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사람의 삶(엡 4:25-32)
  • 2013.07.18 12:12:00
  • 새 해 첫 주일, 새 천년 첫 주일을 맞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그리고 하시는 모든 일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어제 첫 시간에는 우리가 이곳에 모여 새 천년 첫 날을 맞이하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자'는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살아오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옛 사람의 잔재가 남아서 계속 목표없는 삶, 방향이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참된 삶의 기준과 가치를 상실한 채 살아왔으며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산 적이 많습니다.
    이제는 지난 시간과 함께 옛 사람은 모두 벗어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시대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을 따라 새사람으로서 새천년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새 천년을 맞았다고 해도 우리가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의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오늘 말씀은 새 사람의 삶이 어떤 삶인가에 대해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새 사람의 삶은 진실한 삶입니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우리가 옛 사람에 속했을 때는 거짓된 것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의 말, 행실, 모든 생활이 거짓된 부분이 많았으나 이제 새시대의 새사람의 삶으로 살고자 할 때는 이전과 달라져야 합니다. 새 사람은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는, 비단 말에만 국한하는 것 아니라 모든 면에 있어서 진실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은 우리 믿는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인격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서는 성도의 영적 무장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진리의 띠를 띠라'고 말씀합니다. 군인들이 무장할 때, 가장 먼저 띠를 띠고 그 띠에 무기를 부착시킵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가장 먼저 이 진실이라고 하는 진리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그 후에 다른 것을 더할 때에 인격과 삶이 든든해집니다. 이 진실이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돈이 좀 없어도 괜찮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흉이 아닙니다. 못 배웠다 것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건강이 좀 약해도 괜찮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지위나 권세를 누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능력이 좀 부족하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치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이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요즘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옷로비 사건들을 보면서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실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건의 당사자들 뿐 아니라 우리도 직장과 이웃과 사회 속에서 진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성도들 간에 이 진실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주님의 몸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으면 진실을 말해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에 진실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한 의사이신 분이 과거, 즉, 그가 옛 사람에 속했을 때에, 의료보험 관계의 부정한 일에 개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그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텐데, 그 때는 그가 은혜를 받고 난 다음, 새 사람이 된 후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모든 것을 다 말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검사가 지적하는 대로 다 인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까지도 다 자기에게 넘겨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속되더라도 자기의 진실만큼은 지키겠다는 각오로 그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결국 죄가 더 가중되어 구속당하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치소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으며,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체험을 함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받고 많은 도움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사람에게는 이렇게 진실이 중요하다. 비록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좀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진실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새 사람의 삶은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삶입니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새 사람이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화 날 때 화 낼 줄 알고, 노할 때 노할 줄 압니다.그러나 옛사람과 새사람의 차이는 새 사람은 그런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알지만 옛사람은 그냥 감정대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화나는 대로 다 화내고 분한 감정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새시대의 새사람들은 자신의 감정대로 화와 분을 그대로 터뜨리고 끝까지 감정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분노라는 감정은 참 무섭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가도 이것이 발전하면 어떤 무서운 죄를 지을 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분노의 상태를 마귀가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품고 있으면 마귀는 이것을 틈타 더 큰 죄를 짓게 합니다.
    가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해 화가 좀 났습니다. 그 후에는 동생을 미워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점점 발전해서 끝내는 자기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으나 분노를 그냥 갖고 있으니 살인하는 죄까지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이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 가운데 좋은 점은 잘 살려나가야겠지만 잘못된 감정들, 특히 분노와 같은 것은 어느 정도의 선에서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특별히 성도 여러분 가정의 부부생활 속에서 믿는 부부라고 해도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 감정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잠자리에까지 가지고 가지는 않습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 계속 지나면 마귀가 틈타 가정의 귀중한 행복을 파괴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분을 품고 해가 지나 그 다음날까지 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잘못 할 때 당연히 그들에 대해 분을 가지게 되고 화를 내게 마련입니다. 그런 분과 화는 자녀교육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자녀들의 잘못을 보고도 무관심하고 화를 안 낸다면 자녀들이 제 멋대로 클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합당한 분이요, 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때에도 조심할 것은 그런 화를 계속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선에서 조절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녀를 노엽게 하게 되고 오히려 그들이 잘못된 길로 나가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밖에 우리의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 교회생활 하다보면 서로 감정대립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조절하지 않고 계속 허용하면 그 속한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은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감정을 잘 조절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새 사람의 삶은 남을 돕기 위해 근면하게 일하는 삶입니다.

