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성도(벧전 2:19~21) [고난주간]
  • 2013.08.18 14:36:34
  •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때부터 예수님을 본받아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바람직한 일을 위해 최선 의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자식은 알게 모르게 부모를 닮고 제자는 억지라도 스승을 닮는 것처럼 예수 그리 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고 성경 을 읽고 배우다 보면 점차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성경 공부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 식적으로 배우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삶과 죽으심의 전 인격을 닮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온유 겸손하신 마음을 본받고,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신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 였습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 중에 마지막 세 번째 시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어떻 게 본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30년을 사셨으나 누가 보아도 부러워하고 존경할 만한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삶이셨습니다. 그 같은 예수님이 어느 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셨으며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 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된 근본 동기는 어떤 면 때문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사형 틀인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 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 하 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또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만인의 구세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삶 때문만 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하신 죽으심인 십자가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단 한 번뿐인 우리의 삶이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잘먹고 잘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것을 위해 살고 바른 것을 위해 죽을 때 그 사람의 가치가 존귀하게 평가받을 수 있음을 본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죽음의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자세로 단 한 번뿐인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무엇을 위해 살다 가 죽어야 할 것인가 하는 죽음에 대한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우리가 성경이나 교회사를 살펴보아도 예수님처럼 십자가 에 달려 죽은 순교자들이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세상 역사를 보면 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애국 운동을 하다가 잡혀 갖가지 잔인한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순국열사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가지고 말한다면 예 수님의 고난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닮자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 세상에서 축복을 받고 사는 것이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적과 최대의 축복은 순교였습니다. 할 수 있으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어떻게 순교를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순교를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도 자 기의 마지막 죽음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생사의 주권이 내가 아니라 하 나님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순교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올 때까지 한 영혼을 구 원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하며 고난을 자처하고 고난 중에 인내하며 영혼 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선교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 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선교가 무엇이며 전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를 버리시고 이 세 상에 오셔서 그 많은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많은 모욕과 멸시를 당하시면서도 묵묵히 참으신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안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선교라는 말과 순교라는 말은 글자로는 다른 것 같으나 순교없는 선교 는 선교가 아닙니다.

    예 화/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 둥이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영국 제 윈체스트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 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 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이겠으나 그는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그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 것을 잘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구인들 믿고자 하겠느 냐 말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그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선교라면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 시기 위해 순교를 하신 것이니다. 그 같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헛되지 아니 하여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 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 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 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2. 애매한 고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고난을 맛보게 되는데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과오로 인해 맛보게 되는 고난이거나 아니면 육 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먹고살기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만 하는 생존적인 고난이 있 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성도들은 때로 죄가 있어서도 아니며 실수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믿음을 지키고 남을 위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때로 억울한 고난을 당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가 있으셔서 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 니었습니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 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예수님은 무슨 잘못을 범하여 인간들에게 욕을 먹고, 침 뱉음을 당하고, 매를 맞 고, 나중에는 살인 강도들이나 달리는 치욕스런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 라 애매한 고난을 당하셨지만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치 날마다 착한 아이가 되라고 교훈을 하며 키운 자식이 곁길로 가서 일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뒷수습하기 위해 대신 욕을 먹고 돈을 지불 하면서도 묵묵히 그것을 감당하는 부모와 같은 심정이 바로 예수님이 애매하게 당 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십자가만이 아니라 베들레헴 마굿간에 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전 생애가 다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그와 같은 애매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 시면서 까지 묵묵히 참고 견디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도매금으로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 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주님이 대신 십자가 고난 을 마다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입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입장이 되었을 때 침묵보다는 변호하기에 급급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그 사람을 원수처럼 대 하고 있지 아니 한지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말씀 입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곧 그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닮고 본받아야 할 삶과 죽음의 전형적인 모델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하시는 것은 십자가라는 형상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인 사랑을 위한 희생과 고난의 정신을 가지고 실제의 삶에서 예수 그 리스도처럼 복음을 위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애매한 고난을 마다하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것을 닮고 따라오 게 하기 위하여 본을 보이셨다는 말씀을 잊고 사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본을 끼쳐' 라는 말은 알파벳을 처음 배우기 위해 여러 번 베껴 쓰는 것과 같은 의 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아무 것도 쓰지 아니한 새 노트와 같은 빈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1) 예수님의 온유 겸손하신 마음을 내 마음에 베껴 나도 예수님처럼 온유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2) 예수께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인간을 섬기신 것처 럼 나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고 힘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언젠가는 반드시 한 번 죽을 목숨을 가지고 헛된 삶을 살지 않고 예수님처럼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살다가 죽고자 결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 을 베끼는 성도의 거룩한 삶과 죽음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처럼 살다가 죽기를 원 한다면 설령 어떤 오해를 당하고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묵묵히 잘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와 가정에 분쟁이나 시기나 다툼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그와 같 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머리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실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다른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인 것입니다.

    (벧전 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지난 날 역사 속에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열악한 환경 중에서도 위대 한 그리스도를 만나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이며 또한 그것이 주변 사람들이 본보기 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침으로 세상 역사를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위대한 사도 가 된 것은 그는 참 그리스도인의 본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그 전에 그에게 충격적 인 본을 보인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유대인들 의 돌에 맞아 죽는 순간 그 것을 진두 지휘하면서 곁에서 낱낱이 지켜 보았던 청년 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핍박자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이미 스데반의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이미 하였다는 것입니 다.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 옵소서 하고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 결과 스데반의 죽음은 헛되지 아니하고 대어를 낚게 되었고 한 알의 밀처럼 많 은 결실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삶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보다 잘먹고 잘사는데 두고 살지만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데 객관적 기준은 그 사람이 평생을 얼마나 큰집에서 부귀와 권세를 누리 며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았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한 평생 무엇을 위해 살다가 죽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하는 것처럼 우리도 죽음이 올 때 우리의 삶 이 평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끼니의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귀하고 평생 다닐 직장과 사업터를 마련해 주는 것도 귀하지만 가장 귀한 것은 그 사람을 영원 히 살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선교이며 전도이며 그 일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살다 가 죽는 것이 바로 선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 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즈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복음 송 가운데 아주 감동적인 가사 하나를 소개해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닮아 살고 죽는 것이 어떤 것인 가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 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 과 발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보리라 그 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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