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주소서!(시편 51편 1∼10절)
  • 2015.01.21 16:54:37
  • 시중에 파는 고춧가루나 참깨 등에는 중국산이 많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익을 더 많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원전이 안전하고 깨끗하며 경제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짓말할 때마다 코가 자라는 피노키오가 부럽습니다. 모양은 웃기지만 더 큰 죄를 짓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려함의 이면에 정직함의 퇴조가 일상화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민한 감수성으로 자신과 시대의 본질을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적 감성의 눈으로 시대의 거짓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입니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께 정결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시인의 어머니가 불륜을 저질렀다든지 남녀의 육체적 사랑이 죄라는 주장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숙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시인의 고백은 훗날 바울의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죄는 운명처럼 모든 인간에 존재론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죄는 수련, 명상, 도덕적 훈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 자신을 곰곰이 들여다볼수록 죄는 내 본성적인 것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인간 내면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던 옛 시대에 인간의 심층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기를 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정결예식과 정결의 일상화였습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예리하게 충돌한 것은 처음의 정결예식에 담긴 뜻을 그들이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죄를 씻고 정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결법으로 민중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데 사용하는 바리새인의 그릇된 태도를 꾸짖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정결에 무관심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씻고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짓은 단순히 그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으며 반드시 더 무서운 죄로 악화됩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다윗 왕은 밧세바와의 관계를 거짓으로 은폐하기 위해 충직하고 양심적인 우리아를 적진에서 맞아 죽게 만듭니다. 결국 다윗이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이 의인의 살해로 악화됩니다, 성군이요 훌륭한 신앙인이었던 다윗도!

    오늘 시인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물질적 풍요와 성공으로 채워지는 것은 얼마나 초라합니까? 한국교회의 추락은 정직함에 대한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이며, 한국교회는 이 기도를 회복할 때 진정한 부흥이 가능합니다.

    지금 정직이 무너져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사회가 교회를 향해 정직을 다시 세워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에게 더 엄격할 수밖에 없으며, 교회는 사회보다 훨씬 엄정한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런다는 것은 부끄러운 변명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정직하게 하소서! 올해도 정직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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