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5:14-30/ 얼마나 남겼습니까?
  • 2013.11.08 21:04:36
  • 느덧 우리는 이 해의 마지막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살같이 빠른 세상이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만 이렇게 세모를 당하고 보니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연말은 여러 가지로 바쁜 시기인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연말이 결산을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가게에서도 결산을 하고 회사에서도 결산을 합니다. 나라에서도 결산을 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는 얼마나 남겼나 한 번 결산을 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읽었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가만히 생각할 때 우리가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말하자면 시장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하루 생활은 장사하는 사람의 하루와 비슷하고, 우리가 하루를 살고 반성하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이 하루 장사를 마치고 그 날의 손익을 계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한 해를 살고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는 것은 연말 결산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잠언 23장 23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를 사고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인생은 장사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장사하는 데는 본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본전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본전은 사실상 없습니다.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서 우리 각자에게 본전을 주셨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각각 다르게 본전을 주었습니다. 여기 ‘달란트’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옛날 돈의 단위였습니다. 영어로 ‘talent’라고 하는데, 요즘에 TV에 나오는 배우를 ‘탤런트’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몇 가지 맡기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의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90세 이상의 수를 누리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70세 정도 살도록 시간의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20~30세, 아니 그 이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하는, 아주 적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능의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사람의 재능이 다 다릅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잘 하는 사람, 발명을 잘 하는 사람, 기계를 잘 만지는 사람,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 작곡을 잘 하는 사람, 기악을 잘 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물건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는 등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의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셋째는, 기회의 달란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이런 저런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바 그 재능이 다 다릅니다. 질도 다르고 양도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참 성령을 받지만 받은 은사도 각각 다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사나 재능이나 직분을 맡긴 것은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잘해서 이익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많이 남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본전을 가지고 장사하는 장사꾼입니다. 

    여기 보니까 오랜 후에 그 주인이 와서 종들과 회계하자고 했습니다. 남의 본전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은 주인 앞에 와서 계산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결산의 때가 꼭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대로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주인께서 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내가 장사를 열심히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열 달란트를 받으십시오.” 주인은 기뻐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칭찬을 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더 큰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도 주인에게 와서 “주인께서 저에게 두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제가 힘껏 열심히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여기 네 달란트를 받으십시오”하고 내놓았습니다.
     주인은 역시 기뻐하면서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칭찬을 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더 큰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이 종이 와서 “주인은 대단히 인색한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주인께서 주신 돈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손해 안보고 그대로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주 노해서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다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저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렇게 결산합니다. 이 결산에 대해 우리가 배울 몇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전을 받은 대로 남겼습니다. 본전을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남겼습니다.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남겼습니다. 
    받은 대로 남겨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재능, 더 큰 은사, 더 큰 직분을 받았으면 그만큼 더 일할 책임이 있습니다. 많이 맡긴 사람에게서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적게 맡긴 사람에게서는 적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은 것, 큰 것, 높은 것을 맡았으면 그것 가지고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내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아서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그만큼 남겨 가지고 와서 보고할 때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 그만큼 남겨 가지고 와서 보고할 때나 주인은 똑같이 칭찬하고 똑같이 상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익의 양보다 그 충성을 보십니다. 이익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본전을 가지고 얼마나 충성을 다했나 하는 것을 보십니다. 
    사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힘써 장사해서 한 달란트만 더 남겨 가지고 왔었다면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이나 두 달란트 받았던 종과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작은 은사나 재능을 받은 분이 계시다면 작게 받았다고 하나님께 대하여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작게 받은 것, 그것 가지고도 충성스럽게 장사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똑같은 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그곳에 가서 얼마나 큰 일을 하였습니까? 그러다가 마지막에 아프리카 어느 외딴 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일할 때 열심히 도왔던 흑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모아가지고 리빙스턴의 시체를 항구가 있는 곳까지 수천 리를 걸어서 운반하여 왔습니다. 
    배로 리빙스턴의 유해를 실어 영국에까지 왔을 때 온영국이 그 유해를 맞아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시종 리빙스턴을 따라다니면서 그를 도왔던 웨인우라잇이라는 키가 작은 흑인이 런던까지 따라와서 그의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때에 물론 모든 영국 사람들이 리빙스턴을 존경하고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리빙스턴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리빙스턴을 따라서 끝까지 충성되게 봉사한 리빙스턴의 흑인 동역자 웨인우라잇 역시 크게 존경을 하고 찬양했다고 합니다. 
    왜요? 리빙스턴은 그가 받은 바의 재능에 충성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흑인 웨인우라잇도 역시 자기가 받은 은사에 대해서 역시 똑같은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제일 큰 죄는 본전을 땅에 묻어 둔 죄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이의 죄가 이것입니다. 장사하라고 받은 돈을 땅에 묻어 두면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재능을 묻어 두면 안됩니다. 은사를 묻어 두면 안됩니다. 직분을 묻어 두면 안됩니다. 일하라고 우리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라고 하셨으면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늘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교회 성가대원의 수가 교인수에 비해 너무 적습니다. 가만히 찬송할 때 들어보면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예배시에 찬송을 어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정확한 음정으로, 아름다운 음색으로, 정확한 박자로 아주 열심히 잘 부릅니다.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실 수 있는 분이 너무너무 많으십니다. 그 귀한 재능을 땅에 묻어 두면 안됩니다. 성가대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지 마세요. 살인하고, 강도하고, 사기 치고, 간음하는 것만이 죄는 아닙니다. 이런 죄를 ‘적극적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을 행할 줄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극적 죄’라고 합니다. 
    우리가 조심하고 힘쓰지 아니하면 나도 모르는 동안에 소극적인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좋은 재능을 주셨는데 그 재능을 주님 위해 써야 합니다. 묻어 두면 죄가 됩니다.
     내게 귀한 지식이 있는데 이 귀한 지식을 주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는 것과 같습니다. 내게 재물을 맡기셨는데 주를 위해 쓰지 않고 나만을 위해 쓰는 것은 땅에 묻어 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전을 땅에 묻어 두는 죄를 범하지 마십시다.

