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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행전 02:01-04/ 성령충만 [행]
  • 조회 수: 407, 2014.10.08 12:29:18
  •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여 동안에 철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정확하게 배웠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제자훈련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요즘 우리 교인들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인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에게 훈련을 받았으면 안 그랬을 겁니다. 왠지 아십니까? 아직 그들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임하심이 필요했고, 더 나아가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가 성령이시오, 신앙으로 지혜롭게 하는 분도 성령이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행복하게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한마디로 우리 성도는 성령충만이 없이는 능력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충만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충만이란 용어가 신약성경에 16번 나오는데 누가복음에 4번, 사도행전에 11번, 에베소서에 1번 나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모두 누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누가가 독보적으로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물론 바울도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누가가 거의 독보적이죠. 그러면 누가는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성령님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성령님 충만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성령충만이란 성령님의 역사의 절정을 말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나를 통하여 마음껏 드러나게 될 때 이 상태를 성령충만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내가 순복하고, 전적으로 따르게 될 때 성령님은 아무 걸림이 없이 마음껏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우리 심적인 상태로는 기쁨충만, 감사충만, 자신감충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한 자가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고, 확신, 자신감, 당당함이 없을 수가 없지요. 거기다가 성령님이 자유롭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각 종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치유, 방언, 말씀.... 이런 표면적인 현상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뭐 이런 부분은 조금 있다가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그러므로 오순절에 임한 사도들의 성령의 충만함과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입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오순절날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충만함에는 사실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난 경우입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성령님의 임하심이고, 두 번째로 그 성령의 충만함이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있기만 했지, 성령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성령충만을 기도하는 상황하고는 다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역사 이래로 교회와 성도들과 이미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라 시인할 때 성령님이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인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이 사람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하며 마귀가 감히 손대지 못하도록 성령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호랑이, 곰... 등 야생동물들은 항상 영역표시를 해서 다른 동물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도 힘센 것들은 그 영역에 넘어와서 원 주인을 몰아내고 자기가 차지하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하면 그 순간에 성령을 우리 안에 들어가게 하셔서 소유권 표시를 합니다. 너는 내 것이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아무도 손 못된다.... 이렇게 합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성령님 자체가 없었어요. 다만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이다... 이렇게 약속만 한 상태이고, 그 약속이 오순절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이 오셨지만 서서히 점차적으로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성령님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오셔서 그 순간 강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는 기도입니다. 다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해 달라고, 더 강하게 해 달라고, 마침내는 충만하게, 넘치도록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충만함을 기대하며, 기도하며, 말씀에 순종해 나가면 마침내 성령님이 우리의 온 인격을 지배하게 되고 우리는 전적으로 그를 따르게 됩니다. 이 체험을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자아의식이 몽롱해서 신접한 자가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것과 같은 현상을 충만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귀신충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충만은 오히려 자아의식이 분명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아가 맑아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말씀이 분명해 집니다. 말씀에 대한 지혜가 맑아지고 분명해 집니다. '누가'는 성령님의 역사의 절정을 보고 성령님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한 모습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첫째, 복음의 소통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서 누가는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의 충만한 모습을 보고 싶습니까? 선교지와 복음 전파의 현장에 나가 보십시오. 그 곳에서 복음이 소통되는 성령님의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성령충만이란 신앙의 담대함을 말합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핍박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담력을 보고 '성령님이 충만하여...'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도들이 관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19절에 보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라고 하며 용기 있게 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환경, 사람... 겁내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지, 사람이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배짱이 있으려고 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충만이란 고난을 이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억울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는 모습,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 드리는 모습이 성령님의 충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 믿고 불에 타 죽고, 사자밥이 되면서도 손잡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로마황제가 도대체 예수가 누구냐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수없이 피흘리고, 죽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나라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피 흘리며 죽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영광스러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려면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이 없이는 고난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힘들고 불편하면 그냥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버리려고 합니다. 우리 항도교회의 자랑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성도들이 20년 30년... 심지어는 50년 가까이 교회를 지켜온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가벼운 신앙이 아닙니다. 이리 저리 옮겨다니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천국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위로부터 기름부으심이 있기까지 기도하라는 주님의 분부대로 모여 기도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자기 정욕, 자기 생각 다 비우고 내가 주인이 되는 자세, 내가 주인공이 되려는 자세, 내가 주도자가 되려는 자세를 버리고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 능력으로 살고, 기왕 살 바에야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충만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내 삶의 주인이신 성령님이여 오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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