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주일(요21:01-17)
  • 2013.06.11 15:53:32
  • 1999년, 한 천년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주일을 앞두고 저는 설교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설교를 할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주님을 잘 따른다고 하는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가지만 주님은 다시 베드로를 찾아오시어서 용서해 주시고, 사명을 맡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용서와 회복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는 1999년과 함께 용서할 수 없었던 일들과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시 회복된 신앙으로 새해, 새 천년을 맞자는 것이 오늘 설교의 골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일들 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입니다.
     
     3년 전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 베드로는 주님을 따랐고, 그후 12제자 중 항상 첫째를 자랑하는 수제자였습니다. 그의 성격과 신앙을 보면 다혈질에다 항상 능동적이고 정열적이었습니다. 마14:29에 보면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서 자기도 물위로 걸어가다가 풍랑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졌던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16:16에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고,
    무리들이 주님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에 주님은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까?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고 고백했던 베드로였습니다.
     
    막14:27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곧 베드로가 나섭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오늘 이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때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큰소리 펑펑쳤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대제사장의 뜰 모닥불가에서 계집종에게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여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자기 한 몸 살리기 위해 철저히 스승을 배신하는 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은 끝난 줄 알았는데, 주님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늘 주님을 향하여 자신만만했던 제자 베드로, 
    그러나 이제 그는 도저히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노라"
     
    주님을 따르는 영적인 사역에 실패했던 베드로는 이젠 사람을 낚는 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옛날처럼 "물고기나 잡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서 그는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 갈릴리 호수에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온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사역에 실패하여 주님으로부터 도피하여 옛일로 돌아왔지만 육신적인 삶의 현장에서도 또 다시 실패의 고배를 마십니다.
     
    그때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십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실패와 낙심의 어둔 밤이 지나가고 어슴푸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에 참 빛이 되신 주님께서 배신자 베드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그 죄의식으로 인해 나무그늘 아래 숨어 있을 때 먼저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찾아 오셔서 바닷가에 서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거리,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과 안개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일에 몰두해 있어서 주를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마치 엠마오를 향한 두 제자에게 주님이 동행하셨지만 주님이신 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여기 제자들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바닷가에 서서 다정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여기 이 말을 원어상으로 직역하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 잡은 것이 하나도 없지?" 베드로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묻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시는 주님은 오늘 우리의 형편과 처지, 실패와 낙심을 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물에 배 오른쪽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제자들은 그물을 오른쪽에 던졌습니다.
    놀랍게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많이 잡혀오자 그때서야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비로소 저희에게 말씀하신 분이 주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의 외침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채로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로 옵니다.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습니다.
    이 숯불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얽혀져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장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모닥불가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그 무대를 주님께서 이 아침에 다시 만드신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그 장면에서 베드로는 다시 서서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망간다고, 회피한다고, 외면한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주님은 문제를 직면하게 합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그 숯불 위에 고기

    도 있고, 떡도 있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지치고 허기져 낙심된 제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따뜻한 불과 조반을 보십시오.
     
    주님은 육지에 올라온 베드로를 향해 다른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너가 잡은 고기도 가져 오라"
    그리고 와서 함께 먹자고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이었다면 
    "베드로, 넌 큰소리만 뻥뻥 쳤지. 별 수 없었어!"
    "너가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책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반을 다 먹을 때까지 다른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은 친히 떡을 가져다가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실패했고 배신했던 제자들,
    그러나 주님은 아무 책망도, 호통도, 언성도 높이지 아니합니다.
    실패하고, 그 가책 때문에 도망가는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파티를 여시고 베드로의 죄책감과 굳어 있는 마음을 서서히 풀어 주십니다.
    문책하지 않습니다.
    아픈 상처, 실패의 쓰라림을 다시 건드리지 아니하시고 싸매어 주십니다.
    주님은 따지지 않습니다.
    끝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 이유는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켜 그가 다시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위기는 그가 주님을 부인했다는 사실보다도 실패 때문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농도가 식어가고 주님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커다란 문제임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찾아오시고, 싸매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 간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실패한 일들이 있습니까?
    실패 그 속에 오셔서 용서하시고, 싸매시어 회복시켜 주시는 우리의 주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조반을 다 먹은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제 주님은 낙심 중에 있는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페라는 단어이고 베드로가 주님께 대답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레오>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데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야 너는 나를 이 모든 사람들보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필레오의 사랑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계속된 질문은 아가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은 여전히 필레오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지금까지의 베드로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지금까지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 있게 대답하던 그의 모습과는 얼마나 변화된 모습입니까?
     
