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찬을 받은 후 찬미한 제자를 보며(요6:48-58)
  • 조회 수: 298, 2013.06.15 07:25:39
  • 사순절 시리즈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성찬식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성찬을 받고도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해야 될텐데도 숙연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성찬에 참여하는 분위기와 성경 속에 나타난 제자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는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0절에 소개된 바를 살펴보면 이들은 성찬에 참여하고 끝이 나자마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었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 그들의 성찬에 대한 이해가 오늘 우리들의 성찬에 대한 견해와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주께서 베푸시는 이 성찬을 수찬하기에 앞서서 이 떡과 이 잔에 담겨진 주님의 말씀을 살펴가면서 과연 그때 제자들이 성찬 후에 취했던 태도를 우리가 취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그때 제자들이 우리같지 못했던 것이 사뭇 아쉬웠던 일인가 이것을 한 번 살펴보는 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경은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27절 이하에 보면 "이 잔을 먹고 마시기 전에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분별하고서 받을지니,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죄가 되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많고 약한 자가 많고 쓰러지는 자가 많은 것이 이 성찬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고 참여했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오늘 우리들의 성찬에 대한 분위기와 제자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일에 대해서 주께서 베푸신 성찬의 참 의미를 찾아가 보는 이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 48절로 50절에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곧 나 너희에게 주는 이 생명의 떡은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읽으면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마는 잘 살펴서 읽어본다면 간단치가 않습니다.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처럼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만나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언제까지 살았습니까? 근 40년 동안을 이 만나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들의 수한이 다하여 죽었을 뿐이지 만나가 저들에게 효험이 없어서 또 영양이 없어서 죽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어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러면 주께서 주시는 성찬을 먹은 사람은 죽지 아니했습니까? 당시 제자들도 성찬에 참여했지만 죽었고,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도 다 성찬에 참여했으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조금 전에 소개드렸던 "너희 조상들은 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살 곧 이 생명의 양식의 떡은 사람이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이 말씀을 쉽게 그저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잘 살펴서 헤아려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떡에 대하여 이 잔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 끝에 쯤 가서 6장 63절에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장으로 볼 것 같으면 이 문장은 완전한 문장이 아니고 앞에 주어가 생략된 그런 문장이 되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이 성찬에 관한 여러 말씀을 하시던 끝에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생략된 주어를 찾아본다면 계속 말씀하시던 주님께서는 "이 떡은, 이 떡은" 하며 떡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되살려서 함께 말씀을 드려본다면 "이 떡이 살리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떡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이 떡으로서 육에는 유익함이 없느니라" 
    다시 말씀드려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었던 그 만나는 영혼에게는 유익이 없었으나 육에게 유익을 주었고, 지금 내가 너희에게 주고자 하는 이 떡은 육에는 무익하나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이 만나는 사십년 동안 자기의 수한이 찰 때까지 육신을 살리는 데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시는 그때의 그 성찬이나 오늘 우리가 받게될 이 성찬의 떡은 무엇을 살리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만나는 육에 유익하여 육을 사는 날 동안 살렸으나 영은 무익하여 영이 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몸인 이 떡은 육에는 그다지 유익하지 않으나 영에는 유익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이르시되 본문 6장 53절로 5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이런 말씀으로 계속하여 이 성찬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만나가 육신에 유익해서 사는 날 동안에 양식이 되었다면, 주께서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이 떡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넣어 두었다가 우리 육신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게 되는 생명의 능력이 오늘 저희에게 베푸신 이 떡에 담겨있음을 헤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이 떡에 대하여 이 잔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열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비중을 더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떡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는 강한 인상을 받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하시는 말씀들 가운데서 우리와는 달리 생명에 관하여 큰 인상을 받았었더라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육신이 끝나는 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주심에 따라서 우리가 이대로 나이 들어 혹은 병들어 사고로 죽을 것 같으나 죽는 것으로서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은 바로 그때부터로구나 하신 이 주님의 말씀에 더 관심을 두었더라 그것입니다. 
