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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에베소서 01:01-02/ 성도와 직분 [에베소서]
  • 조회 수: 631, 2014.05.14 16:46:43
  •    본 서신은 바울의 3차례의 감옥생활 중에서 1차 가이사랴에서의 2년간 갇혀있는 동안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수신자 대상이 되는 에베소교회는 초대교회의 유명한 전도자들을 배출하거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배소 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상당히 명문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안정되고 규모가 큰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배출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귀양가기 전에 이곳에서 살았었고, 요한 마가도 머물렀으며, 디모데는  이곳에서 직접 목회를 하였으며, 바울 역시 3차여행 도중 이곳에서 3년간 목회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간은 어느 곳에서 보다 눈물과 기도로 점철된 목회였다고 사도행전 20:31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어느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서도 역시 편지의 문안인사는 자기의 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순교로 사수해야 할 사도직                           


    1-2절은 서신서에 보편적으로 나오는 인사이지만 이 인사 내용을 통해서도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그것은 직분이라고 하는 것과 성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직분입니다.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직분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해줍니다. 먼저, 직분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의 사도직... 이것은 바울 자신이 지원했다든지 교회가 그를 사도로 임명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세운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이 직분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얼마나 그의 사도직에 대하여 도전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가지로 도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외부로부터이며, 둘째는 자기 내면에서부터 도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서신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도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는 사도가 아니다, 거짓 선생이다... 이런 공격과 음해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는 그런 공격에 대해 방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사도직은 사실 예수님의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은 12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12 사도들 가운데 가룟 유다의 자리가 빠져 있음으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라고 하는 사람이 사도직을 물려받는 과정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제자이기는 커녕 초창기에는 교인들을 체포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사도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가 사도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그를 불러 세우셨다는 것뿐이죠. 그런데 이건 굉장히 주관적이잖아요. 이걸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증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그가 순교한 그 순간까지 이 사도성에 대해서 공격받았습니다. 사도가 아니다, 가짜다.... 이런 공격을 받았죠.

    둘째로는 사도 바울 자신 내면으로부터 받는 도전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입니다. 복음 전하면서 매 맞고, 핍박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3번이나 옥고를 치루었는데 3번째는 결국 단두대에 효수되어 순교하셨죠. 교회 외부로부터 이런 일들을 당하며 험난한 세월을 사신 분입니다. 거기다가 교회 내부에서도 그를 음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안팤으로 시달렸습니다. 이러다 보면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마냥 기쁨으로만 이 사도직을 감당했을까요? 그도 인간적인 갈등을 겪지 않았을까요? 그도 과거의 안락한 생활로, 과거의 세상적 영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단 한 번도 생기지 않았을까요? 저는 사도 바울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런 갈등들을 추스리면서 사도직을 감당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쨌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 사도직을 함부로 내칠 수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교로 이 사도직을 사수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들을 인간의 가치로 점수를 매겨서는 안됩니다. 더 귀하고, 덜 귀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그럽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있던데요?" 바로 이 말씀 까지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는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딤후2:20). 그러나 이 말씀은 직분의 귀천을 따지는 우리의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 한 것일 뿐입니다. 기능이나 은사에 따라 사람이 점수를 매기는 것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점수를 매기지 않는단 말이죠. 이 말씀처럼 교회에서 모두 귀히 쓰는 그릇만 되면 비천한 분들은 교회에 어떻게 나오겠는가? 교회에서 스스로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하는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생각 자체가 바로 교회를 헤치는 생각이다. 나는 안 그래요... 이러지만 은근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력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가지는가 하면, 돈, 제물... 이런 것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하는 일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고전12:22,23). 사람들이 50이 넘으면 몸에 서서히 이상이 오기 시작합니다. 쉬운 말로 기계가 마모되어 갈 때가 된 것이죠. 그래서 50대가 넘어서면 의학지식이 참 많이 늘어갑니다. 몸에 있는 장기의 이름, 기능... 이런 것들을 잘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눈, 코, 입, 손, 발... 이런 거나 알았는데 지금은 몸 구석, 구석에 숨어있는 장기와 기능을 알아요. 다른 말로 하자면 예전에는 주인에게 천대받았던 장기들이 50대가 지나서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호강을 하는 거죠. 바로 이런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12장 22-23절 말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모든 직분들도 몸의 장기와 같아서 구석구석에서 자기 기능을 잘 해줘야 교회가 평안하고, 은혜가 넘친단 말이죠. 그러니 귀히 쓰고, 천히 쓰는 그런 직분들이 어디 있냔 말이죠. 건강한 교회 가 보세요. 교회 밖에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지체장애인 아동들을 돌보며, 주차봉을 들고, 식당에서 설겆이 하고 그런다고요. 하나님이 세우시는 직분.... 정말 귀하게 받들어야 하며, 그런 직분자들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2. 좁은 길로 가는 무리들, 성도


    교회를 헬라어로 표기할 때 '에클레시아'로 발음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라는 단어는 두 단어가 합성되어 생긴 단어입니다. ek- 라는 단어는 영어로 'out'이라는 말이고, 'klesia' 라는 단어는 kaleo라는 단어로서 영어로 call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영어로 합성해보자면 call out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교회'를 "불러내어 모인 무리"라고 해석하죠. 바로 이게 교회의 의미이며, 이 교회를 바로 성도라고 합니다. 그냥 모인 사람들을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학생, 청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보기 위해 군중을 형성합니다. 사람들은 정치의 좌우 입장에 따라 좌파, 우파라 하여 서로 모여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보수세력도 모여서 힘을 과시하고, 진보세력도 촛불을 켜고 세를 과시합니다. 그리고 프로레탈리아 노조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모여서 투쟁합니다. 각각의 모임마다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합니까? 그러나 그 군중은 어머어마할지라도 교회가 아닙니다. 거룩한 무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이 불러내어 모인 무리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이란 말은 거룩할 '성'자에 무리 '도' 자 아닙니까? '거룩한 자들'이죠. 거룩한 자들은 세상의 인기를 따라 이리 저리 쏠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 거리에 모여서 촛불들고, 고함치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행 따라 가는 사람들 아닙니다.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왜 성도들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까?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자, 선악을 구분하여 의인의 자리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2절에 성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그리고 요한일서 2:3절에서는 성도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또 요한복음 15: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주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도들의 거룩한 생명은 마치 뿌리가 땅에 속해 있고 가지가 나무에 달려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장소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다시 말해 성도는 주님을 붙드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나의 능력,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라는 신분은 보잘 것 없습니다. 오히려 왕따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순간... 오직 성도라는 이름만 남습니다. 가끔씩 교인들의 장례 때마다 시비가 일어나곤 합니다. 무슨 시비냐 하면 왜 목사, 장로라 하지 않고 성도라 하느냐.... 명정을 쓸 때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직분을 따질 때 아무 직분도 없는 교인을 성도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니까 고인을 덮는 명정에 목사, 장로라고 쓰지 않고 성도라고 쓰니 이게 유족으로서는 기분 나쁜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건 정말 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목사도 성도이고, 장로도, 권사도... 다 성도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이제 목사도, 장로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성도만 있는 거죠. 만약 죽은 자가 성도로 이름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목사, 장로... 등의 직분으로 호칭받기를 원한다면 그 사자는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길로 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얼마나 명예로운 신분입니까? 그러니 이 성도의 신분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성도의 삶을 온전히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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