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밤을 놓친 부자(눅 12:13-21)
  • 2013.08.27 06:55:50
  •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을 받은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이르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13-15). 결코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요한 재물이 인생의 인생된 가치나 생명을 좌우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소유가 넉넉했던 한 어리석은 부자가 ‘오늘밤’이라고 하는 시간을 모르고 살다가 영원한 불행에 빠진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주었습니다. 오늘밤을 놓친 부자!

      Ⅰ. 그는 개인주의적 인본주의(人本主義) 자였습니다.

      그는 ‘한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이름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했다고 하였습니다. 수입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심중에 즐거운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풍성한 소출을 처리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고민하였습니다.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하였습니다(눅 12:16-19).   이 부자의 심중에는 ‘나’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내가’, ‘내가’, ‘내 곡간’,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자의 마음에는 하늘의 태양도, 공간의 온기와 계절의 변화도, 때를 따라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도, 새벽에 내리는 결실의 이슬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연통치나 섭리, 축복 따위는 그 심중에 아예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풍성한 소출에 따르는 이웃사람들의 노력이나 봉사도 그의 안중에는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사고의 중심에는 ‘나’(mou)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내 노력, 내 수고, 내 계획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적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심지어 영혼까지 그리고 모든 생존의 자원도 오직 ‘나’라고 하는 것에서 생각하고, 출발하고, 행동하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고유한 인격의 대명사인 이름은 없고, ‘한 부자’라는 호칭이 그의 이름을 대신해 버렸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그의 이름을 대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풍성한 재물(소출)에 속박되고 말았습니다. 본문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극에 달한 개인주의적 인본주의자의 표상입니다. 원문에 보면 ‘나’라고 하는 말이 열 번 이상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믿고 살던 개인주의적 인본주의자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Ⅱ. 그는 실재론적 무신론자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어리석은 자’(a[frwn)란 ‘생각이 없는 자’라는 뜻인데, 구약에 아비가일의 남편 이름인 ‘나발’(rb'n;)에 해당됩니다. 나발의 뜻이 ‘어리석은 자’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마음(심중)에는 오직 ‘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 내 영혼, 내 곡식, 내 소출(눅 12:17, 18, 19), 내 떡, 내 물, 내 양털(삼상 25:11)이 그 마음에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하나님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밭의 풍성한 소출, 내 곡간, 내 모든 곡식, 내 떡, 내 물, 내 양털 생각에 집착해버린 나머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나 창조나 섭리나 자연계시의 축복 등은 아랑곳이 없는 자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영혼’까지도 물질을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즐거워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 부자를 가리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눅 12:21).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어떤 신뢰감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실재론적 무신론자, 유물론적 무신론자, 개인주의적 인본주의 무신론자였습니다.

      Ⅲ. 그는 축복의 기회를 선용할 줄 몰랐던 자였습니다.

