 양을 생각하는 아픔입니다. 또 하나는 양 아흔 아홉 마리
    를 들에 두고 떠나야하는 아픔입니다. 이 두 아픔을 안고 목자는 그 잃은 양을 찾아다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 땅 광야에서 홀로 양을 찾으러 가는 것 자체가 모험입니다. 짐승이 어디서 나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양의 음성을 쫓아서 헤매어야하는 것입
    니다. 목자는 그 위험과 아픔을 무릎 쓰고 양을 찾아 헤매며 다닙니다. 그런데 드디어 양을 찾았습니다. 목자는 큰 기쁨으로 양을 껴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습니다. 혼자 제발로 서서 목자를 따라 올 기력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목자가 양을 어깨에 둘러맵니다. 그러나 양을 찾은
    즐거움으로 무거운 것도 잊은 채 그 양을 어깨에 매고 돌아옵니다. 이제 기쁨으로 집에 돌아옵니다. 집에서 또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잔치를 베푸는 것
    입니다. 잔치를 베풀려면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듭니다. 그러나 목자는 어처구니없게도 양 한 마리의 값보다 더 나가는 음식을 장만하여 큰 잔치를 베풉
    니다. 양 한 마리가 뭐가 그리 귀하다고 목자가 그러한 희생을 치루는 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사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어떻습니까? 아흔 아홉 마리가 있는데, 또 새끼를 낳게 하면 되는데... 아니 그것보다 더한 것은 왜 목자는 한 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 마리를 놓고 떠나갑니까? 기적적으로 양 아흔 아홉 마리 중 하나도 잃지 않았다고 합시다. 왜 양 한마리로 인해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
    를 벌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양 한 마리 값보다도 훨씬 더 들텐데...
     제 삼자가 보기에는 지혜롭지 못한, 이해가 안되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이 양 한 마리가 바로 여러분이었다면 과연 목자보고 미련하다고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양 한마리를 위해 말도 안되는 희생을 치룬 목자의 사랑이 바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신 것입니다.
     길 잃고 헤매이는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이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찾아오신 분입니다. 결코 인간의 계산으로는 맞지 않는 막대한 손해를 보시고 우
    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쓸모 없는 돼지들이었습니다. 떨어지는 콩을 주섬주섬 주어 먹으며 지옥으로 향해갔던 하찮은 돼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찮은 돼지인
    우리를 위하여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떠합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어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세상 사람들과 발길을 전혀 끊어 놓으시진 않
    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콩을 받아먹으면서 지옥으로 향해가고 있는데 나의 안전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상 식 밖에 사람들이라 비난하면서 교회와 직장과 집만
    왔다 갔다 하고만 계시진 않습니까? 그리고 빈 시간을 오락으로만 메꿔 나가고 계시진 않습니까? 우리 모두 축제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의 삶의 참된 축제는 잃은 양으로서 우리가 들었던 목자의 음성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
    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희생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구체적 희생이 무엇일까요? 시간, 시간입니다. 21세기를 향해 가는 이때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
    여 바칠 수 있는 가장 귀한 희생은 바로 시간입니다.
     어느 분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973년에는 사람들이 평균 일주일에 41시간씩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15년 후인 1988년에 와서는 6시간이 늘
    은 47시간씩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11년 후 인 1999년에는 어떨까요? 더 많은 시간동안 일을 하지 않을까요?
     USA Today에서 조사한 것에 의하면 우리가 하루 동안에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을 다 한다면 하루가 42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일해야
    하고, 아이들 ride를 주어야 하고, News를 들어야하고, 운동하고, 친구 사귀고, 취미 생활해야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24시간으로는 어림없고 24시간을 거꾸로 한 42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할 것을 다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시간이 귀함을 서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 시간을 들여
    주의 사랑을 전하면, 처음에는 말씀이 들어오지 않아도 말하는 이가 쏟는 시간에 대한 정성으로 인해 안 믿는 사람들이 점차 귀를 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에게 일단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위하여 얼마나 시간을 희생하
    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셨는데 바쁜 시간이지만 잠시, 잠시 시간을 내지 못합니까?
     스탠리 램씨가 말하길, "보험 중개인들은 일주일에 45명 정도 전화해서 보험계약을 할 것을 권유한다고 합니다. 그들 중 15명만 전화를 통한 보험안내를 인
    내심을 갖고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 15명 중 2명만이 보험계약을 체결한다고 합니다. 보험 중개인들은 45명중 2명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는데
    우리는 길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위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하루에 십분만이라도 잃은 영혼을 위해 써야하지 않을까요?
     바쁘게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귀한 시간을 냅시다. 자리를 같이 합시다. 안 믿는 자들을 초대하십시다. 기회가 되는대로 말씀을 전합니다. 언젠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트루엩(Truett)이라는 목사님이 쓴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교회에 교회를 잘 다니는 소년과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소년은 친구가 쏜 총에 맞아 큰 중상을 입었습니다. 목사님이 병원에 가보니 그 소년은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담당 의사가 말하길 잠시 의식을 회복할
    거지만 2-3일 안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마침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이 날은 아이의 사고로 인해 술에서 깬 상태였습니
    다. 아버지는 의식이 돌아오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웃고 또 울면서 말합니다.
     "나의 영웅은 계속 좋아질거야. 나의 영웅은 다 나을거야." 소년은 눈을 겨우 뜨면서 말합니다. "아니야 아빠, 나는 낫지 못할거예요."
     아버지는 다시 말합니다. "너는 나을거야. 그리고 나도 이젠 변할거야. 변화된 내 모습을 보여줄게."  아이는 아빠의 귀에다 대고 속삭입니다. "내가 떠
    나게 되면, 아빠, 기억해 줘. 아빠가 술에 취했을 때에도 나는 항상 아빠를 사랑했어."
     아버지의 마음은 칼로 찢어지는 듯 합니다. 아버지는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목사님께 말합니다. "나의 아이가 이렇게 나를 사랑했는데, 내가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때 목사님은 잃은 양을 찾아 오셨던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길 잃은 자들에게 필요한 음성이 바로 이 소년의 음성이 아닐까요? "아빠가 술에 취했을 때도 나는 항상 아빠를 사랑했어."
     세상에서 길 잃은 영혼들은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음성을 우리를 통해 듣게 하시려고 이 땅 위에 우리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잃은 양이 되어 돼지같이 살고 있을 때에 주님은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잃은 영혼들 옆에 앉을 때가 아닙니까? 그들을 초대할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들은 목자의 음성을 전해 줄 때가 아닙니까?
     잃은 영혼들을 마음껏 사랑하십시다. 그들을 위해 우리의 귀한 시간을 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축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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