    영적인 일에, 육적인 일에, 모든 일에 실패를 경험했던 베드로,
    그는 이제 주님 앞에서 겸손해졌습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그 사랑에 비한다면 저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전에 그는 자기 힘으로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자기 목숨을 바쳐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마음 밑바탕에는 
    "내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주님! 이제 주님의 은혜와 도움 없이는 내 힘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일조차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비로소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를 다시 일으켜 1세기 초대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주님의 모습 속에서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사랑은 첫째,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로 가서 당신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를 찾아가셨습니까?
    당신을 배신한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찾아 가셨습니까?
    비난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처럼 먼저 찾아가 주는 것입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들, 내게 등을 돌린 사람들, 내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내려가 갈릴리 호숫가에 서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오셨는지도 모르고 계속 자기들 할 일만 하고 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너희들끼리 잘 놀아라" 하고 돌아서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사랑은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다리는 기간 동안 불필요한 오해들이 쌓여 가고, 나중에는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사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나무 그늘 아래서 숨어서 벌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만약 하나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서 끝나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먼저 말을 걸어 주실 수 있었습니까?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 이혼을 다섯 번이나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러 왔을 때 예수님은 "나에게 물 좀 달라"하시며 먼저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부정한 여인에게 주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 주실 수 있었습니까?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영이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말을 걸어 주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한가를 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아내들의 경우 남편으로부터
    1. 여보 사랑해
    2. 여보 고마워
    3. 여보 고생했지
    4. 당신이 제일이야
    5. 당신 오늘 예쁜데  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진한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의 경우는 아내가
    1. 여보 사랑해요.
    2. 당신만 믿어요
    3. 결혼 참 잘했어요.
    4. 당신 정말 남자다워요.
    5. 얘가 당신 닮아 똑똑하고 대견해요 라고 말했을 때 행복을 만끽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밤새 애썼는데도 잡지 못했던 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조반을 친히 만들어 두셨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갈릴리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 집에 가서 무엇을 먹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3:4에서 사랑을 "온유하다"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온유"는 그리스어로 크레스튜오마이(kreestuomai)인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필요를 채워준다"라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사랑을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또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한 번 더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하고 배신했던 그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어 주심으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 훈련을 받으면서 잊지 못하는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서울 홍익교회 김태복 목사님이십니다.
    저는 83년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그때 처음 출석했던 교회가 홍익교회였습니다.
    학부 학년 때 저는 그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목사님은 저에게 중 고등부 교육 전도사로 헌신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당시 중,고등부 학생수가 250명 정도가 되었는데 부족함 투성이인 저에게 이 파트를 맡겨 주셨습니다.
    처음 교육전도사가 되었을 때, 열심은 있고, 열정은 있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과 강한 성격, 그리고 리더십의 부족으로 사람들과 좌충우돌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이 지났을 때, 보다 못한 장로님들이 당회를 열어 손전도사를 내어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신학생은 새싹과 같지 않습니까?
    조금 잘못했다고 내 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잘 못하면 교회가 가르치고 다듬어서 한국 교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키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후 저는 그 교회에서 2년을 더 훈련을 받았고, 그곳에서 저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허랑 방탕하던 탕자가 굶어 죽게 되었을 때,
    "내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니 나는 아버지 집에 가서 품꾼으로 살리라"고 생각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그래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니 종으로 살아라"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아들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상대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은 내 속이 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기회를 주었는데 요행히 그 다음 날부터 상대가 내 마음에 쏙 들게 행동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기회를 준 후에도 그가 그 기회를 통해 바로 서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때까지는 내 속이 썩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13:4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오래 참는다의 그리스어 '마크로뒤미아'(makrothumia)는 디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디오는 희생한다, 나를 제물로 바친다는 뜻입니다.
    기회를 준다는 것은 내가 희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토록 희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또 한 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 위에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는 다시 생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5일만 지나면 1999년이 막을 내립니다.
    한 천년이 지나갑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한해를 마감합시다.
    주님께서 다시 허락해 주시는 기회로 새 해를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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