    이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음에 관하여 강한 집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이 성찬이 끝난 다음 숙연해 있지 아니하고 슬퍼하고만 있지 아니하고 엄숙해지기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 말씀과 함께 성찬에 참여한 다음에는 흔쾌하여 산으로 오르면서 그것도 어느 산이냐? 승천하실 주님의 감람산으로 오르면서 찬미를 하면서 갔다 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을 저희가 보면서, 
    참으로 우리는 성찬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강했다면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찬에 담겨있는 죽음의 의미보다는 삶에 더 강하지 않았는가? 생명과 영생에 더 강하지 않았는가? 이 두 가지 부분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마는 제자들은 찬미했고 우리는 숙연해진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강했고 우리 죄사함 받는 일에 강했고 이 제자들은 생명에 강했기에 찬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결론을 충분히 얻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이 받으실 이 떡과 잔, 성경에 소개된 바 제자들이 받았던 그 떡과 잔이 과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일 수가 있는가? 피 일수가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분명히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시라 했는데 과연 주께서 그 살을 주실 수 있었으며 그 피를 주실 수 있었겠느냐 그것입니다.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또한 먹을 수가 있었겠느냐 그겁니다. 
    아주 의문스러운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당시에 유대인들도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상당히 논란이 많았음을 오늘 본문 6장 5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였고 또한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아니한, 그래도 주님을 따른다 라고 하는 제자의 무리에 속했던 사람들도 60절에 보니 제자 중 여러 사람도 거의 대부분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면서 주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던 사실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바 있는 성찬 후 저들은 주께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았기에 또 그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줄로 알았기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던가? 그때 감람산으로 올라가며 찬미했다 라고 하는데 그 현장의 그 모습을 더 생생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 마태복음 26장으로 한번 찾아가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이하를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이하 30절까지 봉독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찬미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직전까지의 성만찬의 분위기는 어떠했느냐? 주께서 물론 유월절 절기에 준비된 많은 음식들이 놓여있는 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제자들도 같이 둘러앉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상 위에 놓여진 모든 떡에 축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잔에 대하여 축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떡이 주님의 살이 될 수 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잔이 주님의 피가 될 수 있다 라고 하지 아니하셨다 그것입니다. 
    26절에 나타난 대로 "저희가 먹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먹으려고 하던 때도 아니고, 그리고 먹기 전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라고 했으니 이것은 다른 말로 풀이해서 말씀드린다면 "식사 도중에"라는 뜻입니다. 보통 식사 기도를 할 때에는 먹으려고 할 때에 라고 하겠지요. 또 먹기 전에 기도했다 라고 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즉 식사 중에 떡을 하나 가지셨습니다. 떡을 가지고 그 떡에 대하여 축사하십니다. 많은 떡들 가운데 떡 하나를 주님께서 취하시더니 그 떡에 대하여 축사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또 잔 하나를 취하시더니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새 언약의 내 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신 다음 "이것을 먹으라"라고 하면서 그 축사된 떡을 떼어준 것이지 축사되지 아니한 아무 것이나 오늘 저녁 음식은 다 내 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먹으라" 이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축사된 이것을 먹으라, 축사된 이 잔을 마시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즉 식사하는 도중에 주님께서 "잠깐, 잠깐" 하시더니 떡을 하나 가지사 "이 떡은" "이 떡들은"이 아닙니다. 이 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가지시고 "이 떡은(분명히 지적했습니다) 너희를 위하는 내 몸,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라고 말씀하시더니, 그 다음에 "드시오 드시오, 먹으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떡을 떼어준 것입니다. "이 떡을 너희 안에 들게 하라. 이 잔을 마셔서 너희 안에 이 잔이 들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께서 많은 떡 중에 떡을 하나 가지사 축사하시고 이 떡을 굳이 먹으라고 하면서 그 떡을 떼어서 나누어준 것이지 아무 떡이나 같이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닐진데, 과연 주께서 축사하신 바 그 축사된 떡은 어떤 효력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안에 생명이 있으려면, 그 누구의 생명입니까? 예수 당신의 생명입니다. 너희 안에 내 생명이 있으려면 내 살을 먹으라 라고 했습니다. 내 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주신들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겠느냐?" 이런 의문이 그때도 있었고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주께서 이 일에 대하여 한 떡을 가지사 축사할 때에 "이 떡은 내 몸, 이 잔은 내 피"라고 말씀을 그 떡과 잔에다가 부여하시고 그리고서 이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을 먹으라" 다른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말고 "이것을 먹으라. 이것은 내 생명이니라"라고 말씀하셨으나 과연 축사하게 되면 떡이 다음 순간 어떻게 변하는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고린도전서 10장으로 가셔서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 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혹 여러분께서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 본문같은 본문을 읽으시다가 이쯤 읽었는데 전화가 따르릉 온다든지 아니면 또 대문에서 벨이 울린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아이가 무엇을 깨뜨리는 소리가 난다든지 해 가지고 여기까지만 읽다가 그쳐버리면 무슨 뜻이냐? 