      1. 먼저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감사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밭에 풍성한 소출을 받았을 때 하늘에 있는 태양, 대기의 조절, 이른 비와 늦은 비, 충재(蟲災), 한재(旱災), 수재(水災) 같은 것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뜻밖의 큰 일을 당할 때 자기가 아닌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고, 심지어 자기가 믿는 어떤 신의 혜택 등을 생각하는 종교적 의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이런 것들은 전혀 생각지 아니하고, 오로지 풍성한 소출 그 자체와 자기(나)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뜻밖의 축복을 받았을 때 모든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찾는 기회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그 복의 기회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2. 또한 이웃을 향한 선행의 기회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 부자는 기존 곡간을 헐어버리고, 새 곡간을 더 크게 짓고 여러 해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쯤 되면 그 마음으로 불우한 이웃을 생각하며 선행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의 농사일에 수고한 인부들이나, 모심기와 밭매기와 기타 농사작업에 협력한 이웃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수고의 정을 나누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한 부자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3.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우매하게도 영혼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아니 영혼 그 자체를 몰랐습니다. 그는 영혼도 자기 자신이 주장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더욱이 그 영혼도 자신이 쌓아둔 그 많은 물질로 인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밤(오늘밤)에 하나님은 그 영혼을 도로 찾아가버렸다고 하였습니다(눅 12:20).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되돌려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자는 그가 받은 부(富)를 가지고 나타내어야 할 선한 기회를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그 부(富)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경우의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도로 찾을 때, 인생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아놀드라고 하는 의사가 사는 마을에는 그랜불이라고 하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골에 왕진을 하고 돌아오던 의사 아놀드는 그 마을의 큰 부자 글랜불의 집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그네가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급하게 노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놀드는 다시 왕진을 가게 되었는데, 어제 그 나그네가 아직도 부잣집 대문 앞에서 문을 노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사 아놀드는 어제도 보았던 그 이상한 나그네에게 “아니 지금까지 여기 계십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나그네는 “예. 어제부터 여기서 노크를 하고 있는데, 도무지 대문을 열어주지 아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놀드는 다시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 이 집에는 아주 급한 일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내가 그 소식을 알려주려고 왔는데 이 집안 사람들이 전혀 문을 열어 주려고 하지 아니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놀드는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급한 일을 말하려고 하는 그 이상한 나그네를 생각하면서 왕진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어느새 화창한 봄의 계절이 지나고 성장의 여름도 지나, 싸늘한 추수의 계절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부자 그랜불의 집은 곡간은 물론이고 안마당과 바깥마당에 거두어들인 곡식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가을도 지난 어느 추운 겨울날, 의사 아놀드는 왕진 때문에 또 그 부잣집 대문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정말 놀라고 또 놀랐습니다. 지난 봄에 와서 그 집 대문을 노크하고 있던 그 이상한 한 나그네가 그 날도 그 자리에 서서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에 그 나그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그 집의 주인인 큰 부자 그랜불이 험상궂은 얼굴로 친히 몽둥이를 들고 하인들과 함께 대문을 열고 나오더니, 대문에서 노크하던 그 나그네를 때려눕히고는 대문을 잠그고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놀드가 급히 달려가서 몽둥이에 맞고 땅에 쓰러져 있는 그 나그네를 일으켜 세우면서 “오늘밤은 나와 함께 하숙집에 가서 몸을 좀 녹이고 쉬도록 합시다.”라고 강청하며 그 나그네의 손목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의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의사 아놀드가 치료를 하려고 더 자세히 보니, 그 나그네의 두 손바닥에는 생생한 못자국이 똑똑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의사 아놀드가 그 못자국을 보고 그만 길바닥에 엎드려 “오, 주여! 당신이었군요?” 하고 그 나그네를 쳐다보는 순간, 그 나그네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날밤 이 기막힌 사실 때문에 의사 아놀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급히 그를 찾는 사람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그 마을의 부자 그랜불이 보낸 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갑자기 쓰러져 숨을 못 쉬고 있으니 빨리 함께 가 주십시오.”라고 강청하였습니다. 하인들과 함께 그랜불의 집에 도착해 보니, 그 부자의 아내는 그랜불을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의사 아놀드는 그 부자가 임종을 맞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랜불이 온 힘을 다하여 목 메인 소리로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기도라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제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그 부자는 그 큰집과 그 많은 재산을 그냥 놔두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을 거절하기 위하여 언제나 집앞 대문을 닫아놓았습니다. 그리고 뒷문으로 몰래 출입을 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완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갔습니다. 그의 마음을 단단히 잠가두고, 주님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절하며 박대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재물 자체는 결코 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인생에게 주신 자연계시의 축복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그 재물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섬길 기회를 놓쳐 버리고, ‘오늘밤’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을 하나님께서 도로 찾아가 버리는 종말의 기회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비문들’이라고 하는 글 가운데, 어떤 사람이 꿈에 본 지옥에 있는 영들의 큰 회의 장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상석에 사탄이 앉아 그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회의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많은 영혼들을 속여서 멸망의 지옥으로 많이 데리고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흑암 중에 한 영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자기는 가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탄은 그것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께 지음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영이 나타나 자기는 세상에 가서 사람들에게 ‘천당이 없다’고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것 가지고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유한한 세상에서 언제나 불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내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 영이 나타나 자기는 사람들에게 가서 ‘지옥이 없다’고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역시 그것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양심 스스로가 지옥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네 번째 영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자기는 세상에 가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서둘 것이 없다. 내일이 있지 아니하냐?’라고 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옳아! 그 방법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오는데 좋을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언제나 ‘내일 하지’, ‘좀 조용할 때…’, ‘돈 벌어놓고 늙어서’, ‘다음에 틈이 있으면…’, ‘생각해 보고 다음 기회에…’라고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스페인의 속담에는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날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뜻의 말이 아닙니까?

      어느 사람이 전차에서 아침 신문에 발표된 백만장자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 부자는 얼마를 남기고 갔나?”라고 하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남겼어.”라고 말하였습니다. 최후의 날에 인생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은 말하기를 우리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고 하였습니다(욥 1:21).

      루드 구드리 하딩의 시 한편은 오늘을 놓쳐버린 한 부자 앞에 적합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대의 생명이 / 그리 짧은 줄 몰랐소. / 나는 믿었지. / 아직은 멀었으리라.
      그대는 나에게 다정하기를 바랐었지요. / 눈웃음을 지었었지요. / 그런데 벌써 가버리다니 / 
      그 어두운 곳으로 / 이제 말한들 무엇하리요. / 들어줄 사람도 없는 것을…
      이처럼 빨리 / 그대 가 버릴 것을 / 그 누가 알았으리오. / 그런 줄 알았다면! / 그런 줄 알았다면! / 아 원통하구려.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는 날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란 기회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기회입니다. 꽃이 사라져버린 후에도 열매가 그 꽃을 품고 있듯이 오늘은 30배, 60배, 100배의 내일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을 하나님 만나는 날, 은혜받는 날, 믿음의 날, 기도의 날, 전도의 날, 봉사와 헌신의 날, 용서해 주는 날, 회개의 날, 새 결심의 날, 서원의 날로 삼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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