    (엡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우리가 옛사람에 속했을 때는 도적질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도적질이라고 해서 꼭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 모르게 도적질을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남의 명예나 권리, 상표를 도용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당한 방법을 이용해서 돈을 챙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적질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자기가 노력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외국사람들에게 이런 면에 있어 아주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가짜를 잘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태원에는 진짜 상표를 단 가짜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을 사고 우리는 잘 샀다고 좋아합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에도 이런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을 지 모릅니다. 이것은 모두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외국의 상표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또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무단복제하거나 옛날 대학에서 외국 서적을 허락도 받지않고 복사해서 쓰는 해적판들도 다 도적질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옛사람에 속했을 때는 분별없이 할 수 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고 의와 진리로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정정당당히 나의 손으로 수고하여 얻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사람의 생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돈을 번 것을 빈궁한 자, 도움이 필요한 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는 아무 일도 안하고 거미줄만 쳐놓고는 그것에 곤충이 걸리기를 기다리다가 걸리면 피를 빨아먹고 살아갑니다. 거미와 같은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것을 빨아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아무 노력하지 않고 남이 벌어 놓은 것을 거미와 같이 자기 것으로 삼아 남을 해치고, 도적질합니다.
    그런 반면 개미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개미는 얼마나 부지런히 일합니까? 남이 놀 때도 놀지 않고 열심히 땀을 흘리며 양식을 쌓아놓습니다.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며 삽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기와 식구들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이 땅에 많은 것을 쌓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땅에는 남을 해치지 않고 선량하게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며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축적해서 절대 남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만 먹으려고 합니다. 자기 가족들과 자녀들에게만 물려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선량한 사람 같지만 개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꿀벌과 같은 사람입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것으로 꿀을 만들어 자기가 다 먹지 않고 남에게 주는 곤충입니다. 꿀벌과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서 먹을 것을 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쓰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의 삶은 바로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 꿀벌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 28절에 무어라고 했습니까?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새 사람은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자기 손으로 애쓰고 수고하며 일해서 먹을 것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수고해서 얻은 것을 가지고 자기와 가족들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빈궁한 자, 어려움에 처한 사람, 주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천년에는 좀 더 열심히 일하며 삽시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부지런히 일해 얻은 것을 가지고 남을 돕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금년의 선교헌금을 작정합니다. 이것은 부지런히 일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정정당당하게 일해서 얻은 소득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금년에 우리는 구제활동, 장학활동, 또 대북지원, 농어촌지원 등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땀흘려 번 돈들을 이런 가치 있는 일에 쓰는 것은 마땅히 새사람이 행하는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꿀벌처럼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보람있게 쓸 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는, 선한 말을 하는 삶입니다.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여기 더러운 말이라는 헬라어 'Sapros' 란 말은 썩은 열매란 뜻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에게 속했을 때는 우리 마음이 썩었기 때문에 우리 입에서 나온 말도 부패한 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사람이 되었으면 그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졌기 때문에 우리의 입에서는 새 말이 나와야 합니다. 그럼 새 말이 무엇입니까? 덕을 세우는 말, 선한 말,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인간은 언어를 가진 유일한 동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말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잘 쓰면 세우는 것이 되지만, 잘못 쓰면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게 됩니다. 집에서도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말 한마디로 깨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생활을 할 때도 말 한마디로 찬물을 끼얹듯 분위기를 안좋게 만드게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을 잘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건설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로 인해 공동체가 살아나고 세워져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 우리의 이웃 공동체가 세워져야 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시면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는 마음이 가득한 것이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다른 사람 헐뜯고 손해 시키는 말 대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북돋아 주는 말을 해야할 할 것입니다.