    다시 읽어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이 잔은" 지금 우리가 축사하고 축복하여 여러분에게 드릴텐데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라고 했으니 아닌 줄로 알기 쉽습니다마는 이 문장은 끝까지 읽어야 됩니다. 아니며 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문장의 배열상 부정을 부정하면 무엇이 되지요? 긍정이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축복하여 축사받아 먹는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그 축사된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했으니 축사된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이지요. 이해가 되시면 아멘 합시다. 
    또 축사된 잔은 그리스도의 피라는 뜻이지요. 아닌 것이 아니라 기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쉽게 생각하기를 편하게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아 그러면 긍정의 긍정은 부정이겠네요" 이렇게 합니다. 긍정의 긍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은 긍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축복된 그 떡은 먹게 되면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되는 것이요 또 축사하여 축복한 그 잔을 마시게 되면 우리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고 무엇이뇨. 누가 가르친 것입니까? 사도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주께 받은 성찬은 이런 것이니" 하고 가르쳐주신 그 내용 중에 들어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물질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 부여된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 본래의 물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실 적에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예. 마른 막대기 하나밖에 없나이다" "그러냐. 그러면 내가 지금부터 내가 지금부터 네 그 막대기에 내가 함께 있어서 나의 행할 바 모든 능력을 그 막대기로서 나타나게 하겠느니, 그 지팡이는 네가 지금 이전까지 들고 다니던 그런 막대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는바 지팡이가 될 것이니 그 지팡이를 들고 홍해에서 치켜들면 홍해가 갈라질 것이요 반석을 치면 거기에서 물이 나게 될 것이다." 하시더니 그야말로 그 지팡이는 보통 지팡이가 아니라 홍해를 갈랐으니 전에 모세가 가졌던 그 나무 막대기가 가른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에 부여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했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했던 것이지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제는 그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라고 하는 그 말씀이 부여됨으로 말미암아 보통 지팡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그 지팡이에 있었으니 중요한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저 마라라고 하는 쓴 물의 샘을 이스라엘이 만났을 적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세를 통하여 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그 쓴 샘에다가 던져 넣으라 라고 해서 던져 넣었더니 모든 쓴 기운이 없어지고 나무가 감당하고 단물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마셨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모세가 꺾어 넣었던 나무 종류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신풍나무 입니까? 아카시아나무 입니까? 소나무 입니까? 어떤 나무겠습니까?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종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 나무를 찾아 가지고 지금도 찾아서 무슨 소독하는데 사용하면 참 좋겠지요.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꺾으라고 해서 꺾은 그 나뭇가지 그 나뭇가지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했던 그의 그 부여된 말씀이 그 나무 그 일 할 때까지만 역사 했던 것이지 그것이 끝난 후에도 그 나뭇가지 꺾어다가 아무 데나 사용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무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뭇가지에 부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으로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서, 주께서 한 떡을 취하사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떼어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했으면 이제는 떡이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효력이 그 말씀과 함께 얹혀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잔을 드시고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니라"고 했으면 그 잔에 맹물이 들면 어떻습니까? 포도주가 들면 어떻습니까? 아니면 다른 또 술이 들었으면 어떻습니까? 술의 종류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포도주 몇도짜리냐, 포도즙이냐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다 중요한 줄 알고 포도즙을 먹어야 된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포도주라고 썼는데 또 어떤 분들은 사람이 술을 먹어서 되느냐? 
    그래서 포도즙이라고 일부러 글자까지 바꾸어가면서 읽으면서 '즙'이 중요하냐 '주'가 중요하냐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 위에 얹혀진 주의 말씀에 생명이 있는 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 그 안에 있는 뜻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입으로 씹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바로 그것이지요.

    따라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한 번 따라합시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성찬을 베푸시면서 하신 말씀, 그리고 그 성찬의 의미와 큰 목적은 어디 있었느냐?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압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부터 죽음의 길을 따라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죽고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가지 마소서 죽지 마소서 그리 마소서 막 매달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간다 라고 하면서 주님은 가시는 길로 갔습니다. 