    넷째로, 묻어 두는 본전은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이 주인은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편에서 보면 ‘어떻게 그렇게 빼앗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폐단 중에 하나가 소위 부익부 빈익빈인데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집니다. 대기업은 돈이 남아돌아 호경기를 누리고 있는데, 중소기업은 해마다 도산율이 높아지고 있고, 일반 서민은 쪼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는가?’하고 의아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자연의 법칙입니다. 
    가령 우리의 육체를 보세요. 무슨 지체든지 아깝다고 쓰지 않고 아끼면 오래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실제는 그와 반대입니다. 육체는 쓰지 아니하면 결국은 점점 약해지게 되고 나중에는 쓰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음악 연주가가 계속해서 악기 연주를 하지 아니하면 그 손재주는 점점 무디어지고 맙니다. 목소리도 쓰지 아니하면 점점 녹이 슬고 맙니다. 그러므로 어떤 재능이든지 오랫동안 쓰지 않다가 다시 쓰려고 하면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것 아닙니까?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어느 집사님 한 분은 사업이 잘 되어서 돈을 꽤 잘 버셨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가 봐도 윤기가 돌고, 집에 가 봐도 기름기가 돌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 해 입고, 기름진 좋은 음식 먹고, 세상 말로 풍성 풍성 지냈습니다. 그 분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까운 것 없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를 위해서 돈 쓸 일이 생기면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가 볼 때도 ‘그만한 생활 수준으로 살면서 이 정도밖에 못하시나’ 하고, 속으로 퍽 안타깝게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번창하던 사업이 어려워지게 되고 결국은 도산 지경에 이르러 나중에는 집도 빼앗기고 월세방으로 가게 되셨습니다.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갔더니 후회하며 “목사님, 제가 사업이 잘 되고 풍성할 때 그게 내 재간, 내 능력, 내 운수가 좋아서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솔직히 하나님께 감사한 생각도 별로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때 넉넉할 때 십일조라도 제대로 했으면 이렇게 후회까지는 안되었을 거예요. 이제는 십일조 하려고 해도 할 것이 없어요”하며 회개하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다섯째, 빼앗길 뿐만 아니라 큰 형벌을 받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으라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엄숙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로 우리가 직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죄가 이렇게 무거운 형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 이 원리를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전에 하던 좋지 않은 일만 하지 않으면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절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어서 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극적인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교훈만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모압평지에 왔을 때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들이 모세에게 와서 부탁하는 말이 자기들은 가축이 많이 있는데 이 지방에 보니까 초장이 많이 있으므로 요단강을 건너갈 것 없이 이 길르앗 지방에서 살게 해주셨으면 고맙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나아가거늘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도 무장하고 같이 나가서 요단강을 건너 같이 싸워서 다른 형제들도 다 분깃을 얻은 다음에 돌아와서 너희가 원하면 이곳을 차지하라. 그러나 이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큰 죄가 될 터이니 너희가 만일 그런 죄를 짓게 되면 이 다음에는 그 죄가 너희를 찾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니 그리 알라”고 엄히 경계했습니다.