    잠 12:18절에 보면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의 남의 가슴을 칼로 찌는 것 같이 고통을 주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양약처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사람들이 말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문기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책임없는 말을 마구 합니다. 정치가들도 아무렇게나 말을 만들어 합니다. 그렇게 내뱉은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일을 어렵게 만들며 사회를 불안하고 어렵게 만듭니까? 새사람은 말을 잘 가려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로써 덕을 세워야 합니다.
    또한 새사람의 말은 선해야 합니다. 악한 말도 있습니다. 남을 깎아내리는 말, 남을 죽이고 욕하는 말들은 모두 악한 말입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남을 살리고 올려주는 말입니다. 남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새사람의 말입니다.
    새사람의 말은 은혜롭기도 합니다. 듣는 사람이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통해 예수를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말을 잘못해서 그 사람이 평생 예수를 믿지 않게 되었다면 평생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작은 소자를 실족케하면 그의 목에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정말 내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내 말이 정말 은혜를 끼치는 말인가, 아니면 은혜를 막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가정에서도 내 말이 자녀의 신앙을 더 자라게 할지, 아니면 오히려 교회를 더 멀리할 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서로 용서하는 삶입니다.

    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옛 사람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32절에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새 사람의 삶입니다.
    새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습니까?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내게 잘못한 사람 있을 때에 그들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마태복음 18장에서 비유로 잘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가 있었습니다.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금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되는 돈인 줄 압니까? 어떤 주석가의 말에 의하면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이고 일만 탈란트는 미국 돈으로 일천 육백 오십만 달러(우리 나라 돈으로는 약 2백 억에 해당하는 돈)에 해당한다고 했으니 엄청난 돈입니다. 역사가 요셉푸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유대 전국이 로마에 바친 세금이 년 팔백 달란트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의 돈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그런 빚을 탕감 받은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돈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한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이기 때문에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돈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를 잡아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불러 들여 그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나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나에게 섭섭하게 하고 잘못한 사람의 빚은 겨우 백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멱살을 잡고 원수같이 여긴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일만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 심령의 변화를 받은 새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진실된 삶, 부지런히 일해서 남을 돕는 삶,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삶, 그리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는 삶, 용서하는 삶입니다.

    결론적으로 엡 4:3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새 사람은 어제 송구영신예배 때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의 마음속에는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결국 새 사람의 삶이란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않는 삶입니다.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새사람의 삶입니다.
    성령님이 근심케 하지 않으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앞에 말씀한 것처럼 먼저,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거짓을 행하고 진실치 못한 삶을 살 때 몹시 근심하십니다. 그것을 알면서 살아가는 자가 새 사람입니다. 또 우리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아무 때나 화를 내고 또 한번 분을 내면 그칠 줄을 모르고 오래 품고 있을 때 성령님은 근심하십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틈을 타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손으로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도적질하며 남을 돕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근심하십니다. 내가 혼자 벌었다고 나만 움켜쥐고 나만 쓰려고 할 때도 성령님은 근심하십니다. '저런다고 해서 후에 다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입술로 선한 말을 하지 않고 더러운 말, 파괴적인 말, 악한 말, 은혜스럽지 못한 말을 할 때 성령님은 다 들으시고 속에서 깊이 근심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며 마음속에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악의를 가지고 있을 때 성령님은 근심하십니다. 마치 집에서 형제들이 화목하지 않을 때 부모님들에게 근심거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해 첫 주일, 새 천년 첫 주일입니다.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이 된 우리들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혹시 내가 아직도 새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에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먼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했는데도 아직 우리들 가운데 옛 사람의 잔재가 남아 있을 때에는 과감하게 옛 사람과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십시오.
    우리가 새 천년을 맞아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제부터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실된 삶,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삶, 도적질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여 남을 돕는 삶, 선한 말을 하는 삶, 서로 용서하는 삶,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는 삶,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것을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겸손히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드리면서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부터 금년이 다 하도록 또 우리의 생애가 다하도록 우리를 새롭게 유지시켜 주시고 새 사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와 여러분의 생활 속에 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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