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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에베소서 01:15-23/ 계시의 영을 주소서 [에베소서]
  • 조회 수: 657, 2014.06.04 16:19:03
  •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살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사는 목적을 알고, 미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인간은 비참한 존재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당하는도다(호4:6)’ 라고 하였고 그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잘 살고,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 지식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을 잘 알기를 원하면서 그들이 계시의 영을 가지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 계시의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려는 의욕, 욕심...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계시의 영, 계시의 정신을 에베소교인들에게 가득해지도록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육이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는 3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하나님은 4차원, 5차원, 심지어는 몇 차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걸 계시라고 하죠. 그리고 계시 중에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반계시든, 특별계시든 간에 이 계시의 영이 없으면 그 계시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게 일반계시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그걸 특별계시라고 그러는데 한 가지 예로 성경은 특별계시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만 있다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옆에 아무리 좋은 가죽성경이 있고, 텔레비전, 인터넷에서 훌륭한 설교가 들려져도 그럴 마음이 없으니까, 그럴 의욕이 없으니까 다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성경이 만들어져 사람들 손에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출판된 성경 권수만 하더라도 60억이 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의 수는 훨씬 못 미치고, 거기다가 정말 진실하게 하나님을 아는 분들은 그보다도 훨씬 적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교인들에게 계시의 영을 달라고 했겠습니까?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경을 너무 읽지 않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생각으로, 자기 수준으로, 자기 고집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안타까워서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계시의 영이 있으면 우리가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이 그런가 하여 베뢰아 사람들처럼 밤낮으로 성경을 삼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영을 하나님을 알려는 열정, 노력... 이런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게 사람의 뜻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고 자기가 죄인 됨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며 보이지 않는 천국을 알 수 있는 속사람의 눈이 뜨였어도 계속하여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였다고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세 개의 눈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만물을 보고 분별 합니다. 또 지식의 눈이 있습니다. 배움으로 이 눈이 떠져서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고 세상 이치를 알고 살아갑니다. 성경도 글을 모르면 읽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영안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또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요, 그 섭리 속에 살고 있음을 보는 눈입니다 육신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보는 눈이요, 지식의 눈은 배움으로 열리는 눈입니다. 그러나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 주시는 눈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마음눈을 떠야 하고 계시의 영이 조명해 주어야 영안이 열립니다. 


    고린도전서 2장 I4절에 '육에 속한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시의 영을 받아야 마음눈이 밝아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도록 성령으로 조명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직가라 하는 사람의 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보내어 안수하며 기도할 때 즉시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보는 세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전 것들은 다 지나갔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도 눈에서 비늘을 벗겨야 합니다. 죄로 타락한 눈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큰 축복을 보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계시의 정신이 임하고 마음눈이 밝아질 때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18절과 19절에 다 나와 있는데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첫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죄인 중에서 불러주신 것을 압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나를 택하시고 불러 세우셨는가, 하필이면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주셨는가를 알게 됩니다. 계시의 영이 임하고 마음눈이 밝아지면 그때부터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절대 오묘한 섭리와 경륜 앞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냈다는 것은 그때부터 사는 목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며, 사는 방향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나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미래 지향적인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그 뜻을 알기까지는 진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정욕과 실패로 어두워진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려고 하니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소망이라는 것은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l-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해바라기와 같습니다. 해바라기가 땅에 뿌리를 내렸으나 태양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듯이 예수 믿는 사람은 날마다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 에게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업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며, 많은 소유를 누려도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령한 계시를 받아 마음눈이 열리면 세상 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며 세상 사람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군에서 휴가를 받으면 야간열차를 타고 집에 옵니다. 건빵을 먹지 않고 모아서 가족에게 줄려고 밤이 새도록 서서 흔들리는 완행열차에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고향집을 찾아가는 기쁨과 즐거움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을 확실히 안다면 좀 가난하게 살아도 불행해 하지 않을 것이며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완행열차같이 비좁고 사는 날이 고달픈 시간들일지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부르심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안다면 답답한 현실이라도 즐겁게 극복하여 갈 것입니다. 


    참 구원이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24-25절에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고 로마서 8장 l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눈이 어두워서 현재만 바라보고 이 세상만 바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눈을 뜨고 하늘나라 소망을 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분깃을 알고 사는 것은 큰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분깃이 적다고 생각하고 남이 가진 것만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계시의 영을 받아 마음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알게 됩니다. 시편 16:2-3절에 보면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라고 했고 5-6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했습니다. 현재 자신이 소유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하고 큰 축복인가를 알고 고백하는 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여호수아가 줄로 각각 땅을 나누어 줍니다. 어떤 사람은 박토를 받고 어떤 사람은 옥토를 받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토든 옥토든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은혜로 받은 것이니 아름답고 소중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처럼 많이 가지고 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게 가졌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주님 안에서 그 기업의 풍성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를 지니고, 사는 목적을 확실히 알며, 마지막 때에 돌아갈 고향을 알고 기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증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그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이렇게 믿어야 큰 복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결산하면 적자입니까, 흑자입니까?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계시의 영을 받지 못하고 마음눈이 열리지 않으면 예수 믿고 손해만 보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시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대로 족하고 성도 안에서 받은 분복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넘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살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천국이 있음을 알면 이 세상과 분별되어 살아갈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약속된 미래의 풍성한 영광 때문에 고난도 참을 수 있고, 억울함도 참으며 넉넉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l9)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신 능력을 알고, 그 능력을 힘입어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20)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이 우리 안에 믿음으로 역사한다....’  이 사실을 믿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돈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권력의 힘을 맛보고 그것을 얻으려 하나 비참해질 뿐입니다. 인간이 지닌 무력이나 폭력이나 그 어떤 것도 불안할 뿐입니다. 이런 힘은 땅에 속한 것이라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이요, 잃을 때는 자신에게 반드시 해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힘이요, 새로운 생명력이요, 절대적인 하늘의 힘입니다. 바울은 이 능력을 알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빌3:20). 그 힘의 원천이 하늘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 같은 연약한 존재일지라도 능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할 때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l4)고 하였습니다.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뱃심으로 살아가려는 동물적 인간은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뱃심으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으로 사는 자요 땅으로 돌아가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께로 돌아갈 자들 입니다. 계시의 영을 받아 신령한 눈이 밝혀져야 이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알아야 기도로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만한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사는지 알아야 사람을 겁내지 않고, 마귀를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셔서 이 능력으로 힘입으시고 담대하게 마귀와 싸워 이기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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