    사사기 5장 2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유명한 여선지 드보라가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 장군을 무찌르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승리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원수를 대항해서 싸우려고 나왔는데 메로스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협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사자의 말씀이 이 사람들을 저주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메로스 사람들이 원수 편에 서서 간첩 행위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단순히 남이 다 나아가 싸울 때 같이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자기 동네에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는데 몹시 시장하셨습니다. 먼 곳에 보니까 잎이 무성한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무화과가 열렸을까 하고 예수님께서 가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 앞으로 네게서 열매를 다시 먹을 자가 없으리라.” 얼마 후에 보니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가지까지 완전히 말라버리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지은 죄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를 거기에 심은 것은 열매를 맺으라고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아니했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은 것은 소극적인 죄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지 않은 소극적인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입니다. 두려운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극적인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가 지금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나아가서 장사하는데 자기는 나아가서 장사하지 아니하고 돈을 땅 속에 파묻어 놓고 있으면서도 잘못인 줄 몰랐습니다. 주인 앞에 와서도 자기가 한 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이것이 죄라고 생각합니까? 사실 이와 같은 교훈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면서 많이 주저하다가 이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왜 소극적인 죄를 적극적인 죄와 같이 엄하게 형벌하십니까? 그 원인은 적극적인 죄나 소극적인 죄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왜 소극적인 죄를 짓습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기심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강을 건너갈 것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것도 평안하게 살려는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왜 소극적인 죄를 짓습니까? 
    의타심 때문입니다. 왜 메로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다 전쟁터에 나갔는데 같이 나가지 않았습니까? 다들 나아가서 싸우는 동안에 자기는 가만히 있다가 남의 덕에 좀 잘 살아보자는 의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속담에 있는 말대로 “굿이나 보다가 떡이나 먹자”는 식의 의타심 때문이었습니다. 

    왜 소극적인 죄를 짓습니까?
    거짓 겸손 때문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해”하는 자세, 이것은 겸손이 아니고 거짓 겸손 내지 비겁입니다. 아마 메로스 사람이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야 뭐 싸울 줄을 알아야지.” 이것은 겸손이 아니고 비겁입니다. 
    어떤 때는 공포심 때문에, 어떤 때는 게으른 마음 때문에 소극적인 죄를 범합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땅에 묻어둔 것은 게으른 탓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우리도 일하기는 해야겠는데 명년부터는 해야지,” “선교회도 봉사회도 내년부터는 가입해야지,” “십일조도 해야지”하다가 금년 말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게으르면 의무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기신 주님께서 우리더러 계산하자고 하시면서 “너는 얼마를 남겼느냐?”고 물으십니다. 흑자입니까, 아니면 적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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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23:20

    chords
    송구영신 설교자료 - 마태복음 25:14-30/ 얼마나 남겼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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