    이 성만찬을 베푸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야말로 만찬이로다. 오늘밤 이 만찬이 끝나면 다시금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수 없을 것이니라. 이 세상 땅에서 나온 곡식으로서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고 너희는 살 것이로되"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성찬을 베푸셨으니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이 식사 같이 하고 나면 죽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살 방법이 달리 없다는 것을 이제 다 알았습니다. 분위기가 그쯤 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이 떡은 내 몸이니 네가 네 속에 먹어 있게 하라. 이 떡에 내 생명이 있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떡에 부여되었다면 떡이 가 있는 곳에 주님의 생명이 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참 뜻은 무엇이냐? 당신의 몸을, 당신의 몸을 이 떡에 부여해서 축사하신 후에 이 떡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의 몸 속에 넣어두기를 원했다 그것입니다.
    "너희가 먹게되면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되느니라.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 있게 되면 너희는 결국 또 내 안에 있게 되는 이런 관계가 되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아주 심각합니다. 왜 심각합니까? "나는 조금 있으면 죽게 돼. 내가 죽게 되더라도 내 육신이 죽을 뿐 내 생명은 죽을 수가 없으니 나를 따르는 진리 아는 너희들, 나를 믿는 너희 속에 내 생명을 저축해 놓고 싶구나. 보관시켜두고 싶구나. 너희가 받겠느냐?"

    그러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또한 요한복음 3장 14절에 말씀하셨던 그대로 "내가 십자가에 들리는 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같이 내가 들리는 것이지 다른 강도들이 죽는 것과 같지 않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뱀은 무엇입니까? 불뱀입니다. 굉장히 능력 있는 불뱀입니다. 사람들을 불고 쏘면 당장 죽게되는 그런 불뱀입니다. 이런 불뱀을 잡아다가 장대 끝에 올렸는데 모세가 올릴 때에 불뱀을 올렸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의 보기에는 불뱀입니다. 그러나 불뱀이 아니라 놋으로 만든 놋뱀 불뱀이었던 것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놋뱀을 올렸으니 놋뱀 속에 불뱀의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생명은 불뱀 안에 있습니다. 모세가 장대 끝에 매달았던 그 바로 불뱀은 생명을 가진 뱀이 아니라 놋으로 만든 껍데기요 육체적인 모양만 있었지 생명은 거기 있지 않았다 그것입니다. 생명은 십자가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던 것이지 그의 생명은 죽은 적이 없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생명이 어디에 들어가 있었느냐? 몸이 죽기 전에 "이것은 내 살이라. 내 생명이 너희 안에 있도다" 이렇게 된 것은 어떤 관계가 되느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되었느니라"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떡과 포도주가 들어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축사된 주의 말씀 속에 있는 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또한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지만 그러나 죽지 아니하고 산 것은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 올라갔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하나님이 쥐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한은 그 몸이 죽었어도 하나님이 살리고자 하는 날에 다시 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내가 죽었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인것처럼,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되면 너희는 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요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내일 모래면 너희 눈앞에 나의 죽는 모습이 십자가에 달릴 것이나,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죽게 되는 것이니라.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불뱀처럼 매달았던 것처럼, 생명 없는 놋만 매달았던 것처럼 내 몸은 너희를 위하여 죽게 되나 생명은 믿음을 가진 너희 안에서 살겠느니라. 내 생명을 너희가 갖고 있어서 너희가 전도하게 되면 너희의 전도를 받는 사람이 너희의 생명을 받아서 전도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는 내 생명이 그에게 옮겨져가서 거듭나게 되는 것을 믿을지니라 이것이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요한복음 6장 56절로 57절 말씀하시더니 또 이어서 58절에는 "이 축사된 떡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이 축사된 떡은 하늘로서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그런 떡이니 먹고도 죽은 만나와 같지 아니하여 너희는 마지막 날에 영원히 살리라. 이에 제자들은" 그랬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찬미하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감람산으로 찬미하면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찬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만찬이 끝나면 주님께서 죽으시는데 주님께서 어쩔 수 없어 죽이는 자들에 의해서 죽을지라도 광야에 불뱀이 아닌 놋뱀같이 죽게될 것이며 주님의 생명은 그의 피와 함께 그의 몸과 함께 주님 죽기 전에 내 몸에 들게 해 주셨으니 내 안에 보호하겠노라. 내가 믿음으로 내 안에 보호한 주의 생명이 주님이 필요한 때에 다시 부활하실 수 있도록 주의 생명이 내 안에 드시겠다 하시니 주여 오시옵소서." 
    받은 후에는 "주여 염려 마시옵소서 죽으실 지라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 안에 있나이다.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있나이다. 난 분명히 먹었고 내가 영접하였나이다. 그리고 이 생명 이 피를 놓치지 않겠사오니 주여 염려 마시옵소서. 살아계신 주여 죽으시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사셨나이다. 그리고 영원히 사실 것이니이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하였으니, 그들의 그 태도가 수찬자로서의 잘못된 태도냐? 아니요. 그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죽음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삶에 비중을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그 일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생명 있을 적에 들어와서 그 생명으로 계시며 내가 예수를 모셨으므로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살 것이며 그리고 예수를 모시면 우리의 마지막 날에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같이 살리실 것이라는 여기에 더 비중을 두었었던 것이니, 
    그리스도의 성찬을 맞을 때마다 숙연해지고 엄숙해지고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그런 일도 그 성찬에 의미가 있으니 옳은 일이라고도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제자들이 성찬 후에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주여, 내일 이후 죽으시지만 주님은 진정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셔서 들어와 계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가 없습니다 주여" 하고서 감람산으로 갔던 것처럼 제자들은 생명에 관심을 더 두었고 영생에 관심을 더 두었을 그 차이었던 것을 인정하시고, 오늘 성찬은 제자들과 같은 감격을 하면서 받아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이후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는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시는 일을 내가 다시 오는 날까지 할 것인데 너희가 이 떡을 먹고 마실 때에 주의 죽으심을 주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라고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주니까 이 구절만 받고서 "아하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에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는 좀 심각해야 되고 그날은 밝은 옷도 입어서는 안 되고 그리고 아주 엄숙해야 되지 내가 엄숙한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면 "아이고 남이 보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신경을 쓸 만큼 된 것 같은데 여러분, 바울이 이 말한 참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라 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만큼 그 죽은 것을 기억하기 힘든 경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라는 것을 특별히 날 만들어서 특별한 행위를 하면서 일부러 기억을 시키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다른 이는 한 번 죽으면 다시 안 돌아오기 때문에 다시 안 나타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셔서 옛날 그때처럼 죽은 자를 살리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 안에서 살아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경험했으면 아멘 합시다. 
    그러기에 살아있는 분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다른 이는 죽었다면 흔적을 남깁니다. 유골이라고 남지요. 예수님은 유골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때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은 죽었었노라 라고는 하겠지만 10년 20년 지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은 아무도 믿기가 곤란할 정도로 흔적도 없었으니 그러나 너희를 위하여 죽었던 것은 사실이니 이 사실을 기념하라 했습니다. 기념은 어떤 경우에 하는 겁니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서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사모하라, 추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잊어버릴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기념을 하라는 겁니다. 성찬할 때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일부러 기념하지 않고서는 잊어버릴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었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잠시 후에 여러분께서는 그때 당시에 주께서 축사하신 축사를 이 떡이 받게 되고 이 잔이 받게 되면, 그 축사하고 축복된 떡과 잔을 여러분이 받게 될 것인데 떡도 중요하고 포도주도 중요합니다마는 더 중요한 것은 축사된 주의 말씀 안에 있는 그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좌정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들어오고 예수의 생명이 들어왔더니 내가 죽는 날 다시 살게될 것이고 예수님은 죽으나 사나 내 안에서 지금도 살아 계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게 되는 이 놀라운 일을 오늘 우리가 하게 되며, 전에 죽으셨던 것을 우리는 오히려 전파하면서 그러나 지금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수찬에 이 성찬에 참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을 부르시겠습니다. 468장 찬송 1절, 2절 부르시는 동안에 분병 분잔 위원들은 위치에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임하여 교통하시며 역사 하심이, 주의 성찬을 받으며 그때 그 제자들처럼 주의 말씀 깨닫고 그 제자같은 심정으로 이 성찬에 참여한 모든 성도께 이제로부터 주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육신이 다하고 다시 살리심을 입은 그 순간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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